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희는 정가혜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녀도 유나희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유나희의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뿐이었다.“유 여사님, 저라도 아들이 모든 면에서 그보다 못한 여자를 만난 걸 보면, 당연히 만족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연석 씨가 저를 선택한 거지, 제가 억지로 매달린 게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물러나길 바라신다면 차라리 아드님께 말씀해 보세요. 연석 씨가 설득당해서 저와의 결혼을 포기하면 그때 저한테 알려주세요. 그러면 절대 방해하지 않을 거고 그 후로는 마주치더라도 피할게요.”정가혜는 긴 숨을 내쉬며 말을 끝냈다. 그녀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와 맞서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 건 처음일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연석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그녀 또한 그를 놓을 수 없기에 노력하고 있었다.유나희는 잠시 정가혜를 응시하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제는 결혼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하는군요. 가혜 씨가 내 아들을 보잘 것 없게 여긴다면, 왜 연석이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그렇게 쉽게 흔들렸어요?”유나희의 질문은 꽤 단도직입적이었다. 정가혜는 말문이 막혀 고개를 푹 숙였다.유나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가혜 씨 배경이나 학업 능력 외 제일 중요한 건 내 아들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그 마음조차 없다면, 내가 어떻게 두 사람 결혼을 허락하겠어요.”이 말을 들은 정가혜는 고개를 떨궜는데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원나잇 스탠드가 없었다면 그녀는 결혼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황당한 하룻밤 이후, 이연석이 꼭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는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 흔들림의 근원은 단순히 이연석의 ‘결혼하자’는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아직도 이연석을 완전히 포기하지
과거의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정가혜는 미래를 약속할 수 있었다. “유 여사님, 제가 연석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대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걸 바치고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고, 지킬 거예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예요.”이것이 바로 정가혜가 보일 수 있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감정에 진지했고, 전 남편에게도 모든 것을 바쳤으며, 심형진과의 관계에서도 여자친구가 되기로 약속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그녀 마음속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인 이연석이었으니, 결혼 후에는 분명 그에게 더 잘 대해 줄 것이었다.정가혜가 여전히 물러서지 않자 유나희는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우리 연석이가 사실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바람기 있고 노는 걸 좋아하죠. 스캔들도 끊이질 않았어요. 하지만 그건 가혜 씨를 만나기 전의 일이에요. 당신과 만난 뒤로는 확실히 많이 변했어요. 적어도 잦은 스캔들은 없어졌죠. 그 점에선 고마워요. 하지만 가혜 씨, 연석이를 완전히 믿을 수 있겠어요?”계속 소파에 기대어 있던 유나희가 갑자기 몸을 바로 세우고 하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눈빛으로 정가혜를 직시했다.“우리 아들은 어릴 적부터 집에서 예쁨만 받고 자라, 하고 싶은 건 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에요. 예전에 배하린과 결혼하고 싶다며 온 집안을 들쑤셨던 것처럼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나자 죽어도 결혼하기 싫다고 했죠. 지금 갑자기 가혜 씨랑 결혼하겠다는 게 일시적인 충동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배하린에 관한 자세한 내막을 유나희는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이렇게 말한 것은 정가혜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유나희는 정가혜의 과거를 조사해 알고 있었다. 전 남편을 위해 집도 사주고 돈도 보태주는 등 모든 걸 바쳤지만 결국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보통 이런 일을 겪은 여자라면 감정이나 결혼에 대해 더욱 조심스러워질 것이라는 걸.그래서 급소
이지민과 단이수를 언급하자, 줄곧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던 유나희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린 듯이, 그녀는 정가혜의 손을 놓았다.“내가 무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걱정하지 않겠어요? 가혜 씨가 출신이 조금 더 좋고, 학식이 높으며, 몸가짐을 조금 더 단정하게 했더라면 내가 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겠어요?”유나희는 단이수와 이지민의 일에서 교훈을 얻었기에 다시는 아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정가혜는 단이수보다 능력도, 감정적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단이수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만큼 정가혜를 받아들이기는 더 어려웠다.“가혜 씨, 사실 우리 같은 집안에서는 문벌이 맞는 게 가장 중요해요.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사고방식, 시야, 세계관, 학식, 이 모든 것이 다르거든요. 지금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는 건 호르몬의 작용일 뿐이에요. 이 열기가 식으면, 그때서야 차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될 거예요.”유나희의 이 말에 정가혜는 자격지심이 들었다. 말문이 막혀버린 정가혜는 주먹을 쥔 손을 서서히 풀었다. 그녀의 눈에는 피로가 서려 있었고 말없이 유나희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유나희는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릴 수 없어 말을 이어갔다.“물론, 승하와 서유는 가문 문벌이 맞지 않는 결혼의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승하와 연석이는 달라요. 승하는 서유의 출신 배경이나 부족함을 모두 감싸 안아요. 심지어 어느 날 서유가 바람을 피운다고 해도 승하는 여전히 서유를 사랑할 겁니다. 하지만 연석이는 다르죠.”“그 아이는 아직 철이 없어요. 원하는 건 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고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을 내죠. 그때가 되면 가혜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유나희의 말은 정가혜의 가장 깊은 불안을 정확하게 찔렀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헤집으며 정가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꺼내놓았다. 정가혜는 대답할 수 없었다. 유나희의 말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이다.정가혜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
술자리에서, 처음엔 이연석이 일부러 장난을 치며 결혼 상대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자, 친구들은 답답해하며 술을 계속 권했다. 결국 술에 취한 후에야 이연석은 자신이 결혼하려는 사람이 바로 정가혜라고 선언했다.친구들은 모두 정가혜를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듣자마자 큰 소란이 일었다. 이연석이 재혼녀에다 나이도 많고, 심지어 자신을 괴롭혔던 여자를 아내로 맞겠다고 하자, 모두들 이연석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많은 훌륭한 여인들이 이연석과 결혼하기 위해 줄 서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하냐며 그에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라고 충고했다.술에 취해 의식이 흐릿한 이연석도 그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깨닫고 순간 화를 냈다. 그는 갑자기 의자를 발로 차며 자신에게 충고하던 친구들을 하나하나 욕하기 시작했다. 손을 대는 것만 빼고는 거의 다 했다.단이수가 그를 말리지 않았다면 이연석은 아마 술김에 정가혜를 헐뜯는 친구들을 모두 때려눕혔을 것이다.친구들을 다 욕하고 나자 이연석은 이 자리가 의미 없다고 느끼며 외투를 집어 들고 비틀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우울한 기분에 빠진 단이수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구석에서 혼자 남아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름을 달랬다.술기운에 휘청거리던 이연석은 방을 나서다가 우연히 배하린과 마주쳤다.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배하린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지도 않고 다가왔다.“이연석, 너 결혼한다며?” 배하린은 슬픈 눈빛으로 이연석을 올려다보았다.이연석의 눈앞에 두 명의 배하린이 보이다가 결국 하나로 겹쳐졌다. 그는 누가 자신 앞에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난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어. 다른 여자와는 멀리 있어야 해.’ 머릿속에 오직 정가혜만으로 가득한 이연석은 배하린을 피해 옆 복도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술에 취해 발걸음이 불안정하던 그는 그만 발을 헛디뎌 쓰러질 뻔했지만, 배하린이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손... 놓아.” 정가혜가 기분 나빠할 것을 생각한 이연석은 힘껏
이 장면은 과거 강은우가 자신의 여동생과 외도를 했을 때 보았던 그 장면과 같았다.아니, 차이점은 있었다. 그때는 강은우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저 분노가 치밀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연석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이런 모습을 보게 된 지금 마음은 더욱 아팠다.정가혜는 유나희에게 모욕을 당할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눈물이 차오르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왔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샘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눈물이 손등에 떨어지자, 정가혜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끼며 얼굴을 세게 문질러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물을 참아보려 해도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져 침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나지막한 신음 소리는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연석이 자신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배하린과는 끝없이 얽혀있었다니... 아니,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전에 이미 배하린과는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마치 그때, 그녀가 호텔에서 심형진에게 약을 먹고 나오던 순간, 그가 배하린과 함께 끌어안고 있던 장면을 본 것처럼.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무엇일까? ‘이연석, 당신 마음 속에서 나는 대체 뭐야?’“연석아, 기분 좋아?” 이불로 이연석을 덮어버린 채, 배하린은 의도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이연석의 허리를 세게 꼬집었다. 깊은 잠에 빠져 무의식 중이던 이연석은 고통을 느끼며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그 익숙한 소리는 정가혜를 얼음 속에 빠뜨리듯 차갑게 만들었고 손발은 얼어붙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눈물을 참으려 애쓰며 몸을 돌려 미친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갔다.유나희가 했던 말이 맞았다. 이연석은 이승하와 달랐다. 그는 언제나 사랑에 대해 불성실했다. 그는 한 여자와의 침대에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여자의 침대에서는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한 번, 두 번, 한도 없이 그를 품어주었던 정가혜도 그의
이연석의 마음 속 불안감이 극에 달할 즈음, 정가혜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급히 메시지를 열어보고 내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정가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곧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시도했을 때는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상태였다. 통화를 종료한 이연석은 대화창으로 돌아가 급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가혜 씨, 무슨 일이에요? 왜 청혼을 거절하는 거예요?]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대화창에 빨간색 느낌표가 떠오른 것을 보니 그녀가 다시 그를 차단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연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정가혜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연석 씨, 더 이상 청혼 같은 건 하지 마요. 난 당신과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날 밤은 그냥 하룻밤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요.]그러니까...정가혜가 그때 자신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던 건, 자신과 결혼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이제야 마음을 정하고 정확한 답을 준 건가?그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청혼 얘기를 한 건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가혜는 여전히 냉정하고 단호했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진 후에도 그녀는 그것을 그저 하룻밤의 일로 치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연석은 화가 나서 핸드폰을 세게 던졌다. 정가혜가 천 걸음을 물러서면 자신은 만 걸음을 따라가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돌보다도 더 단단했고 자신은 결코 그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핸드폰을 잡고 곧장 정가혜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가혜는 집에 없었다. 노현정은 정가혜가 어젯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연석은 그녀가 다시 나이트클럽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급히 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이트클럽에 도착했을 때 매니저는 사장이 오지 않았다고 했고, 이연석에게
서유는 상황을 파악한 뒤 곧바로 정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가혜는 서유의 전화를 받았다. “서유야, 무슨 일이야?” 정가혜의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그제야 안심하며 물었다. “가혜야, 너 어디에 있어?” 공항을 나서며 선글라스를 낀 정가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M국에 있어.” “뭐? 갑자기 M국에 왜 간 거야?” 서유가 의아한 듯 묻자 정가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털어놓았다. “사월이 수술이 끝났어. 그러니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 송사월의 이름이 나오자 서유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곧 자연스럽게 물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 정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수술은 성공적이었어. 다만 회복 과정을 지켜봐야 해. 그래도 일어설 가능성이 커.” 송사월이 일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말에, 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일어설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언제쯤 귀국할 예정이야?” 정가혜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해. 아마 한 달쯤 걸릴 거야. 회복이 어느 정도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재활 치료를 받을 거야.” 서유는 상황을 파악한 뒤, 이번엔 이연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가혜야, 네가 도련님의 청혼을 거절한 건 혹시 그의 부모님이 너를 따로 만났기 때문이니?” 서유가 전화를 건 이유를 이미 알고 있던 정가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석 씨 어머니 말이 맞아. 나와 그 사람이랑 어울리지 않아.” 서유가 정가혜를 설득하려고 하자 그녀는 이를 막았다. “서유야, 나와 연석 씨는 이제 끝났어. 그 일로 더 이상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한 뒤 정가혜는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김태진을 보았고, 급히 손을 들어 인사하며 덧붙였다. “김 비서가 나를 데리러 왔어. 이만 끊을게.” “잠깐...” 서유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정가혜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서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연석에게
이연석은 집으로 돌아간 후, 정말로 본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안에 있던 물건들은 전부 부숴버렸고 수백 년 된 골동품들도 그의 발길질에 산산조각 났다. 마치 폭도처럼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미친 듯이 온 집안을 휘저으며 파괴했다. 아들의 과격한 행동을 바라보며, 유나희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연석아! 너 여자 하나 때문에 어떻게 부모에게 이럴 수 있니? 양심이란 게 남아 있기는 하니?” 이연석은 야구방망이를 들고 물건을 부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가혜 씨랑 결혼하고 싶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끼어들어야만 했어요? 두 분의 양심은 어디에 있어요?” 고가의 골동품들이 이연석의 손에 의해 하나둘씩 부서지는 것을 보자 마침내 참지 못한 이진철이 앞으로 나섰다. “이연석!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이연석은 아버지가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백옥 연적을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어머니가 가혜 씨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물건을 다 부숴버릴 거예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을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평소에도 집에서 권위가 없던 이진철은 아들의 협박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 엄마가 다 널 위해서 그런 건데, 네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네 엄마를 끌어내려 그 여자에게 사과하게 하려고 하니?” 이연석은 또다시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골동품 진열대의 꽃병들을 모두 박살냈다. “정말 절 위했다면 제 결혼을 도와줘야죠. 제 뒤에서 제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게 험담이나 하고 다녀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사랑하던 꽃병들이 부서진 것을 보자 이진철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 꽃병들은 수백 년 된 것들이야. 하나에 수백억 원짜리인데, 네가 그걸 다 부숴버리다니... 너 정말...” 이진철은 분노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다행히 하인이 그를 붙잡아 겨우 버텼다. 남편이 이토록 분노에 차 있는 것을 본 유나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