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리는 침묵을 유지했다. 원래는 적어도 한달의 시간이 있었다. 한달이라는 시간이 있으면 그녀가 증거물을 챙기고 경찰서로 가서 소만영을 살인혐의로 고소할수 있었다.병원을 나온 소군연은 목적지 없이 그저 시내를 돌고 돌아 길가의 가게에서 멈췄다. 소군연은 소만리를 바라보며 따뜻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만리야, 혹시 나랑 같이 마라탕 한그릇만 더 먹지 않을래?”소만리는 좀 예상외였지만 그의 눈에서 눈물이 보이자 그녀는 뭔가 느낌이 왔다. 소군연은 소만리가 오래 못 사는걸 직감한건가..?소만리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었다.”당연하죠! 앞으로도 여러번 먹을수 있어요!”“진짜?” 소군연은 기대에 찬 두 눈으로 소만리를 바라봤다.“네, 진짜죠!” 소만리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소만리는 소군연과 마라탕을 먹으면서 대학교시절 이야기를 했다.소군연은 솔직하게 말했다.소만리가 대학교에 입학한 그 날 한눈에 반했다고 그러나 그녀는 기모진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하지만 소만리 본인만 알고 있었다. 기모진에 한 눈에 반한게 아니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또 반한거를…다 먹고 소군연은 소만리를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는 올라가서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와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눈에서 점점 멀어지는 소만리를 보자 소군연은 못 참고 차에서 내려 그녀 앞으로 뛰어갔다. 소만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소군연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벼운 뽀뽀를 남겼다. “만리야, 난 네가 좋아.” 그는 말을 다 하고 차를 타고 갔다.소만리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앞머리를 스쳐 그녀는 아직도 소군연의 온기가 남아 있는거 같았다. “소만리!” 방황하던 찰나 소만리는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들었다. 소만리가 황급히 뒤 돌자 기모진이 아파트에서 내려오는게 보였다.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깊은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파란이 없었지만 그의 몸에서 나온 한기는 그녀를 무섭게 했다.소만리
소만리는 창백하게 질려 도망치려 했으나 꼼짝없이 갇혔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볼을 꼬집어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싫어! 기모진, 나 만지지 마! 이거 놔!” 소만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군연이 뽀뽀해 주는 건 좋고, 내가 만지는 건 그렇게 싫어?”소만리가 저항하자 기모진의 얼굴빛은 서리처럼 어두워지고, 눈빛은 살기로 가득했다. "소만리, 잘 봐, 내가 네 남편이야."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소만리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몇 초 후, 소만리는 어깨를 물린 기분이었다."기모진, 싫어!"기모진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소만리는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소만리는 지쳐 깊은 잠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꿈꿨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현실은 악몽처럼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기모진은 여전히 소만리를 가두고 옆에 누워있었다. 소만리는 멍하니 창밖의 달빛을 바라봤다.사랑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찢어지게 아픈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이제 더 이상 기모진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왜 나를 계속 괴롭히는 거지?기모진, 나한테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그 후 소만리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른 채 깨어났다. 기모진은 이미 곁에 없었고, 그의 체온마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만리는 다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샤워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기모진의 숨결과 체취는 씻기지 않는 듯 했다.소만리는 옷을 대충 입고 창백한 얼굴로 집 밖을 나가 마치 넋이 나간 듯 무작정 걸었다. 그녀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 다만 어젯밤 기모진에게 농락당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고, 소만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그녀가 집에 도착해 문을 막 열려고 할 때, 누군가 대문을 열었다. 소만리는 집에 도둑이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소만영이 공주 같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옆에 건장한 두 남자가 서있었다. 그들은 소만리가 깨끗하게 청소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놨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
소만리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눈을 뜨자 소만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깼어? 죽은 줄 알았는데, 네가 죽으면 재미없지."소만영은 피식 웃으며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소만리의 뺨을 움켜쥐었다.소만리의 얼굴은 반쪽이 다쳤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 소만영은 질투했다."소만리, 내가 널 만만하게 봤어, 이런 상황에서도 남자 꼬실 생각을 하다니!"소만영은 아직 아물지 않은 소만리의 상처를 꼬집었다.“모진이 어떻게 꼬셨어? 네 그 애처로운 눈빛으로?”소만리는 소만영의 말을 듣고 알아차렸다.소만영은 어젯밤 기모진이 소만리 방에서 밤을 지새운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게다가 소만영은 기모진과 소만리가 침대에서 나뒹구는 모습을 상상했다.소만리는 피식 웃으며 소만영을 비웃었다.“화난 거야? 기모진도 너를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나 봐, 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어떻게 다른 여자랑 같이 잠을 자?"소만리 너...."소만영은 분노해 더욱 세게 소만리의 상처 난 볼을 꼬집었다. 아물기 시작한 상처에 다시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오자 소만영은 웃음을 띠었다.소만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소만영은 소만리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소만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화가 난 소만영은 소만리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마침내 소만리가 참다못해 소리를 냈다. "소리 내봐! 소만리, 이 천한 년! 그러게 누가 모진이 꼬시라고 했어. 이혼도 안하고""하하......나 모진이랑 이혼 안해! 소만영, 넌 평생 제3자야!" 소만리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소만영을 노려봤다.소만영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소만리의 아름다운 눈을 보며 다시 소만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소만리, 너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해! 네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네 천한 목숨은 기껏해야 석 달 밖에 안 돼!"소만영은 소만리를 호되게 꾸짖으며 분노했다."천한 년! 너 뭘 믿
소만리는 마취약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팔뚝이 저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이 흐릿해지며 어두워졌다.밤이 된 건가?소만리는 갑자기 기절하기 전에 소만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녀는 흠칫 놀라며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으로 어둠 속에서 손을 뻗으며 바닥을 더듬거렸다.사진...딸 사진!소만리는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사진을 찾고 있었지만 그 무엇도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었다.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눌렀다. 하지만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건지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갑자기 딱딱한 카드 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닿은 것 같았다. 소만리는 이것이 기절하기 전 소만영이 던진 사진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흥분하며 사진을 눈앞에 갖다 댔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일으켜 조명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눈앞이 온통 어둡고 흐릿했으며, 특히 눈이 매우 아팠다.그녀는 벽을 따라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눈가에 어른거리는 빛이 밝아왔다. 소만리는 눈을 크게 뜨고 손안의 사진을 보려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눈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머릿속에서 소만영의 음흉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만리는 온몸이 싸늘해졌다. 소만리는 확신하지 못한 듯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어루만졌다.그녀는 손바닥을 눈앞에 갖다 댔지만 눈에는 뿌연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예전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소만리는 실명됐다.소만리는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고, 지나가던 사람과 부딪혔다. 부딪힌 사람은 얼굴 전체에 핏자국을 하고 넋을 잃은 소만리를 보고 병원에 데려갔다.검사가 끝난 후 의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사 결과지를 바라보았다. "소만리씨, 왼쪽 눈 각막이 손상됐어요. 오른쪽 눈 각막은 실명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시력을 회복하고 싶으면 양쪽 눈 각막을 모두 이식해야 합니다.”청천벽력 같은 의사
경찰서를 나온 소만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소만영의 죄를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귀걸이에서 모보아의 피가 검출된다면 소만영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 없다. 소만리는 경찰의 답변을 기다렸지만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그녀는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소만리는 경찰서 입구에서 소만영과 기모진을 마주쳤다.소만리는 먼 곳의 사람이 누군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빗속에 우산을 들고 멀리서 호소하는 소만영의 목소리를 들었다."모진아, 만리는 왜 아직도 날 가만두지 못하는 거야? 내가 죽어야 만족하는 것 아니야?" 소만영이 말을 끝내고 그제야 소만리를 본 듯 놀라며 말했다. “만리?”소만리가 눈을 크게 뜨자 소만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만리야, 내가 어떻게 해야 날 안 괴롭힐 거니? 왜 내가 보아를 죽였다고 하는 거야? 보아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인데 어떻게 내가 보아를 죽일 수 있어! 그 귀걸이 내가 보아한테 선물 한 거니까 보아 핏자국이 있는 게 당연하지!" 소만영은 억울한듯 울며 말했다.소만리의 차분하게 웃으며 말했다."모보아는 네가 죽였어, 그렇게 말 하면 네 죄가 지워질 것 같아? 소만영,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거야.”"만리, 너....""아무리 연기 잘하고 네 눈물이 진짜여도 내 앞에서는 소용없어. 내가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네 그 추악한 마음은 보여!” "그만해! 기모진의 포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소만리는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으로 우산을 꽉 잡았다.소만리의 맑고 투명한 큰 두 눈이 아무런 빛이 없는 앞을 바라봤다.투명한 빗발 너머로 화가 난 기모진의 모습이 소만리 왼쪽 눈의 잔광속으로 희미하게 들어왔다.기모진은 소만리 앞으로 가 소만영을 뒤로 감쌌다。"소만리, 내가 몇 번이나 경고했는데, 다시는 만영이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기모진의 냉혹한 목소리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분노가 묻어났다.소만리는 앞이 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소만리는 무릎을 꿇고 젖은 바닥을 더듬었다. 도로의 차들이 지나가면서 빗물이 그녀의 몸에 튀었다. 그러나 소만리는 여전히 우산을 찾지 못했다.기모진이 시동을 걸려고 하자 눈길이 저절로 백미러로 갔다. 소만영은 일찍이 알아차리고 서둘러 기모진의 관심을 돌렸다.“모진아 우리 어서 가자, 군군이 얼굴 재검사하러 가야해.”기모진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걱정 마, 군군이 얼굴에 흉터가 남지 않을 거야.""만리가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몰랐어, 우리 아버지가 군군이랑 나 때문에 화나서 사람 시켜서 소만리 얼굴에 칼 자국 낼 줄도 몰랐어.” 소만영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모진아, 우리 아버지 탓하지 않아?""바보, 내가 어떻게 네 아빠를 탓하겠어." 기모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기모진의 시선은 다시 힐끔힐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만리가 우산을 쓰고 일어서서 점점 멀어지자 왠지 모를 웃음을 지었다."소만리는 얼굴에 상처가 나도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누가 자기한테 이렇게 악랄한 짓 저지르라고 했어?”기모진의 언짢은 표정과 분노를 보고 소만영은 속으로 기뻐하면서 겉으로는 여전히 여린 척했다. "모진아, 이제 곧 네 아내가 된다는 게 너무 기대돼. 그거 알아? 그해 너랑 해변에서 헤어지고 매일 너를 그리워했어, 너의 아내가 되는 이 날을 항상 기다렸는데, 드디어 그날이 왔구나."기모진은 소만영의 말을 듣고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소만영을 바라봤다."너랑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거야.""응." 소만영은 달달한 미소를 지었지만 눈에는 질투가 가득했다. 기모진이 자신에게 약속을 했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소만영은 소만리가 완전히 죽어야만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소만리는 집으로 돌아와 진통제부터 먹었다. 계속되는 아픔에 그녀는 한 달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얼마 전 기모진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소만영을 아내로 삼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수많은 개미가 물어뜯는 듯한 아픔이
기모진의 얼굴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소만리, 사인하라고." "나는 사인 못 해." 드디어 입을 연 소만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소만리는 기모진 앞에 앉아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른 곳만 쳐다보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기모진이 화를 내며 말했다. "소만리, 더 이상 내 인내심 테스트하지 마, 너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잘 알잖아.” 소만리는 기모진이 위협하는 협박에도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기모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할게, 이혼 합의서에 사인 안 할 거야, 소만영하고 결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너 중혼죄를 고발할 거야!”"소만리! 나도 마지막으로 물을게, 너 도대체 사인할 거야 안 할 거야!" 기모진이 분노하며 말했다."사인 안 해!" 소만리의 태도는 단호했다.기모진의 얼굴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여전히 소만리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성큼성큼 그녀 앞으로 다가가 소만리의 손에 펜을 쥐어 넣고 오른손을 꽉 잡았다. "기모진, 너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소만리는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다."사인 안 하는 거 아냐? 내가 도와줄게!" 기모진의 매서운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듯 소만리 귀에 울려펴졌다.소만리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발버둥칠수록 종양과 그녀의 마음이 심하게 아파졌다. "기모진, 넌 사람도 아니야! 내가 죽는다 해도 너와 소만영의 소원 이루게 할 수 없어!" 소만리는 그를 힘껏 밀치고 달아났다. 그러나 실명한 소만리는 내딛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험했다. 소만리는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물건에 걸려 넘어져 극심한 아픔이 온몸에 퍼졌다.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할 때 기모진의 큰 몸집이 다가왔다. 소만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감싸는 것만 느껴졌다.기모진은 소만리의 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무릎으로 소만리의 등을 짓밟으며 이혼 합의서와 펜을 소만리 앞에 던졌다."소만리, 사서 고생하지 마, 네가 얌전히 사인만 하면 돈 줄게.”
기모진의 말과 함께 소만리는 오른쪽 손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강제로 잡아 이혼 협의서 서명란에 ‘소만리’ 세 글자로 써넣었다.소만리의 이름이지만 기모진의 필적이었다.사인을 다 하자 기모진은 그녀의 손을 놓고 이혼 합의서를 가졌다. 합의서의 사인을 보고 그의 마음은 오히려 이유 없이 불편하고 홀가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소만리가 아직도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을 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눈물을 머금고 입술은 깨물어서 피가 난 것 같았다. 소만리의 모습이 너무 처량했다.기모진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만리, 원하는 거 있어?”"9000만원." 소만리는 곧바로 대답했다.기모진이 듣자마자 경멸하며 차갑게 웃었다. "너도 다 생각이 있었구나. 사람 시켜서 네 계좌로 바로 9000만원 입금 해줄게.”그의 말이 끝나자 휴대폰이 울렸다.그가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소만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소만리는 기모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알았어, 바로 갈게.”그리고 잠시 후 기모진이 돌아서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남은 한 줄기 빛은 그가 돌아서면서 조금씩 어두워지고, 꺼지며 마침내 어둠이 되었다.소만리의 몸에서 순식간에 무언가 부서졌다. 그 부서진 부스러기는 가시덤불처럼 그녀의 심장을 매섭게 찔렀다. 그녀는 모든 빛을 잃은 눈으로 기모진이 떠난 곳을 바라봤다. 그 순간 그녀는 한 평생 사랑을 쫓은 것이 그녀만의 연극이었음을 깨달았다.기모진, 와줘서 고마워. 다음생에는 너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소만리는 마지막으로 다짐했다. 소만리는 지금 자신의 얼굴과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건강이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 전에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그녀를 아무리 싫어 한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친부모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그녀가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며 택시를 잡자, 마침내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추었다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