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법의 모든 챕터: 챕터 121 - 챕터 130

916 챕터

제121화

백채영이 난처한 나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 하이힐을 신은 선우주영이 또각거리며 다가와 도도한 표정으로 도우미를 내려다보았다.“주인이 목숨 구해주겠다는데 둘러싸서 구경이나 할 때야? 얼른 썩 꺼지지 못해?!”선우주영의 성격이 제일 까다롭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녀가 호통치자 다들 걱정에 발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차마 더는 머물러 있지 못하고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백아영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선우경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가 있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도 걸음을 옮겼다.선우주영이 도우미를 내쫓는 모습을 보자 백채영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선우경진을 향해 말했다.“오빠, 제가 해독 침술을 배운지 얼마 안 되었잖아요. 남이 지켜보는 앞에서 침을 놓는 게 긴장되어서 자리를 좀 피해 주면 안 될까요? 조용한 환경에서 침을 놓고 싶어요.”의사들은 각자의 습관과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침술사는 더더욱 유별났다.이에 선우경진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떠났다.선우주영도 떠나기 전 백채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바보, 치료가 자신 없으면 손이라도 못 쓰게 하면 그만이잖아.”선우주영의 웃는 얼굴은 악마와 다름없었다. 순간 백채영은 온몸이 얼어붙더니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선우주영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니!그러나 제법 그럴싸한 제안에 수긍이 갔다. 치료에 소질이 없더라도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치료를 못 하는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다.백채영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더니 덜컥 겁이 나서 덜덜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자해하냐는 말이다!이내 돌멩이를 높이 치켜들었지만, 차마 자기 손등을 내리칠 수는 없었다.백아영은 선우주영과 선우경진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백채영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혼자 남은 거지?게다가 환자는 의술도 모르는 백채영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지 않겠는가? 만약 백채영이 침을 함부로 놓다가 자칫 목숨까지 앗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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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꽃밭을 여러개 가로지르자 도우미가 쓰러져 있는 정원에 도착했다. 아까의 모습대로 바닥에 누워 있는 도우미를 발견한 백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나마 백채영이 사람 목숨이 걸린 일에 섣불리 행동할 만큼 담이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선우주영은 뒤를 바짝 따랐다. 물론 시선은 백채영의 발 옆에 놓인 돌멩이를 바라봤는데, 겉면에서 핏기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보아하니 백채영은 자해할 만큼 독하진 않은 듯싶었다.‘겁쟁이!’선우주영은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선우경진은 아직도 쓰러져 있는 도우미를 보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채영아, 여태껏 손도 안 대고 있은 거야?”그가 떠나서 다시 돌아오기까지 족히 10분은 지난 것 같았다.백채영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머뭇머뭇 오른손을 슬며시 폈다. 이내 오른쪽 검지에 애매한 길이의 핏자국이 드러났다.그녀는 죄책감과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내가 침을 놓으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는 바람에 손가락이 은침에 찔려서 똑바로 잡지를 못하겠어요.”선우경진은 할 말을 잃었다.선우주영도 어이가 없었다.고작 찔려서 생긴 상처라니? 이렇게 찌질할 수가!백아영은 그제야 백채영이 사람을 따돌린 진짜 의도를 알아차렸다. 상처를 입었다는 핑계를 대면 침을 놓지 않더라도 의심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백채영, 다친 시점도 참 공교롭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고 하필이면 혼자서 사람 구하는 타이밍에 다쳐?”이미 지은 죄가 있는 백채영은 백아영의 말을 듣자 정색하며 반박했다.“백아영,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다칠 수는 없잖아?”“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않을까?”백아영은 오늘 백채영을 까발리기는 글렀다는 걸 직감하고 어쩔 수 없이 의심할 수 있게 여지를 남겨 두었다.“선우경진 씨, 혹시 그동안 백채영이 직접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선우경진은 눈살을 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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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선우경진은 어디까지나 명문가 출신으로서 평소에 아무리 다정하고 착해 보여도 분위기가 바뀌는 순간 포스가 철철 넘쳤기에 백채영은 겁을 먹은 나머지 울음마저 뚝 그쳤다.그녀는 식겁하면서 선우경진을 바라보더니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나... 난...”“선우경진, 지금 뭐 하는 거야?!”위엄이 넘치는 호통 소리가 별안간 들려오더니 선우소훈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다가와서 백채영의 팔목을 잡은 선우경진의 손을 잡아당겼다.그는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채영을 잘 돌보라고 했더니 그동안 이렇게 괴롭히고 있었던 거야?”“할아버지! 전 단지 도우미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물었을 뿐인...”“그만!”선우소훈은 다짜고짜 백채영을 등 뒤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여동생을 의심한 지 벌써 몇 번째야?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평소에 널 이렇게 가르쳤니?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지? 고작 백아영의 말에 휘둘리는 거야?!”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백아영을 바라보았다.“그 주제에 자기도 의학 천재라고, 능력이 좀 있다고 해서 감히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을 거로 착각하나 본데, 네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손녀를 의심해? 우리 집안일에 너 같은 외부인이 끼어들 틈은 없어!”백아영은 선우소훈이 직계 가족을 이 정도로 중요하게 여길 줄은 몰랐다. 심지어 손자가 자기 여동생을 의심하는 것마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니?그녀는 오히려 더더욱 납득이 안 갔다. 백채영이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존재인 만큼 아무리 의술에 재능이 없다고 해도 여전히 선우소훈이 애지중지 여기는 보물이라서 사랑을 듬뿍 받기 마련일 텐데, 굳이 온갖 속임수를 써서 신분을 속일 필요가 있냐는 말이다.어쩌면 그녀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음모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백아영은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어르신, 전 백채영이 의술에 문외한이라서 침놓을 줄 모른다고 100% 확신합니다!”“아직도 이간질하다니?!”선우소훈은 그녀의 말을 듣기는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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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선우경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할아버지,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공교롭지 않으세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안심이 될 텐데 왜 방해하셨죠?”“백채영은 뭐니 뭐니해도 선우 일가의 공주님이야.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렇게 몰아세우면 결과가 어떻든 망신은 면치 못할 거야. 앞으로 무시라도 당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선우소훈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경진아, 사회 물을 몇 년이나 마셨다는 사람이 성격이 아직도 그렇게 경솔하면 쓰겠니?”선우경진은 오로지 백채영의 신분을 확인하려다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하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백채영이 도우미가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요!”“아까 물어봤거든? 도우미가 뱀독에 중독되었다고 하더라.”선우소훈이 흐뭇하게 대답했다.선우경진은 살짝 놀랐다.“진짜요?”선우소훈은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왜? 내가 너한테 거짓말 할 이유라도 있어?”그건 말도 안 되었다.선우경진은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왜 뻔히 알면서도 훌쩍거리기만 할 뿐,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냐는 말이지? 설마 여자라는 이유로 일부러 투정 부리고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작전인가?그러나 미심쩍은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건 사실이다....선우 일가는 임시로 찾은 별장에 거주했는데, 최대한 자취를 감추려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걸 기피했다. 따라서 별장 자체도 그리 크고 화려한 편이 아니었다.물론 경비실도 마찬가지였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였다.방에는 책상, 의자, 그리고 1.2m짜리 싱글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는데, 야간 경비 중에 그럭저럭 눈 좀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별장 출입 금지령이 내려진 탓에 결국 경비실이 백아영의 거처가 되었다.딱딱한 침대에서 자려니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백아영은 그렇게 경비실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다. 어느 날 오후,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졌다.창문을 타닥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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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그의 어깨에는 빗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호수 같은 깊은 눈망울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네가 여기 왜 있어?”이성준은 말을 이어가면서 코트를 벗어 재빨리 백아영의 어깨에 걸치고는 가녀린 몸을 단번에 폭 감쌌다.옷에 남아 있는 체온 덕분에 폭우가 내리는 밤에 모처럼 따뜻함이란 무엇인지 느껴보게 되었다.백아영은 살짝 놀란 듯 물었다.“상처는 다 나았어?”“거의 다 나았어.”이성준은 눈살을 찌푸린 채 추워서 하얗게 질린 그녀의 앙증맞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다시 캐물었다.“대답해, 여기서 뭐하냐고.”“어르신께서 나한테 경비 서라고 했어.”이성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비좁고 꿉꿉한 방안을 훑더니 분위기가 한층 더 살벌해졌다.그는 백아영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따라와.”이성준은 우산을 쓰고 백아영과 함께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우산에 후드득 떨어졌지만, 백아영은 비를 단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오히려 우산이 백아영 쪽으로 너무 기울여진 탓에 이성준의 한쪽 어깨가 흠뻑 젖을 정도였다.점점 가까워지는 별장을 보자 백아영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어르신께서 다시는 별장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명령했단 말이야.”그녀의 말에 이성준의 안색이 더욱 싸늘해졌다.이내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이제부터 너한테 명령할 권리 따위 없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백아영을 끌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도우미한테서 이성준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채영은 기쁜 마음으로 2층에서 내려와 버선발로 마중 나갔다.“성준 씨, 아직 회복 중일 텐데 벌써 날 찾아온...”그녀의 의기양양한 목소리는 이성준이 백아영의 손을 잡은 모습을 발견한 순간 뚝 끊겼다.미소로 가득했던 얼굴은 상처라도 받은 듯 울상으로 변했고,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왜... 걔는 왜 데려왔어...?”주인으로서 집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선우소훈과 선우경진도 아래층으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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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그러나 이제 와서...백채영은 마음이 심란한 반면 짜증이 확 났다.“엄마, 그게 무슨 말이죠?”백채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열연을 펼쳤다.“혹시 누가 협박했어요?”박라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몰골이 초췌했다. 마치 그동안 끔찍한 나날이라도 보낸 듯 누군가 그녀의 자백을 얻어내려고 고문했을 가능성도 있었다.선우 일가의 의심만 사게 한다면 백아영은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다만 위정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서 한 중년 남자를 데리고 들어왔다.“이 사람은 불법으로 구제품을 만드는 사장입니다.”초라한 모습의 박라희를 보자 중년 남자는 덜컥 겁을 먹고 감히 거짓말할 엄두조차 못 내고 그날 밤 박라희가 찾아와서 포대기에 적힌 글씨를 조작한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심지어 매장 CCTV에 찍힌 영상까지 챙겨서 가져왔다.이제 굳이 포대기가 없어도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선우소훈과 선우경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번 분말 유산약 소동은 그렇다 쳐도 포대기 사건마저 박라희의 작품이란 말인가?그렇다면 결국 백아영은 결백하다는 뜻이었다.“박라희! 감히 날 속이려 들어?!”선우소훈이 버럭 외쳤다. 이내 화가 점점 끓어올랐고, 고작 눈속임에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박라희를 집어삼킬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었다.박라희는 자백하는 순간부터 끝장났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악을 쓰더라도 백채영만큼은 이번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곧이어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울면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그때 귀신에게 홀렸나 봐요. 절대도 어르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우리 채영이가 누려야 하는 걸 백아영이 자꾸 뺏으려고 하는 꼴이 못마땅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되었어요.”“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감히 백아영을 끌어들여요?”이성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내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으로 말했다.“그나마 백아영이 임신해서 채찍질 100대를 면해서 천만다행이지, 아니면 반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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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이성준은 뒤돌아서 싸늘한 눈빛으로 선우소훈을 바라보았다.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마치 소리 없는 위협처럼 다가왔다. 만약 선우소훈이 아직도 그녀를 난처하게 한다면 당장이라도 안면박대할 기세였다.어찌 됐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선우소훈은 이성준이 무례하게 굴어도 못 본 척했다.이내 백아영을 향해 말했다.“우리가 널 오해한 탓에 애먼 도우미 노릇만 여태까지 하게 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 혹시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만 해.”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은 백아영은 단지 선우 일가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일 뿐, 더는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잠깐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엄마를 뵐 수 있을까요?”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무슨 죄를 지었든 관계없이 어디까지나 혈연으로 연결된 핏줄인지라 언젠간 꼭 만나 보고 싶었다.생각지도 못한 백아영의 제안에 선우소훈은 깜짝 놀랐다.보통 사람이라면 생모가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외면할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보상받을 기회를 고작 죄인을 만나려고 쓰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백아영은 일면식도 없는 어머니를 위해 흔쾌히 보상을 포기했다.‘그래도 효심은 있군.’선우소훈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준비할게.”“할아버지!”이때, 백채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동의하시면 안 돼요! 허수빈은 선우 일가의 죄인이잖아요. 평생 지하실에 가둬두고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면 몰라도 딸까지 만나도록 선심 쓰는 건 아니지 않아요? 어떻게 이처럼 뻔뻔한 요구를 제안할 수 있단 말이죠?”선우소훈은 백채영이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앙칼지게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채영아, 이건 누가 봐도 우리가 잘못한 일이잖아. 보상할 건 보상해야지.”백채영은 짜증이 나서 발만 동동 굴렀다.백아영의 소원을 이뤄주는 자체가 그녀는 못마땅했다. 게다가 백아영과 허수빈은 혈연관계도 없는데, 만약 만났다가 서로 못 알아본다면 어떡하냐는 말이다!그녀는 이내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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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백아영은 민망한 듯 말했다.“나, 나 요리할 줄 몰라.”지난번에 딱 한 번 배웠는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아직은 요리 초보였다.“나한테 맡겨.”이성준은 식자재를 들고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곧이어 텅텅 빈 냉장고가 가득 채워졌다.그러고 나서 능숙하게 야채를 꺼내 다듬기 시작했다.백아영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밥을 얻어먹으러 왔다는 사람이 식자재도 준비해 오고 요리까지 직접 하다니?그녀가 꼼짝도 하지 않자, 이성준은 고개를 들며 농담조로 빈정거렸다.“얼른 청소하지 않고 뭐 해? 이따가 먼지 구덩이 속에서 밥 먹을 거야?”순간 백아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더니 서둘러 청소하러 떠났다.방이 워낙 작아서 그녀는 몸만 돌려도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성준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그의 모습은 인간미가 넘쳤는데, 결국 저도 모르게 자꾸 음흉한 상상에 빠졌다.청소하고 있는 여자와 요리하는 남자라... 이는 누가 봐도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의 한 장면이지 않은가?이런 생각을 떠올리자 백아영은 또다시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더니 재빨리 잡념을 떨쳐버렸다.하지만 눈동자만큼은 분주하게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이성준은 몰래 힐끔거리는 그녀를 일찌감치 눈치챘지만,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껏 감상하도록 놔두었고, 심지어 요리할 때 웍질까지 하면서 끼를 부렸다.30분 뒤, 청소도 마치고 요리도 완성되었다.이내 자그마한 방안에 맛있는 냄새로 가득 찼다.그동안 경비 서느라 경비실에서 꼼짝도 못 한 그녀는 남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게다가 음식도 맛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식탁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내려다보며 백아영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고, 뱃속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성준아, 고생했어.”이성준은 국을 한 그릇 떠서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별말씀을, 당장이라도 군침을 흘릴 것 같으니까 얼른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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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이성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백아영은 흠칫 놀랐다.그렇다고 굳이 남아 있을 이유는 또 뭐란 말이지?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순간 이성준의 표정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다신 안 오려고?”“백채영의 재판 날에는 참석하겠지만, 다른 때에는... 아마 돌아올 일이 없지 않을까?”비록 일찌감치 내린 결정이지만, 왠지 모르게 이성준 앞에서 얘기하려고 하니 목이 잠기면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순간, 울컥한 기분이 든 이성준은 폭풍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듯 엉망진창이 되었다.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그러나 문을 나서자마자 고개를 돌려 민우진을 향해 말했다.“나와!”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연히 움직일 생각이 없는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돌아가고 싶으면 혼자 가. 어차피 방향도 다르잖아.”“내가 끌어내기를 바라는 건가?”싸늘한 목소리는 오싹할 지경인데, 누가 봐도 협박하는 말투였다.서슬 퍼런 이성준의 모습에 민우진은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괜히 백아영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다가 그녀를 난처하게 할까 봐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영 씨, 내일 다시 찾아올게요.”백아영은 앞뒤로 나란히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민우진은 자기 처신을 못 할 정도로 이성준과 치고받고 싸우는 그런 충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단지 서로 눈에 거슬릴 뿐, 아마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다만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고 쌩하니 떠나는 이성준을 떠올리자 괜히 기분이 찜찜했다.그녀가 남원을 떠난다고 해서 화가 난 건가?식탁 위에서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을 내려다보자 백아영은 마음이 뒤숭숭했다.건물 밖에는 여전히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이성준은 계단에서 내려와 곧바로 차에 올라탔고, 더는 민우진과 말을 섞지 않았다.강압적인 말투로 그를 협박하다시피 불러낸 목적이 결국은 백아영과 단둘이 방 안에 있는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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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백아영 씨, 허수빈이 남원에 도착했어요. 저랑 선우 일가에 다녀오시죠.”백아영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더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허수빈, 그녀의 생모가 왔다!드디어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되다니!백아영은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선우 일가에 도착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비웃는 백채영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새로 받은 네일아트를 요리조리 둘러보며 비아냥거렸다.“악덕 도우미의 딸은 역시나 천박하구나. 자기 주제도 모르고 이런 엄마를 두고도 악착같이 빌붙으려고 해? 뼛속까지 더러운 피가 흐르는데 유유상종이 따로 없지 않겠어?”아무리 생모라고 해도 백아영은 어찌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변명할 수 있겠는가?결국 이를 꽉 악물고 가슴 속에 차오른 울분을 삼키며 함께 온 기사한테 말했다.“그분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기사는 백아영을 지하실로 데려갔다.선우경진은 2층 난간 옆에 서서 거실에 있는 백채영을 내려다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채영아, 백아영은 혈육이 보고 싶어서 효도하러 왔을 뿐 잘못한 건 아니잖아? 이 점만 봐서라도 허수빈과 완전 다른데 똑같이 취급하고 모욕하면 되겠어?”“오빠! 또 백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거예요?”백채영은 짜증이 났다.“지난번에 절 의심하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백아영의 편에 서 있네요? 절 진짜 사촌 여동생으로 생각하긴 하나요?”지난번 일을 언급하자 선우경진도 죄책감이 들었다. 어쨌거나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칫 백채영을 망신당하게 할 뻔한 건 사실이었다.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언제 백아영의 편을 들어줬어? 알았어, 네가 기분 나쁘다면 더는 말 꺼내지 않을게.”백채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실로 걸어갔다.백아영과 허수빈의 만남 자체가 걱정인 그녀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시시각각 지켜보기로 했다.한편, 대낮인데도 지하실에는 빛 한 점 없었다. 주위를 밝히는 거라고는 오로지 조명뿐인지라 어딘가 답답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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