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가 그 말을 하는 동시에 기모진의 품은 텅 비었다.삽시간에 그의 심장으로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그는 그제서야 꿈에서 깬 듯 했다.눈 앞에 있는 그 얼굴을 보고서야 기모진은 방금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을 뿐 아니라 그녀를 탐욕스럽게 안았다. 심지어 그녀도 마음 아파하며 자신을 꽉 안아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전례가 없던 일이었다.그러나 이게 다 순전히 그 얼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예전의 그녀와 똑같은 그 얼굴.“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왔어요?”반기는 듯한 소만리의 목소리에 모진은 정신을 차렸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약혼자가 왔어요.”‘약혼자?’“손님이 오셨나?”남자의 목소리가 저만치서부터 다가왔다.기모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하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낯선 목소리도 아니었다.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미랍의 약혼자라면 정말이지 깜짝 놀랄 노릇이었다.“모진이, 너냐?”기모진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검은 양복을 입은 기묵비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어깨는 밖에 내리는 비로 점점이 젖어 있었지만 신사적인 그의 풍모를 해치지는 않을 정도였다.두 쌍의 검은 눈동자가 마주쳤다.깊은 밤의 그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일순 불꽃이 이는 것 같았다. 기모진의 눈에서 한 줄기 불길이 타오르는 듯 했다.“누구신가 했더니......”기모진이 천천히 일어섰다.이때 소만리가 미소를 띠고 기묵비의 옆으로 다가가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껴안았다.“제 약혼자 기묵비 씨에요.”웃으며 소개를 하더니 의문에 찬 눈동자가 기묵비의 온화한 얼굴로 향했다.“방금 ‘모진이’라고 하던데 두 분 아는 사이에요? 아, 이제 보니 두 분 다 기 씨……”“내가 전에 말했던 조카가 바로 모진이야.”기묵비가 서두르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창 밖의 밤처럼 부드럽
소만리는 고개를 저었다.“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했어요. 아니었으면 기모진이 그렇게 번번이 날 ‘그 죽일 놈의 전처’라고 의심하진 않았을 텐데.”소만리는 치가 떨리도록 분한 마음을 실어 이 말을 뱉었다. 그러나 기묵비를 보더니 곧 웃었다.“걱정 하세요. 더 이상은 그 바보 같던 소만리가 아니에요. 제게 주신 ‘부활’의 기회를 절대 헛되이 버리지 않을 거예요.”기묵비는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 은은히 신비로운 느낌이 감돌았다.소만리는 비에 젖은 기묵비의 외투를 벗기고 새 목욕용품을 건넸다.그는 목욕을 하고 하얀 가운을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나왔다.그는 자연스럽게 소만리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귀염둥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묵비는 천천히 몸을 기울여 사랑스럽다는 듯 염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방 치워놨어요.”소만리가 가만히 방으로 들어왔다.기묵비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며칠 있다가 본가에 한 번 가야 하는데 같이 갑시다.”“네.”소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른 쉬어요. 잘 자요.”기묵비는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담담한 입술이 소만리의 이마에 닿더니 얼마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휙 돌아서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소만리는 약간 얼이 빠진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그녀도 바보는 아니다. 기묵비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도와주는 데는 그녀를 향한 남자로서의 마음이 있을 터였다.6년 전 소만영이 목걸이 사건으로 모함을 할 때도 그녀가 결백을 증명할 수 있을 영상을 찍어 은근슬쩍 그녀를 도와주었다.그러나 기묵비와 함께한 지난 3년을 돌이켜 보면 그는 너무나 신비했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다.그는 내내 신사적이었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듯 했다.쓸데 없는 생각을 털어내려고 소만리는 고개를 흔들었다.기모진은 나가서는 차에 앉아 있었다. 소만리 네 아파트 불이 꺼졌다.“기묵비”그의 입에서 기묵비의 이름이 터져 나왔
인파 사이로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소민리의 심장이 훅 조여왔다.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그러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이 기모진에게 다가갔다.“브런치를 사겠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가요?”그녀는 웃었다. 비 온 뒤의 아침 햇살이 청순한 얼굴에 비쳐 밝게 빛났다.기모진은 어딘가를 휙 돌아보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예비 숙모께서 제가 체면 차릴 기회를 안 주시는 건가요, 아니면 삼촌이 질투할까봐 걱정 되십니까?”“무슨 이런 일로 질투를 하겠어요?”소만리는 침착하게 웃고 있었지만 심장은 두근대고 있었다.아직도 그 익숙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만리야~”그 목소리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점점 더 가까워졌다.그러나 그녀는 태연히 기모진을 따라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만리야!”카페에 들어서려는 순간에 그 사람이 소만리의 앞으로 뛰어들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만리야! 진짜 만리잖아!예선은 한껏 흥분해서 소만리의 손을 잡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려 화장이 다 얼룩질 판이었다.“만리?”소만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소만리 씨 예전 친구이신가 보네요. 아가씨도 절 소만리라고 착각하셨나 봐요?”소만리의 대답을 듣고 예선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어리둥절해서 서있었다.“착각이라니? 만리야, 이게 무슨 일이야? 여긴 어떻게 왔어?”예선은 의문투성이인 채였지만 어쨌든 만리를 만났다는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그녀는 팔을 활짝 벌려 소만리를 껴안아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실체라는 느낌을 만끽했다. 예선의 목소리가 떨렸다.“만리야, 너구나! 정말 잘 됐다! 만리가 살아 있었어!”그녀는 흥분에 겨워 소만리의 손을 꼭 쥐고는 기모진을 쌩 하니 노려봤다.“근데, 왜 저 쓰레기랑 같이 있어? 저놈이 소만영이랑 널 거의 죽일 뻔 했잖아! 어떻게 용서를 할 수가 있어? 가자! 이런 쓰레기랑 같이 있지 말고!”예선은 울분에 차서 기모진을 노려보더니 소만리를 끌고 가려고 했다.그러나
기모진의 눈이 소만리의 우아한 뒷모습을 보더니 조용히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정말 저 사람이 소만리라고 생각하나?”“당연히 만리지!”예선이 확신에 차서 내질렀다.“기모진, 경고하는데, 다시는 우리 만리 건드리지 마라. 한 번만 더 우리 만리 다치게 하면 이제는 너 죽고 나 죽는 거야!”예선의 경고를 들은 기모진의 입술이 자조적으로 올라갔다.‘친구 조차도 그녀를 위해서 이렇게 필사적인데남편이라는 나는 도대체 뭐였나?’기모진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소만리는 차에 앉아서 곁눈질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멀어져 가는 예선의 뒷모습을 봤다. 예선이 멀어져 가며 그녀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팠다.‘예선아, 미안해.나는 이제 네가 알던 소만리가 아니야.이 복수를 끝내면 그때 그 만리가 널 찾아가서 사과할게.’소만리는 시선을 거두었다. 차가 막 한 블록을 지났을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차 세워요.”기모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안색이 사뭇 어두웠다.그는 차를 세웠다. 소만리는 차에서 내리더니 그대로 걸어갔다.기모진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차에서 내려 급히 쫓아갔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았다.“어디 갑니까?”손목을 잡히자 그녀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아까는 사람이 많은 데라서 체면 차려드린 줄 아세요. 이렇게 자꾸 내가 소만리가 아닌지 확인하려고 드는 거 정말 짜증나네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매우 불쾌하다는 뜻을 한껏 드러냈다.“애초부터 나랑 브런치 따위 먹을 생각은 아니었을 걸요. 소만리 씨의 친구가 거기 지나다니는 걸 알고 있어서 일부러 날 데리고 간 거잖아요, 아닌가요?”“맞습니다”기모진이 깨끗하게 인정하더니 그윽한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보았다.“내 처랑 완전히 똑같이 생긴 건 그렇다 칩시다. 그러나 내 전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기묵비의 예비신부다? 이건 의심이 안 들 수 없다 이겁니다.”소만리는 그 말을 듣더니 가볍게 웃었다.“이 넓은 세상에 별별 일 다 벌어
사고가 나기 일보직전, 기모진이 손을 뻗었다. 와락 소만리의 손목을 잡아 당겨 있는 힘껏 그녀를 품으로 그러안았다.노란 불에 건너려던 그 차는 소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기모진은 너무 와락 힘을 쓰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힘껏 안고 있던 그녀도 그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퍽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걱정 마, 다 괜찮아.”소만리는 희미하게 기모진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기모진의 팔에 꽉 갇혀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무의식 중에도 그녀를 보호하려고 그랬는지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고 있었다.소만리는 그렇게 기모진 위로 엎어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특유의 차가운 향이 풍겨왔다. 기억에 선명한 익숙한 향이었다.그녀는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날뛰는 것이 방금 날 뻔한 사고 때문에 놀라서 그런 것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차가운 바람이 휙 불었다. 소만리는 그제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이제 좀 놔주시죠.”기모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그는 천천히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방금 저도 모르게 나왔던 ‘만리야’라는 말이 생각났다.“고맙습니다.”소만리가 일어서며 인사했다.기모진도 일어서며 눈 앞에 조금도 다치지 않은 여자를 보고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소만리는 뭔가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선혈이 낭자한 기모진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어젯밤 그녀가 치료해 주었던 위치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가방에서 알코올 물티슈를 꺼냈다. 기모진의 손을 잡고 상처 부위를 간단히 처치하고는 손수건으로 싸맸다.기모진은 꼼짝도 않고 세심하게 자신의 상처를 처치하는 소만리를 바라보았다.집중하는 눈 위로 곱게 뻗은 눈썹이 보였다. 가느다랗게 깜빡이는 그 속눈썹이 하나하나 깃털처럼 자신의 심장에 떨어져 사르르 감싸는 것만 같았다.심장이 제멋대로 두근대는 걸 느꼈다.“감사합니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소만리는 손을 놓고는 벌떡 일어났다.“모셔다
소만영은 다급히 대답했다.“걱정 마. 내일 저녁에 아빠랑 엄마 모시고 시간 맞춰 갈게.”“좋아.”기모진은 이 말을 마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꺼지는 화면을 보며 그의 눈에 비밀스러운 빛이 감돌았다.소만리는 그대로 아파트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 기묵비가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그는 편안한 옷을 입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우아하게 토스트를 먹으며 핸드폰으로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소만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는 따스한 웃음을 지었다.“Miss l.ady 영업 실적이 나날이 오르네요. 당신이 디자인한 액세서리가 인기가 좋군요. 이번 GMA 국제쥬얼리디자인대회에서 수상할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그리고 조향에 필요한 재료를 가져왔으니 걱정 말고 여기서 꿈과 사업을 펼쳐봐요.”기묵비의 말을 들으며 소만리는 감동했다.“감사해요.”기묵비는 빙그레 웃었다. 신비로운 긴 눈이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난 당신의 감사를 바라지는 않아요.”그의 목소리는 봄바람마냥 부드러웠다.좀 얼떨떨해 하는 소만리를 보며 기묵비가 웃었다.“걱정 말아요. 아무것도 억지로 요구하지 않아요. 당신을 기쁘게만 할 수 있다면 난 영원히 당신의 기사가 되고 싶을 뿐이오.”소만리는 그 다정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마음이 따스해졌다.그 웃음이 그녀의 마음 속에 드리워진 어두운 안개를 걷어내 주었다.3년 동안 기묵비가 함께 하며 응원해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그녀는 있을 수 없었다.다음 날 저녁.소만리는 기묵비를 따라 그의 본가에 갔다. 그는 한 손 에는 선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소만리의 손을 잡고 별장 정원으로 들어섰다.집사가 기묵비를 보더니 급히 어르신께 보고했다.방에서 쉬고 있던 할아버지의 느슨해졌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3년 전 기묵비가 본가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지 않았지만 매번 그런 핑계를 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소만리는 할아버지를 무척 뵙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사화정과 소만영이 소파에 앉아 기모진의 어머니와 즐겁게
모두들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당황한 가운데 기모진이 주머니에서 진한 남색의 벨벳 반지함을 꺼냈다.그는 소만리를 향해 그 벨벳 반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소만영이 기모진이 손에 든 반지함을 보고는 놀라서 황급히 말했다.“지, 지금 뭐 하는 거야?”놀란 와중에도 웃음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오늘 우리 엄마 아빠 모시고 오라는 게 나한테 청혼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어? 이 다이아 반지 나한테 주는 거지, 응?”소만영은 기대에 가득 차서는 기모진의 냉랭한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기모진은 곁눈질로도 소만영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반지를 꺼내더니 기묵비가 잡고 있는 소만리의 왼손 쪽으로 손을 뻗었다.소만리가 얼른 손을 뺐다.“기모진 씨, 뭐 하세요?”기묵비가 소만리를 감싸며 나섰다.“모진아, 미랍 씨랑 만리가 닮기는 했지만, 전에도 말했 듯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야.”“이렇게 놀라시다니.”갑자기 기모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그저 예비 숙모께 드리는 선물일 뿐입니다.”“선물이라니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다이아몬드 반지는 함부로 선물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약혼녀께서 질투하시겠어요.”소만리가 웃으며 완곡히 거절하며 아까부터 웃음을 거두고 얼굴이 일그러진 소만영을 흘끗 봤다.“만영이가 왜 질투를 해요!”기모진의 어머니가 나서며 소만리를 쏘아봤다.“천미랍 씨, 그 망할 모진이 전처랑 닮았다고 모진이가 특별한 감정을 느낄 거라고혼자서 김칫국 마시지 말아요.”그녀는 경멸하듯 웃었다.“소만리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 완전히 찍혔다고요! 게다가 모진이가 걔를 얼마나 증오했는데. 걔가 죽어버려서 우린 다들 얼마나 시원했다고요. 모진이도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 우리 예비 며느리가 이런 걸로 질투할 거라고 생각지 말아요! 모진이랑 만영이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 둘이 낳은 애도 벌써 다섯 살이나 되었고!”소만영이 듣더니 곧 미소를 되찾고
소만영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새마냥 기모진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엄마 아빠, 걱정 마세요. 모진 씨는 날 잘 돌보아 줄 거예요, 그렇지?”그녀는 촉촉한 눈으로 기모진을 올려다 보았다. 마침 내려다 보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그런데 너무나 싸늘한 그의 눈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모, 모진 씨……”“난 너와 파혼을 선언하려고 해.”“......”“…… 뭐라고?”소만영은 그 순간 굳어버렸다. 사화정, 모현, 기모진의 부모님도 모두 깜짝 놀랐다.소만리는 침착하게 보고 있었지만 내심 이상하게 생각했다.‘기모진이 소만영과 파혼을 하려고 하다니?’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그는 소만영의 이런 청순가련한 모습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오랜 세월을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그런데 어쩌다가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일까?“여보게, 이게 무슨 소린가? 어떻게 우리 만영이랑 파혼을 해. 만영이가 자네 애까지 낳았는데!”사화정이 울컥하더니 소만리를 가리켰다.“이 여자 때문인가?”기모진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에 힘을 주었다.“그 분과는 무관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소만영을 쳐다보았다.“그 날 아침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하겠지?”소만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기모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네가 만약 란군이 납치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약혼 무효를 선언할 거야.”순간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됐다.“결국 날 안 믿어 주는 거야? 말했잖아, 난 란군이 납치에 간여한 적이 없어. 란군이는 내 아들이라고! 내가 어떻게 누군가와 짜고 그 아일 납치해? 내가 왜 그러겠어?”소만영의 다급한 해명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기모진이 파혼을 선언한 배경을 알게 됐다.“소만리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가 만리를 증오하게 만들려고.”기모진이 평온한 말투로 말을 받았다.소만영은 당황했다.“나, 난 아니야! 육정 같은 건달의 말만 믿고 날 판단하지 마. 우리가 같이 한 세월이 얼마인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