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월은 재빨리 몸을 씻고 옆에 있는 목욕 가운을 집어 입고는 밖으로 나갔다.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탓에 아이는 이미 배가 고팠다.남원 별장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아 바로 밖에서 장을 봐와야 했다.장소월이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문 앞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전연우는 방금 통화를 마치고 발코니에서 나와 말했다."필요한 건 한 시간 정도 후에 배달될 거야."장소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나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내 방에서 지내. 당분간은 나도 너랑 같이 남원 별장에서 지낼 거야."같은 방에서?그럼 인시윤은?오늘은 그와 인시윤의 결혼식 날이 아닌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장소월은 두려움에 더는 묻지 못했다.곧 방문이 열리고 도우미가 그녀의 짐을 모두 들고 들어왔다.장소월에게는 옷이 많다. 옷장을 열어보니 전연우가 평소에 입던 파자마가 모두 한쪽으로 몰려있었고, 나머지 공간은 그녀의 옷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그녀의 신발 역시 전연우의 신발과 함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나 혼자 지낼 수 있는데... 아기가 있어서 불편하잖아."전연우는 장소월에게 다가가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조만간 익숙해질 거야."그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장소월의 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짐은 거의 다 옮겼어요. 더 필요한 게 있나 봐주실래요?""필요 없어요." 장소월의 화장대와 기타 잡동사니는 이미 꽤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다른 한 명의 도우미가 올라와 말했다."대표님, 아가씨, 저녁 다 준비됐으니 내려와서 드세요.""네."전연우가 무심히 대답했다.이야기를 마친 뒤 도우미들은 모두 밖으로 물러났다."아이 이리 줘."장소월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아이를 넘겨주었다. 말려 올라간 옷소매 끝으로 몇 시간 전에 남겨진 상처가 드러났다.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장소월의 손을 잡은 채 세 식구가 위화감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 괴이하고도 화목한 모습을
인정아와 인시윤이 왔다고?장소월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전연우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어디 가려고?""내가 여기에 없는 게 나은 것 같아."전연우는 고개를 들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앉아서 밥 먹어."장소월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미 따지러 온 두 사람이 나타났다.인시윤은 여전히 화려한 수놓이가 만연한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원래 결혼식 뒤풀이 때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녀는 밤새 호텔 방에 앉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인시윤은 공항에서 전연우에게 오빠가 끌려갔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전연우는 정말 그녀를 두고 떠난 것이다.결혼식 날 버리고 떠나다니...오늘 결혼식에서 했던 맹세를 어떻게 이렇듯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잊을 수 있단 말인가."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전연우 씨, 오늘이 우리 결혼식 날이라는 거 잊었어요? 오늘밤 만큼은 나랑 같이 있어야 하잖아요?""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생겨서 오지 못한 거죠, 그렇죠?"인시윤은 화장을 했음에도 얼굴의 초췌함과 창백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미 펑펑 울고 온 듯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약지 사이에는 크고 빛나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이 결혼반지는 인시윤이 직접 고른 커플 반지였는데, 전연우가 끼고 있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두 사람은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죄책감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까마득한 절망에 휩싸인 목소리, 그때의 그 장소월과 너무나 닮아있었다.5년 전, 전연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다.다만 역할이 180도 바뀌어 자신이 제2의 송시아가 될 거라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장소월은 조금의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인시윤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점까지 밀려나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그렇다... 자신과 함께
장소월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전연우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밥 다 먹고 올라가."그의 시선을 의식한 장소월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전연우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몸을 뒤로 젖혔다. 자욱한 연기가 그의 가는 손가락 사이로 날려갔다.인시윤은 대체 무슨 용기로 직접 여기까지 찾아와 전연우에게 따져 묻고 있는 걸까."음흉하기도 하지. 몰래 외국으로 보내려고요? 꽤 치밀한 작전이긴 했어요."인정아가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오늘까지 기다렸다가 내 아들을 괴롭히고, 내 딸에게 수치심을 안겨준 건가? 전연우... 자넨 정말 장해성이 키운 사냥개답군. 그때 뒤에서 자네를 도와준 게 누군지 잊지 말게. 우리 인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겠나?"전연우는 손을 들어 파티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날 도왔다고요? 인씨 가문은 아무것도 해준 거 없어요. 잊지 말아요... 결혼이든, 성세 그룹이 인하 그룹에 던져준 주식이든, 그건 이득이 되는 거래일 뿐이에요. 그것에 대해선 당신과 나 모두 똑똑히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하지만 당신들은 절대 장소월을 건드리면 안 됐어요... 내가 가까스로 되찾은 사람을 당신들이 숨겨버린다면 낭패잖아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디데이를 오늘로 정한 건 꽤 탁월한 선택인 것 같네요."그들은 전연우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장소월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고 있었다.오늘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서울의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전연우는 망설임 없이 결혼식을 뒤로하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갔다.그들이 생각하는 전연우는 사리 분별을 똑똑히 할 줄 아는, 또 이익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냉혹한 현실이 그들의 뺨을 호되게 내리쳤다.인시윤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진실을 듣고 있자니 갑자기 수많은 바늘이 심장을 찌르듯 욱신거렸고 목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괴로워하며 걸어가는 장소월에게 쏠렸다.그녀가 이렇게 나약할 줄이야.전연우가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장소월은 살아서 남원 별장을 걸어 나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전연우는 복도 끝에서 장소월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짜증스럽게 손에 쥔 담배를 끄고 일어섰다."장모님, 정말 한 성격 하시네요."그는 인정아 앞에 걸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우뚝 솟은 검은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제가 장모님의 목숨줄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나 봐요? 방금 하셨던 말 만큼 강영수는 벌을 받아야 할 거예요. 그놈이 버티지 못한다고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니 원망하지 마세요!"인정아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일갈했다."전연우, 네가 감히!""내가 못할 것 같아요? 그럼 어디 한번 해보세요. 내일 인씨 집안 문 앞에 시체가 배달되는지 아닌지 두고 보자고요!" 그의 눈빛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번뜩거렸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그들을 자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인시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연우 씨도 이제 우리 가문의 일원이잖아요. 고작 장소월 하나 때문에 우리한테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 거예요? 당신이 사람이에요?"전연우는 그들과 더이상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강영수가 무사하기를 원한다면 그 대가로 강씨 가문 저택 문서를 갖고 오세요. 삼일 생각할 시간을 줄게요.""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장모님은 저에게 만족스러운 답을 해줘야 할 겁니다. 사과 한마디로는 진심이 전달되기에 다소 부족한 감이 있거든요. 전 무서워요... 당신 아들이 혹시라도 내일을 넘기지 못할까 봐요."충격에 비틀거리는 인정아를 인시윤이 부축했다."전연우 씨, 이분은 연우 씨의 장모님이자, 우리의 인생 선배님이기도 해요. 어떻게 엄마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전연우는 인시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뒤돌아섰다.식탁 위 음식은 거의 그대로였고,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장소월이 먹던 밥그릇에는 아직 밥이 반이 넘게 남아 있었다.전연우가 방으로 돌
장소월은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아이의 소변을 확인한 뒤 침대 중앙에 눕히고는 자신은 침대 가장자리에 누웠다. 이 침대는 넓고 편안하여 밤에 마음껏 뒤척여도 아이의 수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전연우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침대 옆에 앉았다. "국수 끓여서 한 그릇 먹을래?"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아직 채 읽지 않은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난 배 안 고파. 귀찮게 하지 마."그의 손이 위로 올라간 순간, 장소월은 경계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전연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시선을 피한 뒤 책을 닫아 침대 아래에 넣었다. "먼저 잘게."장소월은 등을 돌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전연우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한동안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발코니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 만약 정말 상처를 받았다면 장소월도 저렇게 태연하지 못했을 거야.남원 별장 아래에는 아직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시윤이었다. 엄마와 오빠를 위해...엄마가 홧김에 장소월에게 한 말 때문에, 전연우는 그들이 장소월에게 그에 따른 사과를 하기를 원했다. 엄마는 장소월에게 무릎 꿇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엄마의 지금 건강 상태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다. 인시윤은 머리를 들어 올려 3층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그녀는 결국 장소월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와의 결혼도 일찌감치 계획된 일이었다. 많은 일들은 따귀 한 대를 호되게 맞은 후에야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분명 이런 이치를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마음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무려 5년 가까이, 그녀의 청춘을 모두 바쳤다. 그를 위해 필사적으로 헌신했지만 결국 자신의 일방적인 욕망일 뿐, 그는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점점 더 깊어져 가는 밤, 밖에선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도우미들은 일을 마무리한 뒤 조명을 끄고 퇴근할 준비를 했
주룩주룩 거세게 창문에 쏟아지는 빗소리, 하늘에서 번쩍번쩍 사납게 하늘을 가르는 번개... 아이가 놀라 깨어나 울음을 터뜨렸다. 장소월 역시 깊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전연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이마에 얹어놓았다. 장소월은 손을 뻗어 침대 탁자 옆 조명을 켠 후 이불을 걷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남원 별장의 방은 로즈 가든보다 넓었다. 또한 이미 오랜 시간 살아왔던 곳이기에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그녀는 떨어진 어깨끈을 살짝 위로 올리고는 전연우가 깰까 봐 아이를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 "괜찮아, 괜찮아, 별아, 울지 마..."오늘 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심하게 울고 있었다.장소월이 아무리 달래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답답함에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연 순간, 바깥에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커튼에 닿은 손이 경직되어 멈춰 섰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아이의 울음소리는 점차 조용해지고 있었다.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지.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귀에 스며들었다. 전연우가 검은색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채 몸을 숙이고 그녀의 어깨에 키스했다. "내가 안고 있을게. 넌 들어가서 자. 응?"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온 순간, 장소월은 오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시윤이 왜 저기에 있어?"인시윤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당장에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나 등을 곧게 펴고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아프지도 않아?"장소월의 검은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려왔다.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눈동자 속에서 아픈 상처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인시윤은 네 와이프야. 저런 모습을 보고도 마음이 하나도 안 아파?"장소월에게는 아주 익숙한 광경이었다. 전생의 그 날도 지금과 같이 비가 내리고,
장소월은 무덤덤하게 그녀 곁을 지나갔다. 송시아의 그녀에 대한 태도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시윤은 지난 생의 소월 씨와 정말 닮았네요? 가엾고도 우스꽝스럽고...""내 자리를 빼앗아 높은 자리에 앉은 느낌 어때요? 인시윤이 비를 맞으며 밤새 무릎 꿇고 있는 걸 보니 흐뭇하죠?""생각해보니... 이 장면, 참 익숙한 느낌이네요!"그녀의 말투엔 조롱이 가득 차 있었다. 또한 장소월이 정말로 전생의 기억을 안고 다시 태어난 건지 넌지시 떠보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번 생에서 어떻게 전연우를 손에 쥐었겠는가. 지난 생에서 그녀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매번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고 사정하던 모습을 송시아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장소월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송시아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걸렸다.‘장소월, 저번 생보단 좀 더 똑똑했으면 좋겠네."송시아가 문을 열었을 때, 남자는 아직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연우 씨, 할 말이 있어요."전연우는 침대에 앉아 잠옷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나가."송시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나도 못 들어가요?"음산한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내 말 못 알아들어? 밖에서 기다려!"송시아는 한 발짝 더 다가가려다가 멈춰 섰다. "밖에서 기다릴게요."정보연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장소월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그분은 도우미 방에 갇혀있어요. 제가 알아봤는데 몸은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의사가 돌보고 있다고 하니 걱정 마세요."다른 도우미들은 일 때문에 바쁘게 돌아치느라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그럼 다행이네요.""식사는요? 약도 먹어야 할 텐데..."정보연은 머리를 저었다. "식사를 가져갔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어요.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결국 버티지 못할 거예요. 상처는 별로 크지 않기는 하지만요."장소월이 말했다. "아주머니는 들어가
“... 옷이 구겨졌네요. 제가 정리해드릴게요.”송시아는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손짓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은 부엌 쪽으로 향해있었다. 그녀는 계속하여 부엌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전연우의 몸에 걸쳐진 짙은 줄무늬의 잠옷을 정리해주었다.“오늘 밤 늘 보던 곳에서 기다릴게요. 꼭 와야 해요.”송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녀의 귓전을 스쳤지만 장소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장소월은 말없이 계속하여 뒤처리를 하며 마지막으로 냄비를 씻어서 제자리에 놓았다. 이윽고 송시아가 떠난 후, 정보연이 마침 분유를 다 먹이고 트림을 하는 아이를 안고 위층에서 내려왔다.“아가씨, 아이가 깼어요. 우는 것을 보자마자 아가씨를 찾는 것 같아서 바로 데려왔어요.”그러자 장소월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아이를 건네받았다. “주세요. 약은 먹였어요?”“네.”장소월은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아이를 안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정보연은 눈치껏 전연우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전연우도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현재 모든 상황은 전연우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시간이 흐르며 장소월도 반드시 그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이토록 훈훈한 장면은 전연우에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만족감을 선사했다.오랫동안 비어 있던 마음속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장소월도 그의 스킨쉽을 피하지 않았다. 강영수가 그의 손안에 있으니 만약 전연우가 전처럼 다시 한번 정신줄을 놓고 강영수에게 손을 댄다면... 장소월은 더 이상 모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녁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장난감을 가지고 아이를 달래주던 장소월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담담히 입을 열었다.“난 안 갈래. 영수는 자고 일어나서 내가 안 보이면 계속 울어. 게다가 아직 병도 낫지 않았잖아.”말하자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아이는 마치 그녀에게 달라붙어
이후 서민용도 보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불러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녀를 기다려주지도 않았다.배은란은 서민용이 떠나가는 방향과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갈등하다가 결국엔 서민용을 쫓아갔다.드디어 서민용이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배은란은 또다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눈빛과 똑같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화려하게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 속,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지 못했다. 서철용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민용과의 만남은 허황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두 아이 잘 돌봐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떠날 생각인 거야? 아이들 버리려고?”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아이들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버려두고 떠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불길한 생각이 서철용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민용의 묘비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과 함께 말이다.서철용이 분노가 차올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설마 서민용한테 가려는 거야? 말해봐, 정말 그럴 생각이야?”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서민용을 위해 아이들을 버리고, 심지어 네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거야? 이 세상에 널 붙잡아둘 수 있는 사람이 서민용밖에 없어? 서민용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도 않은 거야?”“말해봐! 정말이냐고 묻고 있잖아!”“맞아! 난 네가 나한테 했던 일들을 탓하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난 그저 민용 씨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그 사람이 어디로 가든 따라가고 싶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야!”“네 말이 맞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하겠어. 너한테 난 벌레보다 못한 존재잖아.”“나 너무 힘들어. 제발 나 좀 놔줘. 나 민용 씨가 정말 보
서철용은 잠에서 깨어나 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그는 급히 위층에 있는 배은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그녀는 그 안에 없었다.그는 덜컥 겁이 났다. 순간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다행히 이후 냉정을 되찾고 차를 몰고 서씨 집안 묘지로 향했다.배은란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울었던지라 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 올라 그녀의 몸에 햇살을 비추었지만, 그녀는 조금의 따뜻함도 느끼지 못했다.서철용이 도착했을 때, 배은란은 서민용의 묘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장에도 배은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 주변 감각에 둔감해져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상태가 걱정되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서 나온 거야? 언제 나온 거야?”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서민용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사진 속 그의 어깨에 닿은 순간, 더는 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야?”귓가에 들려오는 거라곤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철용의 목소리만이 묘지에 울려 퍼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은란의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 해는 이미 머리 위까지 떠올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어느새 배은란의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그 모습을 본 서철용이 끝내 입을 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서 있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어.”하지만 배은란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어쩔 수 없이 도우미를 시켜 두 아이를 묘지로 데려오게 했다. 아이들이 있으면 그녀가 마음을 바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아이도 배은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시 동요와 갈등이 떠올랐지만
배은란은 매번 출근할 때마다 서민용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지 못했다.서민용을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였다. 배은란은 뒷모습만 보고 단번에 알아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그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그녀도 급히 따라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그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배은란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서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저를 따라오는 이유가 뭐죠?”그 순간 배은란은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한번 그의 부드럽고 맑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네? 왜 말이 없어요?”서민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배은란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서민용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 떨어뜨리지 않으셨어요?”서민용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요.”배은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서민용의 모습은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배은란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민용이 왜 웃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들통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얼마 후, 그녀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었다. 하지만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마침 서민용도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민용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그녀가 혼자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민용은 그녀를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배은란은 어색한 마음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배은란은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의 배려 덕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배은란은 서철용의 맞은편에 비스듬히 앉았다. 옆자리도 아니고 정면도 아닌 자리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에 서철용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그는 도우미를 불러 배은란이 위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일렀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철용은 곧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은란의 몸이 회복되기만 하면 다시는 그녀의 삶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서민용의 일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배은란의 몸이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저녁 식사 역시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배은란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더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표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방 아주머니를 불러 닭죽을 데워 그녀가 배고플 때 가져다주라고 말했다.배은란이 자리를 뜨자 서철용도 입맛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답답한 기분을 달래고자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갔다.그녀와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그녀가 곁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서철용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배은란은 마당에 멍하니 서 있는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그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그녀는 줄곧 형제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뒷모습이 그랬다. 하여 뒷모습만 보고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일로 서민용에게 불평까지 한 적이 있다.그 말에 서민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서민용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흐려졌다.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그중 딸 아이는 서민용과 판에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혹시라도 감정이 북받쳐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배은란은 더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기에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돌연 모든 것이 떠올랐다.그때 서철용은 마당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창가로 걸어가 세 사람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머릿속에 그동안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여기며 지내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배은란은 자신을 속이고 곁에 가두어둔 그를 원망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묵묵히 대체자를 자처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그녀는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방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얼마 후, 서철용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위층으로 그녀를 찾아 올라갔다.“일어났으면서 왜 안 내려왔어?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거야?”“미안해.”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서철용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 사과하는 거야?”“미안해.”“오늘은 날 서민용으로 착각하지 않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 기억해냈구나.”“다행이야.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야.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에야 기억을 되찾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서철용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배은란의 눈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을 본 순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는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서민용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에게 소개해주었던 날 밤이 아니다. 사실 그날 밤은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하지만 배은란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서민용만이 존재했기에, 그 기억은 오로지 서철용만의 것이었다.그가 첫눈에 반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알고 보니 형의 여자친구였다. 배은란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그녀와 서민용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순간, 서민용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최고조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장소월은 눈을 감고 무겁게 숨을 고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별이, 정말 제 아이인가요?”서철용은 입술을 질근 깨물고는 사실대로 말했다. “맞아요! 소월 씨와 전연우의 친자식이에요.” 그는 침대 곁에 걸터앉고는 이불에서 핫팩을 꺼내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 놓아주며 말했다. “소월 씨도 믿기 어려울 거예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땐 너무 충격적이라 믿지 않았었거든요.”“하지만... 나중에 관련 자료를 찾아본 결과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요. 소월 씨한테도... 비밀이 있는 거 맞죠?”“그 아이의 존재는 아마 하늘이 소월 씨에게 내려준 마지막 희망일 거예요. 소월 씨가 전생에서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어서 이번 생에 보상해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소월 씨는 아직 25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잖아요. 앞으로 더 넓은 미래가 펼쳐져 있을 거예요. 나도 소월 씨에게 전연우를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만약 이모가 살아계셨다면, 소월 씨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파하셨을 거예요. 이모는... 소월 씨가 매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랄 테니까요...”“소월 씨는... 이모의 유일한 딸이잖아요.”“정말 미안해요. 감히 소월 씨의 용서를 바라지도 않아요. 만약 언젠가 소월 씨가 내 목숨을 원한다면 기꺼이 바칠게요.”장소월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내 아이가 그렇게 쉽게 떠났을 리가요. 전부 그 여자가... 날 속인 거예요.”“하지만... 너무 괴로워요. 정말 살고 싶은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그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요...”서철용은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감정 억누르지 말고 터뜨려요. 울고 나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그 아이... 전연우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오직 그녀만이 아이를 소중하게 여겼다...그녀보다 아이를 더 사
장소월은 끝내 한 입도 먹지 않았다. 전연우의 예전 성격대로라면 강제로 쑤셔 넣었겠지만, 지금의 전연우는 그녀에게 조금도 강요할 수 없었다.오빠... 참으로 낯선 호칭이었다. 그 두 글자가 다시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스스로 부끄럽지도 않을까?대체 무슨 낯짝으로 오빠라는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집에 돌아온 후로도 그녀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장소월은 아무 말 없이 좀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을 지나갔다. 앙상한 몸은 마치 곧 시들어버릴 낙엽 같아서, 바람이 살짝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다.겨우 한 발짝 걸었을 뿐인데, 자리에서 일어선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 쓴 것 같았다. 다시 두 번째 발을 내딛으려던 순간, 돌연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에 힘이 풀려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소월아...” 전연우는 재빨리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의사한테 전화해서 당장 오라고 해요!”은경애도 당황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네, 네, 지금 전화하겠습니다.”은경애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서철용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연우의 집에 도착한 그는 도우미의 설명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의료 상자를 들고 안방에 들어가 보니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했다.“일부러 단식하면서 널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소월 씨 스스로 마음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거야. 전에 내가 말했던 심리 질환 장애, 우울증이라고 이해해도 돼.” 서철용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해 수액을 놓을 준비를 했다. 그는 뒤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담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런 방법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해. 최대한 빨리 정상적으로 밥을 먹게 해야 해.”“도우미를 시켜 죽 끓여와.”그 말을 들은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예를 들어... 그의 장소월은 전생에서 죽은 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로 돌아왔다는 것.쉰 살이 거의 되어가던 전연우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부터 견딜 수 없는 비통함에 시달렸다.시간을 계산해보면 아내를 잃고 난 후 되찾기까지 불과 십여 일밖에 지나지 않았다.전생에서 전연우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서 만인의 숭배를 받았지만, 진정으로 그가 얻은 것은 끝없는 공허함뿐이었다...돌이켜보니 모든 영광을 함께 누려야 할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그녀가 없을 때, 전연우의 눈에는 온통 그녀뿐이었다...매정하게 버려두었던 아내가 떠난 그때부터, 그는 어둠 속에 빠져버렸다. 그러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리움이 조금씩, 조금씩...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후 머릿속까지 잠식되어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고, 모든 곳에 그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전연우는 진정으로 그녀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때쯤 이미 십 년이 지났고, 전연우는 병이 깊어 위독한 상태였다...그는 죽은 후, 자산을 '그 아이'에게 남기지 않고 전부 보육원 자선 재단에 기부했다...이 모든 것이...꿈만 같았다.장소월은 전연우에게 끌려오는 날을 상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방에는 꽃병이 놓여 있었고, 그녀가 좋아하는 화려한 장미꽃들이 꽂혀 있었다...그녀는 좋은 기억들을 떠올려 착잡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하지만 침대 머리맡에 걸린 결혼사진을 본 순간 떠오르는 것이라곤 온통 고통스러운 기억뿐이었다.은경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애원했다.“아이쿠, 아가씨! 제발 뭐라도 좀 드세요.”“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잖아요. 한 끼 안 드시면 10만 원 감봉...”“제 얼굴을 봐서라도 한 입만 드세요.”장소월은 돌아온 후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그 말을 들은 장소월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전연우, 길에서 마음대로 주워온 아이를 내 아이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임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네 손으로 직접 날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 잊었어? 그렇게까지 나 모욕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안 먹혀.”장소월의 말투와 눈빛엔 담담함만이 담겨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고통을 전부 견뎌왔으니 말이다. 전연우는 예전 그녀가 마시는 우유에 독약을 탔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영영 엄마가 될 기회를 상실했고, 자궁까지 절제했다.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놈이 지금 그녀를 병원에 데려가 길가에서 데려온 아이와 친자 확인을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고 있다.어찌 황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액셀을 밟았다. 그녀가 믿지 않을까 봐, 곧장 가장 신뢰도가 높은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보디가드들이 별이를 안아 들었고, 전연우는 장소월의 손을 잡고 8층으로 향했다.“뭐 하는 거야. 이거 놔! 혼자 걸을 수 있어.”전연우는 그녀의 팔목에서 힘을 풀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8층 전체가 비워져 있었고, 각 계단 입구마다 보디가드들이 지키고 있었다.의사도 일찌감치 문밖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연우가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이분들은 모두 가장 공신력 있는 의사 선생님들이야. 오늘은...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이 친자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소월아... 믿기 힘들겠지만, 별이는 정말 우리 둘의 친자식이야.”눈앞 남자의 진지한 눈빛에 장소월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머릿속에... 그녀에게 고통만 안겨 주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수술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를 낳던 순간이었다.장소월은 그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려왔다. 당시 송시아 때문에 하마터면 수술대 위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설령 그 아이가 죽지 않았더라도 아들일 리는 없다.송시아가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