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연정훈한테 그렇게 얘기했단 말이에요?”레스토랑에서 안시연과 만난 부승희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안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안시연은 어젯밤 연정훈과 말없이 진행된 대화를 떠올리더니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부승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대단하다. 정말 너무 대단해요.”안시연은 입맛이 없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아마 우리 교수님, 화 단단히 나셨을걸요.”흥미진진하게 얘기를 듣던 부승희는 안시연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반응이었는데요?”“아무 반응도 없었어요.”“제가 보기엔 정훈 오빠 시연 씨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요?”잠시 생각에 잠긴 안시연이 말했다.“아마, 제가 본인 권위에 도전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기분 나쁜 것도 당연해요.”턱을 쓰다듬던 부승희가 말했다.“아니면 시연 씨를 놔주기 싫은 걸 수도 있죠.”안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상상이 너무 과하신데요.”부승희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그럼 시연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주씨 가문의 그 만능 카드를 어디에 쓰고 싶은데요?”안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뭐야, 그럼 정말 그걸로 정훈 오빠랑 협상하는 거예요?”안시연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그러면 안 돼요?”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부승희가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관두는 게 좋을걸요.”그 말에 안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근 들어 그녀의 마음은 점점 여유로워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지식도 쌓이면서 점점 대담해지고 있었다.죽고 싶어 환장했다고?사실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연정훈과 원만하게 관계를 끝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삶도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병원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지금 같은 생활을 계속해나갈 필요는 없었다.매일 그를 마주하며 이 관계의 끝을 기다리는 것 또한 안시연에게는 고역이었다.차라리 짧고 굵게 아프고 마는 것이 낫지 않을까?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몇 명의 여자가
주 씨 저택 밖.벤틀리 차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고 연정훈은 말없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안시연은 앞에서는 주씨 가문으로 연정훈과 거래를 시도하며 헤어질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뒤에서는 연정훈을 위해 이런저런 부탁을 하고 다녔다.안시연…연정훈은 그녀의 이름을 곱씹으며 처음으로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경인으로 돌아갔던 며칠 동안, 연정훈은 단 한 번도 안시연을 잊었던 적이 없었다. 별다른 건 없었다. 그저 그녀 때문에 속이 쓰려왔고 생각할수록 잠들기 어려웠을 뿐이었다.연정훈은 안시연에게 “결혼”이나 “사랑” 같은 건 줄 수 없었어도 지금까지 그녀에게 못 해준 적은 없다고 생각해왔다.하지만 안시연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게 되자 곧바로 연정훈을 내칠 생각부터 하더니 당당하게 조건을 내걸며 거래까지 제안했다.그렇게 연정훈은 며칠 동안이나 안시연을 냉담하게 대해왔건만, 연정훈이 없는 곳에서 안시연은 그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정말 원수를 은혜로 갚은 셈이나 다름없었다.그리고 이것은 연정훈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다.“연 대표님, 어디로 가야 할까요?”진수빈이 조심스레 물었다.“호텔.”어느 호텔로 가야 할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진수빈은 운전 기사에게 눈빛을 보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호텔까지 가는 동안 연정훈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해보니 마음만은 묘하게 기쁜 것을 알 수 있었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계속 곁눈질로 올라가는 층수를 신경 쓰고 있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는 카드키를 문에 갖다 대더니 잠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면 안시연은 퇴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본 방안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안시연은 물론이고 원래 있던 두 마리의 알파카도 없었다.대단하신 우리의 연 대표는 오랜 시간 동안 거실에 서 있다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 안시연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어디야?”한참
연정훈의 방에 불청객 이승우가 찾아왔다.“정말 대단하네. 넌 그렇게 속이 좁아터졌는데, 정작 사람들은 다 너한테 의리 있게 굴고 말이야.”갓 샤워를 마친 연정훈은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할 일 없으면 얼른 가라. 나 쉬고 싶다.”이승우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나는 무슨 너희 집에 있고 싶은 줄 알아?”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나 바쁘거든. 부승희가 나랑 카드 게임 하고 싶대. 야식도 사준대.”이승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정훈의 공허한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이승우를 바라보았다.이승우도 그런 연정훈의 반응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원래는 너도 초대하려고 했는데, 쉬어야 한다니까 굳이 방해는 안 할게.”말을 마친 이승우가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더니 느긋하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 이승우의 뒷모습을 연정훈은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그대로 가는 줄 알았던 이승우는 타이밍 좋게 다시 뒤돌아서더니 문틀에 기대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네 손가락을 세웠다.“4억, 내가 너 데리고 가준다.”“…”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연정훈은 고개를 숙이더니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이승우는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말했다.“수표, 이체. 다 괜찮으니까 골라 봐.”연정훈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한번 이승우에게 내리꽂혔다.그 시선에 이승우의 웃음소리가 커지더니 셀프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삼, 이…”결국, 깊게 숨을 들이쉰 연정훈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종일 일하다 온 안시연은 피로에 잠식된 나머지 그저 잠 생각뿐이었다.하지만 부승희는 어떻게 에너지가 그렇게도 넘치는지 또 누군가를 불러내 술을 마시고, 카드 게임도 할 생각이었다.“저 돈 없어요.”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한테는 없어도, 시연 씨 남자한테는 돈 많잖아요.”부승희가 안시연을 부추겼다.그 말을 들은 안시연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설마 정훈 씨도 불렀어요?”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은 나비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안시연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는 나비의 목줄을 잡아 양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연정훈과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이승우가 다가와 나비의 털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이 알파카들 네가 키우는 거야?”안시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남의 거예요. 제가 임시로 맡아 키우는 중이에요.”“이름이 뭐야?”“큰 놈은 양나비고, 작은 놈은 양영준이에요.”“흠, 연인 이름 같네.”안시연은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사실 모자지간이에요...”“그런데 왜 그런 이름을 지었어?” 이승우가 빠르게 생각하더니 물었다. “전 주인이 연인 사이였나?”안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나비의 전 주인은 연인 사이였어요. 영준이는 제가 데려온 후에 태어났고요.”이승우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침 부승희가 주문한 샤부샤부 배달이 도착해서 그는 곧바로 문을 열러 갔다.그가 떠나자 작은 거실에는 안시연과 연정훈, 그리고 두 마리 양만 남았다.나비는 열심히 무언가를 씹고 있었다.양영준은 안시연의 발치에 누워 ‘알을 품고’ 있었고 안시연은 고개를 숙여 나비의 털을 쓰다듬었다.연정훈은 태연하게 앉아 있었는데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그때 양영준이 천천히 일어나자 안시연은 그를 주시했다. 양영준은 뚜벅뚜벅 걸어가 연정훈의 곁에 섰다.이를 보고 연정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양영준은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렸다.안시연도 잠시 의아해하다가 옆에 있는 젖병을 발견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배고픈가 봐요.”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젖병이 당신 왼쪽에 있어요.”연정훈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보았다.그가 드디어 중요한 점에 주목하자 양영준의 발걸음 소리가 더 빨라졌다.‘형, 빨리요. 밥 줘요.’안시연은 연정훈이 양에게 젖을 먹일 거라고 기대하
연정훈은 움직이지 않았고 양영준도 꿈쩍하지 않았다.안시연은 할 수 없이 젖병을 들고 자세를 유지한 채 그대로 있었다.다행히 젖병이 크지 않았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했다.우유를 삼키는 소리 속에서 연정훈은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겉에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옷깃 안쪽으로 안에 잠옷을 입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그는 그것이 샴페인 색 실크 슬립 원피스일 거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가 그 드레스를 입으면 하얀 팔과 다리가 드러나고 가슴 부분이 하얗게 보이며 움직일 때마다 위아래로 일렁였다.빛이 비칠 때 그녀가 살짝 숨을 헐떡이면 붉은 입술과 하얀 이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안시연은 쪼그리고 앉아 있던 자세가 불편해져 자세를 바꾸었다.연정훈은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살짝 돌렸다가 그녀가 다시 쪼그리고 앉자 표정을 평온하게 유지한 채 그녀와 양을 계속 바라보았다.갑자기 옆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이 마음에 드는 거야, 아니면 그 우유가 탐나는 거야?”“...”안시연은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깨물고는 젖병을 조금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녀는 양영준이 빨리 다 마시기를 바랐다.이승우가 바 테이블에 앉아 눈썹을 치켜 올리며 웃으며 말했다. “정훈이는 우유가 마음에 든 거 같은데 젖병 안의 우유는 아닌 것 같아.”연정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부승희는 잠시 반응하다가 손을 들어 이승우의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직 불도 켜져 있는데 야한 얘기를 하다니!“...”연정훈의 살벌한 눈빛을 받자 그는 목을 가다듬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뭘 생각하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나? 난 그저 빨리 움직여서 코코넛 밀크 열어서 정훈이한테 한 잔 따라주려고 한 거야!”설명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이렇게 변명하니 더 이상해졌다.부승희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눈을 부라렸다.안시연은 더 이상 쪼그리고 있을 수 없어서 젖병을 일찍 거두고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양영준이
불빛 아래에서 안시연이 과일 플레이트를 자르고 있었다.샤부샤부 냄비에서는 이미 김이 올라와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그녀 전체를 따스한 분위기 속에 둘러싸게 했다.만약 이승우와 부승희를 두 아이로 바꾼다면 연정훈은 지금 그들의 모습이 안시연이 묘사한 것과 거의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음료! 음료를 안 가져왔어!” 부승희가 소리쳤다.안시연이 말했다. “잠깐만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연정훈은 그녀가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일어나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부승희는 그 모습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젓가락을 건넸다.연정훈은 마치 보지 못한 것처럼 바 카운터를 돌아 그녀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부승희는 눈을 깜빡였다.“오렌지 주스, 고마워.”연정훈은 몸을 숙여 큰 오렌지 주스 병을 조리대 위로 들어 올렸다.식탁에서 부승희와 이승우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저런, 시연 씨가 바쁘게 돌아치는 게 가슴 아픈가 봐.’‘우리한테 화난 거 같아.’이승우는 감자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었다.‘그냥 먹어.’조리대 뒤에서 안시연은 과일 플레이트를 내놓고 돌아서서 연정훈이 주스를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망설이며 먼저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그때 연정훈이 그녀에게 물었다. “뭐 마실래?”안시연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오렌지 주스로 할게요.”연정훈은 대답하며 음료병을 흔들어 과육이 있는 부분을 위로 올린 뒤 그녀에게 따라주었다.그리고 가득 찬 잔을 그녀에게 건넸다.안시연은 조심스럽게 받았다.그가 너무 가득 따라서 그녀는 즉시 한 모금 마셔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부승희가 소리쳤다. “시연 씨, 상자 안에 앞치마도 있어요. 정훈 오빠한테 하나 가져다줘요.”“알겠어요.”안시연은 잔을 내려놓고 앞치마 하나를 가져왔다.빨간색의 일회용 앞치마였다.연정훈은 정말 입고 싶지 않았지만 안시연이 이미 건네고 있었다.그는 표정 변화 없이 받아 목에 걸었다.
연정훈도 평범한 남자였기에 감동의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안시연은 그에게 정말 잘해주었다이런 작은 세세한 것들은 물론이고 이번 주씨 가문 일만 해도 그렇다. 그녀는 주씨 가문에게 그를 찾아오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가문에 다른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집이나 차 등 뭐든 가능했을 텐데 하필 그를 위해 그 한마디를 했다.그는 그녀의 첫 남자이자 유일한 남자였고 그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연기가 자욱한 주방에서 그릇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술보다도 더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였다.맞은편에서 이승우가 앉으며 그릇에 고기 한 조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어, 여기 하나 더 있네?”그는 재빨리 입에 넣었다.먹고 나니 갑자기 부승희에게 한바탕 맞았다. 영문을 모른 채.시끌벅적한 사이에 안시연이 연정훈 옆으로 돌아와 작은 밥그릇을 그에게 건넸다.그녀는 샤부샤부를 다시 끓이며 여러 가지를 더 넣었고, 그의 옆에는 따뜻한 닭고기 수프도 한 그릇 있었다.서로 말은 없었다.연정훈은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도 눈길은 안시연에게 머물러 있었다.안시연은 턱을 괴고 맞은편의 장난치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고, 가끔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그녀는 아마도 졸린 모양이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자 얼굴 옆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녀에게 부드럽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더해주어 매우 여성스러워 보였다.“졸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안시연은 소리를 듣고 눈을 뜨며 나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일찍 쉬어.”연정훈이 말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호텔에 묵고 있어 모든 것을 정리해 줄 사람이 있었다.부승희는 이승우를 발로 차며 그에게 꺼지라고 했다.연정훈은 화장실에 갔다가 조금 늦게 나왔고 안시연은 이미 침실로 돌아가 겉옷을 벗고 있었다.침실 문이 반쯤 열려 있어 연정훈은 그녀를 완벽히 볼 수 있었다.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는 따뜻한 노란빛 침대 머리맡 램프 아래 앉아
연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최 측인 정인 그룹에서 책임졌다.안시연이 연정훈의 팔짱을 끼고 연회장에 도착했을 때 주운덕 부부는 이미 연회장에서 양민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그러자 안시연은 빠르게 연정훈의 손을 놓으려 했다.손의 힘을 서서히 풀자 연정훈이 다시 단단하게 고쳐 쥐었다.안시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연정훈이 그녀에게 말했다.“어딜 가려고?”“아무것도 아니에요.”안시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연정훈에게 말했다.“보는 눈이 많아요.”“그래.”하지만 연정훈은 짧게 대답하고 그녀와 함께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안시연은 심장이 쿵쾅거렸다.멀지 않은 곳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양민아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버렸다.주운덕 부부는 안시연에게 예의를 차렸고 주언덕의 아내 최수영은 직접 안시연에게 안부도 물었다.최수영은 불안에 떠는 안시연의 손을 잡고 오늘의 드레스코드에 대한 얘기를 건넸다. 그렇다 보니 옆에 선 양민아는 외면받고 말았다.더 많은 손님이 모여들고 연회장은 점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임유정은 연명걸의 팔짱을 낀 채로 연회장안으로 들어왔는데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이번 경쟁은 참가하지 않아도 이미 진 판이었다.그러나 연명걸은 여전히 무덤덤해 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큰 희망을 품지 않았었다.하지만...연명걸은 연정훈 옆자리의 안시연을 노려보는 임유정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상대를 잘못 골랐네.”임유정이 고개를 슬쩍 돌려 연명걸을 바라봤다.“저 여자 양민아보다 훨씬 더 대단한걸.”임유정은 이를 꽉 깨물었다.‘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뭐가 잘났다고?’주씨 가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고작 옷 한 벌에 곧 죽어가는 할머니의 말대로 협력을 덜컥 결정해 버렸다.연명걸은 인내심이 바닥 나 대화 주제를 바꿨다.“이모부도 도착했어. 가서 인사 할래?”임유정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먼저 가요. 화장만 고치고 따라갈게요.”그러자 연명걸은 고민도 없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연명걸이 떠나고 이
혀가 제압당하고 있어 물러날 수 없었다.예전에도 연정훈이 강하게 나온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양시연은 연정훈 앞에서 작고 연약한 존재가 된 듯 반격할 힘조차 없었다.연정훈의 커다란 몸이 양시연을 감싸 안았고 그의 가슴과 팔은 마치 쇠처럼 단단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양시연은 벽에 밀려났고 연정훈의 손에 머리가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입술을 깨물려는 순간 양시연의 볼을 단단히 쥐고 거칠게 밀어붙였다.자극적인 감각이 입가로 번져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의 입술을 스치며 그 모든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빨아들였다.그리고 다시 그녀의 모든 호흡을 빼앗아 갔다.양시연은 눈을 뜬 채로 연정훈과 마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양시연은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 저항해 보려 했으나 연정훈은 그녀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며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양시연은 어쩔 수 없이 두 다리를 모으며 본능적인 반응을 억누르려 애썼다.양시연이 낮게 신음하자 근처에 있던 나비는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듯했다.아니다. 나비가 이 상황을 목격한들 연정훈을 막을 순 없었다.양시연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힘을 빼려 했지만, 그의 억압적인 힘에 완전히 눌렸다.몸이 몇 번씩 움직이며 오히려 그의 접촉이 더 많아졌고 마치 양시연이 일부러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듯했다.“아주머니...”구조를 청하려 입을 떼었으나 도중에 또다시 막혀버리고 말았다.연정훈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양시연의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를 통해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양시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연정훈이 미친 건 아닌지 이렇게 무작정 행동하는 그가 정말로 더 나아간다면 어쩌냐고 하는 두려움이 양시연의 마음을 스쳤다.양시연이 잠시 생각에 잠기던 순간 입술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연정훈이 먼저 양시연의 입술을 깨물었고 살짝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아프다.사람을 이렇게 물다니 잠깐 연정훈이 짐승인지 의심스러웠다.속으로 욕을 내
너무 가까이 앉아 있던 양시연은 태연한 모습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 연정훈은 양시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리며 테이블로 향했다.아이스티를 한 잔을 마신 후 연정훈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양시연은 할 말이 거의 끝나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마침내 그 질문을 꺼냈다.양시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미국, 영국, 멕시코 그리고 한동안 한강시에 살았었어요.”한강시.양시연은 돌아온 적이 있었지만, 연정훈을 만나러 간 적은 없었다.연정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재미있었군.”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정말 재미있었어요. 이전에 본 것들이 얼마나 적었는지 나가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래서 눈앞의 아름다움에 홀려 발이 움직이지 못했어요.”그녀가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인지 연정훈은 분명히 알아챘다.밖의 아름다움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하하.양시연은 솔직했다.연정훈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차가운 음료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찡그린 얼굴로 양시연에게 물었다.“왜 그때 떠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당신에게 이별을 이야기한 적이 있잖아요.”“내가 동의했어?”“당신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평생 당신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연애가 싫어지면 계속할 이유가 없으니 헤어지는 게 정상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의 뒷모습을 보며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점에 대해 당신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요.”“말해봐.”양시연은 미소 지으며 턱을 약간 치켰다.“당신은 다 괜찮은데 전 여자친구를 너무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고 놓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현재의 사람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죠.”“이렇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계속 이러면 매번 연애가 악순환에 빠
“어디 가려고?”연정훈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잠시 바라보았다.연정훈의 말투는 마치 그녀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예전 그대로였다.양시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깼어요?”“응.”“아주머니를 불러서 돌보게 할게요.”양시연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저도 이제 가봐야 해요.”말을 끝내고 양시연은 일부러 손을 빼려 했다.연정훈은 점점 더 손을 꼭 쥐었다.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양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양시연은 가방으로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밀어내고 유리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나한테 술주정 부리려는 거예요?”연정훈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재미있어요?”양시연이 계속 물었다.자존심이 강한 연정훈이었기에 보통 때라면 손을 놓았겠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양시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연정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고 여전히 양시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양시연은 옆에 놓인 탕후루 꼬치가 눈에 들어오자 주저 없이 하나를 집어 연정훈의 손목을 찔렀다!연정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놓았다.양시연은 흘끗 연정훈을 쳐다본 후 손목을 주무르며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서로 간의 긴장감이 오래 이어지자, 옆에 있던 나비마저 지루해하며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얹고 네 발을 쭉 뻗고 있었다.“네 방에 있는 남자는 누구지?”연정훈이 물었다.양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내 남자친구 변백호 씨예요.”연정훈은 마치 목이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연정훈은 고개를 돌려 양시연을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남자친구가 있으면서도 한밤중에 전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네.”“연 대표님은 보통의 전 남자친구와는 다르죠. 연 대표님은 인품도 좋고 함께 있어도 늘 안전할 거로 생각해요.”양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콧방귀를 뀌었다.“누가 내 인품이 좋다고 했어?”양시연은 대답했다.“저는 경험이 많아요. 전 여자친구들한테 늘 잘 챙겨주셨던 거 다 봤거든요.”“비교해 보면 현재의 여자친구가 아니라
쳇!‘2만 원이라니! 나를 거지로 보는 건가?!’반우희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차 안에서 부승원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반우희가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뒤에서 다시 경적 소리가 울렸다.돌아보니 현금은 여전히 두 장이었지만, 부승원의 엄지가 살짝 움직이자 그 두 장이 마치 부채처럼 펼쳐져 여러 장으로 변했다!반우희는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금액을 재빨리 셈했다.16만 원!한 번 더 돌아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반우희는 잠시 고민했다.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은 여유롭게 경적을 누르고는 휴대폰을 꺼내 한 손으로 타자를 하기 시작했다.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부승원은 눈짓으로 반우희에게 휴대폰을 보라는 신호를 보냈다.반우희는 서둘러 휴대폰을 확인했다.부승원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셋을 세기 전에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돈은 없는 셈 칠 거야.]반우희는 어이없었다.“...”아아!‘또 협박이야?! 나도 자존심이 있는데!’차 안에서 부승원은 여유롭게 기다렸다.셋...그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반우희는 주먹을 꽉 쥐며 화난 얼굴로 돌아서더니 차 문을 열고 단숨에 들어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반우희는 손을 내밀었다.‘돈 줘!’부승원은 어이없었다.“...”좀 더 버틸 줄 알았다.부승원은 손을 치우며 반우희의 무릎 위로 돈을 던졌다.반우희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기쁜 얼굴로 돈을 집어 들었다.돈을 세던 그녀는 부승원의 지갑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 안에 현금이 더 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반우희는 가볍게 헛기침했다.부승원이 냉소적으로 말했다.“탐욕스럽게 침 흘리지 마.”쳇.부승원이 차를 출발시켰고 방향을 보아 반우희를 집까지 데려다주려는 것 같았다.돈을 받은 반우희는 기분이 풀려 더 이상 부승원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다음엔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저랑 시연 언니는 친구라 이런 일은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시죠?
“부 변호사님, 연 대표님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 여기 두고 갈 거예요!”술집 3층 복도에서 반우희는 부승원을 다시 한번 위협했다.부승원은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그래. 두고 가.”반우희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부 변호사님, 제발 저를 그만 괴롭혀요! 한 달에 월급 100만 원밖에 안 주시면서요!”“양시연 씨에게 전화해 봤어?”반우희는 불만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너무하네요. 양시연 언니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니잖아요?”부승원은 계속해서 질문했다.“전화했어?”반우희가 대답했다.“...했어요!”부승원은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우정 때문에 그 정도 의지도 없어졌어.”반우희는 어이없었다.“...”‘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어쩌지?’반우희는 방문을 열고 연정훈이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한시름 놓았다.“양시연 씨가 연정훈을 데려가면 너는 후문으로 나가.”부승원이 말했다.“왜요?”반우희가 불만스럽게 물었다.부승원은 즉시 전화를 끊어버렸다.반우희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연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왔다.반우희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사과했다.“언니,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오게 해서.”양시연은 반우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방에서 작은 액세서리를 꺼내 반우희에게 건넸다.“미안해할 건 나예요. 우희 씨까지 곤란하게 해서요.”“아니에요!”반우희는 팔찌를 찬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그녀는 양시연을 데리고 연정훈을 보러 가며 말했다.“연 대표님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계셨어요.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것 같더니 중간에 언니를 차단해 버렸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무슨 이유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양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왔다. 양시연은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빈 병들을 훑어보았다.싱글 소파에 앉아 있는 연정훈은 눈을 감고 반쪽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머리를
밤10시.방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다.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변백호는 손에 책을 말아 쥐고 소파를 두드리며 양시연을 재촉했다.“빨리 해. 이러다 시간 다 되겠어.”양시연은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이마에 땀을 흘리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시험지는 다양한 언어와 주식, 은행, 세무 지식이 얽힌 난해한 문제들로 가득했다.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자 양시연은 살짝 변명할 생각이 들었다.“이거...네가 안 가르쳐 준 부분이 많아서...”“어떤 문제?”변백호는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변백호는 무섭게 엄격했다.양시연은 선택지 하나를 펜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변백호는 말아놓은 책을 펼쳐 양시연의 머리를 툭 쳤다.“이 문제 네가 귀국하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가르쳤던 거잖아!”양시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문제 빨리 풀어.”변백호는 싫증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네가 제일 형편없어.”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서둘러 답안을 작성했고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시험지를 제출했다.변백호는 즉석에서 채점했고 양시연의 점수는 80점이었다.됐다. 합격이다.변백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형편없어.”양시연은 할 말이 없었다.변백호는 학생들에게 매우 엄격해서 100점 만점에서 80점이 되어야 겨우 통과라고 인정했다. 그의 다른 학생들은 모두 천재에 가까워서 양시연은 그들을 따라가기 버거웠다.중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혼혈 여학생이 있었고 그녀는 대학을 일찍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두뇌를 가졌고 정보를 입력하면 답이 바로 나오는 듯했다.“그럼...이제 집에 가도 될까?”양시연은 조심스럽게 변백호를 살피며 물었다.변백호는 조금 더 양시연을 잡아두려 했지만,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태연히 자세를 고쳐 앉으며 손짓했다.“가 봐.”양시연은 마침내 해방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양시연이 나가자마자 변백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카톡 화
양시연이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변백호가 양시연의 목을 감싸며 앞으로 끌어당겼다.“이거 놔. 무슨 짓이야.”변백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힘 좀 써서 나한테서 벗어나 봐.”양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변백호, 너가 내게 복싱을 몇 번이나 가르쳤다고! 그마저도 나를 샌드백 삼아 때리기만 했는데 내가 대체 뭘 배웠겠어?”변백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에이. 정말 형편없네.”양시연은 어이없었다.“...”“당장 놔!”양시연은 소리쳤다.양시연이 정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변백호는 흥미를 잃은 듯 양시연을 풀어주며 투덜거렸다.“양혁수가 널 어디가 좋다고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체력도 허약한 데다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데.”양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이 치밀었다.변백호는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양시연을 깎아내리곤 했다.분노에 찬 얼굴로 양시연은 문을 열었다. 배달 직원일 거로 생각했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양시연은 멈칫했다.연정훈...?연정훈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옷을 대충 손에 걸친 채 흰 셔츠의 단추는 두어 개 풀려 있었고 손등의 핏줄은 도드라져 있었다. 창백한 얼굴엔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비서가 전한 말이 떠오르며 혹시 따지러 온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양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떻게 오셨어요?”‘무슨 일이냐고?’양시연은 묘하게도 차분했다.연정훈은 숨이 막힐 듯 분노가 치밀었지만, 이를 악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시계를 방에 두고 왔어요.”“시계요?”양시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어디 두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드릴게요.”“내가 직접 찾을 거예요.”양시연은 잠시 멈칫했다. 생각에 잠긴 찰나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변백호의 귀찮은 듯한 연극조 목소리가 들려왔다.“자기야, 누구랑 얘기 중이야?”양시연은 침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연정훈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은 채 응시하자, 양시연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의
검은색 벤츠가 스쳐 지나가며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길가에 서 있던 연정훈은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었다.배은망덕하다.아주 좋다.양시연이 연정훈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시연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의아했다.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부터 마치 동물을 훈련하듯 연정훈의 눈앞에 나타나는 빈도가 줄어들었고 그녀의 열정도 점차 식어갔다. 어젯밤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연정훈의 얼굴을 스쳤다.연정훈은 무거운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양시연에게 강한 한 수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스스로 억눌렀다.연정훈은 계속해서 양시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그럴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다.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연이 계속 연정훈에게 신경 쓸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점심 무렵 양시연의 비서가 나타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양 대표님께서 오전에 급한 일이 생겨 연 대표님과의 쇼핑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연정훈의 마음속 불만은 어느 정도 가셨고 연정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인가요?”“별일은 아닙니다.”비서는 미소 지었다.“그냥 양 대표님의 남자친구가 귀국해서 대표님께서 마중 나가신 것입니다.”스윽!비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 뒤로 한기가 느껴졌다. 눈앞에서 연정훈의 얼굴이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스쳤고 곧 차가운 눈빛으로 얼어붙었다.연정훈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대표님이 왜 가셨다고요?”“남자친구...마중 나갔습니다.”비서는 울고 싶은 지경이었다.이 일이 목숨을 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비서는 연정훈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연정훈이 묻지 않는 틈을 타 살짝 자리를 피했다.다시 돌아보니 연정훈은 표면적으로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으로
양시연은 주 팀장의 얼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계약서를 들어 확인한 후에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양시연의 마음 한편에 묘한 감정이 스쳐 갔으나 양시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연 대표님과 정인 그룹이 저희 인터참을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양시연은 사람들을 향해 차분히 말했다.주 팀장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그럼요. 저희는 양 대표님을 믿습니다.”양시연은 침묵했다.“...”부승원은 변함없는 담담한 얼굴로 계약 절차를 마무리한 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떴다.주 팀장은 양시연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양시연은 정중히 거절했다.“다음에 주 팀장님께서 시간이 되시면 제가 초대하겠습니다.”“네. 좋아요.”그 사람들을 배웅한 후 비서가 사무실로 달려가 좋은 소식을 전했다. 양시연이 돌아서자마자 사무실 안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몇몇 담당자를 회의실로 불렀다.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후 조려욱과 몇몇은 연정훈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주 팀장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양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몇몇 사람들은 양시연을 바라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시연의 답을 기다렸다.양시연이 말했다.“계약은 이미 체결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몫입니다. 투자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겠지요.”“연 대표님께서는 저희 쪽에 머무르고 계시잖아요.”비서가 상기시켰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연 대표님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기고 최고의 예우를 다하세요.”사람들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양시연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녀와 연정훈이 사귀었던 사이였고 연정훈이 이렇게까지 배려하는 것을 보고 혹시 그가 재결합을 바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었다.하지만 재결합은 중요하지 않았다.설령 연정훈이 양시연을 다시 원한다 해도 양시연이 원하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