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말에 추억에 잠겨있던 강중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이승하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맞아. 널 이용해서 그들을 제거하는 게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더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그랬어. 어찌 됐든 그들은 너의 가족이니까.”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원수를 갚으려고 곽씨 가문처럼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우물 안에 가두고 아주 조금씩 괴롭혀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할 것이다.상철수가 독한 인간이라면 강중헌은 그보다 더 악랄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서 이런 판을 짰는데 그에 이끌려 이 판에 들어온 바둑 이승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작부터 그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일곱 살 때, 죽을 때까지 맞은 저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어르신이었습니다. 절 구원해 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르신에게 전 그저 바둑알에 불과한 존재였군요.”강중헌에게 자신이 이용당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리 직접 확인하고 나니 가슴이 아팠다. 눈앞에서 쏟아지는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낳아준 어머니를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새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조차도 단지 그가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하여 일곱 살이 되던 해, 피투성이인 그를 안아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강중헌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겁먹지 말거라. 내가 있으니 앞으로 다 좋아질 것이다.”그땐 정말 강중헌이 그의 인생의 구원자인 줄 알았고 마지막 희망인 줄 알았다. 물론 강중헌도 그를 진심으로 잘 대해주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친 강중헌은 그한테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스승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S 조직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겨울이 오기도 전에, 자상했던 강중헌은 얼음장처럼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얼어붙었다. 이 순간부터 일곱 살짜리 그 남자아이는
햇빛 아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저 때문에 아내가 노심초사하며 사는 거 원치 않습니다. 그저 그 여자와 남은 인생 함께 보내고 싶은 것도 잘못인가요?”S 조직에 있는 한 그는 영원히 맘 편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신분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서유는 물론이고 그의 가문까지도 분명 보복을 받게 될 테니까. “넌 잘못이 없다.”“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입니까?”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강중헌에게 물었다. “제 잘못이 아니라면 택이의 잘못인가요?”그를 힐끗 쳐다보던 강중헌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승하는 천천히 몸을 곧게 세우고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차가운 눈으로 강중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어르신의 이기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십니까?”이승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S 조직의 명단을 하나하나 가리켰다.“이들은 어르신의 복수심 때문에 처참히 죽었습니다.”“어릴 적부터 저와 함께 자라온 택이가 루드웰에서 죽었단 말입니다.”“어르신의 아들 강도윤도 제가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죽었을 겁니다.”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고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솟아올랐다. “강도윤은 어르신의 양아들입니다. 어떻게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수 있는 겁니까? 어르신한테 마음이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강중헌의 기억 속에 이승하는 늘 감정조절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택이와 강도윤 그리고 다른 멤버들 때문에 이승하가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도윤이가 내 양아들인 건 맞지만 도윤이의 부친이 바로 곽승준의 아들이야. 그러니 정이 있을 것도 없지.”그러니까... 강중헌의 아버지가 빼앗아 온 darkness는 원래 강도윤의 것이었다.“강도윤이 도둑을 아버지로 여긴 거군요.”강중헌은 그 말이 거슬렸다.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승하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너한테는 알린 적이 없다.”어둠 속에 서 있는 강도윤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택이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제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데 제가 어찌 빠질 수 있겠습니까?”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강도윤을 넘어 소수빈에 의해 닫힌 문에 닿았다. “일단 돌아가서 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떠하냐?”강도윤은 경멸이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절 입양하고 일부러 저한테 진실을 숨긴 건 대표님을 키워주고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실은 강중헌이 날카로운 칼자루 두 개를 갈고 닦았다는 것이죠.”이승하와 강도윤은 강중헌이 갈고 닦은 칼이었다. 이승하의 칼날은 그의 가족을 겨누고 있었고 강도윤의 칼날은 강중헌이 세력을 확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택이 뿐만 아니라 루드웰에서 죽은 우리 형제들은 모두 복수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강중헌에게 충직했죠.”이 멤버들은 S 조직이라는 숨겨진 세력을 이용하여 가문의 걸림돌을 제거했지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굳건히 지켜온 이념이 있었다. 비즈니스 업계의 걸림돌만 제거하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려고 이 조직에 가입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까지 걸고 싸웠던 형제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강도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번 일이 끝나면 전 강중헌과 적이 될 겁니다. 대표님께서는 그저 모른 척하십시오.”그가 강도윤을 힐끔 쳐다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이 일이 끝난 후 멤버들을 해체하고 상철수의 손을 빌려 강중헌과 적이 되는 거야. 네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지금껏 충분히 이용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상철수와 강중헌이 알아서 하게 물러날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이승하는 이걸 이용해 서유를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 이승하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랭함, 강도윤에게는 이게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슬퍼하실 줄 알았습니다. 대표
장갑을 끼고 그가 헬기 옆에서 대기 중인 멤버들을 쳐다보았다.“세 가지 일만 잘 새겨두거라.”“첫째, 목숨을 부지하라.”“둘째, 49명을 다 죽이면 바로 철수한다.”“셋째, 택이를 죽인 그자는 나한테 넘기거라.”간결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순식간에 귀를 찢는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네.”그가 시선을 거두고 강도윤과 강세은을 쳐다보았다. “내가 첫 번째로 나설 것이니 너희들은 뒤를 따르거라.”“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루드웰 쪽에서 폭탄을 얼마나 배치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발로 나서는 헬기 조종사는 폭탄을 투척하고 바닥에 있는 폭탄을 터뜨려야 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위치에 노출되는 사람이었다. 강도윤과 강세은은 이승하가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그가 항상 싸움에서 승리해 왔던 사람이라는 걸 그들은 잊어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승하가 앞장서면 인심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하는 두 사람의 걱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지나쳐 검은색 승합차 앞에 도착했다.“연석아, 폭파 시간 지연 시스템 작동시켰어?”첨단 전자기기로 가득한 차 안에 앉아 있던 이연석은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금방이면 돼요.”“다 됐어요.”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형,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누구도 형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이승하는 뒤돌아서 소수빈을 향해 손을 폈다. 소수빈은 이내 권총 한 자루를 꺼내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총을 꽉 쥔 채로 그가 헬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헬기에 탑승하려고 할 때, 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이승하, 나도 같이 가.”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수없이 많은 총에 둘러싸인 육성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라시아연맹 상업 연합회의 부회장이자 전문적으로 S 조직과 루드웰을 타격하던 인물, 그를 보고 S 조직의
흠칫하던 김종수는 멍하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무슨 뜻이냐?”“저희 대표님이 바로 김종수 씨의 누나 김율의 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무심하게 내뱉은 강도윤의 말에 김종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자네는... 박화영의 아들이 아닌가?”김율과 이준태가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김종수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승하가 그 두 사람의 아들일 줄이야?믿을 수 없었던 김종수는 이승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생김새만 놓고 보면 알아볼 수가 없지만 미간 사이가... 자세히 보니 차가운 느낌이 딱 김율이었다. 그의 기억 속의 김율은 늘 차가운 얼굴이었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안중에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승하 또한 그녀와 똑 닮은 것 같았다. 높은 자리에서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저 눈빛...보면 볼수록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믿을 수 없다던 그의 표정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 외삼촌이라고 한 거였군.”두 번이나 외삼촌이라고 불렀지만 그때마다 서유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이승하가 이미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강도윤을 노려보던 이승하가 고개를 돌리고 김종수를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혈연관계일 뿐,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한편, 그 말을 듣고 육성재는 큰 충격을 받았다.“당신이... 우리 이모의 자식이라고?”이승하가 이모의 자식이라는 건 그가 이승하의...사촌 동생?이런 젠장!어릴 때부터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이승하가 그의 사촌 형이라니?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육성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이승하에게 늘 당하기만 하더라니. 태어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고 있는 김종수를 보며 강도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김종수 씨, 저희는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조종자 49명을 다 처리하고 나면 철수할 생각이에요.”“당신이 길을 터준다면 당신의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형제들의 목숨만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솔직히 강도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꽤 유혹적인 제안이라 김종수 밑에 있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넷째 어르신,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 많은 조종자들 중에서 저희만 이런 명을 받게 됐지요. 이건 저희더러 죽으라는 거 아닙니까?”“맞습니다.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지원팀까지도 보내주지 않고. 저희가 어떻게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까?”누군가 앞장서서 먼저 입을 열자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김종수는 눈을 내리깐 채 총을 쳐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삼촌.”이승하가 사촌 형이라는 사실은 아직 납득할 수 없지만 육성재는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삼촌이 루드웰에 대해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알지만 현재 상황은 삼촌에게 많이 불리합니다. 그냥 지켜만 보시죠.”“김씨 가문과 S 조직 사이의 원한은 이 일이 끝난 후에 해결하세요. 정말 형제들을 죽도록 내버려둘 겁니까?”김종수는 망설이는 눈을 들어 육성재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이승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담담하면서 패기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불타오르고 있는 산속에서 울려 퍼졌다. “싸운다면 끝까지 맞서겠습니다. 그러나...”남자의 살벌한 눈빛이 김종수를 지나쳐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옷차림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차갑고 매정한 그의 말에 맞은 편에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이 몰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넷째 어르신...”그때, 김종수의 부하가 겁에 질린 듯 김종수를 다시 불렀고 떨리는 목소리에
그렇지. 사살 프로그램이 있었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조종자들은 남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남기를 선택한 조종자들은 대부분 S 조직과 피맺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반면,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얼마 후, 모니터실에 있던 사람들이 반쯤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대기하였다.“형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눈앞에 남은 조종자들을 쳐다보며 상철수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방법을 택한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나서 그가 살벌한 눈빛을 번쩍 들고 조종자들을 둘러보았다. “각자 통제하는 구역으로 돌아가라. S 조직이 가는 구역마다 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거라.”“네.”조종자들은 명을 받은 뒤 모니터실을 빠져나갔다.한편, 상철수는 화학 구역으로 가서 콘솔을 열어 칩 폭파 시스템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에 둘러싸인 이연석은 폭파 시간이 단축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코드를두드렸다.두 사람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밖에서 이미 A 구역까지 진입한 이승하가 S 조직의 멤버들을 이끌고 곧장 상층 구역으로 향했다.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려던 조종사는 CCTV 속 남자가 대문의 암호를 풀고는 다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뜻이지?”“설마 우리한테 사살 프로그램이 있는 걸 눈치챈 걸까? 그래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A 구역의 조종자들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우리는 저들을 사살해야 해.”1팀의 여섯째 어르신의 말이 나오자마자 콘솔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바로 사격 거리를 조정했다. 그런데 온몸에 살기가 가득했던 그 남자는 그들에게 시스템을 조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훤칠한 손가락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1팀, 현관 왼쪽
난장판이 된 탈출 통로를 쳐다보며 이승하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강도윤, 여긴 네가 맡아.”고개를 끄덕이던 강도윤은 이내 팀원들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쫓아갔다.맨 뒤에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도망치면서 총을 쐈고 총을 피하던 강도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우리는 조종자들만 죽인다. 루드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눈치껏 물러나거라.”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하물며 돈을 받고 루드웰을 위해 일하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할 테지. 강도윤이 그들을 지나쳐 맨 앞의 조종자를 쫓고 있는 것을 본 사내들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배신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던 여섯째 어르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S 조직과 싸우기로 했다.“어디 한번 죽여봐.”여섯째 어르신은 총을 뽑아 들고 강도윤의 이마를 겨누었지만 강도윤만큼 행동이 빠르자 않아 순식간에 머리가 뚫렸다. 거대한 몸집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9명의 조종자들은 여섯째 어르신이 죽은 것을 보고 줄줄이 도망치는 것을 멈췄다.“다들!”“총을 쏘거라.”루드웰의 조종자들도 잘 훈련이 되어 있었다. 여섯째 어르신이 죽자마자 1-7이 명령을 내렸다.1-7의 명령에 9명의 조종자들은 하나같이 총을 들고 S 조직 멤버를 향해 총을 쐈다. 여섯째 어르신이 쓰러지는 순간, 그들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강도윤은 그들과 함께 죽을 생각이 없었다.“자신을 지키는 동시에 저들을 죽이거라.”강도윤의 말이 떨어지자 S 조직의 멤버들도 그들을 조준하고 미친 듯이 총을 쐈다. 총알이 오가는 와중에 S 조직의 멤버들도 부상을 당했지만 하도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인지라 큰 부상은 면했다. 양측은 5분 동안 격전을 벌였고 결국 9명의 조종자는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이 쓰러진 후,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남자가 인파 속에서 걸어 나왔다.남자는 짙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