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유골함은 소정의의 가족들이 가지고 귀국했다. 부산 쪽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송문아가 의붓아들에 대해 정이 매우 깊다고 했다. 반면 소정의는 소준섭이 가문 망신을 시킨 놈이라고 하면서 장례를 크게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일로 송문아는 소정의와 대판 싸웠고 아무리 평판이 안 좋아도 어찌 됐든 소씨 가문의 아들이니 장례를 크게 치러야 한다고 했다. 결국 송문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소정의는 그녀에게 장례를 맡겼고 조문 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송문아가 소준섭의 영정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절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부산에서는 그녀가 최고의 계모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소준섭은 은혜도 모르는 의붓아들이라고 낙인찍혔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주서희는 한창 주삿바늘을 들고 약을 바르고 있었다. 흠칫하지도 않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얼마 후, 파미란에서 돌아온 그녀는 윤주원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곁에서 그의 일상생활을 돌보면서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해야 할 일들을 조금도 빼놓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유와 정가혜는 처음에 그녀가 소준섭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까 봐 많이 걱정되었다. 근데 뜻밖에도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흰 가운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소준섭을 언급하든 언급하지 않든 그녀는 늘 환한 얼굴이었고 마치 소준섭이 세상을 떠난 게 그녀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난 일인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들에게 일부러 자신 앞에서 소준섭의 얘기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없으니 더 이상 전전긍긍하며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조문도 가지 않았고 그가 어떻게 묻어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서유와 정가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당부만 했다.그녀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볼일 보라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서유는 설계도를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고 정
윤주원의 손은 빠른 시간 안에 응급 처리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심각한 후유증 없이 이미 많이 회복되었고 조금 더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오자 윤주원은 옆에 있던 부모님을 내보냈고 그의 부모님들도 눈치껏 그녀를 한번 보고는 얘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오늘은 어때? 손은 움직일 수 있어?”윤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촉촉한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말끔히 다 나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답했다.“회복은 될 수 있지만 앞으로 수술은 더 이상 힘들 거야.”“제약 회사에 한동안 다녀보니까 난 수술하는 의사보다 약품 개발에 더 관심이 있더라고요.”“훌륭한 외과의사였잖아. 이렇게 수술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까워.”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의사든 약을 개발하는 사람이든 수술을 하든 환자의 재활에만 도움을 주든, 모든 게 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마지막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려 과거로 돌아간 듯 멍해졌다.열여덟 살의 소준섭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 당시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계단에 기댄 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그의 취업 방향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소유성은 의사 가문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천부적인 재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면서 의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반면 소정의는 컴퓨터를 잘 다루니 금융 업계에 필요한 인재라고 하면서 금융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했다. 두 부자가 이 일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고 결국 소정의의 뜻을 굽히지 못한 소유성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소준섭이 소유성을 다독였다.“제가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을 치료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소준섭은 대학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기로 소정의와 약속했기 때문에 소정의는 그가 대학
주서희는 어두운 눈빛으로 거즈를 감고 있는 그의 손목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주원 씨, 난 불행한 사람이야. 나랑 함께 있으면 주원 씨가 자꾸만 이리 다치게 되잖아.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 다시 시작하지 않은 게 좋겠어.”그 말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근데 그녀가 이런 답을 할 거라는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다만...“서희 씨, 소준섭 씨는 이미 죽었어요. 더 이상 날 해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그녀는 고개를 들어 잔뜩 기대에 찬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난 사람을 죽였어. 게다가 주원 씨가 보는 앞에서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짓까지 했고. 이 두 가지 일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일이야.”그녀는 핑계를 대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사실 소준섭이 윤주원의 앞에서 그녀한테 그런 짓을 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불가능한 사이였다. 이런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과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다른 사람 같았으면 아마 얼굴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주서희는 그래도 강인한 편이었다. 최소한 이리 아무렇지 않게 윤주원을 치료해 줄 수 있는 걸 보면. “난 상관없어요.”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서희 씨, 당신도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요.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소준섭을 죽인 것도 실수였죠. 정말로 죽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난 다 알아요. 다 이해해요. 그래서 난 상관없어요. 근데 당신은 왜...”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웃기만 했다. 눈이 휘어진 것이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초승달 같았다. “난 마음에 걸려.”그의 말을 끊어버리더니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병실 밖에서 서 있는 중년 부부를 쳐다보았다. 피곤한 얼굴과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두 사람을 보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주원 씨 부모님도 이젠 연세가 있으신데 더 이상 이런 일 겪게 하지 마. 두 분께서 주원 씨를 얼마나
말을 마친 그녀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소준섭에게 총을 겨누던 그 순간처럼 그녀는 너무 단호했다. 그녀는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번 결정한 일이면 상대방에게 확실하게 알려주고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했다 . 그러나 윤주원은 그녀가 이대로 그와 관계를 끊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최소한 그의 손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그녀는 평소처럼 그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그는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만큼 중요하지 않을 뿐. 그렇다고 해서 전혀 낯선 사람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서희 씨, 만약 그때 내가 당신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소준섭 씨와 한 달 동안 그 섬에서 잘 지냈을 건가요?”천천히 발걸음을 멈추던 그녀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그녀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만약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주서희는 소준섭과 한 달 동안 지내다가 무사히 돌아왔을 것이다.혼인 신고를 하던 날처럼 소준섭은 그녀를 다시 데려다줬을 것이다. 침대에 기대어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가 얼굴이 어두워졌다.나 때문에 소준섭 씨가 죽은 건가?주서희는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몇 마디 당부하고는 자리를 떴다.바로 이때, 윤주원의 부모님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주서희 씨, 방금 주원이랑 하는 얘기 다 들었어요.”윤주원 어머니의 온화한 얼굴에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주서희에게 감사를 표했다.“우리 주원이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더 이상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들이 남은 인생은 평안하기만을 바랐다. 이런 끔찍한 일을 겪지 말고 아이도 낳고 착한 아내와 함께 오손도손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다. “주서희 씨는 좋은 여자예요. 다만 뼈저리게 사랑했던 사람을
상대방이 백호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녀는 그제야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리여리하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그는 늠름한 모습이었고 점잖고 멋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를 알아보고는 그녀도 똑같이 웃음을 지었다.“외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왜 돌아온 거야? 병원에는 무슨 일로?”백호는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요즘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어머니가 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어. 병원에서 널 보게 될 줄은 몰랐네.말은 마친 그가 다시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주서희에게로 향했다.“옷차림을 보니까 의사인 것 같은데? 의사가 된 거야?”그녀는 별다른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도 의대에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난 네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정말 의사가 될 줄이야.”마음이 딴 데 있는 그녀는 웃으며 무심하게 되물었다.“듣자 하니 의사에 대해 편견이 있는 것 같다?”그가 연신 손을 저었다.“그럴 리가. 난 그저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다시는 소준섭의 뒤를 따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계속해서 말을 꺼내려던 그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이내 말을 멈추었다.“미안해.”그녀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다 지나간 일인데 뭐.”소준섭은 이미 죽었고 그 과거들도 그의 죽음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 소준섭의 얘기가 나오자 백호가 한마디 더 물었다.“소준섭이 죽은 거 넌 알고 있어?”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자신이 죽였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백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젊은 나이에 참 안 됐어. 근데 그런 말 있잖아. 나쁜 놈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고. 소준섭이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까 그리 죽게 된 거야.”그 당시, 백호는 요트를 사서 그곳에서 주서희에게 고백하려고 했었다. 원래는 매우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근데 소준섭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를 데려갔고 그 후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성폭행했다. 백호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해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원래는 묻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 대한 근황을 말하고 있는 백호의 말에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그 사람들은 그저 건달들 아니었어? 어떻게 해외에서 잘살고 있는 거지? 무슨 사업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백호는 그녀에게 반찬을 한 젓가락 집어주며 대답했다.“그 사람들이 무슨 사업을 하겠어? 출소하고 나서 누구한테 빌붙은 건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됐어. 다들 해외로 이민을 갔고 사업은커녕 허구한 날 놀고먹기만 하던데 뭐. 돈은 어디서 난 건지...”사고가 났던 그날 밤,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송문아에 의해 감옥에 보내졌다. 근데 그 사람들이 지금은 돈 걱정 없이 잘 먹고 잘살고 있단다.젓가락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그 사람들 지금 어디에 있어?”그녀가 그들을 찾아가 결판이라도 낼 줄 알았던 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오래전에 죽었어. 어떤 사람은 바다에 나갔다가 죽었고 어떤 사람은 도박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고 어떤 사람은 차에 치여 죽었어. 아무튼 다들 비참하게 죽었지. 하느님께서 너 대신 복수해 주셨나 봐.”나쁜 짓을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근데 주서희는 그 얘기를 듣고 의문 투성이였다. 그들이 왜 갑자기 부자가 되었는지, 왜 갑자기 사고로 죽었는지. 그들이 무슨 비밀이라도 알게 될까 봐 돈을 주고 이곳을 떠나게 한 뒤 감쪽같이 그들을 없앤 것 같다. 눈을 내리깔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음식을 먹고 있는 백호를 향해 물었다.“넌 어떻게 알았어?”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같은 나라에 있었으니까. 그들이 사고가 난 뒤 현지 뉴스에도 나왔었어. 근데 어떻게 모
그녀 앞에 서 있던 소수빈은 최우진이란 이름을 본 순간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바로 입을 열었다. “그 당시 그 일 말이야. 송문아가 뒤에서 꾸민 일일지도 몰라. 아니라면 사촌 오빠가 그놈들한테 돈 보낼 일이 뭐가 있어? 게다가 각 계좌에 입금된 금액이 모두 일치해.”비록 여러 번 나누어 돈을 입금하였지만 모두 비슷한 금액이었다. 만약 그 배후가 소준섭이었다면 그는 그놈들에게 해외의 은행 계좌를 만들어 주고 조작한 뒤 돈을 송금했을 것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무식한 송문아만이 이리 여러 개의 계좌를 통해 돈을 송금했을 것이다.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진 그녀는 소수빈의 부축을 받고서야 제대로 설 수 있었고 그녀는 소수빈의 팔을 잡고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 그녀의 모습에 소수빈은 허리춤에 꽂힌 칼을 빼 들고 당장 부산으로 달려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 “그 여자 잡아 올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똑똑히 물어봐야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내가 갈 거예요.”직접 가서 송문아에게 묻고 싶었다. 이 사람들에게 왜 돈을 보낸 건지? 소준섭의 유골함을 보고 웃던 사람이 왜 부산으로 돌아와 장례식장에서는 통곡을 한 건지? 그녀를 아끼던 고모의 진짜 모습은 어떤 건지?그녀는 간신히 소파를 짚고 일어섰다. 그녀가 마음에 걸렸던 소수빈은 함께 부산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허윤서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어렴풋이 좋은 소식이라는 걸 짐작했다.얼마 후, 전화를 끊은 그가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서희야, 네 새언니 임신했대.”마음이 무거웠던 그녀도 반가운 소식에 기분이 좋아졌다.“너무 잘됐어요.”소수빈은 너무 기뻤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달려가 아내를 만나고 싶었지만 주서희를 보고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가자. 일단 부산으로 가.”오빠로서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주서희는 철없이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새언니 이제 막 임신했는데 오빠가 곁에 있어
이 웃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그 원인을 알아차렸다.자신보다 늦게 결혼한 소수빈이 먼저 아이를 가지게 되었으니...매일 밤 열심히 노력했는데 소수빈보다 명중할 확률이 낮다니... 그 생각에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가 펜을 집어 들며 차갑게 말했다.“안 돼.”“왜요?”웃고 있던 소수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도 휴가를 허락해 주지 않는다니, 진짜 독한 인간이야.이승하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계속해서 서류에만 몰두했고 마음이 급해진 소수빈은 소리를 질렀다.“대표님, 제발 하루만이라도 휴가 좀 주세요.”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이승하의 모습에 소수빈은 책상을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소파로 향했다. “대표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잠시 후, 소수빈을 흘겨보던 그가 서랍을 열어 카드 한 장을 꺼내 소수빈에게 건네주었다.“아이 가진 거 축하해.”카드를 보고 소수빈은 어리둥절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대표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이승하는 다시 펜을 내려놓고는 손을 뻗어 카드를 낚아채려고 했다.“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고. 이건 택이네 아이한테 줘야겠다.”그 소리에 소수빈은 냉큼 이승하의 손에서 그 카드를 낚아챘다.“다른 사람한테 다 양보해도 택이 씨한테 안 되죠. 그냥 제가 받겠습니다.”그가 뻔뻔스러운 얼굴로 크게 웃으며 카드를 다시 손에 넣었다.“그럼 대표님, 전 이만 저희 집사람한테 가보겠습니다.”이승하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소수빈이 사무실을 나서자 그제야 별처럼 빛나는 눈을 들어 소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주변 사람들 중 소수빈이 첫 번째로 아빠가 되는 것이었고 소수빈을 생각하면 당연히 기뻤다. 다만 그의 아이는 언제쯤 찾아올지...원래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소수빈이 저렇게 기뻐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