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내가 굳이 관심하지 않아도 한구운 씨와 관련된 일은 이미 뉴스 사회면에 나오고 있어요.”사실 한구운을 따르던 사람들이 떠나간 건 필연이었다. 이익으로 이어진 관계니 그렇게 끈끈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한구운에게 진심인 이천수는 지금 감옥에 있었다. 다만 갑자기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깨달은 이천수가 한구운을 지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천수가 그런 결정을 한 건 한구운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상황이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맞았다. 두 사람 다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기에 일단 혼자 다 뒤집어쓰고 들어가면 한구운이 밖에서 그를 꺼내줄 기회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천수도 한구운처럼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에야 혼자 감내하길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천수가 한구운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랑에 가치와 조건이 붙을 뿐이었다.윤혜인이 유일하게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서민주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한구운을 사랑하고 믿었지만 한구운은 이익을 위해 손수 서민주를 파트너의 침대로 보냈다. 20살이 갓 된 서민주는 한구운이 준 ‘음료수’에 취해 50살이 넘는 아저씨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당했다. 서민주가 깨어났을 때 한구운은 알리바이가 있어 성공적으로 혐의를 벗을 수 있었고 서민주에게 손을 댄 파트너를 감옥에 처넣고 그 파트너가 하던 프로젝트를 앗아갔다. 그리고 서민주에게 자기를 만나려면 불의의 사고를 견뎌낼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이번 일이 처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서민주는 한구운을 정말 사랑했기에 꾹 참고 문제 삼지 않았지만 한구운이 그런 말을 내뱉자 하루 만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제일 소중하게 여겼던 첫날밤을 다른 사람에게 허망 뺏기고 말았는데 약혼자가 된다는 사람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을 거라고 말하고 있으니 정신을 완전히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오락가락하고 버벅거리기까지 했다. 서민주의 부모님도
윤혜인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요. 안 그러면 경비 부를 거예요.”말하는 동안에 윤혜인은 이미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핸드폰을 찾으며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한구운은 거울로 윤혜인이 뭘 하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혜인아, 너 어떻게 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너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한구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가라니까요?”윤혜인은 한구운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고 문을 가리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한구운이 다 봤다면 더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얼른 핸드폰을 들어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전화가 걸리기도 전에 한구운이 성큼 다가와 핸드폰을 빼앗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아악, 살려주세요.”윤혜인이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핸드폰을 뺏을 생각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며 한구운과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한구운이 느긋하게 윤혜인을 향해 걸어왔다.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아무 기척이 들리지 않는다는 건 문 앞에 서 있던 경비도 이미 당했다는 의미였다. 윤혜인은 지금 이 상황에 한구운을 자극하는 건 그릇된 처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남자와 겨룰 힘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한구운은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인 물컵에 아무렇게나 던져넣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윤혜인을 바라봤다.“혜인아, 결혼 취소하고 나랑 가면 안 돼?”윤혜인은 내심 당황하며 한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미쳤어요? 나를 협박해서 억지로 끌고 나간다면 이곳을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예요.”한구운이 이를 듣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혜인아,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사랑의 도피를 하는 거지 억지는 아니잖아.”이 말에 윤혜인은 등골이 오싹했다. 이미 다 준비한 것 같았다. 윤혜인이 사라지면 기자들이 단체로 사랑의 도피라도 했다고 보도할 게 뻔했다. 이런 뉴스가 뜬다면 이선 그룹의 주가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구운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선 그룹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구운에겐 법률의 허점을 잘 파고드는 변호사도 있었으니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윤혜인은 그런 한구운을 상대하기 싫어 그저 코웃음 쳤다.“기다려보죠. 내 꿈은 죽기 전에 한구운 씨가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예요.”한구운은 너무 아쉬웠다. 성인이 된 후로 한구운의 인생은 늘 순조롭기만 했고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되도록 손을 썼다. 이선 그룹 쟁탈전에서 실패했지만 타격이 그렇게 크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돈이 많으니 얼마든지 외국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윤혜인만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한구운을 너무 힘들게 했다.쾅.굉음과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이준혁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한구운의 얼굴에 주먹을 여러 방 날렸다. 이에 한구운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준혁이 계속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한구운이 손을 내밀어 이준혁의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차갑게 협박했다.“이준혁 씨, 설마 결혼식 날에 경찰서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죠?”이준혁이 주먹을 내리더니 몸을 꼿꼿이 펴며 말했다.“알아서 꺼질래? 아니면 끌려서 나갈래? 경찰차 곧 도착할 거야.”사실 아까 윤혜인의 전화를 받자마자 이준혁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결혼식 질서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한구운이 알아서 나가길 바랐다.한구운이 구겨진 슈트를 털어서 펴더니 웃었다.“다들 나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만 나가볼게요.”떠나기 전 한구운이 윤혜인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혜인아, 나는 인생에 아쉬움 같은 걸 남기지는 않아.”이 말에 이준혁이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다시 한구운을 쥐어패려 했지만 윤혜인이 그런 이준혁을 말리며 나지막이 말했다.“속지 마요. 오늘은 우리 결혼식이잖아요.”한구운은 일을 크게 만들어 오늘 이 결혼을 망치려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일이 그렇게 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거기 누구 없어요?”윤혜인이 낮게 호통쳤다.“허가도 없이 들어온 이 사람 당장 쫓아내요.”
불빛 아래 선 이준혁과 윤혜인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쌍이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물었다.“이준혁 씨, 윤혜인 씨의 남편이 되어 서로 의지하면서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부유하든 빈곤하든, 건강하든 아프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영원히 배신하지 않겠습니까?”이준혁이 깊숙한 눈동자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네, 그렇습니다.”사회자가 똑같은 말을 윤혜인에게 들려주자 사람들의 시선이 윤혜인에게 쏠렸다. 윤혜인이 버진로드 아래를 바라봤다. 그러자 불빛이 윤혜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곽진명과 곽경천이 두 아이를 안고 문현미는 곽아름을 안고 있었다. 이신우는 윤아름을 데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이하진 홍 아줌마, 구지윤, 김성훈이 앉아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이 다 보였다.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축하 인사를 받은 상태였다. 지금보다 더 원만할 때는 없을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네, 그렇습니다.”아래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결혼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그들에게 두 사람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결혼식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준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구운을 감시하라고 보낸 사람이 걸어온 전화였다. 한구운이 여기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양원에서 도망쳐 나온 서민주가 몬 차량에 치여 죽었다고 했다. 응급 처치만 제때 했어도 살 수 있는데 서민주가 한구운을 안은 채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고 말았고 그렇게 한구운이 죽고 만 것이다. 천벌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이준혁이 나지막이 대답했다.“알았어.”위협이 제거되었으니 이준혁도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윤혜인이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이준혁은 다시 한번 그 웃음에 반하고 말았다. 윤혜인이 영원히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결혼식은 길었지만 재밌었다. 저녁이 되자 문현미는 할머니의 신분으로
[번외편]변방 작은 시골의 산기슭.소원은 정원에 앉아 이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두꺼운 패딩을 입고 따듯한 햇볕을 쬐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때 문이 끼익 열리더니 정원에 있던 까만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소원을 향해 걸어오는 서현재의 손에는 까만 물고기 두 마리와 대추 한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현재가 멘 약상자를 건네받으며 말했다.“장씨 아저씨가 준 거야?”“네, 한사코 거절했는데 야생에서 자란 거라 몸에 좋다며 가져다 누나 국 끓여주라고 하던데요?”서현재가 물고기와 대추를 내려놓더니 소시지를 손으로 잘라 개밥그릇에 놓아줬다.“검둥아, 오늘 회식하자.”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그릇에 든 소시지를 먹어 치웠다. 서현재가 강아지에게 소시지를 잘라주며 말했다.“오늘 집 잘 지키고 있었어? 내가 집에 없으면 네가 누나 잘 지켜야 한다고 했잖아.”소원이 강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서현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고작 몇 개월이나 된다고 맨날 그렇게 앞에서 중얼거려...”서현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그랬는데 온몸에 잔털 하나 없이 까만 강아지는 영험해서 몇 번만 얘기해도 알아듣는대요.”소원은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교육을 받은 서현재가 이런 걸 믿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소원이 모르는 게 있었다. 서현재도 소원이 아프면서부터 이런 것들을 믿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신에게 빌며 하느님의 연민을 바랐다. 지금도 소원은 충분히 비참했기에 서현재는 하늘이 소원에게 조금만 더 인자하길 빌었다. 많이도 말고 조금만 말이다. 그냥 소원과 유진이 건강하면 그걸로 족했다.“장씨 아저씨네 할머니는 어때?”소원이 물었다.“날씨가 쌀쌀해서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약 좀 지어드렸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다행이네.”소원이 대답했다. 그들이 인적이 드문 시골에 온 지는 이미 반년이 되어갔다. 도망쳐 나온 날
그날 소원은 오랜만에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노인들은 소원을 ‘아가’라고 부르자 마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그날 밤, 노인들은 두 사람이 부부라고 착각해 일부러 방 한 칸을 따로 내줬다. 소원은 침대에 누웠고 서현재는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소원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현재야, 우리 그냥 여기서 살자.”두 사람 다 이곳이 은연중에 끌렸다. 원래 집 하나를 사려고 했는데 노인들이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 동네에 한 백 세 노인 부부가 자연사 한 집이 있는데 좋은 의미가 담긴 집이라면서 두 사람이 살 수 있게 내어줬다.소원은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다. 방 3개에 우물이 있는 집이었고 정원에는 계화 나무까지 심겨 있었는데 여름이라 너무 향긋했다. 그들은 그렇게 그 집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동네 어르신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어르신들이 아플 때마다 서현재가 진단과 약 처방을 도맡았다.동떨어진 동네라 가장 가까운 이웃 동네로 가려면 백 리는 넘게 가야 했다. 서현재는 장터에서 오토바이 하나와 자그마한 트럭을 샀다. 그렇게 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름에는 소원을 오토바이에 태울 수 있지만 겨울에 날씨가 추울 때면 작은 트럭에 태우고 다녀야 했다.처음에는 행적을 숨기려고 3개월 동안 마을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행히 야채와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물고기 등은 마을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3개월을 넘기자 서현재는 매주 장터로 나가 마을 주민이 필요한 필수품을 공수해 오며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사했다. 그러다 육경한이 성적 학대를 가한 일로 사법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일로 육경한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유민 그룹 주주들이 단체로 육경한이 사임을 요구했다. 대외로는 육경한이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은 그가 무너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2달간
서현재도 그때 비밀리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사둔 상태였다. 이제 조용히 이 마을에서 유진에게 적합한 이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제일 안타까운 게 바로 윤혜인의 결혼식에 직접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윤혜인이 이에 대비해 라이브 방송 링크를 보내왔다. 그것도 마을에서 2달 넘게 지내고 나서야 감히 윤혜인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이준혁은 육경한의 친구였지만 소원은 윤혜인의 안목을 믿었기에 이준혁도 자연스럽게 믿었다. 하지만 육경한이 워낙 예민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준혁이 혹시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를 흘릴까 봐 윤혜인에게 일단 이준혁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구설에 휘말린 육경한은 결혼식 현장에 직접 도착하지는 못했다.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신랑과 신부도 완벽했다. 윤혜인은 소원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소원은 이준혁의 진심에 감동했고 친구가 드디어 행복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 최대한 적게 연락하기로 했고 매년 안전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 알리기로 했다.물고기가 어항에서 첨벙거리는 소리에 소원이 정신을 차렸다. 소원은 서현재가 대추를 씻는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생선 손질할게.”“가만히 놔둬요.”서현재가 말했다.“내가 할게요.”시골에서 기른 대추는 농약을 치지 않았기에 씻기도 편했다. 서현재는 대추를 따듯한 물로 몇 번 헹구고는 이렇게 말했다.“많이 먹지 마요. 결국에는 차가운 음식이니까.”그러더니 물고기를 들고 우물가로 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햇살이 마침 서현재의 얼굴에 비쳤다. 최적의 치료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에 옅은 흉터가 남았지만 잘생긴 건 여전했다. 서현재는 성격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얼굴에 난 흉터까지 부드러워 보였다.소원이 대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면서도 과즙이 많았다. 그러다 다시 사색에 잠겼다. 모든 건 인과응보 같았다. 소원은 사실 서현재의 구원이 아니었다. 그저 적당한 때에 서현재의 눈
갑자기 들이닥친 행복은 마치 오늘 내린 첫눈과도 같았다. 반년 동안 소원의 말을 명심하고 그렇게 빨리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 생각해 종래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만약 소원이 영원히 그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렇게 옆에서 소원과 유진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신분이든 좋았다. 지인이든 아저씨든 동생이든 막론하고 두 사람 옆에만 있다면 신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원하는 게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저 그 욕구를 꾹꾹 눌러 담을 뿐이었다.“누나,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죠?”찰싹.서현재가 자기 뺨을 한 대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쳤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소원은 그런 서현재가 마음 아파 얼른 손을 내밀어 서현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왜 그렇게 세게 때려...”서현재가 소원의 손을 덥석 잡더니 깍지를 꼭 꼈다.“누나, 한 번만 다시 말해주면 안 돼요? 너무 꿈만 같아서 실감이 안 나요.”소원은 서현재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사실 소원도 오랫동안 고민했다. 서현재에게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유진에게는 늘 차분한 아빠가 필요했고 소원은 그녀를 치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서현재라면 이 고달픈 삶을 살아 나갈 용기가 조금이라도 샘솟는 것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리고 하루라도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게다가 서현재는 이미 소원을 향해 99 걸음 다가온 상태였다. 이제 소원이 용감하게 한 걸음 다가설 때가 온 것이다.“서현재. 난 남은 생을 너랑 함께하고 싶은데 넌 어때...”말이 끝나기 바쁘게 다소 차가운 서현재의 입술이 소원의 이마에 닿았다. 그 어떤 욕구도 담기지 않은 뽀뽀였지만 서현재가 얼마나 설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말 한마디라면 서현재는 소원을 위해 백번 천번 죽어도 좋았다.“소원 누나, 누나, 사랑해요.”서현재가 소원의 얼굴을 받쳐 들더니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