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 나니 소만영은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는 듯 했다.그는 진심인 듯 하다.“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사화정이 즉시 소만영을 대신 해서 나섰다.“만영이가 얼마나 오래 자네를 따르고 자네와 사이에 애도 낳아서 다섯 살이 되었잖는가. 5년 동안 사람들이 뒤에서 첩이라고 수근 거리는 것도 참았는데. 이제 그 망할 소만리라는 여자 때문에 우리 만영이를 버려?”그녀가 물었다.기모진의 태양혈이 꿈틀거렸다.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그는 사람들이 ‘그 망할 소만리’라고 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그만!”할아버지께서 다시 분노하셨다.“이 아이가 오랫동안 헤어졌던 당신 딸이라서 그간 부족했던 사랑을 준다고는 해도 이런 식은 곤란하오! 만리 그 아이도 누군가가 낳아서 기른 아이가 아닙니까! 그 아이가 누명을 썼다면 그 아이부모도 똑같이 마음 아팠을 게 아니겠소!”할아버지는 길게 탄식했다.“만리 그 불쌍한 것은 죽어서도 그런 죄명을 쓰고……”그는 탄식하며 천천히 돌아서 위층으로 올라갔다.소만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명치에서 뜨거운 게 울컥하고 올라왔다.‘할아버지.아직까지도 절 이렇게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런데 우리 부모님은……’그녀는 사화정과 모현을 돌아봤다. 그들은 소만영이 그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도여전히 무작정 소만영을 감싸기 바빴다.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조용한 가운데 아무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기모진의 목소리가 들여왔다.“란군이의 양육권은 다투지 않겠어. 일이 이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는 잘 알겠지.”그렇게 말하더니 냉랭하게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에서 소만리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어, 어디가? 모진 씨!”소만영은 급히 쫓아 나갔다. 그러나 곧 기모진의 차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소만영은 기모진이 사라져간 쪽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만 듣고 결혼날짜를 발표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불상사를 당할 줄
기모진이 다른 여자에게 장미꽃을 바친다는 것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기모진의 차는 계속 달렸다. 그러다 보니 길에 점점 차가 적어졌다.그에게 들킬까 봐 기묵비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를 따라갔다.20분 남짓 달리자 기모진의 차가 서는 게 보였다.그런데 차가 멈춘 곳을 둘러보고 소만리와 기묵비는 당황했다.“공원묘지?”기모진이 도착한 곳은 공원묘지였다.‘왜 이런 데를 오지? 게다가 장미 꽃다발까지 들고’이 곳은 그녀가 외할아버지와 아이를 묻은 곳이었다. 그가 잔인하게도 그녀의 눈 앞에서 아이의 뼛가루를 뿌렸던 바로 그곳이기도 했다.기억이 떠오르자 소만리는 심장이 부르르 떨렸다. 그날 하늘에서 내리던 눈이 심장에 내긴 듯 심장이 얼어붙었다.얼마나 비참하고도 무력하게 그에게 간절히 빌었던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눈물을 본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심장을 갈갈이 찢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소만영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대는 것까지 그대로 두었었다.“따라 가 보겠어요?”기묵비가 물었다.소만리는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사람이 적어요. 차도 몇 대 안 되고. 따라 들어가면 들킬거예요.”“그럼 기다릴까요?”소만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기다릴까?그렇지만 뭘 기다린다는 거야?’공원묘지는 넓어서 기모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여기서 기다리다니 뭘 기다린다는 말인가?“손이 차가워요.”기묵비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떠올리고 싶지 않은 옛일을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그의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그녀의 심장으로 흘러들었다.소만리가 아무 말이 없자 기묵비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귓가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걱정 마요. 내가 있으니까.”……공원묘지.기모진은 88송이의 장이를 들고 익숙한 길을 따라가 어느 묘비 앞에 섰다.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보더니 그는 손을 뻗어 한 자 한 자 어루만졌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듯. 그러
기모진은 묘비의 이름을 가볍게 쓸어보더니 일어섰다.주변은 그의 마음처럼 온통 적막했다.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자 기모진은 그제서야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자리를 떴다.소만리가 막 여온이를 데리고 들어서는데 기모진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는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소만리는 전화를 끊고 여온이와 놀아주고 있는 기묵비를 보았다.“가봐요. 마음에 끌리는 일을 해야지.”기묵비가 차마 말을 못하고 곤란해 하는 소만리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그는 그녀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복수라는 것을 잘 알았다.그리고 기모진은 그녀가 복수하려는 대상 중 하나였다.소만리는 옷을 차려 입고 가방을 들고 내려갔다. 막 엘리베이터를 나서는데 기모진의 차가 밖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어스름이 내리고 빗줄기도 세졌다.소만리가 오는 걸 보더니 기모진은 비를 맞으면서 그녀를 위해서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차에 타자 소만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 있다는 거죠?”“그 동안 미립 씨를 괴롭히던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무슨 말씀이세요?”소만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운전하는 남자를 쳐다봤다.어둑어둑한 차 안에서 희미한 빛이 그의 결연한 옆모습을 비췄다. 소만리는 웃음을 띤 기모진의 얼굴을 흘끗 봤다.“별 거 아닙니다. 그냥 밥이나 한 끼 하려고요.”그가 말했다.“이제 다시는 당신을 그녀로 착각하지 않을 겁니다.”“그녀요?”“제 전처 말입니다.”기모진은 대답하며 악셀레이터를 밟았다.바퀴가 비에 젖은 길가의 낙엽을 감아 올렸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을 소리 없이 휘감아 사라지는 듯 했다.소만리는 기모진과 식당에 가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가 그녀를 데리고 별장으로 갔다.예전에 그녀가 살았던 바로 그 별장을.집이 조용한 것이 아마도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듯 했다.‘기란군도 없나?’양육권을 다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란군은 소만영이 데려갈 텐데, 아이가
벨을 누른 것은 소만영이었다.소만리는 깜짝 놀랐다.‘3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소만영은 이 집 열쇠를 안 가지고 있단 말이야?’이상한 생각이 들어 기모진을 바라보니 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뭔가를 중얼거리는 듯 했다.“문 안 열어도 되나요? 소만영 씨가 왔나 봐요. 어쨌든 애 엄마잖아요.”소만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기모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금방 다녀올 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네.”소만리가 웃으며 끄덕였다. 돌아서 나가는 기모진의 뒷모습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흥, 역시나 내치지는 못하겠나보군.’밖에는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을 여니 늦여름 밤바람이 불었다. 꽤나 차가웠다.“드디어 날 만나주는 구나.”소만영이 절박하게 기모진에게 달려들었다.우산도 없이 온 몸이 젖은 것을 보니 비를 맞으며 달려온 듯 했다.기모진을 보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상 억울하다는 듯 목이 메였다.“그때 내가 너무 철이 없었던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 첫 아이를 생각해 봐. 만리 그 독한 년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거야……”“난 우리 란군이를 납치하거나 해치려던 게 아니야. 육정한테 우리 란군이를 잘 돌보라고 했어. 내가 그런 짓을 했던 건 그저 우리 첫 아이 일로 너무 속상해서……”소만영은 말하면서 손으로 기모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기모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자기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응? 지나간 일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사는 거야, 응?”또다시 소만리를 모함하며 지난 잘못을 모두 그녀에게 뒤집어 씌우는 소만영의 위선적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똑똑히 들렸다.소만리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가만히 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손을 놓았다. 와인 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났다. 붉은 액
안 그래도 요즘 소만영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인데 기모진의 집에 천미랍이 있는 꼴을 볼 줄이야!그건 그렇다고 치고.테이블 위의 이 화려한 만찬과 기모진이 잔뜩 놀라서는 천미랍의 손을 잡고 상처를 보고 있는 꼴이라니!“그냥 스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소만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움츠렸다.“작은 상처라고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됩니다. 알코올을 가져올게요.”기모진이 다정하게 말을 하며 일어섰다. 소만영이 따라 들어온 것을 봤지만 흘끗 보더니 그대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가버렸다.“고마워요.”소만리가 인사를 하면서 천천히 일어났다.고개를 들다가 그제야 어두운 얼굴을 하고 온 몸이 젖은 소만영을 본 듯 말했다.“어머나 또 만나네요.”소만영은 열불이 뻗쳤지만 억지로 웃음을 띠며 걸어갔다.“천미랍씨, 내 약혼자 집에서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그 말을 듣더니 소만리가 웃었다.“약혼자라니요? 기모진씨는 당신하고 파혼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이게, 야, 너 지금 그거 무슨 뜻이야?”소만영의 얼굴에서 가식적인 웃음이 싹 사라지더니 두 눈을 부릅뜨고 소만리를 노려봤다.“천미랍, 내가 다 알아. 너 네 그 상판으로 우리 모진 씨를 꼬드기려는 거지?”“그러면 또 어때서요?”소만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고 웃었다.“기모진 씨 같은 남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하죠.”“이게……”소만리의 말을 들은 소만영이 폭발했다. 화가 나서 손찌검을 하려고 소만리의 얼굴을 향해서 손바닥을 휘둘렀다.“이 년이!”소만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어 소만영의 손을 잡았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소만영의 뺨을 후려쳤다.“짝!”뺨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소만영은 졸지에 당한 일에 놀라서 눈이 커졌다.“이, 이게 감히 날 때려? 천미랍, 나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나한테 맞선 것들은 좋게는 못 끝나. 소만리도 그랬지만, 너도 마찬가지야!”그녀의 악랄한 경고가 끝날 때쯤 기모진이 돌아왔다. 그걸 보더
“모진아, 뭐라고?”소만영은 냉엄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나가라고.”그는 소만영에게 조금이지만 정이 남아있는지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소만영은 기모진의 등 뒤에서 씩 웃고 있는 소만리를 발견하자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그러나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던 소만영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기모진의 앞에 서서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모진아.”소만영의 두 눈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서글픈 표정으로 냉담해진 기모진을 바라보았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너한테 실망을 안겨줬어. 그런데 난 모두 란군이와 너를 위해 벌인 짓이었어. 난 단 한 번도 무고한 사람을 해친 적이 없어.”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모습은 몹시도 처량해 보였다.“모진아,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아무 소용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 결백해. 네가 날 믿을 때까지 난 계속 기다릴 거야.”기모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만영은 몸을 돌려 쓸쓸히 집을 나섰다.소만리가 창문 밖을 내다보자 비를 맞아 온몸이 흠뻑 젖어 있는 소만영을 보았고, 그녀의 얼굴엔 집념이 가득했다. 상황은 늘 이렇게 놀랍도록 비슷했다.소만리는 소만영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나온 뒤, 기모진에게 버림받아 임신한 채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그의 신뢰를 애타게 구걸했지만 돌아온 것은 그녀의 가슴 아픈 결말뿐이었던 기억을 되짚었다.소만리는 싸늘한 눈초리로 소만영을 흘긋 보고는 곁눈질로 기모진이 창밖의 소만영을 바라보는 무거운 표정을 보았다.기모진, 그래도 가슴이 아프구나? 네가 몇 년 동안 목숨 걸고 애지중지 한 사람이니까.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진은 시선을 소만리에게로 돌렸고, 그녀의 유리 조각이 박힌 손을 잡고는 그것을 알코올 솜으로 닦아낸 뒤 반창고를 세심하게 붙여 주었다.“마저 밥 먹죠.”그는 입꼬리를 올려 보였지만 진짜 웃는 얼굴이 아니라 근육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소만영을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냥 관둬요.”소만리가 웃으며 거절했
기모진은 소만리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같이 술잔을 들었다.“이 한 잔으로 아까 그 사람이 당신을 때린 거에 용서를 구하죠.”기모진은 이 말을 하며 술잔에 든 와인을 마시고 다시 한 잔을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이 잔은 이렇게 아름다운 미랍 씨를 친구로 사귄 걸 축하하며.”그는 말을 하며 몇 잔을 계속해서 들이켰다.밤이 점점 깊어져 가자 비도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기모진도 와인 한 병을 다 마신 뒤였다.백옥 같던 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날카롭던 눈도 술이 들어가니 풀려있었다.“미래의 숙모님, 제가 데려다 드리죠.”기모진은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그는 만취 상태였다.“모진 씨는 아무래도 쉬는 게 좋겠네요, 저는 묵비 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돼요.”“그 사람이요?”기모진의 낮은 목소리로 웃는 소리는 사람을 미혹되게 만들었다.그가 웃으며 소만리를 바라보았고, 등불의 빛이 그의 시선을 흐리게 만들자 그의 눈앞에는 그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얼굴이 있었다.“그래도 내가 바래다줄게요.”기모진이 고집을 부리며 몸을 일으켜 소만리 쪽으로 향했다.그러나 그는 술에 취해 몸을 휘청거리며 그녀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쓰러질 위기였다.소만리는 받아 줄 마음이 없었지만 창밖에 있는 소만영을 의식하자 손을 뻗어 기모진을 부축했다.그는 몸을 완전히 그녀에게 맡겼고 그녀는 그가 완전히 취했다고 확신했다.“모진 씨, 여기 잠시 앉아 있어요.”소만리가 힘겹게 그를 소파로 부축해왔다.그녀는 방 안의 불빛이 더 환하면 소만영이 밖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소만영이 화가 나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 눈에 선했다.“모진 씨, 너무 취했어요. 레몬 차를 좀 끓여줄 테니까 술 좀 깨요.”소만리가 손을 빼서 몸을 돌리려는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가지 마요.”그가 속삭이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만리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 반쯤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술에 취해 빨개진 몽롱한 얼굴로 주절거렸다.“리야……
소만리는 한평생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기모진을 매우 사랑했던 그 느낌들을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그 물건을 그녀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었다.그녀는 넋이 나간 채로 손을 뻗어 바닥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었다.이 물건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바닷바람의 짠 내음이 풍겨져 옴과 동시에 남자아이의 온화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리야, 내가 크면 널 내 신부로 만들 거야...”하지만 이 약속은 결국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바다 저 깊은 곳까지 침몰했다. 이번 생에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리야...”소만리는 회상을 멈추고, 잠꼬대하는 기모진을 바라보았다.그는 아직도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부르는 리는 그녀가 아닌 소만영이었다.그는 줄곧 원칙도, 제한도 없이 그 악독한 여자를 사랑했다.소만리는 손에 든 조개껍질을 쳐다보며 냉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상황에서 기모진의 몸에서 어릴 적 그녀가 그에게 준 조개껍질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기모진, 네 마음속엔 소만영밖에 없는데, 아직도 이걸 가지고 있다고? 널 십몇 년 동안이나 기다려온 리는 이미 죽었어.”그녀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술에 취해 몽롱한 얼굴을 한 그를 흘긋 보고는 조개껍질을 들고 휴지통에 던지려는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중얼거렸다.“리야, 가지 마. 제발 떠나지 마...”소만리는 잠꼬대를 하는 그를 바라보며 가소로운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기모진, 네가 사랑하는 천리는 밖에서 연기하고 있잖아. 그렇게 그 사람이 보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찾아!”소만리는 차갑게 말을 한 뒤, 기모진을 소파에 밀치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그녀가 문을 열자, 비를 맞고 서 있는 소만영의 얼굴에 환희의 웃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문을 연 사람이 소만리인 것을 발견하자 그녀는 순간 정색하며 소만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소만리는 그녀를 한 번 흘겨보고는 우산을 쓰고 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