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소준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담긴 흐릿한 감정은 빠르게 사라져 버렸고 대신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난 네 오빠 아니야.”단번에 주서희를 밀어낸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오빠는 그 천한 놈이고 난 너랑 아무 상관 없어.”그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그녀는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덤덤하기만 했다. 덤덤한 그녀의 모습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부은 얼굴을 붙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주서희, 네가 그 천한 놈처럼 이승하를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어렸을 때 하던 게임 다시 시작할 거야.”어린 시절의 게임을 계속하겠다는 말에 주서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완강한 눈빛을 보였다. 소준섭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런 눈빛으로 날 보기만 해. 사람들 시켜 널 건드리게 할 수도 있어.”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그가 때린 뺨에 그녀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부어오른 볼을 감싼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반항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반항하면 성인식 그날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사람들 시켜서 날 건드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자궁은 이미 제거된 상태니까.”그 말에 소준섭은 숨이 막혔고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 자업자득이지. 누가 너더러 그놈 아이를 임신하고도 지우지 말래?”주서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자궁벽이 얇아서 아이를 지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죽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또다시 그런 말을 들어도 주서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도 너무 많이 들은 얘기라서 무감각해진 듯하다. 다만 소준섭이 직접 수술을 해주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친 봉합수술 때문에 그녀는 감염이 되어 자궁을 적출한 후에야
어떻게 깊은 사이인지는 주서희는 말하지 않았고 서유도 물어보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서희가 서랍을 열고 새로 들어온 약 몇 박스를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제때 챙겨 먹어요.”서유는 고맙다고 한 뒤 핸드폰을 꺼내 돈을 이체하려고 했다. “얼마예요? 약값 이체해 줄게요.”그 모습에 주서희는 냉큼 손을 저었다.“필요 없어요.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유 씨야말로 지금 돈이 부족한 거 아닌가요?”“곧 죽을 사람이 돈이 부족할 게 뭐가 있겠어요? 단지 언니한테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주고 싶을 뿐이에요.”주서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뭔가 생각이 난 듯 명함 한 장을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미국에서 유명한 심장과 전문의인데요. 대표님께서 이분한테 당신에게 맞는 심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어요.”명함을 건네받은 서유는 심장이 떨려 온몸에 통증이 전해졌다. 이승하가 정말로 말한 대로 그녀에게 적합한 심장을 찾고 있을 줄은 몰랐다.“예전에는 대표님께서 직접 조지 선생님과 연락하셨거든요. 근데 갑자기 나한테 연락하라는 거예요. 앞으로는 서유 씨에 관한 일은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요.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서유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자신을 위해 심장을 찾고 있는 그 사람한테 모진 말을 내뱉고 그 사람을 밀어냈다.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이 밀려온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면서 주서희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는 서유를 보고 주서희는 서유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서유의 의견을 구했다.“조지 선생님께는 내가 연락할까요? 연락한다면 말기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드려야 해요. 그래야 서유 씨에게 딱 맞는 심장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서유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주서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내 상황은 심장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의료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서유는 박하선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창백하고 가냘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나타났다. 상대에게 뺨을 한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연약한 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뺨을 맞은 그녀는 머리가 윙윙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상대방에게 맞설 힘이 없어 억지로 버티며 눈앞에서 날뛰는 박하선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박하선 씨, 무슨 뜻이에요?”“별 뜻 없어. 그냥 당신 볼 때마다 때릴 생각이야.”박하선은 턱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리면서 다시 손을 들어 서유의 뺨을 내리쳤다. 그 모습에 서유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박하선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 해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지유가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챘다.한편, 한발 물러난 서유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박하선은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다행히 연지유가 핸드폰을 낚아채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또다시 손을 뻗어 서유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바로 이때, 연지유가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하선 씨, 오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여기서 이러는 건 좀 그래요.”이곳은 쇼핑몰 입구라서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찍힌다면 그녀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비록 여론을 잠재울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최대한 이씨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박하선은 이내 손을 거두고는 뒤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경호원들은 손수건을 꺼내 서유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녀를 붙잡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경호원들은 서유에게 도망갈 기회조차 주지 않고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경호원이 나서서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다. 이때, 박하선과 연지유가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들어왔다.그들은 높은 권력자처럼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하선 씨, 병원에서 하선 씨한테 무례하게 군 사람이 이 여자죠?”“맞아요.
그녀는 분홍색 거품을 내며 기침을 하였고 거품이 물속으로 들어가 변기의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경호원은 깜짝 놀랐고 그녀가 피를 토한 줄 알고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공기를 들이마신 서유는 점차 숨을 돌리긴 했지만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기침을 하면 여전히 분홍색 거품 가래가 나왔는데 이건 말기 증상이었다.그걸 모르는 박하선은 물에 빠진 그녀의 위가 상한 줄 알고 화가 좀 풀렸다. 박하선은 이를 악물고 서유를 노려보았다.“자업자득이야. 물에 빠져 죽어도 당신은 할말 없어.”말을 마친 박하선이 경호원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자 경호원들은 그제야 서유를 풀어주었다.“이번에는 한번 봐줄게. 또 다시 반항한다면 살아서 나갈 생각 하지 마.”그녀는 독한 말을 내뱉고는 연지유의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바로 이때, 뜻밖에도 등 뒤에서 젖은 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서유가 허약한 모습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박하선 씨는 아직 변기 물 맛을 보지 못했죠? 그냥 가면 어떡해요?”움찔하던 박하선은 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 계집애가 날 변기에 밀어 넣을 생각인 아니겠지?’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그녀의 머리는 변기 속으로 들어갔다.서유는 온 힘을 다해 박하선을 변기에 밀어 넣었고 두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쥐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서유를 잡으려 하자 서유가 호통쳤다.“이 여자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날 가만히 내버려둬야 할 거예요.”박하선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녀는 경호원들이 달려들면 박하선의 목을 심하게 조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누구 하나쯤은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평소에 연약해 보이던 서유가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강해질 줄은 몰랐다. 연지유는 경호원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한 뒤 조용히 서유의 등 뒤로 가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두피가 저리는 듯한 고통에 서유는 저도
이제 막 간신히 숨을 돌린 박하선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승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학대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화가 미칠 것만 같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녀는 서유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녀를 세게 밀쳤다. 무방비 상태였던 서유는 맞은편 칸으로 세게 밀려났고 머리가 변기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빨간 피가 흘러나와 변기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방울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이승하는 얼굴이 굳어졌고 연지유의 허리를 감싸안은 손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갔다.통증을 밀려온 연지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승하 씨, 왜 그래?”이승하는 이내 그녀를 놓아주고는 서유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던 그가 연지유의 의아한 눈빛을 눈치채고 억지로 손을 거두었다. 그는 서유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사과해.” 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들었고 붉은 피가 그녀의 시선을 가리고 있어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작고 힘없는 그녀를 덮어버린 것 같았고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을 잘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하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하선에게 사과하라고 하였고 이건 이유조차 따지지 않는 명령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인 서유는 영원히 그들과 옳고 그름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처참해 보이기도 했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변기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박하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미안해요, 박하선 씨.”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하인처럼 일말의 존엄도 없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보며 이승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서 박하선을 쳐다보았고 눈 밑에 살기가 가득한 그녀를 보며 그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혼쭐을 냈으
뒤에 있는 서유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이승하는 박하선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젠 만족해?”이승하가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박하선은 그제야 의심을 풀었다. 둘째 오빠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절대 때리지 않았고 오히려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린다는 건 그가 이 여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방금 이 여자의 편을 든 것도 아마 주서희 그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을 위해 주서희의 친구를 혼내주었고 이건 둘째 오빠가 여전히 자신을 가장 아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원래 서유를 죽이려고 했지만 자신을 향한 둘째 오빠의 사랑이 사라져 버리는 게 싫어서 이 일은 이쯤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빠가 이 여자를 직접 혼내준 걸로 충분해.”박하선은 작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손 닦아. 더러우니까...”이승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티슈를 받아 고개를 숙이고 손을 닦으면서 곁눈질로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서유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가슴이 답답했고 온몸에 고통이 전해졌다. 1초만 더 있으면 미친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하선이 서유를 발로 차려 할 때 이승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안 갈 거야?”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발을 거두고는 경호원을 데리고 이승하의 뒤를 따라갔다. 옆에 있던 연지유도 서유를 쳐다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시끄럽게 등장해 시끄럽게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서유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죽기 직전의 인형처럼 아무런 의식도 생각도 없었다. 화장실 안의 불빛이 깜박거리더니 이내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뒤통수에서 뜨거운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안 돼서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해졌고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이승하의 메시지를 받고 주서희가 달려왔을 때 서
정가혜, 정가혜...어렴풋이 들리는 정가혜의 울음소리에 그녀는 걱정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안개 속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침 정가혜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서유야, 가지 마. 얼른 돌아와. 아직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정가혜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선한 산소가 들어오자 그녀의 심장이 되살아났다. 점차 안개가 걷히고 정가혜도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주 원장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얼른, 계속 산소를 공급하세요!”주서희는 심전도 측정기에 변동하는 데이터를 보고 갑자기 몸에 힘이 플렸다.환자가 죽을까 봐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두 손이 너무 떨려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구 선생님, 환자분 뒤통수는 어때요?”이제 막 지혈을 마친 구 선생은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주 원장을 보고 이 환자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피는 이미 멈췄습니다. 병원으로 돌아가서 못만 제거하면 됩니다.” “다행히 못이 길지 않아 혈관과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진작 뇌사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주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다가가 서유의 손을 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기가 전혀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그녀의 손이 지금은 조금 따뜻해졌다. 다행히 쇼핑몰이 병원에서 멀지 않았고 그녀가 제때 도착했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랬다면 서유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힘들게 살려도 서유는 아마 두 달도 버티지 못할 거다...그녀가 서유를 멍하니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이승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여자는 어때?”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승하의 담담한 목소리는 마치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듯했고 서유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서유 씨는...”주서희는 어렵게 구조된 서유를 보며 이
오늘 저녁 근무를 하고 있던 정가혜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고 오른쪽 눈꺼풀이 마구 뛰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서유였고 급히 서유한테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그녀는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고 가는 길 내내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집 문을 막 열려고 할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서유야, 뭐 하고 있었어? 왜 전화를 안 받아? 걱정돼 죽는 줄 알았잖아.”전화기 너머로 서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서유 씨 언니분인가요?”낯선 사람이 전화를 받자 정가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그쪽은 누구신지?”“주서희예요. 지난번에 댁에서 봤었죠?”“주서희 씨요?”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늦은 밤에 왜 당신이 서유의 전화를 받아요? 서유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요?”“별일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주서희는 지난번에 서유가 자신에게 미친 듯이 눈치를 준 일이 생각나서 정가혜에게 진실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가혜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주 선생님,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매번 서유가 심장병이 발작할 때마다 난 늘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서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느낄 수가 있다고요. 빨리 말해 주세요. 서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던 주서희는 정가혜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심장 기능 부전의 증상이 있다고는 하지 않고 서유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만 말했다. 서유가 혼수상태라는 말을 듣고 정가혜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녀는 문고리를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주 선생님, 병원 주소 좀 알려주세요.”주서희는 주소를 정가혜에게 알려주고는 그녀를 위로했다.“가혜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우리 병원에 있으니까 계속 서유 씨 상태 지켜볼 거예요. 일단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 주세요. 지금 상태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