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는 쭈그리고 앉아 침대에 머리를 기대며 멍을 때렸다. 그때 눈 부신 헤드라이트가 창문에 반사되었다. 잠시 후 아래층에서 차 소리가 들렸고 코닉세그 한 대가 별장 입구에 멈춰 섰다.우산을 쓴 경호원이 뒷좌석 문을 열자 190cm 되는 남자가 차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한 손으로 넥타이를 풀면서 차갑게 말했다.“들어오지 못하게 해.”경호원은 “네”라고 대답하고 그 남자를 별장으로 모셨다. 그리고 경호원은 돌아서서 대문 밖의 철문으로 향했다.서유는 창문 앞에 서서 경호원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봤더니 어떤 남자가 서있는 것 같았다. 너무 멀리 있고 게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아 서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힘든 몸을 가누며 벽을 짚고 아래층 쪽으로 걸어갔다. 이승하는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싶다고 말하려고 해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오늘 이승하가 드디어 돌아왔으니 서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이승하는 막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서유가 내려온 것을 보자 그의 얼굴색은 갑자기 어두워졌고 보기 흉하게 변했다.하지만 서유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얼른 마중 나갔다.“대표님...”그녀는 이승하와 몇 마디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도 보지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문전박대를 당한 서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무슨 뜻이지?’서유를 집에 데려왔지만 대꾸도 안 하고 심지어 눈치를 주고 있다. 서유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서유는 아예 이승하와 떠날 거라고 말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다니는 주태현을 보면서 생각을 다시 접었다. 이승하의 허락이 없으면 주태현, 도우미들과 경호원들은 계속 그녀를 주시할 것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서유는 이를 악물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야 욕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서유는 얼른 일어나 걸어갔다.“대표님, 며
“역시 쟤랑 이미 다 말해놨네!”얼음처럼 차가운 이승하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서유는 어리둥절해졌다.“그런 적 없어요.”“그럼 걔가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어?”“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변명하지 마. 가방을 찾아달라고 한 이유가 쟤랑 연락하기 위한 거 아니야?”서유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승하는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고집을 부리면서 차가운 표정으로 서유를 바라봤다. 그러자 서유는 할 말을 잃었다.아무리 변명해도 이승하는 김시후가 서유를 데리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서유는 변명하는 것조차 포기했다.“네가 회복되자마자 너를 데리러 왔네. 두 사람이 말을 맞춘 게 아니면 뭔데?”이승하는 점점 더 밀어붙였다. 서유는 억울함과 답답함에 지쳐가는 중이었다. 잠시 후, 서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맞아요. 우리 둘이 이미 다 상의했어요. 내가 회복되는 날에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요.”이승하는 서유가 인정하자 입술을 깨물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천하긴 여전하네.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걔와 자고 싶어?”매너 있고 품격 있는 이승하가 이런 천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서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손바닥만 한 얼굴을 들고는 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맞아요. 빨리 자고 싶어요. 그러니깐 제발 저를 풀어주세요. 일 초도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서유는 점점 더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자 그녀를 안고 있던 이승하는 갑자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서유는 자기가 이미 이승하를 화나게 한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서유는 가시 돋친 장미처럼 온몸의 모든 가시를 치켜세웠다.“대표님,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대표님은 곧 결혼하잖아요. 그러니깐 깔끔하게 정리합시다. 앞으로 다시 만나지 말고 다시는 저를 찾지 마세요. 네?”이승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분위기는 극
주태현의 말을 듣자 이승하는 잠시 멈추고 흐릿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품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서유를 지긋이 바라봤다.“네 옛 애인이 너처럼 주제를 모르네.”이승하는 이 말을 한 후 주태현을 지시했다.“저 사람 올라오라고 해요.”‘서유를 보고 싶다고? 그러면 어디 한번 올라와 봐. 네가 견딜 수만 있다면!’“네.”주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경찰에게 잘 설명을 한 후 김시후를 들여보냈다. 흠뻑 적은 김시후는 비틀거리며 계단 손잡이를 잡고 한 걸음씩 올라왔다.서유가 이승하에게 창문에 깔린 채 강제로 키스 당하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눈물이 차올랐고 눈 주위가 모두 붉어졌다.그는 며칠 동안 이승하의 모든 부동산을 조사해 가며 힘겹게 이 집 주소를 찾아냈지만 지금 그가 마주한 광경은 그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김시후는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통제력을 잃고 미쳐가기 시작했다!“서유야!”그는 비틀거리며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뒤따르던 경호원이 길을 막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이승하는 김시후가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에서 그의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만족한 듯 피식 웃고는 서유의 머리를 잡고 다시 진하게 키스했다.서유는 김시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이승하의 목적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는 김시후를 잊으려 했지만, 충혈된 그의 눈을 볼 때 가슴이 다시 움찔했다. 그녀에게 달려오려고 발버둥 치는 남자가 김시후가 아닌 송사월인 것 같았다. 오직 송사월만이 서유가 다른 남자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무서운 것이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송사월이 힘들어할까 봐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서유가 몸부림칠수록 이승하는 더 진하게 키스했고 심지어 김시후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이승하! 서유를 건드리지 마!”김시후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이승하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경호원에게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고 이승
문이 닫히는 순간, 김시후의 깊은 절망적인 외침이 완전히 차단되었다.이승하는 서유를 침대에 내동댕이쳤고 그녀에게 반항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몸 위로 덮쳤다.서유는 남자가 그저 김시후를 자극한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자신의 몸을 원하는 줄은 생각도 못 했다.“승하 씨, 당신 정신 결벽증 있잖아요? 내가 다른 남자랑 잤는데 더럽지도 않아요?”서유는 이제야 정신 결벽증이 생각났고,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그게 뭐 어때서. 신경 안 써...”덤덤하게 말을 마친 남자의 어두운 눈빛은 마치 무언가 결심한 듯 더욱 확고해졌다.서유는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이승하가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다. 너무 화가 나서 더러운 것도 마다하고 기어이 그녀와 자려 하고 있었다.이것은 벌이기도 하고 분풀이기도 하며 또 아주 조금의... 그리움이었다.이승하는 서유의 몸에 닿자마자 통제력을 잃고 마음속에 억눌렸던 감정이 모두 폭발했다.“서유, 넌 반드시 내 거야...”그의 눈 밑에는 강렬한 소유욕이 넘쳐 흘렀고, 서유도 그런 남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키스를 퍼붓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서유는 문득 황당했다.“승하 씨, 난 대체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죠?”정욕을 표출하는 도구? 아니면 그녀에게 조금의 자리라도 남겨줬을까?한 남자가 자신의 심리적 장애를 뚫고 여자에게 손을 댄다면, 이건 단지 생리적인 욕구 정도로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 않으면 정신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더러워진 여자를 품을 수 있을까?그동안 서유는 이 점을 간과했지만 지금 갑자기 생각나서 그녀에게 작은 희망을 주었다.“그럼 난 너한테 뭔데?”남자의 되물음에 한번 떠보려던 서유는 잠시 멈칫했다.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축 처진 속눈썹으로 눈 밑의 모든 감정을 가렸다.남자는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꽉 잡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사랑할 거라는 망상은 버려.”이승하는 그녀
“어떻게...”서유는 그런 김시후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승하의 옷으로 몸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과 목덜미의 키스 자국은 모두 김시후에게 깊은 상처를 줬다.그는 빨개진 눈으로 손을 떨며 다른 남자의 손길이 닿은 곳을 만지려고 했지만 서유가 이를 피했다.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행동은, 방금 문밖에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상처를 주었다.김시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미동도 없는 여자를 멀리서 보았다.지금 이 순간에서야 김시후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은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서유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김시후의 형이 김시후를 사칭하여 그녀를 두 번 세게 걷어찼을 때, 김시후는 이미 서유를 완전히 잃은 것이었다...새빨간 눈가에 물안개가 피어올라 서유의 모습이 흐려졌다.김시후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힘들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온 힘을 다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의 몸에 새겨넣을 듯 꽉 안았다.하지만 그렇게 그녀를 품에 안았어도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예전의 서유는 송사월이 안아주면 활짝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사월아, 계속 일만 하지 말고 나랑도 놀아 주면 안 돼?”서유는 송사월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송사월은 두 사람의 더 나은 미래와 삶을 위해 항상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송사월에게 함께할 시간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은 교통사고로 인해 서로를 놓쳤다...이런 아쉬움은 그의 심장을 옥죄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질식시켰고, 숨을 크게 내쉬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차가운 액체가 쇄골에 떨어지자 서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그의 큰 손바닥이 여자의 머리를 감쌌다.“서유야, 나 보지 마.”김시후는 자신의 낭패한 모습을 서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남은 한 가닥 자존심이었다.오늘의 김시후는 너무
김시후는 붉어진 눈으로 서유를 향해 씁쓸하게 웃었다.“우리를 헤어지게 하려고 큰형이 나를 사칭해 너를 때렸던 거야...”“형이 5년 전에 너에게 했던 일들은 나도 최근에야 알았어.”“미안해, 서유야. 내가 널 지키지 못했어...”김시후는 여기까지 말하고 멈추더니 붉어진 눈에는 죄책감이 가득했다.서유의 심장은 순식간에 멈추더니, 종이처럼 하얀 작은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러니까, 송사월은 그녀를 버릴 생각도, 죽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당시 그녀를 모질게 때리고, 독한 말을 한 사람은 모두 그의 큰형이었다니...송사월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고, 그녀도 사람을 잘못 사랑하지 않았다...오랫동안 가슴속에 서려 있던 응어리의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서유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갑자기 고민도, 슬픔도, 원망도 사라졌고 과거에서 벗어난 느낌이었다.그녀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한결 편안해진 눈빛이었다.“네 탓이 아니야. 우리가 인연이 없어서 이런 오해가 생긴 거지.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사과할 필요 없어...”그녀의 태연한 말투에 김시후는 더욱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손마디까지 아파지는 느낌이었다.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한 것은, 그녀가 이미 두 사람의 과거를 내려놓았음을 의미하는 걸까?“너... 나 버리려는 거야?”김시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서유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를 만졌다. 그 위에는 온통 이승하가 남긴 키스 자국이 가득한데, 이런 그녀가 어떻게 송사월에게 어울릴까?그녀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김시후를 보며 웃었다.“너도 봤다시피 난 이미 깨끗하지 않아.”한참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김시후는 갑자기 용기를 내어 손을 들어 그녀의 목덜미에 있는 키스 자국을 닦아 주었다.“깨끗하게 지우면 되지. 괜찮아.”그녀의 목덜미를 닦아주는 김시후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남자의 모습에 서유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송사월은 소유욕이 엄청나게 강
서유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꼭 껴안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그의 안색은 차갑고 음산했으며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얼굴 가득 노기를 띤 것을 보니 방금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은 듯했다.‘내가 사월이랑 갈까 봐 나와서 막는 걸까? 이미 사월이 앞에서 그렇게 지나친 일을 저질러 놓고 왜 아직도 날 놓아주지 않는 걸까?’서유는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감추었다.이승하는 그녀가 반항하지 않자 안색이 누그러졌지만, 차가운 눈으로 김시후를 보았다.“내가 갖고 놀던 물건을 김 대표님이 인수하겠다니. 아주 의리가 깊네요.”이 모욕적인 말에 김시후는 벌컥 화냈다.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승하에게 달려들어 한 방 먹일 생각이었다.하지만 뒤통수를 심하게 다치고 폭우까지 맞은 김시후가 어떻게 이승하의 적수가 될까?주먹이 이승하의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그의 발에 맞아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주제를 알고 덤벼야지!”이승하는 손을 들어 옷소매를 튕기더니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향해 거만하게 말했다.김시후의 생사를 전혀 개의치 않는 이승하의 모습에 서유는 더욱 실망했다.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이승하를 밀어내고 김시후의 앞으로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사월아,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다른 남자를 걱정하며 긴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승하는 악기가 치솟았다.마치 중요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듯 강한 소유욕이 타올랐다.“이리 와...”그의 수양과 이성은 직접 여자를 빼앗아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이승하는 제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땅에 있는 어리석은 한 쌍의 남녀를 내려다보았다.그가 드러낸 표정은 명령이고, 경고이며, 그녀가 복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징벌을 가하는 압박이었다.이승하 눈을 마주친 서유는 괴로움이 극에 달했다. 조금도 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승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절대 그녀와 김시후를 안전하게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서유는 어차피 그에게 5년
그녀의 눈은 맑고 깨끗했으며 이승하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었고 간청만 있었다.이승하는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를 품은 후 얻은 약간의 안도감도 순식간에 무너졌다.그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 듯 온몸이 아파졌다.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마구 퍼지는 이 통증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이런 통증은 처음이었다. 온몸을 휘젓고 다니며 사지 전체가 아프고 쑤셨다.“대표님, 제가 가장 나약할 때 손 내밀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사월이는 살 수 없었을 거예요.”“너무 감사하지만, 제가 대표님에 대한 감정은 딱 여기까지예요.”“그만!”이승하의 차가운 소리에 서유는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이승하를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숙이고 그의 분노를 기다렸다.그러나 한참을 기다렸지만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서유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의 차갑고 실망한 눈동자가 보였다.그녀는 마음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아파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이승하가 가장 잘하는 것은 자기 감정을 컨트롤 하는 것이었다. 지금의 그는 이미 이성을 되찾았다.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여자에게 이승하는 그저 감사한 존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하지만 이승하는 번번이 자존심을 굽혀가며 몇 번이고 그녀를 찾아갔다.그때마다 서유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송사월이고, 이승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매번 각인시켜 줬다.이런 상황에서 이승하가 계속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스워 보일 것이다.그는 실망한 기색을 거두고 차갑게 서유를 보더니 전에 없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쓸데없는 말 한마디 없는 이 간단한 두 글자는 이승하가 그녀를 놓아줬다는 것을 의미한다.그와 깨끗하게 헤어지는 목적에 달성했으니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서유는 마음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서유는 오만하고 차가운 남자의 눈동자를 그윽하게 쳐다보고는 이를 악물고 돌아서서 김시후를 향해 걸어갔다.김시후를 부축하고 떠날 때,
그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열었다.“난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난 후부터 죽는 게 그렇게 겁이 나더라.”죽는 게 두려웠기 때문에 전 서계를 돌아다니며 의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끝내 얻지 못하였고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했다. 겁이 난 서유는 그를 꼭 껴안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당신한테는 내가 있고 우리 하준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요. 당신이 죽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요?”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미 5년을 버텨온 그는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고 하느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통이 전해지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통증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칩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것 같았다. 다만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가야 하는데...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품 안에 있는 여인이 가장 걱정되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깊이 파고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만큼 뜨겁고 짜릿한 느낌, 슬픈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하나가 되었다. 그녀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때쯤, 두 사람의 아찔한 행위가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소중한 물건을 끌어안듯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유람선 안으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을 빌려 그가 세월의 흔적도 없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다음 생에도 당신이 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신의 다음 생은 송사월한테 주기로 약속했었나?”아직 잠들지 않은 서유가 그의 가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번 생에 당신이 나보다 먼저 가면 나 절대 당신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음 생에 당신 안 만날 거라고요.”그가 슬픈 표정을
그 당시 풋풋한 어린 소녀였던 연이는 심우주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간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교과서는 정말 내가 가져오지 않았어. 아마도 애들이 가져간 것 같은데 내일 학교에 가면 돌려주라고 할게.”연이도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짱이었다. 친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여자아이들이 그녀를 짱으로 받들고 남자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꼬리를 흔들었다.반면, 심우주는 착실히 공부만 했고 가끔 연이의 괴롭힘에 그는 반격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였기 때문에 심우주는 그런 그녀가 얄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제멋대로 하는 걸 사랑스럽게 지켜보았았다.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연이는 학교에서도 늘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던 심우주는 연이의 그런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잠시 후, 어른들에게 차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이하준이 차에 올라탔다. 늘 차갑기만 하던 아이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차에서 내려와 서유를 덥석 끌어안았다.“엄마, 몸 잘 챙겨요.”갑작스러운 아이의 행동에 서유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하준아, 엄마 아빠는 집에서 우리 하준이 기다리고 있을게.”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손을 풀고 옆에 있던 이승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아빠, 제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아빠도 절 이길 수 없을 거예요.”입꼬리를 살짝 올리던 그가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토닥였다.“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남의 칼에 찔리기 쉬운 법이야. 자세를 낮추는 법을 배우거라.”아빠의 충고를 아이는 가슴 깊이 새겼다.“네, 그렇게 할게요.”이내 그가 허리춤에서 ‘S'라고 새겨진 금빛 칼을 꺼내 아이한테 건네주었다. “돌잡이 때 네가 잡은 칼이야. 이제는 네가 갖고 있어.”전에 소지섭한테서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서유는 어쩔 수 없이 의사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문밖을 지키고 있던 소지섭은 의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물었다.“방금 연이랑 하준이가 와서 묻더라고요. 대표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서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이승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감기라고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고개를 끄덕이던 소지섭은 자리를 떴고 그녀 혼자 덩그러니 문밖에 서 있었다. 그가 얼마나 더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어느 순간 갑자기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가 옆에 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하준이 유학길에 오른 그날, 이씨 가문과 상씨 가문 사람들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마치 하준이의 돌잡이 때처럼 정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어른들의 모습이 이미 많이 변했고 아이들도 훌쩍 자란 상태였다. 서유와 이승하의 우월한 유전자만 이어받은 이하준은 10살밖에 안 된 나이지만 정교한 이목구비에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어 보기만 해도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게다가 180 가까이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있어 누가 봐도 엄친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이연석은 흰색 스웨터 차림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에 가방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이하준의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옆에서 초등학생 교복을 입은 채 케이크를 뺏어 먹고 있는 오뚝이와 깡순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똑같은 10살인데 이게 뭐냐? 누구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명문 학교에 입학하고 누구는 아직도 초등학교나 다니고 있으니.”그 말에 정가혜가 그를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거죠. 내가 몇 번을 말해요. 자꾸만 애들 다그치지 말라고 했죠.”이를 갈던 그가 두 아이 앞으로 다가가 케이크를 낚아채 입에 쑤셔 넣었다.“너희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로 일찍 진학 못 하면 아빠 진짜 가만 안 둬.”두 아이는
“승하 씨...”깜짝 놀란 그녀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찾았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어떻게 의사를 찾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애틋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바닥을 짚고 있던 손에도 덩달아 힘이 풀렸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당신... 왜... 그래요?”지난 10년 동안, 이승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내온 그녀는 거의 울어본 적이 없다. 잠깐 정신을 잃은 모습에도 이렇게 펑펑 우는 것을 보니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애써 두통을 참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쓰러지더니 세월조차 비껴간 잘생긴 얼굴을 살짝 치켜들었다.“깊게 잠이 든 것뿐이야. 왜 이렇게 겁을 먹어?”말을 하면서 손을 뻗어 눈물로 뒤덮인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당신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은데.”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을 들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렇죠. 어떻게 사람이 깨우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요?”맑고 깨끗한 그녀의 눈을 그는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떼어 그녀의 등을 눌러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바보,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야. 피곤할 때는 꿈을 꾸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거든.”그 말을 그녀는 당연히 믿지 못하였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왜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단단한 가슴 위에 얹혀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안해요. 당신 머릿속에 있는 칩을 꺼낼 의사를 찾아야 하는데...”겁이 났다. 이승하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자신을 목숨보다 더
지난주, 토론 대회에 나간다고 말하는 연이를 향해 이하준은 엄청 비꼬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연이는 씩씩거리며 이하준과 내기를 했고 뜻밖에도 그녀가 이기게 될 줄은 몰랐다.눈꺼풀을 내리깔던 하준이가 손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그렇게 재잘재잘하더니 실력 한번 제대로 발휘했네. 축하해.”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지 않고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아무튼 이번에는 네가 졌어. 그러니까 잊지 말고 돈 입금해.”이하준은 천천히 냅킨을 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밥 먹고 나서 줄게. 근데 누나...”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기세등등하게 연이를 쳐다보았다.“누나 올해 열일곱이지? 아직까지 고등학교에 다니고. 수시 자격도 따내지 못했으니 수능 봐서 어떤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 정말 걱정이다.”그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명문대에 합격했다고 잘난 척하지 마. 내년에 나도 그 학교에 합격할지 모르니까.”이하준은 칼과 포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그럼 내 후배가 되는 건가?”화가 난 연이가 반격할 겨를도 없이 그가 또 빈정거렸다.“내년에 학교에서 만나. 만나면 나한테 선배라고 부르는 거 잊지 말고.”“아악. 열받아 죽겠네.”연이가 가슴을 내리치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서유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댄 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이모, 하준이 쟤 정말 얄미워죽겠어요. 빨리 학교에 보내버려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요.”서유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막상 가고 나면 또 보고 싶을걸?”“아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은 이하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솔직히 이 녀석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정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얄미운 동생인 건 사실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웃음을 짓던 서유가 포크로 과일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연이는 과일을 받아먹으면서 이하준을 향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회사에서 돌아온 서유는 정원에서 칼자루를 쥔 채 아이한테 칼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광경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문 옆에 살짝 기대어 잔디밭의 크고 작은 그림자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이한테 관심이 없었던 남자는 아이를 뛰어난 인재로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아빠를 존경했고 아빠를 많이 따랐다. 이승하는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였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집이 따뜻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남자가 그녀와 아이의 옆에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잠시 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던 시선도 이젠 나이가 드니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세월마저 그의 얼굴을 그냥 스쳐 지나간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검은색 셔츠와 긴 바지 사이에 흰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는 그의 몸이 석양 아래에 우뚝 서 있었고 그가 양쪽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머리 뒤로 잘 빗겨져 있었고 약간 고개를 돌리니 머리카락이 왼쪽으로 살짝 흔들렸다. 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유한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옅은 미소를 짓던 그녀는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소지섭을 지나치다가 손에 있던 손수건을 챙겨 앞으로 다가갔다. “여보, 허리 숙여요.”그가 허리를 약간 숙이자 서유는 발끝은 세우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저녁에 뭐 먹고 싶어요?”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가녀린 그녀가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 서 대표님이 직접 요리를 하실 건가?”그의 장난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좀 부르지 말아요.”지난 5년 동안 서유도 많이 바삐 보냈고 자신의 건축 사무소까지 차렸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많이 맡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남편과 아이를 돌봤다. 하지만 이승하는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칼, 총, 레이싱카, 배, 비행기 이것들 중에서 뭐부터 배우고 싶어?”하준이가 초롱초롱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아빠, 저한테 가르쳐주시려고요?”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이론 지식은 이미 거의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호신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야. 나중에 날 대신해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하니까.”아이는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아빠가 옆에 있는데 왜 제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벌써 두통 증상이 심해진 그는 머릿속에 있는 칩에 대해 아이한테 얘기하지 않았다.“당분간은 로봇 프로젝트 때문에 많이 바쁠 거야.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내가 없는 동안에는 네가 엄마를 지켜줘야 해.”요즘 아빠가 로봇 개발 중인 걸 알고 있던 이하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열심히 배워서 엄마를 지켜줄 거예요.”아이의 약속을 듣고 이승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일단 총 쏘는 법부터 가르쳐줄게.”하준이도 냉큼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세 살 때, 총을 가지고 놀다가 아빠한테 호되게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다시는 총을 못 잡게 할 줄 알았어요.”아이가 그 어릴 때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한 거야.”“저 이제 겨우 10살인데요. 지금은 총 가지고 노는 거 안심하세요?”발걸음을 멈추던 그가 뒤돌아서 어느새 허리 높이까지 키가 훌쩍 큰 아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공부하러 해외로 가잖아. 돌아와서 배우면 그땐 이미 늦었어.”천재가 맞는 건지 하준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의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었고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이국땅에서 다른 천재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10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총을 꺼내 하준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한편, 이승하가 아이에게 사격을 가르치려 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이연석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닙니다. 그냥 기부하려던 거예요.”하지만 전문가는 그런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고지식한 태도에 이연석은 화가 나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그러니까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빠졌지! 다 선생님 고지식함이 다 빨아먹은 거예요!”전문가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책상을 치며 맞섰다.“도련님, 제 지능을 모욕하는 건 참겠는데, 머리카락을 모욕하는 건 안 됩니다!”“그래요? 그럼 선생님 머리카락을 모욕하죠!”두 사람이 거의 싸울 뻔한 순간, 이하율 남매가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빠, 우리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너무 배고파요...”이연석은 남매에게 화살을 돌리며 소리쳤다.“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고! 하준이처럼 간식 줄이고 책 좀 보란 말이야!”이하율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아빠, 우린 아직 글도 다 못 읽어요. 책 보는 것도 재미없어요. 우리에겐 간식이 제일 재미있어요.”옆에 있던 전문가는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이 생겼다.“보세요. 이 두 아이가 어디 130과 148의 IQ를 가진 것처럼 보이시나요?”이연석은 할 말을 잃었다. 화가 난 그는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이 고집불통 대머리야! 이런 허접한 기관은 확 망해버려!”전문가는 속으로 생각했다.‘지금까지 수많은 IQ 테스트를 해봤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야. 이럴 수가!’A시로 돌아가기 전, 이연석은 테스트 결과를 컴퓨터로 수정하고 새로 출력한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승하를 찾아갔다.“형, 봐봐. 우리 애들도 IQ가 엄청 높아! 특히 내 아들, 148이야! 나중에 mensa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그 말을 듣던 이승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하율에게 물었다.“오뚝아, 68 곱하기 42는 얼마야?”감자칩을 먹으며 손에 기름이 잔뜩 묻은 이하율은 손가락을 세며 계산하기 시작했다.3분 뒤, 그는 대답했다.“110!”순간 이연석은 참지 못하고 이하율을 향해 발길질을 하
흐트러진 커튼 너머로 달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서유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크게 외쳤다.“여보, 성재 씨의 보디가드가 그러던데 그 사람이 망원경으로 우리 집을 자주 훔쳐본대요. 제발 여기선 그러지 마요.”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이승하는 짙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맞은편 별장을 한 번 흘겨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집어 들고 불을 꺼버렸다.“걱정 마, 안 보여.”“하지만...”서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은 이승하가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리고 늑대처럼 그녀의 혀끝을 휘감아 그녀가 하려던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처음에는 저항하던 서유도 이승하가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두 손톱으로 의자 등받이를 필사적으로 긁을 뿐이었다.예전에는 체력에만 의지하던 이승하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꺼낸 물건들은 서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제발 그런 거 쓰지 마요!”서유가 간절히 부탁했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보, 참지 말고 소리 내봐.”서유는 도저히 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이승하는 도구와 체력을 총동원해 강도를 높였다.“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만약 방음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커튼이 창문을 가리지 않았다면, 서유는 지금 부끄러움에 혀를 깨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더욱 끔찍한 것은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저 이승하에게 온전히 ‘당하기’만 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기진맥진한 서유는 뒤돌아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랐다.‘제발, 하준이가 문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다고, 병원에 같이 가달라고 했으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하준은 수많은 문제 속에 갇혀 있었다.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