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해보면 아마 아주 오랜만에 열리던 가족 모임일 것이다.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전엔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장소월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머리카락엔 물방울이 묻어있었다.전연우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 또한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그와 인시윤 사이엔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남겨 둔 것일까?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직접 보지 않아도 날카로운 그 눈길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느껴졌다. 장소월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강만옥의 옆에 앉았다."여기로 와." 전연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장해진이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장가의 실질적인 주인은 전연우였기에 다들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장소월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나 예전에도 여기에 앉았었잖아. 넌 새언니와 같이 앉아야지, 내가 중간에 껴있으면 이상해."새언니라는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여기 앉지 않으면 아무도 밥 못 먹어.""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전연우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만약 인시윤이었다면, 결코 전연우를 이토록 화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인시윤은 명실공히 전연우의 아내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치 방해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머리를 들어 강만옥과 함께 앉아있는 장해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그녀와 전연우가 가까워지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가 전연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고백했던 그 날 말이다.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녀를 서재에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엄히 꾸짖었다. 전연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조금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2주가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전연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장소월이 처음으로 강만옥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순간이었다."팡!" 갑자기 부엌에서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도우미가 장소월이 한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떨려 그릇을 바닥에 깨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괴이한 상황이었다. 한 명은 애매모호한 관계의 여동생, 다른 한 명은 현재 명실상부한 와이프이다. 장소월 역시 전연우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된 건가. 장소월은 창백해진 얼굴로 또다시 몇 번 힘없이 기침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전연우는 더는 장소월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도리어 친절히 그녀에게 소고기 죽을 담아 주었다.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틀 동안은 담백한 음식만 먹어.""고마워." 장소월이 밥상 위 마늘종 볶음을 한 입 맛보았다. 하지만 미처 그 위에 뿌려져 있던 고춧가루를 보지 못했던 그녀는 곧바로 격렬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몸에 남아있는 상처에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던 전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는 그가 화를 낼 징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 그녀는 전연우의 눈동자에서 걱정어린 감정을 읽었다. 아니, 착각일 것이다. 전연우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장소월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는 전연우의 모습에 이미 내성이 생겨 겁을 먹지도 않았다. 또한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그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약간의 물을 마신 뒤에야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누구 하나 편히 먹지 못한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인시윤은 빈자리에 자리를 옮겨 앉아 전연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집안 안주인이 갖춰야 할 품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 인시윤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너그럽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식사를 마쳤다. 강만옥이 위층에
침대에 누워있던 장해진은 장소월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을 보고 단번에 자극을 받아 흥분하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손을 뻗어 사진을 뺏으려 하기까지 했다."그러니까... 아버지, 정말 이 사람을 알고 계시는 거죠? 그럼 이 사람은 왜 엄마와 함께 있는 거죠?"장소월은 너무나도 간절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다.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 모른다. 서철용은 그녀에게 악의적인 마음을 품고 그녀를 죽이는 것으로 복수하려 한다. 그와 대화해본 결과 그의 복수심은 그녀뿐만 아니라, 장씨 집안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전연우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것 투성이인 일들이 얽히고 얽혀 숨이 턱턱 막히는 안개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장소월은 아무리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는 전생에서도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철용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서재에 숨겨진 방이 있었던 것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대체 그녀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단 말인가?장해진은 점점 더 흥분해 급기야 입에서 거품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깜짝 놀라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와주세요... 빨리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이상해요!"전연우와 인시윤이 곧바로 달려왔다. 그녀는 얼이 빠진 상태로 멍하니 지켜보다가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지 마, 집에 있어."장소월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내 말 들어. 아무 일 없을 거야."그 말에 장소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증은 없고 심증뿐인 그 이야기를 이 오픈된 장소에서 할 수는 없다.건강을 병적으로 챙기는 장해진은 매년 잊지 않고 건강검진을 받았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저토록 병이 악화한단 말인가. 장소월은 옆에 있는 강만옥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도 아이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난간에 보호막까지 덧씌웠을 것이다. 심지어 만에 하나 침대에서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 아래에 부드러운 카펫까지 깔았다.자세히 보지 않으면 평소 이런 디테일엔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이 모든 것들은 전부 전연우가 직접 시장에서 고른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소월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이 아이를 훨씬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한 걸까? 전생에서 그는 분명 그녀를 지독히도 혐오했었다.그때 그녀를 미워하게 된 이유는 백윤서였을까?아버지가 백윤서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전생의 그 날, 아버지는 파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었다. 당시 그녀는 아버지가 백윤서의 방으로 향하는 발소리를 들었고 곧이어 백윤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그녀는... 백윤서에 대한 전연우의 마음을 질투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외면했었다. 그날 마침 전연우는 지방 출장을 가는 바람에 부재중이었다. 하여 자신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나가면 되리라 생각했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버지가 백윤서를 범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그 일을 무기로 장소월은 끊임없이 백윤서를 괴롭혔다.그녀는 백윤서에게 협박했다. 그녀가 장씨 가문을 떠나지 않으면 그녀와 아버지의 비밀을 전연우에게 밝히겠다고.그때의 그녀는 아마 백윤서에 더없이 악독한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녀는 이 비밀을 손에 쥐고 있으면 백윤서를 평생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백윤서가... 남원 별장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그녀는 마지막 순간,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그녀 눈앞에서 피로 물든 채로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장소월은 이젠 그녀가 죽은 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모두 장소월 때문에 백윤서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 것이다.만약... 그날 밤 장소월이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전연우는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진 않았을
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겨우 전연우의 부드러운 눈동자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불편했을 뿐이야."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장소월의 눈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전연우가 그녀 목에 남은 상처 자국을 살펴보며 말했다. "...넌 거짓말할 때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피해. 소월아... 내가 그렇게 무서워?""인시윤 때문이라면, 나... 앞으로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할게." 장소월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시윤과는 아무 상관없어.""아니면, 너 아직도 내가 인시윤과 결혼한 것 때문에 화났어?"전연우는 그녀로부터 조그마한 것이라도 알아내고자 했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비어버린 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장소월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전연우! 난 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어!""처음부터 내가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람 한 명밖에 없었어. 지금도 내 마음은 전혀 변함없어."그 한 마디는 전연우를 완전히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번뜩거렸고, 몸에선 한없이 음산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예전이었다면, 아마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두려움에 눈을 질근 감았다. 전연우는 그제야 번뜩 이성을 되찾았다. 조금 전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전연우는 공중에 멈춰 있는 자신의 손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소월아... 너도 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거 알잖아!""알아들었어?"장소월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전연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해!" 장소월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 알았어.""지금 이 순간부터, 넌 과거의 모든 일들을 깡그
"그리고..." 인시윤는 입술을 질근 깨물다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당신 이름으로 강씨 노부인을 화장터로 보냈어요. 한 주 뒤면 장례식을 치를 거예요.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아요?"전연우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날인데요?""그날은 장례를 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아요. 만약 그날 장례를 치른다면, 죽은 후에 악령이 되어..." 전연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연우가 담배꽁초를 짓누르고는 일어났다.그가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인시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어왔고 목구멍이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난 당신의 아내예요. 내가 어떻게 당신이 살인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자고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잖아요. 연우 씨... 전 영원히 당신 편이에요.""됐어요. 황당한 핑계 그만 대요. 오늘 장소월의 얼굴을 봐서 남원 별장에 발을 들이는 걸 허락했어요." 전연우가 빙글 몸을 돌려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가요.""연우 씨! 난 정말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해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야 해요!""나가라고!" 전연우는 그녀에게 조금의 관용도 허락하지 않았다.인시윤은 이를 꽉 깨물고 마지막 한 마디를 꺼냈다. "당신의 마음속에 제 자린 조금도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언젠가는 당신도 알게 될 테니까. 엄마가 당신을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연우 씨... 조심해야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슬픔과 괴로움이 깃든 표정으로 남원 별장을 나섰다. 정원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은 모두 그녀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장소월에게 바친 신혼 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강씨 노부인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서울 일보에 실렸다.간단히 명시한 사망 날짜 외에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신문 한구석에 덩그러니 실린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그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쉴 뿐이
의사는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환자분의 상태는 너무 심각합니다. 회복될 수 있을지 여부는... 제 능력으로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엔 해외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요.""매년 수많은 환자들이 말기 암 진단을 받습니다. 대부분 절망적이지만 그중엔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있어요.""환자분에겐 행운이 따르실 겁니다..."인정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그 의사는 과거 강영수가 차 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를 맡았던 주치의였다. 인정아는 걱정이 앞섰다. 현재 강영수의 상황에서 타지로의 이동은 너무나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 머무른다면 전혀 가망이 없다. 강영수는 지금 약물에 의존해 간신히 생명의 끈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저 일시적인 방편일 뿐, 언제든 사망에 이를 수 있다.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병원 쪽에 이미 연락했습니다. 언제든 떠나시면 됩니다."얼마 후, 도우미가 걸어와 말했다. "사모님, 노부인의 장례 준비를 마쳤습니다."인정아의 시선이 의식을 잃은 채 사경을 헤매고 있는 강영수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애통한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알겠어요."일주일 후, 장례식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인정아는 전연우의 이름으로 강씨 노부인의 장례식을 치렀다. 서울시 수많은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조문하러 발걸음했다. 강가의 몰락은 성세 그룹 회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세 가문 간의 관계에 대해 마음대로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누군가 이를 입에 올린다면, 그건 전연우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성세 그룹 대표의 심기를 그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강씨 가문 먼 친척들도 찾아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고 있었다. 인시윤은 긴 머리에 하얀 리본을 달고 한쪽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인정아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녀는 사람을 시켜 유골을 묘지에 묻었다.가장 앞자리에 서서 지켜보던 전연우는 경호원으로부터 꽃 한 다발을 건네받았다. 강씨 노부인이 생전 가장 좋아하던 백합이었다.전연우는 묘지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전연우의 그 예상 밖 행동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 역시 장소월의 부탁 때문에 내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꽃다발을 준비했다.아니면 그는 절대 이런 성가신 걸음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험난하고 구불구불한 산길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묘지 위로 비가 부슬부슬 내려왔다.전연우는 가장 늦게 도착한 사람이자 가장 일찍 자리를 뜬 사람이기도 했다. 옆에서 기성은이 그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인시윤이 말했다."연우 씨..." 기성은은 전연우를 쫓아오려는 그녀를 막았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대표님께서는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인정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를 막아서가 아니라 아가씨라는 호칭 때문이었다.인정아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고?!그녀는 모두가 인정하는 명백한 그의 부인이다.혼인신고도 했고, 결혼식까지 마쳤다.전연우는 그런 기성은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인시윤의 안주인 자리는 허울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지금 강씨 집안의 처지는 머지않아 인씨 가문이 맞이해야 할 미래일지도 모른다!점점 더 거세져 가는 빗줄기 속, 산기슭에 멈춰 있는 롤스로이스 차 안에서, 장소월은 은경애로부터 배운 방법으로 품 안의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점심때부터 아이는 갑자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었다. 강씨 노부인의 사망 소식은 병원에서 아이의 병을 치료하던 중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녀가 강씨 저택에 머물렀을 때, 노부인께선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줬었다. 그런 사람이 돌아가셨
분개하고 있던 천효연의 시야에 문득 옆 방문 앞에 놓인 목욕 가운이 들어왔다.목욕 가운 허리띠에는 검은색 은은한 무늬가 수 놓여 있었는데 누가 봐도 강지훈의 것이었다!강지훈이 그녀를 침대에 버려두고 저 바보 같은 여자를 찾아온 것이다!그 사실을 깨달은 천효연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강지훈은 바람기가 있긴 했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천효연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강지훈이 바깥에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저 바보 같은 여자가 나타난 이후로, 강지훈은 그녀를 안고 있으면서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 바보를 위해 그녀에게 손찌검까지 했다!설상가상으로 그 바보는 강지훈의 아이까지 가졌다...천효연은 간신히 벽에 몸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목욕 가운을 쏘아보았다. 동시에 숨을 죽이고 방 안에서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도우미가 다가오자 천효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어서 요염한 자태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아.”소현아는 입을 크게 벌리고 미진이 밥을 먹여주기를 기다렸다.그녀도 남의 손을 빌려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때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이 아파 어쩔 수가 없었다.아침밥은 강지훈이 직접 먹여주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규영과 미진에게 밥을 먹여주라고 지시하고 서둘러 떠났다.“아가씨, 오늘은 어디 불편한 곳 없으신가요?”어제 주인님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 그가 아이를 해치지는 않았을까, 규영과 미진은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들의 마음을 알 리 만무한 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가 다시 끄덕였다.“손목이 너무 아파요. 어떡하죠?”두 사람은 안도하며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달랬다. “이따가 저희가 마사지해 드리면 괜찮아지실 거예요.”소현아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규영과 미진은 의사의 말에 따라 소현아를 데리고 방안을 걸어 다녔다.
강지훈의 움직임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소현아는 배가 짓눌리는 느낌에 불안해졌다. 또한 콧속으로 불쾌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왔다.“윽...”너무나 불편하니 그만해달라고 강지훈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입을 틀어막고 있어 다급해진 소현아는 그의 입술을 꽉 깨물어 버렸다.순간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져나갔다.강지훈이 통증에 약간 뒤로 물러섰다.“강지훈 씨 때문에 아기가 눌렸어요. 그리고 당신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는 찡그린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아 퉤퉤 침을 뱉었다.강지훈의 서늘한 표정을 본 소현아는 토끼처럼 재빨리 배를 감싸 안고 구석으로 도망쳤다.험악한 인상에 입가에 피까지 묻히고 음침한 눈빛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사납기 그지없었다.소현아는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의사 선생님이 아기 다칠 수도 있다고 이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람 찾아가서 같이 자요. 하지만 자고 나서는 깨끗하게 씻고 저 찾아와야 해요. 낯선 냄새가 나면 토할 것 같단 말이에요.”그녀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당신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도우미 언니들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 같아요. 저도 싫고 아기들도 싫어할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의 욕망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격렬하게 끓어올랐다.눈앞의 이 토끼 같은 여자를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몸에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던지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옷 벗으니까 냄새 안 나지? 이리 와.”소현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 갈래요. 당신 때문에 아기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 찾아가세요.”강지훈의 눈빛이 험악하게 변했다. “네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소현아는 밖으로 도망쳐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문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강지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그의 무릎에 앉혀진 소현아가 또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강지훈이 소리쳤다.“울지 마!”강지훈도 어
“지훈 씨, 아랫부분으로 도와줄게요...”그녀의 말은 파편처럼 흩어져버렸다. 강지훈은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천효연은 더 이상 요염한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손가락으로 강지훈의 다리를 꽉 움켜쥐어 길게 할퀸 자국까지 남겼다.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도 강지훈의 마음속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았다.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천효연의 입에서 물건을 빼내고 그녀를 잡아 벽에 밀어붙인 다음 다시 아래로 밀어 넣었다.질식하기 직전, 천효연은 삽입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허리를 비틀며 그에게 맞춰 움직였다.“지훈 씨, 정말 대단하네요...”강지훈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엔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천 조각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천효연의 목소리는 입안에 갇혀버렸다. 쾌감에 찡그려졌던 미간이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 신음소리를 내는 걸 좋아했었는데...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천효연은 기진맥진하여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강지훈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흥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그는 침대에 널브러진 여자를 힐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일어나 욕실에서 간단히 씻은 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새 잠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소현아의 방으로 향했다.소현아는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규영과 미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강지훈이 옆에서 방해하지 않으니 밥상에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와구와구 먹고 있었다.규영과 미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아가씨, 오늘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만 드시라고 하셨잖아요...”소현아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들을 가련하게 바라봤다.“이번 한 번만 먹을게요. 강지훈 씨가 먹으라고 했어요. 못 믿겠으면 직접 물어보세요.”확실히 강지훈이 시킨 것이다. 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그때 강지훈
소현아의 울음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강지훈은 잠시 달래주다가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다.그는 탈옥수를 쫓느라 며칠 동안 뜬눈으로 지새웠음에도 부랴부랴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왔다.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품에 안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토록 난동을 부릴 줄이야.“아직도 다 못 울었어?”강지훈은 그녀를 품에 가두고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소현아의 속눈썹은 눈물에 젖어 엉겨 붙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인지 딸꾹질이 멈추지 않아 괴로워진 그녀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딸꾹질을 멈추려는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강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안에 집어넣었다.조금씩 훌쩍거리던 소현아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당신 싫어요. 당신은 전연우랑 똑같이 나쁜 놈이에요! 소월이한테 갈 거예요. 소월이는 나 굶기지 않을 거라고요...”“흐엉, 소월이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요. 소월이가 만든 밥이 제일 맛있는데...”한참을 울고 나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먹을 것뿐이다.강지훈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요리사한테 다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해!”잠시 후 따뜻한 음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향긋한 냄새를 맡자 소현아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멈추었다. 그녀는 강지훈의 몸에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일이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주인님, 아가씨께선 임신 중이십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임산부는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기분을 잘 살펴줘야 한다고 하셨어요.”규영과 미진은 소현아의 붉어진 눈과 코를 보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강지훈에게 말했다.강지훈은 섬뜩한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복도에서 여자 도우미가 새 목욕 가운을 들고 안방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한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 앞에 나타나 손에 들린 옷을 빼앗았다.“줘. 내가 가져다줄게.”도우미는 당황스
소현아는 접시를 끌어안고 좀처럼 내려놓지 않았다.“오늘 모처럼 입맛이 돈다고요. 규영 씨, 미진 씨, 저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아주 조금만 먹고 강지훈 씨에게는 말 안 할게요.”규영과 미진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그들 역시 소현아를 좋아하는지라 마음껏 먹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 때문에 주인님에게 혼나는 건 더더욱 싫었다.“아가씨, 배고프시면 제가 과일 좀 가져다드릴까요? 과일은 아기에게 좋을 거예요.”규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와 협상했다.소현아는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를 눈앞에 두고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까지 왈칵 차올랐다.하지만 배에서 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결국 접시를 내려놓았다.“알겠어요. 그럼 과일 많이 먹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녁에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거든요.”규영과 미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치우고 과일을 잘라 가져다주었다. 그러고는 맛있게 먹고 있는 소현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사실 소현아는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었다. 많이 먹어도 과도하게 뚱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글동글 귀여운 편이었다. 식사량을 줄이자 며칠 만에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밖에서 돌아온 강지훈은 한눈에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음을 알아챘다. 살이 빠져 더 커진 눈은 전보다 더욱 청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였다.“그동안 제대로 못 먹었어?”그가 손을 뻗어 뺨을 꼬집었다. 감촉도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살도 별로 없었다.소현아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일그러졌다. 그녀는 배고픔에 가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강지훈 씨, 저 배가 너무 고파요. 아기 낳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만두면 안 될까요? 아기 그냥 다시 돌아가게 해줘요!”강지훈은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가? 어디로 돌아가?”소현아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 역시 아기가 어디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리
다음 날, 소현아는 배고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두 아기는 불안한 듯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아가들, 착하지. 의사 선생님께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조금만 참아. 태어나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소현아는 배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두 아기를 달랬다.하지만 아기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더욱 격렬하게 움직였다.소현아의 배 위에 놓여 있던 강지훈의 손에서도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깜짝 놀라며 번쩍 눈을 떴다.귓가에 소현아의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희들 자꾸 차지 마. 내가 안 먹이는 게 아니잖아. 나도 배고프단 말이야.”강지훈의 눈에서 경계심과 냉기가 사라지고 짜증스러움만 남았다.그는 고개를 숙여 소현아의 배를 툭툭 두드리며 음산하게 경고했다.“너희 둘 얌전히 있어. 말 안 들으면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현아가 그의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그녀는 씩씩거리며 그를 쏘아보았다.“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지 말아요. 아기들이 당신 싫다고 계속 차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 말은 들리지도 않으니까 아기들 겁주지 마세요!”강지훈은 손등이 찌릿했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안 들린다는 거 너도 알아?”소현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당신 말은 못 들어도 내 말은 들을 수 있어요. 내 뱃속에 있으니까요.”강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이불을 걷어 올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탄탄한 근육질의 헐벗은 상체가 드러났다.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흉터들이 뒤섞여 있어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소현아는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몰래 그를 쳐다보았다.“강지훈 씨, 그 나쁜 놈에게 전화했어요? 소월이 저 보러 언제 와요?”이 작은 머릿속에 어젯밤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있을 줄이야.그는 소현아를 등지고 천천히 옷을 입으며 지극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전화했어. 전연우가 안 된
강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알았어. 가 봐.”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강지훈 씨, 의사 선생님이 제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다고 했어요.”소현아는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웅얼거렸다.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어도, 소월이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건 되지 않겠는가?그녀가 민감한 부위를 찌른 탓에 강지훈은 마음속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꾹 참고 고개를 돌렸다.그 눈에선 음산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또 도망가고 싶다는 건가?그는 이미 한 번 이 토끼를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소현아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던지라,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그냥 소월이가 보고 싶어요.”장소월과 놀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강지훈은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북경 감옥으로 불러올까?”그 말을 들은 순간 소현아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작은 얼굴에 기대감을 가득 실은 채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좋아요, 좋아요! 내가 소월이 집에 놀러 갈 때마다 그 나쁜 놈이 나더러 많이 먹는다면서 자꾸 구박하고 화를 냈어요. 소월이가 여기에 놀러 오면 당신은 절대 그러면 안 돼요. 맛있는 것도 많이 준비해줘야 해요!”강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장소월이 오기만 한다면.”소현아는 도망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잡혀 왔다. 그런데도 강지훈은 그녀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었다.전연우는 어떻겠는가.장소월은 전연우의 시야에서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에 그의 손모가지도 걸 수 있었다.장소월을 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은 강지훈이 아닌 전연우가 될 것이다.저 작은 토끼의 화가 전연우를 향하게 하면 될 일이다.소현아는 그의 말에서 조금의 이상함도 느끼지
의사가 도착했을 때, 소현아는 여전히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혹시라도 죽는 건 아닐지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의사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다.의사가 검사를 하려고 다가가자 소현아는 엉덩이만 바깥에 내민 채 계속 강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의사도 난감해졌다.강지훈은 품 안에 웅크린 작은 토끼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고 귓불을 잡아 올렸다.“죽을까 봐 무섭다며? 빨리 검사받아봐.”소현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흑흑, 너무 무서워요...”강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사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가운 벗어.”의사가 흰 가운을 벗자 소현아의 거부감이 조금 줄어들었다.검사가 진행되는 내내 강지훈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지켜보았다.의사는 엄청난 압박감과 긴장감에 식은땀까지 흘러나왔다.“어때?”검사가 끝나자 강지훈은 소현아가 다시 그의 품에 안기도록 두 팔을 벌렸다.의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별문제 없습니다. 최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좀 받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임신 중에는 음식을 너무 많이 드시면 안 됩니다. 적당히 드시고 꾸준히 운동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너무 커져서 출산할 때 힘드실 수 있습니다.”별문제가 없다는 말에 강지훈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소현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강지훈의 품에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제가 배부르게 먹지 못하면 아기들도 배고플 텐데요.”“드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양을 줄이시라는 겁니다. 아니면 출산하실 때 고통스러우실 수 있습니다.”그녀는 가련한 표정으로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었다.“아기 낳으면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죠? 강지훈 씨, 그럼 지금 당장 낳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잖아요.”소현아는 예전 창고에 갇혀 하루에 작은 찐빵 하나로 버텼던 때를 떠올렸다. 가끔씩은 찐빵조차도 먹지 못했었다. 당시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하며 허기를 버텼다.아기가 뱃속에 있어서 배부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