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저랑 같이 좀 먹을래요?”“전 유영이랑 이미 먹었어요.”“조금만 더 먹어요.”현우는 혼자 밥을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다.소은지는 마지못해 현우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에서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송연미는 현우가 소은지와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마치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혼란스러웠다.그는 완전히 변해버렸다.누구에게나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유독 송연미에게만큼은 냉담했다. 이번에 돌아온 현우는 마치 과거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그 생각에 가슴이 더 답답해졌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정이 온몸을 짓눌렀다.송연미는 항상 현우를 기다려왔다. 엔데스 운빈과 결혼한 지난 세월 동안에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에 와서 그 기다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송연미는 여전히 비바람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점점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결국 그녀는 비바람 속으로 쓰러졌다.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왜, 왜 이렇게 된 거야?’한편, 현우와 소은지는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송연미가 밖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야 소은지는 그녀가 이곳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현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소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눈살을 찌푸렸다....다른 한편.이유영이 반산월을 나와 백산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신지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수화기 너머로 신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이한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서주가 완전히 뒤집혔어요. 정말로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겨주고 떠났어요. 유영 씨가 말한 것처럼 별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아요.”이유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조금 전, 반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마치 예전에 한지음을 위해서라면 이유영의 각막을 빼앗으려 했던 것처럼.하지만 나중에 강이한은 말했다.그건 정말로 그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사실, 이유영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진심이었다.나중에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걸, 이유영은 확신하고 있었다.강이한이 나중에 무슨 변명을 했든 그런 것들은 이유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때, 전화 너머로 신지수가 말했다.“지금 그 아이뿐만이 아니에요. 강이한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서주에서 사라졌어요.”이유영은 순간 멈칫하며 물었다.“모두요?”“네. 제가 말했잖아요. 강이한이 모든 걸 박연준에게 넘기고 떠났다고.”그렇다면 강이한은 서주에서 완전히 손을 뗀 걸까?왜?박연준이 우천시에 왔을 때, 강이한은 떠났다.그때, 이유영은 강이한과 박연준이 무슨 거래를 했을 것이고 강이한은 그 대가로 무언가를 얻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박연준이 전기봉에 대한 정보를 강이한에게 넘겨줬고 그래서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것이라고 추측했었다.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우천시를 떠나고 그는 서주로 돌아왔지만, 그 이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도 알 수 없었다.지금 보니, 강이한이 우천시를 떠난 이유는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박연준이 정보를 제공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던 걸까?그 순간, 이유영의 머릿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이론적으로 강이한은 우천시를 떠난 후 서주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야 했다.그런데 왜, 그는 박연준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떠난 걸까?이유영은 돌아오는 길에 여진우에게 박연준이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박연준은 서주에 있어요?”“강이한이 모든 걸 맡겼는데, 당연히 서주에 있죠.”신지
무슨 일이 있었냐는 이유영의 질문에 신지수가 짧게 대답했다.“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강이한 씨가 우천시에서 돌아온 이후로, 박연준 씨에게 많은 것을 넘기기 시작했어요.”우천시에서 돌아온 뒤부터 박연준에게 넘기기 시작했다?그렇다면 그들의 거래는 대체 뭐였을까?이유영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겠습니다.”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이미 지나간 일인데,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유영에게 강이한과 박연준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자꾸 과거 일에 읽히는 이유가 너무 편하게 살아와서일까?“네.”신지수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고 통화가 끝났다.하지만 이유영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전기봉의 정보 때문에 우천시를 떠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떠났을까?그리고 서주로 돌아와서는, 왜 또...신지수의 말을 곱씹으면서 이유영은 박연준과 강이한 사이에 뭔가 큰 음모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쩌면 정말로 음모일지도 모른다.어쨌든, 그 두 사람은 연서를 위해 오랫동안 계략을 꾸며왔다.이번에 이렇게 큰 움직임을 보인 것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쾅!”“끼익!”갑작스러운 충격과 함께 차가 급정거했다.다른 차를 들이받고 만 것이다. 문이 열리고, 벤츠 지바겐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차 문이 열리고 다시 닫기는 순간, 이유영은 잠깐 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 엔데스 신우를 본 것 같았다.‘아니, 그럴 리가 없어.’엔데스 신우에게서 저렇게 차가운 기운이 느껴질 리가 없었다. 방금, 그 남자의 윤곽이 주는 냉랭한 분위기를 똑똑히 보았다.엔데스 가문의 셋째 아들은 바보라는 소문이 돌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분명 착각이겠지.’그저 우연히 한 번 본 얼굴이니 순간적인 오해였을 것이다.‘그래, 분명 착각일 거야.’바보라고 불리는 그가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면 설마 그 소문들이 모두 가짜란 말인가?.
엔데스 가문의 일은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유영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역시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야.”“당연하지.”임소미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면서도 눈길만큼은 한없이 따뜻했다.하지만 연애 문제만 떠올리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둘은 서주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이유영이 강이한을 향해 품고 있는 증오를 떠올리면, 서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유영도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임소미는 생각했다.그렇기에 임소미는 더욱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월이한테 가볼게.”이유영이 말하자, 임소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이유영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임소미는 혼자 남아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휴...”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 대해 도저히 어떻게 설명해야 몰라 답답한 심정만 내비쳤다.지금 이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이유영이 방으로 들어오자 월이는 젖병을 문 채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졸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유영은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곁에 있는 월이의 모습을 보니 더없이 마음이 말랑해졌다.“졸려?”“응, 엄마랑 같이 잘래.”“그래, 옷 갈아입고 올게.”이유영은 옷장으로 가서 잠옷을 꺼내 입었다.방에서 나오니 월이는 이미 스르르 잠들어 있었다. 늘 그렇듯, 이유영이 곁에 있으면 유난히 잠드는 속도가 빨랐다.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눈빛이 부드러워진 이유영은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가 월이를 품에 안았다.그 순간,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내 사랑...”속삭이듯 말하며 품 안의 작은 체온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월이는 이유영의 품에 파묻힌 채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그의 고른 숨소리를 듣던 이유영은 문득 깨달았다.월이의 작은 코가 유난히 그 사람을 닮았다.이제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강이한은 ‘그 사
이유영은 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살아왔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묻지 않았다.그때 이유영이 무슨 계획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시절이었다.여진우의 물음은 곧 이유영이 이제 완전히 회복했다는 뜻이었다.“회사에 나가서 일해야지. 근데 난 더 이상 경영은 하고 싶지 않아.”그 말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과거, 여진우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로열 글로벌의 모든 무게가 이유영의 어깨를 짓눌렀다.특히 그때는, 정유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결국 모든 책임을 떠안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오빠가 있고 그 덕에 선택지도 훨씬 많아졌기에 더 이상 예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뭔가 하긴 해야지.”여진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이유영은 곧장 물었다.“그럼 뭐 하면 좋을 것 같아?”“네가 하고 싶은 건?”“네 비서!”그 말에, 여진우는 멍한 표정으로 이유영을 바라봤다.그건 아무리 봐도 재능 낭비였고 아버지가 이유영을 키우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비서를 하겠다고?여진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야망이 없네.”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그 말을 들은 이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자신이 원하는 걸 할 자유도 없는 건가?사실 이유영은 높은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런 위치에 있으면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무언가를 감당해야 한다면 그럴 가치가 있을 때 해야 하는 법이다.“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몇 개 있다던데, 내가 디자인해 볼까?”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예전, 청하시에서 로열 글로벌로 정식 복귀하기 전, 오로라 스튜디오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그래서 디자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여진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사람은 무언가 할 일이 있어야
이유영은 앞에 놓인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오후에 시간 있어?”“왜?”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흰색 실내복을 입고 있었지만 온몸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엄격함은 타고난 것이었다.이유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려고.”차갑고 냉담한 음성이 떨어지자, 맞은편의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이 그의 동요를 말해주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이내 평온을 되찾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유영의 그릇에 정성스럽게 익힌 소고기를 집어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 응?”마치 말썽꾸러기 아이를 다독이듯 다정한 목소리였다.그러나 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이유영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는 걸. 마치 그때의 강이한처럼.이유영은 강이한의 세계에서 한지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을 때, 미친 듯이 이혼을 요구했었다.그때는 가진 것도 없었지만 단호하게 행동했다.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정씨 가문이 있다.이유영의 결심은 박연준에게 거대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다. 몸이 멀어지는 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지만, 마음이 멀어지면 어쩔 수 없었다.이유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박연준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너랑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박연준은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아. 난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거.”이제는 화를 내는 것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둘 사이에는 감정의 균열이 깊어져 있었다.박연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나랑 이혼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아?”과거, 강이한과 이혼하려 했을 때, 강이한은 이유영의 목을 조르며 물었다.“날 떠나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아?”전생이든 현생이든, 그 질문은 반복되었다.강이한은 처음부터 이유영이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유영은 그의 곁에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그리고 지금, 박연준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마치 이유영이 하는 모든 선택이 신중해야
정국진은 오랫동안 엔데스 가문을 피해 왔다. 하지만 피하는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엔데스 가문이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든다면 상상도 못 할 갈등이 벌어질 것이다.어떻게 분석해 봐도 지금은 이유영이 박연준과 이혼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하지만 이유영은 여전히 단호한 모습이었다.정씨 가문은 엔데스 가문과 엮이길 원치 않고 이유영과 박연준 역시 마찬가지다.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분위기에서 이유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박연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적어도 이 시기가 지나서 이혼하자, 응?”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이유영은 박연준이 말하는 '이 시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엔데스 가문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지금, 엔데스 가문의 도장은 사라졌고 전기봉도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일이 마무리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그 도장이 누구에게 발견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하지만 엔데스 가문의 당주 자리는 단순히 도장이나 문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명문가들의 지지도 필요했다.즉, 지금 이 상황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이유영은 박연준을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정씨 가문이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해?”“그럼 너는?”견뎌낼 수 있을까?이유영은 정씨 가문을 그 소용돌이에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칼과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그녀의 감정이 어떠한지 알 수 있게 되자 박연준은 웃었다.그 눈빛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그는 이미 이유영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이유는 마음을 아프게 했다.이유영은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입을 열었다.“너랑 그 사람,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야?”“누구?”뜻밖의 질문에 박연준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하다 곧 깨달았다.강이한을 말하는 것이었다.“너는 무슨 거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박연준은 되묻으며 씁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이유영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알겠어.”이유영
그가 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강이한과 이유영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어쩌면 계획했던 일인지도 몰랐다.그런데 막상 현실이 되자 숨이 막혔다.어쩌면 연서에 대한 일을 몰랐다면 좀 더 담담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강이한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라고 수없이 되뇌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달랐다.모든 것이 달랐다.“걱정하지 마. 강이한은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박연준은 이유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기색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이유영이 낮게 되물었다.“응,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확신을 담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뱉어졌다.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동시에 너무 오랫동안 얽혀 있었기에 서로의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박연준은 알고 있었다. 강이한처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절대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이유영에게 보일 리 없다는 것을.절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이유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박연준의 눈에 스치는 슬픔을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이유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식사 후.이유영이 백산 별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박연준이 입을 열었다.“사흘.”“뭐라고?”“내가 있는 사흘 동안, 너는 풍산 그룹에 머물러야 해.”이유영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이미 불쾌했던 눈빛이 그 말과 함께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엔데스 가문 사람들은 아주 민감해. 착한 사람 하나 없어. 그들이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려면 사흘 정도는 그렇게 큰 부담이 아니잖아. 아니야?”“나한테는 너랑 같이 있는 일분일초도 숨 막혀.”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고 답답했던 박연준의 가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깊이 내려앉았다.‘숨 막힌다고?’박연준은 그제가 알았다. 강이한이 말했던 '막막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어둠 속에서 힘겹게 버
이유영이 집으로 돌아온 뒤, 임소미는 사람을 시켜 조사를 시작했고 이유영이 강이한 곁에서 결코 평온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지 못했다.며칠 동안 진영숙의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목격한 뒤에야 그녀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왜 서주로 떠나서 죽음을 가장했는지를.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진영숙이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던 것이다.남편뿐만 아니라 지금 강이한의 행방조차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여자로서 그 책임은 결코 작지 않았다.임소미는 감정을 가라앉힌 후에야 이유영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진영숙이 사실은 월이를 데려가려 했다는 것을.“며칠 동안 데려가겠다고 했다고요?”“그래서 내가 화가 났던 거야.”진영숙의 행동을 보면 며칠은 말뿐인 핑계였다.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임소미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이제 아무것도 없고 오직 손녀만 남았다고? 과연 손녀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 사람인가?’이유영은 말없이 얼굴을 굳혔다.진영숙은 아이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유영아, 이번 일은 그녀에게 연민을 가질 필요 없어.”임소미의 목소리엔 단단한 결심과 냉기가 섞여 있었다.진영숙은 자신이 모든 걸 잃었기 때문에 아이라도 데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런 상실에 대해 임소미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알겠어요, 엄마. 제가 처리할게요.”이유영은 어머니를 안심시켰지만 그녀의 목소리 역시 차가웠다.“어떻게 처리할 거니?”‘어떻게 처리할까?’이유영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그녀는 당연히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임소미를 진정시킨 뒤, 이유영은 백산 별장을 나섰고 밖에선 지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아가씨.”“풍산 그룹으로 가요.”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무거웠다. 가능하다면 평생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그곳은 과거가 덕지덕지 붙은 장소였고 이유영은 그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윙윙윙.”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발신자는 박연준이었고 이유영은 망설임
이유영에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그녀는 임소미의 품에 파고들며 가느다란 팔로 어머니의 허리를 꼭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오래전 소은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강이한은 연애 상대론 괜찮지만 결혼은 다르다고.그때 변호사였던 소은지는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맞지 않는 결혼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가 강이한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소은지는 그녀를 말렸었다. 소은지는 그녀의 결혼을 말렸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결국 소은지의 말은 모두 옳았음이 증명됐다.끝났다고 믿었던 그 관계는 여전히 그녀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때, 등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앞으로는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이유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눈가에 가득 차올랐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뺨을 따라 끝없이 흘러내렸다.예전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품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두 혼자 견뎌야만 했다.임소미가 감싸안아 주자 이유영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물들어갔다.그리고 이 감정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앞으로는 아무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예요.”그녀가 말한 '아무도'는 명백히 진영숙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사람에게서 다시 이런 고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엄마가 널 지켜줄게. 꼭 지켜줄게.”임소미는 그 말을 반복하듯 속삭였다.오늘 밤, 임소미의 마음속에 일어난 파장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다.진영숙이 막말을 퍼붓고 손까지 쓰는 모습을 보며 이유영이 강씨 가문에서 겪었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를 임소미는 문득 깨달았다.사모님의 우아한 모습은 진영숙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살아야
이유영이 돌아오고 그녀는 진영숙과 임소미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두 명의 도우미가 진영숙을 붙잡아 끌어내고 있었다.임소미의 얼굴은 창백했고 가슴은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솟구쳤다.임소미는 이유영을 보자마자 재빨리 붙잡고 말했다.“너 먼저 위로 올라가.”“무슨 일이 있었어?”이유영이 물었다.정씨 가문에 돌아온 지 오래된 만큼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우아하고 온화한 사람인 만큼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임소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영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이유영, 넌 누가 너한테 눈을 기증해 줬는지 모르지? 강이한이 네게 빚을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입 다물어!”진영숙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소미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유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고 진영숙은 여전히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했지만 더는 이어가지 않았다.그녀는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이유영을 노려보았고 그 눈빛엔 전례 없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예전에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도 진영숙은 이유영을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그리고 지금, 용성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증오가 더욱 깊어진 듯했다.“유영아, 너 먼저 위로 올라가.”“엄마.”“올라가!”임소미는 이유영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격하게 소리쳤다.임소미가 이런 식으로 이유영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임소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이유영은 무언가 더 묻고 싶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말문이 막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그 순간, 진영숙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도우미들의 손을 뿌리치고 이유영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이유영, 강이한은 너에게 빚진 게 없어. 강이한은 오히려 너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너야말로 가장 잔인한 사람이야. 네 눈조차..
임소미는 혈압이 치솟았고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내 말이 틀렸나요?”“틀렸냐고?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은 있고? 당신만 제대로 된 선택을 했더라면 유영이와 강이한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임소미는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격렬히 외쳤다.진영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임소미의 말이 맞았다. 진영숙은 두 사람 관계에서 많은 잘못을 했다.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강이한은 사라졌고 강서희도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월이 뿐이었다.오늘 이곳에 와서 월이를 보게 된 순간, 월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자리 잡았다.“사람 불러!”임소미가 크게 외치자 집사들과 도우미들이 급히 달려왔다.“이 여자를 당장 내쫓아!”“당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뭐라고?”임소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이 여자는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걸까?’조금 전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아이에게 조금의 정이라도 남아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모든 것은 착각에 불과했다.결국 그녀는 후회라는 감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진영숙이 오늘 여기 온 것도, 월이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것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한 마지막 발악이었다.그녀의 말은 그저 그럴싸한 포장일 뿐 사실은 월이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리고 뻔뻔하게도 무례하기까지 했다.진영숙은 임소미의 눈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매서운 날카로움뿐이었다.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우리 아들이 왜 서주를 떠났는지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임소미, 당신들은 정말 단 한치의 양심 가책도 못 느꼈어?”왜 강이한이 서주를 떠났는지 시간대와 상황을 조합해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특히 떠나기 전, 시윤이 건넨 말이 결정적이었다. 이유영이 용성시에서 수술을 받았던 그 시기에 강이한은 서주에
강이한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절망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수술을 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한때 이유영이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무력했는지를 그는 이제서야 조금씩 체감하고 있었다....파리에서 진영숙은 다시 백산 별장을 찾았다. 여전히 강이한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시윤은 강이한이 이정과 신시욱을 데리고 떠났다고 말했다.그 두 사람의 능력을 생각하면 강이한이 스스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진영숙은 어머니로서 절망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를 수소문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정말이지, 당신은...”백산 별정까지 찾아온 진영숙의 뻔뻔함에 임소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굳은 표정으로 응수했다.진영숙은 한때 유능한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감히 저런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대우였다.“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 좀 봐주세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고통이 서려 있었다.그렇다. 지금의 진영숙에겐 주변에 기댈 친척도 함께할 가족도 없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손녀인 월이 뿐이었다.오늘도 그녀는 월이를 위해 여러 장난감을 준비해 왔지만 임소미는 그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만 느껴졌다.“당신도 어머니였잖아요. 제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알잖아요.”임소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봐준다고? 당신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이유영이 강이한과 결혼했을 때, 진영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뱃속의 아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이토록 헌신적인 할머니 행세를 하니 임소미는 화가 났다.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극으로밖에 안 보였다.진영숙의 눈엔 고통이 어렸다.“저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임소미의 말에 그녀는 도무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무리 자존심 강한 진영숙이라 해도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과거
그녀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강이한을 떠난 뒤 어둠 속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있었다.신시욱과 이정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침묵에 잠겼다. 그 질문은 그들 사이에서도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이유영이 그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사실 그들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건 그녀가 깊은 괴로움 속에 잠겨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리고 그녀가 괴로워할수록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의 고독이 얼마나 잔혹한 감정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그녀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은 어쩌면 그때의 이유영보다 더한 심연 속에서 절망을 겪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위해 같은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선생님. 각막 이식 수술 관련 소식이 들어왔습니다.”신시욱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천시에 머무는 동안, 신시욱과 이정은 한 번도 수술 신청을 멈춘 적이 없었다.그들은 강이한을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유영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도 절대 강행하지 않았다.이유영이 시력을 잃었을 때, 그녀는 가족들이 몰래 준비했던 이식 수술조차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었다.그리고 지금의 강이한도 마찬가지였다.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 앞에서 강이한은 조용히 거절했다.“필요 없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두 사람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필요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선생님.”신시욱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더욱 떨려왔다.그 어떤 강인한 남자라고 해도 이 순간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떨림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최근 며칠간 그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두 사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강이한은 자신을 벌하며 살고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정말 이미 충분했다.‘받아야 할 벌은 다 받았는데 왜 여전히 자신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어둠 속에서 지낸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어둠 속에서 사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새들의 지저귐이 더 또렷하게 들리고 사소한 바람 소리 하나에도 감각이 예민해졌다.강이한은 우천시에 있는 주택 마당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천시에 오늘같이 이렇게 따스한 햇살이 비추던 때가 언제였던가?이정이 조심스레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햇살은 있어도 아직은 쌀쌀하네요.”말은 없었지만 강이한은 이정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로 그가 신시욱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그때의 이유영도 지금처럼 감각이 예민했을까?“이정.”“네.”“유영이는 이 마당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보지 못했겠지?”“네.” 이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유영은 이곳에서 몇 개월을 머물렀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마당은 끝내 그녀에게 낯선 곳으로 남게 되었다.지금 그녀를 우천시로 다시 데려온다 한들 스스로 길을 찾아올 수도 없을 것이다.강이한은 낮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유영이는 이 마당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었어.”그렇다. 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감각으로 모든 것을 구분했다. 마치 지금의 강이한처럼.이정이 조심스레 물었다.“이럴 가치가 있었습니까?”그가 이곳에 온 이후, 누군가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가치가 있었는지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유영에게 진 빚은 결코 눈 한 쌍으로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예전에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던 이유영의 손짓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 자신이 어둠 속에서 겪고 있는 공포는 당시 그녀가 느낀 감정에 닿을 수조차 없었다.점심 식사 시간.“쨍그랑.”강이한이 손을 뻗는 순간, 접시와 그릇이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기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유영은 자신의 몸에 강이한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남은 인생에서도 강이한과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얽히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월이의 일로 인해 그녀는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었고 강이한을 평생 용서할 수 없었다.그런 사람의 눈을 자신이 기증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리고 강이한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수술 전에 모든 철수 준비를 마친 것이고 이유영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이미 많은 상처를 준 이후, 아무리 많은 것을 베푼다 해도 이유영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자신과 이유영 사이에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과감하게 그녀의 손을 놓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빚진 것이 없게 되는 걸까?’하지만 단순히 눈을 기증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유영아, 왜 강이한에 관해 묻는 거야? 혹시...”소은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국 그녀는 언제나 이유영 편이었다.특히 수술 전, 마지막으로 강이한을 마주했을 때 그가 남긴 말을 들은 후로 그녀조차도 강이한을 용서할 수 없다고 느꼈다.“나랑 장난해?”소은지의 말에 이유영의 표정은 단숨에 싸늘해졌다.그 차가운 기색을 확인한 소은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렇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소은지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냥 권력에 그토록 집착했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서주를 내려놓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음모일지도 모르지.”소은지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화제를 서둘러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했다.“...”‘음모’라는 단어에 이유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소은지는 그녀의 웃음을 보고 또 한 번 안도했다.“ 월이 보러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뭐라고 했는데?”“일어날 일은 언제든지 다시
강이한은 서주에서의 모든 일을 철수하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하던 사람들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유영은 그저 강이한의 또 다른 속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강이한과 박연준, 두 사람은 누군가를 철저하게 속이는 데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박연준은 진짜로 서주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고 진영숙은 파리에서 집요하게 강이한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걸 보며 이유영은 강이한이 정말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무슨 생각해?”반산월에서 소은지는 이유영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이유영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은지야.”“응?”“어떻게 된 거라고 생각해?”서주의 현 상황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이유영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졌다.강이한은 정말 그의 사람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듯했다.권력을 중시하던 인물이었기에 은둔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강이한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조용히 지낼 성격이 아니었다.“뭐라고?”소은지는 이유영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되물었다.이유영은 소은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강이한이... 정말 사라졌어.”“그래. 그 얘기 예전에도 했었잖아.”이유영이 이제서야 이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소은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예전엔 믿지 않았던 이유영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강이한의 실종을 인정하고 있었다.강이한과 박연준은 이유영의 마음속에서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연서의 사건이 터진 이후, 그녀는 두 사람을 음모로 가득 찬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 강이한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이유영은 그것을 단순한 음모의 연장이라 여겼다.두 사람은 늘 서로 무관한 척 행동했지만 그 뒤에는 누구도 상상 못 할 거대한 연관성이 있었던 것이다.신지수는 여러 번 전화를 걸어왔다.강이한이 서주를 떠난 후, 신씨 가문도 연쇄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그녀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