안시연은 다정한 연정훈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디저트는 정말 달고 맛있었으며 단 음식은 기분 전환에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입가에 가져대는 족족 삼키는 안시연에 연정훈은 그녀를 아기 돼지처럼 떠먹였다.그러다가 질린 안시연이 고개를 돌렸다.연정훈이 스푼을 내려두며 말했다.“이건 별로야?”안시연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테이블을 가리켰다.“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요.”연정훈은 디저트를 쭉 살폈다.뭐든지 한입씩만 먹어 티도 안 났다.안시연이 마지막으로 케이크 한입을 삼키고 연정훈은 드디어 스푼을 완전히 내려뒀다.“너무 많이 시켰어요.”“남은 건 알파카 두 마리 줘.”그 말에 멀지 않은 곳에서 양나비가 귀를 쫑긋 세웠다.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어느 알파카가 케이크를 먹어요?”“알파카는 잡식 동물이잖아.”“그래도 케이크는 안 먹죠.”연정훈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알파카를 보며 말했다.“저 아이 불러와 봐.”“왜 직접 부르지 않고요?”“이름이 별로야.”“...”‘그래.’안시연이 입술을 매만지다가 양나비 이름을 두어 번 불렀다.탁탁탁.나비가 걸어왔다.연정훈은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똑똑하지 않은 애완동물은 싫어했다.지금까지 알파카는 연정훈의 비호감 애완동물 1순위에 놓였다.그는 스푼으로 접시 끝을 두어 번 두드려 먹어도 된다는 표시를 했다.알파카는 고개를 내밀고 여러 케이크를 킁킁 냄새 맡았다.향이 꽤 마음에 든 건지 나비는 바로 입을 벌렸다.연정훈이 안시연을 향해 말했다.“봐봐, 뭐든지 다 먹잖아.”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비는 먹는 행동을 멈추고 차가운 눈길로 연정훈을 바라봤다.예민한 안시연은 이 녀석이 입을 벌리는 행동을 예측해 빠르게 손으로 막아섰다.“뱉지 마! 뱉지 마!”연정훈도 얼굴을 굳혔다. 옆으로 피하는 것과 동시에 안시연의 손을 끌어당겨 그녀의 손에 뱉지 못하도록 했다.두 사람 모두 바짝 긴장해했다.그러나 양나비는 아무것도 뱉지 않았다.안시연은 손바닥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정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몸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그녀를 안고 얼굴을 보면서 귀여워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일이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덮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오늘 밤에는 일찍 쉬어.”안시연은 약간 의아했다.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시중 들어야 하는 줄 알았다.그녀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녀를 안고 있으니 하루의 피로가 싹 다 풀렸다.안시연은 조용히 그의 관자놀이를 만지더니 살살 문질렀다.그렇게 한참 조용히 있다가 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알카파 두 마리는 서브룸에 가둬두었다.안시연은 잠자리에 들 때, 달그락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다시는 뛰어나오지 않을까요?”“열쇠를 가져다가 문을 잠갔어.”“...”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그녀는 너무 웃겼다.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안시연은 대답한 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연정훈은 그녀에게 옷을 맞춰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주씨 가문 파티 당일, 밖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그는 직접 함풍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여전히 전철웅의 가게로 갔는데, 이번에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전철웅의 막내 아들 전이수가 문을 열어주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전이수는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아버지가 요 몇 년 몸이 안 좋아서 옷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요. 이틀 동안 야근해서 만든 새 옷을 방금 보냈고, 지금 쉬러 들어가셨어요.”설명을 들은 안시연은 그 새 옷이 양민아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이수는 그녀와 연정훈을 데리고 뒷건물로 가면서 말했다.“사실 지금 제작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손재간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어쨌든 연세가 있으셔
전이수가 설명했다.“이 옷장 안에 있는 옷 두 벌 다 아버지께서 가장 자랑스러워하셨던 작품이에요. 안타깝게도 옷 주인들은 다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요. 옷이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떠나버렸으니, 아쉽게 된 거죠.”그 말을 듣는 안시연의 마음이 쓰라렸다.하지만 안시연은 진심으로 그 옷이 마음에 들었다.“정말 예뻐요.”안시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전이수는 다른 옷 몇 벌도 꺼내 보여주었지만 안시연의 눈에는 옷장 속에 있던 그 옷밖에 들어오지 않았다.“저 옷 좀 입어 봐도 될까요?”결국, 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전이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왼쪽 옷의 유래는 저도 알고 있지만 오른쪽 옷의 내력은 아버지께서 말해주신 적이 없어요.”“그럼…”“됐어요.”전이수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꿀벌은 예쁜 꽃에 끌리는 법이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라면 이 예쁜 옷도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가만히 둬봤자 그냥 낭비일 테니까요.”안시연은 그런 전이수의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그럼 우선 입어볼게요.”전이수가 말했다.“옷 다 갈아입으시면 불러주세요. 나중에 제가 올라와서 헤어도 해드릴게요.”말을 마친 전이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안시연은 어딘가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제가 탈의실로 가면 돼요. 굳이 내려가실 필요 없습니다.”전이수는 아래층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래도 남녀는 다른 법이잖아요. 연 대표님께서 질투라도 하시면 저는 감당할 자신 없습니다.”그 말에 안시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리 없어요.”안시연은 연정훈 같은 성숙한 사람이 그렇게 유치하게 질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이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재빨리 눈치껏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시연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야 전이수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는 사이, 전이수는 여자 도우미까지 불러 간단히 마실 것이라도 가져다주게 하며 최대한 안시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했다.안시연은 전이수가 정말 재미있는 사
찰칵!셔터가 눌리자 사진이 즉석에서 나왔다.전이수는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해 흑백 필터를 사용해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색감이 안시연의 옷과 연정훈의 분위기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다.사진을 받은 안시연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예쁘게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의 옆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던 연정훈의 시선은 차갑고도 깊었다. 간단히 차려입은 정장은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아 한 손은 안시연의 뒤에,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소매 끝에 달린 보석 단추가 흑백을 뚫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그는 세상을 쥐고 흔드는 거물 같아 보였다.안시연은 한동안 사진 모서리를 꼭 쥐고 있었다.그들의 관계는 하루하루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진은 두 사람의 유일한 커플 사진일지도 몰랐다.그녀는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저한테 줄 수 있어요?”고작 사진 한 장에 불과했다.연정훈이 대답했다.“마음에 들면 더 찍어도 돼.”안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이거 한 장이면 충분해요.”사진을 지갑에 넣은 안시연은 전이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시간은 아직 일렀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 김에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선물해줄 옷을 한 벌 더 골랐다.6시가 다가오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데리고 주씨 가문의 본가로 갔다.차 안에서 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승희 씨랑 약속이 있어서요, 근처에 내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말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슬쩍 바라보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살포시 웃어 보였다.“승희 씨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어서요.”오늘 같은 상황에 안시연이 연정훈과 함께 다니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지금 안시연의 행동은 매우 적절했다. 하지만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그날의 천문 전시회를 떠올렸다. 그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데리고 현장에 등장해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양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급하게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연정훈이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여자의 미모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경중을 구분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오늘 밤, 연정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양민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최수영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최수영은 한때 그녀의 선생님이었다. 그 덕분인지 최수영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양민지를 대할 때 더 친절한 듯했다.그 모습을 보며 임유정은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연명걸은 자발적으로 잔을 들더니 연정훈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사람들의 대쉬에 덤덤하게 응해주었지만 별로 열정적이지는 않았다.하지만 주씨 가문의 수장인 주운덕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연정훈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후에야 연명걸에게 인사를 건넸다.두 사람을 대하는 주운덕의 온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임유정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이를 꽉 깨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양민지와 기 싸움도 해야 했고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도 경계해야 했다.그녀는 자신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그 동시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정훈도 꼭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거듭 결심했다.곧이어 주씨 할머니가 막내아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현장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할머니의 상태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소문과는 다르게 정신이 아주 또렷해 보였다.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 모습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혈기왕성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품었다.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 사람을 꺼리기 마련이다. 양민지와 임유정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졌지만 곧 이 자리가 중요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의식하고는 밝은 미소로 할머니를 맞이했다.끝자리에 앉아 있던 부승희가 비꼬며 말했다.“저 두 명 정말 추하다.
주씨 할머니는 미친 사람이라도 된 듯 안시연을 붙잡고는 계속 혜연이라고 불러댔다.깜짝 놀란 안시연이 서둘러 설명했다.“할머님,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혜연아,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하지만 할머니는 안시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곁에 있던 임지연을 밀어내더니 두 손으로 안시연을 붙잡았다. 노인의 눈빛은 잃은 줄로만 알았던 딸을 다시 마주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헀다.주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할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혜연이가 돌아왔어, 혜연이가 돌아온 거야!”할머니는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곁에 있던 부승희는 진작 인파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렇게 밀려난 부승희의 주위에는 다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현장이 혼란스럽던 그때, 누군가 안시연의 뒤에서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며 천천히 인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잡더니 깊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사람 잘못 보셨어요.”안시연도 그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사람 잘못 보신 거예요.”할머니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더니 오히려 그들의 손을 더욱 꽉 잡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불안하게 빨갛던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 빨개지고 있었다.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챈 연정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그 순간, 주씨 가문의 큰아들 주운덕이 소리쳤다.“당장 의사 불러!”주운덕의 말이 끝나자 다이닝룸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당황한 안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민지와 임유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겁먹을 필요 없어.”귓가에서는 남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귓가에 속
“할머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요?”안시연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주운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시연 씨, 번거로우시겠지만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저희 어르신 만나시면 시연 씨가 혜연이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안시연은 단번에 주운덕의 말을 이해했다.이는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주운덕의 큰 그림이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어딘가 불안해졌다.그 순간, 연정훈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그 말을 듣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운덕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본채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자리를 떴고 주씨 가문의 가족들만 남아있었다. 안시연이 올라갔을 때,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아들딸과 손주들만 있었다.안시연이 도착하자 모두가 그녀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할머니는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노인은 안시연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안시연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시끄럽게 울려대던 할머니의 심장박동 기계가 안정을 되찾았다.주씨 가문의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안시연에게 다가간 최수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요.”최수영은 고맙다는 표정만 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시간이 조금씩 흘렀다.노인은 천천히 잠이 들기 시작했고 곁을 지키던 안시연도 한쪽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최수영이 다가와 속삭였다.“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시연 씨.”안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손을 빼고는 몸을 일으키며 노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그 모습을 눈에 담던 주씨 일가 사람들은 안시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방을 나서기 전, 안시연은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오늘 밤 아니면 내일쯤일 겁니다. 가족분들께서 전부 지키고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연정훈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편히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옷과 메이크업이 망가질까 봐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몇 분마다 한 번씩 연정훈과의 채팅창을 확인하며 아직도 그가 근처에 있는지가 궁금했다.동시에 연정훈도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입력 중”임을 알리는 아이콘이 뜨는 것을 보고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나 안 갔어.”그 문자에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안심했다.그렇게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으니 점점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그렇게 꿈속에서 안시연은 오랜만에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엄마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안시연의 이름을 불렀다.시연아.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소현정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만난 엄마는 소현정보다 훨씬 아름다웠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안시연은 계속 엄마의 발자국을 열심히 뒤따라갔다.그러던 중, 실수로 발을 헛디뎌 버렸다.귓가에는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다급한 노크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시연 씨, 시연 씨!”깜짝 놀란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보다 빨리 반응한 몸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주씨 가문의 손자가 서 있었다.“할머님께서 깨어나셨는데, 시연 씨를 찾고 계세요!”그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자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2층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안시연은 이번이 할머니의 마지막일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쁜 숨소리와 희미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혜연아…”안시연은 침대 옆에 앉아 먼저 손을 내밀어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주씨 할머니의 의식은 전보다 더 또렷했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쉴 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할머니를 둔 안시연은 이 광경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
병원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반우희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간식을 먹고 있었다. 부승원은 또 한가득 간식을 들고 반우희에게 걸어갔다.“아까 그렇게 많이 먹고 또 들어가?”옆자리에 앉은 부승원은 반우희의 배에 걸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의심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반우희는 팔짱을 척 끼며 이렇게 말했다.“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병실에는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대로 대화도 할 수가 없어요.”부승원은 밤새 반우희의 옆을 지켰고 어디에 상처가 났는지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마 상처를 보니 또 마음이 철렁했다.통화하다가 핸드폰 너머의 반우희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부승원은 정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다정한 얼굴로 반우희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목이 메어 겨우 말을 짜냈다.“많이 아파?”반우희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런 상처쯤이야 껌이죠.”방금까지 승주와 투닥거리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반우희는 영웅 놀이에 심취되어 있었다.“정말 바보 같아.”부승원이 고개를 숙여 반우희의 이마에 키스하며 말했다.“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어?”부승원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우희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부승원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한 걸 보며 또 미소를 지었다. 이어 부승원의 품에 꼭 안기며 얼굴을 비볐다.“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아파요.”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말했다.“뽀뽀 두 번만 더 해주면 정말 다 나을지도 몰라요.”“...”부승원은 고개를 슬쩍 돌리다가 다시 반우희를 바라보더니 정말 반우희의 말대로 이마에 연속 두 번 뽀뽀했다.정말 들어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반우희는 당황하다가 또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역시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더니. 하나도 틀린 말 아니야.’부승원이 또 질문을 이어갔다.“안 무서웠어?”“무서웠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반우희가 오버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너무 마음이 급해서 시속 200까지 달렸는데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다
“이번에 우희 씨랑 승주가 없었으면 우리 세 식구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옆 병실 양시연의 말에 연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생명의 은인이니까 평생 보답하면서 살아야지.”양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부부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또 아기로 돌아갔다.“우리 아기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주머니가 이름은 막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지 않았어? 전에 고민해 봤는데 쑥쑥이 어때?”“싫어요.”양시연은 단번에 거절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름을 막 짓는다니요! 우리 아기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부르는 애칭이라고 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죠.”연정훈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양시연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며칠 몸 추스르고 다시 결정하자. 일단은 아기라고 부를 수밖에.”그러자 양시연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귀한 아기를 왕자라고 불러도 아쉬울 따름이었다.“어젯밤 한숨도 쉬지 못한 거 아니에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했고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연정훈은 불안함으로 밤을 지새우고 양시연이 의식을 되찾은 뒤로는 또 흥분에 휩싸여 하나도 졸린 줄 몰랐다.그러나 양시연의 말에 왠지 다시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너랑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가 너 잠들면 나도 잘게.”양시연이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지금 당장 자요.”“하나도 안 졸린데?”“안 졸려도 눈 감고 있으면 잠 들 수 있을 거예요.”양시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정훈 씨 제외하면 믿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정훈 씨라도 푹 쉬고 날 보살펴야죠.”그 말을 듣고 나니 연정훈도 별수가 없었다.그래서 양시연을 다시 체크하고 사람을 불러 아기를 데려가게 했다. 그리고 양시연 옆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아기가 떠나고 양시연은 마음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
다른 한 편 옆 병실에서.“그때, 갑자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고 발로 뻥 차니 문이 펑 하고 열렸어!”승주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쌩쌩한 모습으로 허풍을 불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그 이야기를 영웅 설처럼 들었지만 옆의 반우희는 몰래 혀를 끌끌 찼다.‘벌써 허풍이 늘어서 어떡하냐.’“너희 쪽은 심각한 편도 아니었어. 앞쪽의 내가 얼마나 위험천만했는데. 내가 문을 박차고 단번에 아저씨를 끌어냈다고!”반우희가 승주의 말을 자르자 승주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반박했다.“뭐가 안 심각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고요!”반우희는 쯧 하고 혀를 찼다.반우희가 여전히 인정하지 않자 승주는 또 말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그러는 누나는 며칠 전만 해도 운전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자랑하더니. 아주 범퍼카 운전하는 줄만 알았어요.”‘뭐라고!’반우희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뭐? 범퍼카? 운전하는 내내 다른 차량과 스치지도 않았어.”“마지막에 들이박을 때 위치 선정은 정말 말도 마요.”승주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고 반우희는 큰 모욕을 당한 것처럼 씩씩거렸다.‘웃기지 마.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라고!’두 사람이 다투려고 하자 부승원이 제때 끼어들었다.“야식 도착. 야식 먹을 사람?”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나요!”“...”두 사람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봐도 한 가족으로 보였다.부승원은 야식을 한가득 주문했고 사람을 시켜 순서대로 병실 안으로 옮기게 했다. 그러자 병실 안에는 순식간에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했다.반우희와 승주는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고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희주와 동준은 현재 두 사람을 영웅으로 받들고 있었고 각자 한 사람을 책임져 쿠션과 밥상을 내왔다.많은 음식 중에서 찜닭의 향이 제일 좋았다.포장을 뜯자 군침이 쏟아져 우희와 승주는 하마터면 침대에서 내려와 찜닭으로 돌진할 뻔했다.부승원은 찜닭
연정훈은 참 행운이라 생각했다.아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고도 양시연의 뱃속에서 무사했으니 말이다.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고 엄마로서 죄책감을 느꼈다.“이렇게 작은 녀석이 벌써 큰 위기를 넘겼으니...”그리고 연정훈은 양시연보다도 더 죄책감을 느꼈다. 본인이 모자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내일 내가 타려고 했던 차량이었는데 나 때문에 너희 두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어.”양시연은 두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사건이 벌어진 뒤로 연정훈은 양시연과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이성을 되찾고 임성원을 시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다.“탁승호가 벌인 짓이라고요?”임성원의 말에 양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은 여 아주머니 손자예요!”임성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저희 쪽에서 조치하고 있습니다. 몇 시간 뒤 제대로 된 심문해 볼 계획입니다.”양시연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탁승호일 줄은 몰랐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빠르게 말을 보탰다.“누군가 뒤에서 지시한 게 분명해. 그게 누구인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고. 탁승호는 그냥 이용당한 것뿐이야.”그리고 표정을 살짝 굳히며 뒷말을 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을 벌였으니 뒷감당은 해야겠지?”과거와 똑같은 방법으로 벌어진 교통사고였다. 그러니 이건 척 보아도 조씨 가문이 벌인 짓인 게 틀림없었다.양시연도 너무 화가 나 이를 악물었고 연정훈의 손을 꽉 잡았다.가족과 연루된 문제라면 양시연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양시연에게 있어 건강을 챙기는 게 제일 우선이었으며 본인과 아이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양시연에게 사고가 생기는 순간, 연정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재민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조재민이 벌인 게 아닐 수 있어도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연
양시연의 불안한 기색을 알아챈 연정훈은 몸을 숙여 조용히 속삭였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의사 선생님이 잠깐만 볼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손을 놓았고 그가 멀리 가지 않고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그녀의 오감이 점차 선명해졌고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배에 무게가 덜어진 느낌을 받았다.오랜 시간 동안 아이와 하나였는데 갑자기 떨어져 나간 그 느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며 가슴이 조여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아기...아기는 어디에 있나요?”연정훈이 급히 앞으로 다가가며 설명을 덧붙였다.“아기는 괜찮아. 아무 문제 없어. 다만 검사를 받아야 해서 네 곁에 두지 않은 거야.”‘괜찮다면 왜 검사를 받아야 하지?’양시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었고 순간적으로 연정훈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통증조차 잊은 채 몸을 움직이려 하며 그의 손을 꼭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내 아기... 보여줘요. 제발 나한테 보여줘요.”“양시연 씨, 아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몸에 여러 군데 골절도 있고 과다출혈도 있으셔서 회복이 가장 중요합니다.”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양시연은 억지로 쥐어짜 낸 힘을 풀었다. 다만 연정훈을 계속 쳐다본 탓에 눈이 너무 건조해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연정훈은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걱정하지 마. 이제 끝났어. 너도 무사하고 아기도 괜찮아. 반우희 씨도 모두 다 괜찮아.”양시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사고에 연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연정훈이 모두 무사하다고 하자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었다. 온몸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온 듯했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다시 맞춰진 것처럼 낯설었다. 마취 효과가 남아 있어 강한 통증은 없었지만 몸을 자유롭게 움직
위층 병실에는 양옆으로 각종 의료 기기가 늘어서 있었고 간간이 울리는 기계음은 마치 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들렸다.연정훈은 단 한 순간도 양시연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마치 피 한 방울 없는 듯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손을 꼭 잡고 싶었지만 혹여나 의료 기기에 닿을까 조심스러워 손끝에 힘조차 줄 수 없었다.그녀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입술은 창백하게 변해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폭발 응급처치 그리고 혼수상태까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휘몰아친 듯했다.마치 오래전 그날처럼 갑작스레 울린 전화 한 통이 생각났다. 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뒤였다.그때와 똑같이 반복되는 비극이였다. 또다시 교통사고가 났고 이번에는 연정훈의 아내와 아이가 그 중심에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병원으로 이송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밤을 꼬박 새운 지금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 순간의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렸고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휩싸였다.‘시연, 시연.’연정훈은 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시간을 되짚어가며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어나길 간절히 바랐다.양시연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야만 가슴속에 박혀 있던 돌덩이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때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연정훈은 원래 아무런 대꾸도 할 생각이 없었지만, 양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 문이 열리자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어머님...”양지원은 급히 달려왔고, 경인에 막 도착했을 때쯤 양시연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급한 마음에 뛰다가 그만 넘어져 발목까지 삐고 말았다.그녀는 초췌한 연정훈을 훑어보며 조용히 말했다.“이제 곧 아침이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뭐라도 좀
[오늘 저녁 6시경 가로수길 중부에서 차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직후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폭발했으며 폭발의 여파는 상당히 컸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구타이 국제공항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여성이 뉴스를 바라보며 얼굴을 굳혔다.‘생각보다 일이 너무 빨리 터졌다. 탁승호 그 무능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내가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연정훈도 양시연도 끝내 살아남았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방송을 듣는 순간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일이 터진 이상 지금 당장 떠나야만 했다. 망설이면 다음 차례는 그녀가 될 것이었다. ‘인생은 길어. 너희들 끝까지 지켜보겠어.’병원에서.근처 병원에서 치료받았기에 개인 병원과는 달리 병실은 그렇게 호화롭지 않았다.반우희와 승주는 나란히 누울 수 있는 2인실에 배정되었다. 폭발의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고 단지 깊은 기절 상태에 빠져 있었다.새벽 4시에 부승원은 두 아이와 함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복도 넘어 다른 병실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이 초조하게 머물고 있었다.부승원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라앉지 않는 긴장감이 온몸을 조였다.‘교통사고’와 ‘폭발’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그의 온몸이 떨렸다.‘몇 초만 늦었어도...’“우희 언니, 왜 아직도 안 깨나?”“곧 깨어날 거야...”“승주 형도 아직 안 깨어났어.”두 꼬마는 각각 한 명씩 침대 옆에 앉아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입술이 삐죽해지고 커다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우희 언니...”“승주 형...”부승원은 침묵했다.“...”부승원은 이마를 눌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것은 이미 세 번째 생
어두운 저녁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넓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거대한 나무들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한 대의 마이바흐가 갑자기 차선을 바꾸더니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그루의 나무 사이로 돌진했다.띠 띠디. 따르릉.폭탄을 연상케 하는 소리와 함께 경고음 휴대폰 벨 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은 순식간에 터진 에어백에 묻혀버렸다.양시연은 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진동과 멈추지 않는 타이어 소리가 여전히 차가 공중에 떠 있거나 어딘가에 걸려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냄새 점점 뜨거워지는 공기가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예고했다.아직 몇 분도 지나지 않았고 어쩌면 1분 내로 연정훈이 도착할 수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차 안에 탄 사람들의 운명은 단 몇 초 안에 결정될 터였다.결국 그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곳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무언가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뿐만이 아니라 피도 섞여 있을 것 같았다.그제야 생명이 이렇게도 연약하다는 걸 깨달았다.양시연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부모님 연정훈 모두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고 가장 지키고 싶었던 배 속의 아이마저 이제는 지킬 수 없게 되었다.“아!”그 순간 귓가에 힘찬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고 곧이어 덜컹거리는 거친 소리가 났다.그것은 발로 차 문을 거세게 걷어차는 소리였고 이어서 차 안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양시연이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려는 그 순간 한 손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양시연 누나, 내가 꺼내 줄게요. 누나도 힘을 내요.”양시연은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힘을 내기 시작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또렷한 띠 띠디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움이 엄습했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승주...너 먼저 가...”“싫어요. 절대 안 갈 거예요
도시 안이라 차에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반우희는 초보 운전자로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우희 씨, 차를 좀 한적한 곳으로 몰아 기름을 다 소모해 버려요.”양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배는 점점 더 아파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앞에서 반우희는 이미 운전석에 앉아 길을 주의 깊게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운전하고 있었다.반우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시연 언니, 사실 지금 차를 모는 게 아니라 그냥 장애물 피하기 게임을 하고 있어요. 길 위의 차들만 피하고 있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해요.”‘차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데 한적한 곳으로 가는 건 더 어려워.’양시연은 반우희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그것밖에 못 했다.“우희 씨, 3분만 더 참아요. 3분만 더 참으면 돼요.”연정훈은 몇 분 내로 인근 교통 시스템에 사람들을 보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반우희는 3분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할 수도 보장할 수도 없었다. 3분은 그녀에게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갑자기 앞에서 한 대의 차가 다가왔고 반우희는 눈을 크게 뜨며 핸들을 급하게 돌렸다.이번에도 너무 급하게 돌린 탓에 양시연은 다시 안전벨트에 의해 쪼여졌다.승주는 휴대폰을 들고 연정훈에게 상황을 계속 전달하며 양시연을 보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양시연 누나, 피를 흘리고 있어요.”“양시연!”연정훈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고 승주는 급히 전화를 양시연의 귀에 가져다 대었지만 양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대신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띠 띠디.“정훈 씨, 우리 차에 아마 폭탄이 있는 것 같아요.”그 말을 듣자마자 전화 너머로 들려온 연정훈의 목소리는 마치 천둥에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둘은 더 이상 말을 할 기회도 없이 반우희가 앞에서 소리쳤다.“양시연 언니, 앞에 바로 가로수길이에요. 차는 별로 없어요.”“차는 없지만 폭탄은 있어요!”승주가 절망적으로 외쳤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