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우와 장소월은 오후에야 점심을 먹었다. 기성은이 사인받아야 할 서류 한 무더기를 갖고 전연우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재에서 한동안 회사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30분 뒤, 전연우는 운전을 가르쳐주겠다며 장소월을 불러냈다.운전 연습을 시켜주겠다는 그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전연우는 예전 별장의 폐기물 창고로 쓰던 공간을 차고로 개조해 놓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고급 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화려한 핑크색 벤틀리 차량이 가장 특별하게 두드러져 보였다."전연우... 오늘은 운전 연습할 시간이 없어. 작업실에 그림 의뢰가 들어와서 내가 가봐야 해. 다음에 하면 안 돼?""그럼 일단 두 시간만 연습하자."전연우는 그녀에게 거부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전연우는 그녀를 운전석에 앉히고 곧바로 출발시켰다. 그녀는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다. "...기초 이론부터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다짜고짜 운전을 어떻게 해."전연우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론은 너한테 어렵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일단 실전부터 시작해."차 안에서 전연우는 차 내부 모든 장비와 기능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고, 장소월은 한 번 듣고서 바로 기억했다. 그의 설명에 따라 액셀을 밟고, 창고에서 차를 빼내려 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옆에 주차되어 있던 전연우가 자주 몰고 다니는 롤스로이스를 들이받았다.그녀가 너무 세게 액셀을 밟았던 탓에 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미처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못해 장소월의 이마가 핸들에 부딪히려던 찰나, 전연우가 손바닥을 그녀의 이마에 가져갔다. "...액셀은 천천히 밟아야지, 너무 급하게 밟으면 안 돼."장소월이 미안함이 가득 어려있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네 차를 망가뜨렸어."그녀는 도저히 차 수리 비용을 부담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딱딱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계속 운전해."장소월은 전생에도 차를 다뤄 본 적이 전혀
장소월은 그의 어두운 안색을 차마 보지 못하고, 도망치듯 몸을 돌려 황급히 자리를 떴다.그녀를 제외하고 그를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전연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집에 들어가 차 키를 현관에 툭 던져 놓고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있는 담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어 차 매장 직원에게 차를 수리하러 오도록 요청했다.은경애는 전연우가 들어오긴 전 이미 장소월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도 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것이다.장소월은 핸드폰을 열어 고객의 요구 사항이 적힌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녀는 곧바로 작업실에 들어가 준비를 시작했다. 결과물을 제출할 때까지 그녀에게 한 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별이는 분유병 꼭지를 입에 물고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장소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소월은 아이가 울 때면 가끔씩 안아 달래 주었다."아가씨, 손이 아직 다 낫지 않았는데 벌써 일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상처가 덧나면 어쩌시려고요.""괜찮아요, 지금 이곳에서 사용하는 것 모두 전연우의 돈으로 산 거잖아요. 저도 공짜로 먹고 마실 순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죠."하지만 그녀가 붓을 든 순간, 코에서 피가 예고 없이 흘러내려 옷을 어지럽혔다."세상에, 어떻게 된 거예요."은경애는 깜짝 놀라며 빠르게 휴지 몇 장을 뽑아 그녀에게 건넸다. 장소월은 다급하게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하지만, 한 방울의 핏방울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는 건 막지 못했고, 마침 그곳에 들어온 전연우의 눈에 들어왔다.남자가 농후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흘러내린 피를 응시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은경애가 당황스러움이 역력한 얼굴로 설명했다. "아가씨께서 갑자기 코피를 흘렸어요."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은 전연우는 성큼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장소월!"아무리 부르고 불러도 장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뒤, 서철용이 마스크를 내리고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소월 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자격 없어요!"장소월은 격렬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이어 극심한 기침이 시작됐다. 그 충격에 입안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그 모습에도 서철용은 전혀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상관없는 사람처럼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만 볼 뿐이었다.얼마 뒤, 서철용은 장소월에게 약을 두 알 먹였다. 그녀가 정상 상태로 회복하자 일반 병실로 옮겼다.전연우가 수술실에서 나온 서철용을 붙잡고 물었다."장소월 대체 어떻게 된 거야!"서철용은 가느스름한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병원 규정에 따르면 환자의 질병에 대해 알 권리는 직계 가족이나 배우자만 가질 수 있어. 넌 그중 환자와 어떤 관계야?"서철용은 느긋하게 말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아, 까먹을 뻔했네. 두 사람은 남매였다는 거."전연우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렇게 쓸데없는 말이 아니야."전연우가 주먹까지 들어 올렸지만, 서철용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전연우, 넌 장소월에게... 점점 더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설마, 정말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서철용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황당하단 말이야! 넌 장해진의 친아들이잖아. 너와 장소월은 이루어질 수 없어."전연우가 장해진의 친자식이라는 건 서철용을 제외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서철용의 눈동자가 코너에 숨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인시윤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자신이 조금 전 들었던 모든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전연우와 장소월이... 정말... 친남매였다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불가능하다!만약... 남매인 사실을 전연우도 알고 있다면, 그들은...미쳤다,
장소월은 가슴이 통증으로 저려왔고 목구멍은 피로 꽉 막힌 듯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며칠 뒤에야 돌아오신다고 했는데?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을까?보아하니 서철용이 그녀의 병을 숨겨준 듯했다. 장소월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수다스러운 은경애의 모습은 장소월로 하여금 오랜만에 소현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최근 영양을 너무 과다섭취해서 코피가 난 거래요. 인삼 삼계탕과 한약을 그렇게 많이 드셨으니... 결론적으로는 괜찮대요." "아가씨, 안심하세요. 퇴원하고 나면 대표님도 더는 아가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 "그래요!" 장소월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장소월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의 2주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서철용은 그녀가 직접 장씨 가문의 몰락을 보게 하기 위해 생명 연장의 의지도 없는 장소월에게 항암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 서철용은 늘 그녀가 약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병실을 나섰다. 하마터면 호시탐탐 그녀의 목숨을 노렸던 사람이라는 걸 잊을 뻔했다. 전연우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그녀와 함께 보냈다. 그동안... 강만옥도 병원에 왔었지만, 전연우의 경호원이 그녀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장소월은 강만옥의 기척을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까지 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론 강만옥은 아들을 낳지 않았던가? 최근 며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렸다. 장소월은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산책하러 병실을 나섰다. 시들고 노랗게 색이 바랜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나뭇잎이 마침 그녀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몇 달만 더 지나면 올해는 끝이 난다.그녀는 과연 내년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을까?이번 생에선 고작 31세까지도 살지 못한다...장소월은 조금의 아쉬움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헤어지기 아쉬운 사람이나
"아저씨는요?" 중년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안 좋아서 조만간 수술을 받아야 해요. 다만 그 수술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좋은 사람에겐 행운이 따르는 법이거든요." 그를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지 모를 한 마디였다. 중년 남자가 신문을 접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장소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자애롭고 친절한 미소가 번졌다. "아가씨에게도 행운이 깃들길 기도할게요." "시간이 늦었어요. 돌아가야겠어요."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는 물었다.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 "이 이유가 너무 황당할 거라는 건 알지만... 아가씨를 보면 자꾸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내가 떠올라요. 전 그 사람이 너무 그립거든요..." "그냥 수술 전에 위로 한 번만 해준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나요?" 그는 말할 때에도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장소월은 고민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는 장소월과 몇 초간 포옹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떠나기 전, 깜빡하고 신문을 벤치에 남겨두었다. 장소월이 신문을 집어 들고 그를 쫓아가려 한 순간, 돌연 그녀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밖에서 바람 쐬니까 재밌어?" 전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검은색 슈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옷 갈아입어. 내가 퇴원 절차 다 밟았어." 전연우는 자신의 정장을 두른 장소월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걸어갔다. 장소월이 뒤돌아보니, 그 중년 남자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장소월의 손엔 그 남자의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차 안에서, 전연우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살펴보고 있었다. 단순히 기혈을 회복시키는 약인 듯 보였지만, 이는 서철용이 특별히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걸 장소월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섭취량도 예전보다 적잖이 증가했다. "네 하루
장해진은 호흡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뇌졸중을 앓고 있다고 한다. 초점 없는 눈을 끔뻑거리며 손으로 괴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말을 할 수도, 남의 도움 없이는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3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는 강만옥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아이는 주눅이 들었는지 몸을 움츠리고 강만옥의 뒤에 앉아 있었다. 4년이 흘렀음에도 강만옥은 전혀 늙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성숙한 여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짙은 파란색에 하얀 꽃잎이 수 놓인 원피스, 옅은 컬러의 립스틱을 바른 입술... 긴 머리는 짧게 잘라 파마를 했고, 귀에는 값비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 말이 많은 은경애도 오늘은 왠지 조용했다. 강만옥은 예전처럼 여주인의 오만한 자태를 뽐내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동안 소월이는 더 예뻐졌구나. 이 아이는 나와 네 아버지의 딸이야, 이름은 장명주고." "명주야, 네 언니야. 얼른 언니라고 부르렴." 장명주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소월을 불렀다. "언... 언니!" 장소월은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다가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예전의 모습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철용이 했던 예언은 모두 현실로 구현되고 있었다. "장해진은 절대 무사히 돌아오진 못할 거예요." 그녀의 방에 들어간 전연우는 머리를 푹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장소월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의부님이 돌아오시는 걸 원했던 거 아니었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그녀는 전연우가 서울에 데려온 그 날 이후부터 늘 이렇듯 허망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눈은 항상 아무런 감정도 없이 텅
계산해보면 아마 아주 오랜만에 열리던 가족 모임일 것이다.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전엔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장소월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머리카락엔 물방울이 묻어있었다.전연우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 또한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그와 인시윤 사이엔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남겨 둔 것일까?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직접 보지 않아도 날카로운 그 눈길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느껴졌다. 장소월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강만옥의 옆에 앉았다."여기로 와." 전연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장해진이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장가의 실질적인 주인은 전연우였기에 다들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장소월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나 예전에도 여기에 앉았었잖아. 넌 새언니와 같이 앉아야지, 내가 중간에 껴있으면 이상해."새언니라는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여기 앉지 않으면 아무도 밥 못 먹어.""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전연우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만약 인시윤이었다면, 결코 전연우를 이토록 화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인시윤은 명실공히 전연우의 아내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치 방해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머리를 들어 강만옥과 함께 앉아있는 장해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그녀와 전연우가 가까워지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가 전연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고백했던 그 날 말이다.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녀를 서재에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엄히 꾸짖었다. 전연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조금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2주가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전연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장소월이 처음으로 강만옥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순간이었다."팡!" 갑자기 부엌에서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도우미가 장소월이 한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떨려 그릇을 바닥에 깨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괴이한 상황이었다. 한 명은 애매모호한 관계의 여동생, 다른 한 명은 현재 명실상부한 와이프이다. 장소월 역시 전연우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된 건가. 장소월은 창백해진 얼굴로 또다시 몇 번 힘없이 기침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전연우는 더는 장소월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도리어 친절히 그녀에게 소고기 죽을 담아 주었다.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틀 동안은 담백한 음식만 먹어.""고마워." 장소월이 밥상 위 마늘종 볶음을 한 입 맛보았다. 하지만 미처 그 위에 뿌려져 있던 고춧가루를 보지 못했던 그녀는 곧바로 격렬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몸에 남아있는 상처에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던 전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는 그가 화를 낼 징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 그녀는 전연우의 눈동자에서 걱정어린 감정을 읽었다. 아니, 착각일 것이다. 전연우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장소월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는 전연우의 모습에 이미 내성이 생겨 겁을 먹지도 않았다. 또한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그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약간의 물을 마신 뒤에야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누구 하나 편히 먹지 못한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인시윤은 빈자리에 자리를 옮겨 앉아 전연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집안 안주인이 갖춰야 할 품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 인시윤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너그럽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식사를 마쳤다. 강만옥이 위층에
그는 배은란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니 말이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철용은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걸에게 전화를 걸었다.“뭐야?” “너 돼지냐? 이제야 일어났어?”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욕설이 들려왔다.“농구장에서 기다려. 나와서 농구나 하자.”어제의 서철용은 그야말로 활기 하나 없이 축 처져 있었다.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주호걸은 농구를 하자며 서철용을 불러냈다.“좋아, 지금 바로 갈게.” 서철용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운동복을 입고 농구장으로 향했다.따스한 햇볕이 농구 코트에 쏟아지고 있으니, 서철용의 기분도 더불어 밝아졌다.주호걸은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철용아, 왔어?” 주호걸은 서철용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응, 주호걸, 어제 해준 말 고마웠어.” 서철용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어.” 주호걸은 웃으며 서철용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농구를 시작했고, 서철용의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그 역시 자신에겐 기나긴 미래가 펼쳐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그는 열심히 노력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생각이었다.농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식탁에서,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했다.“주호걸, 나 의대에 가기로 결심했어.” 서철용이 진지하게 말했다.“응, 나는 너 응원해.” 주호걸은 서철용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서철용이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열심히 노력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비록 의학 공부가 서철용의 처음 꿈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배은란 때문에 한 번 진로를 바꾸었다. 또다시 바꾸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개학 첫날이 되었다.주호걸은 의대에 지원하지 않았기에 서철용 혼자 대학교에
번외편 5: 최초의 꿈“미치지 않았어.” 서철용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나는 의대에 가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에게 술을 따랐다.그는 자신의 결정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결정을 끝냈다.그는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는 생각이었다.“철용아, 너...” 주호걸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서철용을 쳐다보았다.그는 서철용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결심한 일은 종래로 번복하지 않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친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난 네가 네 최초의 꿈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최초의 꿈이라...서철용은 생각에 잠겼다.그는 당연히 자신의 최초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했다.의대를 지망했던 건 오로지 배은란 때문이다.“주호걸,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서철용이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난 정말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아.”그 순간 서철용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미친 결정이긴 하지만, 이미 준비를 마쳤다.그는 자신의 꿈을 좇으며 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자꾸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주호걸이 말했다.“이왕 이 길을 선택하고 노력을 기울여 성과까지 따낸 이상, 계속 걸어가야 해. 사소한 일 때문에 포기하는 건 내가 아는 서철용답지 않아.”서철용은 주호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는 주호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 주호걸은 항상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주호걸은 그의 결정을 반대하고 있다.“주호걸, 너...” 서철용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철용아, 너 지금 기분 안 좋다는 거 알아. 또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일 맞지.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의미 없어.” “무슨 말이야?” 주호걸이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랑 사귄대.” 서철용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디야?” 주호걸의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찾아 술을 마시자고 할 서철용이 아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KK 술집으로 가자.” 서철용은 자신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슬픔만 안겨준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KK 술집은 서철용과 주호걸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들은 종종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호걸은 술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앉아 있는 서철용을 발견했다. 서철용은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에 약간의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주호걸은 서철용의 옆에 앉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 안 마셨어.” 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의 컵에 술을 따랐다. 주호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철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철용아, 너...” 주호걸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서철용이 말을 끊었다. “주호걸,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봐.” 서철용은 고개를 들어 허탈한 얼굴로 주호걸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배은란은 한 번도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병신 같은 놈. 고백도 못 하고!” 서철용은 괴로움을 못 이겨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주호걸의 눈에 서철용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는 서철용이 배은란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철용아, 네 잘못이 아니야.” 주호걸은 서철용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 말에 서철용의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번외편 4“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서철용은 합격 문자가 와 있는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그들의 교제 소식에 비하면, 그의 것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서철용 혼자에게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 배은란, 서민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두 사람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사랑을 키워갈 테니, 그는 그저 불필요한 존재가 될 뿐이다.그는 잠시 이 대학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들었다.“너 나한테 전화해서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었잖아.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배은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서철용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서철용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배은란 또한 서철용이 왜 이토록 풀이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아, 너희들이 이어졌다는 거 들으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 그에 비하면 내 일은 별거 아닌 것 같아.” 서철용은 무심한 듯 손을 흔들었다.“됐어, 너희들 먼저 가.” 그는 더 이상 두 사람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 시간이 이어지다간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전락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지칠 만큼 지쳐 더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건 무리다.“이상하네.” 배은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녀는 더는 서철용에게 캐묻지 않고 서민용의 팔짱을 끼고 떠났다.서철용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은 분명 그가 의대에 지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 그녀 역시 이미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의대에 합격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배은란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그런 그녀에게 그의 합격 소식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여보세요,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서철
배은란이‘우리’라고 했다.‘내’가 아니라.“맞아, 우리 사귀기로 했어.” 배은란이 서민용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서철용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배은란과 서민용이 사귄다고?배은란이 줄곧 서민용을 좋아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그의 마음은 실망감과 분함으로 가득 찼다. 왜 서민용은 되고, 그는 안 된단 말인가.하지만 그 또한 감정이라는 것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못마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는 배은란과 서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해.”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음은 불편했어도, 진심으로 배은란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배은란과 서민용 모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 배은란이 말했다. “고마워, 철용아. 사실 우리가 이렇게 되게 된 건, 네 덕분이기도 해.”서철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배은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배은란이 말을 이어갔다. “전에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계속 망설였었거든. 네가 날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배은란도 자신에 대한 서철용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아 잠시 외면했을 뿐이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해 주는좋아해주는 사람,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었다.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서철용을 본 그녀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명해졌다.서철용을 선택했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하여 수능이 끝난 후 서민용에게 그녀의 진심을 고백했다.다행히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서민용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내 덕분에?” 서철용은 더욱 의아해졌다.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덕분에. 네가 날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 보니까 나 역시 나
“은란아, 집에 있니?” 그는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 배은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에 있어. 무슨 일이야?” 방금 합격 문자를 받은 배은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에게 좋은 소식 하나 알려주고 싶어서.” 서철용은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곧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동안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다.그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앞으로는 다른 걱정 없이 그녀와 함께 대학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마침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 배은란이 말했다.오늘 그녀 또한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었던 차에 마침 서철용이 전화를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초대한 것이다.“그래, 그래, 좋아.” 배은란의 제안에 서철용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 역시 배은란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할까 봐 망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런데 배은란이 먼저 그와 만나겠다고 하다니.혹시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나중에 위치 보내줄게.” 배은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서철용에게 오후 시간은 굼벵이처럼 너무나도 느리게 흘렀다.그는 특별히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고 헤어스타일도 바꾸며 최고 멋진 모습으로 배은란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했다.저녁, 서철용은 일찌감치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기대와 긴장으로 가득 찬 채 의대 합격 문자가 담긴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그는 끊임없이 시계를 바라보며 배은란이 오기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서철용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예뻤다.하지만 몇 초 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서민용이 왜 배은란과 함께 왔단 말인가?“여긴 왜 왔어?” 서철용은 불편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서민용에게 물
“응, 결정했어.”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건한 눈빛으로 배은란을 바라봤다.배은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그때도 네 옆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서철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오직 서철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그가 진짜 좋아하는 분야는 컴퓨터공학이었다.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하지만 배은란 앞에서는 그 어떤 꿈도 뒷전이었다.배은란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하고 큰 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뭐?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한의준은 서철용의 결정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들짝 놀랐다.그가 과외해준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의대에 도전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네.”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한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철용 또한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하면 한의준이 많이 놀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지만 시도한다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배은란 곁에 머물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나 다른 전공에 지원해도 되잖아.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서철용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알지만, 한의준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그가 어찌 서철용에 대해 모르겠는가.정확히 말하면 그는 의학 분야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평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매일 의학 관련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의대에 붙을 수 있도록 과외만 잘해주면 돼요.” 서철용은 한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그가 자신을
‘분명 먼저 널 만난 사람은 나였어!’‘배은란!’...“배은란, 어느 대학에 갈 거야?” 서철용은 배은란에게 다가가 능글맞게 물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최근 그의 성적이 급격하게 향상되어 점점 배은란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는 것을.조금만 더 노력하면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가 왜 이토록 열심히 노력하는지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배은란은 콧방귀를 뀌며 오만하게 말했다.서철용은 바로 배은란의 이런 오만한 모습을 좋아했다.“알려주면 안 돼?” 서철용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쓴다면 그는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하여 그는 배은란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그녀가 어느 대학에 지원할지 알려달라고 애원했다.“반장이 가는 곳으로 가려고. 난 반장 따라갈 거야.” 배은란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이 서민용을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물론 서철용 또한 마찬가지였다.서철용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서민용을 따라갈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예상했어야 했다. “야, 어느 대학에 갈지 정했어?” 서철용이 서민용에게 다가가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배은란 때문이 아니었다면 서민용에게 이런 질문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의대에 가려고.” 서민용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무관심했다. 바로 그 모습 때문에 배은란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서민용의 대답을 들은 서철용은 그야말로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서민용이 하필이면 의대를 선택할 줄이야.그는 의대 경쟁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서민용은 배은란과 함께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서철용은 돌연 허탈함과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서민용과 자신은 비교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비교할 생각
회사는 그녀의 상황을 배려해 흔쾌히 휴가를 승인해 주었다.배은란은 1층 욕실에서 씻은 뒤 다시 서민용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현재 서민용과 한 침대에서 자지 않고 있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실수로 누를 수 있기에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건 권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 말을 기억하고 줄곧 한 방에 있었지만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았다.달빛이 서민용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배은란은 달빛을 빌려서야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배은란은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민용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다음 날 아침, 배은란이 일어났을 때 서민용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바깥 새소리 때문에 깼어? 어제 자기 전에 커튼 치는 거 깜빡했네. 다음부터는 잊지 않을게. 안 졸려? 조금 더 잘래?”서민용은 눈을 깜빡이며 괜찮다는 뜻을 표했다. 배은란은 얼른 일어나 그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잠시 뒤면 두 아이가 서민용을 보러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배은란이 오늘 휴가를 냈기에 아침 식사는 서민용의 방에서 네 가족이 함께 먹었다. 서민용은 배은란이 계속 집에 머무르며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의아한 마음에 눈을 반복해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본 배은란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덮으며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이어 그녀는 입술을 서민용의 눈에 가져갔다. 그는 배은란의 입맞춤을 느끼고 눈까풀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서민용의 꿈속에서 그는 한 손에 아이 하나씩 안고 있었고, 석양의 노을이 그와 배은란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더없이 행복한 모습이었다.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두 아이를 안고 놀이공원에 갈 수 없기에 진짜일 리가 없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은란은 뜻밖에도 그를 다시 볼 수 있었다.“들어와서 좀 앉았다가 가.”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서철용은 몸을 돌렸다.“얼굴이 좀 탔네.”“응. 지나가다가 두 사람이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