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급하게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연정훈이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여자의 미모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경중을 구분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오늘 밤, 연정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양민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최수영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최수영은 한때 그녀의 선생님이었다. 그 덕분인지 최수영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양민지를 대할 때 더 친절한 듯했다.그 모습을 보며 임유정은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연명걸은 자발적으로 잔을 들더니 연정훈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사람들의 대쉬에 덤덤하게 응해주었지만 별로 열정적이지는 않았다.하지만 주씨 가문의 수장인 주운덕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연정훈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후에야 연명걸에게 인사를 건넸다.두 사람을 대하는 주운덕의 온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임유정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이를 꽉 깨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양민지와 기 싸움도 해야 했고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도 경계해야 했다.그녀는 자신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그 동시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정훈도 꼭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거듭 결심했다.곧이어 주씨 할머니가 막내아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현장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할머니의 상태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소문과는 다르게 정신이 아주 또렷해 보였다.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 모습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혈기왕성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품었다.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 사람을 꺼리기 마련이다. 양민지와 임유정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졌지만 곧 이 자리가 중요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의식하고는 밝은 미소로 할머니를 맞이했다.끝자리에 앉아 있던 부승희가 비꼬며 말했다.“저 두 명 정말 추하다.
주씨 할머니는 미친 사람이라도 된 듯 안시연을 붙잡고는 계속 혜연이라고 불러댔다.깜짝 놀란 안시연이 서둘러 설명했다.“할머님,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혜연아,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하지만 할머니는 안시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곁에 있던 임지연을 밀어내더니 두 손으로 안시연을 붙잡았다. 노인의 눈빛은 잃은 줄로만 알았던 딸을 다시 마주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헀다.주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할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혜연이가 돌아왔어, 혜연이가 돌아온 거야!”할머니는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곁에 있던 부승희는 진작 인파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렇게 밀려난 부승희의 주위에는 다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현장이 혼란스럽던 그때, 누군가 안시연의 뒤에서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며 천천히 인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잡더니 깊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사람 잘못 보셨어요.”안시연도 그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사람 잘못 보신 거예요.”할머니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더니 오히려 그들의 손을 더욱 꽉 잡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불안하게 빨갛던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 빨개지고 있었다.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챈 연정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그 순간, 주씨 가문의 큰아들 주운덕이 소리쳤다.“당장 의사 불러!”주운덕의 말이 끝나자 다이닝룸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당황한 안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민지와 임유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겁먹을 필요 없어.”귓가에서는 남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귓가에 속
“할머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요?”안시연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주운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시연 씨, 번거로우시겠지만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저희 어르신 만나시면 시연 씨가 혜연이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안시연은 단번에 주운덕의 말을 이해했다.이는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주운덕의 큰 그림이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어딘가 불안해졌다.그 순간, 연정훈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그 말을 듣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운덕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본채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자리를 떴고 주씨 가문의 가족들만 남아있었다. 안시연이 올라갔을 때,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아들딸과 손주들만 있었다.안시연이 도착하자 모두가 그녀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할머니는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노인은 안시연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안시연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시끄럽게 울려대던 할머니의 심장박동 기계가 안정을 되찾았다.주씨 가문의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안시연에게 다가간 최수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요.”최수영은 고맙다는 표정만 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시간이 조금씩 흘렀다.노인은 천천히 잠이 들기 시작했고 곁을 지키던 안시연도 한쪽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최수영이 다가와 속삭였다.“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시연 씨.”안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손을 빼고는 몸을 일으키며 노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그 모습을 눈에 담던 주씨 일가 사람들은 안시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방을 나서기 전, 안시연은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오늘 밤 아니면 내일쯤일 겁니다. 가족분들께서 전부 지키고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연정훈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편히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옷과 메이크업이 망가질까 봐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몇 분마다 한 번씩 연정훈과의 채팅창을 확인하며 아직도 그가 근처에 있는지가 궁금했다.동시에 연정훈도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입력 중”임을 알리는 아이콘이 뜨는 것을 보고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나 안 갔어.”그 문자에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안심했다.그렇게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으니 점점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그렇게 꿈속에서 안시연은 오랜만에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엄마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안시연의 이름을 불렀다.시연아.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소현정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만난 엄마는 소현정보다 훨씬 아름다웠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안시연은 계속 엄마의 발자국을 열심히 뒤따라갔다.그러던 중, 실수로 발을 헛디뎌 버렸다.귓가에는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다급한 노크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시연 씨, 시연 씨!”깜짝 놀란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보다 빨리 반응한 몸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주씨 가문의 손자가 서 있었다.“할머님께서 깨어나셨는데, 시연 씨를 찾고 계세요!”그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자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2층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안시연은 이번이 할머니의 마지막일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쁜 숨소리와 희미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혜연아…”안시연은 침대 옆에 앉아 먼저 손을 내밀어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주씨 할머니의 의식은 전보다 더 또렷했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쉴 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할머니를 둔 안시연은 이 광경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
이 밤은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그것은 연정훈과 안시연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주씨 가문은 앞서 아주 독특한 생일 파티를 열었고, 그 후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이름도 모를 한 여인 때문에.이 소식은 순식간에 양주시의 상류층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안시연은 사람이 가장 적은 장례 첫날에 부승희와 함께 조문을 위해 방문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주씨 가문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3일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그날 오후, 안시연은 주운덕의 초대로 주씨 가문을 방문해 차를 마셨다. 그곳에는 단 둘뿐이었다.주씨 가문은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는지 집안 곳곳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안시연도 예의를 갖춰 단정한 옅은 흰색의 옷을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그녀를 발견한 주운덕 부부는 아주 부드러운 표정으로 안시연을 맞이했다.“앉아요, 시연 씨.”최수영이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안시연이 말했다.“너무 과분한 대접 아닌가 싶네요.”“그런 말 마세요. 이번에 시연 씨 덕분에 어머니께서 큰 한을 풀고 가셨는걸요.”주운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연 씨 아니었으면 어머니께서도 편히 눈 감지 못하셨을 겁니다.”하지만 안시연은 어딘가 모를 죄책감에 입을 열었다.“다 제 실수입니다. 제가 혜연 씨 옷만 안 입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할머님께서는 조금 더 살다가 가셨을지도 몰라요.”주운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저희 어머니 몸 상태는 저희가 제일 잘 압니다. 절대 시연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저 때가 되어 가신 것뿐입니다.”그 말에 안시연은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그녀는 찻잔을 들고 물었다.“할머님 장례식 끝났는지 얼마 안 돼서 바쁘실 텐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시키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최수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가문에서 시연 씨한테 큰 신세를 지게 됐으니, 저희 쪽에서 당연
“정말 연정훈한테 그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레스토랑에서 안시연과 만난 부승희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안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과 말없이 진행된 대화를 떠올리더니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대단하다. 정말 너무 대단해요.”안시연은 입맛이 없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아마 우리 교수님, 화 단단히 나셨을걸요.”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듣던 부승희는 안시연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반응이었는데요?”“아무 반응도 없었어요.”“제가 보기엔 정훈 오빠 시연 씨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요?”잠시 생각에 잠긴 안시연이 말했다.“아마, 제가 본인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기분 나쁜 것도 당연해요.”턱을 쓰다듬던 부승희가 말했다.“아니면 시연 씨를 놔주기 싫은 걸 수도 있죠.”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상상이 너무 과하신데요.”부승희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그럼 시연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주씨 가문의 그 만능 카드를 어디에 쓰고 싶은데요?”안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뭐야, 그럼 정말 그걸로 정훈 오빠랑 협상하는 거예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러면 안 돼요?”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부승희가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관두는 게 좋을걸요.”그 말에 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근 들어 그녀의 마음은 점점 여유로워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지식도 쌓이면서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죽고 싶어 환장했다고?사실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연정훈과 원만하게 관계를 끝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삶도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병원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해나갈 필요는 없었다.매일 그를 마주하며 이 관계의 끝을 기다리는 것 또한 안시연에게는 고역이었다.차라리 짧고 굵게 아프고 마는 것이 낫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몇 명의 여자가
주 씨 저택 밖.벤틀리 차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고 연정훈은 말없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안시연은 앞에서는 주씨 가문으로 연정훈과 거래를 시도하며 헤어질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뒤에서는 연정훈을 위해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다녔다.안시연…연정훈은 그녀의 이름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경인으로 돌아갔던 며칠 동안, 연정훈은 단 한 번도 안시연을 잊었던 적이 없었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저 그녀 때문에 속이 쓰려왔고 생각할수록 잠들기 어려웠을 뿐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결혼”이나 “사랑” 같은 건 줄 수 없었어도 지금까지 그녀에게 못 해준 적은 없다고 생각해왔다.하지만 안시연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게 되자 곧바로 연정훈을 내칠 생각부터 하더니 당당하게 조건을 내걸며 거래까지 제안했다.그렇게 연정훈은 며칠 동안이나 안시연을 냉담하게 대해왔건만, 연정훈이 없는 곳에서 안시연은 그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정말 원수를 은혜로 갚은 셈이나 다름없었다.그리고 이것은 연정훈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연 대표님, 어디로 가야 할까요?”진수빈이 조심스레 물었다.“호텔.”어느 호텔로 가야 할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진수빈은 운전 기사에게 눈빛을 보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호텔까지 가는 동안 연정훈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해보니 마음만은 묘하게 기쁜 것을 알 수 있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계속 곁눈질로 올라가는 층수를 신경 쓰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는 카드키를 문에 갖다 대더니 잠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면 안시연은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본 방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안시연은 물론이고 원래 있던 두 마리의 알파카도 없었다.대단하신 우리의 연 대표는 오랜 시간 동안 거실에 서 있다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안시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어디야?”한참
연정훈의 방에 불청객 이승우가 찾아왔다.“정말 대단하네. 넌 그렇게 속이 좁아터졌는데, 정작 사람들은 다 너한테 의리 있게 굴고 말이야.”갓 샤워를 마친 연정훈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할 일 없으면 얼른 가라. 나 쉬고 싶다.”이승우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나는 무슨 너희 집에 있고 싶은 줄 알아?”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 바쁘거든. 부승희가 나랑 카드 게임 하고 싶대. 야식도 사준대.”이승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정훈의 공허한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이승우를 바라보았다.이승우도 그런 연정훈의 반응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원래는 너도 초대하려고 했는데, 쉬어야 한다니까 굳이 방해는 안 할게.”말을 마친 이승우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느긋하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이승우의 뒷모습을 연정훈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그대로 가는 줄 알았던 이승우는 타이밍 좋게 다시 뒤돌아서더니 문틀에 기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네 손가락을 세웠다.“4억, 내가 너 데리고 가준다.”“…”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연정훈은 고개를 숙이더니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이승우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말했다.“수표, 이체. 다 괜찮으니까 골라 봐.”연정훈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한번 이승우에게 내리꽂혔다.그 시선에 이승우의 웃음소리가 커지더니 셀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삼, 이…”결국, 깊게 숨을 들이쉰 연정훈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종일 일하다 온 안시연은 피로에 잠식된 나머지 그저 잠 생각뿐이었다.하지만 부승희는 어떻게 에너지가 그렇게도 넘치는지 또 누군가를 불러내 술을 마시고, 카드 게임도 할 생각이었다.“저 돈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한테는 없어도, 시연 씨 남자한테는 돈 많잖아요.”부승희가 안시연을 부추겼다.그 말을 들은 안시연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설마 정훈 씨도 불렀어요?”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반우희는 의아해 되물었다.“네?”‘접시 가지고 오라고?’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부승원의 말에 고분고분 접시를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여기요.”접시를 건네자 부승원은 반우희 손에 쥔 포크를 낚아채 자신이 건드리지 않은 부분의 스파게티를 덜어 그 접시에 올려줬다.“먹어.”반우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니 그게 아니라...”“조용히 해...”“네...”반우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뭐야. 누가 언제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했어?’‘그래도 나눠줬는데 한 입도 안 먹는 건 아니지.’그래서 반우희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했다.‘뭐지? 탄 거야?’반우희는 한 입 먹고 부승원을 향해 눈을 깜빡거렸다.부승원은 여전히 묵묵히 스파게티를 비웠다.그러자 반우희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방금까지 요리 잘한다고 그렇게 자랑했는데 소스를 태운 것도 모르다니.지금 보니 부승원도 가끔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대표님은 좋은 사람 맞아. 전에 승주 사건 모든 변호사가 거절했는데 대표님만 받으셨잖아. 돈도 되지 않은 사건인데 정의를 위해 받으신 거지. 정의를 위해!’그 생각을 하니 부승원이 마치 부처님처럼 느껴졌다.‘그리고... 대표님은 정말 너무 잘생겼어!’반우희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혹시 배가 부르지 않아 그런 건가 싶어 부승원은 또 냉장고에서 과일을 한가득 꺼내왔다.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반우희가 남겨준 스파게티는 별로 입도 대지 않고 어디 불편한 듯 자리만 고쳐 앉고 있었다.그래서 부승원은 아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문서를 보냈다.반우희는 새로운 업무가 생긴 줄 알고 눈을 반짝였다.“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서재에서 프린트해 와. 펜도 챙겨오고.”“네!”반우희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이 난 채로 서재로 향했다.그리고 종이와 펜을 챙겨 다시 나타났다.부승원은 건네받지 않고 턱으로 반우희를 자리에 앉게 했다.반우희는 얌전히 자리에
부승원이 고개를 돌려 반우희를 바라봤고 반우희는 바보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자 부승원은 바로 시선을 냉장고로 돌리고 식재료를 찾았다.반우희는 그제야 알아차리고 물었다.“혹시 저녁 안 드셨어요?”“그래.”‘어머. 정상인처럼 대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잖아!’반우희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그리고 방금 부승원의 간식을 먹은 보답으로 반우희는 대신 요리를 해주겠다고 나섰다.“제가 해드릴게요. 저 요리 잘해요.”“그래 보여.”‘요리 잘하니까 볼살이 통통하게 올랐지.’부승원이 이번에도 고분고분 대답하자 반우희는 점점 흥분되었고 용기를 내어 부승원의 옆으로 걸어갔다.“스파게티 하려고요?”“응.”“무슨 소스인데요?”부승원은 무뚝뚝하게 토마토소스를 옆에 두었다.“아, 토마토스파게티?”반우희는 부승원을 바라보며 다시 질문했다.“그런데 정말 요리할 줄 알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냉장고에 식재료 다 있어.”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냉장고에서 소스를 챙겨오고 토마토를 썰었다.부승원은 거절하지 않았고 묵묵히 면을 삶으며 작은 냄비를 반우희에게 건네 소스를 만들게 했다.반우희는 기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다.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할 때 부승원은 늘 반우희를 꾸짖기만 했었다. 그러나 정인 그룹에 들어가고 두 사람은 직급 차이로 꾸중할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부승원이 반우희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같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니... 반우희는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물이 끓고 부승원은 면을 냄비에 넣었고 핸드폰을 꺼내 타이머를 눌렀다.반우희는 계속 부승원을 힐끔거렸고 부승원이 이렇게 추운 날 외투 안에 얇은 흰 셔츠만 입고 있는 게 보였다.‘음... 뭔가 잘생겨 보이는데?’반우희는 자신의 안목에 자신이 있었다. 레전드는 영원한 레전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부승원은 진작 반우희의 시선은 눈치챘으나 그럴 여유가 없어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우희가 자신을 바라보다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딱 봐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지원아,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양석진은 양지원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우리 둘 사이는 네가 한 걸음만 다가와 주면 돼.”나머지는 양석진이 알아서 하면 되었다.양지원은 목이 메어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양석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양석진은 죄책감을 느끼는 양지원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렇게 좋은 날 과거에 잠겨 시간을 허비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그래서 낮은 목소리로 양지원의 관심사를 돌렸고 고개를 숙여 양지원의 입술에 키스했다.이젠 양지원도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양지원은 양석진의 목에 손을 걸고 키스에 응했다.방의 온도는 점점 뜨거워지고 양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지원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음...”다른 한편 반우희는 창가에서 아래층 커플이 키스하는 걸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그리고 손에 쥔 걸레를 내려 두고 아래층에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다.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먹을 쏟은 것 같은 밤하늘에 달빛이 참 아름다웠다.모든 사람이 마음껏 사랑을 하고 있는데 오직 본인만이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반우희는 한숨을 내쉬었으나 오늘 받은 일급으로 동생들에게 야식을 시켜줄 생각을 하니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았다.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반우희는 부승원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사실 오피스텔로 치기에는 평수가 커 별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청소를 마치고 반우희는 기사한테 전화를 걸었고 기사는 아직 식사 중이라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그래서 반우희는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그러다가 우연히 부승원 집에 남아 있는 고가의 간식이 눈에 들어왔고 이 많은 걸 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니 차라리 본인이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차라리 나한테 버리면 완전 고맙지.’그때 승주가 반우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샤부샤부 준비 다 끝났으니까 빨리 와요.”“알겠어!”반우희는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뜨거운 샤부샤부와 동생 세 명과 함께 맞는 새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양지원과 양석진은 조용히 떡을 만들고 있었다. 위층에서 양시연과 연정훈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래층은 평화롭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아무도 부르지 않고 서로 손발을 맞추며 작업을 이어갔다.양지원은 잠시 휴식을 취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하고 나서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는데 가슴이 조금씩 떨려왔다.이제 어린 소녀도 아니었지만 결혼 상대가 양석진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다시 소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자신의 마음을 모른 척하지 않았고 양석진을 놓치지도 않았다.드디어 양석진과 결혼을 했다.잠시 뒤 양지원은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화장실을 나섰다. 고개를 드니 양석진이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양지원은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거두고 스킨 케어를 시작했다.그렇게 순서대로 바르고 있는데 양석진이 어느샌가 양지원의 뒤로 걸어왔다.양지원은 거울 속으로 양석진과 시선을 마주했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그런데 갑자기 오성호랑 이혼하고 세운으로 가서 양석진을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양석진은 내색하지 않고 관저에서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으나 양지원이 모두 거절했었다.하지만 결국 등쌀에 못 이겨 양석진과 저녁을 함께 했다.저녁 식사 자리는 아주 조용했고 양석진은 다정하게 반찬도 집어주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양지원을 위층으로 불렀다.그날 어떻게 방으로 들어가고 방에 들어가서 어떻게 침대 위로 눕혀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양석진이 강하게 몰아붙이던 키스와 단단한 품만이 선명히 떠올랐다.관계가 끝나고 양지원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었는데 그러다가 거울 속 양석진의 깊은 시선과 마주하게 되었다.마치 지금의 양석진과 같은 시선이었다.양지원은 몰래 심호흡하며 작은 앰플을 들었다.그러자 뒤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아까 그거 바르는 거 봤어.”“...”양지원은 당황하지도 않고 대답했다.“두 번 발라야 해요.”“그래.”양석진이 고개를 끄덕
식사 자리에서 양시연은 큰소리로 양석진과 양지원의 결혼을 축하했다. 양홍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못해 함께 축하의 말을 했다.“그래도 밖에서는 좀 조심해.”양홍두가 말을 덧붙였다.“조심해 봤자예요. 오빠는 이미 유명 인사이고 난 돈이 많으니까 어떻게든 주목받을 운명이에요. 걱정은 감사해요.”양홍두는 대답이 없었고 양시연과 연정훈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양석진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최대한 조용히 지내겠습니다.”양홍두는 듣고 나서 몇 번 헛기침했다.“최대한이라니, 듣기만 해도 엉터리 같군.”다행히 양시연의 임신 소식 덕분에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양홍두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 가문에 곧 아기가 태어날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연정훈은 잠깐 자리를 떠나 폭죽을 챙겨왔다.그 덕에 새해의 분위기가 한층 더 진하게 느껴졌다.양홍두는 술기운이 좀 돌자 갑자기 양지원이 좋아하는 떡을 만들겠다고 했다. 많이 취한 건지 이 야밤에 직접 떡을 만들겠다고 아우성쳤다.갑작스러운 양홍두의 말에 양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알겠어요, 아버지. 그냥 소파에 앉아서 쉬고 계세요.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만들게요.”임신 중인 양시연이 행여나 피곤할까 연정훈은 양시연이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게 했다.사실 떡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사람은 큰 돌절구에 앉아서 떡을 만들고, 또 한 사람은 큰 나무망치로 그 떡을 쳐야 했다.힘을 쓰는 건 연정훈의 몫이었다.양석진은 시계를 빼고, 팔꿈치를 걷어붙이며 떡 만들기에 몰두했다.예상외로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모녀는 양홍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새 양지원은 양석진 옆에 다가가 양석진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올려줬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연정훈은 잠시 멈춰서 그런 모습들을 살펴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양시연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양홍두와 웃고 있었는데 연정훈에게 시선 한번 주지
양시연과 연정훈은 함께 정문으로 들어섰다. 넓은 홀 중앙에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양홍두는 그 테이블 한쪽 끝에 서 있었으며, 양지원과 양석진은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양지원은 긴 머리를 묶어 비녀로 고정했고, 연보라색의 전통 한복을 입고 흰색 여우 털을 어깨에 둘렀다. 외관은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양지원이 착용한 붉은 보석 세트는 은근히 세련된 느낌을 더하며,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양석진은 진지한 얼굴로 붓을 쥐고 있었고 그 옆에서 양홍두는 먹을 갈고 있었으며 함께 새해맞이 서예를 쓰고 있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팔을 가볍게 놓았다. 그리고 양지원과 양석진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몰래 눈빛을 교환했다.연정훈은 양홍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연정훈을 발견한 양홍두가 붓을 멈추고 물었다.“내 서예가 어떠냐?”주변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연정훈은 한참 서예를 살펴본 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님, 제 아버지도 서예를 많이 하셨지만, 할아버님의 서예를 보면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할 거예요.”“정말?”“당연하죠.”연정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 세부적인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양홍두를 서예의 대가로 모시는 것 같았다.이에 조금 놀란 양시연이 몰래 양지원에게 물었다.“할아버지 서예가 그렇게 대단해요?”그러자 양지원과 양석진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양지원이 대답했다.“넌 아직도 정훈이 입담을 몰라?”“...”‘아, 역시 그런 거군.’그때, 양홍두가 마른기침하더니 다시 연정훈에게 질문했다.“실은 나도 내 서예가 평범하다는 걸 알고 있네. 그런데 자네 장인어른과는 비교할 수 있겠는가?”“...”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연정훈에게 쏠렸다.그러나 연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양석진을 향해 말했다.“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양시연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역시 연정훈은 말을 넘기는 솜씨가 일품이었다.그러자 양석진은 붓을 놓으며 미
양시연은 사탕을 하나 입에 넣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부 대표님이 그렇게 까다로운 분인가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그렇게 까다로운 건 아니에요. 그런데 완벽주의자라 작은 결점도 못 참고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세요.”그때, 사무실 밖에서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반우희가 천진난만하게 사무실로 들어왔고 그 모습에 사무실 분위기가 한층 밝아진 것 같았다.양시연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고 비서는 양시연의 눈빛을 읽고 재빨리 문을 열어 반우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우희 씨, 케이크 먹으러 와요.”반우희는 잠시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가 오늘따라 양 탈을 쓴 늑대처럼 느껴졌다.“빨리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비서가 웃으면서 손짓했다.반우희는 별 의심 없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양시연은 이미 케이크를 나누고 있었고, 반우희에게 오늘 하루 어땠는지 다정하게 물었다.반우희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저, 벌써 일주일 동안 실수 한 번도 안 했어요! 팀장님이 이제 거의 완벽하다고 하셨어요!”“정말요? 대단해요!”양시연은 웃으며 반우희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반우희는 기쁜 표정으로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먹으며, 양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양시연이 비서에게 말했다.“부 대표님네 가사 도우미 빨리 구해야겠네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좋은 가사 도우미 찾기는 정말 어렵죠. 일급 25만 원도 구하기 힘들어요.”반우희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일급이 얼마라고요?”“25만 원이요.”비서의 말에 반우희는 바로 질문을 이어갔다.“매일 가야 하나요?”“아니요, 주 2회만 가면 돼요.”‘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있다니!’비서가 별다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우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저 청소 진짜 잘해요! 저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우희 씨가요?”“네네. 저 청소 잘하는데 저 한 번만 시켜주실래요?”양시연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 새해에 부승원
연정훈은 귀찮아서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양시연이 재촉했다.“그래도 할 일은 해야죠.”연정훈은 어쩔 수 없이 양시연의 이마에 키스하고 양시연을 품에 안고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저예요, 임성원.”연정훈은 잠시 멈칫했고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양시연이 옆에 있었기에 연정훈은 무표정으로 양시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팔을 천천히 빼고 일어났다.연정훈은 양시연을 옆에 두고 질문했다.“무슨 일이야?”임성원이 말했다.“정신병원 쪽에서 소현주 상태가 좋아졌다고 하네요. 퇴원 조건을 충족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연정훈의 얼굴에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그쪽에서는 어떻게 처리했어?”임성원이 대답했다.“대표님의 지시가 없었기에 원장님이 퇴원 신청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연정훈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양시연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연정훈이 말을 이었다.“좀 생각해 보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알겠습니다.”연정훈이 급하게 전화를 끊자 양시연은 연정훈이 평소와 다름없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무슨 일이에요?”양시연은 궁금해하자 연정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냥 협력 얘기였어.”“아...”양시연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연정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아까 별로 못 먹었잖아요. 아래 내려가서 뭐 좀 먹을래요?”“좋아, 같이 가자.”연정훈은 휴대폰을 두고, 별다른 내색 없이 양시연의 손을 잡고 내려갔다.양시연은 하루 종일 행복했고, 잠들기 전까지 기분 좋게 지냈다.그건 연정훈도 마찬가지였고 소현주에 대한 걱정을 잊고 양시연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그런데 밤이 깊어지고 연정훈은 무서운 악몽을 꾸었다.꿈속에서 양시연은 배를 움켜잡고 차 옆에서 쓰러져 있었고, 소현주는 차 안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연정훈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고, 식은땀을 흘리며 양시연이 여전히 품에 안겨 자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밤은 고요했고, 연정훈은 오랫동안 양시연을 바라보며 생각을 점차 정리했다.소현주는
“모연준 씨는 경인에 가족이 있나요?”양시연이 물었다.모연준의 운전기사가 그 사람을 챙겨준다는 건 두 사람이 평범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의문을 바로 알아차렸다.그들에게 있어 운전기사와 조수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더군다나, 모연준은 차갑고 다른 사람을 돕는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연정훈이 대답했다.“잘 모르겠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고구마 더 먹을래?”연정훈이 대화 주제를 돌리자 양시연은 조금 이상하게 느꼈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집에 돌아가서 먹고 싶으면 내가 구워줄게. 재료도 있고, 오븐도 있으니까.”연정훈이 말했다.“좋아요.”그렇게 대화는 중단되었다.양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승원은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이번 일이 부승희와 관련이 있다면 부승원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차량은 어느새 강남 시티 앞에 도착했다. 여 아주머니는 두 사람이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며 집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물었다.양시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말했다.“임신했다고요?”여 아주머니는 놀라서 외쳤고 양시연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평소랑 똑같이 하시면 돼요.”‘어떻게 평소랑 똑같을 수 있어요!’여 아주머니는 자리를 맴돌며 한참 고민하다가 행동으로 옮겼다.축하 편지 작성, 레시피 체크, 임산부 돌보는 방법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았다.양지원과 양홍두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연정훈의 부모님에게 숨길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비밀로 하자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양시연은 방 침대에 누워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다행히도 여기저기에서 걸려 온 연락은 모두 연정훈이 받았다.양시연은 핸드폰을 들고 검사 결과를 보면서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했다.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오후 네 시가 되었다.연정훈은 그제야 양시연의 곁에 누웠다. 연정훈은 한 손을 머리 뒤에 대고 천장과 양시연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아직 실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