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라는 사치

후회라는 사치

By:   간도  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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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주원과 다툰 날,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나는 너무 화난 나머지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인간은 바람을 쐬인다는 핑계로 첫사랑 그녀와 그녀 아들까지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한편 우리의 어린 딸 아윤이는 홀로 집에서 꼬박 7일이나 내 시신 옆에 있어 주었다. 이주원이 드디어 우리 두 모녀가 생각나 집에 돌아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딸 아윤이는 몸이 아파서 안색이 누렇게 변하고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이주원은 딸을 부둥켜안고 나의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하지만 아윤이는 아등바등하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 나의 묘비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이주원에게 물었다. “그쪽 누구예요? 우리 엄마 귀찮게 굴지 말아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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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날은 이주원과 가장 크게 싸운 날이었다.그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내던지고는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강하리, 제발 의심병 좀 고쳐. 나 신나은이랑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야.”나는 그저 묵묵히 그의 옷 속에서 립스틱을 하나 건졌다.구하기도 힘든 한정판 브랜드 립스틱, 아쉽게도 사용 흔적을 남긴 립스틱이었다.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애 앞에서 좀 자제해주면 안 돼?”이때 이주원이 내 손에 쥔 립스틱을 바닥에 내팽개쳤다.힘이 너무 세다 보니 내 손등에 빨간 손자국이 났다.“이런 날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앞으론 너 꼴리는 대로 살아.”말을 마친 후 그는 소파 위의 외투를 챙기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문 닫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나는 바닥에 축 늘어져 이주원이 벌이고 간 난장판을 하나둘씩 치웠다.이때 5살 된 딸 아윤이가 침실에서 달려 나왔다.아윤이는 내 목을 가볍게 끌어안고 손등에 난 빨간 자국을 어루만졌다.“엄마, 아파요?”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품에 꼭 안았다.“아윤이 착하지. 엄마 하나도 안 아파. 그저... 조금 피곤하네.”나는 7년 동안 이주원을 철석같이 믿어왔다.하지만 그는 신나은과 함께 몇 번이고 내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었다.일이 이 지경에 다다른 이상 나도 더는 이 결혼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아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앙증맞은 손으로 나의 큰손을 꼭 잡아주었다.“아윤이가 엄마 침대 데리고 갈게요. 우리 선생님이 한잠 푹 자면 피곤이 금방 풀린댔어요.”아이의 착한 행동에 서글픈 내 마음이 엄청난 치유를 받았다.나는 딸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살포시 누웠다.우리만의 이야깃거리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깊은 밤, 아윤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왔다.이때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려서 열어보았더니 신나은이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 속에서 이주원은 윗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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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날은 이주원과 가장 크게 싸운 날이었다.그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내던지고는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강하리, 제발 의심병 좀 고쳐. 나 신나은이랑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야.”나는 그저 묵묵히 그의 옷 속에서 립스틱을 하나 건졌다.구하기도 힘든 한정판 브랜드 립스틱, 아쉽게도 사용 흔적을 남긴 립스틱이었다.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애 앞에서 좀 자제해주면 안 돼?”이때 이주원이 내 손에 쥔 립스틱을 바닥에 내팽개쳤다.힘이 너무 세다 보니 내 손등에 빨간 손자국이 났다.“이런 날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앞으론 너 꼴리는 대로 살아.”말을 마친 후 그는 소파 위의 외투를 챙기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문 닫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나는 바닥에 축 늘어져 이주원이 벌이고 간 난장판을 하나둘씩 치웠다.이때 5살 된 딸 아윤이가 침실에서 달려 나왔다.아윤이는 내 목을 가볍게 끌어안고 손등에 난 빨간 자국을 어루만졌다.“엄마, 아파요?”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품에 꼭 안았다.“아윤이 착하지. 엄마 하나도 안 아파. 그저... 조금 피곤하네.”나는 7년 동안 이주원을 철석같이 믿어왔다.하지만 그는 신나은과 함께 몇 번이고 내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었다.일이 이 지경에 다다른 이상 나도 더는 이 결혼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아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앙증맞은 손으로 나의 큰손을 꼭 잡아주었다.“아윤이가 엄마 침대 데리고 갈게요. 우리 선생님이 한잠 푹 자면 피곤이 금방 풀린댔어요.”아이의 착한 행동에 서글픈 내 마음이 엄청난 치유를 받았다.나는 딸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살포시 누웠다.우리만의 이야깃거리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깊은 밤, 아윤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왔다.이때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려서 열어보았더니 신나은이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사진 속에서 이주원은 윗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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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주원이 홧김에 문을 박차고 나간 그 순간, 나는 그가 배짱 있으면 평생 돌아오지 말기를 바랐다.하지만 이젠 이 남자의 외도 여부 따위 관심 없고 신나은 모자가 나를 겨냥한 욕설과 치욕 따위 관심이 없었다.심지어 이주원이 나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려도 괜찮으니 제발 좀 빨리 집에 돌아오기만을 바랐다.우리의 딸 아윤이가 고작 5살이라 스스로 챙길 수가 없으니 홀로 집에 오랫동안 내버려 두면 안 된다.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아윤의 옆에 있어도 이주원은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아이는 배가 고픈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결국 또다시 맨발로 내 몸 위에 기어올랐다.“엄마, 이제 일어나요. 아윤이 배고파요. 엄마가 해주는 김밥 먹고 싶다고요.”전에 아이가 불량 식품만 즐겨 먹는 버릇을 고치려고 집에 있던 즉석식품들을 죄다 버렸었다. 이제 주방에 남은 건 오직 식자재뿐이다.아윤이와 함께할 시간이 이렇게 짧은 걸 진작 알았더라면 밀키트는 최대한 많이 쟁여놓는 건데... 나는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한낱 어린애한테 무슨 요구가 그렇게 높았을까. 나 자신이 마냥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시간은 일분일초 흐르고 나도 더는 아윤의 가여운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아이의 옆을 떠나 한시라도 빨리 이주원을 찾아와야 한다. 나의 넋이 나갈지언정 이주원을 반드시 데려와서 아윤이를 구출해야만 하니까.어제 이주원과 신나은이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나은의 집 주소는 알고 있었다.전에 이주원의 내비게이션에서 수없이 봐온 주소였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한때 업무가 바쁘다면서 새벽까지 야근하기가 일쑤였던 그 남자는 정작 신나은의 집에서 그녀의 아들과 함께 게임이나 해대고 있었다.이주원이 일부러 져주면서 게임 한 판이 또 막을 내렸다.신난 신서빈은 폴짝 뛰면서 이주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이때 신나은도 자연스럽게 다 자른 수박 한 조각을 이주원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그녀는 일부러 이상야릇한 말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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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신나은 모자의 의기양양한 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속이 다 울렁거렸다.이 역겨운 광경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고 집에 홀로 남겨둔 아윤이도 자꾸 눈에 밟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아윤이는 여전히 내 몸에 기댄 채 멍하니 넋 놓고 있었다.좀 전에 울었는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모습이었다.아윤이는 가장 아끼는 토끼 인형을 가져왔다.그 인형은 재질이 별로여서 위생 문제가 줄곧 마음에 걸려 평상시에 아윤이가 안고 자는 걸 허락하지 않았었다.다만 아이를 달래야만 하니 나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엄마도 보라 좋아해. 보라 엄마한테 남겨주면 안 될까?”이 방법은 썩 원활치 못했다. 아윤이는 늘 대판 울고 난 뒤에야 인형을 내게 건네곤 했었다.그랬던 아이가 오늘은 딱딱해진 내 손을 들어 올리더니 가장 아끼던 인형을 내 품에 쏙 넣어주는 것이었다.그러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보라 줄게요. 앞으로 계속 엄마 가져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요, 네?”이아윤은 내 팔을 껴안고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보라 안고 푹 자요. 자고 깨나면 아윤이 용서해줄 거죠?”내 눈물이 허공에 툭 떨어지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어리석은 아이는 내가 본인 때문에 화나서 여태껏 안 깨나는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엄마가 어떻게 아윤이한테 화낼 수가 있겠어?집 떠나 멀리 이주원에게 시집온 것도 후회했고 번마다 그 인간을 용서해준 것도 후회했지만 내 생에 아윤이를 낳은 것만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이아윤은 내 삶에 가장 빛나는 별이고 고달픈 내 인생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선물이니까.아윤이가 없었더라면 나도 진작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두 팔을 벌려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팔은 아이의 작은 몸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가 없었다.한때 손만 뻗으면 내게 와닿았던 따스함이 이젠 이토록 아득하게 멀어졌단 말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가 없단 말인가?아윤이는 내 몸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초가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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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아윤의 목소리를 들은 이주원은 금세 말투가 나긋해졌다.“아윤이구나. 엄마는 뭐하길래 우리 아윤이가 전화했을까?”아이는 바짝 긴장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엄마 자요. 아윤이 몸 아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네요. 아빠가 와서 대신 좀 엄마를 침실까지 부축해주면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주원이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담담한 어투로 아이에게 답했다.“엄마 바꿔줘 봐.”아윤이는 휴대폰을 내 귀에 갖다 댔다.“엄마 듣고 있어요.”드디어 내가 전화를 받았다는 생각에 이주원이 험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강하리, 넌 이게 재밌냐? 하다 하다 아윤이를 이용해서 내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들어?”“그 어린 애를 우리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어? 나 요즘 안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혼자 잘 반성해. 잘못 뉘우칠 때까지 절대 안 돌아가.”그로써 전화가 꺼졌다.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가 있을까?이주원은 심지어 내게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다짜고짜 욕설만 퍼붓고는 전화를 꺼버렸다.아윤이는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는 나는 속이 재가 될 것만 같았다.다시 살아나서 아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그해 이주원과 결혼했을 때, 이 인간은 신나은의 존재에 대하여 내게 단 한 마디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나는 그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집 떠나 이렇게 멀리 시집왔다.이주원이 착한 사람이리라 굳게 믿으면서 내 모든 걸 걸었는데 신나은이 전남편과 이혼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온 순간 인생의 패배를 제대로 느꼈다.나는 그렇게 유별난 사람도 아니고 결혼생활에서 일말의 서러움도 당해선 안 된다는 이기주의자도 아니다.이 몇 년간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우린 수없이 부부싸움을 해왔지만 나름대로 잔잔하게 살아왔고 딱히 넘기지 못할 고비도 없었다.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이주원을 믿기에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다만 그는 유독 큰 반응을 보였고 나도 그만 참지 못한 채 푸념을 몇 마디 했다. 가족을 우선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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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아윤이의 열이 점점 더 올랐다. 아이는 내 팔을 껴안고 이제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엄마, 아빠는 왜 우릴 버린 걸까요?”“아윤이도 싫고 엄마도 싫은 걸까요?”이 문제에 대해서는 설사 내가 살아있다고 해도 대답해줄 수가 없다.그저 딸아이에게 이 말만 해주고 싶었다. 이건 아윤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빠가 매정한 건 엄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다.그 인간은 신나은을 사랑하기에 친자식도 아닌 신서빈을 예뻐해 주고 있다.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가 싫었을 뿐이다.아윤이는 점점 힘이 빠져 배를 어루만지면서 몸을 움츠렸다.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끝까지 내 시체 옆에서 꼭 함께해주었다.점심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방안을 내비쳤다. 아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선명하게 보였다.아이는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내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나 너무 배고파요. 너무 괴로워요.”“엄마, 얼른 좀 일어나봐요. 아윤이 엄마 너무 보고 싶단 말이에요.”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른 나머지 아이는 걸음을 휘청거리며 맨발로 겨우 화장실까지 걸어갔다.이어서 찬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순간, 아이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잠시 몸부림치더니 주방으로 달려가 식탁 위에 놓인 시금치를 마구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내가 까먹고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한 시금치는 사흘이 지나니 잎이 다 노래지고 말았다.평상시에 그토록 입이 짧던 아윤이는 다 시들어진 채소도 이젠 마다하지 않았다.아이는 채소를 들고 소파 쪽으로 다가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운데 주먹만 한 얼굴은 여느 때보다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엄마, 봐요. 아윤이 스스로 잘 챙기고 있어요. 엄마 깨날 때까지 꼭 기다릴 거예요.”나는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팠다.이게 어디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는 걸까? 그냥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집어삼키는 꼴이었다.다만 이 어린아이가 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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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아윤은 아빠한테서 전화가 걸려오자 신나서 어쩔 바를 몰랐다.아이는 전화를 받고 달콤한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지만 정작 들려오는 건 여자 목소리였다.신나은이 이주원 휴대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아윤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꼬맹아, 난 네 아빠가 아니야. 너희 아빠 지금 서빈이랑 놀아주고 있어. 너는 싫대, 하하.”아윤이는 엉엉 울면서 신나은에게 고함을 질렀다.“아줌마 나쁜 여자야. 우리 아빤 그럴 리 없어요!”한편 신나은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더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울긴 뭘 울어? 내가 이사 들어가거든 너희 두 모녀는 멀리 꺼질 줄 알아!”나는 신나은이 전화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이주원이 3일 동안 외박했으니 지금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나중에 이주원이 정말 그녀와 결혼한다면 아윤이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거대한 공포가 나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바로 내가 아닐까?본인도 나약해 빠졌으면서 뭣 하러 아이까지 낳아 이 고생을 시키는지...내 영혼은 다시 이주원의 옆으로 돌아갔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큰소리로 묻고 싶었다.딸아이가 울면서 애원해도 아무렇지 않게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인간, 그는 정말 양심도 없는 걸까?다만 이번엔 저번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이 아니었다.이주원은 신나은의 집 베란다에 기대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한 대 물었다.화분에 하늘색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문득 아윤이도 핑크색의 똑같은 장난감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그 장난감을 받은 날, 아윤이는 좋아서 어쩔 바를 몰랐다. 왜냐하면 그건 이주원이 처음 선물한 장난감이었으니까.아이는 신나서 유치원에 갖고 가 자랑질했다. 우리 아빠가, 날 젤 사랑하는 우리 아빠가 선물한 거라고 동네방네 자랑했다.하늘색 플라스틱이 신속하게 녹아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이때 신나은이 방에서 나오더니 자연스럽게 장난감을 휴지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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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주원은 신서빈을 덥석 안고 까끌거리는 수염으로 아이의 얼굴을 비벼댔다.“요 녀석, 아빠가 이러려고 총 놀이 가르쳐준 줄 알아? 감히 아빠를 쏘네?”신서빈은 씩씩거리면서 머리를 홱 돌렸다.“아무튼 우리 엄마 속상하게 하는 사람은 전부 다 미워요.”이주원은 아이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그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신서빈을 바라보며 콧등을 살짝 어루만졌다.“알았어. 아빠랑 함께 여행가.”신나은 모자는 드디어 그의 확답을 듣고 나란히 거실에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한편 이주원은 베란다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나와의 카톡 대화창에서 머뭇거렸다.아윤의 전화를 제외하고 나는 무려 3일이나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전에는 아무리 크게 싸워도 아윤이를 고려해서 항상 먼저 연락해 사과하곤 했었는데, 설사 이주원의 잘못이라도 기꺼이 먼저 고개를 숙였었는데 이번엔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이주원은 카톡 대화창을 열고 재빨리 타자했다.[나 내일 나은이네랑 같이 여행 가.]한 시간 뒤, 베란다의 담배꽁초가 한 대, 두 대씩 쌓여갔다.옆에 놓아둔 휴대폰은 전혀 알림음이 없었다.그는 짜증이 밀려왔는지 재떨이를 아래층에 퍽 차버리곤 휴대폰을 열어서 화면을 짓부술 기세로 내게 문자했다.[나한테 할 말 없어?]왜 없을까? 제발 좀 집에 돌아가라고, 아빠의 책임은 져야 한다고 백 번도 더 외치고 싶었다.이 남자는 이제 그 기본적인 도리도 못 하고 있으니 다른 건 더 말할 가치도 없을 듯싶었다.밤이 깊어지고 이주원은 마지막 담배까지 다 피운 후 휴대폰 전원을 껐다.“하리야, 난 분명 기회 줬다. 네가 저버린 거야.”그렇게 나는 이주원이 신나은 모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날아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신나은은 예쁜 선캡을 쓰고 앞에서 걸었고 이주원이 뒤에서 세 사람 캐리어를 달갑게 끌고 갔다.인파로 북적이는 공항에서 이주원은 신서빈을 목마 태우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아이는 이주원의 머리카락을 잡고 방향을 조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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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내가 죽은 지 5일째 되던 날, 이아윤도 슬슬 버티기 힘들어했다.연일 고열에 기침까지 해대면서 내 옆을 지켜주려고 감히 잠도 제대로 못 잤다.아이의 촘촘한 속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아윤이는 작은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애써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다.다만 이 모든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아이는 끝내 입술을 깨문 채 다시 한번 이주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엔 금세 통화가 연결됐고 아윤이도 기쁜 마음에 간절하게 애원했다.“아빠, 아윤이 더는 못 버티겠어요. 아빠가 와서 엄마 챙겨주면 안 돼요? 와서 아윤이 좀 도와주면 안 돼요?”이때 전화기 너머로 또다시 신나은의 사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주원이 휴대폰에 유독 예민하게 굴다 보니 그녀도 어떻게든 나와 이주원의 연락을 전부 차단하려고 애썼다.아윤의 목소리를 들은 신나은은 되레 한 맺힌 듯이 쏘아붙였다.“뭣 때문에 너희 엄마 챙겨줘야 하는데? 설마 너희 엄마 죽었니? 죽기라도 했을까 봐?”죽음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이아윤은 두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차올랐다.“죽었다는 게... 뭐예요?”“말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거야.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난 거지.”신나은이 언짢다는 얼굴로 해명했다.전화기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가 곧장 횡설수설하며 전화를 꺼버렸다.이아윤은 제자리에 멍하니 앉아 무기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고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버린 나를...섬세하고 부드럽던 피부 결이 진작 사라지고 시퍼런 멍 자국만 가득 퍼진 나를...아이는 손을 뻗어 내 입술을 찔러보았다.“말도 못 하고.”이어서 내 몸을 힘껏 움직여보려고 했다.“움직이지도 못하고.”마지막으로 작은 얼굴을 내 이마에 갖다 대더니 차갑고 딱딱한 촉감에 재빨리 고개를 움츠렸다.눈물이 아이의 두 불을 타고 흘러내렸다.“온몸이 딱딱해.”아윤이는 아직 어려서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른다.그저 내가 더는 깨날 수 없게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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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이주원은 코트를 챙겨입고 부랴부랴 강주로 돌아갔다.그가 떠난 후 신나은도 본모습을 드러내고 호텔 방안에 주저앉아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강하리, 빌어먹을 년! 넌 그냥 얌전히 죽는 게 상책이야!”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이주원이 마침내 먼저 내게 전화를 걸었다.우리가 사는 건물은 내진설계가 잘 되어 있고 지진의 진원지가 아니라서 딱히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기절해있던 아윤이는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도 미처 깨나지 못했다.아무도 전화를 안 받자 이주원은 당황하기 시작했다.그는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내게 전화를 해댔다.아이가 마침내 끈질긴 휴대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휴대폰 화면을 본 이아윤은 기쁜 내색이라곤 전혀 없었다.전에는 이주원을 가족이라고 여겼고, 엄마와 자신을 지켜줄 기둥이라고 여겼는데 실망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니 절망으로 변해버렸다.어린 친구들 앞에서 아윤이는 항상 아빠를 엄청 지켜주려고 노력했고 아빠가 하신 말씀은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려고 애썼다.아윤이는 비록 어리지만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아빠의 존재가 어느덧 거품으로 변해 서서히 사라지고 말았다.아이는 내 몸에 기댄 채 무덤덤하게 전화를 받았다.그러고는 전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인데요?”아윤의 목소리를 듣자 이주원은 드디어 한시름을 놓았다.혹시 잘못된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던 그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했다.“아윤아, 아빠 금방 집에 돌아가. 우리 아윤이 뭐 사다 줄까?”“저번에 백화점에서 봤던 바비 인형 어때? 아참, 우리 아윤이 가장 좋아하는 엘사 치마 사줄까? 이번에 세트로 사 갈게. 어린이집 다닐 때 바꿔가면서 입고 다녀.”“이제 우리 아윤이가 불량 식품 먹는다고 더는 잔소리 안 할게. 아빠 돌아가거든 햄버거랑 피자 먹자.”이아윤은 휴대폰을 겨우 들고 말할 힘조차 없었다.아이의 이런 반응에 이주원은 살짝 당황했다. 예전 같으면 신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닐 아이인데 지금은 싸늘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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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이아윤은 얌전히 내 몸에 엎드리고 전에 내가 해줬던 것처럼 손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었다.몸에 난 멍 자국을 이렇게 닦으면 지워질 줄 알고 열심히 닦아주었다.이주원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는 긴 속눈썹을 힘없이 떨어트렸다.“엄마 죽었어요.”앳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슬픔을 감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어요.”휴대폰을 들고 있던 이주원은 격하게 손을 떨었다.택시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거대한 관성에 의해 그의 몸도 앞으로 확 쏠렸다.이주원은 앞 좌석에 힘껏 머리를 부딪치고 코피가 줄줄 터져 흘렀다.손으로 피를 쓱 닦았는데 빨간 피를 보는 순간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다.기사는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이주원의 귓가에 들리는 건 소음뿐이었다.그는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얼른 잡생각을 지우려고 했다.“손님, 많이 다치셨어요?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주원은 뒷좌석에서 몸을 움츠린 채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쿵쾅대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괜찮아요. 얼른 공항으로 가주세요.”드디어 마음을 가라앉힌 후 그는 다시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웠다.이어서 단호한 말투로 이아윤에게 물었다.“엄마 안 죽었어. 아윤이가 아직 어려서 죽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래.”“죽는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게 되면 더 이상 그런 허튼소리 안 할 거야, 우리 아윤이.”그 시각 이아윤은 더는 이주원의 무의미한 교육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아이는 살면서 처음 먼저 전화를 끊었다.전화기 너머로 시끄럽게 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자가 본인 아빠였다니,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었다.이주원은 뚝 끊긴 통화연결음에 가슴이 움찔거렸다.그는 끝내 기사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버럭 소리쳤다.“아윤아, 왜 말을 안 들어! 얼른 대답하란 말이야!”“엄마 잠든 거 맞지? 아윤이가 아빠더러 대신 엄마를 침실까지 부축해주라고 했잖아.”“제발 부탁이야, 아윤아. 이런 장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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