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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1화

사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그 수술을 하는 게 싫었지만 이준혁이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그 수술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어떤 상황이 닥치든 난 너희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시간은 윤혜인의 불안함도 모르고 야속하게 흘러가 결국 이준혁이 수술을 받는 날이 되었다. 윤혜인은 곽아름과 초롱, 그리고 파랑을 데리고 밖에서 이준혁의 수술이 끝나길 바랐다. 들어가기 전 곽아름은 잘생긴 이준혁이 환자가 입는 환자복을 입자 놀라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윤혜인이 한참 달래서야 곽아름은 울음을 그쳤지만 이준혁과 대화를 나눠보겠다고 했다. 이준혁이 곽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아름아, 왜?”“아빠, 왜 수술하는 거예요?”“다음에 아름이 안고 뛰고 싶어서.”곽아름은 예전처럼 이준혁이 안고 뛰는 걸 바라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이 꼭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기에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나지막이 말했다.“그래요. 아빠. 우리 반에도 아빠가 안아주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하지만 한 가족이 늘 함께니까 기분이 좋대요.”곽경천은 곽아름의 이마에 뽀뽀하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아름아, 걱정하지 마. 아빠와 엄마는 영원히 네 곁을 지킬 거야.”이내 수술이 시작되었다. 윤혜인이 마음을 졸였지만 다행히 모든 게 정상이었다. 이준혁은 수술실에서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돌아왔다. 그 뒤로 며칠이 흐르고 김성훈이 와서 예후를 검사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준혁아. 우리 성공한 것 같아. 너 정말 대단하다. 이걸로 수백수천의 사람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윤혜인은 성공은 뭐고 새로운 삶은 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성훈은 윤혜인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마른기침하더니 말했다.“둘이 천천히 얘기 나눠요.”그러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도망갔다. 윤혜인이 이준혁을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이미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매일 30분 이상 서 있을 수 있었고 몇십 미터 걷는 것도 전혀 문제없었다. 상황이 하루가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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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2화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늘 제일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거기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혜인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이준혁은 회복이 빨랐다. 수술이 정말 성공적으로 잘된 것 같았다. 비록 격렬한 운동은 할 수 없지만 걷는 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하루에 7, 8시간 이상 서 있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윤혜인은 예쁜 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는 윤혜인이 직접 그린 설계도였다. 대학 시절에 설계했지만 입을 기회가 없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18살에 설계한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윤혜인은 대기실에서 결혼식이 시작하기를 기다렸다.그때 대기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윤혜인은 가벼운 걸음 소리를 듣고 비서 도지훈인 줄 알고 이렇게 물었다.“이제 나갈 시간이야?”하지만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윤혜인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남자는 준수하면서도 점잖았는데 꾸밈새를 보아하니 신랑처럼 보였다.“한구운 씨?”윤혜인이 한구운의 이름을 부르며 경계했다.“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이천수가 잡히면서 한구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일을 다 인정했지만 나쁜 짓을 하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을 리는 없었다. 이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했던 짓거리가 경찰에게 들키면서 경찰에게 수배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윤혜인은 한구운이 외국으로 도망쳤을 줄 알았는데 결혼식에서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너의 결혼식인데 신랑이 되지는 못해도 꼭 와봐야지.”한구운이 덤덤하게 말했다.“한구운 씨, 우리는 서로의 결혼식에 참가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한구운이 웃으며 말했다.“혜인아, 너무 매몰찬 거 아니야? 나 뭐 하러 온 거 아니야.”한구운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았다. 한구운이 어떤 사람인지 윤혜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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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3화

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굳이 관심하지 않아도 한구운 씨와 관련된 일은 이미 뉴스 사회면에 나오고 있어요.”사실 한구운을 따르던 사람들이 떠나간 건 필연이었다. 이익으로 이어진 관계니 그렇게 끈끈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한구운에게 진심인 이천수는 지금 감옥에 있었다. 다만 갑자기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깨달은 이천수가 한구운을 지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천수가 그런 결정을 한 건 한구운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았다. 두 사람 다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기에 일단 혼자 다 뒤집어쓰고 들어가면 한구운이 밖에서 그를 꺼내줄 기회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천수도 한구운처럼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에야 혼자 감내하길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천수가 한구운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랑에 가치와 조건이 붙을 뿐이었다.윤혜인이 유일하게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서민주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구운을 사랑하고 믿었지만 한구운은 이익을 위해 손수 서민주를 파트너의 침대로 보냈다. 20살이 갓 된 서민주는 한구운이 준 ‘음료수’에 취해 50살이 넘는 아저씨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당했다. 서민주가 깨어났을 때 한구운은 알리바이가 있어 성공적으로 혐의를 벗을 수 있었고 서민주에게 손을 댄 파트너를 감옥에 처넣고 그 파트너가 하던 프로젝트를 앗아갔다. 그리고 서민주에게 자기를 만나려면 불의의 사고를 견뎌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서민주는 한구운을 정말 사랑했기에 꾹 참고 문제 삼지 않았지만 한구운이 그런 말을 내뱉자 하루 만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첫날밤을 다른 사람에게 허망 뺏기고 말았는데 약혼자가 된다는 사람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신을 완전히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오락가락하고 버벅거리기까지 했다. 서민주의 부모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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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4화

윤혜인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경비 부를 거예요.”말하는 동안에 윤혜인은 이미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핸드폰을 찾으며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거울로 윤혜인이 뭘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혜인아, 너 어떻게 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너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한구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가라니까요?”윤혜인은 한구운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고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한구운이 다 봤다면 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한구운이 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아악, 살려주세요.”윤혜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핸드폰을 뺏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며 한구운과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한구운이 느긋하게 윤혜인을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도 이미 당했다는 의미였다. 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한구운을 자극하는 건 그릇된 처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남자와 겨룰 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한구운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인 물컵에 아무렇게나 던져넣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결혼 취소하고 나랑 가면 안 돼?”윤혜인은 내심 당황하며 한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미쳤어요? 나를 협박해서 억지로 끌고 나간다면 이곳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한구운이 이를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혜인아,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사랑의 도피를 하는 거지 억지는 아니잖아.”이 말에 윤혜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다 준비한 것 같았다. 윤혜인이 사라지면 기자들이 단체로 사랑의 도피라도 했다고 보도할 게 뻔했다. 이런 뉴스가 뜬다면 이선 그룹의 주가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구운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선 그룹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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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5화

게다가 한구운에겐 법률의 허점을 잘 파고드는 변호사도 있었으니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윤혜인은 그런 한구운을 상대하기 싫어 그저 코웃음 쳤다.“기다려보죠. 내 꿈은 죽기 전에 한구운 씨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예요.”한구운은 너무 아쉬웠다. 성인이 된 후로 한구운의 인생은 늘 순조롭기만 했고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되도록 손을 썼다. 이선 그룹 쟁탈전에서 실패했지만 타격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돈이 많으니 얼마든지 외국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윤혜인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한구운을 너무 힘들게 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이준혁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구운의 얼굴에 주먹을 여러 방 날렸다. 이에 한구운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준혁이 계속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한구운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차갑게 협박했다.“이준혁 씨, 설마 결혼식 날에 경찰서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죠?”이준혁이 주먹을 내리더니 몸을 꼿꼿이 펴며 말했다.“알아서 꺼질래? 아니면 끌려서 나갈래? 경찰차 곧 도착할 거야.”사실 아까 윤혜인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준혁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결혼식 질서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한구운이 알아서 나가길 바랐다.한구운이 구겨진 슈트를 털어서 펴더니 웃었다.“다들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볼게요.”떠나기 전 한구운이 윤혜인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혜인아, 나는 인생에 아쉬움 같은 걸 남기지는 않아.”이 말에 이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다시 한구운을 쥐어패려 했지만 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말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속지 마요. 오늘은 우리 결혼식이잖아요.”한구운은 일을 크게 만들어 오늘 이 결혼을 망치려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일이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거기 누구 없어요?”윤혜인이 낮게 호통쳤다.“허가도 없이 들어온 이 사람 당장 쫓아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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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6화

불빛 아래 선 이준혁과 윤혜인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쌍이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물었다.“이준혁 씨, 윤혜인 씨의 남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면서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부유하든 빈곤하든, 건강하든 아프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습니까?”이준혁이 깊숙한 눈동자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그렇습니다.”사회자가 똑같은 말을 윤혜인에게 들려주자 사람들의 시선이 윤혜인에게 쏠렸다. 윤혜인이 버진로드 아래를 바라봤다. 그러자 불빛이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곽진명과 곽경천이 두 아이를 안고 문현미는 곽아름을 안고 있었다. 이신우는 윤아름을 데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이하진 홍 아줌마, 구지윤, 김성훈이 앉아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이 다 보였다.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축하 인사를 받은 상태였다. 지금보다 더 원만할 때는 없을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그렇습니다.”아래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결혼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두 사람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준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구운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이 걸어온 전화였다. 한구운이 여기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원에서 도망쳐 나온 서민주가 몬 차량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응급 처치만 제때 했어도 살 수 있는데 서민주가 한구운을 안은 채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말았고 그렇게 한구운이 죽고 만 것이다. 천벌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이준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알았어.”위협이 제거되었으니 이준혁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이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이준혁은 다시 한번 그 웃음에 반하고 말았다. 윤혜인이 영원히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결혼식은 길었지만 재밌었다. 저녁이 되자 문현미는 할머니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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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7화

[번외편]변방 작은 시골의 산기슭.소원은 정원에 앉아 이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꺼운 패딩을 입고 따듯한 햇볕을 쬐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끼익 열리더니 정원에 있던 까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소원을 향해 걸어오는 서현재의 손에는 까만 물고기 두 마리와 대추 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현재가 멘 약상자를 건네받으며 말했다.“장씨 아저씨가 준 거야?”“네, 한사코 거절했는데 야생에서 자란 거라 몸에 좋다며 가져다 누나 국 끓여주라고 하던데요?”서현재가 물고기와 대추를 내려놓더니 소시지를 손으로 잘라 개밥그릇에 놓아줬다.“검둥아, 오늘 회식하자.”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그릇에 든 소시지를 먹어 치웠다. 서현재가 강아지에게 소시지를 잘라주며 말했다.“오늘 집 잘 지키고 있었어? 내가 집에 없으면 네가 누나 잘 지켜야 한다고 했잖아.”소원이 강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현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고작 몇 개월이나 된다고 맨날 그렇게 앞에서 중얼거려...”서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그랬는데 온몸에 잔털 하나 없이 까만 강아지는 영험해서 몇 번만 얘기해도 알아듣는대요.”소원은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서현재가 이런 걸 믿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원이 모르는 게 있었다. 서현재도 소원이 아프면서부터 이런 것들을 믿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신에게 빌며 하느님의 연민을 바랐다. 지금도 소원은 충분히 비참했기에 서현재는 하늘이 소원에게 조금만 더 인자하길 빌었다. 많이도 말고 조금만 말이다. 그냥 소원과 유진이 건강하면 그걸로 족했다.“장씨 아저씨네 할머니는 어때?”소원이 물었다.“날씨가 쌀쌀해서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약 좀 지어드렸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다행이네.”소원이 대답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시골에 온 지는 이미 반년이 되어갔다. 도망쳐 나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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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8화

그날 소원은 오랜만에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들은 소원을 ‘아가’라고 부르자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날 밤, 노인들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착각해 일부러 방 한 칸을 따로 내줬다. 소원은 침대에 누웠고 서현재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소원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현재야, 우리 그냥 여기서 살자.”두 사람 다 이곳이 은연중에 끌렸다. 원래 집 하나를 사려고 했는데 노인들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 동네에 한 백 세 노인 부부가 자연사 한 집이 있는데 좋은 의미가 담긴 집이라면서 두 사람이 살 수 있게 내어줬다.소원은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방 3개에 우물이 있는 집이었고 정원에는 계화 나무까지 심겨 있었는데 여름이라 너무 향긋했다. 그들은 그렇게 그 집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어르신들이 아플 때마다 서현재가 진단과 약 처방을 도맡았다.동떨어진 동네라 가장 가까운 이웃 동네로 가려면 백 리는 넘게 가야 했다. 서현재는 장터에서 오토바이 하나와 자그마한 트럭을 샀다. 그렇게 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름에는 소원을 오토바이에 태울 수 있지만 겨울에 날씨가 추울 때면 작은 트럭에 태우고 다녀야 했다.처음에는 행적을 숨기려고 3개월 동안 마을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야채와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물고기 등은 마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3개월을 넘기자 서현재는 매주 장터로 나가 마을 주민이 필요한 필수품을 공수해 오며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러다 육경한이 성적 학대를 가한 일로 사법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로 육경한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유민 그룹 주주들이 단체로 육경한이 사임을 요구했다. 대외로는 육경한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그가 무너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2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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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9화

서현재도 그때 비밀리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사둔 상태였다. 이제 조용히 이 마을에서 유진에게 적합한 이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제일 안타까운 게 바로 윤혜인의 결혼식에 직접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윤혜인이 이에 대비해 라이브 방송 링크를 보내왔다. 그것도 마을에서 2달 넘게 지내고 나서야 감히 윤혜인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이준혁은 육경한의 친구였지만 소원은 윤혜인의 안목을 믿었기에 이준혁도 자연스럽게 믿었다. 하지만 육경한이 워낙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준혁이 혹시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를 흘릴까 봐 윤혜인에게 일단 이준혁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구설에 휘말린 육경한은 결혼식 현장에 직접 도착하지는 못했다.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신랑과 신부도 완벽했다. 윤혜인은 소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소원은 이준혁의 진심에 감동했고 친구가 드디어 행복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최대한 적게 연락하기로 했고 매년 안전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 알리기로 했다.물고기가 어항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에 소원이 정신을 차렸다. 소원은 서현재가 대추를 씻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생선 손질할게.”“가만히 놔둬요.”서현재가 말했다.“내가 할게요.”시골에서 기른 대추는 농약을 치지 않았기에 씻기도 편했다. 서현재는 대추를 따듯한 물로 몇 번 헹구고는 이렇게 말했다.“많이 먹지 마요. 결국에는 차가운 음식이니까.”그러더니 물고기를 들고 우물가로 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마침 서현재의 얼굴에 비쳤다.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에 옅은 흉터가 남았지만 잘생긴 건 여전했다. 서현재는 성격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얼굴에 난 흉터까지 부드러워 보였다.소원이 대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면서도 과즙이 많았다. 그러다 다시 사색에 잠겼다. 모든 건 인과응보 같았다. 소원은 사실 서현재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때에 서현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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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0화

갑자기 들이닥친 행복은 마치 오늘 내린 첫눈과도 같았다. 반년 동안 소원의 말을 명심하고 그렇게 빨리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해 종래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만약 소원이 영원히 그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렇게 옆에서 소원과 유진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신분이든 좋았다. 지인이든 아저씨든 동생이든 막론하고 두 사람 옆에만 있다면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원하는 게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욕구를 꾹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누나,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찰싹.서현재가 자기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소원은 그런 서현재가 마음 아파 얼른 손을 내밀어 서현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왜 그렇게 세게 때려...”서현재가 소원의 손을 덥석 잡더니 깍지를 꼭 꼈다.“누나, 한 번만 다시 말해주면 안 돼요? 너무 꿈만 같아서 실감이 안 나요.”소원은 서현재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소원도 오랫동안 고민했다. 서현재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유진에게는 늘 차분한 아빠가 필요했고 소원은 그녀를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현재라면 이 고달픈 삶을 살아 나갈 용기가 조금이라도 샘솟는 것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리고 하루라도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서현재는 이미 소원을 향해 99 걸음 다가온 상태였다. 이제 소원이 용감하게 한 걸음 다가설 때가 온 것이다.“서현재. 난 남은 생을 너랑 함께하고 싶은데 넌 어때...”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소 차가운 서현재의 입술이 소원의 이마에 닿았다. 그 어떤 욕구도 담기지 않은 뽀뽀였지만 서현재가 얼마나 설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말 한마디라면 서현재는 소원을 위해 백번 천번 죽어도 좋았다.“소원 누나, 누나, 사랑해요.”서현재가 소원의 얼굴을 받쳐 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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