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당황한 가운데 기모진이 주머니에서 진한 남색의 벨벳 반지함을 꺼냈다.그는 소만리를 향해 그 벨벳 반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소만영이 기모진이 손에 든 반지함을 보고는 놀라서 황급히 말했다.“지, 지금 뭐 하는 거야?”놀란 와중에도 웃음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오늘 우리 엄마 아빠 모시고 오라는 게 나한테 청혼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이 다이아 반지 나한테 주는 거지, 응?”소만영은 기대에 가득 차서는 기모진의 냉랭한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은 곁눈질로도 소만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반지를 꺼내더니 기묵비가 잡고 있는 소만리의 왼손 쪽으로 손을 뻗었다.소만리가 얼른 손을 뺐다.“기모진 씨, 뭐 하세요?”기묵비가 소만리를 감싸며 나섰다.“모진아, 미랍 씨랑 만리가 닮기는 했지만, 전에도 말했 듯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이렇게 놀라시다니.”갑자기 기모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예비 숙모께 드리는 선물일 뿐입니다.”“선물이라니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다이아몬드 반지는 함부로 선물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약혼녀께서 질투하시겠어요.”소만리가 웃으며 완곡히 거절하며 아까부터 웃음을 거두고 얼굴이 일그러진 소만영을 흘끗 봤다.“만영이가 왜 질투를 해요!”기모진의 어머니가 나서며 소만리를 쏘아봤다.“천미랍 씨, 그 망할 모진이 전처랑 닮았다고 모진이가 특별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혼자서 김칫국 마시지 말아요.”그녀는 경멸하듯 웃었다.“소만리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 완전히 찍혔다고요! 게다가 모진이가 걔를 얼마나 증오했는데. 걔가 죽어버려서 우린 다들 얼마나 시원했다고요. 모진이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 우리 예비 며느리가 이런 걸로 질투할 거라고 생각지 말아요! 모진이랑 만영이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둘이 낳은 애도 벌써 다섯 살이나 되었고!”소만영이 듣더니 곧 미소를 되찾고
소만영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새마냥 기모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모진 씨는 날 잘 돌보아 줄 거예요, 그렇지?”그녀는 촉촉한 눈으로 기모진을 올려다 보았다. 마침 내려다 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너무나 싸늘한 그의 눈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모, 모진 씨……”“난 너와 파혼을 선언하려고 해.”“......”“…… 뭐라고?”소만영은 그 순간 굳어버렸다. 사화정, 모현, 기모진의 부모님도 모두 깜짝 놀랐다.소만리는 침착하게 보고 있었지만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기모진이 소만영과 파혼을 하려고 하다니?’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그는 소만영의 이런 청순가련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일까?“여보게, 이게 무슨 소린가? 어떻게 우리 만영이랑 파혼을 해. 만영이가 자네 애까지 낳았는데!”사화정이 울컥하더니 소만리를 가리켰다.“이 여자 때문인가?”기모진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에 힘을 주었다.“그 분과는 무관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소만영을 쳐다보았다.“그 날 아침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겠지?”소만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기모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네가 만약 란군이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약혼 무효를 선언할 거야.”순간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됐다.“결국 날 안 믿어 주는 거야? 말했잖아, 난 란군이 납치에 간여한 적이 없어. 란군이는 내 아들이라고! 내가 어떻게 누군가와 짜고 그 아일 납치해? 내가 왜 그러겠어?”소만영의 다급한 해명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모진이 파혼을 선언한 배경을 알게 됐다.“소만리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가 만리를 증오하게 만들려고.”기모진이 평온한 말투로 말을 받았다.소만영은 당황했다.“나, 난 아니야! 육정 같은 건달의 말만 믿고 날 판단하지 마. 우리가 같이 한 세월이 얼마인데 날
기모진은 그가 한때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여자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사실 난 그런 기사는 알지도 못해.”“……”기모진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한 순간에 거실 공기가 얼어붙은 듯 했다. 소만영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실망과 비웃음이 가득한 기모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이런 수를 쓰다니!그녀는 거기 넘어가 다른 자와 짜고 소만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을 자백하고 말았던 것이다!소만리는 옆에 가만히 서서 있었지만 속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전날 기모진이 그녀에게 소만리로 분장하고 육정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실패하지 않았던가.애초에 소만영이 못된 짓을 했다는 증인도 증거도 찾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기모진이 이런 때에 이런 수를 써서 소만영이 얌전히 자백하도록 만들 줄이야.마음이 격하게 떨렸다.이게 대체 어떤 기분인지도 알 수 없었다.기묵비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서로의 시선이 교차되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역시나 네 녀석이었군!”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지팡이들 들고 소만영을 가리켰다.“네 녀석이 딴 놈과 짜고 제 아들을 납치했던 게야. 그리고는 그 누명을 만리에게 씌우다니! 이, 이런 고연 놈을 보았나!”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래진 채 부들부들 떨며 지팡이로 소만영을 가리켰다.사화정이 급히 할아버지를 막으며 말했다.“어르신, 왜 이러세요. 어떻게 우리 만영이를 때리실 수가 있어요? 우리 애도 나름 고충이 있었을 거예요!”고충이라고?상황이 이런데도 사화정이 여전히 소만영을 감싸고 도는 것을 보고 소만리의 심장은 차츰 얼어붙었다.예전에는 혹시라도 진상이 밝혀지는 날아 온다면 마음이 녹아서 그렇게 바라던 부모님 품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사화정이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소만영이 한 짓거리를 감싸는 것을 보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소만영은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는 듯 했다.그는 진심인 듯 하다.“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사화정이 즉시 소만영을 대신 해서 나섰다.“만영이가 얼마나 오래 자네를 따르고 자네와 사이에 애도 낳아서 다섯 살이 되었잖는가. 5년 동안 사람들이 뒤에서 첩이라고 수근 거리는 것도 참았는데. 이제 그 망할 소만리라는 여자 때문에 우리 만영이를 버려?”그녀가 물었다.기모진의 태양혈이 꿈틀거렸다.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그는 사람들이 ‘그 망할 소만리’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그만!”할아버지께서 다시 분노하셨다.“이 아이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당신 딸이라서 그간 부족했던 사랑을 준다고는 해도 이런 식은 곤란하오! 만리 그 아이도 누군가가 낳아서 기른 아이가 아닙니까! 그 아이가 누명을 썼다면 그 아이부모도 똑같이 마음 아팠을 게 아니겠소!”할아버지는 길게 탄식했다.“만리 그 불쌍한 것은 죽어서도 그런 죄명을 쓰고……”그는 탄식하며 천천히 돌아서 위층으로 올라갔다.소만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명치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올라왔다.‘할아버지.아직까지도 절 이렇게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런데 우리 부모님은……’그녀는 사화정과 모현을 돌아봤다. 그들은 소만영이 그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도여전히 무작정 소만영을 감싸기 바빴다.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조용한 가운데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여왔다.“란군이의 양육권은 다투지 않겠어. 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잘 알겠지.”그렇게 말하더니 냉랭하게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에서 소만리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어, 어디가? 모진 씨!”소만영은 급히 쫓아 나갔다. 그러나 곧 기모진의 차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소만영은 기모진이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만 듣고 결혼날짜를 발표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불상사를 당할 줄
기모진이 다른 여자에게 장미꽃을 바친다는 것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기모진의 차는 계속 달렸다. 그러다 보니 길에 점점 차가 적어졌다.그에게 들킬까 봐 기묵비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따라갔다.20분 남짓 달리자 기모진의 차가 서는 게 보였다.그런데 차가 멈춘 곳을 둘러보고 소만리와 기묵비는 당황했다.“공원묘지?”기모진이 도착한 곳은 공원묘지였다.‘왜 이런 데를 오지? 게다가 장미 꽃다발까지 들고’이 곳은 그녀가 외할아버지와 아이를 묻은 곳이었다. 그가 잔인하게도 그녀의 눈 앞에서 아이의 뼛가루를 뿌렸던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기억이 떠오르자 소만리는 심장이 부르르 떨렸다. 그날 하늘에서 내리던 눈이 심장에 내긴 듯 심장이 얼어붙었다.얼마나 비참하고도 무력하게 그에게 간절히 빌었던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눈물을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심장을 갈갈이 찢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소만영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대는 것까지 그대로 두었었다.“따라 가 보겠어요?”기묵비가 물었다.소만리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사람이 적어요. 차도 몇 대 안 되고. 따라 들어가면 들킬거예요.”“그럼 기다릴까요?”소만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기다릴까?그렇지만 뭘 기다린다는 거야?’공원묘지는 넓어서 기모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여기서 기다리다니 뭘 기다린다는 말인가?“손이 차가워요.”기묵비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일을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그의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그녀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소만리가 아무 말이 없자 기묵비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귓가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걱정 마요. 내가 있으니까.”……공원묘지.기모진은 88송이의 장이를 들고 익숙한 길을 따라가 어느 묘비 앞에 섰다.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보더니 그는 손을 뻗어 한 자 한 자 어루만졌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듯. 그러
기모진은 묘비의 이름을 가볍게 쓸어보더니 일어섰다.주변은 그의 마음처럼 온통 적막했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자 기모진은 그제서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떴다.소만리가 막 여온이를 데리고 들어서는데 기모진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소만리는 전화를 끊고 여온이와 놀아주고 있는 기묵비를 보았다.“가봐요. 마음에 끌리는 일을 해야지.”기묵비가 차마 말을 못하고 곤란해 하는 소만리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그는 그녀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복수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리고 기모진은 그녀가 복수하려는 대상 중 하나였다.소만리는 옷을 차려 입고 가방을 들고 내려갔다. 막 엘리베이터를 나서는데 기모진의 차가 밖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어스름이 내리고 빗줄기도 세졌다.소만리가 오는 걸 보더니 기모진은 비를 맞으면서 그녀를 위해서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차에 타자 소만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거죠?”“그 동안 미립 씨를 괴롭히던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무슨 말씀이세요?”소만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운전하는 남자를 쳐다봤다.어둑어둑한 차 안에서 희미한 빛이 그의 결연한 옆모습을 비췄다. 소만리는 웃음을 띤 기모진의 얼굴을 흘끗 봤다.“별 거 아닙니다. 그냥 밥이나 한 끼 하려고요.”그가 말했다.“이제 다시는 당신을 그녀로 착각하지 않을 겁니다.”“그녀요?”“제 전처 말입니다.”기모진은 대답하며 악셀레이터를 밟았다.바퀴가 비에 젖은 길가의 낙엽을 감아 올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소리 없이 휘감아 사라지는 듯 했다.소만리는 기모진과 식당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그녀를 데리고 별장으로 갔다.예전에 그녀가 살았던 바로 그 별장을.집이 조용한 것이 아마도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듯 했다.‘기란군도 없나?’양육권을 다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란군은 소만영이 데려갈 텐데, 아이가
벨을 누른 것은 소만영이었다.소만리는 깜짝 놀랐다.‘3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소만영은 이 집 열쇠를 안 가지고 있단 말이야?’이상한 생각이 들어 기모진을 바라보니 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 했다.“문 안 열어도 되나요? 소만영 씨가 왔나 봐요. 어쨌든 애 엄마잖아요.”소만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기모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금방 다녀올 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네.”소만리가 웃으며 끄덕였다. 돌아서 나가는 기모진의 뒷모습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흥, 역시나 내치지는 못하겠나보군.’밖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여니 늦여름 밤바람이 불었다. 꽤나 차가웠다.“드디어 날 만나주는 구나.”소만영이 절박하게 기모진에게 달려들었다.우산도 없이 온 몸이 젖은 것을 보니 비를 맞으며 달려온 듯 했다.기모진을 보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상 억울하다는 듯 목이 메였다.“그때 내가 너무 철이 없었던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 첫 아이를 생각해 봐. 만리 그 독한 년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야……”“난 우리 란군이를 납치하거나 해치려던 게 아니야. 육정한테 우리 란군이를 잘 돌보라고 했어. 내가 그런 짓을 했던 건 그저 우리 첫 아이 일로 너무 속상해서……”소만영은 말하면서 손으로 기모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기모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자기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응?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사는 거야, 응?”또다시 소만리를 모함하며 지난 잘못을 모두 그녀에게 뒤집어 씌우는 소만영의 위선적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똑똑히 들렸다.소만리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가만히 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손을 놓았다. 와인 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붉은 액
안 그래도 요즘 소만영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인데 기모진의 집에 천미랍이 있는 꼴을 볼 줄이야!그건 그렇다고 치고.테이블 위의 이 화려한 만찬과 기모진이 잔뜩 놀라서는 천미랍의 손을 잡고 상처를 보고 있는 꼴이라니!“그냥 스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소만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움츠렸다.“작은 상처라고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됩니다. 알코올을 가져올게요.”기모진이 다정하게 말을 하며 일어섰다. 소만영이 따라 들어온 것을 봤지만 흘끗 보더니 그대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가버렸다.“고마워요.”소만리가 인사를 하면서 천천히 일어났다.고개를 들다가 그제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온 몸이 젖은 소만영을 본 듯 말했다.“어머나 또 만나네요.”소만영은 열불이 뻗쳤지만 억지로 웃음을 띠며 걸어갔다.“천미랍씨, 내 약혼자 집에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그 말을 듣더니 소만리가 웃었다.“약혼자라니요? 기모진씨는 당신하고 파혼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이게, 야, 너 지금 그거 무슨 뜻이야?”소만영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웃음이 싹 사라지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소만리를 노려봤다.“천미랍, 내가 다 알아. 너 네 그 상판으로 우리 모진 씨를 꼬드기려는 거지?”“그러면 또 어때서요?”소만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고 웃었다.“기모진 씨 같은 남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하죠.”“이게……”소만리의 말을 들은 소만영이 폭발했다. 화가 나서 손찌검을 하려고 소만리의 얼굴을 향해서 손바닥을 휘둘렀다.“이 년이!”소만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어 소만영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만영의 뺨을 후려쳤다.“짝!”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소만영은 졸지에 당한 일에 놀라서 눈이 커졌다.“이, 이게 감히 날 때려? 천미랍, 나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나한테 맞선 것들은 좋게는 못 끝나. 소만리도 그랬지만, 너도 마찬가지야!”그녀의 악랄한 경고가 끝날 때쯤 기모진이 돌아왔다. 그걸 보더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