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경찰들은 현장을 봉쇄한 뒤 총기 사건의 경위를 조사했다. 그러고는 이내 소준섭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 경찰에 연락을 취하였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이 되었다. 얼마 후, 시신은 화장터로 옮겨졌고 그의 시신은 바로 화장을 마쳤다. 불 속에서 타고 있던 소준섭의 시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주서희는 이 모든 게 진실이기를 바랐다.의사인 그녀는 사람이 사망한 후 3일 동안은 인체의 근육이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근육 조직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신경 반사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에 소준섭이 벌떡 일어나 앉은 건 다만 근육이 아파서 보인 반응일 뿐이다. 소준섭은 이미 죽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죽기 전, 그는 그녀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그녀를 보호하였지만 자신은 오히려 성폭행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좋은 명성을 얻지 못하였고 소정의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소씨 가문에 더 이상 소준섭이라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다만 체면을 위해 그들은 소준섭의 유골을 받으러 해외까지 달려왔다 . 소정의를 따라오는 사람들 중에는 송문아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일곱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였지만 눈빛은 야무져 보였다. 한편, 주서희가 소준섭의 유골함을 소찬우에게 건네주었을 때 그는 상자를 건네받아 바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던져주고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유골이 담겨져 있는 상자라고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동생으로서 꼭 들고 있어야 할 유골함이지만 소찬우는 매몰차게 들고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 때문에 그가 죽은 것이니까. 일곱 살짜리 아이가 소준섭한테 무슨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는가? 게다가 소준섭도 이 아이한테 쌀쌀맞게 대했었다. 근데 무슨 이유였을까? 유골함을 만지던 송문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그려졌다. 소준섭의 어머니를
어린 시절의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고모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 고모의 말에 따라 용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여 그녀는 송문아의 말에 따라 늘 소준섭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가끔은 성적이 안 좋다는 핑계까지 대면서 소준섭한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용감하게 그를 찾아갔다. 자신의 정성 어린 마음이 언젠가는 소준섭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송문아에 대한 싫은 마음 때문에 그는 그녀까지 미웠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를 냈고 여우같이 남자한테 꼬리를 친다며 역시 송문아의 조카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녀한테 멀리 떨어지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한밤중에 그녀의 방에 왔었다. 가끔 자다가 눈을 뜨면 그가 옆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독살스럽게 노려보고는 돌아서기도 했다. 그 후, 송문아는 그녀의 방에서 나오는 소준섭을 몇 번 마주치더니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말을 바꾸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고 하고는 백호를 좋아하라고 했다. 백호는 그녀와 같은 반 친구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백호였다. 그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걸 마침 송문아가 보게 된 것이다.백호의 집안 배경을 조사해 본 송문아는 백호가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대놓고 주서희에게 백호랑 어찌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백호가 예의가 바른 사람인 것 같다면서 소준섭보다 훨씬 교양이 있어 보인다면서 친구로 잘 지내라고만 했다. 주서희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게다가 백호는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늘 먼저 그녀를 찾아와 말을 걸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녀는 송문아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고모, 왜 웃으세요?”송문아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서희가 이 악마 같은 놈한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서 웃는 거야.”송문아는 그녀를 매우 불쌍히 여기는 듯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그동안 소준섭 때문에 네가 고생한 거 고모는 다 알고 있다. 널 보면서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얘가 죽어서 내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러나 네가 고통에서 벗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느냐?”송문아는 그녀에게 잘해주었다. 돈도 사랑도 아낌없이 주었고 그녀가 처음 소씨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소정의가 준 돈을 그녀의 통장에 넣어주었고 부동산도 여러 개 주었다.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살아온 주서희가 어린 나이에 이미 억만장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소준섭을 대하는 송문아의 태도는 그녀가 보기에 아주 다정했다. 늘 소준섭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아무리 소준섭이 냉담하게 대하고 독설을 퍼붓고 폭력적으로 대하더라도 송문아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뒤끝도 없이 소준섭을 아껴주었다. 다만 소준섭은 주서희가 없는 곳에서 송문아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그때면 송문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정의가 먼저 나서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소준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의자를 걷어차고 일어나 소씨 가문을 떠났다. 세 사람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주서희는 위층에 있는 편이 많았고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송문아가 그녀에게 얼른 가라고 눈빛을 보냈다. 남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에 그 집안일에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얌전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 후 세 사람의 갈등은 점점 더 많아졌고 그녀는 가까이하지도 않았고 엿듣지도 않았다. 하여 매번 세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는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하였다. 주서희의 기억 속에 송문아는 정말 온화하고 착한
소준섭의 유골함은 소정의의 가족들이 가지고 귀국했다. 부산 쪽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송문아가 의붓아들에 대해 정이 매우 깊다고 했다. 반면 소정의는 소준섭이 가문 망신을 시킨 놈이라고 하면서 장례를 크게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일로 송문아는 소정의와 대판 싸웠고 아무리 평판이 안 좋아도 어찌 됐든 소씨 가문의 아들이니 장례를 크게 치러야 한다고 했다. 결국 송문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소정의는 그녀에게 장례를 맡겼고 조문 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송문아가 소준섭의 영정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절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부산에서는 그녀가 최고의 계모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소준섭은 은혜도 모르는 의붓아들이라고 낙인찍혔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주서희는 한창 주삿바늘을 들고 약을 바르고 있었다. 흠칫하지도 않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얼마 후, 파미란에서 돌아온 그녀는 윤주원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곁에서 그의 일상생활을 돌보면서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해야 할 일들을 조금도 빼놓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유와 정가혜는 처음에 그녀가 소준섭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까 봐 많이 걱정되었다. 근데 뜻밖에도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흰 가운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소준섭을 언급하든 언급하지 않든 그녀는 늘 환한 얼굴이었고 마치 소준섭이 세상을 떠난 게 그녀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난 일인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들에게 일부러 자신 앞에서 소준섭의 얘기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없으니 더 이상 전전긍긍하며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조문도 가지 않았고 그가 어떻게 묻어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서유와 정가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당부만 했다.그녀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볼일 보라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서유는 설계도를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고 정
윤주원의 손은 빠른 시간 안에 응급 처리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심각한 후유증 없이 이미 많이 회복되었고 조금 더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오자 윤주원은 옆에 있던 부모님을 내보냈고 그의 부모님들도 눈치껏 그녀를 한번 보고는 얘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오늘은 어때? 손은 움직일 수 있어?”윤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촉촉한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말끔히 다 나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답했다.“회복은 될 수 있지만 앞으로 수술은 더 이상 힘들 거야.”“제약 회사에 한동안 다녀보니까 난 수술하는 의사보다 약품 개발에 더 관심이 있더라고요.”“훌륭한 외과의사였잖아. 이렇게 수술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까워.”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의사든 약을 개발하는 사람이든 수술을 하든 환자의 재활에만 도움을 주든, 모든 게 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마지막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려 과거로 돌아간 듯 멍해졌다.열여덟 살의 소준섭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 당시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계단에 기댄 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그의 취업 방향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소유성은 의사 가문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천부적인 재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면서 의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반면 소정의는 컴퓨터를 잘 다루니 금융 업계에 필요한 인재라고 하면서 금융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했다. 두 부자가 이 일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고 결국 소정의의 뜻을 굽히지 못한 소유성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소준섭이 소유성을 다독였다.“제가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을 치료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소준섭은 대학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기로 소정의와 약속했기 때문에 소정의는 그가 대학
이승하가 귀국했다. 그의 베일에 싸인 애인으로서, 서유는 곧바로 8호 맨션으로 보내졌다.계약의 규정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엔 티 없이 깨끗하게 몸을 씻어야 했고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절대 풍겨선 안 됐다.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 침실로 왔다.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에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이리 와.”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서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평소에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그가 혹시나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그의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는 이승하.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함께 자고 싶을 뿐이었다.이번에 외국으로 출장 가게 되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만지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그녀가 잠에 곯아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다시 잠에서 깨어난 서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간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매번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떠나지 않은 걸까?서유는 가까스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착한 고양이 마냥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몇 분 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남자가 샤워 타워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넓은 어깨로부터 쇄골 언저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가슴골을 따라 부드럽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이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
방을 떠나는 이승하 뒤로 그의 개인 비서 소수빈이 쟁반 위에 올린 약을 들고 나타났다. “서유 씨, 부탁드립니다.”공손한 태도로 약을 건네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피임약이었다.서유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길 허락하지 않는 이승하였다. 그래서 매번 일이 끝나면 소수빈을 시켜 약을 건네주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먹게 했었다.하얀 알약을 바라보며 서유의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심장이 허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이승하의 무정함에 마음이 아파서인지 숨쉬기가 가빠졌다.“서유 씨…”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가 혹여나 약을 먹으려 하지 않을까 봐 소수빈이 다그치듯 그녀를 불렀다.그런 그를 흘긋 보던 서유는 조용히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물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살짝 풀며 소수빈은 가방에서 집문서와 수표들을 꺼내 테이블에 배열했다.“서유 씨, 대표님께서 드리는 보상입니다. 부동산과 고급 자동차 외, 현금 백억 원을 준비하셨습니다.”실로 놀라운 액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돈이었던 적은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소수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이런 거 필요 없어요.”약간 놀란 듯,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소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성에 차시지 않은 겁니까?”그 말에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소수빈마저 내가 돈을 위해서 승하 옆에 있는 거로 생각하니 이승하는 오죽할까. 이렇게 많은 이별 비용을 내는 건 앞으로 더는 돈 때문에 들러붙지 말라는 뜻이겠지?’“이건 승하 씨가 줬던 건데 다시 전해주실래요? 그리고 카드에 있는 돈은 건드린 적이 없다고 알려주세요. 지금 주신 돈과 부동산 모두, 전 받지 않을 거예요.”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안에 있던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며 서유가 말했다.‘5년 동안 대표님께서 주신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건가?’믿을 수 없다는 듯, 소수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그가 믿든 말든 서유는 블랙 카드를 집문서와 수표들
서유가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곳은 친구 정가혜가 사는 곳이었다.그녀는 가볍게 문을 두드리곤 문 옆에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둘은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고 고아라는 슬픔을 공유한 자매 같은 사이었다.과거 이승하가 서유를 데려갈 때, 정가혜가 그녀에게 말했었다.“서유야, 앞으로 갈 데가 없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걸 잊지 마.”바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서유는 이승하가 준 집을 돌려줄 용기가 생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고 서유를 본 정가혜가 활짝 웃으며 따듯하게 그녀를 맞이했다.“우와, 오랜만이네!”하지만 서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난감한 듯한 미소를 보였다.“가혜야, 나 너한테 얹혀살려고 왔어.”그제야 가혜는 서유가 캐리어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미소가 차츰 굳어졌다.“무슨 일이야?”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유가 멋쩍게 웃었다.“그 사람이랑 헤어졌어.”그 미소가 억지로 쥐어짠 미소임이 가혜는 너무 눈에 선했다.서유의 작은 얼굴은 찬찬히 뜯어보면 야위어서 눈이 움푹 꺼져 보였으며 안색이 창백했다.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유의 몸은 얄팍한 종잇장처럼 불안해 보였다.가혜는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순간 서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도 두 손으로 가혜를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나도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그 말이 그저 위로일 뿐이라는 걸 가혜가 모를 수 없었다. 서유에게 있어 이승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동안 똑똑히 보아왔으니까.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승하에게 돌려줄 2억이라는 돈을 모으기 위해 서유는 몸이 부서지라 일했다.멍청하게도 그리하면 이승하의 눈에 조금이라도 더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결국엔 무정하게 버림받았다.가혜의 기억이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5년 전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만약 그때, 서유가 송사월을 위해 몸을 팔지만 않았어도 이승하를 만날 수 없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의 서유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