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진이 물었을 때 소만리는 이미 답을 예상한 듯했다.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로 간호사가 대답했다. "네? 폐암 이요? 정신적인 문제 말고 몸은 건강한데 무슨 폐암에 걸려요?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정적이 흐르고, 소만리는 순간 몸이 굳었다.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간호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시윤 할아버지 저번에 한 번 없어진 적은 있었어요, 근데 손녀가 숨바꼭질 하자고 숨으라고 했다고 그랬어요.”여기까지 듣자 소만리는 이미 다 알아차렸다.외할아버지는 폐암에 걸리지도 않았고, 납치된 적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소만영이 꾸민 짓이었다."만리야, 이제야 알겠다. 네가 외할아버지를 일부러 숨기고 또 내가 납치했다고 모함했구나.”소만영은 선수 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만리야, 너 도대체 나에게 왜 그래, 난 너를 내 친동생으로 여기는데, 네가 어떻게 이런 짓으로 나를 모함할 수 있어, 네가 정말 그렇게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할아버지 목숨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지.”"왜 그러겠어! 모진이가 너를 미워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지!" 전예는 소만영과 같이 거짓 연기를 했다. "소만리 너 정말 가증스럽구나! 우리 소 씨네 집에서 대학까지 보내주면서 키워줬더니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어? 만영이 남자친구를 뺏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악랄한 짓까지 해? 넌 정말 사람도 아니야!”두 모녀가 번갈아 가며 소만리에게 죄를 뒤집어 씌었다.소만리는 갑자기 무력감을 느꼈고,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다 소만영이 꾸민 음모였다. 소만리는 기모진이 자신의 변명을 믿지 않는 걸 알면서도 기모진에게 마지막 기대를 가졌다. “기모진, 네가 믿은 안 믿든 상관 없어, 하지만 난 이런 비열한 짓 한 적 없어.”“찰싹!”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만리 얼굴에 뺨을 날아와 입에 피가 났다.화끈거리는 볼의 통증 보다 기모진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더 아팠다."소만리, 더럽기만 한 게 아니라 양심도 없구나,
소구와 전예는 소만리가 피를 토하자 의외였지만 통쾌했다.전예와 소구는 문을 닫고 소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그녀가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소만리는 온몸이 흙으로 뒤덮였다. 빗물이 가득한 화단 옆에 웅크려 복부를 움켜쥐고 소만영을 안고 차에 올라타는 기모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모진은 백미러로 보이는 소만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소만리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만영은 그런 소만리를 쳐다보며 승리의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소만리는 절망에 찬 눈으로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실낱 같은 도움의 손길을 포기하지 않았다.소나기처럼 많은 눈물이 흘러 소만리는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기모진은 소만영 뱃속의 아이를 그토록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진 소만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소만리는 자신이 가여워서 쓴 웃음이 났다. 언제부터 소만리의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는 사랑하지 말았어야 할 남자 사랑한 그 순간부터라는 생각이 들었다.소만리는 심각한 내상과 외상을 입고 며칠간 병원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다. 소만리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오직 소군연만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물었다. 소만리는 소군연과 기모진이 더 이상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소만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통화를 했다. 퇴원하는 날, 의사는 그녀의 현재 상태로는 유산을 하고 종양 절제를 할 수 없다며 유감스럽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소만리는 감정 변화 없이 평온하게 웃었다.소만리는 퇴원하고 병원을 나섰다. 겨울의 따뜻한 햇살이 그녀를 반겼다. 하지만 그녀는 그 따뜻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특히 기모진이 자신에게 한 행동을 생각하니 심장이 찢어지듯 아팠다.소만리가 택시를 잡으러 가는 던 중 병원 옆 문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소만리가 자세히 보니 사화정과 그의 남편 모현
소만리는 별장에 돌아와 몇 벌의 옷만 챙겨 가려다 소파 위에 있는 아기 옷을 보았다. 그녀는 옷을 손에 쥐고 그리움을 금치 못했다. 이 아기 옷들이 모두 기모진이 소만영에게 사준 거라고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미어졌다.소만리가 삼 개월이 된 배를 쓰다듬자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소만리는 이내 눈물을 훔쳤다.소만리는 자신에게 그토록 냉철하게 대하는 기모진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소만리는 아기 옷 한 벌을 들고 내려왔다. 그리고 뜻밖에도 문 앞에서 기모진과 소만영을 만났다. 소만영과 기모진이 팔짱 끼고 걸어오는 것을 보자 소만리의 마음이 바늘에 찔리듯 아팠다."만리야 어디 가?" 소만영은 소만리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보고 알면서도 물었다. “어? 만리야 너 언제 그 아기 옷 가게 갔어? 그 옷 우리 아기 선물이야?”소만리는 소만영처럼 당당한 내연녀를 본 적이 없다.소만리는 소만영을 혐오하듯 노려봤다. "유부남 아이 임신하고도 그렇게 떳떳하다니, 소만영, 너 낯짝 정말 두껍구나.”소만영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소만영은 억울한 눈으로 기모진을 바라보았다.“모진아, 나 그냥 갈게, 만리가 또 질투할까 봐 겁나, 나를 다치게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우리 아이까지 다치게 될까 무서워.”소만영의 말에 기모진은 화가 났다.“네가 왜 가.” 기모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만리를 노려봤다."꺼져, 앞으로 절대 만영이 눈에 띄지 마.”기모진이 냉담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리고 소만리가 들고 있는 아기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그 옷, 내가 만영한테 선물한 거야, 누가 만지래? 너 네가 얼마나 더러운지 모르지? 네가 만진 옷을 우리 아들이 어떻게 입어!”기모진은 소만리를 더럽다고 말 하며 소만영의 아들을 말했다.소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아픈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12년 동안 사랑했던 기모진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기모진, 나한테 왜 그렇게 독하게 굴어? 내가 너랑 자려고 계획한 거라고 생각해? 그래
소만리가 고른 옷은 뱃속의 아이의 성별과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옷 이였다.소만리가 계산을 하려고 하는 순간, 뒤를 돌자 소만영이 있었다.소만영은 혼자 온 것 같았다. 소만영이 웃자 소만리는 그녀를 피해가려 했다. 하지만 소만영이 그녀를 막아섰다."만리야, 그렇게 심각한 일을 저지르고 쇼핑할 정신이 있어? 경찰이 아직 안 찾아왔어?소만리는 소만영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너도 참… 재능이 없으면 하지 말지 왜 남의 작품을 베끼고 그래? 지금 창우 회사에서 네가 회사 명예에 손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 저작권 침해했다고 고발한데, 이 죄가 성립되면 너 감옥 갈 거야.”소만리는 어리둥절했다. 소만영이 말한 창우 회사는 바로 그녀에게 커플링 초안을 의뢰했던 회사이다.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소만리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표절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베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소만영, 헛소리하지 마! 네가 이렇게 나를 모함하는 게 바로 내 명예를 훼손하는 거야!”"만리야, 억지로 버티지 마, 이런 일 처음 겪는 것도 아니잖아." 소만영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소만리는 소만영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손해를 많이 봤기 때문에 소만영이 다시는 그녀를 모함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소만리가 소만영을 지나쳐갔다. 그러자 소만영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만리야,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제발 내 아이까지 죽이려 하지 마,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니!”소만영은 또 이런 식이었다.소만리는 소만영에게 한 번 속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소만영에게 속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그러나 소만영의 간사함은 소만리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소만영은 갑자기 소만리의 손을 끌어당겨 중심을 잃은 듯 뒤로 넘어졌다."아!"소만영이 비명을 지르자, 옷 가게의 직원과 손님들이 뛰쳐나왔다.그리고 때마침 기모진이 나타났다. 소만영이 땅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배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기모진이 그
소만리는 구치소에 갇히고 이틀 후에야 기모진을 보았다. 저번과 똑같은 면회실이었지만 그녀는 전보다 더 처참했다. 그리 눈앞의 기모진의 악기도 더 심했다.기모진은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들어와 소만리의 옷깃을 잡았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소만리, 내가 경고했지. 조용히 사는 게 그렇게 어려워? 죽고 싶어서 안달 났지?"기무진, 내가 밀지 않았어! 소만영이 잡고 있던 손을 고의로 놓은 거야! 못 믿겠으면 CCTV 확인해봐! 옷 가게에 분명 CCTV 있어! 모진아, CCTV 보면 진실을 알게 될 거야!" 소만리는 마지막 희망을 잡듯 악착같이 말했다. "네가 밀었잖아! CCTV에 분명히 찍혔어!”“뭐?”소만리는 멍해지며 머리속이 하얗게 변했다.기모진이 그녀에게 CCTV 화면을 보여줬다. 화면 속 장면은 소만리가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CCTV 각도에서 봤을 때 마치 자신이 소만영이 밀친 것처럼 보였다. 기모진에게 소만리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CCTV 속 증거 앞에 그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기모진 분노가 소만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소만리, 이 증거를 보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니? 만영이 아기 유산 됐어? 좋아?소만리는 소만영이 유산됐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소만리는 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점점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기모진의 화난 얼굴을 보며 다시 해명 했다.“모진아, 나 진짜 소만영 밀지 않았어, 이번에도, 저번에도 내가 그런 거 아니야, 이게 다 소만영이 꾸민 짓이야!”"하." 기모진이 차가운 웃음이 소만리를 떨게 만들었다. “만영이 아기 유산됐다고! 그런데 아직도 만영이가 모함해서 너를 해치게 했다고? 소만리, 세상에 어떻게 너같이 더럽고 천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니!" 기모진은 이를 갈았다. 그의 깊은 증오와 원망은 명백히 알 수 있었다."너는 만영이를 다치게 하고, 작품도 베껴서 속이고 돈 벌었잖아. 소만리, 앞으로 내일의 태양은 볼 생
소만리는 항소가 기각되면서 이 험난한 역경을 피할 수 없었다.3년.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만리의 아이가 태어나는 날까지 그녀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다.소만리는 저번에 감옥 갔을 때 임신한 사실을 알리고 구타를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교도관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하지만 악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날 저녁 소만리는 삭발한 여자 죄수 무리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소만리는 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종양이 아프기 시작하며 온몸이 떨렸다. 소만리는 피할 방법이 없어 자신의 몸을 꼭 껴안아 배를 보호했다.그리고 소만리는 몇일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죄수 무리들은 소만리의 배를 때리지 않았다.소만리는 교도관에게 구타당한 일을 몇 차례 말했지만 모두 흐지부지했다.소만리는 매일 밤이 절망적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뱃속에 있는 소중한 작은 생명을 생각하며 꿋꿋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저 기모진이 너무 잔인했다.소만리는 기모진과 다시 만나면 기모진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12년 동안 소만리 혼자만의 집념이었다.소만리는 소군연이 보낸 약으로 통증을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고, 얼마 못 버틸 것 같았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어두운 세상에 등불이 되어줬다.아이가 열 달이 가까이 돼 출산 예정일이 왔다. 소만리는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했다초여름 밤 천둥·번개가 쳤다. 소만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 죄수 무리들이 또 그녀를 찾아왔다. 주먹과 발길질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번엔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두 여자가 그녀의 두 손을 꽉 눌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소만리의 바지를 거칠게 찢어 벗기고 그녀의 다리를 올렸다.소만리는 죄수들이 뱃속의 아이에게 어떤 짓을 할 것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뭐하는 짓이야! 이거 놔!"그러나 죄수들은 그녀의 몸부림을 무시했다. 그러자 소만리는 배에서
소만리는 교도관의 반문에 깜짝 놀라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모든 것은 누군가 사전에 계획하고 그들이 서로 꾸민 일이다. 그녀가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소만리는 차가운 철창을 붙잡고 절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기모진,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너를 만나지 않을래…소만리는 자신이 출소하는 날까지 살아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소군연 보내준 약이 종양에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출산한 아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였는지 결국 소만리는 기적처럼 살아났다.소만리가 출소하는 날은 화창했다. 하지만 소만리의 지난 3년 동안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감옥에 갇힌 그 천 일 동안 생긴 상처가 그녀의 마음에 곳곳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았다.소군연과 예선은 소만리에게 달려갔다. 예선이 깡마르고 넋이 나간 소만리를 보고 꼭 껴안아줬다. "만리야, 이제 걱정 마, 앞으로 나랑 같이 살자."소만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찌릿했다.소군연은 초췌하고 정신 못 차리는 소만리를 보며 미안함과 후회의 마음이 생겼다.만약 소만리가 그 일을 당했을 때 소군연이 해외를 가지 않았다면 소만리 혼자 그런 일을 겪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군연은 소만리에게 연신 사과했다. 소군연이 있었더라면 적어도 그녀에게 변호사 구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소만리는 미안해하는 소군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고마워요, 근데 저한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선배 저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소만리에게 잘못한 사람은 소만영 그 독한 내연녀, 그리고 그녀가 12년간 사랑했던 냉혈한 기모진이다.간단하게 정리하고 소군연은 제일 먼저 소만리를 데리고 남사택에게 찾아가 종합검진을 받았다. 남사택은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라 소만리를 쳐다봤다. "제가 새로 개발한 약이 정말 종양 진행과 악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줄 몰랐어요.”“그럼 이제 수술 가능한가요?” 소군연은
다음날 소만리는 과일과 외할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간식을 사서 정신병원에 갔다.그녀는 곧장 외할아버지가 계신 병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병실 안의 환자는 외할아버지가 아니었다. 소만리는 즉시 데스크로 가서 물었다. 소만리가 자신이 시윤 할아버지 가족이라고 말하자 간호사가 미묘하게 쳐다보며 퉁명하게 말했다. “시윤 할아버지 외손녀예요? 외손녀라면서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이제 오셨어요? 장례식장으로 가보세요, 할아버지 유골 그곳에 있어요.""툭." 소만리는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바닥에 떨어트렸다.소만리는 넋이 나간 공허한 눈에서 순간 따가운 아픔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마음이 죽고 마비되어 다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외할아버지가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소만리는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소만리는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가 외할아버지의 유골과 유품을 전달받았다. 겨울 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소만리는 비바람에 무릎을 꿇고 외할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녀의 마음속 상처와 아쉬움은 메울 수 없이 슬펐다.예선은 달려와 소만리를 안아주며 위로했다.“울지 마 만리야, 모두 다 지나갈 거야.”예선의 도움으로 소만리는 할아버지에게 묘소를 마련해 드렸다.제사를 지내고 정신병원으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사망 이유를 묻자 간호사는 얼렁뚱땅 대답했다.“나이 들어서 돌아가신 거예요"나이 들어서? 소만리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 외할아버지를 만나 뵈었다. 그때 할아버지의 정신 상태는 멀쩡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소만리는 의심이 들었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할 수 없었다.소만리는 외할아버지의 유품에서 나비 모양의 작은 옥 목걸이를 발견했다. 목걸이에는 소만리의 본명 ‘천리’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소만리는 이 목걸이는 외할아버지가 외손녀에게 주는 마지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