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팔이 육성재를 잡으려는 순간, 칼자국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구불구불 돌아요.”그 순간, 육성재는 칼자국남의 말대로 서유를 잡아당기고 재빨리 뱀처럼 구불구불 돌면서 게임존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봇의 팔은 직선으로 뻗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전도 할 수 있었다. 육성재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로봇의 팔도 무한대로 늘어나고 끊임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봇 청이의 프로그램은 한쪽 팔을 칼로 자르고 나서야 돌아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때문에 팔을 칼로 자를 때까지 계속 육성재를 쫓아다닐 것이다.재수가 없는 건 서유였다. 두 사람 사이에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그녀는 육성재와 생사를 함께 해야 했다. 육성재는 도망 다닐 힘이라도 있지만 그녀는 몇 걸음 도망치니 벌써 힘이 빠졌다. 로봇의 쇠칼을 이용해 두 사람 사이의 수갑을 자를 생각을 해보았지만 로봇의 쇠칼은 너무 컸고 수갑의 위치가 가까이 있어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팔이 잘려 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라 섣불리 시도해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로봇 청이의 프로그램은 인체에 닿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 생각은 바로 접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육성재를 따라다니며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칼자국남은 재빨리 맞은편 3번 게임존으로 달려가 아까 팔이 잘린 남자의 품에서 팔을 낚아채 두 사람의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로봇이 육성재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칼자국남은 급히 잘린 손을 로봇 청이의 손에 넣었다. 사람의 팔이 닿자 로봇 청이는 찰칵 소리를 내며 이미 잘린 팔을 한 번 더 잘랐고 피비린내를 맛본 로봇은 재빨리 팔을 걷었다. 순식간에 위험에서 빠져나온 육성재를 보고 서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팔이 잘려 나간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욕설을 퍼부었다. “감히 내 팔을 빼앗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한편, 아직 선택하지 않은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잇달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죽음의 문을 선택
의심스러운 말을 듣고도 넷째 어르신은 담담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내 기억이 맞다면 게임존의 게임 방법은 1-2가 정한 것이네. 다들 지금 1-2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건가? 게임존의 게임 방법을 미리 나에게 알려주어 내가 칼자국남을 투입했다고 생각하나?”넷째 어르신을 비꼬던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1-1에서 1-3, 이 세 사람은 Ace의 창시자였다. 초청자들의 공평한 베팅을 위해 게임존의 룰은 1-2이 전문적으로 책임졌다.다만 매번 게임의 룰은 바뀌었고 1-2 그 사람만 알고 있었다.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넷째 어르신을 의심하는 건 1-2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들 잘 알겠지만 난 초대받은 사람들을 여기까지 데려오고 플레이어의 방을 감시하는 일만 맡았네. 게임존은 내가 관여할 구역이 아니니 앞으로 말을 함부로 하지 말게나. 1-2의 명성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나?”넷째 어르신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2-9의 자리를 지나치는데 아홉째 어르신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뭔가 뜻이 통한 듯했다. 게임존이 닫히고 조종자들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넷째 어르신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방안을 들어서자마자 가면을 벗고 소파에 앉는데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가면을 쓰고 다시 문을 여는데 문밖에 서 있는 한 남자의 훤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더니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인지?”그가 소파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를 쳐다보았다.상대방이 말을 하지 않자 그도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타들어 가는 담배를 가지고 놀았다. 잠시 후, 남자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모스 부호로 소통했다.“지금은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야. 이런 방식으로만 소통할 수밖에 없어.”방
그러나 넷째 어르신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2-9가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그들은 이제 한 배를 탄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넷째 어르신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대고 가볍게 두드렸다. “마지막 라운드, 그가 이곳을 안전하게 떠날 때까지야.”서유가 아니라 육성재가 안전하게 떠날 때까지라고 했다.테이블 위에 있던 아홉째 어르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플레이어 방의 감시 권한을 나한테도 줄 수 있나?”배후의 초대자들은 언제든지 플레이어의 방 CCTV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임 시작 단계만 관람 구역에서 볼 수 있었고 다른 때는 볼 수가 없었다. “오늘 당신을 대신해 누명을 쓴 프로그래머는 이미 1-2에게 살해당했어.”거절이라는 뜻이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아홉째 어르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넷째 어르신은 손에 든 담배꽁초를 버리고 손을 뻗어 가면을 벗었다. 무거운 가면을 벗고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아홉째 어르신 앞에서 한 모금 깊이 들이마셨다.“그 여자도 지켜줄 테니까 더 이상 내 프로그램에 손대지 마.”더 이상 무고한 프로그래머가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껏 찌푸리고 있던 아홉째 어르신의 미간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고맙군.”연기를 내뿜던 넷째 어르신이 담배 연기를 사이에 두고 그를 쳐다보았다.“그 여자랑은 무슨 관계인가?”CCTV에서 그 여자를 보고 즉시 일어나 프로그램을 해킹한 걸 보면 그 여자가 아홉째 어르신에게 중요한 사람인 건 분명했다.그렇지 않으면 세상만사에 관심이 없던 냉정한 성격의 그가 어찌 이런 무모한 짓까지할 수 있었겠는가?넷째 어르신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넷째 어르신은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부탁할 일이 있으면서 이리 퉁명스럽긴.”아홉째 어르신은 가늘고 촘촘한 속눈썹을 천천히 내리며 어두운 눈빛을 숨겼다. “난 나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해.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개인적인 일에 대해
게임 구역의 플레이어들은 각자 생사 문을 통과한 후, 게임의 보상과 벌칙에 따라 다른 장소로 보내졌다. 상금을 선택한 사람과 죽음의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바로 방으로 보내졌고, 경마를 선택한 사람들은 경마장으로 갔다. 비록 육성재는 죽음의 문을 선택했지만 이번 게임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서유와 함께 생의 문으로 들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게임은 끝났고 죽음의 문을 선택한 플레이어들은 이미 받을 벌은 받은 상태였다. 그들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또다시 막막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주변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설령 10호 방의 칼자국남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두꺼운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서유와 육성재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손목에 묶인 수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서유는 아랫배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아마도 달리기 때문에 생긴 증상이었다. “성재 씨, 나 배가 좀 불편한데 약을 먹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조금 긴장한 채 일어나서 육성재를 끌고 구석으로 가더니 불편함을 참으며 몸을 웅크리고 앉아 짐가방을 열었다. 재빨리 유산 방지약을 꺼내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육성재는 약상자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 그 약이 어떤 약인지 확인한 순간 완전히 멍해졌다. “임신했어요?” 서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세 달이 좀 넘었어요. 태아가 불안정해서 가끔씩 조금 불편해요.” 그녀는 말이 끝나자 그에게서 약상자를 받아 짐가방에 다시 넣었다. 가방을 정리한 후 벽을 짚고 일어나 침대로 돌아가 쉬려고 했으나, 육성재가 그녀를 단숨에 붙잡아 당겼다. “뭐... 뭐하는 거예요?” 그의 눈에 서린 붉은 빛을 보고 서유는 조금 겁이 났다. 육성재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고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로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날 때야 손을 풀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았고 그의 목소리에는 질책이 가득했다. “임신한 걸 왜 진작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서유는 어리둥절했다. “그
따뜻한 감각이 닿자 육성재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고 귀 끝까지 빨개졌다. 그는 줄곧 서유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방금 그녀에게 입 맞춘 순간, 그 감정을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녀에게 남편이 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억지로 자신을 다스리며 그 감정을 억눌렀다. 육성재는 손바닥을 꽉 쥐고 인상을 찌푸린 채 서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서유도 그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몇 번 더 째려보며 말했다. “조심해요.” 육성재는 짧게 대답하고는 이불을 잡아당겨 둘의 머리를 덮었다. “지금뭐하는 거예요?” 서유는 당황하며 이불을 밀어내려 했지만 육성재는 그녀의 손을 눌렀다. “감시 카메라가 있어요.” 이불 아래서 서유는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요?” 육성재는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생각엔 이승하가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감시 카메라도 그 말을 듣지 못할 정도였지만 서유는 그 말을 아주 분명하게 들었다. 그의 차분한 말은 그녀의 마음에 부드럽게 닿아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육성재는 다시 그녀의 귀에 더 가까이 속삭였다. “이승하가 그 쪽지를 서유 씨한테 준 것 같아요. 우리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육성재가 생각한 것은 서유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오직 그녀가 위험에 휘말리길 원치 않는 사람은 이승하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왜 집에 돌아오지 않고, 그저 안부 전화 하나조차 하지 않았을까. 서유는 그의 상황을 알 수 없었고 천천히 이불을 밀어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감시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고 그녀에게 쪽지를 보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루드웰에 발을 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서유와 육성재는 첫 번째 게임이 시작된 이후로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은 버티기 힘들었다. 특히 서유는 너무나 피곤했지만 이승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한 생각 때문에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반면 육성재는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수갑에 묶여 있어 어쩔 수 없이 몸을 웅크린 채 버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9호 방의 조작 패널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카드 삽입 구멍이 아니라 두 끼의 식사가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서양식 저녁 식사로, 우유와 음료, 그리고 생수도 함께 나왔으며 모두 플레이어들을 위한 것이었다. 육성재는 서유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음식을 다 먹게 하고는 요구했다. “나랑 화장실 좀 같이 가줘요.” 서유는 마지막으로 우유를 마신 뒤, 빈 잔을 내려놓고 화장실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이런 환경에서 더 이상 예의를 따질 여유는 없었다. 생존과 건강이 우선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화장실로 갔고, 서유는 등을 돌려 육성재를 향하지 않고 눈을 감으며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육성재는 분명 급했지만 이상하게도 화장실에 들어가니 도무지 볼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서유를 돌아보며, 창피함과 불편함 사이에서 차라리 참기로 결심했다. 육성재는 서유를 데리고 화장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워 얼굴을 이불로 덮었다. “이러면 안 돼. 앞으로 몇 라운드 더 남았는데 너...” “말 그만하고 빨리 자. 자면 괜찮을 거야.” 육성재는 아예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고 물도 마시지 않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한 건 급한 거였다. 결국, 한밤중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서유를 깨우고는 허둥지둥 그녀와 함께 다시 화장실로 갔다.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삶에 대한 애정이 모두 사라진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불 속으로
“플레이어 여러분, 화면에 네 가지 흔한 곤충이 있습니다. 나비, 반딧불이, 나방, 잠자리입니다. 이들은 각각 상자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상자에는 어떤 곤충이 들어 있을까요?” 그들 앞에는 단 하나의 검은 상자가 있었고 네 가지 곤충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제한 시간은 여전히 5분입니다. 지금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60, 59, 58...” 육성재는 무의식적으로 칼자국남을 힐끔 쳐다봤다. 그 남자는 숫자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구역에 있던 하얀 문이 자동으로 열리더니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그들 가운데 당당하게 걷는 남자는 얼굴에 1-2라는 숫자가 새겨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홉째 어르신은 처음으로 게임의 보스를 보았는데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1-2가 등장한 이후, 게임 구역의 모니터는 칼자국남의 화면에서 멈췄다. “이 사람의 초대자는 누구지?” “접니다.” 넷째 어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1-2는 검은 방호복을 입고 온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차갑고 날카로웠다. “2-7이 당신이 비밀리에 조작했다고 신고했군. 우리랑 함께 가지.” 역시 2-7이다. 이런 일을 처리하기 위해 1-2가 직접 중구까지 내려오게 만들다니. 넷째 어르신은 느긋하게 2-7을 한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두 손을 내밀었다. 1-2 뒤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수갑을 꺼내 넷째 어르신의 손에 걸고는 그를 데리고 나갔다. 문을 나서기 전에 넷째 어르신은 뒤를 돌아 아홉째 어르신을 한번 바라보았다. 둘 다 가면을 쓰고 있어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끌려 나가는 것은 칼자국남이 노출되었음을 의미했고, 이는 곧 하부 구역의 게임이 끝났음을 뜻했다. 넷째 어르신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아홉째 어르신은 무
육성재는 서유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었다.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는 바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밑을 보지 말고 먼저 선택해요!” 그의 큰 목소리가 서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게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앞에 있는 상자를 응시하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상자는 봉쇄되어 있어 열 수 없었고, 네 종류의 곤충 모두 가벼운 생명체들이라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초조하고 불안했으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한 남자가 시간이 촉박해지자 ‘나비’라고 적힌 버튼을 아무렇게나 눌렀다. 상자가 열리자 나오는 것은 나비가 아닌 나방이었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 있던 죽음의 문이 순간적으로 열렸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원형 위치에 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칼자국남처럼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게임장에서 벗어나면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게임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그가 밟고 있던 바닥의 네모난 타일이 갑자기 열렸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떨어졌고, 그와 인접한 타일들도 하나하나 열리기 시작했다. 즉, 발밑의 원형 표식뿐 아니라 그들이 밟고 있던 바닥 전체가 죽음의 문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선택을 하지 않으면 모두 떨어져 뱀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다. 그 남자가 뱀에게 살점이 하나하나 찢기며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서유는 견딜 수 없이 구역질이 났다. 그제야 그녀는 왜 아무도 이 9라운드의 게임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매 라운드가 생사의 고비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4...” “서유 씨!” 육성재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크게 울려 퍼졌다. 서유는 마치 모든 걸 내던진 듯, 옆의 남자처럼 ‘나비’라고 적힌 버튼을 눌렀다. 상자가 열리자, 파란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펴며 자유를 찾은 듯 위로 날아올랐다. 육성재는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