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선이 그녀의 몸에 꽂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신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피했다. 이토록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어떻게 차분히 전연우와 마주한단 말인가.“가고 싶다고 하면 보내줄 거야?”그녀의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는데도 그놈이 보고 싶어? 4년 전에 혼난 거로도 부족해?”“보고 싶든 아니든 내 일이야. 너와는 상관없어. 아이도 있는 이곳에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넌 네 일에나 신경 써. 내일이 결혼식인데 나랑 같이 있는 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집에 들어가. 아이는 내가 잘 돌볼게.”장소월이 아이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별이는 분유병을 입에 문 채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그녀가 방 청소를 시작하려 바닥에 있는 남색 작은 양말을 집어 들었을 때, 커다란 손이 그녀를 들어 올려 벽에 밀쳐버렸다.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는 한 손으로 장소월의 손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내가 여러 차례 널 인내해줬다고 해서 내 한계에 도전하려고 하지 마. 강영수는 지금 당장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소월아... 착하게 오빠 곁에 있어. 아무 데도 가지 마.”“만약 너한테 다른 속셈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땐 이 오빠가 정말 화낼 거야. 알겠지?”그의 앞에서 장소월은 늘 공격성 하나 없는 나약한 토끼와도 같아 손쉽게 그의 손에 넣고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가 이럴수록 장소월의 반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녀는 전연우를 두려워하면서도 하루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다. 그녀는 독립적인 한 사람이지, 그의 소유물이 아니다.더욱이 그는 이미 인시윤과 약혼한 사이다.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계속 곁에 둔단 말인가!장소월은 전연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날 구금하고, 강영수로 협박하는 것
장소월은 전화를 끊은 뒤 병실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병실을 정리했다.인시윤이 전연우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연우 씨, 우리 이제 가야 해요. 호텔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장소월의 태연한 모습에 전연우는 어둡게 가라앉았던 시선을 거두었다.인시윤은 전연우와 함께 떠나기 전 고개를 돌려 장소월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몰래 하얀색 쪽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장소월은 두 사람이 떠난 뒤에야 조용히 쪽지를 주웠다.내용은 이러했다. 오빠 쪽은 엄마가 설득했어. 내일 아침 너희들을 공항으로 데려다줄 헬기가 병원 옥상에 도착할 거야.강영수가... 모두 다 안다고?인경아는 그를 어떻게 설득했을까?장소월은 그가 떠나지 않겠다고 할 거라 생각했었다. 사실 그녀가 강영수와 출국하기로 마음먹은 데엔 전연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욕심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하지만 내일... 장소월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유 모를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오후 3시, 도우미가 아기 물건이 든 가방을 들고 급히 들어왔다.“아가씨, 시키신 일 모두 준비해 왔습니다. 걱정 마세요. 예전 유모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잘 돌볼 수 있을 거예요.”장소월은 측은한 얼굴로 품 안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건강한 혈색이 돌고 있었다. 약간 저체중인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한동안 잘 보살피면 건강을 회복할 것이다.장소월이 카드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예전 받았던 상금을 모아둔 카드였는데 그녀가 얼마 쓰지 않았기에 아이를 키우는 데엔 충분할 것이다.“내일 제가 떠나면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세요. 멀면 멀수록 좋아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입양시켜도 돼요.”“네. 아가씨.”도우미 역시 돈을 받고 장소월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다.전연우는 내일 결혼식을 치를 것이니 도우미에게까지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도망칠 절호의 기회다.몇 시간 뒤, 매체에서 성세 그룹 대표와 인하 그
다음날 새벽, 장소월은 극심한 고통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목에서 진동하는 농후한 피 냄새에 그녀는 코를 막고 달려나가 슬리퍼도 신지 않은 채 화장실에 들어가 피를 토해냈다.원피스, 바닥... 군데군데 피로 물들었다.물로 씻으려 수도꼭지에 손을 댄 순간, 돌연 눈앞이 컴컴해졌다. 장소월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세면대를 잡고 물로 핏자국을 씻어냈다. 그러고는 벽을 더듬거리며 침대 밑 가장 아래층 서랍을 열어 하얀색 약 두 알을 꺼냈다.장소월은 힘없이 벽에 기댔다. 통증이 가시자 그녀의 시선 속에 다시 빛이 깃들었다. 이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어쩌다 가끔씩 숨 막힐 듯한 고통이 찾아오곤 한다.이건 그녀의 병증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간호사가 들어와 바닥에 뿌려진 피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소... 소월 씨... 어떻게 된 거예요?”도우미 아주머니가 소리를 듣고 들어왔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틀어막고 어쩔 줄을 몰랐다.“세상에.”장소월은 혈색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아질 거예요.”“아주머니, 지금 몇 시예요?”서보영은 얼른 다가가 장소월을 부축했다.“다섯 시예요. 곧 날이 밝을 거예요.”“네. 잠시 뒤 아이를 데리고 병원 뒷문으로 도망치세요.”서보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월의 초췌한 얼굴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강영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 햇살이 구름층을 뚫고 나와 하늘을 반쯤 물들였다.이곳에선 서울시 가장 높은 건축물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성세 그룹이다.강씨 집안은 처참히 무너졌다.사고 후 깨어나 보니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강영수는 후회하고 있을까?그의 가슴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다.그에게 있어 피라미드 가장 꼭대기 위치보다 예전 실수로 잃었던 장소월이 훨씬 더 소중했다.경호원이 다가와 말했다.“도련님,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출발하셔야 합니다.”“그
장소월이 경계하며 그를 쳐다보았다.“내가 왜 당신 말을 믿어야 하는데요?”서철용은 고개를 숙이고 주름진 의사 가운을 툭툭 두드렸다.“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어요. 믿거나 잊어버리거나, 그건 소월 씨의 몫이에요.”“전 확실히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어요. 알다시피 나에겐 망설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어요. 만약 장씨 집안에 대한 원한을 저에게 풀고 싶거나, 또는 저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예전 일은 더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장해진도 그렇고, 엄마의 사망 원인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안들 뭘 할 수 있겠어요? 살날이 반년도 남지 않은 사람이 뭘 할 거라 기대하는 거예요? 만약 엄마가 계셨다면, 엄마도 제가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전 30세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됐어요. 장해진의 딸로 태어난 벌로 생각하고 있어요.”장소월은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지금 제가 원하는 건 바로 제 눈앞에 있어요.”경호원이 재촉했다.“아가씨,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가야 합니다.”장소월의 시선이 다시 서철용에게로 향했다.“아버지가 남긴 엄마 사진첩 속에서... 엄마 옆에 서 있던 그 남자아이 말이에요. 당신이에요?”서철용의 새빨간 입꼬리가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장해진은 그분의 사진을 갖고 있을 자격도 없어요. 또한 그분은 그때 소월 씨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요.”장소월은 누군가 심장을 난타하기라도 한 것처럼 욱신거렸다.“서철용 씨 당신은 몰라요. 자신의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말이에요. 만약 저였어도 흔쾌히 제 목숨을 버리고 아이를 낳았을 거예요.”“아가씨, 이제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장소월은 더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서철용은 헬기에 오르고 있는 장소월을 향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장소월, 네가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호텔 초원에선 한창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현장은 수많은 귀빈들로 꽉 차 있었고, 기자들은
오늘은 분명 조용히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헬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 개인 전용기를 타려고 준비하던 그때.장소월은 이유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왠지 오늘 이렇게 쉽게 떠나지는 못할 것 같았다.진봉은 강영수가 앉아있는 휠체어를 밀고, 장소월은 그들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다.비행기에 발을 들이려던 순간, 돌연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승객 여러분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모든 항공편 출발 시간은 10분 연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갑작스럽게 불편함을 드려 죄송합니다.”동시에 활주로 안 검은색 개인 비행기 모두가 움직여 그들을 에워쌌다.장소월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익숙한 그 롤스로이스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어 고급스러운 검은색 정장을 입은 전연우가 차에서 내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살기는 마치 지옥에서 목숨을 거두러 온 악마의 몸에서 발산되는 것 같았다.오늘은 분명 그와 인시윤의 결혼식 날이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순간 장소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만면에 웃음을 띤 송시아가 몸에 달라붙는 레드 드레스를 입고 전연우의 옆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득의양양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모양새는 똑 닮아 있었다.전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손을 뻗어 장소월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장소월, 이쪽으로 와!”전연우의 출현에 공포에 질린 그녀는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송시아는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팔짱을 끼고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강영수가 장소월의 손을 잡았다.“가지 마.”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진봉이 말했다.“소월 씨, 도련님과 함께 먼저 가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막아볼게요.”장소월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봉을 바라보았다.“당해내지 못할 거예요.”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내가 너랑 가면 영수는 놓아줄 수 있어?”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고 마침 전연
그 한마디 말을 남긴 뒤 전연우는 강제로 장소월을 차 안에 밀어 넣었다.빈틈없이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인 줄 알았으나, 전연우는 이미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장소월은 군말 없이 차에 들어가 애원했다.“전연우, 내가 이렇게 빌게. 영수는 건드리지 마.”“내가 떠나자고 했어. 영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전연우가 돌연 팔을 뻗어 그녀를 확 밀치고는 목을 졸랐다. 얼굴엔 포악함이 가득 이글거렸고 손등엔 퍼런 힘줄이 툭툭 튀어 올랐다. 하지만 장소월은 조금도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 순간 장소월은 전생 백윤서가 죽던 그 순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전연우의 눈빛이 떠올랐다. “한 번만 더 강영수를 입에 올리면 당장 죽여버릴 거야.”너무나도 싸늘한 그의 모습에 장소월은 깜짝 놀라 바로 입을 다물었다. 온몸이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려왔다.기성은은 운전석에 앉아 차를 운전하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대표님, 도우미 아주머니와 아이는 이미 찾았고, 남원 별장에 데려다주었습니다.”장소월은 가슴이 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 아이까지 다시 데려오다니.“차 돌려. 남원 별장으로 가.”“네. 대표님.”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아무 말 없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공항에서 남원 별장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차량은 빠르게 달려 40분도 채 되지 않아 남원 별장에 도착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에 잡혀 별장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가 너무 힘주어 당긴 탓에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함께 잡혀 온 강영수가 별장에 들어오자 전연우는 단번에 휠체어를 차 엎어버리고는 그의 가슴을 짓밟았다.“깨어나자마자 이런 일을 벌여? 이봐, 강 도련님, 대체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걸 좋아하게 된 거야?”“하... 하지 마.”장소월은 힘겨운 몸을 이끌고 기어가 전연우의 발목을 잡고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전연우, 영수는 아직 채 회복되지도 않았어. 이러면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 거야.”“
전연우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소월의 아래턱을 감싸 쥐었다.“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찌할 건데?”반달 모양으로 길게 뻗은 수려한 눈썹, 그렁그렁 맺혀있는 눈물, 벌겋게 물든 두 눈,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그 모습에 당장에라도 침대에 눕히고 괴롭히고 싶었다.“나한텐 어떻게 해도 다 괜찮아. 저 사람들은 놔 줘.”전연우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소월아, 날 뭐라고 불러야 해?”장소월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오... 오빠...”전연우는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눈에 걸려있는 눈물에 살며시 키스했다.“세 번은 없어. 알고 있지?”장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연우는 그제야 등 뒤의 경호원에게 손짓했고, 경호원은 아이를 장소월에게 안겨주었다. 살펴보니 다행히 아이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이어 전연우는 그녀와 아이를 함께 안아 올렸다.“저놈은 지하실에 가두고 아무도 못 만나게 해. 그리고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해. 죽으면 안 되니까.”“네. 대표님.”전연우의 주요 목적은 바로 말 안 듣는 장소월을 다시 잡아 오는 것이었다.장소월은 전연우의 품에 안겨 그의 방에 들어갔다. 그는 아이가 있다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범하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를 견뎌냈다.예전에는 성욕에 대한 굶주림이었다면, 이번엔 그녀가 한 잘못에 대한 처벌이 추가 되었다. 하여 애무도 없이 곧바로 그녀의 몸 안을 파고들었다. 장소월은 손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를 애써 참아냈다.얼마가 지났을까, 아이는 울다가 지쳐 그녀의 옆에서 잠들었다. 그가 일을 끝내자, 장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한마디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두 다리 사이에서 끈적한 액체가 씻겨내려 왔다.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욕조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이 모든 고통은 전연우가 초래한 것이다.그가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전연우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가 죽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장소월은 재빨리 몸을 씻고 옆에 있는 목욕 가운을 집어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탓에 아이는 이미 배가 고팠다.남원 별장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 바로 밖에서 장을 봐와야 했다.장소월이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문 앞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전연우는 방금 통화를 마치고 발코니에서 나와 말했다."필요한 건 한 시간 정도 후에 배달될 거야."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나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내 방에서 지내. 당분간은 나도 너랑 같이 남원 별장에서 지낼 거야."같은 방에서?그럼 인시윤은?오늘은 그와 인시윤의 결혼식 날이 아닌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장소월은 두려움에 더는 묻지 못했다.곧 방문이 열리고 도우미가 그녀의 짐을 모두 들고 들어왔다.장소월에게는 옷이 많다. 옷장을 열어보니 전연우가 평소에 입던 파자마가 모두 한쪽으로 몰려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그녀의 옷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그녀의 신발 역시 전연우의 신발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나 혼자 지낼 수 있는데... 아기가 있어서 불편하잖아."전연우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조만간 익숙해질 거야."그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장소월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짐은 거의 다 옮겼어요. 더 필요한 게 있나 봐주실래요?""필요 없어요." 장소월의 화장대와 기타 잡동사니는 이미 꽤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다른 한 명의 도우미가 올라와 말했다."대표님, 아가씨, 저녁 다 준비됐으니 내려와서 드세요.""네."전연우가 무심히 대답했다.이야기를 마친 뒤 도우미들은 모두 밖으로 물러났다."아이 이리 줘."장소월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아이를 넘겨주었다. 말려 올라간 옷소매 끝으로 몇 시간 전에 남겨진 상처가 드러났다.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의 손을 잡은 채 세 식구가 위화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 괴이하고도 화목한 모습을
배은란은 매번 출근할 때마다 서민용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지 못했다.서민용을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였다. 배은란은 뒷모습만 보고 단번에 알아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그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그녀도 급히 따라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그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배은란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서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저를 따라오는 이유가 뭐죠?”그 순간 배은란은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한번 그의 부드럽고 맑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네? 왜 말이 없어요?”서민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배은란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서민용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 떨어뜨리지 않으셨어요?”서민용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요.”배은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서민용의 모습은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배은란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민용이 왜 웃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들통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얼마 후, 그녀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었다. 하지만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마침 서민용도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민용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그녀가 혼자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민용은 그녀를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배은란은 어색한 마음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배은란은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의 배려 덕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배은란은 서철용의 맞은편에 비스듬히 앉았다. 옆자리도 아니고 정면도 아닌 자리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에 서철용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그는 도우미를 불러 배은란이 위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일렀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철용은 곧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은란의 몸이 회복되기만 하면 다시는 그녀의 삶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서민용의 일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배은란의 몸이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저녁 식사 역시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배은란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더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표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방 아주머니를 불러 닭죽을 데워 그녀가 배고플 때 가져다주라고 말했다.배은란이 자리를 뜨자 서철용도 입맛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답답한 기분을 달래고자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갔다.그녀와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그녀가 곁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서철용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배은란은 마당에 멍하니 서 있는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그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그녀는 줄곧 형제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뒷모습이 그랬다. 하여 뒷모습만 보고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일로 서민용에게 불평까지 한 적이 있다.그 말에 서민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서민용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흐려졌다.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그중 딸 아이는 서민용과 판에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혹시라도 감정이 북받쳐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배은란은 더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기에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돌연 모든 것이 떠올랐다.그때 서철용은 마당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창가로 걸어가 세 사람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머릿속에 그동안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여기며 지내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배은란은 자신을 속이고 곁에 가두어둔 그를 원망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묵묵히 대체자를 자처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그녀는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방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얼마 후, 서철용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위층으로 그녀를 찾아 올라갔다.“일어났으면서 왜 안 내려왔어?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거야?”“미안해.”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서철용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 사과하는 거야?”“미안해.”“오늘은 날 서민용으로 착각하지 않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 기억해냈구나.”“다행이야.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야.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에야 기억을 되찾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서철용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배은란의 눈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을 본 순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는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서민용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에게 소개해주었던 날 밤이 아니다. 사실 그날 밤은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하지만 배은란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서민용만이 존재했기에, 그 기억은 오로지 서철용만의 것이었다.그가 첫눈에 반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알고 보니 형의 여자친구였다. 배은란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그녀와 서민용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순간, 서민용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최고조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장소월은 눈을 감고 무겁게 숨을 고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별이, 정말 제 아이인가요?”서철용은 입술을 질근 깨물고는 사실대로 말했다. “맞아요! 소월 씨와 전연우의 친자식이에요.” 그는 침대 곁에 걸터앉고는 이불에서 핫팩을 꺼내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 놓아주며 말했다. “소월 씨도 믿기 어려울 거예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충격적이라 믿지 않았었거든요.”“하지만... 나중에 관련 자료를 찾아본 결과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요. 소월 씨한테도... 비밀이 있는 거 맞죠?”“그 아이의 존재는 아마 하늘이 소월 씨에게 내려준 마지막 희망일 거예요. 소월 씨가 전생에서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어서 이번 생에 보상해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소월 씨는 아직 25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잖아요. 앞으로 더 넓은 미래가 펼쳐져 있을 거예요. 나도 소월 씨에게 전연우를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만약 이모가 살아계셨다면, 소월 씨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셨을 거예요. 이모는... 소월 씨가 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테니까요...”“소월 씨는... 이모의 유일한 딸이잖아요.”“정말 미안해요. 감히 소월 씨의 용서를 바라지도 않아요. 만약 언젠가 소월 씨가 내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바칠게요.”장소월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내 아이가 그렇게 쉽게 떠났을 리가요. 전부 그 여자가... 날 속인 거예요.”“하지만... 너무 괴로워요. 정말 살고 싶은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그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서철용은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감정 억누르지 말고 터뜨려요. 울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그 아이... 전연우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오직 그녀만이 아이를 소중하게 여겼다...그녀보다 아이를 더 사
장소월은 끝내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전연우의 예전 성격대로라면 강제로 쑤셔 넣었겠지만, 지금의 전연우는 그녀에게 조금도 강요할 수 없었다.오빠... 참으로 낯선 호칭이었다. 그 두 글자가 다시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을까?대체 무슨 낯짝으로 오빠라는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집에 돌아온 후로도 그녀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장소월은 아무 말 없이 좀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을 지나갔다. 앙상한 몸은 마치 곧 시들어버릴 낙엽 같아서,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겨우 한 발짝 걸었을 뿐인데, 자리에서 일어선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다시 두 번째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에 힘이 풀려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소월아...” 전연우는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의사한테 전화해서 당장 오라고 해요!”은경애도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네, 네, 지금 전화하겠습니다.”은경애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서철용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연우의 집에 도착한 그는 도우미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의료 상자를 들고 안방에 들어가 보니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일부러 단식하면서 널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소월 씨 스스로 마음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야. 전에 내가 말했던 심리 질환 장애, 우울증이라고 이해해도 돼.” 서철용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 수액을 놓을 준비를 했다. 그는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방법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해. 최대한 빨리 정상적으로 밥을 먹게 해야 해.”“도우미를 시켜 죽 끓여와.”그 말을 들은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예를 들어... 그의 장소월은 전생에서 죽은 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로 돌아왔다는 것.쉰 살이 거의 되어가던 전연우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견딜 수 없는 비통함에 시달렸다.시간을 계산해보면 아내를 잃고 난 후 되찾기까지 불과 십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전생에서 전연우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서 만인의 숭배를 받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얻은 것은 끝없는 공허함뿐이었다...돌이켜보니 모든 영광을 함께 누려야 할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그녀가 없을 때, 전연우의 눈에는 온통 그녀뿐이었다...매정하게 버려두었던 아내가 떠난 그때부터, 그는 어둠 속에 빠져버렸다. 그러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후 머릿속까지 잠식되어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고, 모든 곳에 그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전연우는 진정으로 그녀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때쯤 이미 십 년이 지났고, 전연우는 병이 깊어 위독한 상태였다...그는 죽은 후, 자산을 '그 아이'에게 남기지 않고 전부 보육원 자선 재단에 기부했다...이 모든 것이...꿈만 같았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끌려오는 날을 상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방에는 꽃병이 놓여 있었고, 그녀가 좋아하는 화려한 장미꽃들이 꽂혀 있었다...그녀는 좋은 기억들을 떠올려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하지만 침대 머리맡에 걸린 결혼사진을 본 순간 떠오르는 것이라곤 온통 고통스러운 기억뿐이었다.은경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애원했다.“아이쿠, 아가씨! 제발 뭐라도 좀 드세요.”“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잖아요. 한 끼 안 드시면 10만 원 감봉...”“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입만 드세요.”장소월은 돌아온 후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전연우, 길에서 마음대로 주워온 아이를 내 아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임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네 손으로 직접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 잊었어? 그렇게까지 나 모욕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안 먹혀.”장소월의 말투와 눈빛엔 담담함만이 담겨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고통을 전부 견뎌왔으니 말이다. 전연우는 예전 그녀가 마시는 우유에 독약을 탔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영영 엄마가 될 기회를 상실했고, 자궁까지 절제했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놈이 지금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길가에서 데려온 아이와 친자 확인을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어찌 황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녀가 믿지 않을까 봐, 곧장 가장 신뢰도가 높은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보디가드들이 별이를 안아 들었고, 전연우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8층으로 향했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 혼자 걸을 수 있어.”전연우는 그녀의 팔목에서 힘을 풀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8층 전체가 비워져 있었고, 각 계단 입구마다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었다.의사도 일찌감치 문밖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연우가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 가장 공신력 있는 의사 선생님들이야. 오늘은...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이 친자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소월아... 믿기 힘들겠지만, 별이는 정말 우리 둘의 친자식이야.”눈앞 남자의 진지한 눈빛에 장소월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머릿속에... 그녀에게 고통만 안겨 주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수술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던 순간이었다.장소월은 그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려왔다. 당시 송시아 때문에 하마터면 수술대 위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설령 그 아이가 죽지 않았더라도 아들일 리는 없다.송시아가 그녀
그녀가 쓰던 베개도 여전히 예전 그대로 침대에 놓여 있었다. 전연우는 매일 그 베개를 안고 잠들곤 했다.그의 아내 장소월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단호하고 냉정하고 떠나버렸다.심지어 꿈속에서조차 한 번도 그를 보러 오지 않았을 정도로...전연우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었다. 장소월이 곁에 없는 동안 전연우는 그녀의 사진만 반복해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이제... 그녀가 드디어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장소월은 자리에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전연우, 난 네가 싫어.”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제발!”“난 너랑 같이 살 수 없어. 예전의 모든 것들 잊을 수도 없고.”“후회돼서 미치겠어. 그때 왜 바로 네 숨통을 끊어놓지 않았을까. 네가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떠났어야 했는데.”“별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하고 밥부터 먹자, 응?” 전연우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서울로 돌아가면 모든 걸 알게 될 거야.”“돌아가서도 네가 여전히 날 죽이고 싶다고 하면, 그땐 목숨 내놓을게.”“나 죽으면 성세 그룹을 포함해 해외에 있는 자산까지 전부 팔아서 현금, 주식, 보석으로 바꿔 너한테 상속할 거야. 너랑 별이가 평생 걱정 없이 편히 지낼 수 있게.”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모두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전부 그녀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이다.장소월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가소로웠다. “넌 네가 날 사랑한다고 생각할 때만, 최고의 것들을 나한테 주려고 해.”“만약 날 사랑하지 않았다면, 전연우... 난 지금 이곳에 살아있지도 못했을 거야!”“전연우, 난 네 사랑 따위 필요 없어.”장소월은 자신이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했다.죽고 싶지는 않지만... 그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혼자 먹어. 난 입맛 없어.”장소월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휴게실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장소월은 몸에 걸쳐진 가디건을 홱 뜯어내고는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엄마...” 분홍색 공주 드레스를 입은 아이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달려왔다. 아이의 머리에 달려 있는 가발을 본 순간 사막에 있던 월이가 떠올랐다. 별이는 머리에 가발을 쓰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엄마... 보고 싶었어요.” “이건 별이가 엄마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엄마가 이걸 보면 우리랑 집에 갈 거라고 아빠가 말했어요.” 장소월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다리를 붙잡고 있는 아이를 떼어냈다. “대체 언제까지 사람 갖고 장난칠 거야!” “사기꾼!” 별이는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전연우에게 부딪혔다. 전연우는 아이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응?”장소월은 새빨개진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며 말했다. “강용도, 현아도 강지훈에게 끌려갔어. 이 모든 거... 네가 계획한 거야?” 전연우는 세상 모든 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다. “가짜 친자 확인서를 가지고 와서 날 속이려 들어? 날 세 살짜리 애 취급하는 게 재밌어?” “사기꾼!” 별이는 여전히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엄마... 별이랑 같이 가요. 별이는 이 사기꾼이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별이는 엄마랑 같이 있을 거예요...” 전연우는 아이를 옆에 있던 여자에게 넘겨주었다. 장소월은 그제야 핫팬츠 가죽 재킷 차림에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이 여자가 바로 ‘손이준’과 이혼하고 그를 빈털터리로 만든 전 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연우,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난 너랑 돌아가지 않아.” 하지만 전연우는 바로 장소월을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와이프 다리는 소중하니까 안고 가는 게 좋겠어.” 장소월이 소리쳤다. “전연우, 이 비겁한 자식. 당장 내려놔.”그 시각 밤하늘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도시엔 지난 6년 동안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