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경비 부를 거예요.”말하는 동안에 윤혜인은 이미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핸드폰을 찾으며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거울로 윤혜인이 뭘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혜인아, 너 어떻게 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너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한구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가라니까요?”윤혜인은 한구운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고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한구운이 다 봤다면 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한구운이 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아악, 살려주세요.”윤혜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핸드폰을 뺏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며 한구운과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한구운이 느긋하게 윤혜인을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도 이미 당했다는 의미였다. 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한구운을 자극하는 건 그릇된 처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남자와 겨룰 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한구운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인 물컵에 아무렇게나 던져넣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결혼 취소하고 나랑 가면 안 돼?”윤혜인은 내심 당황하며 한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미쳤어요? 나를 협박해서 억지로 끌고 나간다면 이곳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한구운이 이를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혜인아,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사랑의 도피를 하는 거지 억지는 아니잖아.”이 말에 윤혜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다 준비한 것 같았다. 윤혜인이 사라지면 기자들이 단체로 사랑의 도피라도 했다고 보도할 게 뻔했다. 이런 뉴스가 뜬다면 이선 그룹의 주가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구운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선 그룹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구운에겐 법률의 허점을 잘 파고드는 변호사도 있었으니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윤혜인은 그런 한구운을 상대하기 싫어 그저 코웃음 쳤다.“기다려보죠. 내 꿈은 죽기 전에 한구운 씨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예요.”한구운은 너무 아쉬웠다. 성인이 된 후로 한구운의 인생은 늘 순조롭기만 했고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되도록 손을 썼다. 이선 그룹 쟁탈전에서 실패했지만 타격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돈이 많으니 얼마든지 외국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윤혜인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한구운을 너무 힘들게 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이준혁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구운의 얼굴에 주먹을 여러 방 날렸다. 이에 한구운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준혁이 계속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한구운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차갑게 협박했다.“이준혁 씨, 설마 결혼식 날에 경찰서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죠?”이준혁이 주먹을 내리더니 몸을 꼿꼿이 펴며 말했다.“알아서 꺼질래? 아니면 끌려서 나갈래? 경찰차 곧 도착할 거야.”사실 아까 윤혜인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준혁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결혼식 질서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한구운이 알아서 나가길 바랐다.한구운이 구겨진 슈트를 털어서 펴더니 웃었다.“다들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볼게요.”떠나기 전 한구운이 윤혜인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혜인아, 나는 인생에 아쉬움 같은 걸 남기지는 않아.”이 말에 이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다시 한구운을 쥐어패려 했지만 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말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속지 마요. 오늘은 우리 결혼식이잖아요.”한구운은 일을 크게 만들어 오늘 이 결혼을 망치려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일이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거기 누구 없어요?”윤혜인이 낮게 호통쳤다.“허가도 없이 들어온 이 사람 당장 쫓아내요.”
불빛 아래 선 이준혁과 윤혜인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쌍이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물었다.“이준혁 씨, 윤혜인 씨의 남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면서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부유하든 빈곤하든, 건강하든 아프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습니까?”이준혁이 깊숙한 눈동자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그렇습니다.”사회자가 똑같은 말을 윤혜인에게 들려주자 사람들의 시선이 윤혜인에게 쏠렸다. 윤혜인이 버진로드 아래를 바라봤다. 그러자 불빛이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곽진명과 곽경천이 두 아이를 안고 문현미는 곽아름을 안고 있었다. 이신우는 윤아름을 데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이하진 홍 아줌마, 구지윤, 김성훈이 앉아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이 다 보였다.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축하 인사를 받은 상태였다. 지금보다 더 원만할 때는 없을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그렇습니다.”아래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결혼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두 사람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준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구운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이 걸어온 전화였다. 한구운이 여기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원에서 도망쳐 나온 서민주가 몬 차량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응급 처치만 제때 했어도 살 수 있는데 서민주가 한구운을 안은 채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말았고 그렇게 한구운이 죽고 만 것이다. 천벌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이준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알았어.”위협이 제거되었으니 이준혁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이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이준혁은 다시 한번 그 웃음에 반하고 말았다. 윤혜인이 영원히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결혼식은 길었지만 재밌었다. 저녁이 되자 문현미는 할머니의 신분으로
[번외편]변방 작은 시골의 산기슭.소원은 정원에 앉아 이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꺼운 패딩을 입고 따듯한 햇볕을 쬐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끼익 열리더니 정원에 있던 까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소원을 향해 걸어오는 서현재의 손에는 까만 물고기 두 마리와 대추 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현재가 멘 약상자를 건네받으며 말했다.“장씨 아저씨가 준 거야?”“네, 한사코 거절했는데 야생에서 자란 거라 몸에 좋다며 가져다 누나 국 끓여주라고 하던데요?”서현재가 물고기와 대추를 내려놓더니 소시지를 손으로 잘라 개밥그릇에 놓아줬다.“검둥아, 오늘 회식하자.”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그릇에 든 소시지를 먹어 치웠다. 서현재가 강아지에게 소시지를 잘라주며 말했다.“오늘 집 잘 지키고 있었어? 내가 집에 없으면 네가 누나 잘 지켜야 한다고 했잖아.”소원이 강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현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고작 몇 개월이나 된다고 맨날 그렇게 앞에서 중얼거려...”서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그랬는데 온몸에 잔털 하나 없이 까만 강아지는 영험해서 몇 번만 얘기해도 알아듣는대요.”소원은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서현재가 이런 걸 믿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원이 모르는 게 있었다. 서현재도 소원이 아프면서부터 이런 것들을 믿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신에게 빌며 하느님의 연민을 바랐다. 지금도 소원은 충분히 비참했기에 서현재는 하늘이 소원에게 조금만 더 인자하길 빌었다. 많이도 말고 조금만 말이다. 그냥 소원과 유진이 건강하면 그걸로 족했다.“장씨 아저씨네 할머니는 어때?”소원이 물었다.“날씨가 쌀쌀해서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약 좀 지어드렸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다행이네.”소원이 대답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시골에 온 지는 이미 반년이 되어갔다. 도망쳐 나온 날
그날 소원은 오랜만에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들은 소원을 ‘아가’라고 부르자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날 밤, 노인들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착각해 일부러 방 한 칸을 따로 내줬다. 소원은 침대에 누웠고 서현재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소원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현재야, 우리 그냥 여기서 살자.”두 사람 다 이곳이 은연중에 끌렸다. 원래 집 하나를 사려고 했는데 노인들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 동네에 한 백 세 노인 부부가 자연사 한 집이 있는데 좋은 의미가 담긴 집이라면서 두 사람이 살 수 있게 내어줬다.소원은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방 3개에 우물이 있는 집이었고 정원에는 계화 나무까지 심겨 있었는데 여름이라 너무 향긋했다. 그들은 그렇게 그 집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어르신들이 아플 때마다 서현재가 진단과 약 처방을 도맡았다.동떨어진 동네라 가장 가까운 이웃 동네로 가려면 백 리는 넘게 가야 했다. 서현재는 장터에서 오토바이 하나와 자그마한 트럭을 샀다. 그렇게 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름에는 소원을 오토바이에 태울 수 있지만 겨울에 날씨가 추울 때면 작은 트럭에 태우고 다녀야 했다.처음에는 행적을 숨기려고 3개월 동안 마을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야채와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물고기 등은 마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3개월을 넘기자 서현재는 매주 장터로 나가 마을 주민이 필요한 필수품을 공수해 오며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러다 육경한이 성적 학대를 가한 일로 사법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로 육경한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유민 그룹 주주들이 단체로 육경한이 사임을 요구했다. 대외로는 육경한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그가 무너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2달간
서현재도 그때 비밀리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사둔 상태였다. 이제 조용히 이 마을에서 유진에게 적합한 이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제일 안타까운 게 바로 윤혜인의 결혼식에 직접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윤혜인이 이에 대비해 라이브 방송 링크를 보내왔다. 그것도 마을에서 2달 넘게 지내고 나서야 감히 윤혜인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이준혁은 육경한의 친구였지만 소원은 윤혜인의 안목을 믿었기에 이준혁도 자연스럽게 믿었다. 하지만 육경한이 워낙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준혁이 혹시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를 흘릴까 봐 윤혜인에게 일단 이준혁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구설에 휘말린 육경한은 결혼식 현장에 직접 도착하지는 못했다.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신랑과 신부도 완벽했다. 윤혜인은 소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소원은 이준혁의 진심에 감동했고 친구가 드디어 행복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최대한 적게 연락하기로 했고 매년 안전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 알리기로 했다.물고기가 어항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에 소원이 정신을 차렸다. 소원은 서현재가 대추를 씻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생선 손질할게.”“가만히 놔둬요.”서현재가 말했다.“내가 할게요.”시골에서 기른 대추는 농약을 치지 않았기에 씻기도 편했다. 서현재는 대추를 따듯한 물로 몇 번 헹구고는 이렇게 말했다.“많이 먹지 마요. 결국에는 차가운 음식이니까.”그러더니 물고기를 들고 우물가로 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마침 서현재의 얼굴에 비쳤다.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에 옅은 흉터가 남았지만 잘생긴 건 여전했다. 서현재는 성격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얼굴에 난 흉터까지 부드러워 보였다.소원이 대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면서도 과즙이 많았다. 그러다 다시 사색에 잠겼다. 모든 건 인과응보 같았다. 소원은 사실 서현재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때에 서현재의 눈
갑자기 들이닥친 행복은 마치 오늘 내린 첫눈과도 같았다. 반년 동안 소원의 말을 명심하고 그렇게 빨리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해 종래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만약 소원이 영원히 그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렇게 옆에서 소원과 유진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신분이든 좋았다. 지인이든 아저씨든 동생이든 막론하고 두 사람 옆에만 있다면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원하는 게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욕구를 꾹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누나,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찰싹.서현재가 자기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소원은 그런 서현재가 마음 아파 얼른 손을 내밀어 서현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왜 그렇게 세게 때려...”서현재가 소원의 손을 덥석 잡더니 깍지를 꼭 꼈다.“누나, 한 번만 다시 말해주면 안 돼요? 너무 꿈만 같아서 실감이 안 나요.”소원은 서현재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소원도 오랫동안 고민했다. 서현재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유진에게는 늘 차분한 아빠가 필요했고 소원은 그녀를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현재라면 이 고달픈 삶을 살아 나갈 용기가 조금이라도 샘솟는 것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리고 하루라도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서현재는 이미 소원을 향해 99 걸음 다가온 상태였다. 이제 소원이 용감하게 한 걸음 다가설 때가 온 것이다.“서현재. 난 남은 생을 너랑 함께하고 싶은데 넌 어때...”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소 차가운 서현재의 입술이 소원의 이마에 닿았다. 그 어떤 욕구도 담기지 않은 뽀뽀였지만 서현재가 얼마나 설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말 한마디라면 서현재는 소원을 위해 백번 천번 죽어도 좋았다.“소원 누나, 누나, 사랑해요.”서현재가 소원의 얼굴을 받쳐 들더니
[세울 클럽]라이터에 이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억이 아늑하고 조용한 시골에서 악몽 가득한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소원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라이터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저기요, 괜찮아요?”부딪힌 남자가 먼저 물었다. 소원은 익숙한 사람을 만날까 봐 너무 무서웠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낯선 얼굴이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소원은 혹시나 노출될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라이터는 제가 배상할게요.”서현재가 그쪽으로 다가가 두 남자와 교섭하자 상대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고작 라이터 하나인데 망가지면 망가지는 거죠. 얼마 안 해요.”상대가 이렇게 말하더니 자리를 떠났다.“누나, 왜 그래요?”서현재가 소원의 어깨를 안고 물었다. 그 라이터는 이미 바닥에서 주워 쓰레기통에 버려진 뒤였다. 라이터에 새겨진 글자를 못 본 것 같았다.소원이 창가를 내다봤다. 아까 그 남자들은 현지 번호판이 달린 차를 몰고 식당을 떠났다. 소원은 억지로 두려움을 꾹꾹 참아내며 서울에서 온 사람은 아닐 거라고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 라이터는 그냥 서울에 갔다 온 적이 있거나 서울을 지나치다가 가져온 거라고 생각했다. 서현재는 소원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자 이렇게 물었다.“어디 아파요? 집에 갈까요?”소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 그냥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랬어. 지금은 괜찮아졌어.”소원은 고작 이런 일로 서현재를 걱정시키기 싫었다. 두 사람은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왔다. 조그마한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어렵게 얻은 아늑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식사를 마치고 서현재는 소원을 다시 옷으로 따듯하게 감싼 채 트럭에 태워 집으로 돌아갔다. 눈이 내렸지만 트럭은 꽤 안정적으로 달렸다. 서현재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했기에 뭘 하든 척하면 척이었다. 겨울을 맞아 타이어도 미끄럼방지 타이어로 바꿨고 조명도 LED라 깊은 산속에서도 길을 훤히 비출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육경한은 감정을 억누르며 이 신비한 인물의 다음 액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황진수가 계속 말했다.“하지만 최근에 그때 당시 한 청소부가 바닥에서 펜을 주웠다는 것을 알아냈어요. 청소부는 그 펜이 예뻐서 손자에게 주기 위해 가져갔대요. 청소부를 찾아가 무슨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은 없는지 물었더니 그제야 말하더라고요.”황진수는 청소부에게서 가져온 펜을 꺼내며 말했다.“바로 이겁니다.”육경한이 사인펜을 손에 들고 살펴봤다. 무게도 어느 정도 무거운 것이 가치가 상당할 것 같았다.평소 육경한이 사용하는 사인펜과 비슷했다.평소 글을 잘 쓰지 않는 소종은 뭔가 쓸 일이 생기면 손에 잡히는 펜을 아무것이나 집어서 글을 썼다. 이런 고급스러운 사인펜을 소지할 리가 없었다.이 펜은 소종의 거친 이미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황진수도 같은 생각이었다.“소종 비서는 이런 펜을 사용한 적이 없어요. 조사해 봤는데 이건 이탈리아 왕실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인펜이에요. 한 자루에 수천 달러가 넘죠. 일반 사람들은 펜의 브랜드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 펜의 주인은 아마도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 펜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아요. 사람 자체가 우아하고 점잖을 거예요. 물론 내면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 척하겠죠.”황진수의 분석은 아주 일리가 있었다. 배후 인물이 누구인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귀족용 펜이라 서울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야. 이탈리아 쪽 주문 리스트를 받아서 서울에 있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없는지 확인해 봐.”육경한이 말했다.이 사람은 배후에 계속 숨어 있었기에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이 펜뿐이었다.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적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밝은 곳에 있는 그들은 매우 수동적인 상황이 되었다.육경한은 속으로 반드시 이 사람을 빨리 잡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떻게든 소원이 출산하기 전에 배후에 있는 조종자를 제거해야 했다.“그리고 진아연
오랫동안 약을 먹은 소원이 아무런 부작용이 없다는 것은 약이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게다가 무녀의 장수 효과도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평생 늙지 않는 그런 신비로움은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난 서현재를 믿지 않아. 내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볼게. 그다음에 결정하자.”서현재를 믿지 않는다는 육경한의 말에 소원도 더 이상 그와 논쟁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이다. 서현재를 믿지 않으니 본인이 믿는 사람을 찾겠다는 것은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굳이 논쟁할 필요도 없었다.“알았어. 하지만 시간을 너무 오래 끌지는 마.”소원이 한마디 했을 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보니 주석훈이었다.오기 전에 주석훈에게 병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주석훈이 걱정되어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통화버튼을 눌러 주석훈에게 곧 갈 것이라고 말한 소원이 전화를 끊었을 때 육경한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이만 가 봐야겠어.”육경한이 말했다.“주석훈, 너무 가까이하지 마.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 같지 않아.”육경한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사실 사람을 시켜 조사도 해봤지만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다. 이력이 훌륭했고 신상 정보도 매우 완벽했다.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소원에게 접근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주석훈이 예전에 이선 그룹에서 일한 것도 확인해 봤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소원이 물었다.“왜 그러는데?”소원은 육경한이 무슨 증거를 찾았거나 의심스러울 만 한 단서라도 있는 줄 알았지만 육경한은 단답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직감이 그래.”소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육경한 씨, 모든 사람을 본인 생각으로만 판단하지 마.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 어디 있어.”소원의 말에 육경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믿을
말투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어젯밤부터 오늘까지 그 일로 육경한은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오직 다른 남자에게 사줬던 이 죽을 맛보고 싶었다.육경한이 소심한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혹시라도 주석훈에게 태클을 걸까 봐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주석훈의 병문안을 간 것은 주석훈이 나를 돕다가 다쳤기 때문이야. 게다가 꽤 심각해. 나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어?”“참 착하기도 하지.”육경한의 약간 비꼬는 듯한 말에 소원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이 남자,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육경한이 맞나?너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닌가?도도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니 말이다.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하지만 소원은 육경한의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착한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착한 것은 아니야. 사람을 가리거든.”너무나 명확한 말에 육경한이 침묵하다가 말했다.“저기 있는 생선 먹고 싶어.”소원은 순간 멈칫했지만 육경한이 환자인 것을 감안해 생선 배 부분의 가시 없는 살을 떼어 죽과 함께 먹여 주었다.생선 배 부분의 살을 소원에게 먼저 먹여 주는 것은 육경한의 옛날 습관이었다.육경한은 생선을 다 먹은 뒤 말했다.“배불러.”소원이 말했다.“좀 더 먹어. 그래야 빨리 회복하지. 그러면 황진수 씨도 배 아픈 척 안 해도 되고.”소원은 황진수가 배 아프다고 했던 것이 연기인 것을 알아차렸다.육경한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빈 생선 뼈를 보며 한마디 했다.“소원아, 나 후회해. 전에 너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지 말걸... 많이 후회하고 있어.”소원은 순간 손이 멈칫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육경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이가 또 생겨서인지 몰라도 왠지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이준혁은 육경한의 행동과 일 처리 방식이 너무 극단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