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소준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담긴 흐릿한 감정은 빠르게 사라져 버렸고 대신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난 네 오빠 아니야.”단번에 주서희를 밀어낸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오빠는 그 천한 놈이고 난 너랑 아무 상관 없어.”그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그녀는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덤덤하기만 했다. 덤덤한 그녀의 모습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부은 얼굴을 붙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주서희, 네가 그 천한 놈처럼 이승하를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어렸을 때 하던 게임 다시 시작할 거야.”어린 시절의 게임을 계속하겠다는 말에 주서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완강한 눈빛을 보였다. 소준섭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런 눈빛으로 날 보기만 해. 사람들 시켜 널 건드리게 할 수도 있어.”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그가 때린 뺨에 그녀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부어오른 볼을 감싼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반항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반항하면 성인식 그날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사람들 시켜서 날 건드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자궁은 이미 제거된 상태니까.”그 말에 소준섭은 숨이 막혔고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 자업자득이지. 누가 너더러 그놈 아이를 임신하고도 지우지 말래?”주서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자궁벽이 얇아서 아이를 지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죽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또다시 그런 말을 들어도 주서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도 너무 많이 들은 얘기라서 무감각해진 듯하다. 다만 소준섭이 직접 수술을 해주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친 봉합수술 때문에 그녀는 감염이 되어 자궁을 적출한 후에야
어떻게 깊은 사이인지는 주서희는 말하지 않았고 서유도 물어보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서희가 서랍을 열고 새로 들어온 약 몇 박스를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제때 챙겨 먹어요.”서유는 고맙다고 한 뒤 핸드폰을 꺼내 돈을 이체하려고 했다. “얼마예요? 약값 이체해 줄게요.”그 모습에 주서희는 냉큼 손을 저었다.“필요 없어요.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유 씨야말로 지금 돈이 부족한 거 아닌가요?”“곧 죽을 사람이 돈이 부족할 게 뭐가 있겠어요? 단지 언니한테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주고 싶을 뿐이에요.”주서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뭔가 생각이 난 듯 명함 한 장을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미국에서 유명한 심장과 전문의인데요. 대표님께서 이분한테 당신에게 맞는 심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어요.”명함을 건네받은 서유는 심장이 떨려 온몸에 통증이 전해졌다. 이승하가 정말로 말한 대로 그녀에게 적합한 심장을 찾고 있을 줄은 몰랐다.“예전에는 대표님께서 직접 조지 선생님과 연락하셨거든요. 근데 갑자기 나한테 연락하라는 거예요. 앞으로는 서유 씨에 관한 일은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요.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서유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자신을 위해 심장을 찾고 있는 그 사람한테 모진 말을 내뱉고 그 사람을 밀어냈다.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이 밀려온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면서 주서희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는 서유를 보고 주서희는 서유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서유의 의견을 구했다.“조지 선생님께는 내가 연락할까요? 연락한다면 말기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드려야 해요. 그래야 서유 씨에게 딱 맞는 심장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서유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주서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내 상황은 심장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의료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서유는 박하선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창백하고 가냘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나타났다. 상대에게 뺨을 한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연약한 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뺨을 맞은 그녀는 머리가 윙윙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상대방에게 맞설 힘이 없어 억지로 버티며 눈앞에서 날뛰는 박하선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박하선 씨, 무슨 뜻이에요?”“별 뜻 없어. 그냥 당신 볼 때마다 때릴 생각이야.”박하선은 턱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리면서 다시 손을 들어 서유의 뺨을 내리쳤다. 그 모습에 서유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박하선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 해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지유가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챘다.한편, 한발 물러난 서유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박하선은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다행히 연지유가 핸드폰을 낚아채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또다시 손을 뻗어 서유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바로 이때, 연지유가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하선 씨, 오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여기서 이러는 건 좀 그래요.”이곳은 쇼핑몰 입구라서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찍힌다면 그녀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비록 여론을 잠재울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최대한 이씨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박하선은 이내 손을 거두고는 뒤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경호원들은 손수건을 꺼내 서유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녀를 붙잡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경호원들은 서유에게 도망갈 기회조차 주지 않고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경호원이 나서서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다. 이때, 박하선과 연지유가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들어왔다.그들은 높은 권력자처럼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하선 씨, 병원에서 하선 씨한테 무례하게 군 사람이 이 여자죠?”“맞아요.
그녀는 분홍색 거품을 내며 기침을 하였고 거품이 물속으로 들어가 변기의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경호원은 깜짝 놀랐고 그녀가 피를 토한 줄 알고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공기를 들이마신 서유는 점차 숨을 돌리긴 했지만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기침을 하면 여전히 분홍색 거품 가래가 나왔는데 이건 말기 증상이었다.그걸 모르는 박하선은 물에 빠진 그녀의 위가 상한 줄 알고 화가 좀 풀렸다. 박하선은 이를 악물고 서유를 노려보았다.“자업자득이야. 물에 빠져 죽어도 당신은 할말 없어.”말을 마친 박하선이 경호원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자 경호원들은 그제야 서유를 풀어주었다.“이번에는 한번 봐줄게. 또 다시 반항한다면 살아서 나갈 생각 하지 마.”그녀는 독한 말을 내뱉고는 연지유의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바로 이때, 뜻밖에도 등 뒤에서 젖은 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서유가 허약한 모습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박하선 씨는 아직 변기 물 맛을 보지 못했죠? 그냥 가면 어떡해요?”움찔하던 박하선은 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 계집애가 날 변기에 밀어 넣을 생각인 아니겠지?’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그녀의 머리는 변기 속으로 들어갔다.서유는 온 힘을 다해 박하선을 변기에 밀어 넣었고 두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쥐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서유를 잡으려 하자 서유가 호통쳤다.“이 여자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날 가만히 내버려둬야 할 거예요.”박하선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녀는 경호원들이 달려들면 박하선의 목을 심하게 조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누구 하나쯤은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평소에 연약해 보이던 서유가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강해질 줄은 몰랐다. 연지유는 경호원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한 뒤 조용히 서유의 등 뒤로 가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두피가 저리는 듯한 고통에 서유는 저도
이제 막 간신히 숨을 돌린 박하선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승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학대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화가 미칠 것만 같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녀는 서유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녀를 세게 밀쳤다. 무방비 상태였던 서유는 맞은편 칸으로 세게 밀려났고 머리가 변기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빨간 피가 흘러나와 변기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방울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이승하는 얼굴이 굳어졌고 연지유의 허리를 감싸안은 손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갔다.통증을 밀려온 연지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승하 씨, 왜 그래?”이승하는 이내 그녀를 놓아주고는 서유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던 그가 연지유의 의아한 눈빛을 눈치채고 억지로 손을 거두었다. 그는 서유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사과해.” 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들었고 붉은 피가 그녀의 시선을 가리고 있어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작고 힘없는 그녀를 덮어버린 것 같았고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을 잘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하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하선에게 사과하라고 하였고 이건 이유조차 따지지 않는 명령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인 서유는 영원히 그들과 옳고 그름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처참해 보이기도 했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변기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박하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미안해요, 박하선 씨.”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하인처럼 일말의 존엄도 없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보며 이승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서 박하선을 쳐다보았고 눈 밑에 살기가 가득한 그녀를 보며 그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혼쭐을 냈으
뒤에 있는 서유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이승하는 박하선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젠 만족해?”이승하가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박하선은 그제야 의심을 풀었다. 둘째 오빠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절대 때리지 않았고 오히려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린다는 건 그가 이 여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방금 이 여자의 편을 든 것도 아마 주서희 그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을 위해 주서희의 친구를 혼내주었고 이건 둘째 오빠가 여전히 자신을 가장 아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원래 서유를 죽이려고 했지만 자신을 향한 둘째 오빠의 사랑이 사라져 버리는 게 싫어서 이 일은 이쯤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빠가 이 여자를 직접 혼내준 걸로 충분해.”박하선은 작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손 닦아. 더러우니까...”이승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티슈를 받아 고개를 숙이고 손을 닦으면서 곁눈질로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서유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가슴이 답답했고 온몸에 고통이 전해졌다. 1초만 더 있으면 미친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하선이 서유를 발로 차려 할 때 이승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안 갈 거야?”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발을 거두고는 경호원을 데리고 이승하의 뒤를 따라갔다. 옆에 있던 연지유도 서유를 쳐다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시끄럽게 등장해 시끄럽게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서유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죽기 직전의 인형처럼 아무런 의식도 생각도 없었다. 화장실 안의 불빛이 깜박거리더니 이내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뒤통수에서 뜨거운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안 돼서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해졌고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이승하의 메시지를 받고 주서희가 달려왔을 때 서
정가혜, 정가혜...어렴풋이 들리는 정가혜의 울음소리에 그녀는 걱정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안개 속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침 정가혜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서유야, 가지 마. 얼른 돌아와. 아직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정가혜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선한 산소가 들어오자 그녀의 심장이 되살아났다. 점차 안개가 걷히고 정가혜도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주 원장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얼른, 계속 산소를 공급하세요!”주서희는 심전도 측정기에 변동하는 데이터를 보고 갑자기 몸에 힘이 플렸다.환자가 죽을까 봐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두 손이 너무 떨려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구 선생님, 환자분 뒤통수는 어때요?”이제 막 지혈을 마친 구 선생은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주 원장을 보고 이 환자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피는 이미 멈췄습니다. 병원으로 돌아가서 못만 제거하면 됩니다.” “다행히 못이 길지 않아 혈관과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진작 뇌사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주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다가가 서유의 손을 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기가 전혀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그녀의 손이 지금은 조금 따뜻해졌다. 다행히 쇼핑몰이 병원에서 멀지 않았고 그녀가 제때 도착했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랬다면 서유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힘들게 살려도 서유는 아마 두 달도 버티지 못할 거다...그녀가 서유를 멍하니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이승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여자는 어때?”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승하의 담담한 목소리는 마치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듯했고 서유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서유 씨는...”주서희는 어렵게 구조된 서유를 보며 이
오늘 저녁 근무를 하고 있던 정가혜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고 오른쪽 눈꺼풀이 마구 뛰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서유였고 급히 서유한테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그녀는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고 가는 길 내내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집 문을 막 열려고 할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서유야, 뭐 하고 있었어? 왜 전화를 안 받아? 걱정돼 죽는 줄 알았잖아.”전화기 너머로 서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서유 씨 언니분인가요?”낯선 사람이 전화를 받자 정가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그쪽은 누구신지?”“주서희예요. 지난번에 댁에서 봤었죠?”“주서희 씨요?”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늦은 밤에 왜 당신이 서유의 전화를 받아요? 서유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요?”“별일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주서희는 지난번에 서유가 자신에게 미친 듯이 눈치를 준 일이 생각나서 정가혜에게 진실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가혜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주 선생님,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매번 서유가 심장병이 발작할 때마다 난 늘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서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느낄 수가 있다고요. 빨리 말해 주세요. 서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던 주서희는 정가혜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심장 기능 부전의 증상이 있다고는 하지 않고 서유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만 말했다. 서유가 혼수상태라는 말을 듣고 정가혜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녀는 문고리를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주 선생님, 병원 주소 좀 알려주세요.”주서희는 주소를 정가혜에게 알려주고는 그녀를 위로했다.“가혜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우리 병원에 있으니까 계속 서유 씨 상태 지켜볼 거예요. 일단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 주세요. 지금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