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친구를 대할 때는 정이 깊고 의리가 있었다. 그의 형이 소준섭에게 자신을 감시하라고 부탁했음에도 소준섭은 한 번도 형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억을 되찾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소준섭은 술 몇 병을 들고 그의 묘 앞에 앉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적도 많았다.이후 다시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 소준섭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두 다리를 잃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았다. 소준섭은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그의 다리를 치료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때의 김시후는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감에 서서히 일어설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기에 소준섭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김시후는 생각했다. 만약 그때 소준섭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인해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소준섭과 주서희 사이에도 얽히고설킨 일이 너무 많았다. 소준섭 자신도 지독한 고통 속에 살고 있었기에 자신의 다리와 우울증을 위해 소준섭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그런데도 자신조차 돌볼 여유가 없었던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다리와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송사월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소준섭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준섭아, 네 유언 꼭 들어줄게. 부디 편히 쉬어라...”주서희의 손가락은 김시후를 위한 유언을 넘어 마지막 줄로 향했다.[다음 생엔...]단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피의 자국을 보면 유언을 쓰다 도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지점에서 이 세상에 자신을 찾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 느끼고 더 이상 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소준섭에게 있어 계모와 결혼한 아버지는 이미 마음이 온통 계모에게 쏠려 있었고, 계모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빠져
송사월조차 모르는 사실이라면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소준섭은 그저 그렇게 악랄하게 굴고 싶었을 것이다. 주서희를 철저히 괴롭히기 위해 사람들을 보낸 것일 테니 말이다.어쨌든 그때 그는 주서희를 몹시도 증오했다. 비록 그녀를 조금이라도 좋아했을지라도 그동안 쌓인 증오가 훨씬 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이제는 더 이상 답을 찾을 수 없게 된 주서희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햇빛 속에 있는 소준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손끝이 차갑고 굳어진 그의 뺨에 닿았을 때 주서희는 그를 한번 안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주서희는 다시 송사월에게 물었다. “누가 준섭 씨를 죽였는지 묻지 않나요?”송사월은 주서희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섭이가 널 지키고자 했다면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자살로 위장된 흔적이 아무리 정교해도 송사월은 소준섭을 너무 잘 알기에 속지 않았다. 분명 소준섭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주서희가 총을 쏘게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서희에게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 자살로 위장한 것이다.송사월은 오래도록 생각했다. 만약 그가 소준섭의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사랑은 집착에 가깝지만 그 사랑은 진심이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줄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이 결말은 떠난 자에게는 해방일 수 있으나 남겨진 자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를 직접 쏴 죽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 오랜 세월의 사랑과 증오 속에서 도대체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 누가 알겠는가?송사월은 주서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지키고자 했던 친구의 유언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주서희 스스로는 자신을 탓하게 될 것이다.
소수빈이 그렇게 아래층으로 끌려오곤 멍하니 있던 주서희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서희야...”아연실색한 주서희를 보며 소수빈은 그녀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곤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걱정하지 마. 소준섭이 죽었으니 앞으로 너한테 집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주서희는 눈 밑에 달아오른 붉은 빛을 감추고는 입꼬리를 올려 개운하나 조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요, 소준섭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사람이 없어요. 정말 다행이에요.”소수빈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정말로 기뻐하는 줄 알았다. 서둘러 몸을 돌려 저 멀리를 가리켰다.“서유 씨와 가혜 씨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소수빈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보니 서유와 정가혜가 배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온 것을 눈치챘는지 서유와 정가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빠르게 걸어오더니 거의 뛰다시피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따뜻함을 느낀 주서희도 두 사람을 안아주었지만 왜인지 그들이 주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서희의 마음은 여전히 덩굴에 감긴 듯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 답답하고 숨 막히는 느낌에 주서희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유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었을 뿐, 소준섭의 시신이 운구차에 실려 내려가는 것조차 돌아보지 못했다...서유는 하얀 손을 들어 주서희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서희가 병실을 뛰쳐나갔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소준섭에 대한 죄책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 감정은 아마도 사랑했던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얽혀있던 관계가 갑자기 끝났다는 부적응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주서희가 아직도 소준섭을 사랑하는지 그 답은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서유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주서희를 달래고 나서 그녀를 놓아주고 배에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현지 경찰들은 현장을 봉쇄한 뒤 총기 사건의 경위를 조사했다. 그러고는 이내 소준섭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 경찰에 연락을 취하였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이 되었다. 얼마 후, 시신은 화장터로 옮겨졌고 그의 시신은 바로 화장을 마쳤다. 불 속에서 타고 있던 소준섭의 시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주서희는 이 모든 게 진실이기를 바랐다.의사인 그녀는 사람이 사망한 후 3일 동안은 인체의 근육이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근육 조직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신경 반사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에 소준섭이 벌떡 일어나 앉은 건 다만 근육이 아파서 보인 반응일 뿐이다. 소준섭은 이미 죽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죽기 전, 그는 그녀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그녀를 보호하였지만 자신은 오히려 성폭행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좋은 명성을 얻지 못하였고 소정의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소씨 가문에 더 이상 소준섭이라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다만 체면을 위해 그들은 소준섭의 유골을 받으러 해외까지 달려왔다 . 소정의를 따라오는 사람들 중에는 송문아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일곱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였지만 눈빛은 야무져 보였다. 한편, 주서희가 소준섭의 유골함을 소찬우에게 건네주었을 때 그는 상자를 건네받아 바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던져주고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유골이 담겨져 있는 상자라고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동생으로서 꼭 들고 있어야 할 유골함이지만 소찬우는 매몰차게 들고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 때문에 그가 죽은 것이니까. 일곱 살짜리 아이가 소준섭한테 무슨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는가? 게다가 소준섭도 이 아이한테 쌀쌀맞게 대했었다. 근데 무슨 이유였을까? 유골함을 만지던 송문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그려졌다. 소준섭의 어머니를
어린 시절의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고모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 고모의 말에 따라 용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여 그녀는 송문아의 말에 따라 늘 소준섭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가끔은 성적이 안 좋다는 핑계까지 대면서 소준섭한테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아주 나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용감하게 그를 찾아갔다. 자신의 정성 어린 마음이 언젠가는 소준섭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송문아에 대한 싫은 마음 때문에 그는 그녀까지 미웠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그는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를 냈고 여우같이 남자한테 꼬리를 친다며 역시 송문아의 조카딸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그녀한테 멀리 떨어지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녀를 싫어하면서도 한밤중에 그녀의 방에 왔었다. 가끔 자다가 눈을 뜨면 그가 옆에 서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독살스럽게 노려보고는 돌아서기도 했다. 그 후, 송문아는 그녀의 방에서 나오는 소준섭을 몇 번 마주치더니 어찌 된 일인지 갑자기 말을 바꾸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고 하고는 백호를 좋아하라고 했다. 백호는 그녀와 같은 반 친구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백호였다. 그날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준 걸 마침 송문아가 보게 된 것이다.백호의 집안 배경을 조사해 본 송문아는 백호가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대놓고 주서희에게 백호랑 어찌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백호가 예의가 바른 사람인 것 같다면서 소준섭보다 훨씬 교양이 있어 보인다면서 친구로 잘 지내라고만 했다. 주서희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게다가 백호는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었다. 늘 먼저 그녀를 찾아와 말을 걸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녀는 송문아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고모, 왜 웃으세요?”송문아는 웃음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우리 서희가 이 악마 같은 놈한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어서 웃는 거야.”송문아는 그녀를 매우 불쌍히 여기는 듯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그동안 소준섭 때문에 네가 고생한 거 고모는 다 알고 있다. 널 보면서 내 마음이 너무 아팠어. 얘가 죽어서 내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그러나 네가 고통에서 벗어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느냐?”송문아는 그녀에게 잘해주었다. 돈도 사랑도 아낌없이 주었고 그녀가 처음 소씨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소정의가 준 돈을 그녀의 통장에 넣어주었고 부동산도 여러 개 주었다.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살아온 주서희가 어린 나이에 이미 억만장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소준섭을 대하는 송문아의 태도는 그녀가 보기에 아주 다정했다. 늘 소준섭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를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아무리 소준섭이 냉담하게 대하고 독설을 퍼붓고 폭력적으로 대하더라도 송문아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뒤끝도 없이 소준섭을 아껴주었다. 다만 소준섭은 주서희가 없는 곳에서 송문아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그때면 송문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정의가 먼저 나서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뺨을 맞은 소준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의자를 걷어차고 일어나 소씨 가문을 떠났다. 세 사람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주서희는 위층에 있는 편이 많았고 실수로 부딪히기라도 하면 송문아가 그녀에게 얼른 가라고 눈빛을 보냈다. 남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에 그 집안일에 끼어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얌전하게 멀리 떨어져 있었다.그 후 세 사람의 갈등은 점점 더 많아졌고 그녀는 가까이하지도 않았고 엿듣지도 않았다. 하여 매번 세 사람의 갈등이 폭발하는 이유를 그녀는 알지 못하였다. 주서희의 기억 속에 송문아는 정말 온화하고 착한
소준섭의 유골함은 소정의의 가족들이 가지고 귀국했다. 부산 쪽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송문아가 의붓아들에 대해 정이 매우 깊다고 했다. 반면 소정의는 소준섭이 가문 망신을 시킨 놈이라고 하면서 장례를 크게 치르는 것을 반대했다. 그 일로 송문아는 소정의와 대판 싸웠고 아무리 평판이 안 좋아도 어찌 됐든 소씨 가문의 아들이니 장례를 크게 치러야 한다고 했다. 결국 송문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소정의는 그녀에게 장례를 맡겼고 조문 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송문아가 소준섭의 영정 사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기절할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부산에서는 그녀가 최고의 계모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소준섭은 은혜도 모르는 의붓아들이라고 낙인찍혔다. 그 소식을 들을 때, 주서희는 한창 주삿바늘을 들고 약을 바르고 있었다. 흠칫하지도 않고 표정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 대해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얼마 후, 파미란에서 돌아온 그녀는 윤주원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곁에서 그의 일상생활을 돌보면서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해야 할 일들을 조금도 빼놓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서유와 정가혜는 처음에 그녀가 소준섭 때문에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까 봐 많이 걱정되었다. 근데 뜻밖에도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흰 가운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소준섭을 언급하든 언급하지 않든 그녀는 늘 환한 얼굴이었고 마치 소준섭이 세상을 떠난 게 그녀에게는 고통에서 벗어난 일인 것 같았다.주서희는 그들에게 일부러 자신 앞에서 소준섭의 얘기를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가 없으니 더 이상 전전긍긍하며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조문도 가지 않았고 그가 어떻게 묻어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서유와 정가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당부만 했다.그녀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볼일 보라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서유는 설계도를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고 정
윤주원의 손은 빠른 시간 안에 응급 처리를 했기 때문에 특별히 심각한 후유증 없이 이미 많이 회복되었고 조금 더 치료하면 퇴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병실로 들어오자 윤주원은 옆에 있던 부모님을 내보냈고 그의 부모님들도 눈치껏 그녀를 한번 보고는 얘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물었다.“오늘은 어때? 손은 움직일 수 있어?”윤주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촉촉한 눈동자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말끔히 다 나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회복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대답했다.“회복은 될 수 있지만 앞으로 수술은 더 이상 힘들 거야.”“제약 회사에 한동안 다녀보니까 난 수술하는 의사보다 약품 개발에 더 관심이 있더라고요.”“훌륭한 외과의사였잖아. 이렇게 수술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아까워.”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의사든 약을 개발하는 사람이든 수술을 하든 환자의 재활에만 도움을 주든, 모든 게 다 사람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사람을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마지막 한마디에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려 과거로 돌아간 듯 멍해졌다.열여덟 살의 소준섭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그 당시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계단에 기댄 채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그의 취업 방향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소유성은 의사 가문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천부적인 재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면서 의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반면 소정의는 컴퓨터를 잘 다루니 금융 업계에 필요한 인재라고 하면서 금융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했다. 두 부자가 이 일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고 결국 소정의의 뜻을 굽히지 못한 소유성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소준섭이 소유성을 다독였다.“제가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을 치료하고 구할 수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어요.”소준섭은 대학에서 금융학을 전공하기로 소정의와 약속했기 때문에 소정의는 그가 대학
서유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육성재는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갔고, 모든 이들이 묘지를 떠난 후에도 그녀의 묘비 앞에 남아 머물렀다.“서유 씨...”그는 묘비를 붙잡고 천천히 몸을 낮추어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젊지 않은 눈으로 그녀의 영정 속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했다.“내가 올 줄 몰랐죠?”육성재는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시작했다.“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랑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도 참 정이 깊은 놈이었네요.”영정 사진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너무 깊이 사랑해서 세상 어떤 여자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어요. 그러니 서유 씨, 나도 이승하 못지않게 당신을 사랑했던 거예요, 안 그래요?”그러나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묘지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새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새와 짐승들이 떠나고 나니 주변은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마치 지난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힌 채였다.그토록 짙은 사랑은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난 지금에서야 그는 그녀의 묘 앞에 와서 고백했다.그 역시, 깊이 사랑했노라고.모든 사람에게는 후회가 있다. 육성재의 유감은 그녀가 죽기 전까지 자신을 이렇게 바보처럼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알게 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서유는 이미 떠났는데, 육성재 난 왜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거냐? ’육성재는 그녀의 묘비 앞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천천히 일어나 발걸음을 돌렸다.그의 삶은 사랑이 아니라 일에 무게를 둔 인생이었다. 그는 생을 바쳐 육씨 집안을 세계 최고의 가문으로 일궈냈다.그는 상업계의 전설 같은 인물로 남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육성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하곤 했다.수도에 있는 송사월은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제일 마지막으
생이 마감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그 5년 동안 이승하가 숨겼던 사랑이었다.몇 번이나 뒤척이며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몸이 단단하고 강인한 두 팔에 꽉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강하게 끌어안는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또한 주말에 식사할 때, 식탁 건너편에 앉은 이승하가 가끔 그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오랜 짝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마친 후 그녀를 안아 자신의 가슴에 엎드리게 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아이를 달래듯 잠들게 했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이승하의 사랑은 작은 순간순간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타인에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승하 본인만은 아주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얼마나 힘들게 숨겨왔는지...서유의 눈은 이미 뜰 수 없었고, 몸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 번 볼 힘조차 없었다.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것을 받은 사람은 정가혜였다.세월이 흐르면서 정가혜도 나이가 들었다. 젊었을 때의 맑은 목소리는 사라지고 약간 쉰 소리가 섞여 있었다.“서유야, 조금만 기다려. 우리 며느리가 출산하면 바로 널 보러 갈게...”삶의 마지막 순간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왜인지 이미 메마르고 고갈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이내 오열로 변해 멈출 수 없었다.“가혜야, 난 승하 씨가 너무 보고 싶어. 그 이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 부탁할게. 하준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엄마가 하준이 결혼식을 볼 수 없게 됐다고...”전화기 너머의 정가혜는 이 말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서유가 그동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어머니로서 아들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이승하를 따라갔을 것이다.얼마 전부터 서유의 몸이
서유의 손가락이 이하준의 머리 뒤로 부드럽게 닿았다. 마치 이미 모든 사실을 받아들인 듯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온했다. “언제쯤 결혼할 거니?”이하준의 몸이 경직되었다. 안개처럼 흐릿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유를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어머니... 아직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아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서유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봐봐. 네 엄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단다. 제발 네 아빠를 만나러 가게 해줘. “어릴 적엔 부모님이 그를 속박했지만, 커서는 그가 부모님을 속박했다. 오직 그 속박만이 그를 고아로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만 더 이기적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그는 서유의 팔을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거예요. 그러면 결혼하겠습니다, 네?”결국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서유는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회에 가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네가 곧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길 빌어주마...”서유의 소원을 결코 들어주지 말아달라고 하늘의 신들에게 기도하며, 이하준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결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그는 이승하가 남겨둔 로봇을 다시 가져와 서유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모두 로봇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유언의 일부를 들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아버지가 말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고 전했다.처음에 서유는 이승하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봇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는 서재에 앉아 하루하루 이승하가 녹음했던 로맨틱한 말을 돌려서 들었다.마치 예전에 그가 그녀를 찾지 못했을 때 다른 이의 번호로 하루에 십여 통의 문자를 보내 그녀의 부재를 애도했던 것처럼.이제는 그가 먼저 떠났지만
아들을 위해, 결국 서유는 이승하를 따라 죽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하룻밤 사이 머리가 백발이 되어, 마치 열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이 되었다. 예전에는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던 얼굴이 순식간에 주름투성이가 되었고,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그녀의 눈동자도 생기를 잃고 텅 빈 채로 아무 빛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엄마가 되었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승하의 무덤 앞에서 약속했다.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아들이 결혼하면 그때 찾아가겠다고. 만약 자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다음 생의 약속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이승하의 장례식에 서유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내어 비틀거리며 그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무덤가에서 그녀가 중얼거리던 말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직 그녀를 부축하며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이하준만이 그 말을 기억했다.눈 덮인 땅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그날 밤, 서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이승하의 시신은 얼음관에 안치된 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일주일을 버텼다. 그녀가 깨어난 후, 그녀는 하얗게 센 머리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단 한 번 보고는 곧바로 돌아섰다.그들이 이승하를 어떻게 묻었는지, 묘지는 어떻게 정했는지, 영정 사진으로 어떤 사진을 선택했는지 서유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차가운 베개를 매만지며 그가 아직 살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데만 몰두했다.‘만약 당신이 여기 있었다면, 내 하얀 머리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겠죠.’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랬을 거예요.”이승하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유가 그 때문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는 한참 동안 기뻐하며, 그녀 마음에 자신이 있다는 확신을 얻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가 그로 인해 속을 끓이고 밤낮으로 잠 못 이루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서유는 떨리는 속눈썹을 들어, 삶의 의미를 잃은 듯한 눈으로 멀리 바라보며 말했다.“아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 나와 그 사람, 그냥 여기 있을 거야. 내가 얼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어.”그녀가 여기서 얼어 죽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주변 사람들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먹먹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말리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서유는 그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단호하고도 완강하게, 이승하를 품에 안고 눈 덮인 땅 위에 앉아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이하준이 서유의 손을 붙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힘껏 눌러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어머니,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알아요. 그래서 지금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드신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이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까지 잃을 순 없어요. 제발 부탁이에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 주세요...”아들이 귀 옆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서유는 천천히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빚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의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한 미소였다.“난 이미 네 아버지가 떠날 준비를 오래전에 마쳤단다. 이제 그이가 정말 떠났으니,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너도 알잖니. 그이가 살면 나도 살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야. 아무도 이걸 막을 순 없어.”예전에 이하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버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성인식을 맞이한 바로 오늘, 부모님 두 분을 동시에 잃을 수 없었다.눈 덮인 땅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천천히 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서유를 힘껏 끌어안았다.“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결혼하는 것과 자식을 낳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아버지는 그걸 보지 못하고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대신 그 순간을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
눈물이 눈가에서 갑작스럽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을 찢는 통곡이 아니었다. 아무 소리 없이 흘러내릴 뿐, 그녀는 벌어진 입술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생에서 이승하에게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창백한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바보, 당신이 아무리 피를 흘린다 해도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내가 무섭겠어요?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왜 굳이 혼자 이런 곳에 온 거예요?”마지막 이별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녀의 이승하는 이런 안타까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모든 걸 숨겼다.만약... 그녀가 그 가짜 이승하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평생 그의 몸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눈과 함께 얼어붙어 영원히 설산 아래에 묻혔을 것이다.이승하는 이미 스스로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게 하려고, 그녀를 속이기 위해 가짜 로봇을 만든 것이다.‘하지만 승하 씨...’‘당신이 아무리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든다 해도, 그건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평생 날 속일 수 있다면 난 받아들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지금 그 거짓말은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잖아요.’‘당신은 내가 당신을 찾으러 올 것을 허락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가짜 로봇을 만들어 내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피를 흘리는 고통을 혼자 감당하며 이런 깊은 산속에서 눈과 마른나무를 친구 삼아 떠나지도 않았겠죠.’그녀의 이승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서유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와 함께 죽는다면 그것은 한평생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이제 먼저 떠난 이승하가 황천길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서유는 알 수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듯, 이하준이 떨리는 손으로 이승하의 손을 움켜쥐던 순간, 서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네발로 기어 이하준에게 달려갔다.그녀는 여전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단호한 시선은 이승하의 얼어붙고 하얗게 질린 손에 닿자마자 떨리는 속눈썹을 내리깐 채,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이승하를 덮은 눈을 미친 듯이 파헤쳤다.깊은 산속의 눈은 산 아래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끝없이 쌓인 층층의 눈 속에서 서유는 온 힘을 다해 이승하를 파내던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가 일곱 군데에서 새어 나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은 더 이상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하준은 아버지의 침묵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마음속 어딘가가 찢어지듯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듯, 그의 세계는 단숨에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하준아.”서유의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도와줘.”이하준은 어머니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부탁에 정신을 차렸다. 서유의 눈빛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었다. 오직 이승하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단호함만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얼어붙은 이승하의 손과 얼굴을 붙들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를 녹이려는 듯 필사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하준도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발을 감싸 쥐었다. 그는 얼어붙은 신발을 벗기고 자신의 배 위로 올린 뒤, 손바닥으로 아버지의 다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 시작했다.서유는 이승하의 얼굴에 덮인 얼음을 녹이며, 그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계속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나더러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나 정말 잘 기다렸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키고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지금이라도 눈을
눈밭을 헤매며 이승하를 찾고 있던 서유는 갑자기 발길을 멈췄다. 마치 영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멍하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오직 그녀 자신뿐, 영혼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서서 한참을 있다가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세 번 뛰고 난 뒤, 가슴 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 몸을 굽히며 고통을 참고자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직감적으로 그녀는 이승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다. 이를 악물고 계속 그를 찾으려던 그 순간, 눈 위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한 사람이 붉은 리치 한 송이를 손에 들고 걸어왔다.“여보,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와 있는 거야?”눈앞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승하를 보자, 긴장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서유는 한순간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그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 같았다.서유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마치 숲속의 토끼처럼 기쁨에 차 달려가 이승하의 품에 안겼다.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익숙한 향기에, 서유는 깊게 숨을 내쉬며 안심했다.“당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정말 당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이승하는 긴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손길이었다.“내가 말했잖아. 항상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그의 품 안에 꼭 안긴 서유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더욱 꽉 껴안았다. 하지만 갑자기 무언가가 손에 닿자, 서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승하를 밀쳐내며 소리쳤다.“당신... 당신은 내 승하 씨가 아니야!”이승하는 요즘 들어 많이 수척해졌고, 허리를 감쌀 때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승하는 예전처럼 건장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당신
시린 눈보라 속에 홀로 서 있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겨우 남은 힘으로 긴 손가락을 들어 흔드는 그를 보며, 이연석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재빨리 눈 덮인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형! 내가 먼저 의사를 부르고, 로봇을 산으로 올려보낼게. 그러고 나서 바로 돌아올 테니까 그 자리에서 꼭 기다려. 금방 올게!”밤길은 험난했지만, 사방으로 쏟아지는 눈은 길을 환히 비춰주어 이연석은 마치 대낮처럼 보이는 길 위를 달렸다. 하지만 급한 걸음은 때때로 방향을 잃고, 몇 차례나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휘청거렸다.멀어져가는 이연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승하는 느려지는 심장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생명의 문이 서서히 닫혀가는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서유가 그의 흔적을 찾으며 이름을 부르자, 이승하는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고개를 돌려 눈 덮인 길 위에서 우산을 쓰고 걷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 그로 인해 시간이 멈추고 만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지만, 이제는 햇빛도 사라지고 눈보라만이 세상을 덮고 있었다.“승하 씨!”서유는 잠시 기다리다 이상함을 느끼고 별장 맞은편에 있는 집의 문을 열어보았다. 예상대로 이승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 헤맸다.이승하는 대답하고 싶었다. ‘나 여기 있어.’ 그러나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그는 예전처럼 힘찬 목소리로 외칠 수 없었다.그는 겨우 뜨고 있는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한 걸음씩 깊은 산 속으로 걸어갔다.그곳은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고 하얀 눈이 밤하늘을 밝혔어도 사람의 움직임을 알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가 누울 만한 최적의 장소였다.이승하는 생각했다. 얼음과 눈이 몸을 얼려버리면 야수가 지나가더라도 그의 썩은 살을 물어뜯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설산 아래에 묻히면 그의 외모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