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효가 나타나는 시간은 무척 빨랐다....기성은은 전화를 받고 사진들과 함께 인시윤을 인가네로 돌려보냈다.갖은 고문에 몰골이 엉망이 되어버린 강영수의 사진을 본 인정아는 미칠 지경이었다.“감히 내 아들에게 손을 대?”“전연우 이 짐승 같은 놈!”가뜩이나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인정아는 광기 어린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하지만 기성은은 이제 익숙하다는 듯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대표님께서 뭘 원하는지 사모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인정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다 강가의 본가 때문에 이러는 거야?”기성은의 미소는 이 물음의 답을 더욱 분명케 했다.“그래... 다 줄게. 내 아들을 풀어준다면 전연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어.”인정아가 위층 금고에서 오랫동안 보관돼 있던 땅문서를 꺼내어 기성은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전연우에게 내 아들을 돌려내라고 전해. 바라는 게 있다면 다 줄 테니까.”기성은은 물건을 건네받으며 입을 열었다.“안심하십시오. 3일 안에 반드시 사람을 돌려보낼 것입니다.”“3일? 아니... 지금 당장 내 아들을 데려와.”“기성은!”인정아가 기성은을 뒤쫓아 나갔기만 발에 신은 하이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옆에 있던 가사도우미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다.“사모님, 큰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그러니 빨리 약을 드셔야죠. 인하 그룹은 사모님이 없으면 안 돼요. 사모님께서 몸을 잘 챙기셔야 해요.”그녀의 한마디가 무너져버린 인정아를 살린 듯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그래, 난 아직 쓰러질 수 없어. 나에겐 회사도 있고, 이 집도 있어!”인정아는 그제야 전연우는 단 한 번도 인가네와 협력할 생각이 없었고 혼자서 모든 것을 독차지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예전에 그와 싸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강가의 본가가 없어지고 아들도 그의 손에 있으니 인정아는 감히 멋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그 이익들을
기성은이 찾아올 때마다 줄곧 좋은 일은 없었다.장소월은 전연우가 뒤에서 또 무슨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약을 바르고 전연우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주며 담담히 답했다.“금방 올게.”다 쓴 면봉을 휴지통에 버리고 따뜻한 물 한 컵을 따라 침대맡에 두었다가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뒤에야 그는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 기성은이 손에 든 물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돌아올 때 송시아 조수님께서 인가네에 도착해 대표님의 뜻을 받들어 직접 강가의 본가 땅문서를 대표님께 넘겨주겠다 하셨습니다.”전연우는 물건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잘했어. 일 처리가 끝나면 3주 동안 장기 휴가를 줄 테니 이제 마지막 일을 도와줘.”“얼마든지 분부 해주십시오.”그러자 전연우의 눈빛에 순간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이틀 안에 가서 강가의 본가를 전부 치워버려. 이틀 후에 내가 직접 강씨 가문을 인수할 거야.”“알겠습니다, 대표님.”전연우는 곧바로 물건을 들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고 장소월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 잠든 것이 아닌 단순히 그를 피하려고 한다는 것은 전연우 역시 잘 알고 있다.장소월이 화를 내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여자란 조금 달래주기만 하면 풀리기 마련이다.전연우보다 장소월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언제 그랬냐는 듯 장소월을 바라보고 있는 전연우의 눈빛 속에는 분노가 가시고 부드러움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거친 손으로 장소월의 부드러운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아직도 오빠한테 화났어? 소월아... 내가 이렇게 한 건 다 내 의도가 있어. 정보연은 인가네에서 주선해 준 사람이고 성세 그룹의 주식이 정보연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어. 게다가 내 주위 회사 위아래에 모두 정보연이 심어둔 스파이가 있어. 소월아, 너도 오빠 잘 알잖아... 오빠 공간에서는 모래 한 톨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걸...”정보연이 인정아의 사람이라고?장소월은 확실히 이 일에
“좋아. 약을 먹을 테니 지금 빨리 영수를 놓아줘.”장소월이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자 전연우는 급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주고 직접 그녀에게 먹여주기 위해 준비한 약을 집어 들었다.“나... 나 혼자 할게.”약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전연우는 그녀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오빠가... 먹여줄게.”전연우의 눈빛에서 번뜩이는 위협에 장소월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의 말대로 순순히 입을 약간 벌려 그의 손끝에 있는 하얀 알약을 삼켰다.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손끝을 머금자 남자의 눈에 욕망이 이글이글 떠올랐다. 그는 애써 욕구를 누르고 장소월이 물컵을 들고 약을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장소월이 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전연우에게 강제로 물컵을 빼앗기고 말았다. 전연우는 결국 포악하고 강제적인 기운에 눌려 걷잡을 수 없이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장소월은 강영수의 처지를 생각하며 몸부림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감내했다.전연우는 애써 그녀의 상처에 닿지 않도록 그녀를 안고 몸을 뒤집고는 곧바로 지체없이 관계를 맺었다.장소월은 이를 악물고 그의 맹렬한 공격을 한 번, 또 한 번 견뎌냈다.엎드려 있는 게 불편할까 봐 전연우는 그녀의 허리를 다시 안아 일어나 앉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온갖 다양한 자세가 오가고 장소월은 고통에 못 이겨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리고 매번 이럴 때마다 관계의 뒤처리는 전연우의 몫이었다...그는 말없이 쓰러져버린 장소월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었다...장해진이 3일 후에 서울시에 돌아온다고는 하였지만 그곳에 큰비가 내려 비행기가 며칠 연착되는 바람에 장소월은 인가네로 보내지는 것을 직접 바라보게 되었다.병원에 3일 동안 누워있다가 전연우는 그녀를 남원별장으로 데려갔는데 원래는 로즈 가든에 데려갈 계획이었다.하지만 집에서 그녀를 잘 돌봐줄 사람이 없고 전연우는 최근에 너무 바빠서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수도 있으니 그녀를 남원별장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인
"어머. 아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집에 들어가면 맛있는 식사 차려드릴게요.""백윤서 씨는 모르지만, 오 아주머니 소식은 알아요. 눈 뜨고 보기도 힘들었어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데다 수술까지 받았어요. 지금은 또 요독증을 앓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주변에 돌봐줄 사람도 없어 홀로 견디고 있어요. 전에 제가 한번 가봤을 때,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돈이 있어도 병원에 가지 않고 모두 기부했대요.""지금은 그냥 집에서 죽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어요."장소월 입가의 미소가 서서히 식어갔다. 오 아주머니가 전연우와 손을 잡고, 그녀에게 십여 년 동안 약을 먹인 탓에 그녀는 평생 엄마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장소월은 죽을 때까지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그때 핑크색 벤틀리가 마당에 들어왔다. 전연우가 값비싼 정장을 입고, 탄탄한 몸매를 드러내며 차에서 내려왔다.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자를 보며, 전연우가 한 손엔 열쇠를 쥐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얘기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그의 목소리를 듣자, 장소월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곰팡이 냄새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이를 먼저 방으로 데려가세요." 품에서 잠들어 있는 별이가 깰까 봐 장소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경애는 조심스레 아이를 받아 안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나무로 만든 의자는 두 사람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로 쾌적했다. 전연우가 그녀 옆에 다가가 그녀의 부드럽고 매끈한 손가락 끝을 잡고 입맞춤을 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자 매혹적인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점심에 뭐 먹었어?"장소월은 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뭘 했는지 다 알잖아. 뭣 하러 물어보는 거야.""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말할 필요 없어. 난 이만 들어가 쉴게." 장소월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놔주지 않고 말했다."
장소월은 피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인내하며 강제로 받아들였다. 그래야만 주변 사람들에게 가는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말을 듣고 전연우가 화낼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들뜬 듯한 표정으로 장소월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말해봐, 나와 어떤 관계를 원해?"장소월은 긴 속눈썹을 내리뜨리며 말했다. "난... 우리가 남매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전연우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남매가 한 침대에서 뒹굴어? 응?" 그의 눈에는 차가움 뿐만 아니라 숨겨진 짙은 어둠도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감옥에 갇혀버린 야수가 포효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괜찮아." 전연우가 그녀의 목에 드러난 멍과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조금씩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우리 아이가 자라나는 걸 함께 지켜보게 되겠지."아이? 그들 사이엔 아이가 없다. 그 아이는 두 사람의 친자식이 아니다."전연우, 그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야. 아이를 원한다면... 시윤이랑 낳아. 시윤이가 낳은 아이야말로... 진정한 네 아이야."장소월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게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전연우는 그녀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네가 화낼 거라는 거 알지만, 이건 명백한 사실이야.""네가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네." 전연우가 그녀의 볼을 꼬집고는 거세게 키스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불만을 발산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차라리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의 손이 상처에 닿자 장소월이 살짝 신음소리를 냈다. 그에 따라 전연우의 손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하늘에서 내려온 찬란한 금색 빛줄기가 두 사람을 비추었다. 건장한 남자와 그 품에 안겨있는 가녀린 여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답
경호원이 다가와 말했다. "일꾼들이 전화로 한 시간 반 뒤면 도착한다고 합니다."전연우는 말했다. "급할 것 없어."그때 마숙자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려 겨우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은 당신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악마예요. 반드시 이 업보를 돌려받게 될 거예요..."전연우가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아주머니 덕분이에요. 집문서를 직접 인경아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땅문서에 관해선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일이 잘된 데엔 당신 공도 무시할 수 없어요."전연우의 말은 고의적으로 그녀를 자극하는 듯했다.강씨 노부인의 사망 원인은 오로지 화병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줄기의 위태로운 생명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살아나갔던 건 이 강씨 저택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문서를 훔쳐 인정아에게 넘겨주었고, 그로 인해 모든 희망을 잃은 강씨 어르신은 절망감에 휩싸인 채 숨을 거두었다.마숙자는 수십 년 동안 노부인의 곁에서 일해왔다. 늘 가족처럼 자신을 아껴줬던 노부인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후회, 죄책감, 괴로움, 수치심... 등 갖가지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악마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내가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너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마숙자의 눈동자에서 돌연 살기가 기승을 부렸다. 이어 그녀는 뒤에서 식칼을 꺼내 들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 악마 놈아, 죽어!"하지만 마숙자가 성공할 리는 만무했다. 잘 훈련된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제압한 것이다.전연우는 발아래 엎드려 있는 여자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보라색 번개가 번쩍이며 하늘을 갈랐다. 그 빛에 그의 눈동자가 더더욱 날카롭고 오싹하게 번뜩였다."이년도 시체와 함
아마 아버지도 누군가가 그의 방에 들어올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소월이 버튼을 눌러보려 했을 때, 갑자기 문 아래 틈새로 어두운 색의 가죽 구두가 보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즉시 손을 떼고 아버지의 의자에 앉았다. 너무 다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전에 다쳤던 곳을 또 접질리고 말았다. 그때 전연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를 맞았는지 옷에선 아직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며 말했다. "별이 때문에 깼어?" 장소월이 머리를 숙여보니 아이는 이제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다만 아이의 작은 얼굴은 열기에 붉어져 있었고 이따금 기침을 하기도 했다."아기는 나한테 줘. 손 채 낫지 않았잖아." 장소월은 그에게 아이를 넘겨주지 않았다. "몸에서 왜 휘발유 냄새가 나?" 전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서 수리했어. 난 일단 샤워할게." "알았어." 그가 돌아서자 장소월의 눈썹이 한 번 움찔했다. 그녀의 직감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확실히 올라가는 걸 확인한 뒤, 장소월은 아이를 소파에 눕혀 놓고는 책상 아래의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불상을 올려놓았던 선반이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졌다. 장소월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철용의 말이 사실일 줄이야. 아버지의 서재 안에는 실제로 밀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장소월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센서 등이 켜지며 그녀의 길을 밝혀주었다. 밀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벽면에 엄마의 사진들이 가득가득 빼곡히 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방은 여자의 침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침대부터 화장대, 그리고 옷장까지... 방 한가운데에는 한 폭의 그림이 놓여 있었는데, 그림 속 여자는 화려한 꽃들이 수 놓인 한복을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더없
마음속에서 이 남자와 어머니는 분명 예사롭지 않은 관계일 거란 확신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소월은 그중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서철용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장소월은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즉시 밀실에서 나가 문을 닫고는 사진을 책갈피 안에 감추었다. 내일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다.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전연우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텅텅 비어있는 그녀의 두 손을 보고는 물었다. "아이는?"장소월은 그제야 별이가 떠올랐다. "아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는 없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 분명 소파 위에 눕혀 놓았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바로 그때, 주먹만 한 조그만 머리가 책상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침을 잔뜩 흘린 채 배시시 웃으며, 바닥에 엎드려 부드러운 카펫에서 구르고 있었다.장소월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방금 목욕시켰더니 그새 또 못 참고 더럽혀?" 그녀의 말투에는 못마땅함과 허탈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장소월은 왼손으로 아이를 안았다. 오른손은 아직 채 낫지 않긴 했지만 이전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 전연우는 그녀에게 극진히 약을 발라주었고, 계란으로 상처를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용한 달걀은 낭비하지 않고 요리해 먹었다.그는 달걀 흰자를 좋아하지 않아 그 부분은 장소월에게 먹였다.장소월과 전연우는 성격 면에서나 식습관 면에서나 완전히 달랐다. 전연우는 감정 파동이 심한 반면, 장소월은 늘 평온했다. 또한 전연우는 매운 걸 즐겨 먹지만, 장소월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에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얼굴에 가득 묻은 침 자국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손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 안 고파? 국수 한 그릇 끓여줄까?"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괜찮아. 시간이 늦었어. 잘 거야."
“무슨 일 있으세요, 손님? 저 종업원 불러서 손님에게 서빙하게 할까요?” 웨이터가 서철용에게 물었다. 그는 서철용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철용은 급히 손을 저었다. 그가 어떻게 배은란에게 서빙하라고 시키겠는가. 오히려 그가 배은란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분노가 일었다. 서민용은 왜 배은란을 이런 곳에서 일하게 내버려 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건 서민용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서철용의 감정은 복잡해졌고, 점차 모순으로 가득 찼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배은란을 만나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술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배은란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바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배은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철용은 만감이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데려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에게는 배은란의 삶에 간섭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주호걸은 서철용의 이상을 눈치채고 물었다. “철용아, 왜 그래?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 서철용은 한숨을 내쉬고 배은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봐. 배은란 맞지?” 서철용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주호걸은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배은란이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야?” “서민용 이 천벌 받을 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 서철용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서민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배은란과 사귀었다면, 적어도 그녀를 이런 곳에서 일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철용아, 일단 진정해.” 주호걸은 서철용이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봐 그의 팔을 붙잡았
대학 생활이 시작된 지 대략 2주가 지나도록 서철용은 배은란을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녀와 서민용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밤 나가서 술이나 한잔할까?”핸드폰 너머로 주호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같은 도시에 있었다.술을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의 공통된 취미였다. 바로 이 취미 덕분에 두 사람은 우정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그래, 좋지.” 서철용은 웃으며 대답했다.그 역시 마침 술이 당기던 참이었다. 다만 주호걸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을 뿐이다.“학교 근처에 새로 생긴 바가 있는데, 예쁜 여자들이 많다고 하더라고. 한번 가볼래?” 주호걸이 제안했다.그는 서철용에게 여자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그가 계속 배은란만 마음에 품고 있는 건 원치 않았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배은란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 학교에는 예쁜 여학생들이 많다. 배은란이 예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서철용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주호걸은 서철용이 하루빨리 배은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과 알콩달콩 사귀기를 바랐다.“주호걸, 너도 내 성격 알잖아.” 서철용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주호걸이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배은란 말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철용아, 네가 배은란 잊기 어려워한다는 거 알지만, 계속 과거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어. 밖으로 나와서 주변 세상을 둘러봐.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어.” 주호걸은 차분히 서철용을 설득했다.서철용은 잠시 말없이 사색에 빠졌다. 확실히 주호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하염없이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사는 건 옳지 않다. 하루빨리 마음이 문을 열고 나와 새로운 삶을 마주해야 한다.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망설임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좋아, 주호걸. 오늘 밤 그 새로 생긴 바에 한번 가보자.”서철용은 마침내 결심했다.이건 새로운 길로
그는 배은란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니 말이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철용은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걸에게 전화를 걸었다.“뭐야?” “너 돼지냐? 이제야 일어났어?”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욕설이 들려왔다.“농구장에서 기다려. 나와서 농구나 하자.”어제의 서철용은 그야말로 활기 하나 없이 축 처져 있었다.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주호걸은 농구를 하자며 서철용을 불러냈다.“좋아, 지금 바로 갈게.” 서철용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운동복을 입고 농구장으로 향했다.따스한 햇볕이 농구 코트에 쏟아지고 있으니, 서철용의 기분도 더불어 밝아졌다.주호걸은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철용아, 왔어?” 주호걸은 서철용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응, 주호걸, 어제 해준 말 고마웠어.” 서철용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어.” 주호걸은 웃으며 서철용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농구를 시작했고, 서철용의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그 역시 자신에겐 기나긴 미래가 펼쳐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그는 열심히 노력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생각이었다.농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식탁에서,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했다.“주호걸, 나 의대에 가기로 결심했어.” 서철용이 진지하게 말했다.“응, 나는 너 응원해.” 주호걸은 서철용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서철용이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열심히 노력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비록 의학 공부가 서철용의 처음 꿈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배은란 때문에 한 번 진로를 바꾸었다. 또다시 바꾸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개학 첫날이 되었다.주호걸은 의대에 지원하지 않았기에 서철용 혼자 대학교에
번외편 5: 최초의 꿈“미치지 않았어.” 서철용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나는 의대에 가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에게 술을 따랐다.그는 자신의 결정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결정을 끝냈다.그는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는 생각이었다.“철용아, 너...” 주호걸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서철용을 쳐다보았다.그는 서철용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결심한 일은 종래로 번복하지 않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친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난 네가 네 최초의 꿈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최초의 꿈이라...서철용은 생각에 잠겼다.그는 당연히 자신의 최초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했다.의대를 지망했던 건 오로지 배은란 때문이다.“주호걸,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서철용이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난 정말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아.”그 순간 서철용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미친 결정이긴 하지만, 이미 준비를 마쳤다.그는 자신의 꿈을 좇으며 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자꾸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주호걸이 말했다.“이왕 이 길을 선택하고 노력을 기울여 성과까지 따낸 이상, 계속 걸어가야 해. 사소한 일 때문에 포기하는 건 내가 아는 서철용답지 않아.”서철용은 주호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는 주호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 주호걸은 항상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주호걸은 그의 결정을 반대하고 있다.“주호걸, 너...” 서철용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철용아, 너 지금 기분 안 좋다는 거 알아. 또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일 맞지.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의미 없어.” “무슨 말이야?” 주호걸이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랑 사귄대.” 서철용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디야?” 주호걸의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찾아 술을 마시자고 할 서철용이 아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KK 술집으로 가자.” 서철용은 자신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슬픔만 안겨준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KK 술집은 서철용과 주호걸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들은 종종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호걸은 술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앉아 있는 서철용을 발견했다. 서철용은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에 약간의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주호걸은 서철용의 옆에 앉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 안 마셨어.” 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의 컵에 술을 따랐다. 주호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철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철용아, 너...” 주호걸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서철용이 말을 끊었다. “주호걸,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봐.” 서철용은 고개를 들어 허탈한 얼굴로 주호걸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배은란은 한 번도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병신 같은 놈. 고백도 못 하고!” 서철용은 괴로움을 못 이겨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주호걸의 눈에 서철용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는 서철용이 배은란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철용아, 네 잘못이 아니야.” 주호걸은 서철용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 말에 서철용의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번외편 4“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서철용은 합격 문자가 와 있는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그들의 교제 소식에 비하면, 그의 것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서철용 혼자에게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 배은란, 서민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두 사람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사랑을 키워갈 테니, 그는 그저 불필요한 존재가 될 뿐이다.그는 잠시 이 대학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들었다.“너 나한테 전화해서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었잖아.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배은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서철용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서철용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배은란 또한 서철용이 왜 이토록 풀이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아, 너희들이 이어졌다는 거 들으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 그에 비하면 내 일은 별거 아닌 것 같아.” 서철용은 무심한 듯 손을 흔들었다.“됐어, 너희들 먼저 가.” 그는 더 이상 두 사람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 시간이 이어지다간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전락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지칠 만큼 지쳐 더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건 무리다.“이상하네.” 배은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녀는 더는 서철용에게 캐묻지 않고 서민용의 팔짱을 끼고 떠났다.서철용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은 분명 그가 의대에 지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 그녀 역시 이미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의대에 합격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배은란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그런 그녀에게 그의 합격 소식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여보세요,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서철
배은란이‘우리’라고 했다.‘내’가 아니라.“맞아, 우리 사귀기로 했어.” 배은란이 서민용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서철용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배은란과 서민용이 사귄다고?배은란이 줄곧 서민용을 좋아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그의 마음은 실망감과 분함으로 가득 찼다. 왜 서민용은 되고, 그는 안 된단 말인가.하지만 그 또한 감정이라는 것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못마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는 배은란과 서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해.”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음은 불편했어도, 진심으로 배은란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배은란과 서민용 모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 배은란이 말했다. “고마워, 철용아. 사실 우리가 이렇게 되게 된 건, 네 덕분이기도 해.”서철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배은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배은란이 말을 이어갔다. “전에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계속 망설였었거든. 네가 날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배은란도 자신에 대한 서철용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아 잠시 외면했을 뿐이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해 주는좋아해주는 사람,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었다.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서철용을 본 그녀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명해졌다.서철용을 선택했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하여 수능이 끝난 후 서민용에게 그녀의 진심을 고백했다.다행히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서민용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내 덕분에?” 서철용은 더욱 의아해졌다.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덕분에. 네가 날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 보니까 나 역시 나
“은란아, 집에 있니?” 그는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 배은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에 있어. 무슨 일이야?” 방금 합격 문자를 받은 배은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에게 좋은 소식 하나 알려주고 싶어서.” 서철용은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곧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동안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다.그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앞으로는 다른 걱정 없이 그녀와 함께 대학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마침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 배은란이 말했다.오늘 그녀 또한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었던 차에 마침 서철용이 전화를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초대한 것이다.“그래, 그래, 좋아.” 배은란의 제안에 서철용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 역시 배은란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할까 봐 망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런데 배은란이 먼저 그와 만나겠다고 하다니.혹시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나중에 위치 보내줄게.” 배은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서철용에게 오후 시간은 굼벵이처럼 너무나도 느리게 흘렀다.그는 특별히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고 헤어스타일도 바꾸며 최고 멋진 모습으로 배은란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했다.저녁, 서철용은 일찌감치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기대와 긴장으로 가득 찬 채 의대 합격 문자가 담긴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그는 끊임없이 시계를 바라보며 배은란이 오기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서철용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예뻤다.하지만 몇 초 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서민용이 왜 배은란과 함께 왔단 말인가?“여긴 왜 왔어?” 서철용은 불편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서민용에게 물
“응, 결정했어.”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건한 눈빛으로 배은란을 바라봤다.배은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그때도 네 옆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서철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오직 서철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그가 진짜 좋아하는 분야는 컴퓨터공학이었다.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하지만 배은란 앞에서는 그 어떤 꿈도 뒷전이었다.배은란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하고 큰 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뭐?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한의준은 서철용의 결정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들짝 놀랐다.그가 과외해준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의대에 도전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네.”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한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철용 또한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하면 한의준이 많이 놀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지만 시도한다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배은란 곁에 머물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나 다른 전공에 지원해도 되잖아.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서철용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알지만, 한의준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그가 어찌 서철용에 대해 모르겠는가.정확히 말하면 그는 의학 분야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평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매일 의학 관련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의대에 붙을 수 있도록 과외만 잘해주면 돼요.” 서철용은 한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그가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