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에서 일어난 윤주원은 주서희를 강요하는 소준섭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의 주먹이 소준섭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태권도 9단의 실력을 갖추고 있던 소준섭이 그를 발로 걷어찼다. 소준섭은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 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감히 윤 선생 따위가 내 여자를 빼앗으려 한 거야?”말을 마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발을 들어 윤주원을 세게 걷어찼다. “감히 내 여자한테 고백을 하다니. 이런 빌어먹을.”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천재 의사’로 불리는 소준섭이 병원에서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막아서려 했지만 그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이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소준섭은 두꺼운 가죽 장화를 신은 채 윤주원이 일어날 수 없게 발로 세게 걷어찼다. 피를 토하는 윤주원의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온몸을 떨었고 입을 벌려 소준섭의 팔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온 힘을 다해 꽉 깨물었더니 그제야 통증을 느낀 그가 발길을 멈추었다. 소준섭은 빨갛게 물든 눈을 들어 주서희를 한참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주서희는 자신을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는 그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저항했다.“이거 놔요.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당신이랑 같이 죽을 거예요.”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소준섭은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같이 죽자? 그래. 네가 다른 남자랑 같이 있는 것보다는 낫지.”그녀는 소준섭을 악착같이 밀어낸 뒤 내려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가 그녀를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렸다. 그의 어깨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주서희는 고개를 들고 사무실 쪽을 천천히 바라보았다.눈물을 참으며 도움의 눈빛을 보내오는 주서희를 보고 서유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가 소준섭을 막았다. “소 선생님, 이렇게 막무가내로 서희 씨를 데리고 간다면 서희 씨가 당신을 더 미워하게 될 거예요.”주서희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그가 이런 방식으로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서유의 손이 미친 듯이 떨렸고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경멸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소준섭을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요?”소준섭은 미친 듯이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주서희의 손목을 잡고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당신은 알 자격이 없어요.”그는 자신을 꽉 붙잡고 있던 서유의 손을 걷어차고는 주서희를 어깨에 메고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힘없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서유의 모습에 주서희는 너무 미안했다.더 두려웠던 건 서유가 소준섭의 몇 마디 말 때문에 또다시 이승하와 헤어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던 주서희가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소리쳤다.“소준섭 씨, 나 당신 평생 후회하게 만들 거예요.” 그 말에 그녀의 등을 누르고 있던 그의 손이 갑자기 떨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힘껏 껴안았다. ‘주서희, 난 널 데리고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널 데리고 부산으로 돌아가 널 내 곁에 두고 싶을 뿐이라고.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평생을 후회해도 난 상관없어.’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몸을 겨우 가누고 있던 서유가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주서희는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고 눈물을 왈칵 쏟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경호원들은 재빨리 자리를 떴고 윤주원은 응급실로 옮겨졌고 마음씨가 착한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서유의 안부를 물었다. 서유는 고개를 흔든 뒤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복도 난간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한 발짝 한 발짝 창가로 다가갔다. 병원 아래층에서 소준섭은 주서희를 차에 태웠다. 주서희에게 뺨을 세게 맞으면서도 그는 화를 참으며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이를 본 서유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
영원히 답장을 받지 못할 두 개의 문자였다. 대화가 끊겨버린 그 시간처럼 여기서 끝을 맺어야 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이승하와 송사월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승하뿐이었다. 그 이름은 마치 그의 어깨에 남긴 이빨 자국처럼 심장에 깊이 박히고 뼈와 피에 녹아들어 도저히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 사람과 함께하면서 아프기도 했고 상처받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녀의 본심을 따른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용감하게 그를 사랑하고 싶다. 서유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마음속의 미안함도 함께 내려놓았다. 그녀는 마음을 굳고 먹고는 펜과 줄자를 들고 다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승하가 프러포즈하는 날, 이 설계도를 그에게 건네주면서 지난 8년 동안 단 한 순간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밤을 새워 겨우 스케치를 완성한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바로 이때 이승하한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 속 남자는 예전보다 턱선이 갸름해 보였고 몸매도 날씬해진 것 같아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밥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거죠?”다정한 그녀의 말투가 남자의 텅 빈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일 오전 10시에 공항에 도착할 거야.”그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돌아간다는 소식만 전했다. 서유는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괜찮은 거예요?”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핏발이 선 눈동자를 애써 감추려 했다. 영상 속의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서유가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내일 오후에 나랑 같이 F국으로 떠나.”말을 마친 그가 아쉬운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지금 바로 회의 들어가야 해.”어쩐지 그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가 자신을
잠깐 흠칫하던 이연석은 이내 입을 열었다.“알았어요. 준비할게요.”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둘째 형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정가혜 씨, 주서희...”두 사람은 서유의 친한 친구들이기 때문에 그녀의 곁에서 함께 그녀의 행복한 순간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챙기는 그의 모습에 이연석마저도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형, 꼭 행복해야 해요.”‘형이 그토록 원했던 서유 씨가 분명 형한테 행복을 가져다줄 거예요.’이승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퍼졌다. ‘이제 다 왔어. 행복해질 일만 남은 거야.’이연석은 전화를 끊고 가족들에게 자신이 전용기를 마련할 테니 제시간에 F국으로 가라고 알렸다. 그러고는 주서희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자 그는 소수빈에게 전화를 걸어 주서희를 찾으라고 당부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그는 바에 있던 술잔을 들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이내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는 옆에 놓여있는 양복 외투를 집어 들고 클럽으로 향했다. 한편, 정가혜는 와인을 들고 한창 VIP룸의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연석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손님들은 이씨 가문의 도련님이 나타나자 그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자리를 양보했다.그러나 이연석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정가혜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요. 나랑 함께 F국으로 가요.”정가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손님에게 사과를 한 뒤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더 이상 이곳에서 소란 피우지 말아요.”두 사람이 헤어진 후 이연석은 툭하면 클럽에 찾아와서 소란을 피웠다. 아무리 장사가 잘되는 가게라도 그 때문에 망하고 말 것이다. 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정가혜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그는 그녀를 몇 초 동안 쳐다보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둘째 형이 F국에서 서유 씨한테
서울. 주서희가 연락이 안 되자 소수빈은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여전히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든 그는 재빨리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서 그는 의사들의 입을 통해 주서희가 소준섭에게 강제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소준섭 그 인간이 서유를 발로 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표님의 여자한테 감히 손을 대다니?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소수빈은 핸드폰을 꺼내 이승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승하의 전용기는 이미 밤하늘을 날고 있었고 그의 핸드폰은 꺼져 있는 상태였다. 소수빈은 먼저 CCTV를 다운 받아 이승하의 핸드폰으로 전송하고는 부산으로 달려가 주서희를 찾았다. 다음 날 오전, 서유가 펜을 들고 설계도를 대조하며 마지막 빌딩을 그리는 데 열중하고 있을 때 핸드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 있는 핸드폰을 힐끗 쳐다보던 그녀는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이름을 발견하고는 흠칫했고 떨리는 손 때문에 펜이 비뚤어졌다. 화면에 뜬 ‘지현우'라는 세 글자를 노려보며 그녀는 침을 삼켰고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움켜쥐고는 핸드폰을 집었다. Y국으로 돌아간 후, 지현우는 그녀에게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근데 오늘 왜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한 건지? 설마 다시 돌아올 생각인 건지? 그녀의 예상대로 지현우의 첫 마디가 돌아왔다는 말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무심코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가볍게 대답만 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더더욱 묻지 못했다. 지현우는 U자형 소파에 앉아 늘씬한 다리를 포개고 무심하게 물었다.“육성재가 당신을 찾고 있죠?”그가 돌아와서 자신에게 계약서의 두 번째 조항을 이행할 것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육성재의 말을 꺼내니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맞아요.”“정확히 말해서 그 사람이 찾고 있는 사람은 김초희예요.”그녀가 이내 말을 이어갔다
전용기는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였고 우람한 체격을 가진 카리스마 넘치는 남자가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재빨리 공항을 빠져나왔다.고급 차에 올라탄 후, 그가 개인 핸드폰을 꺼내 서유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알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잘생긴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고 눈까지 빨개졌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손을 떨면서 워싱턴에서 병원 원장이 처방해 준 진통제 몇 알을 입에 넣었다. 앞에 앉아 있던 경호원은 치료를 받은 그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수술하시는 게 어떠합니까?”수술을 한다는 건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수술 후, 무사히 깨어나서 그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을 그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빨갛게 된 눈을 들고 경호원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내가 한 말을 흘려들은 거야?”경호원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국내로 돌아오면 아무도 그의 병세에 언급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대표님의 말이 떠올라 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대표님, 죄송합니다.”이승하는 차디찬 시선을 거두고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고는 약효가 나타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때쯤 차는 별장 입구에 멈춰 섰고 그는 힘겹게 몸을 가누며 차에서 내린 뒤 빠른 걸음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세수를 마치고는 다시 옷방으로 가서 검은색 양복을 골라 갈아입고 머리 스타일을 다듬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더 이상 창백해 보이지 않고 눈 밑이 더 이상 새빨갛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금고를 열었다.그는 그 안에서 스카프와 사진 그리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다. 물건들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상자에 넣은 다음 그는 직접 들고 별장을 나섰다. 서유를 데리고 단둘이 F국으로 갈 생각으로 그는 경호원을 동행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제 자리에서 대기하라고 명한 뒤 직접 차를 몰고 정가혜의 별
경호원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히 문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서유 씨가 왜 보이지 않는 거야?그들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손히 대답하고는 재빨리 흩어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승하는 소수빈과 택이한테 서유를 찾아오라고 명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로 다시 돌아와 비행기가 착륙한 후 아직 켜놓지 않은 다른 핸드폰를 꺼내 들었다. 그들에게 전화하려고 할 때, 그는 소수빈이 어젯밤 한밤중에 보내온 동영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영상 속에 서유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서둘러 동영상을 클릭했고 마침 소준섭이 발을 들어 그녀의 심장을 걷어차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갑자기 그의 눈 밑에서 차가운 피로 물든 빛이 뿜어져 나왔다.‘소준섭,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죽고 싶어 환장했군.’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진 그는 서유를 찾은 다음은 소준섭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때, 영상 속에서 소준섭이 송사월을 언급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김시후가 지난 몇 달 동안 부산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있냐는 그의 말에 이승하는 몸이 얼어붙었다. 영상 속, 바닥에 엎드려 있는 서유가 그 말을 듣고 당황해하며 미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고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아프기 시작했다.‘서유, 송사월한테 미안해서 인사도 없이 날 떠난 거야?’ 이건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한 번 또 한 번 이렇게 그를 버리고 가면 그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는가?그는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고 차 문에 쓰러졌다.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에도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마치 혼이 나간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진 그는 고개를 들고 멍하니 그녀가 머물렀던 별장을 쳐다보았다. 별처럼 반짝이던 그의 눈빛이 절망으로 가득 차 버렸고 빛을 잃어갔다. ‘서유, 나한테 당신은 목숨 같은 존재야. 당신이 떠나면 난 목숨을 잃게 되는 거라고. 설마 내가 죽어도 당신은 아무런
바다 옆의 무인도, 숲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낡은 통나무집. 서유는 의자에 묶여있었고 그녀의 입술에는 몇 겹의 테이프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혼수상태에서 점점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는 순간, 주변에 스물 몇 명의 흉악한 남자들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키도 크고 위풍당당하게 해 보였고 손에 쇠막대기와 칼 같은 범행 도구를 들고 있었다. 햇빛이 통나무집 틈새 사이로 쏟아져 들어와 번쩍번쩍하는 칼날 위에 떨어지자 은백색의 빛을 발하였다. 그 하얀 빛들이 그녀의 눈을 찔렀고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손과 발이 모두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헛수고하지 말아요. 당신은 도망갈 수 없으니까.”무거운 구두를 신고 있던 흉터남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흉터남을 본 순간, 서유는 그들이 김씨 때문에 왔다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전에 경찰서에 등록된 김씨가 바로 김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속였었다. 같은 성씨였기 때문에 그날 그녀는 현장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흉터남이 이렇게 빨리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경호원들을 피해 그녀를 이곳으로 납치해 올 줄은 몰랐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흉터남을 바라보며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들이 그녀를 납치한 것은 그녀의 입을 통해 김씨가 누구인지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김씨를 본 적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한 이승하는 안전할 것이다. 이들이 자신을 납치한 목적을 알고 눈치챈 그녀는 알 수 없는 공포감이 오히려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칼을 들고 몽둥이를 잡고 있는 그들을 보며 그녀는 고문당하는 과정에서 분명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어떻게 이 사람들과 협상하여 최대한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을지에 고민하던 그때...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통나무집의 문이 열렸고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밖에서 들어왔다. 눈을 가려고 있어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