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아이의 존재는 그들에게 부담만 될 뿐이다.전연우는 이 아이를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장소월은 그럴 수 없다.장소월은 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 아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등을 두드려주었다.별이가 눈을 감고 잠들려 하자 장소월은 아이를 소파에 눕혔다. 별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바로 잠든 척 눈을 감았다.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텅 빈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일기장 속 뜯겨 나간 페이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던 걸까.그리고 얼룩으로 가려진 그 중요한 부분도...만약 그녀가 장해진의 딸이 아니라면, 어머니와 장해진은 대체 무엇으로 얽혀있는 걸까?어머니는 열여섯의 나이에 연선우와 결혼했다...일기 속 내용대로 그녀가 어머니와 연선우의 아이라면... 서철용도 이 일기장을 봤을 텐데 왜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고 괴롭혔단 말인가.서철용이 또 다른... 무언가를 그녀에게 감추고 있는 건가?도원촌.좁고 거북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서철용은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 서서 끊어져 가는 목숨줄을 간신히 잡고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 도대체 누구 아이예요? 성예진의 일기장 당신이 찢었어요?"서철용은 그 검사 보고서를 확인한 뒤로부터 자신이 여태껏 했던 일이 과연 옳았는지 아닌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는 처음부터 인시윤이 전연우와 장소월의 관계를 의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조금도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없다.동하 병원이틀 전.서철용이 통화로 의사에게 말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나오면 이걸로 바꿔서 보여주세요.""서 선생님은 그 여자가 친남매라고 알 길 원하시는 거죠?""난 모두가 알게 하고 싶어요. 내가 지시한 대로 하세요.""음... 네. 알겠습니다."서철용은 확실히 한 가지 점을 간과했다. 단 한 번도 장해진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져 있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벽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연우 또한 언젠가 천벌을 받고 말 것이다.장소월도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오귀화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는 오랫동안 알아 온 은경애뿐이었다. 때문에 오귀화의 마지막을 처리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경찰은 화재 사고사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료했다.장례식은 조촐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은경애는 유골함을 인적이 드문 한 외딴곳에 묻었는데, 이는 오귀화가 예전 찾아놓았던 묘지였다.장례식이 끝난 뒤 은경애는 오귀화의 유품을 정리했다. 모두 어린 소녀가 쓰는 머리띠와 머리핀들, 그리고 분홍색 공주 원피스 한 벌도 있었다.모두 어린 시절 장소월의 물건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은경애는 모두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사무실에서 서철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밤새 그 보고서를 쳐다보고 있었다.그가 틀렸던 것이다.장소월은 성예진의 딸이었고, 장해진과는 어떠한 혈연관계도 없었다.제기랄,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생각하지 못한 거지.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뭘 했단 말인가!"서 선생님."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서철용는 고개를 들고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들어와.""서 선생님, 배은란 씨가 오셨습니다. 예약을 하진 않으셨고, 선생님을 만나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서철용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만날 시간 없어요. 나 없다고 말해요."또각또각.복도에서 땅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 피하기엔 늦어버렸다.“네가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왔어.”배은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서철용이 차가운 눈으로 힐끗 보고는 말했다.“나가 있어요.”“네. 선생님.”배은란은 일찍이 3개월 전에 귀국했지만, 두 사람이 만난 횟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서
"제발 그 사람 구해줘.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게."배은란은 서민용의 치료를 위해 그와 함께 해외로 떠났었다. 하지만 모든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전부 허탕만 치고 말았다.이제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서철용이 유일하다.배은란은 평소 한량처럼 먹고 마시며 실없는 장난만 치던 시동생이 국제 의료계에서 이렇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녀가 찾아갔던 대부분 병원의 의사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서철용을 추천했다.그러다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 결과 안타깝게도 서민용의 병세는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배은란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 돌아온 것이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그가 차에 타자마자 배은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서철용이 소리쳤다. "내려!""약속해주기 전엔 안 가."배은란 자신은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말이었지만 서철용의 귀엔 유혹하는 것처럼 들렸다."안 간다고? 형수, 그렇게까지 나랑 자고 싶어?"배은란은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난 너랑 손톱만큼도 엮이고 싶지 않아!"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서철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 밑에 묻어있던 짜증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서철용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을 떠났다.배은란은 차 안에 앉아 불안한 마음으로 시내에서 점점 멀어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절벽 옆 산꼭대기에 도착해서야 차가 멈춰 섰다. 이곳에선 서울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들, 줄기줄기 흐르는 강, 배은란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서철용은 차 키를 뽑고 좌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서철용, 민용 씨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어찌 됐든 네 형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서철용은 핏발이 가득 서 있는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안전벨트를
서철용이 배은란을 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핸드폰 너머 한의준에게 말했다. "죽었다고요?""네가 한 거 아니야?"서철용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저씨, 그건 제가 확실히 조사해 볼게요."서철용이 오귀화를 죽일 이유는 없다. 또한... 그녀는 가만히 놔둬도 얼마 살지 못하는 몸 상태였다. 설사 이유가 있다 해도 살인이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단서가 끊겨버렸다.서철용은 몇 년간 줄곧 성예진의 일기장을 찢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몇 페이지만 찾으면 당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겨우 십여 분 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서철용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돌아눕자마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살결에 부딪혔다. 배은란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고, 서철용은 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주었다.그가 애틋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운전할 줄 알아?""뭘 하려고?" 배은란이 눈썹을 찌푸렸다.서철용은 바로 손에 있는 차 키를 그녀에게 던졌다. "산에서 내려가면 병원으로 가."그는 휴식이 필요했다.서철용은 배은란을 타고 넘어가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배은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에서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차는 거의 두 시간 동안 달려서야 병원 문밖에 도착했다.서철용의 휴대전화는 한 번 또 한 번 반복해 울리고 있었다.배은란이 차를 세우자 휴대전화가 그의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졌다. 화면을 살펴보니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저기..." 배은란은 서철용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려 손을 뻗었다가, 아직 잠들어있는 그를 보고는 자신이 직접 수신 버튼을 눌렀다. 이어 핸드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선생님, 인시윤 씨가 다쳤습니다. 빨리 와 보셔야 해요."배은란이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깨우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서철용은 벌써 잠에서
전혀 가망 없는 일이라 치료를 시도해볼 필요도 없다.예전 전연우에게 독약을 넘겨주던 때의 그 통쾌함...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자책감이 몰려와 온몸을 휘감았다.그는 예진 이모의 유일한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8살의 어린 서철용은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의 옆에 서서 별빛 달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예진 이모, 이모가 딸을 낳으면 제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줄 거예요.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래요... 평생 좋은 오빠로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성예진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철용이는 좋은 오빠가 될 거라고 이모는 믿어.”“이모가 없을 땐 철용이가 여동생을 지켜줘야 해.”어린 서철용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약속할게요.”그때의 다짐을 떠올리니 숨통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보호?만약 장소월이 죽는다면, 그 일등공신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철용이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은란은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는 서철용을 보았다.배은란은 그의 흔들흔들 한량 같은 모습만 봤으니 이런 진지한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장소월은 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래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경애 아주머니, 아까 누가 왔었어요? 자다가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아가씨, 잊으셨어요? 경애 아주머니는 휴가 냈잖아요. 2,3일 뒤에야 돌아와요.”“깜빡했네요.”장소월은 기억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최근 무언가를 깜빡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다.장소월이 식사를 마쳤을 때, 도우미는 전연우의 확인 전화를 받고 있었다.“네. 대표님, 아가씨께선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치셨습니다.”“방금 조금 의심하긴 했지만 더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방에 들어가 별이를 돌보고 있어요.”보고를 마친 뒤 도우미는 전화를 끊었다.서울 변경에서의 비행기 폭발 사고에 관해, 전연우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소식이 새어나가는 것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면 진짜가 되는 거야.”“난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할 거야. 나 전연우의 아들인 전우성이라고 말이야.”일단 결심하면 무슨 일이 있든 밀고 나가는 불도저 같은 성정의 전연우다. 지금 말투로 봐선 장소월과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일을 통보하는 것이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절대 제지하지 못한다.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난 허락 못 해. 별이를 내 호적에 올린 건 너잖아. 별이는 내 아이야. 너랑은 상관없어.”“서울을 떠나고 싶다면 너 혼자 가. 난 절대 너 따라 안 가.”장소월은 차분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그만의 계획이 있듯, 장소월 역시 자신만의 굳건한 의지가 있다.아버지... 아니...이제 장소월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가 서울에 머무르려 하는 이유는, 이곳엔 아직 그녀가 알지 못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그녀는 자신이 장해진의 딸이 맞는지 아닌지 알고 싶었다.장소월은 전연우와의 말다툼 때문에 아이가 깰까 봐 방을 나가 거실로 내려갔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컵에 붓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언제 내려왔는지 등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파리에 가면 우리 결혼하자. 응?”전연우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감촉이 온몸에 전류를 흘렸다.“결혼? 왜 내가 너랑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컵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굴은 평온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선 거센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잊지 마. 넌 예전 수차례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야!”“이제 와 나랑 결혼하겠다고? 너 스스로도 웃기지 않아?”“그리고 전연우... 넌 이미 결혼했어.”장소월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별이에게 줄 분유를 만들었다.이번 생에서도 전생과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결혼을 장난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그는 이번 생에서 이익을 위해 인시윤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는 전연우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결혼?미쳐버린 게 분명하다!장소월은 불안한 얼굴로 아이의 침을 닦아주었다. 별이는 입가에 가까이 가져간 분유병을 보자마자 단번에 물고 쪽쪽 빨았다. 그리고는 장소월의 품에 안겨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볼을 만졌다. 예전 그 핼쑥하게 말랐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바뀌었다.얼굴엔 젖살이 통통하게 올랐고 머리카락은 검고 빼곡하게 자라나 있었다. 맑고 반짝이는 두 눈동자만 보아도 영특한 아이로 성장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전연우가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는 장소월을 힐끗 본 뒤 서재로 들어가 통화버튼을 눌렀다.“무슨 일이야?”서철용은 인시윤의 수술을 갓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인씨 집안 사고를 얼마 동안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해?”전연우가 물었다.“언제부터 내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야?”서철용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우린 한배에 타고 있잖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도 좋을 것 없어.”전연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병원 적잖은 사람들이 인씨 집안 사고에 관해 알았어. 이쪽은 내가 처리했으니까 너도 조심해. 새어나가지 않게.”전연우는 책상 위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피고 연기를 내뿜었다.“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전연우! 네 가장 큰 결점은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거야. 장소월에게 강영수의 죽음을 오랫동안 숨기지는 못할 거야. 또한 장소월을 잠시 가둘 순 있어도, 평생 통제하지는 못해. 장소월은 작은 자극도 받아선 안 된다는 걸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 이번 일은 장소월에게 큰 충격이 될 거야.”서철용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엔 무슨 일이 있든 내
전연우가 말했다.“다시 한번 검사받게 해 보려고. 너 요즘 약 많이 먹었잖아.”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별이는 말 못 하는 인형처럼 전연우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별이는 오늘 가슴에 파란색 곰돌이가 그려진 티셔츠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쓴 채 문을 나섰다. 모두 장소월이 골라준 것이었다. 별이는 장소월의 품에서와는 달리,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조용히 안겨 있었다.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연 그녀의 차가운 손에 따뜻한 온도의 살결이 포개졌다. 그녀는 모른 척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십여 분을 달려 엘리트 개인 병원에 도착했다.전연우는 아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건장한 체격의 전연우 옆으로 가녀린 몸매의 장소월이 함께 걸어갔다.오늘 장소월은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에 검은색 스타킹을 신고 따뜻한 핑크색 털신을 신고 있었다. 어깨엔 전연우의 코트가 걸쳐져 있기도 했다. 전연우는 편한 니트 차림에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한 손으론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장소월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간호사 한 명이 나와 그들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12층.엘리베이터 앞에서 또 다른 간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전연우는 땀이 나도록 꼭 잡았던 장소월의 손을 놓아주었다.“기다릴게.”검사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하얀색 의사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건 서철용이 나타났다.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두려움과 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에 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전연우가 그녀를 달래주었다.“금방 끝날 거야. 내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검사실 안엔 온통 차가운 기계들만 자리 잡고 있었다. 전생에서 항암치료를 받을 때 항상 보았던 것이 바로 이런 광경이다.그녀는 무서웠다.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전생에서 항암치료를 결심하고 병원에 간 그 시간 이후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그녀는 다시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았다.“나 요즘 몸 괜찮아. 검사받을 필요 없어.”전연우
그 후... 배은란은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과거가 눈앞에서 재현되자 배은란은 절망감에 휩싸여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배은란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은 뒤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민용 씨!”그녀는 서민용을 찾아가려고 벌떡 일어났다.몸을 일으켜보니 서민용이 두 눈을 감은 채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환자복까지 입고 있으니 더욱 허약하고 초췌해 보였다.배은란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입을 힘껏 틀어막았지만, 신음 소리는 손가락 틈새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한참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민용 씨, 또 날 버리려는 거야? 혹시 내가 요즘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랬다면 미안해. 정말 조심했는데...”“민용 씨, 혹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그래? 하지만... 난 정말 당신 없이는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응?”“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 용서해 주면 안 돼? 당신 깨어나면,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자.”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는 붉어진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배은란 씨, 지금 뭐하시는...”의사가 회진을 돌다가 병실 밖으로 나온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배은란은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된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철용은 어디에 있어요? 선생님은 알고 계시죠? 그 사람이 민용 씨를 돌보라고 시킨 거잖아요.”의사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 선생님과는 이미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희도 그분의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배은란의 눈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민용 씨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제발 말해 주세요. 무엇을 원하시든 다 드릴게요.”의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짧게 대답했다.
학창 시절의 서철용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지만, 배은란은 결코 알지 못했다...회상 끝....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새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배은란의 헌신적인 간호 덕분에 서민용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아침, 배은란은 여느 때처럼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서민용의 몸을 닦아주었다.얼굴을 다 닦아주었는데도 서민용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민용 씨?” 배은란은 왠지 모르게 불안함이 엄습했다.서민용은 하루 24시간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몸이 불편해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하여 매일 아침 배은란이 오면 그는 눈을 뜨고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늘어놓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듣곤 했었다.하지만 오늘은... 배은란이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건드려 보았다.서민용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민용 씨, 빨리 일어나 봐.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이런 장난 재미없어.”배은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감히 서민용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그의 피부엔 여전히 따뜻한 체온이 감돌고 있었고, 숨소리도 고르게 나고 있었다.불러도 깨지 않다는 것 외에는, 잠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몇 번을 시도해도 서민용이 미동도 하지 않자 배은란은 덜컥 겁이 나 주치의에게 연락했다.주치의의 제안에 따라, 배은란은 서민용을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게 했다.병실 안은 각종 기계들로 가득했고, 네다섯 명의 전문의들이 침대 주위에 모여 있었다.배은란은 문 앞에 서서 망가진 목각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의사들에 의해 제멋대로 주물러지는 서민용을 지켜보았다.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지고 눈가도 따끔거렸다.한때는 누구보다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는데...의식이 깨어있다면, 이 수치스러운 상황에 얼마나 괴로워할까?어쩌면, 죽음만이 편안해지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그가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나
그는 사장과 여자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감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서철용은 그들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당신들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서철용은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에는 자신감과 비웃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어제 바에서 배은란을 구한 사람이 바로 나였거든.”여자와 사장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배은란을 구한 이가 서철용이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직접 찾아와서 따져 물을 줄이야.“당신... 뭘 하려는 거예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철용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려 사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서철용의 어조는 냉담하고 단호했다. 사장은 서철용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자 앞으로 걸어가 한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팔을 들어 올려 따귀를 후려쳤다. 여자는 반응할 틈도 없이 가격을 당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렸다. 그녀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고, 눈에는 충격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장을 노려보았다.“당신... 당신이 감히 날 때려?” 여자는 분노에 차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공포와 불안감이 가득 차 있었다. 사장은 그녀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경멸과 혐오감이 깃든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바로 모든 일의 원흉이다. 사장을 시켜 배은란에게 약을 먹이도록 한 사람 또한 이 여자다. 지금, 그녀는 반드시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당신... 당신들 두고 봐.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는 몸을 돌려 옥상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줄 리 없는 서철용이었다. 그는 곧바로 여자의 옷을 낚아채 옥상 난간 옆으로 끌고 갔다.“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여자
“누구시죠? 왜 여기 계시는 거죠?” 사장이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 그녀는 서철용과 일면식이 없을뿐더러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서철용이라고 합니다. 당신과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냉담하고 단호한 서철용의 어조에 사장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서철용의 의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한 기운만큼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 함부로 그의 화를 돋우지 않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그의 목적을 알아내려고 애썼다.서철용은 군더더기 없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는 사장에게 왜 배은란에게 약을 먹였는지, 왜 그녀를 해치려 했는지 따져 물었다.사장은 처음에는 부인하려 했지만, 서철용의 눈빛이 너무나 날카로워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누군가 그렇게 하도록 시켰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해명했다.“다른 사람이라고요?” 서철용은 코웃음을 쳤다. “어제 문 앞에서 서민용의 번호를 따가려던 그 여자 말인가요?” 그는 사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진작부터 그 여자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민용을 바라볼 때 눈에서 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배은란을 향할 때는 심한 적개심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서민용은 수상한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걸 어떻게 아세요?” 사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 사장에게 그런 짓을 시킨 사람은 확실히 그 여자였다. 그녀는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라 사장과의 관계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이 어제 이곳에 왔었던 걸 기억해내지 못했다. 서철용 정도 외모의 남자라면 잊어버렸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그 여자 오늘 또 와요?” 서철용은 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네. 매일 옵니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여자가 저한테 시킨 거예요. 저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서철용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그는 바 문이 열리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계획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는 주호걸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령 그가 주호걸을 무시한다고 해도, 주호걸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대략 10분 정도 지나자, 주호걸이 바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이 근처에 있었으니, 자연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서철용은 온몸에서 위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그는 손에 든 빵을 서철용에게 내밀었다. 그는 서철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주말 이 시간이면 분명 한창 꿈나라에 빠져있었을 그가 오늘은 술집 문 앞에 나타났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오로지 배은란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배은란이 알아주기나 할까.“입맛 없어. 먹고 싶지 않아.” 서철용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음식이라곤 조금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 안 먹으면 무슨 힘으로 싸우려고?” 서철용이 거절했지만, 주호걸은 손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빵을 들고 있었다. 서철용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주호걸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 그는 빵을 받아들고 순식간에 먹어치웠다.그 후에도 계속 술집 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그렇게 쳐다보면 누가 감히 문을 열겠어?” 주호걸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철용에게 말했다. 문 앞에 서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가까이 다가오겠는가?게다가 서철용의 오늘 차림새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분명 도둑으로 취급했을 것이다.서철용이 고개를 돌려 주호걸을 바라보았다. 주호걸의 말이 옳다. 그의 생각이 짧았다. 그는 옆으로 살짝 떨어진 곳에 있는 잘 보이지 않는 으슥한 장소로 옮겼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그는 이곳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 드디어 3시쯤 되었을 때,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집 사장이었다! 배은란의 물에 장난질을 쳐놓
한편, 서철용은 곧장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배은란이 일하는 바로 향했다.그는 어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배은란이 잘못한 것도 없이 억울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만약 그가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배은란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서민용도 다시 배은란을 찾아가지 않았으니, 서철용이 그곳에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만다행이었다.아직 낮시간이라 바는 문을 열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다른 곳에 가고 싶지 않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주호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여보세요.” 서철용은 냉담한 어조로 전화를 받았다.지금의 그는 누구에게도 좋은 태도를 보일 수 없었다. 주호걸을 포함해서 말이다.하지만 만약 배은란이 말을 걸어온다면, 아마 다른 모습일 것이다.“어디야?” 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서철용을 찾으려 수없이 반복해 전화를 걸었지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다.서철용의 학교는 그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서철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줄곧 서철용 곁에 있었으니 말이다.서철용이 배은란을 데리고 떠난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이다.그는 단지 지금 서철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그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기 때문이었다.“바에 있어.”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어제 바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주호걸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었다. 계속 주호걸에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바로 찾아올 것이다.그렇게 되면, 그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또한 그와 주호걸 사이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무엇을
어젯밤은 너무나도 뜨겁고 격렬했다.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다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부끄러워서 입 밖에 내뱉기가 어려울 뿐이었다.“은란아, 깼어?” 서민용은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배은란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있어 주지 못했던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여 이런 상황에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응.” 배은란은 행복한 미소가 번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다면, 언제 서민용과 그런 일을 하겠는가.“너 주려고 아침밥 사 왔는데, 다 식었네.” 서민용이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을 쳐다보며 말했다.“지금 먹을게.” 배은란이 웃으며 말했다.그녀는 서민용이 아침 일찍 일어나 그녀를 위해 사 온 음식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어젯밤 그가 이곳에 없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은란아, 술집 아르바이트는 그만두는 게 좋겠어.” 서민용이 배은란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는 어젯밤 내내 술집에서 일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어제 어떤 여자가 그에게도 접근하지 않았던가. 배은란의 안전은 더더욱 장담할 수가 없다.그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이제 더는 술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만약 서민용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하지만 다행히 서민용이 적시에 와주었기에,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그리고 그 사장 역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전에는 사장이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여 술집에서 일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못해도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어제 사장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물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혹시나 그런 일이 발생할까
“민용아, 난 네가 정말 좋아.” 배은란은 손을 뻗어 서철용의 목을 감싸 안았지만, 입으로는 서민용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손을 잡고 그녀의 팔을 내려놓으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예상치도 못한 큰 힘으로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민용아, 나 도와준다고 했잖아?” 배은란의 말투에는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정말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나랑 사귄 지가 언젠데, 왜 한 번도 날 건드리지도 않는 거야.” 그녀는 서철용의 어깨에 기대어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었던지라 서철용은 화들짝 놀랐다.이미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서민용이 이토록 보수적이었을 줄은 전혀 몰랐다.“은란아,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나중에 결혼하면 해줄게.”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배은란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챌까 봐 감히 크게 말하지는 못했다.“하지만 나 지금 너무 괴롭단 말이야.” 배은란은 연약한 몸을 서철용의 품에 기댄 채 두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서철용은 처음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단지 이곳에서 그녀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을 뿐이었다.하지만 그 역시 남자인지라 사랑하는 여자의 도발을 참아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착하지. 잠들면 괜찮아질 거야.” 서철용은 애써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배은란을 눕히려 했다.하지만 배은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힘을 써도 도저히 그녀를 침대에 눕힐 수가 없었다.몸은 이미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는 간신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녀를 밀어냈다.하지만 배은란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다. 그녀는 곧바로 서철용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은란아, 이러지 마.” 서철용은 그녀의 키스에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민용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지금을 즐기면 안 될까?” 배은란은 애틋한 눈빛으로 서철용을 바라보았다.약물의 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이 혼미해진 탓인지, 그녀의 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배은란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술집에서 일하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그런 잘생긴 남자랑 사귀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한테 넘겨.” 여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배은란은 화가 치밀어오름과 동시에 더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반항할 조금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여자는 우쭐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배은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서민용은 내 거야. 다시는 그 남자 앞에 나타나지 마.” 그녀가 배은란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려 한 순간, 누군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고개를 들어보니 한 남자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감히 이 여자를 함부로 건드려?” 서철용은 다시 여자를 향해 발길질했다.그는 종래로 여자를 때리지 않는다. 하지만 배은란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게 누구든 백 배로 갚아주려는 생각이었다.여자는 서철용의 발로 차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서 나뒹굴었다.“꺼져!” 서철용이 여자를 향해 소리쳤다.여자는 겁에 질려 간신히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그녀는 본래 강약약강의 표본인 사람이었다.“민용아...” 배은란은 서철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지금의 그녀는 의식이 흐릿한 상태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선명히 볼 수가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서민용이 돌아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런 배은란의 모습에 서철용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배은란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라줬다.“그래.” 그는 배은란을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배은란을 품에 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서민용 행세를 해야만 배은란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배은란의 마음속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따뜻한 품에 꼭 안겨 있으니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민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