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정훈은 흥미를 잃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몸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그녀를 안고 얼굴을 보면서 귀여워하는 것도 몸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일이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뽀뽀한 후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덮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오늘 밤에는 일찍 쉬어.”안시연은 약간 의아했다. 적어도 다른 방법으로 시중 들어야 하는 줄 알았다.그녀는 남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녀를 안고 있으니 하루의 피로가 싹 다 풀렸다.안시연은 조용히 그의 관자놀이를 만지더니 살살 문질렀다.그렇게 한참 조용히 있다가 연정훈은 그녀를 안고 방으로 돌아갔다. 알카파 두 마리는 서브룸에 가둬두었다.안시연은 잠자리에 들 때, 달그락거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다시는 뛰어나오지 않을까요?”“열쇠를 가져다가 문을 잠갔어.”“...”이렇게 진지할 일인가? 그녀는 너무 웃겼다.남자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자.”안시연은 대답한 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연정훈은 그녀에게 옷을 맞춰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주씨 가문 파티 당일, 밖에 비가 많이 내렸는데 그는 직접 함풍에 그녀를 데리러 왔다.여전히 전철웅의 가게로 갔는데, 이번에는 뒷문으로 들어갔다.전철웅의 막내 아들 전이수가 문을 열어주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전이수는 품위 있는 청년이었다.“아버지가 요 몇 년 몸이 안 좋아서 옷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요. 이틀 동안 야근해서 만든 새 옷을 방금 보냈고, 지금 쉬러 들어가셨어요.”설명을 들은 안시연은 그 새 옷이 양민아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이수는 그녀와 연정훈을 데리고 뒷건물로 가면서 말했다.“사실 지금 제작한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손재간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어쨌든 연세가 있으셔
전이수가 설명했다.“이 옷장 안에 있는 옷 두 벌 다 아버지께서 가장 자랑스러워하셨던 작품이에요. 안타깝게도 옷 주인들은 다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지만요. 옷이 완성되기도 전에 먼저 떠나버렸으니, 아쉽게 된 거죠.”그 말을 듣는 안시연의 마음이 쓰라렸다.하지만 안시연은 진심으로 그 옷이 마음에 들었다.“정말 예뻐요.”안시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전이수는 다른 옷 몇 벌도 꺼내 보여주었지만 안시연의 눈에는 옷장 속에 있던 그 옷밖에 들어오지 않았다.“저 옷 좀 입어 봐도 될까요?”결국, 안시연이 입을 열었다.전이수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대답했다.“왼쪽 옷의 유래는 저도 알고 있지만 오른쪽 옷의 내력은 아버지께서 말해주신 적이 없어요.”“그럼…”“됐어요.”전이수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꿀벌은 예쁜 꽃에 끌리는 법이죠.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라면 이 예쁜 옷도 아주 잘 어울릴 겁니다. 가만히 둬봤자 그냥 낭비일 테니까요.”안시연은 그런 전이수의 말에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그럼 우선 입어볼게요.”전이수가 말했다.“옷 다 갈아입으시면 불러주세요. 나중에 제가 올라와서 헤어도 해드릴게요.”말을 마친 전이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안시연은 어딘가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제가 탈의실로 가면 돼요. 굳이 내려가실 필요 없습니다.”전이수는 아래층을 가리키며 말했다.“그래도 남녀는 다른 법이잖아요. 연 대표님께서 질투라도 하시면 저는 감당할 자신 없습니다.”그 말에 안시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리 없어요.”안시연은 연정훈 같은 성숙한 사람이 그렇게 유치하게 질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이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재빨리 눈치껏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안시연이 옷을 다 갈아입고 나서야 전이수가 다시 위층으로 올라왔다.그러는 사이, 전이수는 여자 도우미까지 불러 간단히 마실 것이라도 가져다주게 하며 최대한 안시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했다.안시연은 전이수가 정말 재미있는 사
찰칵!셔터가 눌리자 사진이 즉석에서 나왔다.전이수는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해 흑백 필터를 사용해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 색감이 안시연의 옷과 연정훈의 분위기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했다.사진을 받은 안시연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이 예쁘게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마음에 들었다.안시연의 옆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던 연정훈의 시선은 차갑고도 깊었다. 간단히 차려입은 정장은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앉아 한 손은 안시연의 뒤에, 다른 한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소매 끝에 달린 보석 단추가 흑백을 뚫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그는 세상을 쥐고 흔드는 거물 같아 보였다.안시연은 한동안 사진 모서리를 꼭 쥐고 있었다.그들의 관계는 하루하루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진은 두 사람의 유일한 커플 사진일지도 몰랐다.그녀는 얼굴을 돌려 연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저한테 줄 수 있어요?”고작 사진 한 장에 불과했다.연정훈이 대답했다.“마음에 들면 더 찍어도 돼.”안시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이거 한 장이면 충분해요.”사진을 지갑에 넣은 안시연은 전이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시간은 아직 일렀고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 김에 안시연은 부승희에게 선물해줄 옷을 한 벌 더 골랐다.6시가 다가오자 연정훈은 안시연을 데리고 주씨 가문의 본가로 갔다.차 안에서 안시연이 말했다.“저는 승희 씨랑 약속이 있어서요, 근처에 내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 말에 연정훈은 안시연을 슬쩍 바라보았다.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살포시 웃어 보였다.“승희 씨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어서요.”오늘 같은 상황에 안시연이 연정훈과 함께 다니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지금 안시연의 행동은 매우 적절했다. 하지만 연정훈은 저도 모르게 그날의 천문 전시회를 떠올렸다. 그때 연정훈은 안시연을 데리고 현장에 등장해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양민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급하게 시선을 거두었다.그녀는 연정훈이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여자의 미모에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경중을 구분하지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오늘 밤, 연정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양민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최수영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최수영은 한때 그녀의 선생님이었다. 그 덕분인지 최수영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보다 양민지를 대할 때 더 친절한 듯했다.그 모습을 보며 임유정은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연명걸은 자발적으로 잔을 들더니 연정훈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연정훈은 사람들의 대쉬에 덤덤하게 응해주었지만 별로 열정적이지는 않았다.하지만 주씨 가문의 수장인 주운덕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연정훈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후에야 연명걸에게 인사를 건넸다.두 사람을 대하는 주운덕의 온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임유정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이를 꽉 깨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양민지와 기 싸움도 해야 했고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도 경계해야 했다.그녀는 자신에게서 연정훈을 빼앗아간 안시연이 반드시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그 동시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연정훈도 꼭 후회하게 만들겠다고 거듭 결심했다.곧이어 주씨 할머니가 막내아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현장의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할머니의 상태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소문과는 다르게 정신이 아주 또렷해 보였다.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 모습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혈기왕성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품었다.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 사람을 꺼리기 마련이다. 양민지와 임유정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졌지만 곧 이 자리가 중요한 비즈니스 관계를 맺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의식하고는 밝은 미소로 할머니를 맞이했다.끝자리에 앉아 있던 부승희가 비꼬며 말했다.“저 두 명 정말 추하다.
주씨 할머니는 미친 사람이라도 된 듯 안시연을 붙잡고는 계속 혜연이라고 불러댔다.깜짝 놀란 안시연이 서둘러 설명했다.“할머님,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아요.”“혜연아,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하지만 할머니는 안시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녀는 곁에 있던 임지연을 밀어내더니 두 손으로 안시연을 붙잡았다. 노인의 눈빛은 잃은 줄로만 알았던 딸을 다시 마주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헀다.주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할머니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혜연이가 돌아왔어, 혜연이가 돌아온 거야!”할머니는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했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안시연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곁에 있던 부승희는 진작 인파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그렇게 밀려난 부승희의 주위에는 다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현장이 혼란스럽던 그때, 누군가 안시연의 뒤에서 나타나 그녀를 보호하며 천천히 인파들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잡더니 깊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사람 잘못 보셨어요.”안시연도 그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사람 잘못 보신 거예요.”할머니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안시연과 연정훈을 번갈아 보더니 오히려 그들의 손을 더욱 꽉 잡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불안하게 빨갛던 할머니의 얼굴은 더욱 빨개지고 있었다.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챈 연정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그 순간, 주씨 가문의 큰아들 주운덕이 소리쳤다.“당장 의사 불러!”주운덕의 말이 끝나자 다이닝룸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당황한 안시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살벌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양민지와 임유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겁먹을 필요 없어.”귓가에서는 남자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귓가에 속
“할머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요?”안시연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주운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시연 씨, 번거로우시겠지만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저희 어르신 만나시면 시연 씨가 혜연이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안시연은 단번에 주운덕의 말을 이해했다.이는 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한 주운덕의 큰 그림이었다.하지만 안시연은 어딘가 불안해졌다.그 순간, 연정훈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그 말을 듣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운덕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본채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자리를 떴고 주씨 가문의 가족들만 남아있었다. 안시연이 올라갔을 때, 할머니의 방에는 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아들딸과 손주들만 있었다.안시연이 도착하자 모두가 그녀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할머니는 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황이었다. 노인은 안시연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안시연도 무의식적으로 함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시끄럽게 울려대던 할머니의 심장박동 기계가 안정을 되찾았다.주씨 가문의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안시연에게 다가간 최수영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괜찮아요.”최수영은 고맙다는 표정만 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시간이 조금씩 흘렀다.노인은 천천히 잠이 들기 시작했고 곁을 지키던 안시연도 한쪽 몸이 저리기 시작했다.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최수영이 다가와 속삭였다.“이제 가보셔도 될 것 같아요, 시연 씨.”안시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손을 빼고는 몸을 일으키며 노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그 모습을 눈에 담던 주씨 일가 사람들은 안시연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방을 나서기 전, 안시연은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오늘 밤 아니면 내일쯤일 겁니다. 가족분들께서 전부 지키고 계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연정훈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안시연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편히 자리에 누울 수 없었다. 혹시라도 옷과 메이크업이 망가질까 봐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휴식을 취했다.안시연은 몇 분마다 한 번씩 연정훈과의 채팅창을 확인하며 아직도 그가 근처에 있는지가 궁금했다.동시에 연정훈도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입력 중”임을 알리는 아이콘이 뜨는 것을 보고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나 안 갔어.”그 문자에 안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안심했다.그렇게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으니 점점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그렇게 꿈속에서 안시연은 오랜만에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엄마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안시연의 이름을 불렀다.시연아.엄마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소현정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꿈속에서 만난 엄마는 소현정보다 훨씬 아름다웠다.비몽사몽 한 상태로 안시연은 계속 엄마의 발자국을 열심히 뒤따라갔다.그러던 중, 실수로 발을 헛디뎌 버렸다.귓가에는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이윽고 다급한 노크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시연 씨, 시연 씨!”깜짝 놀란 안시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머리보다 빨리 반응한 몸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주씨 가문의 손자가 서 있었다.“할머님께서 깨어나셨는데, 시연 씨를 찾고 계세요!”그 말에 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자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2층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안시연은 이번이 할머니의 마지막일 것 같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가쁜 숨소리와 희미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혜연아…”안시연은 침대 옆에 앉아 먼저 손을 내밀어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주씨 할머니의 의식은 전보다 더 또렷했다. 그녀는 눈을 뜬 채 쉴 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안시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할머니를 둔 안시연은 이 광경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힘
이 밤은 잠들 수 없는 밤이 될 것이다.그것은 연정훈과 안시연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주씨 가문은 앞서 아주 독특한 생일 파티를 열었고, 그 후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이름도 모를 한 여인 때문에.이 소식은 순식간에 양주시의 상류층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안시연은 사람이 가장 적은 장례 첫날에 부승희와 함께 조문을 위해 방문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주씨 가문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3일 만에 모든 절차가 끝났다.그날 오후, 안시연은 주운덕의 초대로 주씨 가문을 방문해 차를 마셨다. 그곳에는 단 둘뿐이었다.주씨 가문은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었는지 집안 곳곳에서 침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안시연도 예의를 갖춰 단정한 옅은 흰색의 옷을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그녀를 발견한 주운덕 부부는 아주 부드러운 표정으로 안시연을 맞이했다.“앉아요, 시연 씨.”최수영이 직접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안시연이 말했다.“너무 과분한 대접 아닌가 싶네요.”“그런 말 마세요. 이번에 시연 씨 덕분에 어머니께서 큰 한을 풀고 가셨는걸요.”주운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연 씨 아니었으면 어머니께서도 편히 눈 감지 못하셨을 겁니다.”하지만 안시연은 어딘가 모를 죄책감에 입을 열었다.“다 제 실수입니다. 제가 혜연 씨 옷만 안 입었더라면, 그랬다면 어쩌면 할머님께서는 조금 더 살다가 가셨을지도 몰라요.”주운덕이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저희 어머니 몸 상태는 저희가 제일 잘 압니다. 절대 시연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저 때가 되어 가신 것뿐입니다.”그 말에 안시연은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그녀는 찻잔을 들고 물었다.“할머님 장례식 끝났는지 얼마 안 돼서 바쁘실 텐데, 저를 부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시키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최수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가문에서 시연 씨한테 큰 신세를 지게 됐으니, 저희 쪽에서 당연
말싸움이라면 양시연도 이제 연정훈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뻔뻔한거로는 연정훈을 당해내지 못했다.결국 양시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밥만 입에 넣었다.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주변 산책길을 같이 걸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데리고 양혁수를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연정훈이 양혁수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하지만 양혁수도 연정훈을 예쁘게 볼 리가 없었다.게다가 양혁수가 연정훈을 못마땅해하는 건 양시연의 문제를 떠나 태어나길 두 사람은 상극인 것 같았다.다시 집으로 돌아온 양시연은 연정훈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걸 발견했다. 이 집에 나타날 사람은 양혁수를 제외하고 또 없었고 양혁수의 옆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한 여자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변여름이었다.“시연 언니.”변여름이 먼저 양시연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정훈의 손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연정훈더러 말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로 걸어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양혁수는 두 사람의 등장에 잠시 침묵했다.그러다가 등받이 몸을 편히 기대며 양혁수를 비꼬기 시작했다.“뭐예요? 나랑 도망이라도 갈까 봐 지키러 왔어요?”“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두 사람은 만나기만 해도 스파크가 튀었다.변여름은 연정훈의 공격적인 태도에 아이스크림까지 내려두고 연정훈을 살폈다.양혁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시연이 한발 빠르게 나섰다.“이제 점심시간이 곧 되는데 여름이는 점심 먹었어?”“아직 안 먹었어요.”양시연이 서둘러 변여름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그럼 그러지 말고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같이 밥 먹자고 전해.”양혁수는 입맛을 다시며 못마땅하다는 말투로 말했다.“외부인이 있어서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네.”연정훈도 지지 않았다.“마침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게 내키지 않아서.”“...”‘다들 정말 유치하긴.’변여름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양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연정훈의 품에서 턱을 치켰다.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의 콧등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이젠 일어나. 우리 시내 구경이나 가자.”양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빨리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안 급해.”연정훈은 잠시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그러는 넌 양혁수 보러 온 거잖아. 마침 시간도 되겠다 온 김에 나도 양혁수 보러 갈까 봐.”양시연이 눈을 부릅 떴다.‘삐진 거 참 오래도 가네.’“나보고 잘 삐진다고 그러더니, 정훈 씨야말로 삐돌이네요.”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이 너무 신경이 쓰인 연정훈은 행여나 두 사람이 따로 만날 까 안절부절못했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연정훈은 오늘 양혁수의 앞에서 깨소금을 볶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참 속 보이네.’하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양혁수는 네 오빠잖아. 그러니 보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양시연은 말문이 막혔다.“참나. 그럼 혁수더러 형님이라고 부르던가요.”연정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나쁘지 않은데?”“...”양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정훈을 살짝 밀어냈다.“빨리 일어나서 옷 좀 챙겨줘요. 나도 씻어야겠어요.”연정훈은 양시연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줬고 빠르게 옷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그 옆에 꼭 붙어 있는 모습이 직접 옷을 입혀주지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하지만 양시연은 연정훈을 잘 알았다. 연정훈에게 맡겨버린다면 아마도 또 한바탕 사달이 날 것이다.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양시연은 많이 뻔뻔해졌고 연정훈의 앞에서 당당하게 옷을 갈아입었다.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두 다리가 흐물거리고 허리가 엄청 시큰거렸다.그러자 연정훈이 빠르게 양시연을 부축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끗 보다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금 정훈 씨도 멀쩡한 척하는 거죠? 사실은 엄청 피곤한데 말이에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끌어안고 직접 화장실로 데려갔다. 양시연을 내려놓은 연정훈은 또
“거짓말...”“나랑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그냥 내 얼굴이랑 몸만 좋았던 거잖아요...”정신은 흐릿해지고 땀으로 온몸이 젖어갔다. 그리고 양시연의 두 볼도 붉게 물들었으며 두 사람은 이따금 대화를 이어갔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양시연이 눈물이라도 흘리는 날이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그래서 양시연을 달래며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졌다.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어느새 방안은 조용해졌다.양시연은 이제 손가락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연정훈의 팔을 베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기에 연정훈은 양시연을 안아 들고 샤워를 하러 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오고 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연정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이제 화해하는 거로 어때?”‘화해?’‘무슨 화해?’양시연이 머리를 굴리다가 연정훈이 과거 연애 시절을 가리킨다는 걸 깨달았다.“풉...”그래서 웃음이 터졌다.“...”연정훈은 양시연이 정신이 흐릿할 때 서둘러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그렇게 양시연은 서서히 잠이 들었고 어느새 연정훈의 품에 안겨 중얼거렸다.“꿈 깨요...”연정훈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연정훈은 양시연을 꼭 껴안고 고개를 숙여 이마에 키스를 했다.몇 시간 뒤면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연정훈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에든베타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버리고, 소현주 사건도 말해줬으니 이제 마음이 편했다.그래서 잠에 들지 않고 가만히 양시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되었다.아침.양시연이 눈을 떴을 때, 연정훈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 맞은편 소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양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고백이 떠오른 양시연은 흥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등을 휙 돌려버렸다.그러자 입꼬리를 올린 연정훈이 노트북을 내려 두고 양시연의 등 뒤로 앉았다. 이어 몸을 숙여 양시연의 목에 키스를 했다.입술의 말캉한 촉감이 유난히 선명했다.양시연은 두 눈을
“꼭 그렇게 날 상처 줘야겠어?”연정훈이 고개를 숙여 양시연을 바라봤다.그러자 양시연이 쯧 하고 혀를 찼다.“이건 모두 정훈 씨가 자초한 거예요.”“삼촌이 정말 깨어나지 않았다면 정훈 씨는 평생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로 살았을 텐데.”그리고 양시연이 몸을 돌려 연정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어디 보자. 설마 지금도 바보인가?”“...”연정훈은 양시연에게 속수무책이었고 양시연이 내키는 대로 머리를 쓰다듬게 했다.양시연은 이런 연정훈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고작 이런 말로 내 믿음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 마요. 소현주 씨를 제외하고 정말 다른 사람은 없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걸요. 그때 호텔에서...”양시연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아주 익숙해 보였단 말이에요!”연정훈은 이런 양시연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올렸다.“날 놀리는 거야? 내가 뭐가 익숙해 보였다고 그래.”“...”“네가 멍청한 거지.”‘어쭈?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양시연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어쨌든 모두 정훈 씨 탓이에요. 어떻게 교수씩이나 돼서 수업 듣던 학생한테 마음을 품을 수 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연정훈은 과거에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그러자 연정훈은 이불을 위로 올리더니 다시 양시연의 위로 올라타고 양손으로 몸을 지탱했다.시선이 얽히고 연정훈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틀어 양시연의 귓불에 키스하며 말했다.“나한테 다른 사람이 있었는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겠어?”양시연은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연정훈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양손으로 연정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는데 머릿속에는 그동안 연정훈과 함께 지내던 추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연정훈은 양시연만 보면 이성을 잃었다. 처음 만남을 이어가던 그 시절 연정훈은 너무 양시연을 몰아붙여 양시연을 힘들게 했었다.양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아요? 정훈 씨가
연정훈이 인상을 찌푸리자 양시연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말이 맞죠?”“...”양시연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자 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나랑 소현주는 가벼운 교제였지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었어.”양시연은 믿지 않았다.“결혼 얘기까지 오갔다면서 해본 적 없다고요?”“없어.”연정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양시연은 연정훈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훑었다.그러나 진실이 어찌 되었든 이젠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양시연은 이불을 쭉 당겨 등을 돌려 누웠다.“...”연정훈은 몸을 일으켜 양시연을 품에 넣었고 양시연은 팔꿈치로 연정훈의 복부를 가격했다.“나 건드리지 마요!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면서!”“...”연정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뒤로 하고 다시 양시연을 꼭 껴안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뽀뽀하고 달래도 효과가 없었다.그러자 연정훈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공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지?”양시연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그게 무슨 소리예요?”“더 자세하게 알려줄게.”“...”양시연은 궁금했지만 겉으로는 질색하며 말했다.“누가 듣고 싶대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말해줄 필요 없어요.”연정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양시연은 드디어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고 연정훈은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소현주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소현주는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공휘를 만났었다. 사실 이것도 순화해서 한 말이지, 소현주는 아주 많은 남자들과 돈으로 된 만남을 이어갔다.그러니 성폭행으로 몰아간 영상은 진짜와 거짓이 동시에 존재했다.소현주는 연정훈과 같이 지내며 과거가 들킬까 걱정이 많았고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유학을 변명으로 해외에서 여러 번 회복 수술도 받았다.공휘 주변에는 널린 게 여자였고 소현주에게는 이미 질려버린 터였다. 그러나 연정훈의 여자가 된 소현주를 보며 다시 관심이 생겼다.이 얘기를
양시연이 깜짝 놀라 물었다.“양혁수랑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연정훈이 입을 열었다.“누가 너희 정원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양민아에게 동영상을 넘겼어. 그리고 양민아는 그 영상을 내 할머니에게 보여줬고.”양시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할머니가 또 정훈 씨한테 보여줬겠네요?”“그래.”양시연이 길게 심호흡했다.“나랑 혁수는...”연정훈이 말을 잘랐다.“영상 속에서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잠이 들었어. 길고양이 길 강아지들을 같이 목욕도 시키고 양혁수는 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널 껴안기도 했어.”연정훈은 머릿속에서 가장 크게 남아 있던 그 영상을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다.“정원의 수도가 터진 날, 두 사람은 흠뻑 젖어버렸고 양혁수가 널 끌어안았어.”양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고 양시연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려놨다.“그건... 그건 끌어안은 게 아니라 그냥...”하지만 적합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때는 생각이라는 걸 내려놓고 편히 지내다 보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냥 물놀이하려는 본인을 막아서는 양혁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잡았다.“지금 나한테 연인 사이였냐고 물어보고 싶은 거잖아요. 혹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관계를 가지진 않았는지 궁금한 거고요.”이 말을 하는 양시연은 양민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애매모호한 영상을 짜집기해서 보낸 양민아는 이런 사단을 만들고자 작정을 한 것 같았다.연정훈이 한숨을 내쉬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예전엔 그게 궁금했어.”“그럼 지금은요?”“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고 생각해. 너한테 나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아.”“...”양시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연정훈을 살짝 노려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그걸 아는 사람이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어디에서
포장을 뜯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듯 들렸고 양시연은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양시연은 몸을 살짝 들어 올려 연정훈의 귀에 대고 대답했다.“딱 조금만 더...”“...”“너 너무 우쭐대지 마.”연정훈의 뜨거운 숨결이 양시연의 귀 끝에 닿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양시연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고 단단히 허리를 감싸 안았다.“안 우쭐대면 네가 더 좋아할 만한 거로 보답할게.”양시연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손끝에서부터 힘이 풀려 움직임이 서툴러졌다.연정훈이 양시연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주었고 결국 모든 게 마무리됐다. 잠시 이어진 적막 속 이불 아래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이 일렁였다.“음...”타국에서의 밤은 그렇게 은밀히 막을 올렸다....새벽 뜨겁고 아찔했던 방 안은 마침내 고요를 되찾았다.양시연은 연정훈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며 몽롱한 기운 속에서 허리 아래로 전해지는 묘한 무력감을 느꼈다.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지던 그 순간 양시연은 자신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연정훈이 몸을 떼어내는 부드럽고 세심한 움직임은 양시연의 온몸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고 양시연의 얼굴은 불꽃처럼 붉게 물들었다.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열고 천천히 무언가를 정리했다.양시연은 눈을 감은 채 그의 품에서 안정을 찾았고 연정훈은 조심스레 양시연을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연정훈은 그녀를 가슴 위에 편안히 눕히고 단단한 팔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연정훈은 침대 머리맡의 물을 들어 양시연의 입가에 가져다 두어 모금 먼저 마시게 하고 남은 물을 천천히 마셨다.양시연은 서서히 기운을 되찾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순간 막혀있던 사고의 흐름이 갑자기 뚫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정훈 씨, 갑자기 오게 된 이유가 정말로 나 보고 싶어서예요?”연정훈은 그녀를 꼭 안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다른 이유가 또 있을까?”양시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길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
남편이라는 단어는 사실 꽤 진지한 단어였지만 연정훈은 그 단어마저 가볍게 만들어버렸다.양시연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차라리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끝내 연정훈을 ‘남편’이라 부르지는 않았다.연정훈이 다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양시연은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녀의 눈빛은 애교와 질책이 섞여 있었다.“당신, 교수잖아요. 제대로 된 지식인이라면서 왜 맨날 이런 이상한 짓만 배워오는 거예요?”연정훈이 그녀의 손을 떼려 하자 양시연은 연정훈을 째려보며 손에 더 힘을 주었다.“멀리까지 와서 나 괴롭히려고 온 거예요?”연정훈은 목젖이 살짝 움직이며 양시연을 바라보았고 연정훈의 눈빛은 점점 깊어져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양시연은 마음속으로 흐뭇해하며 손을 내려놓고 연정훈의 입술에 상을 주듯 가볍게 입 맞췄다.“말 잘 들어요. 먼저 저녁 먹고 다 먹으면 샤워해요.”연정훈이 무언가 대꾸하려던 순간 양시연이 말을 끊었다.“비행기에서 씻었다고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연정훈은 말없이 양시연을 바라보았다.“...”양시연은 살짝 웃으며 한 번 더 연정훈의 입술에 입맞춤하고 그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장난스레 속삭였다.“씻었으면 조금 있다가 저랑 같이 샤워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정훈의 숨소리가 깊어졌고 곧바로 강렬한 입맞춤이 이어졌다.“알겠어. 밥부터 먹자.”양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연정훈의 반응에 흡족해했다.집에서 가져온 음식은 양지원 쪽에 있었지만 양시연은 굳이 가져오지 않고 새로 한 상을 주문했다. 그녀는 옆에 앉아 연정훈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가리키는 음식마다 그는 더 많이 먹었다.조용한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재회로 인한 설렘이 잦아들고 따스한 온기가 가득 차올랐고 3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연정훈의 아내로서 그의 곁에 앉아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연정훈은 그녀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걸 보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포크로 감자를 찍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내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보고 싶었죠. 그런데...”양시연이 부드럽게 말을 하던 중 연정훈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키스했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자 양시연은 잠시 놀라 눈을 감고 앓는 소리를 냈다.곧 그녀는 부드럽게 입을 벌려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서두르지 않는 그들의 키스는 부드럽고 길게 이어졌고 키스가 끝나자 양시연은 살짝 헐떡이며 촉촉해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두 볼이 붉게 물든 양시연은 발끝을 들어 연정훈의 목에 팔을 감고 손끝으로는 연정훈의 귀를 장난스럽게 간지럽히며 속삭였다.“이렇게 빨리 온 거 보면 전화 끊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 예매한 거 아니에요?”연정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여 아주머니가 반찬 준비하시는 걸 기다렸어.”양시연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듯했지만 그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왔다는 사실이 떠올라 걱정스레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요?”“비행기에서 먹었어.”“뭘 먹었는데요?”연정훈은 대답하려다 순간적으로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양시연이 그의 귀를 잡으며 말했다.“거짓말하지 마요.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진수빈 씨가 정훈 씨랑 같이 왔는데 방금 막 배달을 시키더라고요.”연정훈은 침묵했다.“...”그가 들킨 후 민망한 듯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하려 하자 양시연은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낮게 말했다.“장난치지 말고요. 우선 뭘 좀 먹고 씻고 푹 쉬어야 해요.”“안 피곤한데.”“그러면 정훈 씨...아!”양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정훈은 그녀를 갑작스럽게 들어 올렸고 그는 몇 걸음 만에 침대로 다가가 양시연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몸을 기울였다.양시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편히 누웠지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막았다.그녀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며 장난스럽게 입을 내밀었다.“나 보고 싶었다는 게 이런 거였어요?”‘뭐야. 온통 엉큼한 생각뿐이라니.’연정훈은 전화를 받은 뒤 감정이 북받쳐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왔다.비행기에서도 그녀에 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