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요?" 중년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안 좋아서 조만간 수술을 받아야 해요. 다만 그 수술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장소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좋은 사람에겐 행운이 따르는 법이거든요." 그를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지 모를 한 마디였다. 중년 남자가 신문을 접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장소월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자애롭고 친절한 미소가 번졌다. "아가씨에게도 행운이 깃들길 기도할게요." "시간이 늦었어요. 돌아가야겠어요."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힐끗 보고는 물었다.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요?" "..." "이 이유가 너무 황당할 거라는 건 알지만... 아가씨를 보면 자꾸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내가 떠올라요. 전 그 사람이 너무 그립거든요..." "그냥 수술 전에 위로 한 번만 해준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나요?" 그는 말할 때에도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장소월은 고민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는 장소월과 몇 초간 포옹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떠나기 전, 깜빡하고 신문을 벤치에 남겨두었다. 장소월이 신문을 집어 들고 그를 쫓아가려 한 순간, 돌연 그녀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밖에서 바람 쐬니까 재밌어?" 전연우는 차가운 얼굴로 검은색 슈트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옷 갈아입어. 내가 퇴원 절차 다 밟았어." 전연우는 자신의 정장을 두른 장소월의 어깨를 감싸 안고 걸어갔다. 장소월이 뒤돌아보니, 그 중년 남자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장소월의 손엔 그 남자의 신문이 쥐어져 있었다. 차 안에서, 전연우가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살펴보고 있었다. 단순히 기혈을 회복시키는 약인 듯 보였지만, 이는 서철용이 특별히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라는 걸 장소월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섭취량도 예전보다 적잖이 증가했다. "네 하루
장해진은 호흡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뇌졸중을 앓고 있다고 한다. 초점 없는 눈을 끔뻑거리며 손으로 괴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말을 할 수도, 남의 도움 없이는 식사를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휠체어에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3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는 강만옥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아이는 주눅이 들었는지 몸을 움츠리고 강만옥의 뒤에 앉아 있었다. 4년이 흘렀음에도 강만옥은 전혀 늙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성숙한 여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짙은 파란색에 하얀 꽃잎이 수 놓인 원피스, 옅은 컬러의 립스틱을 바른 입술... 긴 머리는 짧게 잘라 파마를 했고, 귀에는 값비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 말이 많은 은경애도 오늘은 왠지 조용했다. 강만옥은 예전처럼 여주인의 오만한 자태를 뽐내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동안 소월이는 더 예뻐졌구나. 이 아이는 나와 네 아버지의 딸이야, 이름은 장명주고." "명주야, 네 언니야. 얼른 언니라고 부르렴." 장명주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소월을 불렀다. "언... 언니!" 장소월은 마치 심장에 비수가 꽂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다가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예전의 모습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철용이 했던 예언은 모두 현실로 구현되고 있었다. "장해진은 절대 무사히 돌아오진 못할 거예요." 그녀의 방에 들어간 전연우는 머리를 푹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장소월을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의부님이 돌아오시는 걸 원했던 거 아니었어?"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그녀는 전연우가 서울에 데려온 그 날 이후부터 늘 이렇듯 허망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눈은 항상 아무런 감정도 없이 텅
계산해보면 아마 아주 오랜만에 열리던 가족 모임일 것이다.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전엔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완전히 달라졌다. 장소월은 감정을 추스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방금 세수를 했는지 머리카락엔 물방울이 묻어있었다.전연우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고, 그녀 또한 그의 시선을 의식했다.그와 인시윤 사이엔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녀를 위해 남겨 둔 것일까?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직접 보지 않아도 날카로운 그 눈길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느껴졌다. 장소월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강만옥의 옆에 앉았다."여기로 와." 전연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장해진이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장가의 실질적인 주인은 전연우였기에 다들 삼엄한 분위기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장소월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나 예전에도 여기에 앉았었잖아. 넌 새언니와 같이 앉아야지, 내가 중간에 껴있으면 이상해."새언니라는 말에 전연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여기 앉지 않으면 아무도 밥 못 먹어.""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전연우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만약 인시윤이었다면, 결코 전연우를 이토록 화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인시윤은 명실공히 전연우의 아내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치 방해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장소월은 머리를 들어 강만옥과 함께 앉아있는 장해진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그녀와 전연우가 가까워지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돌연 그녀의 머릿속에 그날이 떠올랐다. 그녀가 전연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고백했던 그 날 말이다.아버지는 이유 없이 그녀를 서재에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엄히 꾸짖었다. 전연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조금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 일 때문에 그녀는 2주가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전연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장소월이 처음으로 강만옥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순간이었다."팡!" 갑자기 부엌에서 귀를 찢을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도우미가 장소월이 한 말을 듣고 너무 놀란 나머지 손이 떨려 그릇을 바닥에 깨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괴이한 상황이었다. 한 명은 애매모호한 관계의 여동생, 다른 한 명은 현재 명실상부한 와이프이다. 장소월 역시 전연우의 수많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된 건가. 장소월은 창백해진 얼굴로 또다시 몇 번 힘없이 기침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이 많이 쇠약한 상태였다. 전연우는 더는 장소월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도리어 친절히 그녀에게 소고기 죽을 담아 주었다.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이틀 동안은 담백한 음식만 먹어.""고마워." 장소월이 밥상 위 마늘종 볶음을 한 입 맛보았다. 하지만 미처 그 위에 뿌려져 있던 고춧가루를 보지 못했던 그녀는 곧바로 격렬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몸에 남아있는 상처에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던 전연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는 그가 화를 낼 징조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순간, 그녀는 전연우의 눈동자에서 걱정어린 감정을 읽었다. 아니, 착각일 것이다. 전연우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장소월은 불같이 화를 내며 날뛰는 전연우의 모습에 이미 내성이 생겨 겁을 먹지도 않았다. 또한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그 역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녀는 약간의 물을 마신 뒤에야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누구 하나 편히 먹지 못한 불편한 식사 자리였다. 인시윤은 빈자리에 자리를 옮겨 앉아 전연우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한 집안 안주인이 갖춰야 할 품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 인시윤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너그럽게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식사를 마쳤다. 강만옥이 위층에
침대에 누워있던 장해진은 장소월의 손에 들려있는 사진을 보고 단번에 자극을 받아 흥분하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크게 반응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손을 뻗어 사진을 뺏으려 하기까지 했다."그러니까... 아버지, 정말 이 사람을 알고 계시는 거죠? 그럼 이 사람은 왜 엄마와 함께 있는 거죠?"장소월은 너무나도 간절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었다.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 모른다. 서철용은 그녀에게 악의적인 마음을 품고 그녀를 죽이는 것으로 복수하려 한다. 그와 대화해본 결과 그의 복수심은 그녀뿐만 아니라, 장씨 집안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전연우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모르는 것 투성이인 일들이 얽히고 얽혀 숨이 턱턱 막히는 안개를 형성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장소월은 아무리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었다.그녀는 전생에서도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서철용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의 서재에 숨겨진 방이 있었던 것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대체 그녀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더 많이 있단 말인가?장해진은 점점 더 흥분해 급기야 입에서 거품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장소월은 깜짝 놀라 다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와주세요... 빨리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이상해요!"전연우와 인시윤이 곧바로 달려왔다. 그녀는 얼이 빠진 상태로 멍하니 지켜보다가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가서야 정신을 차리고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전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가지 마, 집에 있어."장소월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내 말 들어. 아무 일 없을 거야."그 말에 장소월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물증은 없고 심증뿐인 그 이야기를 이 오픈된 장소에서 할 수는 없다.건강을 병적으로 챙기는 장해진은 매년 잊지 않고 건강검진을 받았었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저토록 병이 악화한단 말인가. 장소월은 옆에 있는 강만옥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도 아이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난간에 보호막까지 덧씌웠을 것이다. 심지어 만에 하나 침대에서 떨어졌을 때를 대비해 아래에 부드러운 카펫까지 깔았다.자세히 보지 않으면 평소 이런 디테일엔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이 모든 것들은 전부 전연우가 직접 시장에서 고른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장소월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이 아이를 훨씬 더 신경 쓰는 것 같았다.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한 걸까? 전생에서 그는 분명 그녀를 지독히도 혐오했었다.그때 그녀를 미워하게 된 이유는 백윤서였을까?아버지가 백윤서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전생의 그 날, 아버지는 파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었다. 당시 그녀는 아버지가 백윤서의 방으로 향하는 발소리를 들었고 곧이어 백윤서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그리고 그녀는... 백윤서에 대한 전연우의 마음을 질투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외면했었다. 그날 마침 전연우는 지방 출장을 가는 바람에 부재중이었다. 하여 자신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나가면 되리라 생각했다.그리고 그다음 날, 아버지가 백윤서를 범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그 일을 무기로 장소월은 끊임없이 백윤서를 괴롭혔다.그녀는 백윤서에게 협박했다. 그녀가 장씨 가문을 떠나지 않으면 그녀와 아버지의 비밀을 전연우에게 밝히겠다고.그때의 그녀는 아마 백윤서에 더없이 악독한 악마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녀는 이 비밀을 손에 쥐고 있으면 백윤서를 평생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어느 날...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백윤서가... 남원 별장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그녀는 마지막 순간,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그녀 눈앞에서 피로 물든 채로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장소월은 이젠 그녀가 죽은 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모두 장소월 때문에 백윤서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 것이다.만약... 그날 밤 장소월이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전연우는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진 않았을
장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겨우 전연우의 부드러운 눈동자에서 빠져나온 그녀는 침대를 짚고 일어나 눈물을 닦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눈에 먼지가 좀 들어가서 불편했을 뿐이야."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운 장소월의 눈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전연우가 그녀 목에 남은 상처 자국을 살펴보며 말했다. "...넌 거짓말할 때마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피해. 소월아... 내가 그렇게 무서워?""인시윤 때문이라면, 나... 앞으로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할게." 장소월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시윤과는 아무 상관없어.""아니면, 너 아직도 내가 인시윤과 결혼한 것 때문에 화났어?"전연우는 그녀로부터 조그마한 것이라도 알아내고자 했지만, 그녀의 눈은 텅 비어버린 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장소월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말했다. "전연우! 난 네가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어!""처음부터 내가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람 한 명밖에 없었어. 지금도 내 마음은 전혀 변함없어."그 한 마디는 전연우를 완전히 화나게 만들었다.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번뜩거렸고, 몸에선 한없이 음산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예전이었다면, 아마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손을 댔을지도 모른다.장소월은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두려움에 눈을 질근 감았다. 전연우는 그제야 번뜩 이성을 되찾았다. 조금 전 대체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전연우는 공중에 멈춰 있는 자신의 손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다음에 또 그런 말을 듣게 된다면, 소월아... 너도 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놈이라는 거 알잖아!""알아들었어?"장소월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바들바들 떨며 머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전연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잡고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말해!" 장소월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 알았어.""지금 이 순간부터, 넌 과거의 모든 일들을 깡그
"그리고..." 인시윤는 입술을 질근 깨물다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당신 이름으로 강씨 노부인을 화장터로 보냈어요. 한 주 뒤면 장례식을 치를 거예요.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아요?"전연우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무슨 날인데요?""그날은 장례를 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아요. 만약 그날 장례를 치른다면, 죽은 후에 악령이 되어..." 전연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연우가 담배꽁초를 짓누르고는 일어났다.그가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인시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쿵쿵 뛰어왔고 목구멍이 막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난 당신의 아내예요. 내가 어떻게 당신이 살인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자고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잖아요. 연우 씨... 전 영원히 당신 편이에요.""됐어요. 황당한 핑계 그만 대요. 오늘 장소월의 얼굴을 봐서 남원 별장에 발을 들이는 걸 허락했어요." 전연우가 빙글 몸을 돌려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가요.""연우 씨! 난 정말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해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야 해요!""나가라고!" 전연우는 그녀에게 조금의 관용도 허락하지 않았다.인시윤은 이를 꽉 깨물고 마지막 한 마디를 꺼냈다. "당신의 마음속에 제 자린 조금도 없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언젠가는 당신도 알게 될 테니까. 엄마가 당신을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연우 씨... 조심해야 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슬픔과 괴로움이 깃든 표정으로 남원 별장을 나섰다. 정원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은 모두 그녀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장소월에게 바친 신혼 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강씨 노부인이 사망했다는 기사가 서울 일보에 실렸다.간단히 명시한 사망 날짜 외에 아무런 내용도 없었다.신문 한구석에 덩그러니 실린 그 기사를 본 사람들은 그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쉴 뿐이
서철용의 보기 드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전연우와 강지훈이 언제부터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그의 기억 속 강지훈은 여전히 전연우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부하였다.북경 감옥.소현아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침대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도우미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약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현아 아가씨가 몸이 불편하다며 계속 약을 안 드시겠다고 합니다.”막 바깥에서 들어온 강지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자 옆에 있던 도우미가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검은색 군화가 바닥을 밟는 힘 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무슨 일이야?”엉덩이를 쳐들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소현아는 강지훈이 나타나자 겁을 먹은 듯 얌전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노란색 헐렁한 잠옷 차림의 소현아는 동그란 배를 쭉 내밀고 손으로 어루만졌다. “강지훈 씨,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아요. 봐봐요, 이렇게 커졌어요.”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냉랭해졌다. “어젯밤 약 안 먹었어?”소현아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먹었어요. 만져봐요. 배 속에 아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강지훈 씨, 나 정말 임신한 것 같아요.”강지훈은 여러 도우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옷 속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허벅지 사이로 야한 속옷이 드러났지만, 도우미들은 이런 광경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북경 감옥 요리사 솜씨가 좋아졌나 보네. 살이 많이 쪘어.”도우미 중 한 명이 눈을 내리깔고는 애써 불안감을 감추며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강지훈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약 줘.”도우미가 약을 건네주자, 강지훈은 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이 약 왜 먹는 거야?”그녀가 더듬거리며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나서서 말했다. “이건 현아 아가씨를 위한 소화를 돕는 약입니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야식을 너무 많이 드셔서인지 아침을 잘 못 드셨습니다. 하여 소화불량이 아닌가 싶어
은경애는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아이를 돌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편의를 위해 바로 옆방 침실에서 잤던 그녀는 옷을 걸친 채로 일어나 별이 방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건지 활짝 열려있는 문을 본 그녀는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도련님.”“또 어디에 가신 거예요!”은경애는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지독한 휘발유 냄새와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순식간에 졸음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큰일 났어요, 빨리 와 보세요! 큰일 났어요!”은경애는 별장의 모든 조명을 켰다. 옆방 침실에서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서철용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즉시 눈을 뜨고 옷을 입은 채로 방문을 나섰다. 별장을 가득 메운 불쾌한 냄새가 서철용의 코에도 흘러들어왔다. 코를 막고 계단을 내려가니 1층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사고를 친 아이는 서재에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은경애는 급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우리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바깥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모두 혹독한 훈련을 거친 경호원들이라 물이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바닥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떴다.지난번에는 부엌에 불을 지르더니, 이번에는 물바다를 만들었네. 좋아, 아주 좋아!“도련님, 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이고!” 은경애는 한 달에 두세 번은 이렇게 멘붕이 오곤 했다. 이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장씨 가문에 들어와 갖은 일을 경험했지만, 돈 욕심 때문에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아이를 데리고 몇 달 동안 겪었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은경애와는 달리 서철용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 불쾌한 냄새는 도대체 어디서 나는 걸까?그때 서철용의 눈에 구석 쪽 이상하게 고여있는 물이 들어왔다. 그는 걸어가 발로 툭툭 밟아 보았다. 그 순간 아
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야 천천히 잦아들었다. 다만 너무 오랜 시간 울었던지라 볼은 붉게 퉁퉁 부어올랐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은경애 역시 긴장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람의 목소리를 이렇게 듣게 되다니.은경애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장소월은 침대에 앉아 이불을 덮고 말했다. “별아, 엄마야. 엄마 목소리 기억나?”“엄... 엄마...” 별이가 다소 불분명한 발음으로 옹알이를 했다.서철용이 은경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일단 나가 계세요. 나중에 부를게요.”“네, 그럼 저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주세요.”은경애가 나가자 서철용은 휴대폰을 가져가려 했지만, 별이는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채 단단히 잡고 있었다.장소월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별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선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말로 자신을 엄마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소월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진정제와도 같았다. “별아, 엄마가 없더라도 경애 아주머니 말씀 잘 들어야 해, 알겠지?”“네...”“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해...”별이가 대답했다. “네...”지금 이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까지 자지러지게 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담겨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휴대폰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별이는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며 말했다. “엄... 엄마.”서철용이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꼬맹아,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충전해야 해. 안심해. 네 엄마는 아빠가 꼭 찾아올 거야. 네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절대 헤어질 수 없어.”별이는 이제 막 난 젖니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어 보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곯아떨어졌다. 서철용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받쳤다. 만에 하나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경을 치게 될 테니 말이다.서철용은 아이를 눕힌 뒤 방을 나섰다. 시간이 늦었
은경애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 대표님이 절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서철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 자식을 꽤 믿나 보네요...”“그럼요, 대표님께서 돌아오면 보너스를 주신다고 했어요. 조금만 더 모으면 큰 손주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 수 있어요.”참으로 보기 드문 진심이고 충심이었다. 주위에 온통 괴물들뿐인 전연우의 곁에 이토록 헌신적인 사람이 있었다니.“말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전연우가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면, 나도 아주머니를 믿을 수 있어요.” 서철용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설득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은경애에게 문자를 보여주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는 한배를 탄 사람들이에요. 아주머니를 해치는 건 나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은경애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저는 글자를 몰라요.”그 한마디에 서철용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누가 알겠는가, 이 남자가 속으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남원 별장에는 보일러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서철용은 너무 더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은경애가 물었다. “여기에서 주무시려고요? 외부인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 없어요.”바깥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의심이 많은 건 좋은데, 너무 지나치면 안 돼요. 내 말까지 믿지 않으면, 나중에 정말로 일이 터졌을 때 아무도 당신들을 도와줄 수 없어요.”은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표님께서 똑똑히 말했었다. 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오지 않는 한, 누구든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는 있지만, 너무 많이 믿어서는 안 된다.은경애는 별장에서 별이를 돌보는 일만 하고 있었고, 식사는 다른 몇 명의 도우미들이 준비해 정해진 시간에 가져다주고 있었다.저녁 식사가 준비된 후
은경애는 시선을 흘끗 돌려 아래층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난간을 잡고 일어서는 별이의 모습을 본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우리 작은 도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행기 장난감 가지고 놀고 계시지 않았어요? 언제 내려오셨어요?”“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대표님과 아가씨를 무슨 낯으로 뵙겠어요.”서철용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시선을 맞추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청아하고 맑은 눈빛이었지만, 서철용은 한눈에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겨우 몇 살밖에 안 되는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이 꽤나 많아 보였다.별이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서철용을 향해 옹알거렸다.아이를 오랫동안 돌본 은경애는 아이의 성격을 잘 알기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철용 앞으로 데려갔다. “도련님, 서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는가 봐요. 평소에 집에 외부인이라곤 거의 드나들지 않으니 선생님을 보고 신기한가 보네요.”“도련님, 이분은 도련님의 삼촌이세요. 삼촌이라고 해보세요...”서철용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벌써 말을 할 줄 알아요?”은경애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 정말 신기해요. 너무 똑똑해서 가르쳐주는 건 뭐든 한 번이면 다 따라 한다니까요.”서철용은 숨김없이 말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속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네요.”별이는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며 옹알이를 했다. 은경애가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한테나 안아달라고 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저 말고는 누구도 가까이 못 가게 해요.”서철용이 손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방으로 들어간 서철용은 별이의 손에 들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장소월이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별이는 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서철용은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 “네 엄마는 지금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어.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도 함께 돌아올 거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의 남자는 이미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직 팔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호사가 다가와 면봉으로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었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온 서철용을 보며 말했다. “서 선생님, 환자분 상태는 여전히 똑같습니다. 목숨은 건졌고 의식도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서철용이 손을 휘젓자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말했다. “형, 지금까지 이렇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내 말 듣고 있지?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전연우를 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어. 나 이제 더는 어떠한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아.” “난... 서씨 집안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야. 물론 아버지의 사생아도 아니야. 우연히 서씨 가문과 연이 닿았고, 서철용이라는 신분을 사칭해 들어가게 된 거야.” “진짜 서철용은 오래전에 죽었어.” “내 진짜 성은 연 씨야. 20년 전, 난 원수에게 살해당했지만, 운 좋게 살아남았어. 그러다 진짜 서철용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서씨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옥패를 넘겨주었어. 그때는 그냥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네.” “그리고 배은란은... 나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은란이가 낳은 아이 아버지는 형이야.” 침대에 누운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서철용은 그가 반응을 보이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 은란이 좋아하는 거 맞아. 하지만 비열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은란이 마음 얻고 싶지 않아.”“서민용, 치료 잘 받고 형 아내와 아이한테 돌아가...” “형을 저승 문턱에서 데려와 살려놓은 내 수고를 헛되이 하진 말아야지.” 서철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종래로 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지 않았다. 장해진이 죽어 복수가 끝났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
“아, 참, 그리고 그 아이도...” “전연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 버릴 거야.” “알겠습니다, 송 대표님.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오늘 밤 반드시 일을 성공시킬 겁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대방은 팔을 걷어붙이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럼 전에 얘기했던 회사 주식은...” 송시아는 날카롭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하지 마. 회사 주식은 네가 원하는 만큼 줄게.” “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해가 지면 좋은 소식이 들리실 겁니다.” 남원 별장이 사라지고 아이도 죽으면... 그때쯤이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겠지. 장소월... 그때까지도 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까지 내팽개치고 언제까지 숨어있는지 두고 보겠어. 장소월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자기 아이가 아니더라도 다치는 건 외면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꼭꼭 숨어 있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찾아낼 방법은 수백 가지가 넘으니까. 러시아 국경 밖. 잠을 자던 장소월은 갑자기 가슴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꿈속에서 별이가 계속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었다... 장소월로 하여금 단 한 순간도 걱정의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사람은 전연우 외에도 별이가 더 있었다. 그 아이... 장소월은 왜인지 모르게 줄곧 그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었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의 통증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환자 차트를 보고 있던 서철용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소월 씨,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장소월은 아픈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별이가 잘못되는 꿈을 꿨어요. 혹시 남원 별장에 가봐 줄 수 있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요.” 서철용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뱉어내며 말했다. “소
밤늦도록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송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품에 안겨 침대에 내려놓아졌다. 몸에는 얇은 담요 한 장만 덮여 있을 뿐이었다. 너무나 지쳐버린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남자가 떠나고 나서야 텅 빈 반산 별장은 다시 고요해졌다. 송시아가 깨어났을 땐 이미 점심 열두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잠들어있는 것처럼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의 잘생기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쓸어내렸다. 남자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마저 희미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송시아는 자연스럽게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관계를 맺은 뒤에도 송시아는 지금처럼 그의 잠든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전연우는 너무나도 예민했기에 아무리 피곤해도 깊게 잠들지 못하고 미세한 움직임만 있어도 바로 깨어났다. 때문에 지금처럼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연우는 출중한 능력 외에도 가장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많은 여자를 홀리는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지금의 그이든, 50대 중년의 전연우이든, 그는 늘 성숙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는 지배자의 풍모와 아우라를 지녔고, 그와 같은 사람은 서울 전체를 뒤져봐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송시아는 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박 두 번의 삶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그에게 쏟았다. 그와 함께 다시 일어섰고, 그가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중 그 누가 전연우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서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국회의원들마저도 그의 눈치를 살핀다. 전연우가 가진 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송시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때 도우미가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점심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송시아는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그녀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행복하게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 씨, 남원 별장이 없어지고, 두 사람의 아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면 마지막은 장소월 차례예요... 장소월까지 죽은 후, 난 영원히 이 별장에서 당신과 함께 살 거예요.” ... 신이랑의 이직 소식이 성세 그룹 전체에 퍼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소민아였다. 사무실, 소민아는 손에 회의 자료를 들고 신이랑 앞으로 걸어가 따지듯이 물었다. “왜 회사에서 나가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말 안 믿었는데, 회의하러 잠깐 올라갔다가 와보니 정말 이직한다네요.” “신이랑 씨, 정말 송시아랑 손잡은 거예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내가 본가로 들어가는 건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어요. 민아 씨 눈에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민아 씨한테 결혼을 강요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결국 민아 씨는 날 한 번도 믿지 않은 거네요!” 소민아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한 감정이 눈동자에 비쳤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랑 씨, 제 말은 그게 아니고... 미안해요. 제가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해서 헛된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요. 그냥 이랑 씨가 왜 갑자기... 회사를 나가는 건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신이랑이 말했다. “민아 씨, 전에도 말했듯이, 난 구르미 시리즈에 줄곧 머무르지는 않을 거예요. 나한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소민아가 말했다. “무슨... 무슨 일인데요? 왜... 지금까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신이랑은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민아 씨한테 말했었어요. 다만 민아 씨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뿐이죠.” “난 이만 갈게요. 나머지 업무는 이미 우림 씨에게 인계했어요. 우림 씨가 내 자리를 대신할 거예요.” 소민아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신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