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옷이 구겨졌네요. 제가 정리해드릴게요.”송시아는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손짓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은 부엌 쪽으로 향해있었다. 그녀는 계속하여 부엌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전연우의 몸에 걸쳐진 짙은 줄무늬의 잠옷을 정리해주었다.“오늘 밤 늘 보던 곳에서 기다릴게요. 꼭 와야 해요.”송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녀의 귓전을 스쳤지만 장소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장소월은 말없이 계속하여 뒤처리를 하며 마지막으로 냄비를 씻어서 제자리에 놓았다. 이윽고 송시아가 떠난 후, 정보연이 마침 분유를 다 먹이고 트림을 하는 아이를 안고 위층에서 내려왔다.“아가씨, 아이가 깼어요. 우는 것을 보자마자 아가씨를 찾는 것 같아서 바로 데려왔어요.”그러자 장소월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아이를 건네받았다. “주세요. 약은 먹였어요?”“네.”장소월은 그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아이를 안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정보연은 눈치껏 전연우를 힐끗 바라보고는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전연우도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현재 모든 상황은 전연우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시간이 흐르며 장소월도 반드시 그를 떠날 수 없을 것이다.장소월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이토록 훈훈한 장면은 전연우에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만족감을 선사했다.오랫동안 비어 있던 마음속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장소월도 그의 스킨쉽을 피하지 않았다. 강영수가 그의 손안에 있으니 만약 전연우가 전처럼 다시 한번 정신줄을 놓고 강영수에게 손을 댄다면... 장소월은 더 이상 모험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저녁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장난감을 가지고 아이를 달래주던 장소월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담담히 입을 열었다.“난 안 갈래. 영수는 자고 일어나서 내가 안 보이면 계속 울어. 게다가 아직 병도 낫지 않았잖아.”말하자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 아이는 마치 그녀에게 달라붙어
장소월이 좋아하는 물건이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줄 수 있다.지금처럼 자신에게 선을 긋고 울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고는 그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사람은 원래 욕심이 많은 법이다.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그런데 하필이면... 전연우는 그 한 가지도 얻지 못했다.인시윤을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전에 남원별장에서 인시윤을 돌보기 위해 고용한 가사도우미도 모두 함께 꺼지라고 했다.사실 장소월은 이 별장의 소유권이 그녀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옛 모습을 돌려놓기 위해 전연우는 이곳에서 일하던 가사도우미도 다시 찾아 데려왔다.그리고... 은경애...은경애가 아직도 시공이 중단된 낡은 건물에서 빨래하고 있을 때, 경호원 몇 명이 그녀를 찾아 나섰지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빛의 속도로 거절해버렸다.하지만... 월급을 듣자마자 그녀는 결국 발을 가누지 못하고 그 사람들을 따라 차를 탔다.차에 탔을 때, 그곳이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동굴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자신의 뺨을 두 대 때렸었다. 당시 그 여자는 인... 뭐였었지, 결국 은경애는 말 한마디에 해고당했고 월급도 절반 이상이 깎였었다.당시 은경애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었다....전연우가 한 모든 행동은 마치 일부러 그녀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정보연은 아직도 아이가 실수한 옷을 챙기고 있는데 갑자기 경호원이 들이닥치더니 말없이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이 모든 일은 장소월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아가씨... 전 아무 일도 안 했어요!”“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장소월은 아이를 방에 혼자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그들을 쫓아갔다.홀 안에는 남원별장 내부의 모든 사람이 서 있었다.그리고 모든 사람의 손에는 종이봉투에 담긴 돈이 들려 있었다.“갈 때 자리에 있는 여러분의 입을 깨끗하게 하는
그러자 그때, 경호원 한 명이 텀블러 하나를 손에 들고 문 앞에서 걸어왔다.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장소월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대표님, 강영수를 가둔 방에서 찾은 것입니다.”전연우는 담담히 옆 사람을 흘끗 쳐다보고는 입가에 포악한 곡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그래? 안에 뭐가 들어 있는데?”그러자 경호원이 곧바로 그에게 보고했다.“갈비죽입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곧바로 텀블러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죽을 절반가량 들이켰다.장소월은 숨통이 조여오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죽? 누가 내 허락 없이 갖다 줬어?”그의 말투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아가씨 옆에 있는 하인입니다.”그러자 전연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령을 내렸다.“저년의 손을 잘라버려.”“그리고 마신 만큼 토해내라고 해.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먹을 것을 보내지 마.”전연우의 말에 정보연은 즉시 당황하고 말았다.“대표님, 이건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아가씨가 보내 달라고 해서 저도 아가씨의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대표님, 저에게는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다음에는 절대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정보연은 콧물과 눈물범벅이 되어 하마터면 전연우 앞에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아가씨,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장소월은 얼굴을 찌푸리며 곧바로 그를 말렸다.“내가 시킨 거 맞아. 그러니까 보연 아줌마 그렇게 대하지 마. 영수가 깨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넌 가두어 버렸잖아... 영수는...”“벌써 마음이 아파진 거야?”전연우는 마치 장소월이 성심성의껏 강소영을 감싸주는 것이 질투 난다는 듯 억지로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의 몸에서 풍기는 싸늘한 기운이 장소월을 스르륵 감싸고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등골에 소름이 돋고 뼈가 사무치게 했다.“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오빠가 오해한 거야.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걸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어.”장소월은 그의 눈을 피하며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
장소월은 전연우의 손에 의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그리고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온 강영수는 그동안 한바탕 시달린 듯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 앞에 늘어뜨린 그의 검은 잔머리는 간신히 허약하고 생기 하나 없는 눈동자를 가려주었고 드러난 팔뚝에는 멍 자국이 가득하고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전연우는 한쪽에 놓여있던 골프채를 들고 곧바로 강영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장해진의 밑에서 일하며 영역 다툼을 위해 기타 세력들과 싸우던 시절처럼 흉포한 기세가 역력했다.전연우에게 해낼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강영수의 죽음을 원하는 전연우의 눈빛은 쉽사리 숨길 수 없었다.손에 피를 묻힌 적도 있고 게다가 지금은 모든 세상이 그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목숨 하나가 줄어든다고 해도 아무도 감히 그에게 무어라 언질을 줄 수 없다. 그러니 아무도 강영수의 죽음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예전의 전연우는 지금보다 더 무법천지였다.골프채를 휘두르는 그 순간, 장소월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땅에서 벌떡 일어나 강영수의 곁으로 달려와 그를 꼭 껴안고 몸을 감쌌다.순간 뒤쪽 견갑골로부터 찌릿찌릿한 저림이 전해지더니 뒤이어 뻑뻑한 통증과 함께 그녀의 팔 전체에 걸쳐 모든 감각이 없어졌다.순식간의 고통에 귀에서 이명이 들려왔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정말 강영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내세울 줄 몰랐다. 그는 급히 장소월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소월아!”장소월은 엄청난 고통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영수는 네 공격을 참아낼 수 없어. 전연우... 영수를 죽게 하고 싶지 않잖아...”“이 바보야!”전연우는 즉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집어 던지고는 장소월을 번쩍 안아 들었고 그의 얼굴에는 무시무시하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그는 그녀를 방으로 데려가 다른 것을 신경 쓸 틈도 없이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북북 찢었다. 불과 몇 분 만에 그녀의 등 쪽은 온통 검푸르게 부어올랐다.골프채를
간호사는 장소월의 옆을 지키며 그녀에게 수액을 놓아주었다.“혹시 서철용 의사 선생님 좀 불러 주시겠어요? 볼일이 있어서 그래요.”“서 선생님께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 2시간 정도 있다가 수술이 끝나면 전해드릴게요.”“감사합니다.”“천만에요.”장소월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물가물한 의식을 애써 놓지 않았다. 통증 때문인지 장소월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그때, 전연우가 마침 밖에서 돌아와 병실로 들어왔다. 잠깐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다.그는 장소월의 병상 앞에 앉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의부님은 이틀 후에 돌아오실 거야.”장소월을 대신해 이불을 정리해주는 그의 손길은 뜻밖에도 부드럽기만 했다.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그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장소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얼마나 지났을까 장소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도대체 언제 영수를 풀어줄 작정이야?”“소월아, 나한테 대들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 안 돼? 순순히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넌 여전히 예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지낼 수 있어.”그제야 장소월은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머리 위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약간 공허하고 멍했다. 그리고 전연우에게 돌아온 대답은 단지 짧디짧은 한마디뿐이었다.“나는 그럴 수 없어.”그는 누구 때문에 변할 일은 없을 것이다.그는 여전히 전생의 전연우와 똑같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한 시간여 뒤, 직접 검사 보고서를 들고 장소월의 병실로 들어선 서철용은 곧바로 조용하지만 어딘가 기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장소월은 계속하여 눈을 감은 채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연우는 말없이 병실에서 그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옆에 매달린 링거 호스는 한 방울씩 똑똑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고 전연우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고 링거 속도를 늦추었다.그 시간 동안 모두가 원초적인 상
약효가 나타나는 시간은 무척 빨랐다....기성은은 전화를 받고 사진들과 함께 인시윤을 인가네로 돌려보냈다.갖은 고문에 몰골이 엉망이 되어버린 강영수의 사진을 본 인정아는 미칠 지경이었다.“감히 내 아들에게 손을 대?”“전연우 이 짐승 같은 놈!”가뜩이나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인정아는 광기 어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하지만 기성은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대표님께서 뭘 원하는지 사모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인정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다 강가의 본가 때문에 이러는 거야?”기성은의 미소는 이 물음의 답을 더욱 분명케 했다.“그래... 다 줄게. 내 아들을 풀어준다면 전연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어.”인정아가 위층 금고에서 오랫동안 보관돼 있던 땅문서를 꺼내어 기성은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전연우에게 내 아들을 돌려내라고 전해. 바라는 게 있다면 다 줄 테니까.”기성은은 물건을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안심하십시오. 3일 안에 반드시 사람을 돌려보낼 것입니다.”“3일? 아니... 지금 당장 내 아들을 데려와.”“기성은!”인정아가 기성은을 뒤쫓아 나갔기만 발에 신은 하이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사모님, 큰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빨리 약을 드셔야죠. 인하 그룹은 사모님이 없으면 안 돼요. 사모님께서 몸을 잘 챙기셔야 해요.”그녀의 한마디가 무너져버린 인정아를 살린 듯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그래, 난 아직 쓰러질 수 없어. 나에겐 회사도 있고, 이 집도 있어!”인정아는 그제야 전연우는 단 한 번도 인가네와 협력할 생각이 없었고 혼자서 모든 것을 독차지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전에 그와 싸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강가의 본가가 없어지고 아들도 그의 손에 있으니 인정아는 감히 멋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그 이익들을
기성은이 찾아올 때마다 줄곧 좋은 일은 없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뒤에서 또 무슨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약을 바르고 전연우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며 담담히 답했다.“금방 올게.”다 쓴 면봉을 휴지통에 버리고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 침대맡에 두었다가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뒤에야 그는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기성은이 손에 든 물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돌아올 때 송시아 조수님께서 인가네에 도착해 대표님의 뜻을 받들어 직접 강가의 본가 땅문서를 대표님께 넘겨주겠다 하셨습니다.”전연우는 물건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잘했어. 일 처리가 끝나면 3주 동안 장기 휴가를 줄 테니 이제 마지막 일을 도와줘.”“얼마든지 분부 해주십시오.”그러자 전연우의 눈빛에 순간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이틀 안에 가서 강가의 본가를 전부 치워버려. 이틀 후에 내가 직접 강씨 가문을 인수할 거야.”“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는 곧바로 물건을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고 장소월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잠든 것이 아닌 단순히 그를 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전연우 역시 잘 알고 있다.장소월이 화를 내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여자란 조금 달래주기만 하면 풀리기 마련이다.전연우보다 장소월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언제 그랬냐는 듯 장소월을 바라보고 있는 전연우의 눈빛 속에는 분노가 가시고 부드러움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거친 손으로 장소월의 부드러운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아직도 오빠한테 화났어? 소월아... 내가 이렇게 한 건 다 내 의도가 있어. 정보연은 인가네에서 주선해 준 사람이고 성세 그룹의 주식이 정보연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어. 게다가 내 주위 회사 위아래에 모두 정보연이 심어둔 스파이가 있어. 소월아, 너도 오빠 잘 알잖아... 오빠 공간에서는 모래 한 톨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걸...”정보연이 인정아의 사람이라고?장소월은 확실히 이 일에
“좋아. 약을 먹을 테니 지금 빨리 영수를 놓아줘.”장소월이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전연우는 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주고 직접 그녀에게 먹여주기 위해 준비한 약을 집어 들었다.“나... 나 혼자 할게.”약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오빠가... 먹여줄게.”전연우의 눈빛에서 번뜩이는 위협에 장소월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입을 약간 벌려 그의 손끝에 있는 하얀 알약을 삼켰다.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손끝을 머금자 남자의 눈에 욕망이 이글이글 떠올랐다. 그는 애써 욕구를 누르고 장소월이 물컵을 들고 약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장소월이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전연우에게 강제로 물컵을 빼앗기고 말았다. 전연우는 결국 포악하고 강제적인 기운에 눌려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장소월은 강영수의 처지를 생각하며 몸부림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감내했다.전연우는 애써 그녀의 상처에 닿지 않도록 그녀를 안고 몸을 뒤집고는 곧바로 지체없이 관계를 맺었다.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그의 맹렬한 공격을 한 번, 또 한 번 견뎌냈다.엎드려 있는 게 불편할까 봐 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다시 안아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온갖 다양한 자세가 오가고 장소월은 고통에 못 이겨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리고 매번 이럴 때마다 관계의 뒤처리는 전연우의 몫이었다...그는 말없이 쓰러져버린 장소월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다...장해진이 3일 후에 서울시에 돌아온다고는 하였지만 그곳에 큰비가 내려 비행기가 며칠 연착되는 바람에 장소월은 인가네로 보내지는 것을 직접 바라보게 되었다.병원에 3일 동안 누워있다가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별장으로 데려갔는데 원래는 로즈 가든에 데려갈 계획이었다.하지만 집에서 그녀를 잘 돌봐줄 사람이 없고 전연우는 최근에 너무 바빠서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수도 있으니 그녀를 남원별장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인
“응, 결정했어.”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건한 눈빛으로 배은란을 바라봤다.배은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그때도 네 옆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서철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오직 서철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그가 진짜 좋아하는 분야는 컴퓨터공학이었다.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하지만 배은란 앞에서는 그 어떤 꿈도 뒷전이었다.배은란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하고 큰 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뭐?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한의준은 서철용의 결정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들짝 놀랐다.그가 과외해준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의대에 도전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네.”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한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철용 또한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하면 한의준이 많이 놀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지만 시도한다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배은란 곁에 머물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나 다른 전공에 지원해도 되잖아.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서철용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알지만, 한의준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그가 어찌 서철용에 대해 모르겠는가.정확히 말하면 그는 의학 분야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평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매일 의학 관련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의대에 붙을 수 있도록 과외만 잘해주면 돼요.” 서철용은 한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그가 자신을
‘분명 먼저 널 만난 사람은 나였어!’‘배은란!’...“배은란, 어느 대학에 갈 거야?” 서철용은 배은란에게 다가가 능글맞게 물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최근 그의 성적이 급격하게 향상되어 점점 배은란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조금만 더 노력하면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가 왜 이토록 열심히 노력하는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배은란은 콧방귀를 뀌며 오만하게 말했다.서철용은 바로 배은란의 이런 오만한 모습을 좋아했다.“알려주면 안 돼?” 서철용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쓴다면 그는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하여 그는 배은란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지 알려달라고 애원했다.“반장이 가는 곳으로 가려고. 난 반장 따라갈 거야.” 배은란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이 서민용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물론 서철용 또한 마찬가지였다.서철용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서민용을 따라갈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예상했어야 했다. “야, 어느 대학에 갈지 정했어?” 서철용이 서민용에게 다가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배은란 때문이 아니었다면 서민용에게 이런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의대에 가려고.” 서민용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무관심했다. 바로 그 모습 때문에 배은란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서민용의 대답을 들은 서철용은 그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서민용이 하필이면 의대를 선택할 줄이야.그는 의대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서민용은 배은란과 함께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서철용은 돌연 허탈함과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서민용과 자신은 비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비교할 생각
회사는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흔쾌히 휴가를 승인해 주었다.배은란은 1층 욕실에서 씻은 뒤 다시 서민용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현재 서민용과 한 침대에서 자지 않고 있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실수로 누를 수 있기에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권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 말을 기억하고 줄곧 한 방에 있었지만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았다.달빛이 서민용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배은란은 달빛을 빌려서야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배은란은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용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다음 날 아침, 배은란이 일어났을 때 서민용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바깥 새소리 때문에 깼어? 어제 자기 전에 커튼 치는 거 깜빡했네. 다음부터는 잊지 않을게. 안 졸려? 조금 더 잘래?”서민용은 눈을 깜빡이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배은란은 얼른 일어나 그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잠시 뒤면 두 아이가 서민용을 보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배은란이 오늘 휴가를 냈기에 아침 식사는 서민용의 방에서 네 가족이 함께 먹었다. 서민용은 배은란이 계속 집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눈을 반복해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배은란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덮으며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어 그녀는 입술을 서민용의 눈에 가져갔다. 그는 배은란의 입맞춤을 느끼고 눈까풀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서민용의 꿈속에서 그는 한 손에 아이 하나씩 안고 있었고, 석양의 노을이 그와 배은란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두 아이를 안고 놀이공원에 갈 수 없기에 진짜일 리가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은란은 뜻밖에도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들어와서 좀 앉았다가 가.”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서철용은 몸을 돌렸다.“얼굴이 좀 탔네.”“응. 지나가다가 두 사람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
그는 말없이 조용히 혼자 떠났고, 배은란은 알지 못했다.배은란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그의 방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우미에게 물어보니 그가 짐을 챙겨 떠났다고 한다.배은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텅 빈 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사모님, 서 선생님 다시 돌아오실까요? 이 방은 그대로 남겨둬야 할까요?”“모르겠어요. 그냥 둬요. 비워두세요.”배은란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아이들보다는 병원에 있는 서민용이었다.그녀는 줄곧 병원에서 예전처럼 그를 간호했다.눈앞의 서민용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녀는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킬 것이다. 배은란은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서민용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는 배은란의 손길을 느끼고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배은란은 단번에 알아챘다.그녀는 힘껏 서민용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방금 손가락 움직인 거야? 나 느꼈어. 지금 당신 손바닥에 내 손 넣었는데 느껴져?”서민용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몇 초 후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지금은 깍지를 꼈는데, 느껴져?”서민용의 감각이 전보다 확연히 빨라졌다. 이번엔 배은란이 말을 마치자마자 거의 바로 눈을 찡긋거렸다.배은란은 그의 손을 마사지하고 다시 그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서민용은 지금 눈과 손만 약간씩 움직일 수 상태였다. 입으로는 밥을 먹고 씹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그녀와 소통했다. 다행히 머리는 깨어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아니었다면 배은란은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을 것이다.서민용은 다리에선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배은란의 손에 잡혀 있는 앙상한 다리는 그녀의 다리보다도 훨씬 더 가늘어 보였다. 그녀는 순간 슬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민용이 보지 못하기에 눈물을 글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서민용의 다리에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그의 다리에 감각이 없다는
이후 서민용도 보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불러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그녀를 기다려주지도 않았다.배은란은 서민용이 떠나가는 방향과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한참을 갈등하다가 결국엔 서민용을 쫓아갔다.드디어 서민용이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배은란은 또다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던 그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눈빛과 똑같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화려하게 피어있는 수많은 꽃들 속,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고 있었다.깨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지 못했다. 서철용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서민용과의 만남은 허황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두 아이 잘 돌봐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떠날 생각인 거야? 아이들 버리려고?”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아이들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버려두고 떠나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불길한 생각이 서철용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서민용의 묘비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과 함께 말이다.서철용이 분노가 차올라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설마 서민용한테 가려는 거야? 말해봐, 정말 그럴 생각이야?”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언의 긍정이나 다름없었다.“서민용을 위해 아이들을 버리고, 심지어 네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거야? 이 세상에 널 붙잡아둘 수 있는 사람이 서민용밖에 없어? 서민용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도 않은 거야?”“말해봐! 정말이냐고 묻고 있잖아!”“맞아! 난 네가 나한테 했던 일들을 탓하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난 그저 민용 씨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그 사람이 어디로 가든 따라가고 싶다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이야!”“네 말이 맞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하겠어. 너한테 난 벌레보다 못한 존재잖아.”“나 너무 힘들어. 제발 나 좀 놔줘. 나 민용 씨가 정말 보
서철용은 잠에서 깨어나 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그는 급히 위층에 있는 배은란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그녀는 그 안에 없었다.그는 덜컥 겁이 났다. 순간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다행히 이후 냉정을 되찾고 차를 몰고 서씨 집안 묘지로 향했다.배은란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울었던지라 눈이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 올라 그녀의 몸에 햇살을 비추었지만, 그녀는 조금의 따뜻함도 느끼지 못했다.서철용이 도착했을 때, 배은란은 서민용의 묘비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장에도 배은란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버린 듯 주변 감각에 둔감해져 있었다.서철용은 배은란의 상태가 걱정되어 미쳐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집에서 나온 거야? 언제 나온 거야?”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서민용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사진 속 그의 어깨에 닿은 순간, 더는 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형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거야?”귓가에 들려오는 거라곤 지저귀는 새소리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철용의 목소리만이 묘지에 울려 퍼졌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은란의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 주었다. 해는 이미 머리 위까지 떠올랐고, 그렇게 두 사람은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어느새 배은란의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그 모습을 본 서철용이 끝내 입을 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자. 계속 이렇게 서 있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어.”하지만 배은란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어쩔 수 없이 도우미를 시켜 두 아이를 묘지로 데려오게 했다. 아이들이 있으면 그녀가 마음을 바꿔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두 아이도 배은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에 잠시 동요와 갈등이 떠올랐지만
배은란은 매번 출근할 때마다 서민용과의 만남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는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지 못했다.서민용을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였다. 배은란은 뒷모습만 보고 단번에 알아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하지만 이내 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그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그녀도 급히 따라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그의 뒷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배은란이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서민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저를 따라오는 이유가 뭐죠?”그 순간 배은란은 온몸이 경직되어 굳어버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한번 그의 부드럽고 맑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네? 왜 말이 없어요?”서민용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배은란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바라보는 서민용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서민용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거 떨어뜨리지 않으셨어요?”서민용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요.”배은란이 반응하기도 전에 서민용의 모습은 또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배은란은 자신의 손에 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민용이 왜 웃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의 거짓말이 그에게 들통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얼마 후, 그녀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었다. 하지만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바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때 마침 서민용도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서민용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그녀가 혼자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민용은 그녀를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갔다. 배은란은 어색한 마음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배은란은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의 배려 덕분에 낯선 사람들과 함께 밥을
배은란은 서철용의 맞은편에 비스듬히 앉았다. 옆자리도 아니고 정면도 아닌 자리였다. 그녀의 그런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기에 서철용은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그는 도우미를 불러 배은란이 위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일렀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철용은 곧 여기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은란의 몸이 회복되기만 하면 다시는 그녀의 삶을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서민용의 일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배은란의 몸이 견뎌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두 사람의 저녁 식사 역시 침묵 속에서 이어졌다. 배은란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더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표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방 아주머니를 불러 닭죽을 데워 그녀가 배고플 때 가져다주라고 말했다.배은란이 자리를 뜨자 서철용도 입맛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답답한 기분을 달래고자 바람을 쐬러 마당에 나갔다.그녀와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데, 그녀가 곁에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서철용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배은란은 마당에 멍하니 서 있는 외로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 그가 힘들어한다는 걸 알지만,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그녀는 줄곧 형제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뒷모습이 그랬다. 하여 뒷모습만 보고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일로 서민용에게 불평까지 한 적이 있다.그 말에 서민용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서민용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흐려졌다.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려보니, 그중 딸 아이는 서민용과 판에 박은 듯 똑 닮아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다. 혹시라도 감정이 북받쳐 아이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배은란은 더는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기에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돌연 모든 것이 떠올랐다.그때 서철용은 마당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창가로 걸어가 세 사람이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본 순간 너무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머릿속에 그동안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여기며 지내왔던 날들이 떠올랐다. 배은란은 자신을 속이고 곁에 가두어둔 그를 원망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묵묵히 대체자를 자처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그녀는 서철용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 몰라 방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얼마 후, 서철용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위층으로 그녀를 찾아 올라갔다.“일어났으면서 왜 안 내려왔어? 여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거야?”“미안해.”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서철용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 사과하는 거야?”“미안해.”“오늘은 날 서민용으로 착각하지 않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 기억해냈구나.”“다행이야.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야.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에야 기억을 되찾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서철용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배은란의 눈에 더 이상 자신이 없다는 것을 본 순간 그녀를 포기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그는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서민용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가족들에게 소개해주었던 날 밤이 아니다. 사실 그날 밤은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만난 날이었다.하지만 배은란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서민용만이 존재했기에, 그 기억은 오로지 서철용만의 것이었다.그가 첫눈에 반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알고 보니 형의 여자친구였다. 배은란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그녀와 서민용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었다.그 순간, 서민용에 대한 그의 질투심은 최고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