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한에게는 뼈 아픈 실패이자, 유영을 지지하는 소은지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소은지는 생각할수록 흥이 올랐다.유영이 말했다.“얼굴 뒤집어진 건 당연한 거고 핸드폰 바닥에 막 던지는데 내가 다 소름이 돋더라고.”입찰 결과가 나왔을 때 보았던 강이한의 똥 씹은 얼굴을 생각하면 유영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지금쯤 얼마나 화가 나고 억울할까?전에 그녀에게 넌 절대 강성건설이 요구하는 도면을 그려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던 그였다.그는 라이벌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능력치를 얕잡아본 사람이라면 아내인 유영이 유일했다. 그는 전업주부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에게 뼈 저리게 패배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우리 유영이, 오구오구 잘했어.”소은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칭찬해 주었다.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다 보니 술맛마저 달게 느껴졌다.그렇게 클럽에서 신나게 마시고 노는 모습은 그대로 세강 오너 일가에게 전해졌다.또 한차례 집안이 뒤집힌 순간이었다.한편, 유영은 늦은 아침에 눈을 떴다. 어제 마구 달리다가 언제 순정동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정장 차림의 집사와 메이드복 차림의 고용인들이 공손히 계단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외삼촌 정국진은 대놓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성격이었다.그는 평소 고용인들의 예의범절과 품위에도 매우 엄격했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유영을 발견한 집사가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강이한과 함께 살면서 세강 일가도 꽤 화려하게 사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다.처음에는 그런 화려하고 대접하는 삶에 적응하기 무척 힘들어했다.그런 그녀에게 쏟아진 것은 진영숙 일가의 매정한 비웃음이었고 시간이 길어지자 고용인들마저 그녀를 우습게 아는 상황이 발생했다.그때는 그들의 삶이야 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굳이 비교를 하자면 정국진은 평소에도 품위나 예의범절을 따지는
정국진의 평소 일 처리 방식이라면 기사가 나가기 전에 막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먼저 유영의 의사를 묻는 것을 택했다.사실 정국진은 유영을 이미 로열 글로벌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가르치고 있었다.그래서 결정권을 유영에게 맡긴 것도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단호함과 대처 능력을 길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소식을 알게 된 뒤로 유영에게 전화 한 통 해주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그가 예상했던 대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유영은 먼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일단 알겠어요.”유영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민정이 물었다.“어떻게 할 거예요?”전에 그녀가 사람을 고용해서 잔인한 수단으로 상간녀를 응징했다는 기사가 떴을 때, 그녀는 이혼 서류를 공개하면서 여론을 순식간에 뒤집었다.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일단은 무시해요.”“무시하라고요?”“그 기사가 나한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쳤나요?”“그건 아니죠.”그러고 보니 딱히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다.어차피 그들이 운영하는 오로라 스튜디오는 정국진의 인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유영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그들을 흔들 수 없었다.유영은 곧장 차로 향하며 조민정에게 물었다.“왕 대표님 쪽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왔었다고 했죠?”“그래요.”조민정은 이 상황에서 거래처를 걱정하는 유영의 행보에 살짝 당황했다.하지만 정작 본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강이한이 왕 대표를 협박한 증거를 찾아내요.”“알았어요.”조민정은 그제야 유영의 의도를 파악했다.어차피 지금 그쪽과 진흙탕 싸움을 해도 그들에게 좋을 게 없고 오히려 품위만 떨어진다. 이쪽에서 차라리 무대응으로 일관하면 저쪽은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될 것이다.유영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고 누구처럼 남자 하나에 목매어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청하시는 또 한 번 뒤집어졌다.유영이 사과하러 한지음의 병실로 찾아갔다는 건 그녀가 납치 사실을
강이한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방치했지만 지금은 언제 어디를 가든 정국진의 든든한 그림자가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이런 가족애가 그녀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정국진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한 뒤, 유영은 덤덤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숙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영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어차피 용건이야 들어보지 않아도 욕하려고 전화한 게 뻔했기에 받을 필요도 없었다.몇 번 끊어버렸더니 상대는 끈질기게도 계속 전화를 걸어대다가 그것도 통하지 않자 문자를 보냈다.[당장 본가로 와. 안 그러면 소은지 걔 청하에서 일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거니까.]문자를 확인한 유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역시 비열한 것으로 세강 사람들을 따라갈 자가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이든 상대에게 통하는 협박이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결국 유영은 자신의 포르쉐를 끌고 강이한의 본가로 찾아갔다.저택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외제차를 보고 유경원인 줄 알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유영인 것을 확인한 순간, 입가에 지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충격으로 바뀌었다.유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줌마를 바라보았다. 진영숙과의 관계가 이 정도로 틀어진 데는 이 아줌마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오셨어요? 큰 사모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어요. 뭐가 그리 바쁘다고 얼굴 한번 안 비춰준다고 큰 사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예의 없이 어른을 기다리게 한다고 핀잔하는 듯한 말이었다.유영은 자신보다 키가 큰 아줌마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이 집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는 키가 작은 탓도 한몫했다.하지만 지금은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것뿐인데도 아줌마가 오히려 압박감을 느꼈다.“날 기다린 건 아닐 테고,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유영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전에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고용인을 대한 적 없던 유약한 며느리였다.“유경원 씨랑 같이
진영숙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그리고 실제로 세강의 안주인 자리는 청하시에 사는 모든 여자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그런데 유영이 보잘것없다는 식으로 말하니 속이 뒤집어졌다.“그럼 싫은데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거니? 싫으면 당장 이한이랑 이혼하지 그러니?”“지금 이혼을 거부하는 건 그 사람이거든요? 벌써 잊으셨나요?”“너!”진영숙은 말문이 막혔다.자신을 전혀 공경하지 않는 유영의 태도에 화가 나는데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전에는 화풀이 상대로 제격이었는데 지금은 하는 말마다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니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다.유영은 씩씩거리는 진영숙을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날 여기로 부른 용건이 뭐예요?”소은지를 들먹이며 협박까지 했으니 뭔가 용건이 있는 건 분명했다.짝!자리에서 일어선 진영숙이 서류 뭉치를 유영의 얼굴에 던졌다.유영은 무심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진영숙이 입을 열었다.“동교 신도시 프로젝트, 대체 어떻게 된 거니?”“이미 다 들어서 아시면서 왜 굳이 나한테 물어보세요?”세강그룹 내부에 진영숙의 눈과 귀가 있는 건 전에도 아는 사실이었지만 소식이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까지 들어간 건 놀라웠다.진영숙은 유영이 박연준을 도와 동교 프로젝트 입찰에 성공하면서 강이한을 엿 먹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진영숙은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유영의 귀뺨을 때렸다.짝!유영의 고개가 돌아가고 입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진영숙의 분노한 고함에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네가 뭔데 그 프로젝트에 끼어들어?”“너 같은 애는 정말 질색인데 아직 이한이랑 이혼하기도 전에 외부인과 결탁해서 내 아들을 엿 먹이는 거야? 너 우리 세강을 망하게 할 생각이야?”“너 같은 걸 남자들이 정말 예뻐서 잘해주는 것 같아? 너 이한이랑 이혼하면 그 남자들도 목적 달성했다고 가장 먼저 너한테서 등 돌릴 거야!”이미 이성을 잃은 진영숙은 온갖 비난을 유영에
어제 홍문동에서 보였던 당황함은 온데간데없고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모습이었다.진영숙은 그런 유경원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경원이 보고 좀 배워!”진영숙은 일부러 유영을 자극하려고 비웃음을 날렸다.나긋나긋하고 온순한 유경원과 비교하니 사사건건 자신과 부딪히는 유영이 더 한심하고 추악해 보였다.물론 유영이 과거에 자신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는 이미 까맣게 잊은 진영숙 여사였다.유영이 뒤돌아서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끼고 사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려는 진영숙을 내버려두고 현관을 나섰다.꼴에 부부라고 어쩜 저렇게 비슷한 말을 하면서 속을 뒤집어 놓는 건지!진영숙은 가슴을 부여잡고 통증을 호소했다.“쟤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보고 배운 게 없어!”“이래서 서민은 들이면 안 된다는 거야!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애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진영숙은 말할수록 짜증만 치밀었다.유영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대문을 나섰다.유영이 돌아간 뒤, 유경원은 진영숙을 위로하느라 진땀을 뺐다.“아줌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어차피 곧 이혼할 건데 그 여자한테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나요?”“그렇긴 하지만 쟤 하는 걸 보면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내가 그동안 그렇게 가르쳤는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그래요. 아줌마는 좋은 마음에 잔소리 좀 한 건데 이유영 씨가 나빴네요.”유경원은 진영숙이 무슨 말을 하든 일단은 치켜세웠다.그제서야 진영숙의 노기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그녀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하고 유경원을 바라보았다.유영이 외부인과 짜고 세강을 물먹인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외출하고 돌아온 강서희는 유경원과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디저트를 만드는 진영숙을 보며 순간 표정이 표독스럽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언니 왔어? 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딸을 본 진영숙의 표정이 조금 더 환해졌다.“경원이 좀 보고 배워.
반면, 강서희는 목에 가시가 찔린 것처럼 불편했다.유경원을 향한 적의가 눈빛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진영숙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갈무리했다.유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이한과 엮인 여자는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니 당연히 진심으로 유경원과 잘 지내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한동안 대화가 오간 뒤, 유경원은 집으로 돌아갔다.둘만 남게 되자 강서희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물었다.“엄마, 경원 언니… 정말 오빠 짝으로 괜찮은 거 맞아? 해외에서 오래 살다 왔는데… 뒷조사는 다 해봤어?”물론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었다.예전에도 진영숙은 며느리감으로 점찍은 사람이 해외 유학 경험이 있다고 하면 뒷조사를 철저하게 진행했다.하지만 유경원은 예외였다.유경원은 출국하기 전부터 강이한을 짝사랑했었고 그가 아니면 시집을 안 간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소홀한 점도 있었다.진영숙은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조사는 안 했지만 너도 봤잖아. 애가 아주 사근사근하고 품위가 몸에 배었어. 저 정도면 해외에서도 얌전히 공부만 했을 것 같은데?”강서희가 말했다.“그렇긴 하지만 외국이 어떤 곳인지 엄마도 알잖아. 경원 언니야 얌전한 성격이지만 외국 남자들이 좀 개방적이야? 그쪽에서 작정하고 꼬시면 순진한 언니가 안 넘어가고 견디겠어? 엄마도 빨리 손주를 보고 싶잖아. 난 그래도 조사를 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강서희는 진영숙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진영숙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도 맞아. 환경이 사람한테 끼치는 영향도 무시는 못 하지. 나중에 따로 조사를 해봐야겠어.”손주 얘기가 나오자 또 짜증이 치밀었다.그날 유영이 아이의 유골이 담긴 펜던트를 자신의 얼굴에 던질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그때 보였던 강이한의 충격 어린 표정으로 보아 유영은 여태 그 비밀을 강이한에게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진영숙은 유영이 강씨 가문의 아이를 낳게 할 마음이 추호
그런데 이혼할 때가 되자 위자료 운운하는 것도 못마땅했다.왕숙은 강서희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아까 오셨을 때 비싼 차에서 내리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지만…포르쉐면 비싼 차 아닌가요?”“포르쉐요?”강서희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진영숙이 불쾌한 표정을 하고 왕숙에게 물었다.“걔가 포르쉐 끌고 온 거 아줌마가 직접 봤어?”“네. 상태를 보아 새것처럼 보였거든요!”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강이한이 전에 BMW를 사줬을 때도 못마땅했지만 어디 나가는데 너무 싸구려를 타고 다니면 세강의 체면을 깎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데 또 포르쉐를 구매했다니!강서희의 얼굴에도 질투가 가득했다.딸 강서희가 몇 번이고 졸랐는데도 진영숙이 사주지 않았던 게 포르쉐였다.양녀를 귀하게 키우긴 했지만 포르쉐를 흔쾌히 사줄 정도는 아니었다.강서희는 줄곧 갖고 싶었던 차를 유영이 타고 다닌다는 말에 얼굴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진영숙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강서희도 굳은 얼굴로 말했다.“오빠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둘이 정말 이혼하는 거 맞아?”“어떻게든 하게 만들어야지!”진영숙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더는 이런 애를 집안에 계속 둘 수는 없어.’한편, 어제 고배를 맛본 강이한은 회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동교 프로젝트 주변 개발권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 시설은 다른 회사가 꽉 잡고 있었고 박연준 쪽에서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거라 그들에게 돌아올 기회는 많지 않아 보였다.내년의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고 산하의 부동산 기업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다른 방안을 연구해 내야 했다.어떻게 하면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진영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 성격이기에 강이한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너 걔한테 차 새로 사줬어?”진영숙이 다짜고짜 물었다.자초지종을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진영숙이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반면 강이한은 엄마랑 다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그는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유영 그 계집애가 포르쉐를 끌고 집에 왔다니까?’지금도 아까 했던 진영숙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계좌부터 확인해 보았지만 거금이 빠진 내역은 없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다른 사람의 카드로 차를 구매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에게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선물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지출이면 은행에서 확인 전화가 와야 마땅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입출금 내역도 깔끔했다.카드로 산 게 아니라면 그 차는 누구의 것일까?소은지를 제외하면 유영은 청하시에 친구가 없었다.소은지 같은 직장인이 그런 호화 외제차를 구매했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누굴까?렌트한 것일까?아니면 해외에 있는 그 남자?점점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면서 그의 주변으로 차가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조형욱은 상사의 호출에 긴장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대표님.”“로열 글로벌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어?”“보고서를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조형욱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답했다.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메일로 보낸 것이었다.강이한이 눈을 확 부릅뜨자 조형욱은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식은땀이 났다.강이한은 메일에 접속해서 첨부 파일을 열었다. 안에는 로열 글로벌 회장의 가족 사항이 들어 있었다.자료에 의하면 그는 아내와 사이가 꽤 돈독했으며 부인은 첫째 딸을 출산한 뒤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했다.정국진은 몸 약한 아내를 배려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회사는 점점 몸집이 커졌지만 아들은 없고 의학을 공부하는 딸 한 명이 전부였다.그는 딱히 스캔들에 휘말린 적도 없고 외부 활동에도 딱히 특별한 점이 없었다.그토록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 왜 유영과 그런 관계를 맺었는지 이해
분위기는 폭발 직전까지 치달았다.소은지와 엔데스 명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현우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모든 건 이미 끝나 있었는지도 모른다.이제는 서로의 뺨까지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명우의 웃음이었다.냉담하고 음울한 웃음이었고 소은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잔혹함과 함께 묘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소은지, 잘하고 있어.”그가 비웃듯 말했다.“74호는 감히 하지 못했던 걸 엔데스 가문의 일곱 번째 며느리는 해내는구나.”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상반된 두 신분에 대해 조롱하고 있었다.명우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좋아. 아주 좋아.”그가 성큼 소은지 앞으로 다가갔고 흥미로 가득 찼던 눈빛은 이내 사나워졌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고 거칠게 턱선을 문지르며 위협의 기운을 내뿜었다.“지금 이 모습,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어.”소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분질러버릴 듯한 목소리였다.하지만 소은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흥! 그래?”“그럼.”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몇 년 동안 엔데스 명우는 소은지의 뼈마디가 부러지는 고통을 주며 괴롭혀왔다.그런 그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굴복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강했고 절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명우가 대꾸할 틈도 없이 그녀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순간,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언가에 의해 산산이 갈라졌다.소은지는 오늘 엔데스 명우가 끝까지 덮어두려 했던 금기를 건드리고 있었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그래, 넌 아직도...”명우의 입에서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소은지가 먼저
이번엔 뭔가 달랐다. 소은지가 이렇게 길게 말을 이어간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엔데스 명우가 아무리 화를 내도 소은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그의 분노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차분하게 명우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심장을 움켜쥐듯 강렬했다.소은지가 말했다.“그 여자는 쓰레기니까.”그 순간, 엔데스 명우에게서 위험한 기운이 감돌더니 폭발이라도 한 듯한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곧이어 소은지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손길이 느껴졌다.그 힘에는 폭발 직전까지 억눌려 있던 명우의 분노가 거칠고 강렬하게 실려 있었다.“퍽!”차가운 재떨이가 남자의 이마에 떨어졌고 분위기는 더 살벌하게 얼어붙었다.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사이로 살기를 머금은 눈빛이 번뜩였다.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짐승의 눈빛이었다.공기가 멎은 듯 정적이 감돌았고 시간마저 멈춰버린 것 같았다.소은지는 조용히 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내려놓았다.소은지의 움직임은 침착하고 단단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죽는 게 무섭지 않아?”몇 년 동안 아무도 설선비라는 이름을 그의 앞에서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은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흥!”소은지의 웃음엔 비웃음과 연민이 섞여 있었고 그녀는 엔데스 명우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그 누구도 그런 눈빛으로 그를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소은지는 달랐다.과거에도 그녀는 그의 앞에서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똑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죽음을 무서워했던 건 내가 아니라 설선비였지. 그렇게 죽는 게 무서웠던 사람이 왜...”“팍!”손바닥이 소은지의 뺨을 세차게 갈랐다.명우의 입술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참으려 애써도 감정은 이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그는 더 이상 소은지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눌러왔던 분노는 이제 금방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그녀는 차디찬 말투로 엔데스 명우를 향해 내뱉었다.“당신 볼 때마다 떠올라. 그 여자와 설선비를 위해 이성 잃고 날뛰던 모습.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니까.”“소은지!”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선비라는 이름은 엔데스 명우에겐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치유되지 않은 상처처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몰려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지금까지 그 누구도 명우의 앞에서 감히 설선비를 언급하지 못했다.소은지가 그의 곁에 머물던 시절에도 그는 늘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곤 했다.마치 그녀의 입에서 설선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 존재 자체가 더럽혀지기라도 하는 것처럼.하지만 소은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으며 눈빛엔 오히려 조롱이 가득 담겨 있었다.“정말 불쌍해.”“닥쳐!”“당신은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지?”“닥치라고!”“쾅!”분노에 찬 엔데스 명우가 다과상을 걷어찼다.소은지는 부서진 잔해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화났어?”명우의 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난 몇 년간, 소은지가 설선비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명우는 항상 이런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창문조차 없는 방에 가두었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무너져갔다.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오래 있다 보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소은지는 설선비라는 이름 때문에 몇 번이나 벌을 받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그녀는 그 이름만 꺼내도 한동안 엔데스 명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소은지는 조금씩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그 여자의 이름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던 소은지는 더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물론 엔데스 명우가 가끔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일도 있었지만 설선비의 이름을
소은지의 웃음은 날카롭고 싸늘했다.엔데스 명우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여섯째 도련님.”단순한 호칭이 아닌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였다. 엔데스 명우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고 소은지를 향한 날카로운 눈빛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을 듯했다.하지만 그런 눈빛 앞에서도 소은지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소은지, 네가 현우 곁에 왜 있게 됐는지 설마 잊은 거야? 아니면 두 사람 관계가 계속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소은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현우 씨 곁에 있게 된 이유?’과거 청하시에 있으며 소은지는 절망의 끝에 몰리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철저하게 무너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엔데스 명우는 그녀를 끝까지 몰아세웠고 그녀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 기회만 엿보았다.그리고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아 주저 없이 현우의 곁으로 간 것이다.현우와 함께하게 된 이유, 소은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엔데스 명우는 거칠게 소은지의 턱을 움켜쥐었다.턱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지만 소은지의 눈빛은 그 순간조차 흔들리지 않았다.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그녀 곁에서 수없이 봐온 차가운 눈빛이었다.“그거 알아? 네가 이런 눈으로 날 볼 때마다 그 눈 다 뽑아버리고 싶다는 거.”소은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눈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그 눈에는 언제나 차갑고 독특한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소은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엔데스 명우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준 건 아니지만 명우는 그녀의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엔데스 명우도 처음부터 그녀의 이런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그녀의 고집과 강인함을 꺾으려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흥!”결국 그는 차갑게 웃으며 소은지의 손을 뿌리쳤다. 차갑게 몸을 돌린 그의 기운은 얼음처럼 냉랭했다.소은지의
얼마나 오래됐을까?소은지는 생각했다.‘엔데스 명우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한 게 대체 언제였지? 현우 씨 곁에 머물게 된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네.’현우와 함께하며 그녀는 자연스레 엔데스 명우와 멀어졌다.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순간이 극히 드물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두 사람의 마음속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고 서로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금유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엔데스 명우가 침묵을 깼다.그 말에 소은지는 차갑고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여섯째 도련님, 그게 무슨 말이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엔데스 명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소은지는 ‘여섯째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일부러 또렷이 힘을 실어 말했다.소은지를 바라보는 엔데스 명우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고 마치 소은지의 속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사실 명우를 만나기 전 소은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그동안 줄곧 반산월에 머물며 가장 자주 마주친 인물이 송연미였다. 송연미를 통해 엔데스 가문의 인물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현우가 어디 있는지 아직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기에 그녀의 마음엔 불안으로 가득 찼다.혹여 자신이 실수라도 해서 현우에게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막상 이 순간이 오자 오히려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여섯째 도련님?”엔데스 명우가 아무 말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소은지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남자의 깊은 눈동자는 더욱 어두워졌고 그 안엔 불투명한 그림자가 깔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이미 꿰뚫어 본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하지만 소은지는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한 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잠시 후, 엔데스 명우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걸 봐서 소은지는 고집이 셀 뿐만 아니라 정신력 또한 만만치 않
이유영은 아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고 월이를 떠올리자 눈빛에 따스한 온기가 어려 들었다.정국진은 이유영이 어젯밤 반산월에서 소은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러나 이유영과 소은지의 관계를 떠올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우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어.”“응.”이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어때? 괜찮은 것 같아?”“누구?”이유영은 되물었다.여진우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건지 이유영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이 반응하기도 전에 여진우은 굳은 표정으로 이내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여진우의 이상한 모습을 바라보며 이유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뭘 잘못했나? 왜 저러지?’‘설마 은지를 말하는 건가? 은지를 걱정하고 있다고?’‘에이, 설마. 두 사람은 전혀...’하지만 엔데스 명우와 소은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겉으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그래서 여진우가 소은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유영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한편, 이유영이 남기에게 했던 말대로라면, 현우의 일이 정말 소은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오늘 아침 엔데스 가문은 분명 반산월을 시험해 올 것이다.그리고 그 예감처럼,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엔데스 란서였다.그녀는 과거 엔데스 가문에서 소은지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이야기만 나누고는 돌아갔다.“아저씨.”“네.”“아홉째 아가씨가 왜 왔을까요?”그들은 오직 엔데스 가문에서만 마주쳐 왔기에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소은지는 지금 반산월에 나타나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철저히 경계하고 분석해야 했다.남기는 조심스레 말했다.“아홉째 아가씨는 순수합니다. 만약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누군가의 지시를 받았을 겁니다.”소은지
소은지는 지금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은 현실이 되어 소은지를 괴롭혔다.이유영은 떠났고 소은지는 홀로 남겨진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아저씨.”“네, 사모님.”집사 남기가 조용히 소은지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현우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다. 현우는 소은지에게 남기 집사라면 믿어도 된다고 말했었다.어제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남기는 누구보다 먼저 소식을 막으라고 조언했다.그 빠르고 정확한 대처를 보면 아마도 오랜 시간 현우 곁을 지켜온 인물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지금 남기는 소은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중요한 시기인 만큼 소은지 곁에 머무는 이상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남기도 모를 리 없었다.그런 남기를 통해 소은지는 각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다.어제 분명히 무슨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엔데스 명우에게 잡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엔데스 가문의 일원으로서 처음 겪은 일이었다.그것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일과도 완전히 결이 달랐다.복잡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자 처음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낯설었다.어찌할 바 모를 상황 속에서 다행히도 남기의 존재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젯밤부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그래도 계속 물어봐야만 했다.남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그 말을 들은 소은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유영 앞에서 보였던 연약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만이 남아 있었다.지금 이 일은 절대 엔데스 가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원래 가문 간의 다툼이라는 것이 이리도 잔인했던가?’과거에 엔데스 가문의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었다.어찌 됐든 그들은 가족이었다
그 생각을 하며 이유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이유영은 말없이 소은지를 꼭 껴안았다.소은지가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소은지는 현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엔데스 가문 도련님인데도 불구하고 소은지 곁에서 함께 일하는 현우를 보며 이유영은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소은지의 마음을 마주하고 나서 이유영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이유영은 밤을 꼬박 새워 소은지 곁을 지켰다.두 사람 아무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반산월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아침 식탁 위에는 정적만 감돌았다.“오빠한테 전화해서 조용히 찾아보라고 했어.”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유영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현우가 사라졌다.‘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수없이 많은 생각이 소은지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휘몰아쳤다.“일단 밥은 먹어.”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 소은지를 보며 이유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소은지는 이유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영아, 나...”“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만약 이 일이 정말 엔데스 가문과 얽혀 있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이 많아. 그리고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이유영이 겁이 나서 떠나려는 게 아니었다.그 말은 소은지에게 이유영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를 일깨워주는 말이었다.소은지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이유영이 곁에 오래 머물수록 주변의 의심은 커질 거라는 것을.그래서 이유영은 아침 식사 후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소은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유영이 곁에 있어 주길 바랐지만 동시에 오직 이 상황을 먼저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예전 청하시에서의 이유영 삶은 비록 힘들었지만 강씨 집안은 적어도 순수했다.그래서 힘들 땐 소은지를 찾아갈 수 있었고 가끔은 훌쩍 여행도 갈
“은지야...”이유영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 어떤 위로의 말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그 자식은 자격이 없어, 유영아!”엔데스 명우를 말하는 것이었다.파리에서 너무 많은 것을 봐온 소은지는 엔데스 명우는 절대 자격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이유영은 조용히 대답했다.“알아.”“하지만 현우 씨는...”소은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현우는 무고하다고, 아무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과거 그녀와 엔데스 명우 사이의 원한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우와 현우는 겉보기엔 사이가 좋았다.그러나 그녀로 인해 현우가 일에 휘말리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엔 서늘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막 시작된 일이야.”이유영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현우는 오늘 하루 사라졌을 뿐이니 벌써 이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유영아, 넌 몰라.”이유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은지가 급히 받아쳤다.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영은 잘 모르기에 긴장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소은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소은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현우의 차가 금유산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소은지는 미친 듯이 전화를 걸었고 심지어 직접 금유산까지 달려갔다.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현우가 정말 무사하다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소은지는 금유산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이유영에게 털어놓았다.이야기를 들을수록 이유영의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일 거라 생각했지만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현우의 실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불안하게 했다.“현우 씨,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어쩌면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도 있어.”어쨌든 그는 엔데스 가문의 일곱째 도련님이었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절대 감춰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소은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