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칫하던 소준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담긴 흐릿한 감정은 빠르게 사라져 버렸고 대신 혐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난 네 오빠 아니야.”단번에 주서희를 밀어낸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오빠는 그 천한 놈이고 난 너랑 아무 상관 없어.”그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그녀는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덤덤하기만 했다. 덤덤한 그녀의 모습이 죽을 만큼 싫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부은 얼굴을 붙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주서희, 네가 그 천한 놈처럼 이승하를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어렸을 때 하던 게임 다시 시작할 거야.”어린 시절의 게임을 계속하겠다는 말에 주서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도 지지 않으려는 완강한 눈빛을 보였다. 소준섭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다시 한번 그런 눈빛으로 날 보기만 해. 사람들 시켜 널 건드리게 할 수도 있어.”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그가 때린 뺨에 그녀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부어오른 볼을 감싼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반항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반항하면 성인식 그날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다른 사람들 시켜서 날 건드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자궁은 이미 제거된 상태니까.”그 말에 소준섭은 숨이 막혔고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 자업자득이지. 누가 너더러 그놈 아이를 임신하고도 지우지 말래?”주서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자궁벽이 얇아서 아이를 지우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죽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또다시 그런 말을 들어도 주서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도 너무 많이 들은 얘기라서 무감각해진 듯하다. 다만 소준섭이 직접 수술을 해주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거친 봉합수술 때문에 그녀는 감염이 되어 자궁을 적출한 후에야
어떻게 깊은 사이인지는 주서희는 말하지 않았고 서유도 물어보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주서희가 서랍을 열고 새로 들어온 약 몇 박스를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제때 챙겨 먹어요.”서유는 고맙다고 한 뒤 핸드폰을 꺼내 돈을 이체하려고 했다. “얼마예요? 약값 이체해 줄게요.”그 모습에 주서희는 냉큼 손을 저었다.“필요 없어요.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유 씨야말로 지금 돈이 부족한 거 아닌가요?”“곧 죽을 사람이 돈이 부족할 게 뭐가 있겠어요? 단지 언니한테 돈을 조금이라도 더 남겨주고 싶을 뿐이에요.”주서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뭔가 생각이 난 듯 명함 한 장을 꺼내 서유에게 건네주었다.“미국에서 유명한 심장과 전문의인데요. 대표님께서 이분한테 당신에게 맞는 심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어요.”명함을 건네받은 서유는 심장이 떨려 온몸에 통증이 전해졌다. 이승하가 정말로 말한 대로 그녀에게 적합한 심장을 찾고 있을 줄은 몰랐다.“예전에는 대표님께서 직접 조지 선생님과 연락하셨거든요. 근데 갑자기 나한테 연락하라는 거예요. 앞으로는 서유 씨에 관한 일은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요.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서유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자신을 위해 심장을 찾고 있는 그 사람한테 모진 말을 내뱉고 그 사람을 밀어냈다.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이 밀려온 그녀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면서 주서희 앞에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침묵하고 있는 서유를 보고 주서희는 서유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고 서유의 의견을 구했다.“조지 선생님께는 내가 연락할까요? 연락한다면 말기의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드려야 해요. 그래야 서유 씨에게 딱 맞는 심장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서유는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 주서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내 상황은 심장을 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거예요. 나 때문에 의료
미처 반응하지 못한 서유는 박하선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창백하고 가냘픈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나타났다. 상대에게 뺨을 한 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연약한 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뺨을 맞은 그녀는 머리가 윙윙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녀는 상대방에게 맞설 힘이 없어 억지로 버티며 눈앞에서 날뛰는 박하선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박하선 씨, 무슨 뜻이에요?”“별 뜻 없어. 그냥 당신 볼 때마다 때릴 생각이야.”박하선은 턱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리면서 다시 손을 들어 서유의 뺨을 내리쳤다. 그 모습에 서유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박하선의 손길을 피했다. 그녀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 해지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연지유가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챘다.한편, 한발 물러난 서유가 핸드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 하자 박하선은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다행히 연지유가 핸드폰을 낚아채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또다시 손을 뻗어 서유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 바로 이때, 연지유가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하선 씨, 오고 가는 사람이 많으니 여기서 이러는 건 좀 그래요.”이곳은 쇼핑몰 입구라서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찍힌다면 그녀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비록 여론을 잠재울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최대한 이씨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박하선은 이내 손을 거두고는 뒤에 있던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경호원들은 손수건을 꺼내 서유의 입을 틀어막고는 그녀를 붙잡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경호원들은 서유에게 도망갈 기회조차 주지 않고 던져버렸다. 그리고 두 경호원이 나서서 그녀를 꽉 붙잡고 있었다. 이때, 박하선과 연지유가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들어왔다.그들은 높은 권력자처럼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하선 씨, 병원에서 하선 씨한테 무례하게 군 사람이 이 여자죠?”“맞아요.
그녀는 분홍색 거품을 내며 기침을 하였고 거품이 물속으로 들어가 변기의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경호원은 깜짝 놀랐고 그녀가 피를 토한 줄 알고 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공기를 들이마신 서유는 점차 숨을 돌리긴 했지만 계속해서 기침을 했다.기침을 하면 여전히 분홍색 거품 가래가 나왔는데 이건 말기 증상이었다.그걸 모르는 박하선은 물에 빠진 그녀의 위가 상한 줄 알고 화가 좀 풀렸다. 박하선은 이를 악물고 서유를 노려보았다.“자업자득이야. 물에 빠져 죽어도 당신은 할말 없어.”말을 마친 박하선이 경호원들을 향해 턱을 치켜들자 경호원들은 그제야 서유를 풀어주었다.“이번에는 한번 봐줄게. 또 다시 반항한다면 살아서 나갈 생각 하지 마.”그녀는 독한 말을 내뱉고는 연지유의 팔짱을 끼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바로 이때, 뜻밖에도 등 뒤에서 젖은 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서유가 허약한 모습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박하선 씨는 아직 변기 물 맛을 보지 못했죠? 그냥 가면 어떡해요?”움찔하던 박하선은 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 계집애가 날 변기에 밀어 넣을 생각인 아니겠지?’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그녀의 머리는 변기 속으로 들어갔다.서유는 온 힘을 다해 박하선을 변기에 밀어 넣었고 두 손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쥐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서유를 잡으려 하자 서유가 호통쳤다.“이 여자가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날 가만히 내버려둬야 할 거예요.”박하선의 목숨을 쥐고 있는 그녀는 경호원들이 달려들면 박하선의 목을 심하게 조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누구 하나쯤은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평소에 연약해 보이던 서유가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강해질 줄은 몰랐다. 연지유는 경호원들에게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한 뒤 조용히 서유의 등 뒤로 가서 그녀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두피가 저리는 듯한 고통에 서유는 저도
이제 막 간신히 숨을 돌린 박하선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승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렇게 학대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화가 미칠 것만 같았다. 바닥에서 일어난 그녀는 서유를 향해 달려가더니 그녀를 세게 밀쳤다. 무방비 상태였던 서유는 맞은편 칸으로 세게 밀려났고 머리가 변기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순식간에 빨간 피가 흘러나와 변기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방울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이승하는 얼굴이 굳어졌고 연지유의 허리를 감싸안은 손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갔다.통증을 밀려온 연지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승하 씨, 왜 그래?”이승하는 이내 그녀를 놓아주고는 서유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내밀던 그가 연지유의 의아한 눈빛을 눈치채고 억지로 손을 거두었다. 그는 서유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사과해.” 그 말에 서유는 고개를 들었고 붉은 피가 그녀의 시선을 가리고 있어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작고 힘없는 그녀를 덮어버린 것 같았고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모습을 잘 보지는 못했어도 그가 하는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박하선에게 사과하라고 하였고 이건 이유조차 따지지 않는 명령이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에게 평범한 사람인 서유는 영원히 그들과 옳고 그름을 논할 자격이 없었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은 처참해 보이기도 했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변기를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박하선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미안해요, 박하선 씨.” 그녀는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마치 잘못을 저지른 하인처럼 일말의 존엄도 없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보며 이승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서서 박하선을 쳐다보았고 눈 밑에 살기가 가득한 그녀를 보며 그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혼쭐을 냈으
뒤에 있는 서유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이승하는 박하선을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이젠 만족해?”이승하가 뺨을 때리는 모습을 보고 박하선은 그제야 의심을 풀었다. 둘째 오빠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절대 때리지 않았고 오히려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린다는 건 그가 이 여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방금 이 여자의 편을 든 것도 아마 주서희 그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을 위해 주서희의 친구를 혼내주었고 이건 둘째 오빠가 여전히 자신을 가장 아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녀는 원래 서유를 죽이려고 했지만 자신을 향한 둘째 오빠의 사랑이 사라져 버리는 게 싫어서 이 일은 이쯤에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빠가 이 여자를 직접 혼내준 걸로 충분해.”박하선은 작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이승하에게 건네주었다.“손 닦아. 더러우니까...”이승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티슈를 받아 고개를 숙이고 손을 닦으면서 곁눈질로 바닥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서유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그는 가슴이 답답했고 온몸에 고통이 전해졌다. 1초만 더 있으면 미친 짓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 빠르게 시선을 거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하선이 서유를 발로 차려 할 때 이승하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안 갈 거야?”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발을 거두고는 경호원을 데리고 이승하의 뒤를 따라갔다. 옆에 있던 연지유도 서유를 쳐다보며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시끄럽게 등장해 시끄럽게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서유는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죽기 직전의 인형처럼 아무런 의식도 생각도 없었다. 화장실 안의 불빛이 깜박거리더니 이내 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뒤통수에서 뜨거운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안 돼서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해졌고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이승하의 메시지를 받고 주서희가 달려왔을 때 서
정가혜, 정가혜...어렴풋이 들리는 정가혜의 울음소리에 그녀는 걱정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가 안개 속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마침 정가혜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서유야, 가지 마. 얼른 돌아와. 아직 너한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정가혜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신선한 산소가 들어오자 그녀의 심장이 되살아났다. 점차 안개가 걷히고 정가혜도 사라져 버렸고 그녀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주 원장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얼른, 계속 산소를 공급하세요!”주서희는 심전도 측정기에 변동하는 데이터를 보고 갑자기 몸에 힘이 플렸다.환자가 죽을까 봐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두 손이 너무 떨려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구 선생님, 환자분 뒤통수는 어때요?”이제 막 지혈을 마친 구 선생은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주 원장을 보고 이 환자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피는 이미 멈췄습니다. 병원으로 돌아가서 못만 제거하면 됩니다.” “다행히 못이 길지 않아 혈관과 신경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진작 뇌사했을 겁니다.” 그의 말에 주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다가가 서유의 손을 만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기가 전혀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그녀의 손이 지금은 조금 따뜻해졌다. 다행히 쇼핑몰이 병원에서 멀지 않았고 그녀가 제때 도착했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랬다면 서유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힘들게 살려도 서유는 아마 두 달도 버티지 못할 거다...그녀가 서유를 멍하니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이승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여자는 어때?”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이승하의 담담한 목소리는 마치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듯했고 서유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서유 씨는...”주서희는 어렵게 구조된 서유를 보며 이
오늘 저녁 근무를 하고 있던 정가혜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고 오른쪽 눈꺼풀이 마구 뛰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서유였고 급히 서유한테 전화를 여러 번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급한 나머지 그녀는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고 가는 길 내내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집 문을 막 열려고 할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급하게 물었다. “서유야, 뭐 하고 있었어? 왜 전화를 안 받아? 걱정돼 죽는 줄 알았잖아.”전화기 너머로 서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서유 씨 언니분인가요?”낯선 사람이 전화를 받자 정가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네. 그쪽은 누구신지?”“주서희예요. 지난번에 댁에서 봤었죠?”“주서희 씨요?”정가혜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늦은 밤에 왜 당신이 서유의 전화를 받아요? 서유한테 무슨 일 생긴 건가요?”“별일 없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주서희는 지난번에 서유가 자신에게 미친 듯이 눈치를 준 일이 생각나서 정가혜에게 진실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가혜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주 선생님, 거짓말 하지 마세요. 매번 서유가 심장병이 발작할 때마다 난 늘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서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느낄 수가 있다고요. 빨리 말해 주세요. 서유 지금 어디 있는 거예요?”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던 주서희는 정가혜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심장 기능 부전의 증상이 있다고는 하지 않고 서유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고만 말했다. 서유가 혼수상태라는 말을 듣고 정가혜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그녀는 문고리를 꽉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주 선생님, 병원 주소 좀 알려주세요.”주서희는 주소를 정가혜에게 알려주고는 그녀를 위로했다.“가혜 씨,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우리 병원에 있으니까 계속 서유 씨 상태 지켜볼 거예요. 일단 갈아입을 옷 좀 준비해 주세요. 지금 상태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