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혼할 때가 되자 위자료 운운하는 것도 못마땅했다.왕숙은 강서희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계속해서 말했다.“아까 오셨을 때 비싼 차에서 내리더라고요. 저는 잘 모르지만…포르쉐면 비싼 차 아닌가요?”“포르쉐요?”강서희가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진영숙이 불쾌한 표정을 하고 왕숙에게 물었다.“걔가 포르쉐 끌고 온 거 아줌마가 직접 봤어?”“네. 상태를 보아 새것처럼 보였거든요!”진영숙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강이한이 전에 BMW를 사줬을 때도 못마땅했지만 어디 나가는데 너무 싸구려를 타고 다니면 세강의 체면을 깎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런데 또 포르쉐를 구매했다니!강서희의 얼굴에도 질투가 가득했다.딸 강서희가 몇 번이고 졸랐는데도 진영숙이 사주지 않았던 게 포르쉐였다.양녀를 귀하게 키우긴 했지만 포르쉐를 흔쾌히 사줄 정도는 아니었다.강서희는 줄곧 갖고 싶었던 차를 유영이 타고 다닌다는 말에 얼굴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진영숙이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강서희도 굳은 얼굴로 말했다.“오빠가 너무 잘해줘서 그래. 둘이 정말 이혼하는 거 맞아?”“어떻게든 하게 만들어야지!”진영숙은 말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더는 이런 애를 집안에 계속 둘 수는 없어.’한편, 어제 고배를 맛본 강이한은 회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떻게든 동교 프로젝트 주변 개발권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 시설은 다른 회사가 꽉 잡고 있었고 박연준 쪽에서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거라 그들에게 돌아올 기회는 많지 않아 보였다.내년의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고 산하의 부동산 기업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어떻게든 다른 방안을 연구해 내야 했다.어떻게 하면 손실을 메꿀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진영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차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 성격이기에 강이한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데요?”“너 걔한테 차 새로 사줬어?”진영숙이 다짜고짜 물었다.자초지종을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진영숙이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반면 강이한은 엄마랑 다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바로 전화를 끊었다.“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그는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유영 그 계집애가 포르쉐를 끌고 집에 왔다니까?’지금도 아까 했던 진영숙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그는 핸드폰을 꺼내 계좌부터 확인해 보았지만 거금이 빠진 내역은 없었다.그렇다는 건 그녀가 다른 사람의 카드로 차를 구매했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녀에게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선물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지출이면 은행에서 확인 전화가 와야 마땅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입출금 내역도 깔끔했다.카드로 산 게 아니라면 그 차는 누구의 것일까?소은지를 제외하면 유영은 청하시에 친구가 없었다.소은지 같은 직장인이 그런 호화 외제차를 구매했을 리는 없을 텐데 대체 누굴까?렌트한 것일까?아니면 해외에 있는 그 남자?점점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면서 그의 주변으로 차가운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조형욱은 상사의 호출에 긴장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섰다.“대표님.”“로열 글로벌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어?”“보고서를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조형욱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답했다.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기에 조용히 메일로 보낸 것이었다.강이한이 눈을 확 부릅뜨자 조형욱은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식은땀이 났다.강이한은 메일에 접속해서 첨부 파일을 열었다. 안에는 로열 글로벌 회장의 가족 사항이 들어 있었다.자료에 의하면 그는 아내와 사이가 꽤 돈독했으며 부인은 첫째 딸을 출산한 뒤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했다.정국진은 몸 약한 아내를 배려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회사는 점점 몸집이 커졌지만 아들은 없고 의학을 공부하는 딸 한 명이 전부였다.그는 딱히 스캔들에 휘말린 적도 없고 외부 활동에도 딱히 특별한 점이 없었다.그토록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 왜 유영과 그런 관계를 맺었는지 이해
“네, 다 확인했어요.”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승소할 수 있을까요?”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이혼 소송에서 이기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고개를 들자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저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아주 매서운 눈빛에 유영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눈빛 하나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변호사라면 믿고 일을 맡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양승호가 느긋한 말투로 말했다.“승소는 백 퍼센트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대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네요.”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유영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어낼 정도면 그는 눈치가 참 빠른 사람이었다.강이한은 청하시에서 아무도 이 사건을 맡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유영은 그의 모든 착각을 깨부술 생각이었다.생각해 보면 강이한도 참 악랄한 수단으로 소은지를 소송에서 제외했다.대체 언제부터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열하게 변했을까?유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바깥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잠시 후, 스튜디오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강이한이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조민정도 굳은 표정으로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들어가면 안 된다니까요?”조민정에게도 이 정도로 막무가내인 사람은 처음이었다.로열 글로벌에서 일할 때는 직원들 모두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민정 씨는 일단 나가봐요.”유영이 담담히 말했다.조민정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강이한은 유영과 옆에 있는 양승호를 번갈아보더니 두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반면, 유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어차피 왔으니까 소개할게. 우리 이혼 소송을 맡아주실 양 변호사님이야.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양 변호사님 통해서 입장을 전달하면 돼.”‘또 이혼 얘기야?’강이한은 치가 떨렸다.어느 정도 압박을 가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지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그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어디 로펌이지?
안 그래도 화가 났던 강이한은 그 말을 듣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폭력?그게 그렇게 심각할 정도였나?“내가 왜 손찌검까지 했는지 정말 몰라?”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유영은 날이 선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받아쳤다.“매번 한지음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신은 나한테 폭력을 썼어. 이유가 뭐였는지 그게 중요해?”무슨 이유였든 폭력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일반인도 다 아는 논리를 그는 왜 자꾸 무시하는 걸까?유영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서류를 검토했다.진지한 모습이 평소의 그의 모습과 아주 흡사했다.강이한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양승호가 앉았던 의자를 가져다가 앉았다.“일단 그 서류 내려놓고 얘기 좀 해!”그는 더 이상 그녀의 무시를 견디기 어려웠다.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와 함께한 10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직장 일을 해본 적 없었다.대체 뭐가 그녀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을까?유영은 마지막 서류에 사인한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용건이 더 남았어?”“내일 있을 할머니 칠순잔치에 나랑 같이 가.”“오늘 아니었어?”“내일이야!”날짜까지 착각한 유영을 보고 강이한은 더 큰 짜증이 몰려왔다.하지만 그 자신조차도 전에는 날짜를 헷갈린 적이 많았기에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유영이 말했다.“봐서 알겠지만 나 요즘 굉장히 바빠.”강이한의 옆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유영의 일 처리 방식은 그를 많이 닮았다.과거 강이한이 바쁠 때 모든 일에서 예민하게 굴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그러했다.하지만 강이한은 그녀가 이 자리에 앉기까지 그 남자에게서 받은 지원을 생각하면 다시 화가 치밀었다.“그 사람이 당신을 정말 예뻐하나 봐. 그 사람은 당신 결혼한 유부녀인 거 몰라?”그 남자 얘기만 나오면 그는 화가 났다.유영이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 남자가 유영에게 잘해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믿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다른 남자에게서 그 수많은 것들을 받은 주제에 이 여자는 뭐가 잘났다고 아직도 이렇게 당당한 걸까?유영은 들고 있던 펜으로 책상을 내려찍었다.“내일 칠순잔치에 안 갈 거야. 아직 시간 있을 때 다른 파트너 알아봐. 한지음이 적당하겠네.”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유영의 눈빛도 차갑게 식었다.시력을 잃었다는 것마저 가짜였는데 강이한은 끝까지 그녀를 믿었다. 오히려 그녀의 추악한 본모습을 까발리려는 유영에게 폭력까지 썼다.한지음 얘기가 나오자 강이한의 얼굴도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둘 사이에 언제부터 이렇게 간극이 심하게 벌어졌는지 하나하나 따지려니 끝이 없었다.그녀를 빤히 노려보던 강이한이 말했다.“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본가에 가는 거야.”경고와 협박이 담긴 명령이었지만 유영은 더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여론전은 계속되고 있었다.유영에 대한 온갖 비난글이 인터넷에 폭주했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그녀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글도 보이긴 했지만 곧 수많은 악플 공격을 받고 사라졌다.퇴근하려고 밖에 나가자 정국진이 보낸 경호원이 바깥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유영을 취재한다고 찾아왔던 기자들도 전부 그들이 처리했다.한편, 청하병원.강서희는 틈만 나면 한지음의 병실로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유영을 빨리 이 집에서 내쫓을지 의논했다.TV를 틀자 기자들에게 포위된 유영이 묵묵히 차에 오르는 모습과 경호원이 그녀의 주변을 지키는 모습이 나왔다.강서희는 그 모습마저 불만이었다.“저런 인간을 경호하는 경호원이 다 있네.”솔직히 유영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전에는 강이한이 지켜주더니 나중에는 해외에서 만난 남자가 그녀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아직도 이혼을 안 하고 있는 걸까?생각할수록 강서희는 짜증이 치밀었다.한지음은 와인잔을 흔들며 강서희에게 질문을 던졌다.“해외에 있는 그 남자랑은 둘이 진짜 뭐가 있어?”“당연히 뭐가 있으니 저렇게까지 지원
돌변한 한지음의 표정에 강서희가 화들짝 놀랐지만 유영을 처리하겠다는 의지에 다시 표정을 수습했다.그녀는 오랜 시간 그들이 이혼할 날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더 이상 기다리기 싫었다.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그 시각, 유영은 순정동으로 돌아왔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소은지가 오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간단한 요리도 준비했다.소은지는 그녀의 강아지를 안고 순정동으로 방문했다.해외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것들 중에 반려견도 포함되어 있었다.소은지는 강아지를 안은 채 유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전에는 네 외삼촌이 그냥 벼락부자인 줄 알았는데….”지금은 정국진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뀐 순간이었다.포르쉐만 해도 조카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순정동을 방문하자 이런 멋진 삼촌이 다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이런 외삼촌이라면 트럭으로 가져다 줘도 환영할 것 같았다.유영은 강아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뭉치 이리 와.”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뭉치와 보낸 시간은 참 힐링되는 시간이었다.뭉치는 소은지네 집에서 대접 받고 지냈는지 전보다 무게가 더 나가는 것 같았다.소은지가 물었다.“외삼촌 결혼하셨어?”“그건 왜?”“아니, 결혼 안 하셨으면 나는 어떠냐 해서.”소은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항상 차분하고 냉정함을 않는 친구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면 정국진이 얼마나 유영을 총애하는지 알 수 있었다.유영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친구를 흘기며 답했다.“외숙모 건재하시거든? 안 그래도 외삼촌 때문에 강이한이 아버지 뻘 되는 남자 만난다고 나 엄청 욕했단 말이야.”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면 강이한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하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냥 강이한이 멍청한 것 같기도 했다.소은지도 비슷한 상상을 했는지 유영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강이한 그 자식, 그분이 네 외삼촌인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난 전혀 궁
해외에 거주하는 3개월 동안은 유영에게 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친절하고 자상한 외숙모와 외삼촌의 사랑, 그리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좋은 건 다 그녀에게 챙겨주던 동생까지.그들은 이산가족을 맞는 심정으로 유영을 품어주었다.강이한과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지만 사실 마음은 계속해서 피폐해져 간 것 같았다.“은지야.”“응?”“난 한지음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야.”유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그녀를 악역으로 몰아가고 현재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압력을 가하는 존재들에게 이제는 반격을 해줄 시간이었다.전에는 박연준이 준 과제 때문에 시간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진짜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난 널 응원할게.”소은지가 말했다.세강 일가의 핍박을 오랜 시간 받아왔으니 이제 돌려줄 때도 되었다.그녀에게 해를 가한 자들은 아직도 유영을 만만하게 보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들에게 정국진과의 관계를 숨긴 건 태도가 급변하는 그들의 추악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그렇다고 괴롭힘을 당하고도 반격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유영은 조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오전에 기자회견을 열 생각이니까 준비해 주세요.”“알겠습니다.”오늘 아침까지 그냥 무시하겠다던 유영이 갑자기 정면에 나선 것이 의아했지만 조민정은 그녀의 말을 따라주기로 했다.어차피 이대로 공격이 계속되면 그냥 무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유영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강이한도 고역을 겪고 있었다.조형욱이 정국진 아내에게 보낸 문자는 바로 답장이 왔다.답장은 아주 간결했다.[남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하세요.]문자를 확인한 강이한은 또 깊은 분노를 삼켜야 했다.그는 상처를 입은 맹수처럼 온갖 곳에서 짜증을 드러냈다.“대체 뭐 하는 여자길래 이렇게 차분해? 남편한테 마음이 없는 거야?”조형욱은 난감한 얼굴로 코끝을 매만졌다.“아마 이 일을 크게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네요.”조형욱
그 시각, 유영은 소은지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소은지가 말했다.“살면서 이런 진수성찬은 처음 먹어 봐. 너희 외삼촌, 입맛도 꽤 까다로운가 봐?”입맛이 까다로운 주인을 모시고 사는 주방장만 만들어낼 수 있는 풍미였다.유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외삼촌이 모든 면에서 좀 까다롭긴 하지.”매번 정국진과 함께 외식을 나갈 때면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기 드물었다.“부럽다. 넌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잖아. 내가 너희 집에서 같이 살면 아마 한 달에 10킬로는 찔 것 같아.”소은지는 키가 컸지만 먹는 대로 살이 찌는 체질이었다.반면 유영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었다.그녀의 외모는 10년 전과 비교해도 전혀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동안이었다.“그렇긴 하지만 나도 고민 정도는 있어. 잘 챙겨 먹느라고 해도 머리가 자꾸 빠져. 이러다 탈모 오는 거 아닌지 몰라.”아마 머리카락이 자꾸 빠지는 이유는 세강 일가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었다.“괜찮아. 넌 원래 머리숱이 많잖아. 좀 빠져도 돼.”소은지가 말했다.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데 핸드폰이 울렸다.낯선 번호인 것을 확인한 유영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영 씨, 맞죠?”수화기 너머로 유경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목소리를 알아들은 유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무슨 일이시죠?”유영이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강이한과 살면서 그와 관련된 스캔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대놓고 집까지 찾아온 여자는 유경원이 유일했다.지난 생에서는 나타나지도 않았던 인물이었다.조민정에게 부탁해서 알아봤더니 진영숙이 왜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훌륭한 가정 환경에서 사랑 받고 자란 공주님, 그게 유경원이었다.“내일 이한 씨가 본가로 같이 가자고 할지 모르는데 가지 마세요.”온화한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지만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말투였다.유영은 순간적으로 분노를 느꼈다.아직 공식적으로 이혼한 것도 아닌데 이젠 별별 사람들이 다
서재에서 정국진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다 멈칫했다.“아빠?”“아니야, 가서 쉬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정국진의 눈에 스친 망설임을 이유영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파리와 서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했으니까.고개를 끄덕이며 이유영이 말했다.“그럼 전 방으로 돌아갈게요.”“응.”이유영이 서재를 나서자 정국진만 남은 공간에는 복잡한 기운이 감돌았다.서주에서 박연준이 돌아왔다.그리고 강이한은...정국진은 사람을 보내 그의 행방을 찾으려 했지만 강이한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그는 떠날 때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췄다. 마치 세상에서 존재조차 지워버린 듯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수술 후에는 이유영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이유영을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얼마나 깊은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방으로 돌아오자, 유 아주머니와 월이가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이유영을 보자 바비 인형을 월이에게 건네며 공손히 말했다.“아가씨.”“네.”“잠시만요.”이유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유 아주머니를 향해 물었다.“그 사람, 몇 번이나 왔어요?”강이한을 물어보고 있었다.이제는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정씨 가문 사람들은 이유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유 아주머니는 조용히 대답했다.“두 번 왔어요.”두 번.즉, 우천시에서 돌아온 후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이유영은 강이한이 아이를 보러 왔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다.그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만약 그가 아이가 자신의 혈육이라는 걸 알고도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이 세상에 그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일단 나가보세요.”“네, 아가씨.”유 아주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이유영은 조용히 월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임소미는 이유영을 꼭 끌어안으며 마치 텅 비었던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유영이 돌아오기 전, 임소미는 이미 그녀의 시력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여진우가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수술 전까지 모두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만큼, 그 소식은 임소미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엄마, 숨 막혀요.”이유영이 투덜거렸다.“얘가...”임소미는 그녀를 품 안에서 놔줬지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작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었다.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는 순간, 임소미의 가슴은 다시 먹먹해졌다.지난 2년 동안, 이유영의 눈에 드리워진 어둠을 바라보며 마지막에 결국 텅 빈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임소미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두려웠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정말 볼 수 있는 거 맞지?”이렇게 맑은 눈동자를 보고도 여전히 불안했던 임소미는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정말 볼 수 있어요. 엄마, 오늘 검은색 원피스 입으셨네요.”“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이유영이 옷 색깔을 정확히 맞추자 임소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국진도 그 말을 듣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됐어, 보이면 됐어.”“아빠.”“밥 먹자.”이것이 바로 가족이었다.언제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이 기다리고 있는 곳.여진우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따뜻함을.정국진과 임소미 앞에서 그도 편안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참 좋았다.재벌 가문에서 이렇게 화목한 가족 분위기를 가진 곳은 드물었다. 그들은 보기 드문 조화를 이루며 서로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식탁에는 여진우가 좋아하는 음식과 함께 이유영을 위해 준비된 담백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고 이유영은 기꺼이 그 음식을 받아들였다.“엄마, 저거 먹고 싶어요.”월이는 이유영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사실,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이유영이 강이한을 만나기 전, 비록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순수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을 앗아갔다. 계산해 보면 그는 이유영을 2년 동안 지켜왔고 5년을 연애했으며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다.이유영은 그 감정이 진짜라고 믿었고 온 마음을 다해 화답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거짓이었다.강이한도, 박연준도 모두 거짓이었다.강이한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끝없는 사랑을 선물했지만 박연준은 그녀가 가장 힘들 때 가장 큰 보호를 제공했다.한 명은 사랑을 주었지만 보호는 없었고 다른 한 명은 보호를 제공했지만 사랑은 없었다.둘 중 누구든, 이유영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었다.“알겠어요.”배준석이 씁쓸하게 말했다.이유영은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예요.”“...”“하지만 그들은 저에게...”이유영은 말을 멈췄다.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냥 보내주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끝내 이유영을 놓아주지 않았다.“배준석 씨.”“네?”“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생사의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지만 얻을 수 없는 사랑이에요.”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유영은 어땠을까?그녀가 손에 쥔 모든 것은 원래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그것은 사랑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그는 이유영 씨에게 진심이었어요.”배준석이 이유영이 영원히 용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러나 이유영은 비웃음만 나왔다.진심이라고?그 말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진심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가 누구에게 끝까지 진심일 수 있을까? 마음을 다한 사람이 결국 가장 큰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과거의 자신이 너무 진심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순간, 배준석은 확신했다.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을 영원히 용서하
여진우는 이유영과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배준석이었다.청하시에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에서의 배준석은 마치 햇살처럼 밝은 청년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그는 끝없는 광기와 붕괴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때의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들에게 가차 없이 상처를 입혔다.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미친개처럼 사람만 보면 물어뜯으려 했고 특히 이유영에게는 더욱 그랬다.지금도 이유영은 그날 밤 순정동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배준석은 조형욱과 함께 이유영의 집으로 찾아와 뱃속 아이를 없애려 했다.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배준석은 마치 숱한 풍파를 겪고 난 후의 고요함처럼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져 있었다.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는 씁쓸함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여진우는 지쳐 있었다.오랜 시간 이유영의 곁을 밤낮으로 지켰던 탓에 그녀가 건강을 회복하자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배준석은 잔에 따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이유영을 바라보았다.“정말 그렇게 미워요?”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요즘 이유영 앞에서 강이한과 박연준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그녀는 비교적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하지만 배준석이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유영은 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진정하려 애썼다. 요즘 그녀는 금식 중이었다. 예전에는 죽을 먹으며 다른 음식을 달라고 떼를 썼지만 다시 볼 수 있게 된 후 시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는 눈을 위해서라면 한 달 금식은 물론, 1년, 2년도 감수할 수 있었다.술은 절대 마실 수 없었다.배준석의 질문에, 이유영은 조용히 되물었다.“준석 씨는 누구를 미워해요?”이유영은 생각했다.배준석이 자신을 위해 수술을 집도하고 평생을 바친 연구로 성공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에 약혼녀를 해쳤던 진짜 범인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배준석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이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여전히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 희미했다.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마침내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눈앞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이유영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모두가 긴장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지와 우현은 작은 손을 꼭 잡은 채,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려는 듯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두 아이는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지. 만약 그녀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터였다.“이유영 씨.”“보여요.”배준석은 이유영에게 복수하지 않았다.그 사실을 깨닫자, 이유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배준석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온몸이 긴장했고 심지어 공포감에 휩싸였었다.의사는 평소 만날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절대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는 존재다. 환자가 되는 순간, 결국 그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유영아.”여진우는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이유영은 여진우의 온몸이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제는 익숙했다.그래서 여진우가 자신을 안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온기를 느끼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하지만 이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감각에만 의존했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정말 보여?”여진우는 그녀를 품에서 놔주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보여.”진짜였다. 정말 볼 수 있었다.여진우는 장난스럽게 물었다.“내가 무슨 색 옷을 입었는지 보여? ““파란색.”“...”“됐어. 너 수염 난 것도 다 보여.”태연한 이유영의 말에, 여진우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오늘 아침 면도를 깜빡했는데 그녀가 단번에 알아챈 것이다.두 사람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고 병실 안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수술은 성공했다.붕대를 풀고 눈
그 순간, 이유영과 여진우의 숨이 가빠졌다.이유영은 눈을 감은 채,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마지막 순간이었다.이제 눈을 뜨는 순간,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이 앞으로 남은 삶 동안 마주해야 할 현실이 될 터였다.“눈 떠보세요!”의사의 목소리가 한층 강해졌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그 목소리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배준석이었다.강이한과 싸운 뒤, 완전히 사라졌던 그 사람.그가 여기에 있다고?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유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때, 여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준석아, 너 때문에 유영이가 놀랐잖아.”배준석의 묵직한 목소리보다 여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병실에 울리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여진우가 배준석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자, 이유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려 했다.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눈을 뜰 수가 없어.”병실은 고요해졌다.그때, 차가운 손끝이 피부를 스쳤다. 배준석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냈다.보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이유영은 자신의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바로 배준석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믿을 수 없었다.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왜냐하면 배준석이 바로 한지음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였다.그때 청하시는 얼마나 혼란스러웠던가.왜 강이한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받아들이라고 했을까?어떻게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이유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유영 씨.”배준석이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제 기억 속의 이유영 씨는 나약한 주부가 아니었어요.”그 한마디에, 이유영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그렇다. 그녀는 한때 평범한 주부였다.그런
여진우는 조용히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매일 의사가 소독하면서 검사도 하고 있는데 아무 문제 없대요.”적어도 현재로서는 의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그래도 걱정돼.”임소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눈에 문제가 생기면 보통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큰 문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무엇보다도 아무 일 없이 잘 회복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내일까지 아무 문제 없으면 집으로 돌아올 거지?”“네.”“그러면 됐어. 맛있는 음식 준비해 둘게.”임소미는 여진우와 이유영이 수술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말에, 여진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좋아.”임소미도 부드럽게 대답했다.그 따뜻한 목소리에 여진우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동시에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전화를 끊고 그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엄마한테서 온 전화야?”“응, 맛있는 음식 준비해 줄 거래.”여진우가 웃으며 말했지만 이유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임소미가 해주는 음식을 떠올리자 이유영의 마음에 갑자기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그래?”“엄마를 외숙모로 알고 있을 때부터 나한테 정말 잘해줬어.”이유영은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사람은 복을 쌓으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그때 임소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유영을 친딸처럼 아껴주었다.여진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말했다.“좋은 사람이야.”“응.”이유영도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임소미는 좋은 사람이었다.강이한이 임소미 앞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던 건, 그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강이한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내일 붕대를 풀 거야. 무서워?”여진우가 이유영의 손을 가만히 잡으며 물었다.이유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무서워. 당연히 무섭지.”이유영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예전에도 한지음도 같은 수술을 받았지만 실패했었다.수술이란 절대 백 퍼센트 성공
그 남자는 박연준이었다.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그가 왜 그 시점에 우천시에서 그녀와 혼인 신고를 했는지.하지만 박연준의 그 호의를 이유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다정함 뒤에는 강이한처럼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호의가 단순한 호의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박연준과 떨어져 있는 게 좋겠어.”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여진우가 가만히 웃었다.그의 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지만 동시에 짙은 걱정도 비쳤다.여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유영이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고 있다는걸.강이한과 박연준을 겪은 후, 그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고 누군가가 다가와 호의를 베풀면 그 안에 반드시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기에, 여진우는 강이한이 떠나면서 박연준을 그녀 곁에 남겨둔 이유를 깨달았다. 이유영와 박연준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애초에 박연준 말고는 이유영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미래에 아무리 진심으로 이유영을 대하는 사람을 만나도 이유영은 똑같이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점심시간이야?”이유영이 물었다.수술을 받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감당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전에 우천시나 모이산에 있을 때, 주변의 기운만으로도 밤과 낮을 가늠할 수 있었다.심지어 조명의 밝기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그녀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소독약 냄새였다.그것은 불쾌하게 모든 감각을 방해했다.게다가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후로는 계속 죽만 먹었으니 음식으로 시간을 가늠하는 것도 힘들었다.여진우가 답했다.“점심이야.”“저녁에는 다른 걸 먹을 수 있을까?”죽만 먹은 지 너무 오래되었고 입안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이유영이 투덜거렸다.여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
정국진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유영이는 곧 돌아올 거예요. 현우가 수술이 성공했다고 했어요.”그제야 임소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대답했다.“네.”“여보!”“네?”임소미는 강이한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제 제대로 알게 됐겠지?”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냉소가 서려 있었다.“이유영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줬는지...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알겠지.”특히 월이가 강이한을 바라보던 눈빛.그 순간, 강이한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임소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아이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깊은 경계심을 읽어냈을 때,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강이한은 이유영에게 안겨준 그 모든 고통을, 이번에 뼈저리게 맛보았을 것이다.그러나 정국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래서 기뻐요?”기쁘냐고?과거에 이유영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알았을 때 그녀는 강이한을 찢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었다.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오고 나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찌르듯이 아팠다.사람이란 원래 그런 존재다.임소미는 작게 숨을 들이쉬며 애써 담담한 척했다.“기쁘든 기쁘지 않든, 그와 유영이가 여기까지 온 것도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어요.”이런 끝을 맞이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최선의 결말일지도 모른다.정국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네.”더 이상 미련을 남긴 채 있어 봤자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만 남을 뿐이었다.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결국 서로를 위해서도 나은 일일 터였다.임소미는 여전히 무언가 곱씹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그래도 믿기지 않아요. 강이한이 이유영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는 사실을요. 모든 걸 박연준에게 내어주고, 서주 전체까지 내려놨어요.”남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망설일 것도 없이 권력과 지위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