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수억은 훨씬 넘게 벌고 자산도 수백억대이긴 하지만 2천만 원을 이리 잃게 되니 정가혜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너무 허무하게 쓰여버린 것 같아서 말이다. 왜 주서희와 이런 내기를 한 것인지 모르겠다.정말 유치하다.소파에 앉아 쿠션을 잡고는 이를 갈며 바보 같은 자신을 막 뭐라 하는 그녀를 보며 연이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웃음을 보고 주서희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가혜 씨, 빨리 봐요. 연이가 웃었어요.”그 모습을 본 정가혜도 손을 내밀어 연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네가 웃었으니 이 돈도 값어치가 있는 거야.”주서희는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리고 한 손으로 뺨을 괴고는 연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다가 고개를 숙이고 레고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혜 씨,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이에게 주려고 했었다. 근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궁이 없다. 모성애가 가득 찬 온화한 그녀의 눈빛에 왠지 모르게 우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주서희의 모습에 정가혜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서희 씨, 윤 선생님이랑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입양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니 낳지 못한다면 아이를 입양해서 내 자식으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봤어요. 결혼 후에 한 명 입양할 생각이에요.”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연이와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를 너무 갖고 싶었다. 낳을 수 없다면 입양해서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강한 여인이라 아쉬움이 있어도 어떻게든 해결 방법부터 찾아내는 사람이었다.사랑에 용감한 그녀는 설령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그녀는 또다시 마음을 열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가혜는 그녀와 달랐다. 지난 몇 년 동안 잘 버텨왔고 강한 여자처럼 보여도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사
정가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카펫 위에 앉아 주서희에게 물었다.“참, 지난번에 나한테 의사 선생님 소개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제 해줄 거예요?”그러자 주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소개팅 다시는 안 할 거라면서요?”지난번 정가혜 클럽의 하 매니저가 그녀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겠다 해놓고서는 자신이 소개팅 상대로 나왔었다.정가혜는 그날 카페에서 자신에게 고백하는 하 매니저를 보며 그 상황이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또 웃기기도 했다.설마 하 매니저가 자신을 몇 년간 짝사랑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하지만 상황만을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다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잘 어울리기는 했다. 다만 그녀는 하 매니저가 전혀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성실하고 우직한 사업 파트너 같은 느낌뿐이었다.그와 사업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스킨십이나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했다.그날 정가혜는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이니 완곡하게 상대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나타난 이연석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이연석 역시 이씨 집안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녀를 안고 키스부터 해버렸다.명확하게 두 사람 사이를 증명하는 그 장면을 보고 하 매니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가방을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하 매니저에게 이연석 같은 재벌 2세와 한 여자를 빼앗을 담 같은 건 없었다. 그 후로 그는 몇 마디 협박으로 더 이상 클럽에서 일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간 짝사랑한 것을 고백한 후 정가혜에게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아버렸으니 더욱더 클럽에서 일할 수 없었다.정가혜는 그를 몇 번이고 설득하려 해봤지만 단호한 그의 태도에 결국 보내주기로 했다.단 한 번의 소개팅으로 일 잘하던 사람을 잃어 정가혜는 홧김에 더 이상 소개팅 같은 건 안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주서희를 보니 자신도 일편단심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일평생
요 며칠 서유는 줄곧 이승하의 옆에서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었다. 그러다 상처에 딱지가 생긴 걸 보고는 계속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았다.그녀는 이 교수가 약을 갈아준 뒤 물었다.“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역시 흉터가 남는 걸까요?”“상처가 얕은 건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 테지만 크고 깊은 건 조금 힘들 것 같네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일 좋은 약으로 어떻게든 흉지지 않게 노력해볼게요.”확답은 아니었지만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 의사라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서유는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다.“감사합니다, 이 교수님.”“뭘요.”이 교수는 서유와 얘기를 마친 뒤 이승하에게 인사하고는 의사들을 데리고 떠났다.서유는 그들이 떠난 뒤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내일모레면 지현우가 땅에 묻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영국으로 가서 언니 유골함을 그쪽에 보내주려고요.”지현우의 아버지는 오늘 아침 그녀에게 합장할 시간에 늦지 않게 빨리 영국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케이시는 Y 국 왕실의 손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져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들어가고 얼마 가지 않아 자살로 죽어버렸다.케이시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를 죽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심혜진밖에 없다.그녀는 지현우가 죽으면 케이시도 죽여버리겠다고 했었으니까. 심씨 가문 외동딸인 그녀가 내린 결정이라 지씨 가문에서 아무리 케이시를 보호하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김초희와 지현우의 일은 함께 땅속에 묻히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나게 된다.내일 바로 Y 국으로 간다는 그녀의 말에 노트북을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멈춰버렸다.이승하는 시선을 들어 서유를 보며 물었다.“꼭 가야만 하는 거야?”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언니를 위해 하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줘요.”이승하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Y 국으로 가는 전용기 준비시켜 놔.”그는 지시를 내린 뒤 서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는 서유는 유골함을 꼭 안고 그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은 같이 안 오셨어요?”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아 보이자 연이에게 시선을 주었다.연이는 이승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서둘러 눈을 피하며 손에 든 인형을 바라보았다.이승하는 그저 한번 보기만 할 뿐 곧바로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연이는 이승하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고 나서야 다시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아이는 지금 이승하의 반대편에 앉아 있기에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눈앞에 있는 아저씨는 어딘가 야윈 듯했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었다.다른 사람과 비교도 안될 만큼 마치 천사들의 가호를 받는 사람처럼 그렇게 얼굴에서 빛이 났다.연이는 이승하를 한참이나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제일 소중한 인형을 그에게 건네주었다.사방이 어두운 작은 방에 갇혀 거의 죽을 뻔했던 그때 이승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그는 햇빛을 등진 채 마치 신의 사자처럼 걸어와 아이의 앞에 섰다.그러고는 뒤따라온 사람들에게 철창을 열게 만든 다음 총을 허리춤에 넣어두고 단숨에 연이를 품에 끌어안았다.연이는 그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바로 큰 소리로 울어버렸다.“아저씨, 나 목말라요. 그리고 배고파요...”그때도 이승하는 아이의 눈물을 눈앞에서 보고는 지금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저 큰 손으로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연이에게 이승하는 차갑고 냉랭한 사람으로 비쳤다. 아이를 앞에 두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으니까.하지만 그날 울고 있던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며 안정감을 주었을 때 아이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안심되었다.이승하는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이었고 그건 서유를 향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건 연이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연이는 이 아저씨라면 엄마가 남기고 간 인형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초희는 생전
전용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S 조직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이승하 일행의 뒤를 따랐다.서유는 연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은 채 세 명은 그렇게 유유히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이었다.남자는 고고하고 위엄있었고 여자는 우아하고 단아하며 아이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게다가 그들 위에는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중 선두에 선 두 명 역시 꿀리지 않는 외모였다.그들의 등장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멈춰 구경했고 또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이승하 일행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차량 쪽으로 걸어가 공항을 벗어났다.그들은 Y 국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그 다음 날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묘원으로 향했다.묘원에 도착해보니 지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이씨 가문과 지씨 가문의 선대 가주들은 비즈니스적으로 많이 부딪혔기에 이승하는 연이를 데리고 차 안에 남았다.서유는 유골함을 들고 심이준과 조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소수빈과 그가 데려온 경호원들의 안내에 따라 서서히 안쪽으로 다가갔다.지현우의 묘비 앞, 지강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아내 심혜진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 뒤로 가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애도를 표했다.“회장님, 사모님, 김초희 씨의 유골함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누군가의 언질에 지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서유가 유골함을 든 것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서유는 사람들을 지나 지강현과 심혜진의 앞에선 다음 유골함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심혜진은 김초희와 지현우의 합장이 못마땅한 듯 김초희의 유골함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지강현 역시 그저 눈길 한번 주더니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말했다.“넣어 놔.”남자는 서유의 손에서 유골함을 건네받고는 지현우와 함께 묻어주었다.서유는 묘비에 새겨진 ‘지현우의 아내 김초희’라는 글과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이승하의 그 말에 연이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는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연이도 아빠랑 엄마한테 꽃 주러 가고 싶어요.”왕실 사람들이 죽었을 때 묘비에 국화꽃을 올려놓았던 것을 떠올린 연이가 말했다.딸인 자신이 엄마와 아빠에게 꽃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이승하가 뒤로 손짓하자 경호원 중 한 명이 그에게 국화꽃을 건네주었다. 한 송이가 아닌 여러 송이라 조금 무거웠지만 연이는 거뜬하게 안아 들었다.이승하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연이를 내려준 다음 힘든 몸을 이끌고 자신 역시 차에서 내렸다.택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황급하게 그를 제지했다.“그쪽으로 가면 지씨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이승하는 한 손을 차체에 올려놓고 안에 있는 택이를 보며 말했다.“저들은 날 어떻게 못 해.”만약 지씨 가문에서 이승하를 해하려 했다면 전용기에서 내렸을 때 처리하려 들었을 것이다.이승하가 몸을 돌려 안쪽으로 가려는데 조그마한 아이손이 갑자기 손가락을 잡아 왔다.이에 그는 시선을 내려 뒤꿈치를 한껏 올리고 어떻게서든 손을 잡으려는 아이를 보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빼버렸다.그러고는 아이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기억해.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네 이모뿐이야.”연이는 그 말에 삐진 듯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 씩씩대며 서유 쪽으로 달려갔다.전용기에서 이승하와는 말도 섞지 않겠다며 다짐했던 게 바로 어제였지만 결국 아까 먼저 말을 건 건 아이였다. 그 생각도 함께 떠오른 것인지 연이는 이제는 정말 말을 걸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연이는 꽃을 든 채 사람들 틈을 가로질러 서유의 곁으로 다가왔다.아이의 등장에 지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다.“어머, 저 아이 케이시 딸 아니에요?”“아니래요. 제대로 조사해보니 현우 딸이래요.”“듣기로는 케이시가 중간에서 손을 쓴 바람에 현우는 여태 자기한테 딸이 있었는지도 몰랐대요. 아이도 자기 아빠는 줄곧 케이시라고 믿었다고 하더
서유는 연이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가 그 뒤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시선이 멈춰버렸다.남자는 검은색 양복 차림에 조각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유는 이승하가 차에서 내려 굳이 이곳으로 온 것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다시 연이를 바라보았다.원래 그녀는 지씨 가문 사람들이 다 떠난 뒤 연이를 데리고 이곳에 오려고 했었지만 이승하의 여유 넘치는 얼굴을 보니 지씨 가문 사람들에게 연이를 빼앗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그렇다면 지금은 아이가 사람들과 함께 부모를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도리다.서유는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연이야, 연이 엄마 여기 있어.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마음껏 해.”연이는 묘비에 있는 김초희와 지현우의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앙증맞은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두 사람 얼굴을 쓰다듬었다.“엄마, 아빠, 천국에서 조금만 더 연이 기다려요. 다음 생에 또 태어나도 연이는 엄마랑 아빠 아이 할래요.”서유는 연이의 말에 찡해졌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물었다.“연이야, 현우 삼촌이 아빠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연이는 서유를 보며 대답했다.“삼촌은 끝까지 인정 안 했지만 연이는 알 수 있어요.”아이는 일반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했다. 게다가 이런 복잡한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기도 했다.지강현과 심혜진은 똑 부러진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더욱더 환희에 차 허리를 굽혀 아이를 끌어안으려고 했다.그러나 낯선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연이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서유의 뒤로 숨어버렸다.“아이가 이런 상황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러니 주의 부탁드릴게요.”서유는 연이의 앞을 막아서고는 침착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연약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서는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지씨 부부도 교양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무리하게 아이를 빼앗으려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도 않았다.“서유 씨, 현우와 초희의
결국, 지강현이 내린 결론은 감정 면에서 이승하도 지현우와 똑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여자에게 꽂히면 곧 죽어도 다른 곳은 안 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이런 성격은 어릴 때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그러니 성인이 되고서도 한 여자에 목을 맨다고 지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그는 마치 단기간에 이승하의 모든 것을 파악이라도 한 양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서유 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아이의 이모부가 되는 격이니 이 대표도 후견권 얘기에 참석할 자격이 되죠. 자리를 옮겨 함께 얘기 나눌까요?”원수의 아들에게 이 정도 얘기한 건 지강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였다.그러니 도리대로 라면 이승하도 지금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예를 갖춰야 한다.하지만 그는 지강현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마디만 던졌다.“그 문제는 제 변호사와 얘기하시죠.”그러고는 다시 서유에게로 돌아섰다.“끝났어?”서유는 고개를 숙여 연이에게 물었다.“엄마랑 아빠한테 더 할 얘기 없어?”연이는 지씨 부부가 자신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서유는 그걸 보더니 연이의 손을 잡고 이승하에게 말했다.“이제 가요.”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지나쳐 차량이 세워진 쪽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뒤에 있던 심이준과 조지도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마지막으로 묘비를 한번 보고는 서유네를 따라 차량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일행이 묘원을 벗어나 차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심혜진이 뒤쫓아와 서유를 불러세웠다.“잠시만요. 서유 씨 어머니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차에 오르려던 서유는 어머니라는 세글자에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왜 당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냐는 눈길을 보냈다.이승하도 들어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심혜진 쪽을 바라보았다.“승하 씨, 잠시만 얘기 좀 나누고 와도 돼요?”이승하는 서유의 얼굴을 보더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같이 가자.”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승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