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희수는 풀이 죽어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서유는 그녀가 온재빈의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추측했고, 그녀가 거들먹거리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곧이어 서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여기는 화장실이잖아요. 당연히 볼일 보러 온 거죠.”그녀의 말투 역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서유는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렇지 않고 최민지처럼 계속 참는다면 상대방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더 득의양양해질 것이다.서유의 말투에 온희수는 자연히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흥, 밀당하는 거야 뭐야? 일부러 숨어서 시후 오빠가 너 걱정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지? 똑똑히 말해줄게. 시후 오빠의 파트너가 됐다 해서 네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 봉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시후 오빠는 내 사람밖에 될 수 없다고!”온희수의 경고에 서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내가 여기에 숨은 건 그저 이승하를 피하기 위해서인데 무슨 밀당을 한다 그러는 거지?!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 아니야?’서유는 온희수에게 설명할 핑계도 대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아가씨, 전체적인 신분을 생각하면 아가씨도 김 대표님을 넘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 제 앞에서 굳이 존재감 찾을 필요 없습니다.”김시후는 이지민과 혼인을 할 예정이었고 온희수의 신분은 이지민에게 비하면 훨씬 못했기에 헛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하지만 온희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는 손을 들어 서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네가 뭔데? 네가 뭔데 온씨 가문의 아가씨인 내가 네 앞에서 존재감을 찾아?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그 뺨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서유은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는 온씨 가문 아가씨가 뜻밖에도 사람을 때릴 줄은 몰랐다.이로 인해 그녀는 갑작스럽게 뺨을 한 대 맞았다.서유는 그 자리에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이 발목을 잡았다.뺨을 한 대 맞았을 뿐인데 현
이승하는 손을 닦은 후 안색이 좋지 않은 서유를 바라보았다.“내가 너한테 경고했잖아. 김시후를 멀리하라고.”방금 이승하가 온씨 가문 대저택에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연회에 참석하러 온 줄 알았는데 그녀에게 따지러 왔을 줄이야.그가 수완이 뛰어난 건 알았지만 하루 만에 그녀와 김시후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낼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 일은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만약 연지유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집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 김시후와 함께 이런 곳으로 올 수나 있었을까.서유도 감출 생각이 없었고 사실대로 말했다.“저도 멀리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당신의 연지유 씨께서 기어코 저더러 김시후 씨를 접대하라고 하던데요.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돈을 배상하라고 하는데 저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와서 그를 접대할 수밖에 없었는걸요.”그녀의 말속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 앞에서 괴상야릇한 행동을 하지 말고 탓을 하려거든 연지유를 탓하라는 말이었다. 이승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피식 웃었다.“네가 김시후의 침대에 기어들지 않았다면 연지유가 너더러 그를 접대하라고 했을까?”이 말은 서유가 자진한 거란 말인가?역시나 연지유는 이승후의 여신님이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절대 그녀를 질책하지 않을 거니까.서유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승하는 서유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를 벽에 밀어 붙이고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봤다.“김시후가 방금 공개적으로 이씨 가문과의 결혼을 파기한 게 너의 베갯밑송사 때문은 아니고?”김시후가 이씨 가문과의 결혼을 파기했다니?서유는 잠시 멈칫하더니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그녀 자신은 왜 김시후가 혼인을 파기하게 할 만큼 대단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녀는 빨간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승하의 앞에서 해명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이승하는 그녀에게 더욱 밀착해 왔다. 청
이승하는 문을 나서기 전에 고개를 돌려 서유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김시후가 결혼을 파기했다고 해서 김씨 가문에서도 동의한 게 아니야. 김시후는 언제든지 이씨 가문 사위로 들어와야 할 거야. 너 침대에서 김시후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김시후가 널 위해서 온씨 가문과 대적하게 할 게 아니라면 말이야.”이승하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맞은편의 남자 화장실로 걸어갔다.그의 거만하고 낯선 뒷모습을 응시하며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매번 이승하를 대면할 때마다 그녀는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긴장이 감돌았다.그가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드러낼까 봐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 그녀는 다행히도 일시적인 통쾌감을 채우려고 의지와는 반대로 그에게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자신의 작은 속셈이 이승하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조롱하고 오해할지 알 수 없었다.서유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돌아서서 세면대 앞으로 가서 손을 씻는 척하며 밖으로 나갔다.서유를 찾으러 가는 내내 김시후는 온희수에게 시달려 짜증이 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때 물이 잔뜩 묻어 있는 손을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는 서유를 보자 그는 온희수를 옆으로 밀어내고 서유에게로 다가갔다.“서유 씨, 우리 먼저 돌아가요.”서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가운 시선으로 생각에 잠긴 듯 온희수를 힐끗 쳐다보았다.온희수는 자신이 방금 충동적으로 서유의 뺨을 때린 게 생각나 그녀가 김시후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봐 경고의 눈빛을 번뜩였다.서유는 온희수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는 그녀가 말할까 봐 두려워 절절매는 꼴이 조금 우스웠다. 그리고 온희수가 사람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지 알았다.서유는 온희수에게 따귀를 돌려주고 싶었지만 여기는 온씨 가문 영역이었고 만약 그녀가 모든 사람 앞에서 손찌검을 한다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그녀가 온희수를 괴롭힌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녀는 이슈가 되어 구설
서유는 아직도 김시후가 자신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에 몹시 놀라 있었다. 그러나 온희수가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모함하며 뒤집어씌우려고 하자 더 이상 따지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가 치밀었다. 서유가 막 온희수에게 자신이 뭐라고 욕했는지 물으려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희수 씨는 몇 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옳고 그름을 뒤집는 능력만 배웠나 보군요.”등 뒤에 있는 남자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불빛 아래에 서있는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서유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그가 자신을 위해 나서줬단 사실에 감격했지만, 고개를 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승하의 시선이 슬그머니 서유와 김시우가 잡은 손을 흘기며 어둡고 흐릿한 기색을 내비쳤다.그는 계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와 온희수의 앞에 다가와 멈춰 섰다.“조금 전 온희수 씨가 사람을 모욕할 때 제가 마침 그곳을 지나갔거든요.” 이승하가 인정사정없이 온희수를 까발리자, 그녀의 얼굴은 삽시에 사색이 되어 계속 변명하려 애썼다. 이승하는 차디찬 요염한 눈으로 담담하게 그녀를 흘겨봤다.온희수는 이렇게 무서운 눈길은 생전 처음 마주했다. 그의 눈은 정말 예뻤지만, 그 속에 비친 기색은 사람을 얼려 죽일 것만 같았다. 그녀는 겁을 먹고 즉시 입을 다물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이때 온재빈은 그제야 자기 여동생에게 일이 닥친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뛰어왔다.온희수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이승하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온씨 가문 가정 교육은 실로 봐줄 만하군요.”이승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한 무리의 경호원을 데리고 온씨 저택을 떠났다.계속 옆에서 쇼를 구경하고 있던 이연석은 사색에 잠겨 둘째 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둘째 형의 차갑고 덤덤한 성격상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서서 온씨 가문 아가
하지만 온희수는 당연히 서유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고 그저 그녀를 자기 얼굴을 깎아내린 장본인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연회가 끝나자 온희수는 온기태와 온재빈에게 불만을 쏟아냈다.“아빠, 오빠, 날 위해 정의 구현을 해줘야 해요!”온기태는 온희수의 칭얼대며 우는 소리에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자기의 화도 다스리지 못하고 이승하에게 밉보이고는 뭘 잘했다고 울어!”온희수는 순간 울음을 뚝 그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온기태를 바라보았다.“아빠, 지금 절 때린 거예요?”“넌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승하에게 밉보이고 김시후가 데리고 온 여자에게 감히 함부로 손찌검해? 한 사람은 서울에서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부산에서 비바람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넌 그런 두 사람에게 다 밉보인 거고!”온기태는 화가나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온몸을 떨었다. 만약 온재빈이 말리지 않았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또 한 번 온희수에게 지독한 교훈을 줬을 것이다.온희수는 항상 자신을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며 지켜주던 아버지가 외부인 때문에 저에게 손찌검했다는 사실에 화가나 얼굴을 감싸쥐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온재빈은 자기 여동생이 토라져서 나가자, 애를 태우며 뒤를 쫓아갔다.온씨 가문의 맞선 연회가 난장판이 되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서유는 김시후의 손에 이끌려 저택을 나갔다.김태진이 차를 가지러 가고 김시후는 서유의 손을 잡고 문 앞에서 기다렸다.서유는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보며 자연스럽게 빼냈다.부드러운 작은 손이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김시후의 눈에는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서유는 방금 그가 자신을 도와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김 대표님, 아까는 고마웠어요.”그녀의 낯설고 예의 바른 목소리에 김시후의 실망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서유의 부어오른 얼굴을 보며 자책했다.“제가 미안하죠. 저만 아니었다면 서유 씨가 다칠 일은 없었을 거잖아요.”서유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괜찮아요.”
이연석은 백미러를 통해 차갑고 괴리감이 느껴지는 이승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한참 망설인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형, 언제 연지유랑 결혼할 거야?”이연석은 이승하와 연지유가 결혼하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 더 이상 걱정되고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이승하는 웃고 있는 듯했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다.“너도 내가 그 여자랑 결혼하길 바라는 거야?”이연석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바라지 않아. 하지만...”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이연석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 이승하가 갑자기 담담하게 말했다.“결혼할 거야.”그의 목소리는 몹시 냉담했고 마치 로봇처럼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연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니 둘째 형은 한 번도 기뻐했던 적이 없었다...김시후는 서유를 집으로 데려다주고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에게 연고를 건네줬다.“부기를 빠지게 하는 거예요.”서유는 감사 인사를 하고는 거절했다.“집에 가서 얼음찜질하면 돼요.”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김시후는 그녀의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응시하며 눈에는 다시 쓸쓸함이 드리웠다.김시후는 서유가 자신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며 심지어 약간의 적개심까지 품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기자, 김태진이 그에게 주의를 줬다.“김 대표님, 서유 씨는 지금 밀당을 하는 거예요. 절대 속으시면 안 됩니다.”김시후는 기억을 잃은 뒤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밀당이 뭔지 잘 몰랐고 김태진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반박했다.“그냥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은데 무슨 밀당이야.”“서유 씨가 일부러 미워하는 척하는 것은 대표님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예요. 대표님이 안절부절못할 때면 다시 멀어지는 척했다가 일단 대표님이 서유 씨에게 마음을 다 내어주면 그렇게 그녀의 손에 잡히게 되는 거죠. 게다가...”그는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게다가 아까 서유 씨가 잔꾀를 부린 것을 발견하지
꿈에서 깨어난 순간, 서유는 너무 황당했다. 어떻게 이런 꿈을 꾸었을까?그녀는 손을 뻗어 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과 따뜻한 붉은 입술을 만졌다.분명 어제 실수로 그의 얼굴에 뽀뽀해서 이런 창피한 꿈을 꿨을 것이다.지난 5년 동안 이미 그와의 스킨십에 익숙해졌으니 아직 몸이 적응이 안 됐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갑자기 김시후의 전화가 걸려 왔다.“김 대표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김시후는 그녀의 공적인 말투를 듣고 좀 불편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고 대답했다.“서유 씨, 오늘 김 비서가 없으니 저와 함께 프로젝트 입찰에 가주셔야겠어요.”‘김시후의 그림자 같은 존재인 김 비서가 없다고?’서유는 조금 의심이 들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입찰이 끝나면 그는 곧바로 부산으로 돌아갈 것이다.이 생각에 살짝 기뻐진 그녀는 한마디 보탰다.“그럼 기다리세요!”‘이렇게 기뻐한다고?’김시후는 그녀의 감정 변화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급하지 않아요. 입찰은 열 시에 시작하니 아직 일러요.”서유가 시간을 보니 이제 아침 7시였다. ‘설마 그 꿈 때문에 이렇게 빨리 일어난 것일까?’그 꿈을 생각하자 서유는 얼굴이 다시 붉어졌고, 얼른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어젯밤에 기절하다시피 잠이든 후로 줄곧 카톡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정가혜가 자신을 찾았을까 봐 급히 카톡을 확인했다.정가혜는 그녀에게 풍경 사진 몇 장과 짧은 동영상을 보냈다.서유는 일일이 확인하고는 답장했다.답장을 마친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업무 채팅방에 밀려 아래로 내려간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공백으로 된 그의 프로필 사진은 마치 베일에 싸인 김씨의 신분처럼 추측하기 어려웠다.그녀는 그와의 채팅 기록을 열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답장한 그 메시지에 머물러 있었다.그날 이후로 김씨는 그녀에게 그 어떤 메시지도 전화도 하지 않았다.서유는 좀 이상했다. 분명 그날에는 미친 듯이 수백 통의 전화를 걸어오더니, 그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빌딩을 멍하니 보고 있자 김시후가 그녀를 가볍게 밀었다.“서유 씨, 저 따라오세요.”서유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시후의 뒤를 따라 현대식 느낌이 물씬 나는 건물로 들어섰다.JS 그룹의 보안 시스템은 아주 엄격했다. 외부인은 반드시 신원을 확인해야 들어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았다.그들이 하나씩 신원을 확인하고 있을 때, 연지유가 임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그녀는 김시후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는 그의 뒤를 따라오는 서유를 발견했다.“김 대표님, 제가 서유 씨와 몇 마디 해도 괜찮을까요?”“연 대표님 회사 사람인데 당연히 괜찮죠.”김시후는 연지유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기에는 예의 바르나, 사실 비꼬는 듯한 말투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그는 서유에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화진 그룹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김시후가 들어가자, 연지유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말했다.“서유 씨, 보아하니 김 대표를 잘 모시고 있나 봐?”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더니, 또 경멸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유를 보았다.“화진 그룹의 입찰은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김 대표가 서유 씨를 데려온 걸 보면 분명 서유 씨를 좋게 보고 있다는 뜻이잖아?”좋게 보고 있다는 말을 그녀는 일부러 끝소리를 잡아당겨 말했다. 마치 업무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유혹하는 능력을 인정하고 좋게 보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서유는 그녀의 말에서 비아냥거림을 알아챘지만, 그녀와 더 이상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지유는 서유가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표정이 차가워졌지만 곧 온화하고 대범한 미소를 지었다.“아주 잘하고 있으니 나중에 월급 인상해 줄게.”“월급 인상보다는 사직 신청서만 승인해 주시면 돼요.”서유의 단호한 거절에 연지유는 좀 난처해졌다.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턱을 치켜올리고는 서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서유 씨, 김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