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 하지만... 오 아주머니는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고아였다고, 아버지가 밖에서 주워온 사람이라고 했었다. 분명 따뜻한 거실이었지만 장소월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분홍색 양피로 만든 노트를 폈다. 두꺼운 종잇장을 넘기니 정연하게 쓰여있는 글씨가 보였다. "1975년 1월 20일, 맑음. 오늘은 내 16번째 생일이다. 오늘 의준이가 나한테 예쁜 목걸이와 당나귀를 선물해 주었다. 앞으로 시장에 나갈 때마다 타고 다녀야지." "오늘 엄마 아빠는 무슨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지 말씀해주시지 않았다. 너무 기대된다!" "...1975년 1월 21일, 흐림. 어제 생일 파티가 끝난 뒤, 난 의준이가 준 당나귀를 타고 시내에 나갔다. 그러던 중 커다란 말을 타고 나타난 군화를 신은 남자 때문에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짜증 나. 그 남자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놈이 제멋대로 싸돌아다닌다며 나를 비난했다. 엄마가 선물해 준 옷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렸다.""1975년 3월 28일, 저번 그 남자가 또다시 나타났다. 그는 아빠한테 돈을 요구하러 온 것이었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문 앞에서 그 남자를 쳐다보았고 그 남자도 나를 보았다. 너무 흉악했다. 나는 무서워 방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그 남자가 오성을 지키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키가 정말로 컸다! 금주 언니는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도 했었다.""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를 꾸짖었고, 나를 해코지했으니까!""그 사람은 나쁜 놈이다." 오성? 그게 어디지? 장소월은 그곳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소월은 엄마가 십 대 때 기록한 일상들을 한 장씩 훑어보았다..."1976년 7월 12일, 오늘 밤에도 그는 돌
왜지?왜 아버지의 이름이 없는 거지?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행복과 즐거움이 넘쳤던 일기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걸, 장소월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보면 볼수록 숨이 막혀왔다.대체적인 이야기는 오성에서 일어난 일이었다.엄마는 어릴 때부터 부잣집 딸로 남부러울 것 없이 호의호식하며 살아왔다. 엄마의 할아버지는 그룹 회장이었고, 그녀의 아버지, 즉 장소월의 할아버지는 부회장이었다.그 당시 유명한 명문가 집안이었다.한의준은 고조할아버지가 전장에서 주워온 고아였고, 6살 때 성씨 가문에 입양되어 엄마와 함께 자랐다. 엄마는 자신보다 세 살 많은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별한 관계로 발전했다.고조할아버지도 한의준을 성씨 가문의 데릴사위로 삼을 생각으로 집에 들였다고 한다.그 이후의 사건은 글자가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았다.엄마는 16살이 되던 해, 당시 직업군인이던 연선우를 만났다.그는 26세 젊은 나이에 유능한 장군이 되어있었다.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어 연선우의 눈에 띄었고, 고조할아버지도 내심 이 결혼을 원했는지 혼사를 추진했다.하지만 그때 어머니는 이미 한의준과 결혼을 약속했었다. 둘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 두터운 감정을 쌓은 상태였다...어머니는 17살 때 연선우에 의해 강제로 연씨 가문에 끌려갔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시달리다 어머니는 임신을 했다고 한다. 만약 그때 어머니가 임신한 아이가 그녀라면 중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그렇다면 그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을까?연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왜 갑자기 모두 도륙당했을까?연선우는 3년 동안 대체 어디에서 뭘 한 걸까?그녀의 아버지, 장해진은 이 이야기에서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을까?단서는 여기에서 끊겨버렸다. 그 뒤로 몇 장의 종이가 찢겼기 때문이다.많은 것들은 안개 속에 감춰져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그 한의준은...설마 저번 병원에서 보았던 그 남자일까?하지만 그의 얼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에 전연우는 가시를 바른 생선을 그녀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장소월은 젓가락을 깨물고 있다가 빠르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아니야."전연우는 잠시 뚫어지라 그녀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전연우는 늘 그래왔듯 장소월과 함께 욕실에서 한참 동안 애정을 나누었다. 일이 끝나자 장소월은 기진맥진해진 채 전연우의 품에 안겨 침실로 들어왔다.전연우는 어두운색의 긴 두루마기에 허리띠를 묶고 있었다. 헐렁하게 열린 옷깃 사이로 단단하고 관능적인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는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지쳐 잠든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그렇게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다가 서재로 향했다.희미한 조명 하나가 간신히 어둠을 밝히고 있는 서재 안, 창문 유리에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비추었다. 날카로운 눈빛에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전연우는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대표님,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내일 인시윤 씨는 그 사람과 함께 그 비행기에 탈 것입니다."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끝나기 바쁘게 서재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밖을 쳐다보며 간단히 대답한 뒤 바로 전화를 끊었다.전연우는 서재에서 나와 평온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본래 잘 덮었던 이불이 허리까지 밀려 내려가 수려하게 뻗은 하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전연우는 아이 울음소리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였다.인기척을 느낀 장소월이 흐릿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별이가 울고 있는 거야?""응. 내가 가서 볼 테니까 계속 자."장소월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으며 말했다. "배가 고파서 우는 걸 거야. 분유는 주방에 있어."전연우가 옆방에 들어가자 아이는 팔다리를 활짝 벌리고 더욱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 전연우는 느릿느릿 걸어
지금 이 아이의 존재는 그들에게 부담만 될 뿐이다.전연우는 이 아이를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장소월은 그럴 수 없다.장소월은 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 아이가 편히 잠들 수 있게 등을 두드려주었다.별이가 눈을 감고 잠들려 하자 장소월은 아이를 소파에 눕혔다. 별이는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바로 잠든 척 눈을 감았다.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텅 빈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어머니의 일기장 속 뜯겨 나간 페이지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던 걸까.그리고 얼룩으로 가려진 그 중요한 부분도...만약 그녀가 장해진의 딸이 아니라면, 어머니와 장해진은 대체 무엇으로 얽혀있는 걸까?어머니는 열여섯의 나이에 연선우와 결혼했다...일기 속 내용대로 그녀가 어머니와 연선우의 아이라면... 서철용도 이 일기장을 봤을 텐데 왜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고 괴롭혔단 말인가.서철용이 또 다른... 무언가를 그녀에게 감추고 있는 건가?도원촌.좁고 거북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서철용은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 서서 끊어져 가는 목숨줄을 간신히 잡고 숨 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장소월 도대체 누구 아이예요? 성예진의 일기장 당신이 찢었어요?"서철용은 그 검사 보고서를 확인한 뒤로부터 자신이 여태껏 했던 일이 과연 옳았는지 아닌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그는 처음부터 인시윤이 전연우와 장소월의 관계를 의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조금도 혈연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도, 의심해본 적도 없다.동하 병원이틀 전.서철용이 통화로 의사에게 말했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 혈연관계가 없다고 나오면 이걸로 바꿔서 보여주세요.""서 선생님은 그 여자가 친남매라고 알 길 원하시는 거죠?""난 모두가 알게 하고 싶어요. 내가 지시한 대로 하세요.""음... 네. 알겠습니다."서철용은 확실히 한 가지 점을 간과했다. 단 한 번도 장해진
그건 두 사람 사이에 세워져 있는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벽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연우 또한 언젠가 천벌을 받고 말 것이다.장소월도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오귀화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는 오랫동안 알아 온 은경애뿐이었다. 때문에 오귀화의 마지막을 처리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경찰은 화재 사고사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료했다.장례식은 조촐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은경애는 유골함을 인적이 드문 한 외딴곳에 묻었는데, 이는 오귀화가 예전 찾아놓았던 묘지였다.장례식이 끝난 뒤 은경애는 오귀화의 유품을 정리했다. 모두 어린 소녀가 쓰는 머리띠와 머리핀들, 그리고 분홍색 공주 원피스 한 벌도 있었다.모두 어린 시절 장소월의 물건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은경애는 모두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엘리트 개인 병원.사무실에서 서철용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마를 꾹꾹 누르며 밤새 그 보고서를 쳐다보고 있었다.그가 틀렸던 것이다.장소월은 성예진의 딸이었고, 장해진과는 어떠한 혈연관계도 없었다.제기랄, 이렇게 간단한 일을 왜 생각하지 못한 거지.몇 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체 뭘 했단 말인가!"서 선생님."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서철용는 고개를 들고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들어와.""서 선생님, 배은란 씨가 오셨습니다. 예약을 하진 않으셨고, 선생님을 만나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서철용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만날 시간 없어요. 나 없다고 말해요."또각또각.복도에서 땅을 밟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 피하기엔 늦어버렸다.“네가 날 만나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왔어.”배은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서철용이 차가운 눈으로 힐끗 보고는 말했다.“나가 있어요.”“네. 선생님.”배은란은 일찍이 3개월 전에 귀국했지만, 두 사람이 만난 횟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결국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서
"제발 그 사람 구해줘.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할게."배은란은 서민용의 치료를 위해 그와 함께 해외로 떠났었다. 하지만 모든 병원을 돌아다녔지만 전부 허탕만 치고 말았다.이제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서철용이 유일하다.배은란은 평소 한량처럼 먹고 마시며 실없는 장난만 치던 시동생이 국제 의료계에서 이렇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그녀가 찾아갔던 대부분 병원의 의사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서철용을 추천했다.그러다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 결과 안타깝게도 서민용의 병세는 오히려 점점 더 악화되기만 했다.배은란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 돌아온 것이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그가 차에 타자마자 배은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서철용이 소리쳤다. "내려!""약속해주기 전엔 안 가."배은란 자신은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말이었지만 서철용의 귀엔 유혹하는 것처럼 들렸다."안 간다고? 형수, 그렇게까지 나랑 자고 싶어?"배은란은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이가 아니었다면 난 너랑 손톱만큼도 엮이고 싶지 않아!"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서철용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눈 밑에 묻어있던 짜증스러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서철용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을 떠났다.배은란은 차 안에 앉아 불안한 마음으로 시내에서 점점 멀어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절벽 옆 산꼭대기에 도착해서야 차가 멈춰 섰다. 이곳에선 서울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들, 줄기줄기 흐르는 강, 배은란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서철용은 차 키를 뽑고 좌석 의자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했다."서철용, 민용 씨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어찌 됐든 네 형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서철용은 핏발이 가득 서 있는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안전벨트를
서철용이 배은란을 안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고 핸드폰 너머 한의준에게 말했다. "죽었다고요?""네가 한 거 아니야?"서철용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저씨, 그건 제가 확실히 조사해 볼게요."서철용이 오귀화를 죽일 이유는 없다. 또한... 그녀는 가만히 놔둬도 얼마 살지 못하는 몸 상태였다. 설사 이유가 있다 해도 살인이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제 단서가 끊겨버렸다.서철용은 몇 년간 줄곧 성예진의 일기장을 찢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 몇 페이지만 찾으면 당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겨우 십여 분 밖에 눈을 붙이지 못한 서철용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돌아눕자마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살결에 부딪혔다. 배은란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하마터면 굴러떨어질 뻔했고, 서철용은 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잡아주었다.그가 애틋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운전할 줄 알아?""뭘 하려고?" 배은란이 눈썹을 찌푸렸다.서철용은 바로 손에 있는 차 키를 그녀에게 던졌다. "산에서 내려가면 병원으로 가."그는 휴식이 필요했다.서철용은 배은란을 타고 넘어가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배은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운전석에 앉아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에서 고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차는 거의 두 시간 동안 달려서야 병원 문밖에 도착했다.서철용의 휴대전화는 한 번 또 한 번 반복해 울리고 있었다.배은란이 차를 세우자 휴대전화가 그의 주머니에서 굴러떨어졌다. 화면을 살펴보니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망설이다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저기..." 배은란은 서철용에게 핸드폰을 건네주려 손을 뻗었다가, 아직 잠들어있는 그를 보고는 자신이 직접 수신 버튼을 눌렀다. 이어 핸드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일 났어요! 선생님, 인시윤 씨가 다쳤습니다. 빨리 와 보셔야 해요."배은란이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깨우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서철용은 벌써 잠에서
전혀 가망 없는 일이라 치료를 시도해볼 필요도 없다.예전 전연우에게 독약을 넘겨주던 때의 그 통쾌함... 그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자책감이 몰려와 온몸을 휘감았다.그는 예진 이모의 유일한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8살의 어린 서철용은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의 옆에 서서 별빛 달빛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예진 이모, 이모가 딸을 낳으면 제가 반드시 안전하게 지켜줄 거예요.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래요... 평생 좋은 오빠로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성예진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철용이는 좋은 오빠가 될 거라고 이모는 믿어.”“이모가 없을 땐 철용이가 여동생을 지켜줘야 해.”어린 서철용은 자신감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약속할게요.”그때의 다짐을 떠올리니 숨통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보호?만약 장소월이 죽는다면, 그 일등공신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서철용이다.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은란은 수술복을 입고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는 서철용을 보았다.배은란은 그의 흔들흔들 한량 같은 모습만 봤으니 이런 진지한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장소월은 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래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경애 아주머니, 아까 누가 왔었어요? 자다가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요.”“아가씨, 잊으셨어요? 경애 아주머니는 휴가 냈잖아요. 2,3일 뒤에야 돌아와요.”“깜빡했네요.”장소월은 기억력이 점점 퇴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연히 느끼고 있었다.최근 무언가를 깜빡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들이었다.장소월이 식사를 마쳤을 때, 도우미는 전연우의 확인 전화를 받고 있었다.“네. 대표님, 아가씨께선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치셨습니다.”“방금 조금 의심하긴 했지만 더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방에 들어가 별이를 돌보고 있어요.”보고를 마친 뒤 도우미는 전화를 끊었다.서울 변경에서의 비행기 폭발 사고에 관해, 전연우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소식이 새어나가는 것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
배은란이 병원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병실 문 앞으로 걸어간 그녀는,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야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설령 서민용이 지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있다고 해도,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민용 씨, 나 왔어...” 그 순간, 텅 비어 있는 병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배은란의 눈동자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민용 씨, 민용 씨!” 몇 초간 마음을 가다듬은 뒤에야 겨우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의사를 찾았다. 하지만 사무실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 배은란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응급실 쪽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빨간 등이 켜져 있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며, 복도는 무섭게 조용하기만 했다. 그 광경에 배은란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서민용이 저 안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간호사 한 명이 복도를 지나갔다. 배은란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317호 병실 환자 저 안에 있나요?”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분 보호자시죠? 여기에 서명해 주세요.” 배은란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엄청난 공포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고, 구역질까지 날 것 같았다. “제가 그 사람 와이프입니다.” 그녀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와 펜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종이 위에 떨어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배은란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온몸이 떨릴 정도로 흐느꼈다. “환자분은 아직 치료 중이세요. 모든 가능성이 다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간호사는 너무나 슬퍼하는 그녀를 위
“서 대표님은 자리에 안 계십니다.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전화로 연락해 보십시오.” 안내 데스크에서 용건을 설명하자 돌아온 대답은 그러했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배은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죄송하지만, 그건 대표님의 사생활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저는 그 사람의...” 다급한 마음에 배은란은 자기도 모르게 ‘형수’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순간 회사 사람들이 그녀와 서철용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하여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삼켜버렸다. “여기 잠깐 앉아 있어도 될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직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배은란은 회사에서 계속 서철용을 기다렸지만, 퇴근 시간인 오후 5시가 되도록 그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직원이 다시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배은란은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후 내내 폐를 끼쳤네요. 혹시 서철용 씨가 돌아오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여기 제 연락처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번호를 적고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은란은 잠시 침묵하다가, 서씨 본가 주소를 불렀다. 택시는 천천히 출발했다. 배은란은 뒷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서철용과 오랫동안 뒤섞여 지냈었다. 하지만 연락이 끊겨버리니 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곳이라곤 회사와 서씨 본가, 두 곳이 전부였다. 서철용이 본가에 드나드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서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배은란은 두려움에 한참을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서철용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배은란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시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예상했던 것처럼, 실망과 절망만 반복되었다.배은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서철용 관계의 주도권은 줄곧 서철용에게 있었다는 것을.감정적으로는 그녀가 우위에 있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 그녀는 약자의 입장이었다.서철용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지금, 그녀는 그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조차 알지 못했다.배은란은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였다.연락처 목록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까지, 서철용을 알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지 못했다.포기하려던 찰나, 연락처 맨 밑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했다.장소월이었다.최면에 걸려 있던 동안, 서철용과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여자였다.배은란은 늘 그 시절의 기억을 애써 밀어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떠올려야 했다.기억 속 장소월이라는 여자는 서철용과 예사로운 관계가 아닌 듯했다.그녀라면 서철용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배은란은 빨리 원하는 답을 얻고 싶은 마음에 시간조차 잊은 채 전화를 걸었다.한참을 기다려도 통화연결음만 들려올 뿐이었다.하지만 얼마 후,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장소월의 목소리는 흐릿하고 몽롱한 것이 갓 잠에서 깬 듯했다.배은란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새벽 2시라는 것을.“장소월 씨, 저 배은란이에요.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정말 미안해요. 혹시 최근에 철용 씨와 연락하신 적 있으신가요?”배은란은 진심으로 자책하며 사과했다.그녀의 휴식을 방해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그녀가 혹여 화가 나 서철용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을까 봐 그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장소월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배은란 씨? 저희 아는 사이인가요?”배은란은 잠시 당황했다. 그녀가 자신을 잊어버렸을 거라는
그 후... 배은란은 그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과거가 눈앞에서 재현되자 배은란은 절망감에 휩싸여버렸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배은란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은 뒤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민용 씨!”그녀는 서민용을 찾아가려고 벌떡 일어났다.몸을 일으켜보니 서민용이 두 눈을 감은 채 바로 옆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환자복까지 입고 있으니 더욱 허약하고 초췌해 보였다.배은란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입을 힘껏 틀어막았지만, 신음 소리는 손가락 틈새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한참을 울고 나서야 간신히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민용 씨, 또 날 버리려는 거야? 혹시 내가 요즘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랬다면 미안해. 정말 조심했는데...”“민용 씨, 혹시 이렇게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그래? 하지만... 난 정말 당신 없이는 안 돼. 제발 이러지 마. 응?”“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나 용서해 주면 안 돼? 당신 깨어나면,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자.”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고는 붉어진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배은란 씨, 지금 뭐하시는...”의사가 회진을 돌다가 병실 밖으로 나온 그녀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배은란은 생명의 동아줄이라도 된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서철용은 어디에 있어요? 선생님은 알고 계시죠? 그 사람이 민용 씨를 돌보라고 시킨 거잖아요.”의사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서 선생님과는 이미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희도 그분의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배은란의 눈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민용 씨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제발 말해 주세요. 무엇을 원하시든 다 드릴게요.”의사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짧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