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눈앞에 완전히 죽어버린 소준섭을 보며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물었다.‘소준섭이 정말 죽어 마땅할까?’그의 잘못은 대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인가? 먼저 소준섭을 좋아한 건 그녀였지 않은가? ‘네가 소준섭에게 집착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 사람 곁에 다가갔잖아.’그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고 미워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야 하는 걸까?소준섭이 그들을 미워했던 것은 사실 그녀의 이모 때문이었다. 이모는 소준섭의 어머니를 자살로 내몬 주범이었고 그런 살인자와 함께 그녀는 소준섭의 가정을 빼앗고 그에게 돌아가야 할 사랑을 차지했다. 소준섭이 그녀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모든 원한의 시작은 그들 윗세대의 부끄러운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행동이 그들의 후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소준섭의 원한이 윗세대의 잘못에서 시작되어 그녀에게로 옮겨간 것처럼, 그녀의 원한도 소준섭이 그녀를 집단 강간하도록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인과의 순환이었다.그래서 원한이 시작되었으면 반드시 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끝은 그녀가 복수를 위해 소준섭이 자신을 사랑하게끔 설계한 것이었다. 원래 소준섭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그를 지옥으로 끌어들였다. 만약 그녀가 그런 방법으로 그를 사랑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소준섭은 그녀에게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관계는 결국 남남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과가 존재하는 이상 그녀는 그를 지옥으로 끌어내렸고 지옥에 빠진 이들에겐 결코 좋은 결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결국 이런 비참한 결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저 주서희는 자신의 증오가 마침내 해소된 것 같아 속이 후련했다. 이제야 큰소리로 웃어댈 수 있었다. “보복은 늦지 않았어. 소준섭, 넌 마땅히 죽어야 해.” 그런데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멍하니 소준섭의
그러나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작은 악마는 여전히 망설임 없이 그녀를 구하러 달려가곤 했다. 어릴 적 그녀가 물에 빠져 거의 익사할 뻔했을 때도 그가 뛰어들어 그녀를 구해냈다.그녀가 처음으로 설렘을 느낀 순간도 바로 그때였다. 물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소준섭의 모습이 그녀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 후로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생명의 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나서서 그녀를 지켜준 사람이기도 했다.그 당시 그녀는 그에게 물어보곤 했다. “오빠, 아직도 날 신경 쓰고 있는 거죠?” 교복을 입고 난간에 기대어 있던 소준섭은 냉소적인 눈길로 그녀를 힐끗 보며 거만하게 대답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너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이전에는 주서희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소준섭은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조금씩 좋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주서희의 눈이 갑자기 붉어졌다. 이제는 그가 죽었으니 아무도 그 답을 알려줄 수 없었다.그녀는 손을 들어 소준섭의 바짓단을 따라가며 바닥에 말라버린 핏자국을 더듬었다. 그 핏자국은 그가 남긴 유언이었다. 네 줄의 글자였다.[주서희, 내가 죽었으니 이제 네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알고 보니 그는 죽을 때까지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죽으면 더 이상 볼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그는 이런 마음으로 자신을 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에게 구조를 요청하지도 않은 채.그래, 소준섭은 여러 번 그녀를 찾아왔지만 그 이유는 그녀가 윤주원과 결혼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폭력적인 방법을 택했고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은 분명히 극단적이었다.그는 그녀를 괴롭히면서도 구해주고 주서희가 이유를 물으며 그
소준섭이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친구를 대할 때는 정이 깊고 의리가 있었다. 그의 형이 소준섭에게 자신을 감시하라고 부탁했음에도 소준섭은 한 번도 형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억을 되찾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소준섭은 술 몇 병을 들고 그의 묘 앞에 앉아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적도 많았다.이후 다시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 소준섭은 너무나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두 다리를 잃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았다. 소준섭은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그의 다리를 치료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때의 김시후는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감에 서서히 일어설 의지를 잃어가고 있었기에 소준섭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김시후는 생각했다. 만약 그때 소준섭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인해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소준섭과 주서희 사이에도 얽히고설킨 일이 너무 많았다. 소준섭 자신도 지독한 고통 속에 살고 있었기에 자신의 다리와 우울증을 위해 소준섭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그런데도 자신조차 돌볼 여유가 없었던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다리와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 주었다는 사실에 송사월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소준섭의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준섭아, 네 유언 꼭 들어줄게. 부디 편히 쉬어라...”주서희의 손가락은 김시후를 위한 유언을 넘어 마지막 줄로 향했다.[다음 생엔...]단 네 글자만 쓰여 있었다. 그 후에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피의 자국을 보면 유언을 쓰다 도중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지점에서 이 세상에 자신을 찾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 느끼고 더 이상 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소준섭에게 있어 계모와 결혼한 아버지는 이미 마음이 온통 계모에게 쏠려 있었고, 계모와의 갈등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빠져
송사월조차 모르는 사실이라면 아마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소준섭은 그저 그렇게 악랄하게 굴고 싶었을 것이다. 주서희를 철저히 괴롭히기 위해 사람들을 보낸 것일 테니 말이다.어쨌든 그때 그는 주서희를 몹시도 증오했다. 비록 그녀를 조금이라도 좋아했을지라도 그동안 쌓인 증오가 훨씬 컸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이제는 더 이상 답을 찾을 수 없게 된 주서희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햇빛 속에 있는 소준섭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손끝이 차갑고 굳어진 그의 뺨에 닿았을 때 주서희는 그를 한번 안아보고 싶었지만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주서희는 다시 송사월에게 물었다. “누가 준섭 씨를 죽였는지 묻지 않나요?”송사월은 주서희의 가녀린 등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섭이가 널 지키고자 했다면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자살로 위장된 흔적이 아무리 정교해도 송사월은 소준섭을 너무 잘 알기에 속지 않았다. 분명 소준섭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주서희가 총을 쏘게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서희에게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 자살로 위장한 것이다.송사월은 오래도록 생각했다. 만약 그가 소준섭의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사랑은 집착에 가깝지만 그 사랑은 진심이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줄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이 결말은 떠난 자에게는 해방일 수 있으나 남겨진 자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를 직접 쏴 죽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 오랜 세월의 사랑과 증오 속에서 도대체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 누가 알겠는가?송사월은 주서희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지키고자 했던 친구의 유언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주서희 스스로는 자신을 탓하게 될 것이다.
소수빈이 그렇게 아래층으로 끌려오곤 멍하니 있던 주서희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서희야...”아연실색한 주서희를 보며 소수빈은 그녀가 무서워한다고 생각하곤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걱정하지 마. 소준섭이 죽었으니 앞으로 너한테 집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주서희는 눈 밑에 달아오른 붉은 빛을 감추고는 입꼬리를 올려 개운하나 조금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요, 소준섭이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사람이 없어요. 정말 다행이에요.”소수빈은 그녀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정말로 기뻐하는 줄 알았다. 서둘러 몸을 돌려 저 멀리를 가리켰다.“서유 씨와 가혜 씨가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소수빈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보니 서유와 정가혜가 배 아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녀가 나온 것을 눈치챘는지 서유와 정가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빠르게 걸어오더니 거의 뛰다시피 달려와 그녀를 껴안았다.따뜻함을 느낀 주서희도 두 사람을 안아주었지만 왜인지 그들이 주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서희의 마음은 여전히 덩굴에 감긴 듯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 답답하고 숨 막히는 느낌에 주서희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유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었을 뿐, 소준섭의 시신이 운구차에 실려 내려가는 것조차 돌아보지 못했다...서유는 하얀 손을 들어 주서희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주서희가 병실을 뛰쳐나갔을 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소준섭에 대한 죄책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이 감정은 아마도 사랑했던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것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오랫동안 얽혀있던 관계가 갑자기 끝났다는 부적응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주서희가 아직도 소준섭을 사랑하는지 그 답은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서유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는 주서희를 달래고 나서 그녀를 놓아주고 배에 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현지 경찰들은 현장을 봉쇄한 뒤 총기 사건의 경위를 조사했다. 그러고는 이내 소준섭이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 경찰에 연락을 취하였고 사건은 그렇게 종결이 되었다. 얼마 후, 시신은 화장터로 옮겨졌고 그의 시신은 바로 화장을 마쳤다. 불 속에서 타고 있던 소준섭의 시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주서희는 이 모든 게 진실이기를 바랐다.의사인 그녀는 사람이 사망한 후 3일 동안은 인체의 근육이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근육 조직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신경 반사 현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에 소준섭이 벌떡 일어나 앉은 건 다만 근육이 아파서 보인 반응일 뿐이다. 소준섭은 이미 죽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그가 죽기 전, 그는 그녀가 이 일에 연루되지 않도록 그녀를 보호하였지만 자신은 오히려 성폭행범으로 몰리게 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좋은 명성을 얻지 못하였고 소정의에 의해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소씨 가문에 더 이상 소준섭이라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다만 체면을 위해 그들은 소준섭의 유골을 받으러 해외까지 달려왔다 . 소정의를 따라오는 사람들 중에는 송문아 그리고 늦은 나이에 얻은 일곱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였지만 눈빛은 야무져 보였다. 한편, 주서희가 소준섭의 유골함을 소찬우에게 건네주었을 때 그는 상자를 건네받아 바로 뒤에 있는 하인에게 던져주고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유골이 담겨져 있는 상자라고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동생으로서 꼭 들고 있어야 할 유골함이지만 소찬우는 매몰차게 들고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찌 됐든 그녀 때문에 그가 죽은 것이니까. 일곱 살짜리 아이가 소준섭한테 무슨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겠는가? 게다가 소준섭도 이 아이한테 쌀쌀맞게 대했었다. 근데 무슨 이유였을까? 유골함을 만지던 송문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그려졌다. 소준섭의 어머니를
이승하가 귀국했다. 그의 베일에 싸인 애인으로서, 서유는 곧바로 8호 맨션으로 보내졌다.계약의 규정에 따라 그를 만나기 전엔 티 없이 깨끗하게 몸을 씻어야 했고 향수나 화장품 냄새를 절대 풍겨선 안 됐다.그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 그녀는 오랫동안 목욕을 하고 실크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2층 침실로 왔다.컴퓨터 앞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이승하는 그녀가 들어오는 기척에 그녀를 흘긋 바라봤다.“이리 와.”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담담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가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서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평소에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종잡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그가 혹시나 화가 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그의 앞에 제대로 서기도 전에 이승하가 그녀를 와락 안아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키스하는 이승하.항상 그런 식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부드러움도 없었다. 그녀를 만나면 그저 함께 자고 싶을 뿐이었다.이번에 외국으로 출장 가게 되면서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자를 만지지 못했으니 오늘 밤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그녀가 잠에 곯아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남자는 끝날 기미가 보였다.다시 잠에서 깨어난 서유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간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귀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매번 검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린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런데 이번엔 왜 떠나지 않은 걸까?서유는 가까스로 피곤한 몸을 이끌어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착한 고양이 마냥 남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몇 분 뒤, 욕실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남자가 샤워 타워를 두른 채 걸어 나왔다. 머리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넓은 어깨로부터 쇄골 언저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가슴골을 따라 부드럽고도 단단해 보이는 그의 복근 위로 미끄러졌다. 치명적일 만큼 유혹적이다. 그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
방을 떠나는 이승하 뒤로 그의 개인 비서 소수빈이 쟁반 위에 올린 약을 들고 나타났다. “서유 씨, 부탁드립니다.”공손한 태도로 약을 건네주며 그가 입을 열었다.피임약이었다.서유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길 허락하지 않는 이승하였다. 그래서 매번 일이 끝나면 소수빈을 시켜 약을 건네주었고 그가 보는 앞에서 먹게 했었다.하얀 알약을 바라보며 서유의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심장이 허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이승하의 무정함에 마음이 아파서인지 숨쉬기가 가빠졌다.“서유 씨…”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가 혹여나 약을 먹으려 하지 않을까 봐 소수빈이 다그치듯 그녀를 불렀다.그런 그를 흘긋 보던 서유는 조용히 약을 받아 입에 넣었다. 물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그제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살짝 풀며 소수빈은 가방에서 집문서와 수표들을 꺼내 테이블에 배열했다.“서유 씨, 대표님께서 드리는 보상입니다. 부동산과 고급 자동차 외, 현금 백억 원을 준비하셨습니다.”실로 놀라운 액수다.하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원하는 것이 돈이었던 적은 없었다.서유는 고개를 들어 소수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이런 거 필요 없어요.”약간 놀란 듯, 아니,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소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성에 차시지 않은 겁니까?”그 말에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소수빈마저 내가 돈을 위해서 승하 옆에 있는 거로 생각하니 이승하는 오죽할까. 이렇게 많은 이별 비용을 내는 건 앞으로 더는 돈 때문에 들러붙지 말라는 뜻이겠지?’“이건 승하 씨가 줬던 건데 다시 전해주실래요? 그리고 카드에 있는 돈은 건드린 적이 없다고 알려주세요. 지금 주신 돈과 부동산 모두, 전 받지 않을 거예요.”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안에 있던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며 서유가 말했다.‘5년 동안 대표님께서 주신 돈은 한 푼도 건드리지 않은 건가?’믿을 수 없다는 듯, 소수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그가 믿든 말든 서유는 블랙 카드를 집문서와 수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