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의 정씨 가문은 점점 몰락하기 시작했고 빚도 많이 지고 사람들에게 미움도 많이 받고 있었어.”“빚쟁이들한테 쫓기고 원수들에게 쫓기는 걸 거의 대부분 상철수가 막아줬었지.”“상철수의 보호 아래 아무도 감히 정씨 집안을 건드리지 못했고 darkness조차도 정여희를 가까이하지 못했어.”“그러다가 상철수는 아버지의 강요로 강은영과 결혼하게 되었고 정여희는 홧김에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지. 그래서 곽도원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게 된 거야.”“곽도원은 darkness를 이끌고 정여희의 일가를 죽였고 밑에 있는 건달들에게 출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정여희를 성폭행하게 하였어.”“잔인하기 그지없었지.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그 당시 정여희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대. 결국 죽을 때까지도 눈을 감지 못한 거야.”“그 당시 곽도원은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상철수의 미움을 살 수가 없었어. 하여 정여희를 죽이고 난 뒤, 정씨 집안에 원한이 있는 다른 가문의 짓으로 위장했어.”“그 덕에 상철수는 몇 년이 지나서야 darkness를 조사하게 되었어. 그러나 그때 darkness에 내란이 일어나 숙청된 후라 상철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어.”“그 후, S 조직이 나타났고 상철수가 그때 실마리를 알아차리게 된 거야. 그러고는 몇 년 뒤에 S 조직을 모방해 Ace를 만들었고 S 조직 멤버들의 명단을 수소문하게 되었어...”정여희와 곽승민 그리고 상철수 세 사람 사이의 원한에 대해 자세히 말한 뒤, 강중헌은 고개를 들어 반대편에 앉아 있는 차분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사실 곽승민을 실제로 죽인 사람은 상철수였어. 곽도원은 그저 강은영의 꼼수에 놀아난 것이야.”“상철수가 계약이 끝난 뒤 이혼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야. 그러나 강은영은 곽도원의 칼을 빌려 정여희를 처리했어.”강중헌의 말을 듣고 있던 이승하의 차가한 얼굴에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강중헌을 탓하는 눈빛이었다.그런 그의 모습에 강중헌은 무의식적으로 해명했다.“너한테
이승하의 말에 추억에 잠겨있던 강중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이승하의 눈빛을 마주 보았다. “맞아. 널 이용해서 그들을 제거하는 게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더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그랬어. 어찌 됐든 그들은 너의 가족이니까.”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원수를 갚으려고 곽씨 가문처럼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우물 안에 가두고 아주 조금씩 괴롭혀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할 것이다.상철수가 독한 인간이라면 강중헌은 그보다 더 악랄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서 이런 판을 짰는데 그에 이끌려 이 판에 들어온 바둑 이승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작부터 그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일곱 살 때, 죽을 때까지 맞은 저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어르신이었습니다. 절 구원해 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르신에게 전 그저 바둑알에 불과한 존재였군요.”강중헌에게 자신이 이용당했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리 직접 확인하고 나니 가슴이 아팠다. 눈앞에서 쏟아지는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낳아준 어머니를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새어머니에게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그를 키워준 할아버지조차도 단지 그가 이용할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하여 일곱 살이 되던 해, 피투성이인 그를 안아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던 강중헌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겁먹지 말거라. 내가 있으니 앞으로 다 좋아질 것이다.”그땐 정말 강중헌이 그의 인생의 구원자인 줄 알았고 마지막 희망인 줄 알았다. 물론 강중헌도 그를 진심으로 잘 대해주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마주친 강중헌은 그한테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스승 같은 존재였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S 조직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겨울이 오기도 전에, 자상했던 강중헌은 얼음장처럼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얼어붙었다. 이 순간부터 일곱 살짜리 그 남자아이는
햇빛 아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승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저 때문에 아내가 노심초사하며 사는 거 원치 않습니다. 그저 그 여자와 남은 인생 함께 보내고 싶은 것도 잘못인가요?”S 조직에 있는 한 그는 영원히 맘 편히 지낼 수 없을 것이다. 신분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서유는 물론이고 그의 가문까지도 분명 보복을 받게 될 테니까. “넌 잘못이 없다.”“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입니까?”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강중헌에게 물었다. “제 잘못이 아니라면 택이의 잘못인가요?”그를 힐끗 쳐다보던 강중헌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승하는 천천히 몸을 곧게 세우고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차가운 눈으로 강중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어르신의 이기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십니까?”이승하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S 조직의 명단을 하나하나 가리켰다.“이들은 어르신의 복수심 때문에 처참히 죽었습니다.”“어릴 적부터 저와 함께 자라온 택이가 루드웰에서 죽었단 말입니다.”“어르신의 아들 강도윤도 제가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죽었을 겁니다.”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고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솟아올랐다. “강도윤은 어르신의 양아들입니다. 어떻게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몰수 있는 겁니까? 어르신한테 마음이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강중헌의 기억 속에 이승하는 늘 감정조절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택이와 강도윤 그리고 다른 멤버들 때문에 이승하가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도윤이가 내 양아들인 건 맞지만 도윤이의 부친이 바로 곽승준의 아들이야. 그러니 정이 있을 것도 없지.”그러니까... 강중헌의 아버지가 빼앗아 온 darkness는 원래 강도윤의 것이었다.“강도윤이 도둑을 아버지로 여긴 거군요.”강중헌은 그 말이 거슬렸다.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승하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너한테는 알린 적이 없다.”어둠 속에 서 있는 강도윤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택이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제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데 제가 어찌 빠질 수 있겠습니까?”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강도윤을 넘어 소수빈에 의해 닫힌 문에 닿았다. “일단 돌아가서 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떠하냐?”강도윤은 경멸이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절 입양하고 일부러 저한테 진실을 숨긴 건 대표님을 키워주고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실은 강중헌이 날카로운 칼자루 두 개를 갈고 닦았다는 것이죠.”이승하와 강도윤은 강중헌이 갈고 닦은 칼이었다. 이승하의 칼날은 그의 가족을 겨누고 있었고 강도윤의 칼날은 강중헌이 세력을 확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택이 뿐만 아니라 루드웰에서 죽은 우리 형제들은 모두 복수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강중헌에게 충직했죠.”이 멤버들은 S 조직이라는 숨겨진 세력을 이용하여 가문의 걸림돌을 제거했지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굳건히 지켜온 이념이 있었다. 비즈니스 업계의 걸림돌만 제거하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려고 이 조직에 가입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까지 걸고 싸웠던 형제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강도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번 일이 끝나면 전 강중헌과 적이 될 겁니다. 대표님께서는 그저 모른 척하십시오.”그가 강도윤을 힐끔 쳐다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이 일이 끝난 후 멤버들을 해체하고 상철수의 손을 빌려 강중헌과 적이 되는 거야. 네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지금껏 충분히 이용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상철수와 강중헌이 알아서 하게 물러날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이승하는 이걸 이용해 서유를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 이승하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랭함, 강도윤에게는 이게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슬퍼하실 줄 알았습니다. 대표
장갑을 끼고 그가 헬기 옆에서 대기 중인 멤버들을 쳐다보았다.“세 가지 일만 잘 새겨두거라.”“첫째, 목숨을 부지하라.”“둘째, 49명을 다 죽이면 바로 철수한다.”“셋째, 택이를 죽인 그자는 나한테 넘기거라.”간결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순식간에 귀를 찢는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네.”그가 시선을 거두고 강도윤과 강세은을 쳐다보았다. “내가 첫 번째로 나설 것이니 너희들은 뒤를 따르거라.”“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루드웰 쪽에서 폭탄을 얼마나 배치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발로 나서는 헬기 조종사는 폭탄을 투척하고 바닥에 있는 폭탄을 터뜨려야 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위치에 노출되는 사람이었다. 강도윤과 강세은은 이승하가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그가 항상 싸움에서 승리해 왔던 사람이라는 걸 그들은 잊어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승하가 앞장서면 인심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하는 두 사람의 걱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지나쳐 검은색 승합차 앞에 도착했다.“연석아, 폭파 시간 지연 시스템 작동시켰어?”첨단 전자기기로 가득한 차 안에 앉아 있던 이연석은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금방이면 돼요.”“다 됐어요.”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형,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누구도 형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이승하는 뒤돌아서 소수빈을 향해 손을 폈다. 소수빈은 이내 권총 한 자루를 꺼내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총을 꽉 쥔 채로 그가 헬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헬기에 탑승하려고 할 때, 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이승하, 나도 같이 가.”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수없이 많은 총에 둘러싸인 육성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라시아연맹 상업 연합회의 부회장이자 전문적으로 S 조직과 루드웰을 타격하던 인물, 그를 보고 S 조직의
흠칫하던 김종수는 멍하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무슨 뜻이냐?”“저희 대표님이 바로 김종수 씨의 누나 김율의 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무심하게 내뱉은 강도윤의 말에 김종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자네는... 박화영의 아들이 아닌가?”김율과 이준태가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김종수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승하가 그 두 사람의 아들일 줄이야?믿을 수 없었던 김종수는 이승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생김새만 놓고 보면 알아볼 수가 없지만 미간 사이가... 자세히 보니 차가운 느낌이 딱 김율이었다. 그의 기억 속의 김율은 늘 차가운 얼굴이었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안중에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승하 또한 그녀와 똑 닮은 것 같았다. 높은 자리에서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저 눈빛...보면 볼수록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믿을 수 없다던 그의 표정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 외삼촌이라고 한 거였군.”두 번이나 외삼촌이라고 불렀지만 그때마다 서유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이승하가 이미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강도윤을 노려보던 이승하가 고개를 돌리고 김종수를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혈연관계일 뿐,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한편, 그 말을 듣고 육성재는 큰 충격을 받았다.“당신이... 우리 이모의 자식이라고?”이승하가 이모의 자식이라는 건 그가 이승하의...사촌 동생?이런 젠장!어릴 때부터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이승하가 그의 사촌 형이라니?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육성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이승하에게 늘 당하기만 하더라니. 태어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고 있는 김종수를 보며 강도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김종수 씨, 저희는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조종자 49명을 다 처리하고 나면 철수할 생각이에요.”“당신이 길을 터준다면 당신의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형제들의 목숨만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솔직히 강도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꽤 유혹적인 제안이라 김종수 밑에 있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넷째 어르신,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 많은 조종자들 중에서 저희만 이런 명을 받게 됐지요. 이건 저희더러 죽으라는 거 아닙니까?”“맞습니다.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지원팀까지도 보내주지 않고. 저희가 어떻게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까?”누군가 앞장서서 먼저 입을 열자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김종수는 눈을 내리깐 채 총을 쳐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삼촌.”이승하가 사촌 형이라는 사실은 아직 납득할 수 없지만 육성재는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삼촌이 루드웰에 대해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알지만 현재 상황은 삼촌에게 많이 불리합니다. 그냥 지켜만 보시죠.”“김씨 가문과 S 조직 사이의 원한은 이 일이 끝난 후에 해결하세요. 정말 형제들을 죽도록 내버려둘 겁니까?”김종수는 망설이는 눈을 들어 육성재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이승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담담하면서 패기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불타오르고 있는 산속에서 울려 퍼졌다. “싸운다면 끝까지 맞서겠습니다. 그러나...”남자의 살벌한 눈빛이 김종수를 지나쳐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옷차림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차갑고 매정한 그의 말에 맞은 편에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이 몰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넷째 어르신...”그때, 김종수의 부하가 겁에 질린 듯 김종수를 다시 불렀고 떨리는 목소리에
그렇지. 사살 프로그램이 있었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조종자들은 남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남기를 선택한 조종자들은 대부분 S 조직과 피맺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반면,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얼마 후, 모니터실에 있던 사람들이 반쯤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대기하였다.“형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눈앞에 남은 조종자들을 쳐다보며 상철수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방법을 택한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나서 그가 살벌한 눈빛을 번쩍 들고 조종자들을 둘러보았다. “각자 통제하는 구역으로 돌아가라. S 조직이 가는 구역마다 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거라.”“네.”조종자들은 명을 받은 뒤 모니터실을 빠져나갔다.한편, 상철수는 화학 구역으로 가서 콘솔을 열어 칩 폭파 시스템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에 둘러싸인 이연석은 폭파 시간이 단축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코드를두드렸다.두 사람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밖에서 이미 A 구역까지 진입한 이승하가 S 조직의 멤버들을 이끌고 곧장 상층 구역으로 향했다.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려던 조종사는 CCTV 속 남자가 대문의 암호를 풀고는 다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뜻이지?”“설마 우리한테 사살 프로그램이 있는 걸 눈치챈 걸까? 그래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A 구역의 조종자들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우리는 저들을 사살해야 해.”1팀의 여섯째 어르신의 말이 나오자마자 콘솔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바로 사격 거리를 조정했다. 그런데 온몸에 살기가 가득했던 그 남자는 그들에게 시스템을 조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훤칠한 손가락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1팀, 현관 왼쪽
이제 막 열여덟 살이 된 제시카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러나 그가 걸음을 옮길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를 악물고 애써 참았다. 이하준, 이번 생에 절대 내 손안에 떨어지지 마.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감정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이하준은 그녀의 복수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잠시 후, 연이를 업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하준이는 연이가 뚱뚱하다고 투덜댔고 화가 난 연이는 그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웨딩카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옥신각신 다투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던 이승하는 서유의 손을 잡고 웨딩카의 뒤를 따라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아빠가 없는 연이에게 오늘 이승하는 아빠 노릇을 해주기로 했다. 연이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어가 그녀의 손을 신랑에게 맡겼다.입장하기 전, 문밖에 서 있던 연이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치켜들고는 그를 쳐다보았다.“이모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모부한테 손도 못 대게 하시더니. 오늘은 어쩔 수 없죠?”검은 정장 차림의 그가 담담한 얼굴로 하이힐을 신고 있는 연이를 내려다보았다.“오늘만이야. 다음은 없어.”연이가 입을 삐죽거리며 눈을 흘겼다.“어쩜 이리 하준이랑 똑같아요? 이렇게 좋은 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요?”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덕담 한마디 내뱉었다.“우주랑 평생 행복하길 바란다. 이번 생에 이리 네 손 잡고 입장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해...”연이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연이의 손을 잡고 입장하여 그녀의 손을 심우주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카한테 경고했다.“내 딸한테 잘해. 안 그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그 말 한마디에 연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흐릿한 시선 속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승하의 얼굴이 들어왔다.이모부한테 그녀는 처음부터 딸이었다...감동을 받은 연이는 발길을 돌리려는 이승하를 덥석 끌어안고 낮은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겹게 말을 뱉었다.“연이야, 뒤돌아서 나 좀 봐봐.”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리니 얇은 셔츠 차림에 눈밭에 서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잠깐 멈칫하던 그녀는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 나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찾아오지 마.”말을 마친 연이는 전화를 끊고 남자 친구의 손을 잡은 채 숙소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남자 친구가 허를 찌르는 물음을 내던졌다.“그렇게 귀찮아할 거면서 왜 연락처를 아예 차단하지 않았어?”차단하면 다시는 연락할 수 없을 것이다. 눈을 내리깔며 한동안 망설이던 연이는 남자 친구 앞에서 심우주의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연이를 찾을 수 없었던 심우주는 2년 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살았다. 문자를 받지도 못하는 그녀의 핸드폰으로 2년 동안 수없이 많은 문자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연이의 남자 친구는 바람을 피우고 연이를 차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연이는 오히려 침착하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를 찾아가 따지지도 않았다. 그후, 심우주 학교의 퀸카가 그를 미친 듯이 따라다닌다는 소식을 듣고 연이는 그제야 남자 친구의 바람에 자신이 왜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우주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누구한테 먼저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 졸업식 당일 밤, 우연히 심우주를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그가 수없이 몰래 찾아와서 자신을 보고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마음이 변치 않은 그를 보며 그녀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날 좋아하지 않았던 애가 언제부터 날 좋아하게 된 걸까?그녀의 의혹에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진한 키스로 뒤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진심을 쏟아냈다.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 연이는 뼛속까지 보수적이었던 자신을 다행으로 여겼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았기 때
이승하를 따라 차에 올라탄 하준이는 서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해졌다.“엄마, 엄마가 여긴 어떻게...”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된 모습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몰래 네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얼굴에 찍힌 신발 자국을 보니 서유는 더 마음이 아팠다. 손을 뻗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다가 아이가 어색해할까 봐 허공에서 손이 굳어버렸다. 조심스러워하는 엄마를 보고 하준이는 예전처럼 무뚝뚝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수척해진 아이의 얼굴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네가 외국에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걸 알았더라면 5년 전에 엄마는 절대 널 외국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야.”아이가 그녀보다 더 큰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제가 애들을 괴롭히는 편이에요.”아이가 당하는 꼴을 직접 눈으로 본 서유는 자신을 위로하는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 나름 솜씨가 좋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었던 거고요.”말을 마치고 그가 고개를 들어 앞줄에 앉아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는 남자를 우러러보았다.“아빠, 방금 절 구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진짜 영웅 같았어요.”옅은 미소를 짓던 이승하는 소수빈이 건네준 수건을 받아 아이에게 건네줬다.“너도 이제 다 큰 어른인데. 언제까지 내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거야? 나중에 아빠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수건을 받아 대충 머리를 닦던 아이는 모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풍당당한 사람인데 어떻게 없을 수가 있겠어요?”아이의 말에 차가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서유도 소수빈도 아무 말이 없었고 차 안의 분위기가
비가 쏟아진 그날 밤, 이하준은 우산을 쓰고 학교를 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마침 쇠몽둥이를 든 외국인 무리와 마주쳤고 그들은 하나 같이 근육질 몸매에 흉악한 얼굴이었다. 가끔 멍청이 같은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이승하의 말을 명심하고 애써 참았지만 상대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한 번은 누군가 그가 개발한 약을 교수의 물컵에 넣었다. 다른 친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이하준은 그들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응징했고 학교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교수가 그를 믿고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쫓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 악당들은 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질투하고 증오했다. 지금 눈앞의 놈들은 분명 그들이 그를 혼내주려고 부른 사람들일 것이다.학교에 다니면서도 소지섭에게 격투 기술을 배우는 걸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두렵지가 않았다. 우산을 살짝 받쳐 드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눈이 드러났고 그 눈 밑에 살의가 가득했다.근육질 남자들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고 이하준은 손에 든 우산을 접어 날카로운 한끝으로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세게 찔렀다. 싸움 실력이 뛰어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대단하더라도 점점 더 많이 달려오는 근육질의 남자들을 혼자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교수님과 약속했었지만 수세에 몰리자 그는 어쩔수 없이 허리춤에 있던 금빛 칼을 빼 들고 근육질 남자의 복부를 향해 찔렀다. 어린 나이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몇몇 근육질의 남자는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쇠몽둥이를 들어 온 힘을 다해 이하준의 머리를 내리쳤다.이하준의 목숨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보로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면 머리를 쳐야 한다. 바보가 안 된다면 적어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근육질의 남자들은 이하준을 제압하기 위해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