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소만영이 그를 찾아간 거겠지.소만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모진은 잘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는 내내 소만영을 무한정 믿어 주었다.그리고 번번이 제멋대로 구는 소만영을 내버려 두어 그녀에게 그렇게나 깊은 고통을 준 것이다.그러나 그가 정말로 소만영을 감싸려고 든다면왜 쓸데없이 자신에게 소만리로 꾸미고 가서 육정을 만나달라고 했을까?기모진이 그대로 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소만리의 아파트까지 따라왔다.“잠깐 들어가도 됩니까?”기모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살짝 부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밤 늦은 시간이라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보고는 문을 열었다.“들어오세요.”다친 것이 마음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에게서 뭔가 정보를 얻어내려는 것이었다.소만리는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파에 앉은 무표정한 남자를 보았다.기모진은 손을 늘어뜨리고 푹신한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깊은 시름에 잠겨 의기소침해 있었다.소만리는 아무 말 없이 알코올솜을 꺼내 기모진 손등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살살 감았다.“한 번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기모진이 대뜸 한 마디 했다.소만리는 붕대를 감던 손을 멈췄다. 이어서 그녀는 태연히 웃으며 물었다.“누굴 말씀하시는 거예요?”기모진은 대답 없이 그저 가볍게 훗 하고 웃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정말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내내 너무나 그 여자를 믿었어요.”소만리는 앞서 말한 것은 예전의 자신이고, 나중에 이른 것은 소만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렇지만 기모진 당신이 생각도 못한 건 그것뿐이 아니야. 당신이 본 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소만리는 다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물었다.“기모진 씨 말씀은 전처가 아들을 납치한 사건이 사실은 누가 한 건지는 아는데 믿고 싶지 않다는 말씀인가요?그의 섹시한 눈이 갑자기 몽롱해지는 듯 하더니 묵직한 시선이 복잡한 심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맑은 눈을 바라봤다.기모진은 한참 만에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체온
소만리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기모진의 품은 텅 비었다.삽시간에 그의 심장으로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그는 그제서야 꿈에서 깬 듯 했다.눈 앞에 있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기모진은 방금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그녀를 탐욕스럽게 안았다. 심지어 그녀도 마음 아파하며 자신을 꽉 안아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전례가 없던 일이었다.그러나 이게 다 순전히 그 얼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예전의 그녀와 똑같은 그 얼굴.“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왔어요?”반기는 듯한 소만리의 목소리에 모진은 정신을 차렸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약혼자가 왔어요.”‘약혼자?’“손님이 오셨나?”남자의 목소리가 저만치서부터 다가왔다.기모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낯선 목소리도 아니었다.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미랍의 약혼자라면 정말이지 깜짝 놀랄 노릇이었다.“모진이, 너냐?”기모진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검은 양복을 입은 기묵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어깨는 밖에 내리는 비로 점점이 젖어 있었지만 신사적인 그의 풍모를 해치지는 않을 정도였다.두 쌍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깊은 밤의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일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기모진의 눈에서 한 줄기 불길이 타오르는 듯 했다.“누구신가 했더니......”기모진이 천천히 일어섰다.이때 소만리가 미소를 띠고 기묵비의 옆으로 다가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껴안았다.“제 약혼자 기묵비 씨에요.”웃으며 소개를 하더니 의문에 찬 눈동자가 기묵비의 온화한 얼굴로 향했다.“방금 ‘모진이’라고 하던데 두 분 아는 사이에요? 아, 이제 보니 두 분 다 기 씨……”“내가 전에 말했던 조카가 바로 모진이야.”기묵비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창 밖의 밤처럼 부드럽
소만리는 고개를 저었다.“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어요. 아니었으면 기모진이 그렇게 번번이 날 ‘그 죽일 놈의 전처’라고 의심하진 않았을 텐데.”소만리는 치가 떨리도록 분한 마음을 실어 이 말을 뱉었다. 그러나 기묵비를 보더니 곧 웃었다.“걱정 하세요. 더 이상은 그 바보 같던 소만리가 아니에요. 제게 주신 ‘부활’의 기회를 절대 헛되이 버리지 않을 거예요.”기묵비는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은은히 신비로운 느낌이 감돌았다.소만리는 비에 젖은 기묵비의 외투를 벗기고 새 목욕용품을 건넸다.그는 목욕을 하고 하얀 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나왔다.그는 자연스럽게 소만리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귀염둥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묵비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사랑스럽다는 듯 염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방 치워놨어요.”소만리가 가만히 방으로 들어왔다.기묵비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며칠 있다가 본가에 한 번 가야 하는데 같이 갑시다.”“네.”소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른 쉬어요. 잘 자요.”기묵비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담담한 입술이 소만리의 이마에 닿더니 얼마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휙 돌아서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소만리는 약간 얼이 빠진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기묵비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도와주는 데는 그녀를 향한 남자로서의 마음이 있을 터였다.6년 전 소만영이 목걸이 사건으로 모함을 할 때도 그녀가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영상을 찍어 은근슬쩍 그녀를 도와주었다.그러나 기묵비와 함께한 지난 3년을 돌이켜 보면 그는 너무나 신비했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다.그는 내내 신사적이었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듯 했다.쓸데 없는 생각을 털어내려고 소만리는 고개를 흔들었다.기모진은 나가서는 차에 앉아 있었다. 소만리 네 아파트 불이 꺼졌다.“기묵비”그의 입에서 기묵비의 이름이 터져 나왔
인파 사이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소민리의 심장이 훅 조여왔다.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그러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기모진에게 다가갔다.“브런치를 사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요?”그녀는 웃었다. 비 온 뒤의 아침 햇살이 청순한 얼굴에 비쳐 밝게 빛났다.기모진은 어딘가를 휙 돌아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예비 숙모께서 제가 체면 차릴 기회를 안 주시는 건가요, 아니면 삼촌이 질투할까봐 걱정 되십니까?”“무슨 이런 일로 질투를 하겠어요?”소만리는 침착하게 웃고 있었지만 심장은 두근대고 있었다.아직도 그 익숙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만리야~”그 목소리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점점 더 가까워졌다.그러나 그녀는 태연히 기모진을 따라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만리야!”카페에 들어서려는 순간에 그 사람이 소만리의 앞으로 뛰어들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만리야! 진짜 만리잖아!예선은 한껏 흥분해서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려 화장이 다 얼룩질 판이었다.“만리?”소만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소만리 씨 예전 친구이신가 보네요. 아가씨도 절 소만리라고 착각하셨나 봐요?”소만리의 대답을 듣고 예선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어리둥절해서 서있었다.“착각이라니? 만리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긴 어떻게 왔어?”예선은 의문투성이인 채였지만 어쨌든 만리를 만났다는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그녀는 팔을 활짝 벌려 소만리를 껴안아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실체라는 느낌을 만끽했다. 예선의 목소리가 떨렸다.“만리야, 너구나! 정말 잘 됐다! 만리가 살아 있었어!”그녀는 흥분에 겨워 소만리의 손을 꼭 쥐고는 기모진을 쌩 하니 노려봤다.“근데, 왜 저 쓰레기랑 같이 있어? 저놈이 소만영이랑 널 거의 죽일 뻔 했잖아! 어떻게 용서를 할 수가 있어? 가자! 이런 쓰레기랑 같이 있지 말고!”예선은 울분에 차서 기모진을 노려보더니 소만리를 끌고 가려고 했다.그러나
기모진의 눈이 소만리의 우아한 뒷모습을 보더니 조용히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정말 저 사람이 소만리라고 생각하나?”“당연히 만리지!”예선이 확신에 차서 내질렀다.“기모진,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만리 건드리지 마라. 한 번만 더 우리 만리 다치게 하면 이제는 너 죽고 나 죽는 거야!”예선의 경고를 들은 기모진의 입술이 자조적으로 올라갔다.‘친구 조차도 그녀를 위해서 이렇게 필사적인데남편이라는 나는 도대체 뭐였나?’기모진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소만리는 차에 앉아서 곁눈질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멀어져 가는 예선의 뒷모습을 봤다. 예선이 멀어져 가며 그녀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예선아, 미안해.나는 이제 네가 알던 소만리가 아니야.이 복수를 끝내면 그때 그 만리가 널 찾아가서 사과할게.’소만리는 시선을 거두었다. 차가 막 한 블록을 지났을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차 세워요.”기모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안색이 사뭇 어두웠다.그는 차를 세웠다. 소만리는 차에서 내리더니 그대로 걸어갔다.기모진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차에서 내려 급히 쫓아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어디 갑니까?”손목을 잡히자 그녀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아까는 사람이 많은 데라서 체면 차려드린 줄 아세요. 이렇게 자꾸 내가 소만리가 아닌지 확인하려고 드는 거 정말 짜증나네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매우 불쾌하다는 뜻을 한껏 드러냈다.“애초부터 나랑 브런치 따위 먹을 생각은 아니었을 걸요. 소만리 씨의 친구가 거기 지나다니는 걸 알고 있어서 일부러 날 데리고 간 거잖아요, 아닌가요?”“맞습니다”기모진이 깨끗하게 인정하더니 그윽한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내 처랑 완전히 똑같이 생긴 건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내 전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기묵비의 예비신부다? 이건 의심이 안 들 수 없다 이겁니다.”소만리는 그 말을 듣더니 가볍게 웃었다.“이 넓은 세상에 별별 일 다 벌어
사고가 나기 일보직전, 기모진이 손을 뻗었다. 와락 소만리의 손목을 잡아 당겨 있는 힘껏 그녀를 품으로 그러안았다.노란 불에 건너려던 그 차는 소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기모진은 너무 와락 힘을 쓰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힘껏 안고 있던 그녀도 그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퍽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걱정 마, 다 괜찮아.”소만리는 희미하게 기모진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기모진의 팔에 꽉 갇혀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무의식 중에도 그녀를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었다.소만리는 그렇게 기모진 위로 엎어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차가운 향이 풍겨왔다. 기억에 선명한 익숙한 향이었다.그녀는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날뛰는 것이 방금 날 뻔한 사고 때문에 놀라서 그런 것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휙 불었다. 소만리는 그제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이제 좀 놔주시죠.”기모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그는 천천히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방금 저도 모르게 나왔던 ‘만리야’라는 말이 생각났다.“고맙습니다.”소만리가 일어서며 인사했다.기모진도 일어서며 눈 앞에 조금도 다치지 않은 여자를 보고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소만리는 뭔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선혈이 낭자한 기모진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어젯밤 그녀가 치료해 주었던 위치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알코올 물티슈를 꺼냈다. 기모진의 손을 잡고 상처 부위를 간단히 처치하고는 손수건으로 싸맸다.기모진은 꼼짝도 않고 세심하게 자신의 상처를 처치하는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집중하는 눈 위로 곱게 뻗은 눈썹이 보였다. 가느다랗게 깜빡이는 그 속눈썹이 하나하나 깃털처럼 자신의 심장에 떨어져 사르르 감싸는 것만 같았다.심장이 제멋대로 두근대는 걸 느꼈다.“감사합니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소만리는 손을 놓고는 벌떡 일어났다.“모셔다
소만영은 다급히 대답했다.“걱정 마. 내일 저녁에 아빠랑 엄마 모시고 시간 맞춰 갈게.”“좋아.”기모진은 이 말을 마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꺼지는 화면을 보며 그의 눈에 비밀스러운 빛이 감돌았다.소만리는 그대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기묵비가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그는 편안한 옷을 입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우아하게 토스트를 먹으며 핸드폰으로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소만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는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Miss l.ady 영업 실적이 나날이 오르네요. 당신이 디자인한 액세서리가 인기가 좋군요. 이번 GMA 국제쥬얼리디자인대회에서 수상할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그리고 조향에 필요한 재료를 가져왔으니 걱정 말고 여기서 꿈과 사업을 펼쳐봐요.”기묵비의 말을 들으며 소만리는 감동했다.“감사해요.”기묵비는 빙그레 웃었다. 신비로운 긴 눈이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난 당신의 감사를 바라지는 않아요.”그의 목소리는 봄바람마냥 부드러웠다.좀 얼떨떨해 하는 소만리를 보며 기묵비가 웃었다.“걱정 말아요. 아무것도 억지로 요구하지 않아요. 당신을 기쁘게만 할 수 있다면 난 영원히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을 뿐이오.”소만리는 그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따스해졌다.그 웃음이 그녀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안개를 걷어내 주었다.3년 동안 기묵비가 함께 하며 응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그녀는 있을 수 없었다.다음 날 저녁.소만리는 기묵비를 따라 그의 본가에 갔다. 그는 한 손 에는 선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만리의 손을 잡고 별장 정원으로 들어섰다.집사가 기묵비를 보더니 급히 어르신께 보고했다.방에서 쉬고 있던 할아버지의 느슨해졌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3년 전 기묵비가 본가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지 않았지만 매번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소만리는 할아버지를 무척 뵙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사화정과 소만영이 소파에 앉아 기모진의 어머니와 즐겁게
모두들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당황한 가운데 기모진이 주머니에서 진한 남색의 벨벳 반지함을 꺼냈다.그는 소만리를 향해 그 벨벳 반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소만영이 기모진이 손에 든 반지함을 보고는 놀라서 황급히 말했다.“지, 지금 뭐 하는 거야?”놀란 와중에도 웃음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오늘 우리 엄마 아빠 모시고 오라는 게 나한테 청혼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이 다이아 반지 나한테 주는 거지, 응?”소만영은 기대에 가득 차서는 기모진의 냉랭한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은 곁눈질로도 소만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반지를 꺼내더니 기묵비가 잡고 있는 소만리의 왼손 쪽으로 손을 뻗었다.소만리가 얼른 손을 뺐다.“기모진 씨, 뭐 하세요?”기묵비가 소만리를 감싸며 나섰다.“모진아, 미랍 씨랑 만리가 닮기는 했지만, 전에도 말했 듯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이렇게 놀라시다니.”갑자기 기모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예비 숙모께 드리는 선물일 뿐입니다.”“선물이라니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다이아몬드 반지는 함부로 선물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약혼녀께서 질투하시겠어요.”소만리가 웃으며 완곡히 거절하며 아까부터 웃음을 거두고 얼굴이 일그러진 소만영을 흘끗 봤다.“만영이가 왜 질투를 해요!”기모진의 어머니가 나서며 소만리를 쏘아봤다.“천미랍 씨, 그 망할 모진이 전처랑 닮았다고 모진이가 특별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혼자서 김칫국 마시지 말아요.”그녀는 경멸하듯 웃었다.“소만리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 완전히 찍혔다고요! 게다가 모진이가 걔를 얼마나 증오했는데. 걔가 죽어버려서 우린 다들 얼마나 시원했다고요. 모진이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 우리 예비 며느리가 이런 걸로 질투할 거라고 생각지 말아요! 모진이랑 만영이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둘이 낳은 애도 벌써 다섯 살이나 되었고!”소만영이 듣더니 곧 미소를 되찾고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