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가 고개를 들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너한테는 알린 적이 없다.”어둠 속에 서 있는 강도윤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택이 그리고 다른 멤버들도 제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복수하는데 제가 어찌 빠질 수 있겠습니까?”이승하의 차가운 시선이 강도윤을 넘어 소수빈에 의해 닫힌 문에 닿았다. “일단 돌아가서 저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떠하냐?”강도윤은 경멸이 가득 찬 웃음을 지었다. “절 입양하고 일부러 저한테 진실을 숨긴 건 대표님을 키워주고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실은 강중헌이 날카로운 칼자루 두 개를 갈고 닦았다는 것이죠.”이승하와 강도윤은 강중헌이 갈고 닦은 칼이었다. 이승하의 칼날은 그의 가족을 겨누고 있었고 강도윤의 칼날은 강중헌이 세력을 확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 “택이 뿐만 아니라 루드웰에서 죽은 우리 형제들은 모두 복수의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강중헌에게 충직했죠.”이 멤버들은 S 조직이라는 숨겨진 세력을 이용하여 가문의 걸림돌을 제거했지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굳건히 지켜온 이념이 있었다. 비즈니스 업계의 걸림돌만 제거하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려고 이 조직에 가입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까지 걸고 싸웠던 형제들이 속았다는 생각에 강도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번 일이 끝나면 전 강중헌과 적이 될 겁니다. 대표님께서는 그저 모른 척하십시오.”그가 강도윤을 힐끔 쳐다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이 일이 끝난 후 멤버들을 해체하고 상철수의 손을 빌려 강중헌과 적이 되는 거야. 네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하는 게 아니라.”지금껏 충분히 이용당했으니 이제부터는 상철수와 강중헌이 알아서 하게 물러날 것이다. 다만 그 전에 이승하는 이걸 이용해 서유를 집으로 데려와야 한다. 이승하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랭함, 강도윤에게는 이게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슬퍼하실 줄 알았습니다. 대표
장갑을 끼고 그가 헬기 옆에서 대기 중인 멤버들을 쳐다보았다.“세 가지 일만 잘 새겨두거라.”“첫째, 목숨을 부지하라.”“둘째, 49명을 다 죽이면 바로 철수한다.”“셋째, 택이를 죽인 그자는 나한테 넘기거라.”간결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순식간에 귀를 찢는 듯한 함성이 들려왔다.“네.”그가 시선을 거두고 강도윤과 강세은을 쳐다보았다. “내가 첫 번째로 나설 것이니 너희들은 뒤를 따르거라.”“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루드웰 쪽에서 폭탄을 얼마나 배치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선발로 나서는 헬기 조종사는 폭탄을 투척하고 바닥에 있는 폭탄을 터뜨려야 했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위치에 노출되는 사람이었다. 강도윤과 강세은은 이승하가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그가 항상 싸움에서 승리해 왔던 사람이라는 걸 그들은 잊어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이승하가 앞장서면 인심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하는 두 사람의 걱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지나쳐 검은색 승합차 앞에 도착했다.“연석아, 폭파 시간 지연 시스템 작동시켰어?”첨단 전자기기로 가득한 차 안에 앉아 있던 이연석은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금방이면 돼요.”“다 됐어요.”이연석은 행동을 멈추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피식 웃었다.“형,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있는 한 누구도 형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이승하는 뒤돌아서 소수빈을 향해 손을 폈다. 소수빈은 이내 권총 한 자루를 꺼내어 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총을 꽉 쥔 채로 그가 헬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헬기에 탑승하려고 할 때, 맑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이승하, 나도 같이 가.”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니 멀지 않은 곳에 수없이 많은 총에 둘러싸인 육성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라시아연맹 상업 연합회의 부회장이자 전문적으로 S 조직과 루드웰을 타격하던 인물, 그를 보고 S 조직의
흠칫하던 김종수는 멍하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승하를 쳐다보았다.“무슨 뜻이냐?”“저희 대표님이 바로 김종수 씨의 누나 김율의 아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무심하게 내뱉은 강도윤의 말에 김종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자네는... 박화영의 아들이 아닌가?”김율과 이준태가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라는 걸 김종수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승하가 그 두 사람의 아들일 줄이야?믿을 수 없었던 김종수는 이승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생김새만 놓고 보면 알아볼 수가 없지만 미간 사이가... 자세히 보니 차가운 느낌이 딱 김율이었다. 그의 기억 속의 김율은 늘 차가운 얼굴이었고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안중에 없는 듯한 사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승하 또한 그녀와 똑 닮은 것 같았다. 높은 자리에서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저 눈빛...보면 볼수록 두 사람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믿을 수 없다던 그의 표정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자네가 나한테 외삼촌이라고 한 거였군.”두 번이나 외삼촌이라고 불렀지만 그때마다 서유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이승하가 이미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하지 않았던 것이냐?”강도윤을 노려보던 이승하가 고개를 돌리고 김종수를 쳐다보았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혈연관계일 뿐,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을까?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한편, 그 말을 듣고 육성재는 큰 충격을 받았다.“당신이... 우리 이모의 자식이라고?”이승하가 이모의 자식이라는 건 그가 이승하의...사촌 동생?이런 젠장!어릴 때부터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이승하가 그의 사촌 형이라니?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육성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이승하에게 늘 당하기만 하더라니. 태어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고 있는 김종수를 보며 강도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김종수 씨, 저희는 형제들의 원수를 갚고 싶을 뿐입니다. 조종자 49명을 다 처리하고 나면 철수할 생각이에요.”“당신이 길을 터준다면 당신의 사람들은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형제들의 목숨만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솔직히 강도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꽤 유혹적인 제안이라 김종수 밑에 있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넷째 어르신, 저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 많은 조종자들 중에서 저희만 이런 명을 받게 됐지요. 이건 저희더러 죽으라는 거 아닙니까?”“맞습니다.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지원팀까지도 보내주지 않고. 저희가 어떻게 목숨 걸고 싸우겠습니까?”누군가 앞장서서 먼저 입을 열자 옆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김종수는 눈을 내리깐 채 총을 쳐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삼촌.”이승하가 사촌 형이라는 사실은 아직 납득할 수 없지만 육성재는 시비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삼촌이 루드웰에 대해 의리를 중시하는 것은 알지만 현재 상황은 삼촌에게 많이 불리합니다. 그냥 지켜만 보시죠.”“김씨 가문과 S 조직 사이의 원한은 이 일이 끝난 후에 해결하세요. 정말 형제들을 죽도록 내버려둘 겁니까?”김종수는 망설이는 눈을 들어 육성재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이 없는 이승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담담하면서 패기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불타오르고 있는 산속에서 울려 퍼졌다. “싸운다면 끝까지 맞서겠습니다. 그러나...”남자의 살벌한 눈빛이 김종수를 지나쳐 총을 들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옷차림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차갑고 매정한 그의 말에 맞은 편에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이 몰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넷째 어르신...”그때, 김종수의 부하가 겁에 질린 듯 김종수를 다시 불렀고 떨리는 목소리에
그렇지. 사살 프로그램이 있었지.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잠시 머뭇거리던 조종자들은 남는 것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남기를 선택한 조종자들은 대부분 S 조직과 피맺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반면, 떠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얼마 후, 모니터실에 있던 사람들이 반쯤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대기하였다.“형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눈앞에 남은 조종자들을 쳐다보며 상철수는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한발 물러서는 방법을 택한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나서 그가 살벌한 눈빛을 번쩍 들고 조종자들을 둘러보았다. “각자 통제하는 구역으로 돌아가라. S 조직이 가는 구역마다 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거라.”“네.”조종자들은 명을 받은 뒤 모니터실을 빠져나갔다.한편, 상철수는 화학 구역으로 가서 콘솔을 열어 칩 폭파 시스템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에 둘러싸인 이연석은 폭파 시간이 단축되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코드를두드렸다.두 사람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밖에서 이미 A 구역까지 진입한 이승하가 S 조직의 멤버들을 이끌고 곧장 상층 구역으로 향했다.사살 프로그램을 작동하려던 조종사는 CCTV 속 남자가 대문의 암호를 풀고는 다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무슨 뜻이지?”“설마 우리한테 사살 프로그램이 있는 걸 눈치챈 걸까? 그래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A 구역의 조종자들을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우리는 저들을 사살해야 해.”1팀의 여섯째 어르신의 말이 나오자마자 콘솔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바로 사격 거리를 조정했다. 그런데 온몸에 살기가 가득했던 그 남자는 그들에게 시스템을 조정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훤칠한 손가락을 뻗어 앞으로 내밀었다.“1팀, 현관 왼쪽
난장판이 된 탈출 통로를 쳐다보며 이승하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강도윤, 여긴 네가 맡아.”고개를 끄덕이던 강도윤은 이내 팀원들을 이끌고 빠른 속도로 쫓아갔다.맨 뒤에 있던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도망치면서 총을 쐈고 총을 피하던 강도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우리는 조종자들만 죽인다. 루드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눈치껏 물러나거라.”생사의 갈림길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하물며 돈을 받고 루드웰을 위해 일하는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할 테지. 강도윤이 그들을 지나쳐 맨 앞의 조종자를 쫓고 있는 것을 본 사내들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검은 옷차림의 사내들이 배신하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었던 여섯째 어르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S 조직과 싸우기로 했다.“어디 한번 죽여봐.”여섯째 어르신은 총을 뽑아 들고 강도윤의 이마를 겨누었지만 강도윤만큼 행동이 빠르자 않아 순식간에 머리가 뚫렸다. 거대한 몸집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졌고 다른 9명의 조종자들은 여섯째 어르신이 죽은 것을 보고 줄줄이 도망치는 것을 멈췄다.“다들!”“총을 쏘거라.”루드웰의 조종자들도 잘 훈련이 되어 있었다. 여섯째 어르신이 죽자마자 1-7이 명령을 내렸다.1-7의 명령에 9명의 조종자들은 하나같이 총을 들고 S 조직 멤버를 향해 총을 쐈다. 여섯째 어르신이 쓰러지는 순간, 그들은 함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강도윤은 그들과 함께 죽을 생각이 없었다.“자신을 지키는 동시에 저들을 죽이거라.”강도윤의 말이 떨어지자 S 조직의 멤버들도 그들을 조준하고 미친 듯이 총을 쐈다. 총알이 오가는 와중에 S 조직의 멤버들도 부상을 당했지만 하도 이런 경험이 많은 사람들인지라 큰 부상은 면했다. 양측은 5분 동안 격전을 벌였고 결국 9명의 조종자는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이 쓰러진 후,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남자가 인파 속에서 걸어 나왔다.남자는 짙
빠른 속도로 화학 구역을 돌파한 남자는 원래 상철수를 직접 잡아내 협상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전에 7라운드 게임을 수정했던 조종자가 여기에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싸늘한 그의 시선이 순식간에 상대방의 머리를 닿았다. 이곳에서 머리가 찢기게 된 후, 이승하는 누군가가 고의로 7라운드의 게임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렇지 않았다면 택이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그들은 그를 시험하기 위해 택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이 피맺힌 원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손으로 직접 갚아줄 것이다.그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총을 허리춤에 꽂고 금빛 칼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칼을 쥔 남자는 고개를 들고 빠른 속도로 B 구역 1-9의 앞으로 돌진했다. 난투극을 벌이던 1-9는 달려드는 남자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단칼에 목이 베어버렸다.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는 목구멍을 움켜쥔 채 그가 억울한 눈빛으로 칼을 거두고 있는 눈앞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처음에는 이승하가 왜 자신만 죽이려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생명이 다한 찰나 남자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성준모가 내린 명령이었지만 그가 공범인 이상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그가 쓰러진 후, 이승하는 느릿느릿하게 몸을 쪼그리고 앉았다.화학 구역으로 따라온 육성재는 이승하가 주저앉은 걸 보고 그가 한 번 더 칼질을 하려는 줄 알았다.그러나 훤칠한 몸매의 남자는 죽은 사람의 옷으로 칼날의 핏자국을 닦고 있었다.육성재는 저도 모르게 눈을 흘겼고 곧이어 총을 들어 이승하를 죽이려 하던 사람을 한 방에 쏴 죽였다. “내가 당신 목숨 구해준 거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거야?”천천히 핏자국을 닦고 있던 남자가 육성재의 소리에 고개조차 들지 않고 입을 열었다.“너만 괜찮다면 네 형수 구하고 나서 다 같이 식사 한번 해.”...그 소리에 애써 가라앉힌 화가 또다시 치밀어 올랐고 지금이라도 당장 이승하를 한 방에 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상철수는 짙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승하가 스스로 이런 조건을 내걸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그가 서유를 구하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상철수는 이승하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으나 S의 창립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고 싶었다. 세월의 풍파를 겪어 온 그의 눈동자에는 수많은 사연과 함께 인간의 복잡한 속내가 담겨 있었다. “만약 나를 속인다면 너는 절대 서유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다.” 잔꾀에 능한 상철수는 너무 많은 생각으로 인해 남을 쉽게 위협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승하는 상철수의 이러한 비열한 면모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 당신한테 절 위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승하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상철수의 귀에 닿았다. “제가 협상하려는 것도 제 아내 때문일 뿐입니다.” 즉, 서유가 상철수의 손아귀에 있지 않았다면 이승하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미 다른 구역들을 침략한 것처럼, 그는 생화 구역을 단숨에 공격하고 상철수를 생포했을 터였다. 애써 조건을 따지며 협상할 이유는 없었다. 완전히 패배한 상철수는 더 이상 이승하를 위협할 여지가 없었고, 그렇다고 정말 서유를 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찾아낸 외손녀를 해칠 리 없으니까. 그러나 이승하가 제시한 조건이 혹여 속임수일까 염려되었다. 상철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긴 끝에 다시 방송 버튼을 눌렀다. “먼저 창립자가 누구인지 말해라. 그럼 서유를 풀어주겠다.” 이승하의 차가운 눈빛에 비웃음이 어렸다. “서유를 먼저 내놓지 않고 정보를 얻으려 합니까? 가능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직접 들어와서 데려가.” 상철수는 여유롭게 이승하에게 탈출실의 위치를 알렸다. “생화 구역의 복도 끝, 사각형 흰 벽 뒤에 탈출실이 있다. 조작대 비밀번호는 794203. 혼자 와라.” 패배한 자의 마지막 저울질이란 이런 것인지, 상철수의 조심스러운 행동에서 잘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