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수억은 훨씬 넘게 벌고 자산도 수백억대이긴 하지만 2천만 원을 이리 잃게 되니 정가혜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너무 허무하게 쓰여버린 것 같아서 말이다. 왜 주서희와 이런 내기를 한 것인지 모르겠다.정말 유치하다.소파에 앉아 쿠션을 잡고는 이를 갈며 바보 같은 자신을 막 뭐라 하는 그녀를 보며 연이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웃음을 보고 주서희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가혜 씨, 빨리 봐요. 연이가 웃었어요.”그 모습을 본 정가혜도 손을 내밀어 연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그래, 네가 웃었으니 이 돈도 값어치가 있는 거야.”주서희는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리고 한 손으로 뺨을 괴고는 연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다가 고개를 숙이고 레고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혜 씨,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이에게 주려고 했었다. 근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자궁이 없다. 모성애가 가득 찬 온화한 그녀의 눈빛에 왠지 모르게 우울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주서희의 모습에 정가혜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서희 씨, 윤 선생님이랑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입양할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니 낳지 못한다면 아이를 입양해서 내 자식으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봤어요. 결혼 후에 한 명 입양할 생각이에요.”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연이와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를 너무 갖고 싶었다. 낳을 수 없다면 입양해서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강한 여인이라 아쉬움이 있어도 어떻게든 해결 방법부터 찾아내는 사람이었다.사랑에 용감한 그녀는 설령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그녀는 또다시 마음을 열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가혜는 그녀와 달랐다. 지난 몇 년 동안 잘 버텨왔고 강한 여자처럼 보여도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사
정가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카펫 위에 앉아 주서희에게 물었다.“참, 지난번에 나한테 의사 선생님 소개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언제 해줄 거예요?”그러자 주서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소개팅 다시는 안 할 거라면서요?”지난번 정가혜 클럽의 하 매니저가 그녀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겠다 해놓고서는 자신이 소개팅 상대로 나왔었다.정가혜는 그날 카페에서 자신에게 고백하는 하 매니저를 보며 그 상황이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또 웃기기도 했다.설마 하 매니저가 자신을 몇 년간 짝사랑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하지만 상황만을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다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잘 어울리기는 했다. 다만 그녀는 하 매니저가 전혀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그저 성실하고 우직한 사업 파트너 같은 느낌뿐이었다.그와 사업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스킨십이나 그 이상의 관계를 맺는 건 불가능했다.그날 정가혜는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이니 완곡하게 상대를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나타난 이연석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이연석 역시 이씨 집안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녀를 안고 키스부터 해버렸다.명확하게 두 사람 사이를 증명하는 그 장면을 보고 하 매니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 가방을 들고 자리를 벗어났다.하 매니저에게 이연석 같은 재벌 2세와 한 여자를 빼앗을 담 같은 건 없었다. 그 후로 그는 몇 마디 협박으로 더 이상 클럽에서 일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그간 짝사랑한 것을 고백한 후 정가혜에게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도 알아버렸으니 더욱더 클럽에서 일할 수 없었다.정가혜는 그를 몇 번이고 설득하려 해봤지만 단호한 그의 태도에 결국 보내주기로 했다.단 한 번의 소개팅으로 일 잘하던 사람을 잃어 정가혜는 홧김에 더 이상 소개팅 같은 건 안 하겠다고 했다.하지만 주서희를 보니 자신도 일편단심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일평생
요 며칠 서유는 줄곧 이승하의 옆에서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었다. 그러다 상처에 딱지가 생긴 걸 보고는 계속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았다.그녀는 이 교수가 약을 갈아준 뒤 물었다.“상처가 다 아물고 나면 역시 흉터가 남는 걸까요?”“상처가 얕은 건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질 테지만 크고 깊은 건 조금 힘들 것 같네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일 좋은 약으로 어떻게든 흉지지 않게 노력해볼게요.”확답은 아니었지만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 의사라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서유는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천천히 풀었다.“감사합니다, 이 교수님.”“뭘요.”이 교수는 서유와 얘기를 마친 뒤 이승하에게 인사하고는 의사들을 데리고 떠났다.서유는 그들이 떠난 뒤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내일모레면 지현우가 땅에 묻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일 영국으로 가서 언니 유골함을 그쪽에 보내주려고요.”지현우의 아버지는 오늘 아침 그녀에게 합장할 시간에 늦지 않게 빨리 영국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케이시는 Y 국 왕실의 손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져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들어가고 얼마 가지 않아 자살로 죽어버렸다.케이시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를 죽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심혜진밖에 없다.그녀는 지현우가 죽으면 케이시도 죽여버리겠다고 했었으니까. 심씨 가문 외동딸인 그녀가 내린 결정이라 지씨 가문에서 아무리 케이시를 보호하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김초희와 지현우의 일은 함께 땅속에 묻히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나게 된다.내일 바로 Y 국으로 간다는 그녀의 말에 노트북을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멈춰버렸다.이승하는 시선을 들어 서유를 보며 물었다.“꼭 가야만 하는 거야?”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언니를 위해 하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해줘요.”이승하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Y 국으로 가는 전용기 준비시켜 놔.”그는 지시를 내린 뒤 서
사태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는 서유는 유골함을 꼭 안고 그에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은 같이 안 오셨어요?”이승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불안감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아 보이자 연이에게 시선을 주었다.연이는 이승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서둘러 눈을 피하며 손에 든 인형을 바라보았다.이승하는 그저 한번 보기만 할 뿐 곧바로 다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연이는 이승하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가고 나서야 다시 몰래 그를 훔쳐보았다.아이는 지금 이승하의 반대편에 앉아 있기에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눈앞에 있는 아저씨는 어딘가 야윈 듯했지만 여전히 잘생기고 멋있었다.다른 사람과 비교도 안될 만큼 마치 천사들의 가호를 받는 사람처럼 그렇게 얼굴에서 빛이 났다.연이는 이승하를 한참이나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제일 소중한 인형을 그에게 건네주었다.사방이 어두운 작은 방에 갇혀 거의 죽을 뻔했던 그때 이승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었다.그는 햇빛을 등진 채 마치 신의 사자처럼 걸어와 아이의 앞에 섰다.그러고는 뒤따라온 사람들에게 철창을 열게 만든 다음 총을 허리춤에 넣어두고 단숨에 연이를 품에 끌어안았다.연이는 그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바로 큰 소리로 울어버렸다.“아저씨, 나 목말라요. 그리고 배고파요...”그때도 이승하는 아이의 눈물을 눈앞에서 보고는 지금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저 큰 손으로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연이에게 이승하는 차갑고 냉랭한 사람으로 비쳤다. 아이를 앞에 두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으니까.하지만 그날 울고 있던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며 안정감을 주었을 때 아이는 그 어떤 말보다 더 안심되었다.이승하는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이었고 그건 서유를 향한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언제 어디서나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건 연이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연이는 이 아저씨라면 엄마가 남기고 간 인형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초희는 생전
전용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S 조직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이승하 일행의 뒤를 따랐다.서유는 연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은 채 세 명은 그렇게 유유히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이었다.남자는 고고하고 위엄있었고 여자는 우아하고 단아하며 아이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게다가 그들 위에는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그중 선두에 선 두 명 역시 꿀리지 않는 외모였다.그들의 등장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멈춰 구경했고 또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기도 했다.이승하 일행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차량 쪽으로 걸어가 공항을 벗어났다.그들은 Y 국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 그 다음 날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고 묘원으로 향했다.묘원에 도착해보니 지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이씨 가문과 지씨 가문의 선대 가주들은 비즈니스적으로 많이 부딪혔기에 이승하는 연이를 데리고 차 안에 남았다.서유는 유골함을 들고 심이준과 조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소수빈과 그가 데려온 경호원들의 안내에 따라 서서히 안쪽으로 다가갔다.지현우의 묘비 앞, 지강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아내 심혜진은 대성통곡을 했다. 그 뒤로 가문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애도를 표했다.“회장님, 사모님, 김초희 씨의 유골함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누군가의 언질에 지씨 가문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서유가 유골함을 든 것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서유는 사람들을 지나 지강현과 심혜진의 앞에선 다음 유골함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심혜진은 김초희와 지현우의 합장이 못마땅한 듯 김초희의 유골함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지강현 역시 그저 눈길 한번 주더니 옆에 있는 한 남자에게 말했다.“넣어 놔.”남자는 서유의 손에서 유골함을 건네받고는 지현우와 함께 묻어주었다.서유는 묘비에 새겨진 ‘지현우의 아내 김초희’라는 글과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이승하의 그 말에 연이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는지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끄덕였다.“연이도 아빠랑 엄마한테 꽃 주러 가고 싶어요.”왕실 사람들이 죽었을 때 묘비에 국화꽃을 올려놓았던 것을 떠올린 연이가 말했다.딸인 자신이 엄마와 아빠에게 꽃을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이승하가 뒤로 손짓하자 경호원 중 한 명이 그에게 국화꽃을 건네주었다. 한 송이가 아닌 여러 송이라 조금 무거웠지만 연이는 거뜬하게 안아 들었다.이승하는 차 문을 열고 먼저 연이를 내려준 다음 힘든 몸을 이끌고 자신 역시 차에서 내렸다.택이는 그 모습을 보더니 황급하게 그를 제지했다.“그쪽으로 가면 지씨 가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릅니다.”이승하는 한 손을 차체에 올려놓고 안에 있는 택이를 보며 말했다.“저들은 날 어떻게 못 해.”만약 지씨 가문에서 이승하를 해하려 했다면 전용기에서 내렸을 때 처리하려 들었을 것이다.이승하가 몸을 돌려 안쪽으로 가려는데 조그마한 아이손이 갑자기 손가락을 잡아 왔다.이에 그는 시선을 내려 뒤꿈치를 한껏 올리고 어떻게서든 손을 잡으려는 아이를 보더니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빼버렸다.그러고는 아이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기억해. 내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네 이모뿐이야.”연이는 그 말에 삐진 듯 볼을 한껏 부풀리더니 씩씩대며 서유 쪽으로 달려갔다.전용기에서 이승하와는 말도 섞지 않겠다며 다짐했던 게 바로 어제였지만 결국 아까 먼저 말을 건 건 아이였다. 그 생각도 함께 떠오른 것인지 연이는 이제는 정말 말을 걸지 않겠다며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연이는 꽃을 든 채 사람들 틈을 가로질러 서유의 곁으로 다가왔다.아이의 등장에 지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다.“어머, 저 아이 케이시 딸 아니에요?”“아니래요. 제대로 조사해보니 현우 딸이래요.”“듣기로는 케이시가 중간에서 손을 쓴 바람에 현우는 여태 자기한테 딸이 있었는지도 몰랐대요. 아이도 자기 아빠는 줄곧 케이시라고 믿었다고 하더
서유는 연이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가 그 뒤로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시선이 멈춰버렸다.남자는 검은색 양복 차림에 조각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유는 이승하가 차에서 내려 굳이 이곳으로 온 것을 보고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다시 연이를 바라보았다.원래 그녀는 지씨 가문 사람들이 다 떠난 뒤 연이를 데리고 이곳에 오려고 했었지만 이승하의 여유 넘치는 얼굴을 보니 지씨 가문 사람들에게 연이를 빼앗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그렇다면 지금은 아이가 사람들과 함께 부모를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도리다.서유는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연이야, 연이 엄마 여기 있어.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마음껏 해.”연이는 묘비에 있는 김초희와 지현우의 사진을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앙증맞은 손을 내밀어 부드럽게 두 사람 얼굴을 쓰다듬었다.“엄마, 아빠, 천국에서 조금만 더 연이 기다려요. 다음 생에 또 태어나도 연이는 엄마랑 아빠 아이 할래요.”서유는 연이의 말에 찡해졌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물었다.“연이야, 현우 삼촌이 아빠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연이는 서유를 보며 대답했다.“삼촌은 끝까지 인정 안 했지만 연이는 알 수 있어요.”아이는 일반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했다. 게다가 이런 복잡한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크기도 했다.지강현과 심혜진은 똑 부러진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더욱더 환희에 차 허리를 굽혀 아이를 끌어안으려고 했다.그러나 낯선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연이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서유의 뒤로 숨어버렸다.“아이가 이런 상황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러니 주의 부탁드릴게요.”서유는 연이의 앞을 막아서고는 침착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연약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눈에서는 경계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지씨 부부도 교양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무리하게 아이를 빼앗으려 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도 않았다.“서유 씨, 현우와 초희의
결국, 지강현이 내린 결론은 감정 면에서 이승하도 지현우와 똑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 여자에게 꽂히면 곧 죽어도 다른 곳은 안 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이런 성격은 어릴 때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그러니 성인이 되고서도 한 여자에 목을 맨다고 지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그는 마치 단기간에 이승하의 모든 것을 파악이라도 한 양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서유 씨를 아내로 맞이하면 아이의 이모부가 되는 격이니 이 대표도 후견권 얘기에 참석할 자격이 되죠. 자리를 옮겨 함께 얘기 나눌까요?”원수의 아들에게 이 정도 얘기한 건 지강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였다.그러니 도리대로 라면 이승하도 지금은 아버지뻘 되는 사람 앞에서 예를 갖춰야 한다.하지만 그는 지강현 쪽은 보지도 않은 채 한마디만 던졌다.“그 문제는 제 변호사와 얘기하시죠.”그러고는 다시 서유에게로 돌아섰다.“끝났어?”서유는 고개를 숙여 연이에게 물었다.“엄마랑 아빠한테 더 할 얘기 없어?”연이는 지씨 부부가 자신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서유는 그걸 보더니 연이의 손을 잡고 이승하에게 말했다.“이제 가요.”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지나쳐 차량이 세워진 쪽으로 향했다.두 사람이 떠나자 뒤에 있던 심이준과 조지도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마지막으로 묘비를 한번 보고는 서유네를 따라 차량 쪽으로 향했다.그렇게 일행이 묘원을 벗어나 차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심혜진이 뒤쫓아와 서유를 불러세웠다.“잠시만요. 서유 씨 어머니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차에 오르려던 서유는 어머니라는 세글자에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왜 당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냐는 눈길을 보냈다.이승하도 들어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심혜진 쪽을 바라보았다.“승하 씨, 잠시만 얘기 좀 나누고 와도 돼요?”이승하는 서유의 얼굴을 보더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같이 가자.”서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승하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