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아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집에 들어가면 맛있는 식사 차려드릴게요.""백윤서 씨는 모르지만, 오 아주머니 소식은 알아요. 눈 뜨고 보기도 힘들었어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데다 수술까지 받았어요. 지금은 또 요독증을 앓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주변에 돌봐줄 사람도 없어 홀로 견디고 있어요. 전에 제가 한번 가봤을 때, 처음엔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돈이 있어도 병원에 가지 않고 모두 기부했대요.""지금은 그냥 집에서 죽을 날짜를 기다리고 있어요."장소월 입가의 미소가 서서히 식어갔다. 오 아주머니가 전연우와 손을 잡고, 그녀에게 십여 년 동안 약을 먹인 탓에 그녀는 평생 엄마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장소월은 죽을 때까지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그때 핑크색 벤틀리가 마당에 들어왔다. 전연우가 값비싼 정장을 입고, 탄탄한 몸매를 드러내며 차에서 내려왔다. 은은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자를 보며, 전연우가 한 손엔 열쇠를 쥐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앞으로 걸어왔다. "무슨 얘기하고 있길래 그렇게 즐거워?"그의 목소리를 듣자, 장소월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곰팡이 냄새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이를 먼저 방으로 데려가세요." 품에서 잠들어 있는 별이가 깰까 봐 장소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경애는 조심스레 아이를 받아 안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나무로 만든 의자는 두 사람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로 쾌적했다. 전연우가 그녀 옆에 다가가 그녀의 부드럽고 매끈한 손가락 끝을 잡고 입맞춤을 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자 매혹적인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점심에 뭐 먹었어?"장소월은 그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뭘 했는지 다 알잖아. 뭣 하러 물어보는 거야.""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그래.""말할 필요 없어. 난 이만 들어가 쉴게." 장소월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전연우는 그녀를 놔주지 않고 말했다."
장소월은 피할 수 없었다. 끊임없이 인내하며 강제로 받아들였다. 그래야만 주변 사람들에게 가는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녀의 말을 듣고 전연우가 화낼 줄 알았지만, 의외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들뜬 듯한 표정으로 장소월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손으로 그녀의 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말해봐, 나와 어떤 관계를 원해?"장소월은 긴 속눈썹을 내리뜨리며 말했다. "난... 우리가 남매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전연우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남매가 한 침대에서 뒹굴어? 응?" 그의 눈에는 차가움 뿐만 아니라 숨겨진 짙은 어둠도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감옥에 갇혀버린 야수가 포효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괜찮아." 전연우가 그녀의 목에 드러난 멍과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너도 조금씩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우리 아이가 자라나는 걸 함께 지켜보게 되겠지."아이? 그들 사이엔 아이가 없다. 그 아이는 두 사람의 친자식이 아니다."전연우, 그 아이는 우리 아이가 아니야. 아이를 원한다면... 시윤이랑 낳아. 시윤이가 낳은 아이야말로... 진정한 네 아이야."장소월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게 살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전연우는 그녀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네가 화낼 거라는 거 알지만, 이건 명백한 사실이야.""네가 이렇게 말 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네." 전연우가 그녀의 볼을 꼬집고는 거세게 키스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불만을 발산하고 있었다.전연우는 장소월이 차라리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그의 손이 상처에 닿자 장소월이 살짝 신음소리를 냈다. 그에 따라 전연우의 손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하늘에서 내려온 찬란한 금색 빛줄기가 두 사람을 비추었다. 건장한 남자와 그 품에 안겨있는 가녀린 여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답
경호원이 다가와 말했다. "일꾼들이 전화로 한 시간 반 뒤면 도착한다고 합니다."전연우는 말했다. "급할 것 없어."그때 마숙자가 돌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후들거려 겨우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 "어르신은 당신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악마예요. 반드시 이 업보를 돌려받게 될 거예요..."전연우가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아주머니 덕분이에요. 집문서를 직접 인경아에게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땅문서에 관해선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일이 잘된 데엔 당신 공도 무시할 수 없어요."전연우의 말은 고의적으로 그녀를 자극하는 듯했다.강씨 노부인의 사망 원인은 오로지 화병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줄기의 위태로운 생명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살아나갔던 건 이 강씨 저택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문서를 훔쳐 인정아에게 넘겨주었고, 그로 인해 모든 희망을 잃은 강씨 어르신은 절망감에 휩싸인 채 숨을 거두었다.마숙자는 수십 년 동안 노부인의 곁에서 일해왔다. 늘 가족처럼 자신을 아껴줬던 노부인의 죽음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후회, 죄책감, 괴로움, 수치심... 등 갖가지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악마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부짖으며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내가 지옥에서 살아야 한다면, 너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마숙자의 눈동자에서 돌연 살기가 기승을 부렸다. 이어 그녀는 뒤에서 식칼을 꺼내 들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이 악마 놈아, 죽어!"하지만 마숙자가 성공할 리는 만무했다. 잘 훈련된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그녀를 제압한 것이다.전연우는 발아래 엎드려 있는 여자를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보라색 번개가 번쩍이며 하늘을 갈랐다. 그 빛에 그의 눈동자가 더더욱 날카롭고 오싹하게 번뜩였다."이년도 시체와 함
아마 아버지도 누군가가 그의 방에 들어올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소월이 버튼을 눌러보려 했을 때, 갑자기 문 아래 틈새로 어두운 색의 가죽 구두가 보였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는 즉시 손을 떼고 아버지의 의자에 앉았다. 너무 다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전에 다쳤던 곳을 또 접질리고 말았다. 그때 전연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를 맞았는지 옷에선 아직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며 말했다. "별이 때문에 깼어?" 장소월이 머리를 숙여보니 아이는 이제 울음을 그친 상태였다. 다만 아이의 작은 얼굴은 열기에 붉어져 있었고 이따금 기침을 하기도 했다."아기는 나한테 줘. 손 채 낫지 않았잖아." 장소월은 그에게 아이를 넘겨주지 않았다. "몸에서 왜 휘발유 냄새가 나?" 전연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가 고장 나서 수리했어. 난 일단 샤워할게." "알았어." 그가 돌아서자 장소월의 눈썹이 한 번 움찔했다. 그녀의 직감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확실히 올라가는 걸 확인한 뒤, 장소월은 아이를 소파에 눕혀 놓고는 책상 아래의 스위치 버튼을 눌렀다. 불상을 올려놓았던 선반이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졌다. 장소월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서철용의 말이 사실일 줄이야. 아버지의 서재 안에는 실제로 밀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장소월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센서 등이 켜지며 그녀의 길을 밝혀주었다. 밀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벽면에 엄마의 사진들이 가득가득 빼곡히 붙여져 있었던 것이다... 방은 여자의 침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침대부터 화장대, 그리고 옷장까지... 방 한가운데에는 한 폭의 그림이 놓여 있었는데, 그림 속 여자는 화려한 꽃들이 수 놓인 한복을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더없
마음속에서 이 남자와 어머니는 분명 예사롭지 않은 관계일 거란 확신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소월은 그중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서철용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장소월은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즉시 밀실에서 나가 문을 닫고는 사진을 책갈피 안에 감추었다. 내일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다.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마침 샤워를 마치고 돌아온 전연우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텅텅 비어있는 그녀의 두 손을 보고는 물었다. "아이는?"장소월은 그제야 별이가 떠올랐다. "아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는 없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 분명 소파 위에 눕혀 놓았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바로 그때, 주먹만 한 조그만 머리가 책상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침을 잔뜩 흘린 채 배시시 웃으며, 바닥에 엎드려 부드러운 카펫에서 구르고 있었다.장소월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다가갔다. "방금 목욕시켰더니 그새 또 못 참고 더럽혀?" 그녀의 말투에는 못마땅함과 허탈함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장소월은 왼손으로 아이를 안았다. 오른손은 아직 채 낫지 않긴 했지만 이전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 전연우는 그녀에게 극진히 약을 발라주었고, 계란으로 상처를 문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용한 달걀은 낭비하지 않고 요리해 먹었다.그는 달걀 흰자를 좋아하지 않아 그 부분은 장소월에게 먹였다.장소월과 전연우는 성격 면에서나 식습관 면에서나 완전히 달랐다. 전연우는 감정 파동이 심한 반면, 장소월은 늘 평온했다. 또한 전연우는 매운 걸 즐겨 먹지만, 장소월은 입에도 대지 못한다.전연우는 그녀의 손에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얼굴에 가득 묻은 침 자국을 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손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전연우가 그녀에게 물었다. "배 안 고파? 국수 한 그릇 끓여줄까?"장소월은 고개를 저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괜찮아. 시간이 늦었어. 잘 거야."
집사가 다급한 얼굴로 인정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큰일 났어요. 빨리 일어나세요!"인정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집사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관 속에 들어있는 시체를 본 순간, 인정아의 눈에 불같은 노기가 일렁거렸다. "전연우, 이 지독한 놈!"강씨 노부인은 숨을 거둔지 이미 며칠이나 지난 것 같아 보였다. 냉동관이 더이상 작동하지 않으니, 두 시간 만에 견딜 수 없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노부인의 옆엔 흰색 마의를 입은 마숙자가 누워있었는데, 이마엔 어딘가에 부딪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인정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서 확인해봐요. 살았는지 죽었는지!"집사는 두려웠지만 애써 용기 내어 마숙자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혼비백산하며 말했다"죽... 죽었어요!""사모님, 어떻게 해요. 모두 죽었어요!"인정아의 이마가 깊게 찌푸려졌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관 모서리에 남겨져 있는 핏자국에 닿았다. 관에 머리를 부딪쳐 그 충격으로 사망한 것 같았다.인정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발인을 맡길 사람들을 불러요. 절대 일을 시끄럽게 만들면 안 돼요... 그냥 성세 그룹 대표의 뜻이라고 말하세요.""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전연우, 절대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그의 행각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잔인했다.어느덧 아침이 되어 하늘이 밝았다. 침대에서 장소월이 몸을 뒤척인 순간, 옆에 누워있던 아이가 돌연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렸다.그 시끄러운 소리에 전연우도 잠에서 깨어났다."전연우, 별이 배고픈가 봐. 분유를 가져다줘." 장소월이 눈을 감은 채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딘가 애교가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전연우는 손을 이마에 올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떴다. 옆에 누워있는 여자를 쳐다보니 매끈하고 가련한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장소월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을 챙겨 입고 아이를 안아 방에서 나갔다.
전연우와 장소월은 오후에야 점심을 먹었다. 기성은이 사인받아야 할 서류 한 무더기를 갖고 전연우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재에서 한동안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30분 뒤, 전연우는 운전을 가르쳐주겠다며 장소월을 불러냈다.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는 그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전연우는 예전 별장의 폐기물 창고로 쓰던 공간을 차고로 개조해 놓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고급 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화려한 핑크색 벤틀리 차량이 가장 특별하게 두드러져 보였다."전연우... 오늘은 운전 연습할 시간이 없어. 작업실에 그림 의뢰가 들어와서 내가 가봐야 해. 다음에 하면 안 돼?""그럼 일단 두 시간만 연습하자."전연우는 그녀에게 거부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전연우는 그녀를 운전석에 앉히고 곧바로 출발시켰다. 그녀는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다. "...기초 이론부터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다짜고짜 운전을 어떻게 해."전연우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론은 너한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실전부터 시작해."차 안에서 전연우는 차 내부 모든 장비와 기능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고, 장소월은 한 번 듣고서 바로 기억했다. 그의 설명에 따라 액셀을 밟고, 창고에서 차를 빼내려 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옆에 주차되어 있던 전연우가 자주 몰고 다니는 롤스로이스를 들이받았다.그녀가 너무 세게 액셀을 밟았던 탓에 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미처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못해 장소월의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려던 찰나, 전연우가 손바닥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액셀은 천천히 밟아야지, 너무 급하게 밟으면 안 돼."장소월이 미안함이 가득 어려있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네 차를 망가뜨렸어."그녀는 도저히 차 수리 비용을 부담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딱딱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계속 운전해."장소월은 전생에도 차를 다뤄 본 적이 전혀
장소월은 그의 어두운 안색을 차마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몸을 돌려 황급히 자리를 떴다.그녀를 제외하고 그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전연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집에 들어가 차 키를 현관에 툭 던져 놓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어 차 매장 직원에게 차를 수리하러 오도록 요청했다.은경애는 전연우가 들어오긴 전 이미 장소월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도 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것이다.장소월은 핸드폰을 열어 고객의 요구 사항이 적힌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녀는 곧바로 작업실에 들어가 준비를 시작했다. 결과물을 제출할 때까지 그녀에게 한 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별이는 분유병 꼭지를 입에 물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장소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아이가 울 때면 가끔씩 안아 달래 주었다."아가씨, 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벌써 일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상처가 덧나면 어쩌시려고요.""괜찮아요, 지금 이곳에서 사용하는 것 모두 전연우의 돈으로 산 거잖아요. 저도 공짜로 먹고 마실 순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죠."하지만 그녀가 붓을 든 순간, 코에서 피가 예고 없이 흘러내려 옷을 어지럽혔다."세상에, 어떻게 된 거예요."은경애는 깜짝 놀라며 빠르게 휴지 몇 장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장소월은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하지만, 한 방울의 핏방울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는 건 막지 못했고, 마침 그곳에 들어온 전연우의 눈에 들어왔다.남자가 농후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흘러내린 피를 응시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은경애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코피를 흘렸어요."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은 전연우는 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장소월!"아무리 부르고 불러도 장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
“의사 선생님... 선생님...” 송시아는 가득 흥분한 채 의사를 불렀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의사가 달려와 전연우를 진찰하고 상처를 확인했다. “환자분 상처는 아주 잘 아물고 있습니다. 아까 정말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반응이 있었다면, 신경이 스스로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곧, 혹은 예정보다 더 빨리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송시아는 환희가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좋은 소식이었다. 송시아는 전연우의 침대에 앉아 연고를 꺼내 손가락에 조금 묻히고는 그의 옷을 걷고 이미 아문 상처에 발랐다. “연우 씨, 이 팔찌 장소월이 준 거 맞지? 서철용이 당신에게 한 말 전부 다 들은 거야?” “당신도 지금 당장이라도 깨어나서 장소월을 보고 싶겠지?” “당신들은 날 너무 얕잡아 봤어.” “당신의 흉터... 없어지지 않도록 몸에 남겨둬야겠어. 이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평생 잊지 못하게 말이야.” 송시아가 그에게 쓰는 연고는 최고급이라 시중에서 개당 2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 흉터 제거뿐 아니라 상처 회복도 빠르게 해준다. 그녀는 휴지를 꺼내 연고를 닦아냈다. 그때 송시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답장이 와 있었다. “송 대표님, 그 팔찌는 비슷한 디자인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바닷가 쪽에서 파는 팔찌는 거의 다 흡사한 유형이거든요. 완전히 똑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문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마지막 3초를 남기고 연결되었다. 송시아가 말했다. “전연우는 곧 깨어날 거예요. 이직 준비는 다 됐어요? 이랑 씨 마음만 굳건하다면, 내가 꼭 민아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게 할게요. 마음이 변한다 해도 상관없어요. 신씨 집안은 나에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니까.” 신이랑이 물었다. “성세 그룹 주식은 왜 팔았어요? 뭘 하려는 거죠?” 송시아는 한쪽 팔을 가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전 나중에 갈 거예요. 거긴 아주 안전한 곳이에요.” 도우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사모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군병원 아래에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운전기사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색 장갑을 끼고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배은란은 딸을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랑 같이 가면 안 돼?” “민용 씨, 나 혼자 가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 응?” 서철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이 끝나면 금방 너한테 갈게. 네가 가는 곳은 내 스승님과 사모님의 댁이야. 그분들은 평생을 의학에 헌신하셨고, 자녀가 없어서 날 친아들처럼 여기셨어. 너에게도 잘해주실 테니까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 그분들은 분명 너 좋아하실 거야.” 배은란은 그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거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 “그럼 꼭 빨리 나한테 와야 해.” “그래.” 점차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서철용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배은란, 이건 내가 너한테 진 빚이야.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땐 진짜 서민용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게. 완전한... 서민용을 너에게 돌려줄게!’ 그날 밤, 서민용은 분명히 죽었었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직전, 서철용이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 냈다. 다만, 그의 상황은 아직도 좋지 않다. 여전히 스승님의 병원에 누워 연명 치료만 받고 있을 뿐이다. 전연우 외에, 지금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은 바로 서민용이다...배은란이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서철용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배은란은 정신과 약을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기억도 천천히 회복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반산 별장. 송시아는 바로 그 소식을 들었다. “쯧, 그렇게 많은 공을 들여서 형수를 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