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의 말에 자식들까지 물에 빠뜨린 이들은 후회막심이었다.JS 그룹에 계속 있게 되면 나중에 공을 세워 다시 주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스스로 제 발등을 찍고 자식들의 앞길까지 망친 꼴이 되고 말았다. 한편,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은 사람들은 다행히 자손들에게까지 화가 미치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들이 먼저 나서서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원치 않은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인내심이 바닥난 이승하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1분 다 됐습니다.” 그 싸늘한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경호원들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고 놀란 사람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입장을 표명했다. “난 돈 받을게.”“나도.”“그리고 나도.”잠시 후,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 자리를 뜨려 하는데 가운데 앉아 있던 남자가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은 듯 그들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회사에서 쫓겨난 마당에 또 무슨 일인데? 남아서 저녁이라도 먹으라는 거야?이승하는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차갑게 입을 열었다.“사과하셔야죠.”그중 선두에 선 한 남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사과라니?”그가 고개를 들고 그 남자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제 와이프한테 사과하셔야죠.”그 말에 남자는 흠칫했다. 사석에서 몇 마디 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한 가문의 권력자로서 여자를 위해 이러는 건 크나큰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가운데 앉아 있던 이승하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한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 와이프에 대해 뭔가 꿍꿍이가 있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그 말에 그 남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의 어머니까지도 직접 감옥에 보낼 정도로 가차 없고 냉혈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약점이 있더라도 그걸 날카로운 검으로 만들어 자신의 것을 함부로 건드리는 자들을 찌를 것이다. 그를 멀리하고 그를 건드리지 않고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을 쉽게 건드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이태석은 이승하의 말을 듣고 평소에 자신이 지켜주었던 동생들이 자신에게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자신이 돌봤던 동생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고 문득 낯선 느낌이 들었다. 다들 각자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점점 사이가 소홀해졌다.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이들은 일이 생기거나 프로젝트를 따낼 때만이 그를 찾아오곤 했었다. 아무리 그들에게 잘해줘도 그들한테 이태석은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큰 형님, 큰 오빠일 뿐이었다. 깊이 반성하던 이태석은 아무 말이 없었고 모든 상황을 이승하에게 맡기기로 했다. 남자가 긴 손가락을 들어 명을 내리려고 할 때,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이지민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아까는 내가 말이 너무 과격했어. 마음에 두지 말거라.”항상 거만하고 오만하던 어른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을 보고 이지민은 깜짝 놀랐다.다행히 어릴 때부터 자신의 기분을 쉽게 들어내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왔던 터라 그녀는 차분하고도 태연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과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제가 낙태를 했다고 함부로 소문 퍼뜨리지 마세요. 몸이 아파서 산부인과에 검사를 받으러 간 것뿐이니까요.”그녀는 여세를 몰아 낙태 사건에 대해 해명했지만 단이수와 사귀었던 일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어찌 됐든 지난날 사람을 잘못 사귄 건 사실이니 마땅히 질책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앞장서서 먼저 사과를 하니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사과를 했다. 가문에서 쫓겨나는 거에 비하면 사과 따위는 별문제 아니었다. 아무리 이 집안의 권력자가 이승하라고 해도 친척들을 다 쫓아낼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이태석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이태석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한 것이었다. 누구의 미움을 사더라도 뒤에서 그들을 지켜주었던 형님에게 미움을 사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앞으로 정말 JS 그룹에서 이 집안에서 사라지
그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이태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날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냐?”남자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T국에 할아버지를 위해 별장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떠나시지요. 그곳에서 여생을 편히 보내시길 바랍니다.”손자에게 쫓겨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이태석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네가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누구 덕인데?”이승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아무 감정 없이 대꾸했다.“할아버지 덕분입니다.”용머리 지팡이를 짚고 있던 이태석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은혜를 잊어버리지는 않았구나.”그가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이태석을 담담하게 쳐다보았다.“은혜를 잊지도 않았지만 그 당시 할아버지께서 방관하시던 모습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그 말에 이태석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 일은 내가 너한테 잘못했다. 그러나 여자 하나 때문에 할아버지한테 이러는 건 아니지 않느냐?”이승하는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내다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청혼식에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 이미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그 여자는 저한테 목숨 같은 사람입니다. 그 여자가 없다면 저도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근데 할아버지는 기어코 제 목숨을 건드리셨죠.”그가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이태석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께서 제 목숨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니 저도 할아버지한테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그 말에 이태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승하한테서 지난날 무릎을 꿇고 사정하던 큰아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아버지, 그 여자는 저한테 목숨 같은 사람입니다. 그 여자 건드리시면 절 죽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그 여자한테 손대지 마세요.”그 당시 그는 큰아들을 강요해 박화영과 결혼하게 하였고 그 후 20여 년 동안 비극이 지속되게 되었다. 과거에 젖어 빠져나오지 못하기라도 한 듯 이태석은 천천히 시선을
말을 마친 이승하는 자리를 떴다.화가 잔뜩 난 이태석은 온몸을 떨고 있었고 지팡이를 짚은 채 이를 갈았다.“이승하, 내 말 듣지 않으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거다.”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이태석을 힐끗 쳐다보았다.“진작부터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랑 일찍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는 중입니다.”한편, 옆에 있던 이지민은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말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고는 응원의 손짓을 보냈다.“오빠, 난 오빠 응원해요.”그러나 그녀한테 돌아온 건 이승하의 눈빛이 아니라 이태석의 싸늘한 눈빛이었다.“다섯째야, 딸아이 관리 좀 잘하거라.”다섯째 아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딸아이의 손을 잡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애들 일에 더 이상 상관하지 마세요.”나이가 들어도 왜 이리 이것저것 다 참견하는 건지? 예전에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 그리 간섭하더니만 이젠 하다 하다 손자의 결혼까지 간섭하려고 하다니...정을 주지 말라고 그리도 입에 달고 사시더니 그동안 정 하나 없는 노친네가 손주보다 더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어쩌면 손주보다도 뒤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다섯째 아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이태석은 그 충격에 기절할 뻔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나한테 반항을 해? 이태석은 가슴을 움켜쥐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승연의 아버지만이 그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태석은 그래도 둘째 아들이 효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것들은 모두 불효자라고 생각했다.이승연의 아버지, 그의 이름은 이석훈이다. 그가 병상 앞에 앉아 눈살을 찌푸린 채 이태석을 쳐다보았다.“아버지, 제가 이리 남은 건 아버지한테 진심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던 이태석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날 설득할 생각이라면 하지
이태석이 대답을 하려는데 이석훈은 그에게 입을 열 틈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승하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그 아가씨 때문에 승하가 몇 번이나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고집대로 정말 두 사람 갈라놓을 생각이십니까? 똑똑한 우리 둘째 조카까지 정말 죽일 작정이시냐고요?”“큰형은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미 시원이를 잃은 큰형이 승하마저 잃게 하실 건가요? 큰형의 자식들을 다 죽일 겁니까?”“그리고 아버지가 아셔야 할 게 또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집안에서 승하 말고는 집안을 이끌어갈 사람이 없어요. 결혼 문제 때문에 승하를 잃게 된다면 우리 이씨 가문은 끝장이란 말입니다.”이석훈은 이태석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며 말을 이어갔다.“아버지, 이 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 겁니까?”이태석은 그의 손을 밀어내며 호통쳤다.“네놈 따위가 일깨워줄 필요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모를 것 같아?”“모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이리 고집불통이신 거 아닙니까?”그 말에 이태석은 그의 뺨을 철썩 내려쳤다. 다행히 눈치가 빠른 이석훈은 냉큼 뒤로 피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이태석은 하마터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혼내줄 뻔했다. 이석훈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 당시 우리 형제들한테 박화영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셔서 저희는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그 일 때문에 전 늘 승하한테 미안한 마음이었어요. 아버지는 승하한테 미안하지도 않으십니까?”그 말이 이태석의 아픈 곳을 제대로 찔렀다. 베개를 들고 이석훈을 세게 때리려던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려놓았다.“나도 당연히 미안한 마음이 있지. 그래서 그동안 JS 그룹을 승하 그놈한테 전적으로 맡긴 거야.” 이석훈은 이승하를 이용해 JS 그룹을 키우려는 그의 속셈을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승하한테 죄책감이 있으시다면 승하 뜻대로 하게 해주세요. 승
침대에 앉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이태석은 핸드폰을 꺼내 비서한테 서유의 전화를 알아보라고 한 뒤 서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편, 신혼집 설계도 작업에 한창 집중하고 있던 서유는 낯선 번호를 보고는 받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맞은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일세.”이태석이 자신에게 전화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어르신. 무슨 일로 저한테...”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일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예의 바르게 말을 건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이태석은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자네한테 물어볼 것이 있네.”“네, 어르신. 말씀하세요.”서유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똑바로 앉았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난 그는 통유리창 옆으로 다가가 정원의 등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승하 그놈을 사랑하는가?”그녀는 그가 또 무슨 간사하고 이상한 질문을 해서 자신을 공격하려는 줄 알았다. 근데 이런 질문을 하니 조금 의외였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한 뒤 정중하게 대답했다.“어르신, 어르신께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 왠지 너무 가벼운 대답일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전 그 사람을 잃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잃어보고 나니 그걸 깨닫게 되더라고요.”그 당시 지현우의 거짓말이기는 했지만 그를 잃어버린 느낌은 실제로 경험했었다. 그걸 경험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미 뼛속 깊이 파고들었고 놓칠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게 아마도 사랑이겠지...이태석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다시 물었다. “그놈이 예전에 자네한테 그리 못되게 굴었는데 밉지도 않나?”그녀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한테 물었다.“그 사람한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 있었나요?”이태석은 멍하니 아무 말도 잇지 못하였다. 그가 침묵하자 서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어르
서유는 그와 이런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승하도 그녀도 아이를 낳는 도구가 아니었으니까.그러나 이태석은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독단적인 성격이 이승하와 참 많이 닮은 듯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승하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르신 만난 적 있었어요?]방금 차에서 내린 이승하는 그 문자를 확인하고는 이내 답장을 보냈다.[나와, 얼굴 좀 보게.]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침 흩날리는 눈 사이로 검은 코트를 걸친 남자가 고급 차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얼른 일어나 두꺼운 외투를 꺼내 몸에 두르고 별장 밖으로 나갔다.별장 문을 열고 나서자마자 남자가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단숨에 품으로 끌어당겼다. 비명을 지르던 그녀가 미처 반응도 하기 전에 남자는 검은 코트를 펼치고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그는 그녀를 어린아이처럼 감싸 안았고 그녀는 머리만 빼꼼 내밀고 우뚝 솟은 그를 올려다보았다.“많이 늦었는데 왜 왔어요?”고개를 숙인 남자는 작고 하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나 보고 싶었어?”그 말에 그녀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기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고는 안 그런 척하기는?“오늘 아침에 봤잖아요. 그래서 안 보고 싶었어요.”아닌 척 시치미를 떼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아, 난 당신이 보고 싶었으니까.”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꿀을 먹은 것처럼 달콤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남자의 잘록한 허리를 꼭 껴안고 뻣뻣한 가슴에 얼굴을 대고는 아무 말도 없이 포옹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때, 그가 그녀의 턱을 잡고 눈빛을 마주치더니 부드럽고 촉촉한 그녀의 입술을 쳐다보고는 침을 삼켰다.“나랑 같이 집에 가자.”정가혜의 별장에서 이제 하룻밤 묵었는데 집으로 가자니? 결혼 전의 자유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욕망이 가득 찬 그의 눈빛을 쳐다보고는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싫어요, 가혜랑 같이 있을
주저하지 않고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뒤에서 그녀를 덥석 안았다.그녀를 꼭 안고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얹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진짜 당신을 어찌하면 좋을까?”등지고 서 있던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승하 씨, 그러니까 앞으로 나랑 밀당하지 말아요. 나한테는 그런 거 안 통하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이제 보니 우리 와이프는 직설적인 걸 좋아하나 봐?”말을 마친 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민감한 그녀의 피부를 위아래로 쓰다듬었다.”“당신 안고 싶어서 미치겠어.”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전해지자 짜릿한 느낌에 그녀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발버둥 쳤지만 남자는 오히려 그녀를 반쯤 안아 올려 그녀를 벽에다 밀쳤다.“걱정하지 마. 여기서는 안 해. 키스만 할 거야.”노골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더니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는 머리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를 덥석 껴안고 연약한 그녀의 몸에 연기가 날 정도로 뜨거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벽에 기댄 채 그의 키스를 받아내고 있던 그녀는 남자의 욕망에 빨려 들어갈 뻔했다. 이성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미...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그녀는 남자가 입술을 떼는 순간 바로 그를 밀어냈다.“승하 씨, 얼른 놔줘요.”그녀의 목덜미에 미친 듯이 키스하고 귓불을 살짝 깨물고 있던 남자가 잠시 멈추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여보라고 부르면 놔줄게.”가뜩이나 빨개진 그녀의 볼은 그 말을 듣고 더 빨개졌다.“안 돼요. 입이 안 떨어진단 말이에요.”욕망으로 눈시울이 붉어진 남자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왜? 왜 못 불러?”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곧 할 건데 뭐. 미리 연습한단 셈 치고 불러봐.”그의 입가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그녀가 그의 탄탄한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