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임신했어?”위청재는 경악하며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흥. 참, 너 대단하구나. 나중에 그 아이가 태어나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나.”“어머니는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어떻게 부르든 제가 이 아이에게 엄마 노릇은 제대로 할 거니까 어머니와는 상관없는 일이죠.” 소만리는 평온하게 대꾸했다.위청재는 슬쩍 비웃으며 말했다.“소만리, 너 정말....”“어머니 그냥 드세요.” 기모진은 차갑게 위청재의 말을 끊고 소만리를 보며 말했다.“숙모가 임신했으니 몸조리 잘 해야지.”그는 탕수육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예전에 이걸 즐겨 먹던 게 생각나서.”“고맙습니다만 이젠 좋아하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 약혼녀에게나 음식을 챙겨주시죠. 내 일은 상관 마시고요.”소만리는 끝까지 냉담함을 이어가며 기모진이 집어준 음식은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오히려 고개를 돌려 기묵비를 보고 웃었다.기 할아버지는 이 광경을 보면서 미간이 점점 더 깊어졌다.저녁을 먹은 후, 기묵비는 문밖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고 기모진과 언초는 소파에 앉아서 웨딩잡지를 뒤적거리며 결혼식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소만리는 기모진이 다른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마침 기 할아버지가 그녀를 불러서 바로 위층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서재.기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상 위의 사진을 집어 들며 아쉬운 듯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구나. 난 너와 모진이 그때처럼 행복하고 즐거운 결말을 맺을 줄 알았는데… 너희들이 이리 헤어지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소만리는 가슴이 아팠으나 다가가서 그 사진을 보았다.“제 외할아버지 사진이네요?소만리는 사진 속의 외할아버지를 알아보았다. 기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모진을 데리고 사월산으로 휴가를 갔다가 그곳에서 옛 전우를 만났었지. 그 당시 그는 어린 소녀를 한 명 데리고 있었단다. 그 소녀가 바로 너였지. 이 사진은
소만리는 기모진의 눈 속에서 너무나도 공격적인 횡포와 강압을 느꼈다.그녀는 그가 통제 불능의 일을 저질러 뱃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기모진 당신이 말했잖아요. 우린 이미 끝났다고. 당신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이상 나한테 이렇게 치근덕대지 말아요.“소만리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주며 동시에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그러나 기모진은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잘생긴 얼굴을 그녀의 눈앞으로 가져갔다.“왜 그렇게 내가 무서워? 내가 당신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그가 그녀의 빰에 엷게 술 냄새를 풍기며 속삭이자 소만리의 귀밑이 뜨거워졌다.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그녀는 약간 당황했지만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기모진, 지금 당신의 위치를 기억해 봐요. 나는 지금 당신 작은 아버지의 아내라고요. 당신의 작은어머니가 되는….”“소만리, 당신 입 다물어.”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차갑게 내리고 그녀의 말을 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소만리, 당신 도대체 왜 그래? 기묵비가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벌써 잊었어? 그가 어떻게 여온을 죽였는지 잊었냐고? 당신이 어떻게 그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 어떻게 그 사람과 잠을 자고 아이를 가질 수 있냐고? 당신 미쳤어?”그의 감정은 점점 더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소만리는 그가 퍼붓는 원망이 너무나 괴로웠다.그녀는 황급히 손을 들어 기모진의 얼굴을 향해 내리쳤다.“퍽”남자는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서 있었다.“기모진, 미친 사람은 당신이야.”소만리는 마음속의 아픔을 꾹 참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기모진, 당신은 이미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죠.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내 일에 신경 쓰지 말아요!”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억울함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당신의 그 약혼녀와 잘 살아요. 내가 어떤 남자와 함께 있고 어떤 남자의 아이를 낳든 나에게 물어볼
창밖에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방금 올라오는데 소만리를 봤어요. 얼굴색이 어두워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걱정스러운 듯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는 기모진에게 언초가 서재로 들어오며 말했다.“내가 너무 밉다고 하더군. 죽었으면 좋겠다고.”기모진은 붉게 물든 깊은 눈동자를 보이며 말했다. 눈 밑에는 달갑지 않은 슬픔이 가득했다.“그녀가 기묵비의 아이를 가졌어. 역시나 날 사랑하지 않았어.”“아마 그녀에게도 어쩔 수 없는 고충이 있을지도 몰라요.”언초가 위로했다.“무슨 고충이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서까지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기모진이 힘없이 애써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그날 F국에서 당신이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죽었을 거야.”“전 당신을 구했고, 당신도 저를 구했죠.“언초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들이 지금 떠날 것 같은데 배웅하러 갈래요?”“보낼 것도 없고 날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야. 당신은 가 봐. 당신을 보고 싶어 할 거 아냐.”기모진이 자조하며 힘없이 웃었다. 언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기모진을 두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기묵비와 소만리를 보고 언초는 웃으며 다가갔다.“모진은 술에 취해서 방에서 쉬고 있어요. 제가 모진을 대신해서 두 분을 배웅하러 왔어요.”돌아서서 가고 있던 소만리는 언초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돌아보았다.그녀는 왠지 이 얼굴이 낯이 익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그러나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기묵비도 배웅하러 온 언초를 보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소만리를 안고 돌아섰다.언초는 조용히 시선을 올려 떠나가는 긴 두 그림자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렸다.기묵비, 당신 말이 맞아. 우리 만난 적 있어.보아하니 당신은 지금의 내 얼굴에서 낯익은 느낌을 찾은 모양인데, 내가 당신 기억 속에 살아있다는 걸 다행으로
CCTV에 표시된 시간은 초요가 병원에 가서 유산하기 하루 전날이었다.당시 병원에서 그는 초요의 신체검사 결과지를 주웠고, 초요는 그의 아이를 임신한 후 바로 낙태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그러나 사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그날 그는 기모진을 처리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소만리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몸을 날려 기모진을 향한 총알을 막았다.이것이 그를 몹시 화나게 하였고 그는 서재에 들어가 그를 위로하는 초요에게 분풀이를 했다.그는 당시 초요에게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초요는 망설였다.그래서 그는 그녀가 그 정도로는 그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CCTV를 보고 있는 순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그녀는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였던 것이다.그러나 그는 노발대발하며 그녀를 뿌리치고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다.그때도 초요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욕을 먹어서 겁에 질린 줄 알고 가버렸다.하지만 그 자신조차 그녀를 테이블 구석으로 내던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그로 인해 그녀의 배는 탁자 모서리에 심하게 부딪히고 말았다!그녀는 제대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물만 머금은 채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기묵비는 문득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아냐, 아냐 이래선 안 돼.”그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리며 그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였다.초요는 다음 날에야 병원으로 갔다. 만약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더라면 바로 병원에 갔을 것이다.그러니 그가 초요를 밀친 것과는 무관해야 했다.기묵비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지만 자신을 속여봐도 소용없었다.이때 장 씨 아줌마가 마침 그의 지시대로 우려낸 홍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아줌마는 찻잔을 놓고 가려고 했으나 기묵비는 그녀를 잠시 불러 그날의 일을 물었다.“초요는 쭉 당신이
”소만리, 난 널 사랑하지 않아.”“여기 제 약혼녀 초초예요.”“왜? 기부인은 내가 기묵비의 아이를 해칠까 두려운 건가?”소만리는 가슴 아파하며 자신의 배를 만졌다.기모진, 당신의 아이야.이번 생에서 당신 말고는 내게 다른 남자는 없어.그런데 당신은 결국 나를 믿지 못하는군.소만리는 고민스러운 듯 웃더니, 갑자기 이틀 전 자신의 실연한 얘기를 털어놓는 낯선 사람을 위챗에 추가한 것이 생각났다.그녀는 지금 이 낯선 사람 외에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소만리는 그 사람의 위챗 대화창을 열었다.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안부를 물었더니 그쪽에서 바로 답장이 왔다.[안녕하세요. 친추해 주셔서 너무 기뻐요.][안녕하세요.]소만리가 답했다.[저기, 저 실연당했어요. 기분이 우울해요. 지금 저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소만리도 기분이 우울했던 참에 있는 말 없는 말 주저리주저리 이 사람과 얘기하기 시작했다.이튿날 깨어나자 비로소 소만리는 자기도 모르는 와중에 잠들어 버린 것을 알았다.그녀는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아침을 다 먹을 즈음 기묵비가 왔다.그는 그녀를 데리고 기 씨 그룹으로 가서 말했다. 소만리에게 기 씨 그룹 보석디자인 부문 감독을 맡아 달라고 했다. 소만리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만일의 하나를 위해서 계약을 협의하기로 했다. 기모진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기모진은 2억 원을 제시하였다. 자신을 위해 보석을 주문 제작해 줄 것을 기 씨 그룹에 요구하였다.소만리는 기묵비가 그녀를 시험해 보려고 이런 일을 꾸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기묵비는 대범하게, 그것도 한밤중에 소만리를 기모진과 단독으로 협의하게 하였다.소만리는 이른바 기 씨 그룹의 총재 직함의 기모진과 회의실에서 만났다.이 시간에는 부서의 모든 사람들이 퇴근한다. 건물 전체에는 그들 둘뿐이다.이때 기모진은 소만리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전혀 개의치도
기모진은 소만리의 갑작스럽고 적극적인 포옹이 의아했다.어둠 속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소만리의 허리에 손을 얹었으나 말투는 오히려 담담했다.“계약에 관한 일 말고 기부인이 나와 무슨 할 말이 있지?”소만리는 지금 기모진이 자신에게 차갑게 말하는 것을 탓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자기는 더 모진 태도로 그를 대했기 때문이다.“기모진, 정말 중요한 일이 있어.”기모진은 핸드폰의 희미한 불빛을 빌려 눈을 내리깔고 품 안의 소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말해 봐.”소만리는 심호흡을 하고도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회의실 입구를 보았다. 그녀는 기모진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약간 더 힘을 주며 말했다.“모진, 사실 우리의 여......”“윙윙윙.......”소만리가 말을 더 하려는데 공교롭게도 마침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녀의 심장은 요동 쳤고 빛을 내뿜는 핸드폰 화면에는 기묵비의 이름이 떠 있었다.이미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어 하고 싶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소만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역시 그녀는 결코 기묵비의 감시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무슨 말인데?” 기모진이 다시 물었다.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아마도 그녀가 방금 그를 “모진"이라고 불렀기 때문인 것 같았다. “더덩.”갑자기 회의실 전등이 환하게 켜졌지만 소만리의 마음속 등불은 이미 꺼져가고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기모진을 꼭 잡고 있던 두 손을 풀고 빨리 핸드폰을 주워들었다.기묵비의 전화를 막 받으려는 순간 기모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만리는 놀라고 당황한 눈빛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기모진, 손 놔.”“아까 하려던 말 아직 안 했잖아. “남자는 굳은 표정을 하고 여자를 추궁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그의 깊은 눈을 바라보니 소만리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충동이 밀려왔다.순간 그녀는 기모진이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지
전화기 너머 기묵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여온이한테 일이 생겼어.”소만리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뭐라구요? 일이 생겼다고요? 무슨 일인데요?”“여온이가 잘못하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깨지고 피가 많이 흘렀어. 방금 왕립병원에 입원했어.”기묵비의 말투는 평온했고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당신 지금 기모진이랑 같이 있어?”“저 지금 같이 있지 않아요. 지금 당장 비행기 표 예약해서 F국으로 돌아갈 거에요.”기모진은 회의실에서 나오다가 소만리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급히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기모진의 눈 속에 질투의 빛이 떠올렸다. “그 사람 전화 한 통에 이렇게 빨리 서둘러 돌아가서 그를 만나다니. 소만리, 넌 애초에 나한테 그렇게 신경 쓴 적 있었어?”소만리는 밤 비행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갔다.그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기여온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계속 관찰 중이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소만리는 핏기 없는 인형의 얼굴을 보았다. 가슴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유모가 말하길 기여온이 놀다가 실수로 머리를 부딪쳐서 깨졌다고 했다. 그러나 소만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묵비의 경고였다.그는 그녀가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진실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하지 않으면 온전히 상처받는 사람은 기여온이라는 경고였다.소만리는 지친 듯 의자에 앉았다. 마음이 더욱 지친 하루였다.눈앞에 기묵비의 큰 체구가 다가왔다. 소만리는 그것이 거대한 산맥처럼 느껴져 압도당하고 짓눌려 숨을 쉬기 어려웠다. 그녀는 이렇게 겁에 질린 채로 얼마나 더 많은 나날을 버텨야 할지 몰랐다.기묵비는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여온은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해. 이렇게 일부러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어.”소만리는 마치 옥처럼 부드럽고 촉촉한 그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지금 저 안에 누워 있는 아이는 내가 10개월 동안 품어 낳은 내 혈육인데 어찌 편안하게 경
”신혼부부라 아주 금슬이 좋다 못해 뜨겁구만.”그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비꼬는 말투를 하며 소만리의 신혼방을 지나갔다.그녀는 괴로워 속이 쓰린 것을 억지로 참으며 기모진과 언초가 팔짱을 끼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소만리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기 선생님과 당신의 약혼녀도 금슬이 좋아 보이는군요.” “물론이지.”기모진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의 보드라운 눈길이 언초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초초는 내 인생 가장 어두운 순간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났고 내 평생 초초처럼 좋은 여자를 만났으니 당연히 소중히 아껴줘야지.”“모진, 당신이 말한 것만큼은 아니에요.”언초는 수줍은 듯 말하며 기모진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참, 어서 기 선생님과 기부인에게 청첩장을 드리세요.”청첩장?소만리는 당황스럽고 의아해서 뒤따라 가 보았다. 기모진은 세심하게 만든 청첩장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이번 주 토요일에 저와 기모진이 경도에서 약혼식을 거행하니까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도 오셔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건네준 청첩장을 보는 소만리의 눈빛이 흐려졌다.그들은 과연 약혼을 하는 것이다.“나와 소만리는 꼭 제시간에 도착해서 참석할게요.”기묵비는 청첩장을 받고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 저 깊은 곳이 캄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언초를 바라보았다.어딘가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이 느낌은 그의 평온했던 심장을 다시 휘저어 놓았다.언초는 기묵비의 그런 시선을 느끼고는 더욱더 대범하게 그를 반기며 말했다.“기 선생님,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언초 양이 왠지 낯이 익어서요. “기묵비가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래요? 아마 저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많나 봐요. 그래서 기 선생님이 낯이 익어 하시는 것 같아요. “언초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기모진의 팔을 끌어당겼다.“모진, 우리 갈까요. 저랑 같이 약혼드레스 보러 가요.”“그
문 앞에 서 있던 소군연의 모친은 이 모습을 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군연의 부친이 옆에서 말렸다.“그만 좀 해. 아들이 평생 홀아비로 살길 바라는 거야?”“누가 지금 가서 훼방 놓으려는 줄 아세요? 가서 말해 줘야죠. 나도 이 혼사에 동의해도 되겠냐고.”“당신 동의하는 거야?”소군연의 모친이 막 대답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강연장 안 불빛이 밝아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 환호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소군연의 품에서 나온 예선은 소만리와 기모진,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심지어 나익현과 나다희까지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예선과 소군연을 향해 다가왔다.예선은 멍하니 소만리를 쳐다보다가 결국 이 모든 것이 그들이 미리 계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녀와 소군연의 부모만 감쪽같이 몰랐던 것이다.소군연은 절대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단지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지키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시키기 위해 좀 다른 방법을 썼을 뿐이다....이듬해 봄.생명의 기운이 깃든 모든 것들이 축제를 펼치는 계절.경도호텔 야외 정원에서는 결혼식이 한창이었다.그렇다.오늘은 소군연과 예선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소만리와 기모진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공주님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두 부부의 눈에는 실로 눈앞의 모든 존재들이 기적과도 같았다.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막내와 그 옆을 잘 보살피고 있는 듬직한 기란군, 그리고 곱고 맑은 딸 기여온까지.“엄마 아빠, 나랑 막내한테도 뽀뽀해 줘.”“뽀뽀, 뽀뽀.”막내는 기란군의 말을 알아들은 듯 소리쳤다.“너랑 막내는 맨날 하잖아. 여온이는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까 특별히 좀 더 많이 해 줘야지.”기모진은 귀여운 기여온을 안고 볼에 뽀뽀를 했다.“여온아, 요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그놈이 평소에 무섭게 굴지는 않아?”“당신이 말한 그놈이 혹시 나예요?”강자풍이 짐짓 뾰로통한 얼
예선의 말을 듣고 소군연의 모친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예선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게다가 예선은 자신을 향해 ‘존중'이라는 단어를 썼다.예선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소군연의 모친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는 중 갑자기 소만리의 목소리가 들렸다.“예선아, 네가 그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들이 널 존중해 줄 줄 알아? 사람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그렇지만 군연은 그들의 아들이잖아. 만약 내가 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군연이랑 결혼을 한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평생 나와 군연을 원망하며 살 거야.”예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군연을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나와 부모님 사이에서 평생 힘들어하면서 살게 할 순 없어.”“그렇지만 예선아...”“소만리, 이제 그만해. 너 나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함께 지내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평안하고 즐겁게 지낸다면 그것으로 족한 거야, 안 그래?”예선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미 마음속에 결심을 한 것 같았다.소만리는 예선을 말리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뭐라고 조언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예선아, 그럼 이제 갈 거야? 소군연 선배 더 안 찾을 거야?”“찾아볼 곳은 다 찾아봤어. 이래도 못 찾는다는 건 아마도 군연과 나의 인연이 여기까지라는 거겠지. 군연이 혼자 조용히 있게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아.”예선이 돌아서자 소군연의 모친은 얼른 몸을 숨겼다.자신이 그들을 미행했다는 걸 그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이때 소만리가 예선을 불러 세웠다.“예선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너랑 군연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때? 아직 안 가 본 곳이 혹시나 없는지 잘 생각해 봐. 소군연 선배가 거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예선은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아직 안 가 본 곳이 한 군데 있긴 해.”“거기가 어
멀리서 예선을 몰래 관찰하던 소군연의 부모는 차 안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흥. 군연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깊다더니 한나절이 지나도록 군연이 어디 갔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군.”소군연의 모친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투덜거렸다.소군연의 부친은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런 말 좀 이제 그만해. 지금은 군연이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야. 사실 난 저 예선이란 애, 꽤 괜찮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부모도 없다고 당신 많이 싫어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부모도 있고 그뿐만 아니라 엄마는 갑부에 아빠는 유명한 의사인데 당신 뭐가 불만이 그렇게 많아? 정말 아들을 평생 독신으로 살게 할 셈이야?”소군연의 부친은 솔직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지만 소군연의 모친은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당신도 예전에는 반대했잖아요? 나중에는 나도 동의했다구요. 하지만 아버님 체면 세워 드리느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건데 이제 와서 날 탓하면 어쩌라는 거예요?”“그만둬.”소군연의 부친이 아내의 말을 끊었다.“어째서 말을 못하게 해요? 내가...”“예선이 움직였어!”소군연의 부친이 급히 액셀을 밟았고 소군연의 모친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잠시 후 소만리의 차는 경도대학교 정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눈에 익은 건물을 바라보며 예전에 함께 보냈던 날들을 떠올렸다.그들이 대학에 갓 입학한 첫날이었다.그때 그들은 모두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한 해 선배의 남자와 부딪히게 되었다.그 남자와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될 때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경도대학교에 있을 것 같아?”소만리가 물었다. 예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네 말처럼 군연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는 곳은 다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 왔어. 운에 한번 맡겨 보려고.”예선은 말을 마치며 학교 안으로 걸어갔다.학교는 개방식이어서 예선과 소만리는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바로 들어갔
소군연의 할아버지는 소군연의 글을 보고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퇴원하자마자 한 여자 때문에 사라져?게다가 이 여자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그는 결코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소군연이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니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만약 소군연이 정말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들 소 씨 가문은 후사가 없게 되는 게 아닌가?낭패였다.그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예선은 밖으로 뛰쳐나온 후 그가 갈 만한 곳을 찾아가 보았지만 오전이 다 지나도록 소군연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그녀는 소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아무런 소득 없이 시간만 흘러가자 예선은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그녀는 길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인생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무탈히 사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상실감이 확 밀려왔다.군연, 정말 날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우린 이렇게 헤어져서 제 갈 길을 가게 되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예선은 막막한 마음을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소만리에게서 전화가 왔다.예선은 얼른 그녀의 전화를 받아 소군연에게 일어난 상황을 전했고 소만리는 한달음에 예선에게 달려왔다.예선은 소만리를 보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소만리는 예선을 위로했다.“예선아, 소군연 선배가 일시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걸 거야. 널 포기했을 리가 없어.”“아니야. 포기한 거야.”예선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그의 가족들이 절대 날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특히 어머니는 강경하게 반대하시고 최근에 발생한 일 때문에 다른 가족들도 나에 대한 선입견이 더욱 나빠졌어.”“그동안 일어난 일은 너랑 아무 상관없어. 넌 피해자야.”“하지만 그들은 날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저 소군연
”얼른 들어갈게요!”소군연의 엄마는 황급히 뛰어가다가 갑자기 뒤따라오는 예선에게 고개를 돌렸다.“넌 오지 마! 우리 소 씨 가문에 널 환영하는 사람은 없어!”소군연의 엄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선은 소군연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예선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어떻게 소군연이 스스로 퇴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어제까지도 분명 병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소군연의 집으로 가는 길에 예선은 소군연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보았다.그러나 소군연은 받지 않았다.소군연에게 핸드폰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선은 계속 전화를 시도했고 예상대로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소군연을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가는 길이 너무 막혔다.드디어 예선이 소군연의 집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앙칼진 소군연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가 어떻게 스스로 집에 왔다는 거야? 방금 깨어난 거 아니야?”“이것 좀 봐 봐. 이거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될 거야.”소군연의 부친은 원망 섞인 말투로 소군연의 모친에게 뭔가를 쥐여 주었다.예선이 얼른 현관에 들어서자 따가운 소군연의 모친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넌 왜 또 왔어? 누가 널 환영한다구...”“됐어. 그만하고 이것 좀 보라니까.”소군연의 부친은 예선이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군연의 모친 말을 끊었다.예선은 소군연의 부친이 미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쫓아내지 않자 얼른 안으로 걸어갔다.소군연의 모친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메모지 한 장이었는데 메모지에는 짧은 몇 마디가 쓰여져 있었고 모두 소군연의 모친에게 전하는 말인 것 같았다.소군연은 자신이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실토하며 잠에서 깬 이후 자신의 엄마가 예선에게 모질게 투덜거리는 말만 하는 것을 보고 예선과 절대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
예선은 아무도 없는 병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즉시 소군연을 찾아나섰다.그러나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아도 예선은 소군연의 모습을 찾지 못했고 마음속에서 초조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이때 소군연의 엄마가 들어왔다.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소군연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본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 군연이는? 군연이 혹시 무슨 검사하도 하러 간 거야?”소군연의 엄마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예선에게 물었다.소군연의 엄마가 보이는 이런 태도에는 이골이 났는지 예선은 개의치 않으며 담담하게 돌아섰다.“저도 알고 싶어요.”“나보다 먼저 와 놓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제가 왔을 때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어요.”예선은 돌아서면서 말을 이었다.“간호사한테 한번 물어볼게요.”“잠깐만.”소군연의 엄마가 예선을 멈추어 세우며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너한테 말을 해 둬야겠어. 군연인 이미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어. 다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너 때문에 영 씨 집안 두 모녀는 감옥에 갇혔어. 이건 분명히 네가 우리 가문과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야. 네가 우리 군연이를 얼마나 좋아하든 우리 군연이 널 얼마나 좋아하든 상관없어. 넌 우리 소 씨 가문에 들어올 수 없어.”이 말을 들은 예선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영 씨 집안 두 모녀가 감옥에 간 것까지도 예선의 탓으로 돌린단 말인가?예선과 소군연은 엄연히 피해자였다.영내문 같은 악랄한 사람은 오늘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악행을 저지를 사람이었다.영내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벌여진 일들로 이 모든 것이 자명한데 소군연의 엄마는 여전히 예선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예선은 더 이상 소군연의 엄마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런 시간 낭비 에너지
채수연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여온아.”채수연이 기여온에게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다정하게 말했다.“여온아, 선생님이 여온이 좋아하는 거 알지? 어딜 가든 매일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길 바라. 그리고 하루빨리 말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랄게.”기여온이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고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한껏 고개를 끄덕였다.채수연은 일어서서 강자풍을 바라보았다.아직도 눈에는 그에 대한 호감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조금 전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의 집착은 사라졌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고집스럽게 쟁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채수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자풍을 바라보며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강자풍도 더 이상 아무 말없이 몸을 굽혀 기여온을 품에 안고 돌아섰다.돌아서기 전에 채수연에게 따뜻한 작별의 미소도 잊지 않았다.“채 선생님,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어쨌든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습니다. 고맙습니다.”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절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걸로 이미 다 갚으셨어요. 하지만 강 선생님 같은 친구가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기회가 되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그럼요, 언제든지요.”강자풍이 흔쾌히 승낙했다.친구가 된다는 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채수연은 그 자리에서 기여온을 안고 점점 멀어지는 강자풍의 뒷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강 선생님, 저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자풍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미소를 가득 품고 뒤돌아보며 물었다.“뭐가 궁금하신가요?”“좋아하는 여자가 정말 있긴 한 거죠?”강자풍은 기여온의 작은 얼굴에 부드러운 시선을 잠시 떨구며 입을 열었다.“지금 저의 가장 큰 소원은 여온이가 무탈하고 건강하게
”어쩌다가 듣게 되었어요.”강자풍은 순순히 시인했다.채수연은 강자풍의 대답을 듣고 자신이 난감해할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다만 약간의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강자풍은 채수연이 난감해하지 않도록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채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하다가 영상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오는 바람에 선생님을 더 난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나와 여온이 일로 또 한 번 고민거리를 안겨 드린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강자풍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기여온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하지만 선생님,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 없을 거예요.”채수연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마음속에서 상실감이 강하게 몰아쳤다.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강자풍을 쳐다보며 강자풍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말은 그녀를 안타깝게 만들었다.“채 선생님, 여온이한테 더 잘 맞는 유치원을 찾았어요. 제가 일하는 곳과도 더 가까워서 여온이 등하원하는 데도 훨씬 편리할 것 같아요.”강자풍의 말을 들은 채수연은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허전했다.“여온이한테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봐 유치원을 옮기기로 하신 거예요?”강자풍은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이게 선생님한테도 우리한테도 좋은 것 같아요.”강자풍은 ‘우리'라는 말을 할 때 기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채수연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자신의 감정이 줄곧 일방적인 것이었고 닿을 수 없는 허무한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자풍의 눈에는 이미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채수연도 강자풍의 말에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저희 엄마와 엄마 친구가 강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은 정말 부적절했어요. 죄송합니다.”강자풍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입
류 씨 성을 가진 남자가 트집을 잡았고 결국 강자풍이 기여온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이 모두 찍혀 인터넷에 공개된 것이었다.이 남자도 양심은 있었던지 기여온의 모습은 블러 처리를 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했지만 강자풍의 모습은 영상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채수연의 엄마는 한눈에 영상 속 사람이 강자풍임을 알아차렸다.영상 아래의 댓글을 본 채수연의 엄마는 더욱 초조한 눈빛으로 말했다.“수연아, 너 어떻게 이런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할 수 있어?”채수연의 얼굴이 찡그려졌다.“맞아요. 부인하지 않을게요. 난 강 선생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뭐라고!”“아유... 수연아, 너 정말 이 애 딸린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진 씨 부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반짝거렸다.“내가 보니까 여기 댓글 단 사람들이 벌써 이 남자 신상을 다 파헤친 것 같던데. 이 남자 예전에 우리 F국에서 한때 주름잡았던 그 강어라는 사람 동생이라더라구. 그 강연이라나 뭐라나 누나라는 사람은 업계에선 더욱 악명이 높았대.”“뭐! 그 강 선생이 강어와 강연의 동생이라고?”채수연의 엄마는 자신의 소중한 딸이 악명 높은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과 사귀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나도 그 사람 형과 누나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요. 나도 알고 있다구요. 하지만 강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 일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했다면 벌써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거예요.”채수연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게다가 강 선생님은 이 아이의 친아빠가 아니에요. 친구 딸인데 잠시 이 아이를 돌보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아주머니, 부탁드리는데요. 이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로 자꾸 걸고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못 해서 누구보다 괴로운 건 이 아이잖아요. 입장 바꿔서 누군가가 아주머니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절대 듣고 싶지 않을 거잖아요, 네?”“...”채수연의 입에서 뭐라도 가십거리를 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