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전후로 서재에 들어갔고 전연우가 문을 닫자, 압도적인 억압이 온 방 안을 엄습했다.장해진은 불상에 향을 피우며 물었다. “최근에 새로운 친구를 만들었니?”갑자기 던진 물음에 장소월은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였다.“네... 네! 아버지,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장해진은 느릿느릿 책상 앞에 가서 앉았고, 전연우는 바로 그의 옆쪽에 가서 섰다. 두 눈길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월아, 아빠가 너를 무섭게 했니?”장소월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아니요...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셔서, 혹시라도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벌을 받게 될 까봐 걱정했어요.”장해진은 이 말은 듣고는 오히려 희한했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기 딸이 어딘가 변한 것 같았다.예전의 퉁명스러운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언제부터 강 씨 집안사람을 만나고 다녔어?”강 씨 성을 가진 친구라면 장소월은 한 명밖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궁금했다.장해진의 사소한 원한도 반드시 갚는 성격에 따르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장해진은 관여를 안 할 수가 없었다.이런 말들을 물어보면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바로...‘설마... 강영수까지 여기에 끼어들었나?’이것은 장소월이 유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장해진이 굳이 따로 그녀를 불러내 대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강영수에 관한 일들을 장해진한테 평생 숨길 수는 없고 지금 말하지 않아도 장해진은 나중에 분명히 다 알게 될 것이다.장소월은 아예 사실대로 말했다. “저도 요 며칠 사이에 알게 된 친구인데, 바로 우리 집 옆집에 살았어요. 지난번에 제가 뒤뜰에 있는 대추나무에 갔을 때 그와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에요.”“그래?”‘강 씨 집안사람들도 남원 별장에 있다고?’장소월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은 강영수예요. 아버지, 그 사람 사실 좋은 사람이에요.”장해진은 일어나 장소월에게
백윤서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다가 전연우가 서재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연우 오빠, 왜 그래요? 얼굴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그 사람이... 오빠를 난처하게 했죠?”전연우는 팔에 양복 외투를 걸쳤다. 원래 얼굴이 오만상이었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 봐.”차에 앉아 핸들을 잡은 채 서재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 전연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이건 일주일 뒤 주최되는 자선 파티 초대장이야. 그때 내가 사람을 보내 협조하게 할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겠지?”전연우는 초대장을 받았다. “의부님, 혹시 인가네를 끌어들일 생각이십니까?”“아니, 이건 두 집안의 정략결혼이야. 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가정을 꾸려야지. 지금으로서는 인가네가 너의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다.”“네, 의부님을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전연우는 무엇 때문인지 차를 세웠다. 백윤서는 이해가 안 가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 오빠, 왜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전연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백윤서를 끌어안고 그녀의 향긋한 동백꽃 냄새를 맡았다.백윤서는 흠칫하더니 몸이 뻣뻣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전연우와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전에 그들 사이에는 항상 큰 틈이 있는 것 같았고 아무도 그 틈을 넘을 수 있는 한 발자국을 내딛지 않았다. 설령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하지만 지금 백윤서는 전연우의 이상함을 감지하였다. 줄곧 자기 분수를 알고 있던 사람이 인제 와서 적극적으로 그녀를 안다니.차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백윤서는 천천히 몸을 느슨하게 풀더니 고개를 젖히고 턱을 전연우의 어깨에 얹은 채 두 손으로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연우오빠... 왜... 왜 그래요? 무슨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요?”얼마 지나지 않아 전연우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윤아, 내가 최근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네가 학교로 돌아가
장소월은 거의 빠른 속도로 답장하였다.「앞으로 또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날 불러. 내가 다 해줄게.」「알았어.」전연우는 위의 메시지를 보더니 눈빛에 많은 생각들이 담겼다.웬일로 장소월이 한 남자에게 메시지를 답장하는 모습을 본다.전연우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느낌이 들어 왜인지 모르게 불편했다.위의 메시지들은 모두 장소월의 핸드폰을 감시하여 얻은 내용이었다.지난번의 병원에서 장소월의 틈을 타서 몰래 감시하는 앱을 다운했던 것이었다.이어서 장소월은 강영수와 거의 3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 아이들의 일상적인 공유와 취미뿐이었다.무미건조했지만 전연우는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읽었다.그는 장소월이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이야기가 다 끝나가서야 전연우는 이에 대해 감흥이 없어졌다.시간을 보니, 8시 30분이었다. 전연우는 자기가 장소월한테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였다.같은 시각 장가네.장해진은 술자리에 나갔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장소월은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장해진은 워낙 밖에서 여자를 많이 만드는지라 그에게 있어서 어느 곳에서 밤을 지내든지 마찬가지였다.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후, 장소월은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했다.사실 그 밤떡은 모두 아줌마가 만든 것이고 그녀는 그냥 밀가루를 반죽하고 물을 부어 넣는 등, 옆에서 거들기만 하였다. 장소월은 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줌마가 너무 걱정해서 혹시라도 상처가 날까 봐 손을 대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전생에 전연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장소월은 요리부터 간식까지 미슐랭 요리사 못지않는 요리 솜씨를 발휘했었다.하긴 남자를 정복하려면 그 남자의 위부터 정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니...전연우는 확실히 그녀의 요리 솜씨에 붙잡혔고, 나중에는 입맛이 점점 까다로워져서, 밖에서 먹는 음식도 익숙지 않게 되었다.그녀가 요리를 배우게 된 것은 전연우의 위장병 때문이었는데 방금 장
차가운 달빛이 창가에 드리웠다. 장소월은 잠옷을 입고는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장소월은 평소에 밤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아까 깨어났을 때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주전자의 물을 다 마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장소월이 졸린 눈으로 돌아서자, 갑자기 소파에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 펄쩍 뛰었다.“악!”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은 일어나 벽에 있는 불을 켰다.눈 부신 불빛에 장소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야 비로소 사람이 똑똑히 보였다.“오빠가 왜 여기에 있어? 아직도 안 돌아간 거야?”거실에는 은은한 술 냄새가 났는데 전연우한테서 나는 냄새였다.‘방금 술자리에서 돌아왔나?’‘아니... 가서 백윤서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와서 뭐 하는 거지?’전연우는 원래 치밀한 사람이라, 그와 8년 동안 부부였는데도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도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말을 하고 있는데 전연우는 서서히 다가오면서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장소월의 뒤에는 벽이 있어 물러설 길이 없었다.그는 앞으로 걸어가서, 눈빛으로 여자아이를 힐끗 보았다.아무리 그의 가벼운 눈빛일지라도 장소월은 여전히 포착할 수 있었다. 전연우 눈 밑의 이상한 기색도.그의 호흡이 잠시 흐트러졌다.장소월이 아는 바에 의하면, 전연우는 함부로 하는 습관이 없다.백윤서가 사고가 나기 전뿐이었지만.그녀가 죽은 후, 전연우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취해 수많은 여자와 놀아났었다.장소월은 알고 있었다. 현재 장해진이 있는 한, 전연우는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장소월의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렸다. 눈치채지 못한 척 도망치려 했다.그러자 전연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벽을 짚더니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장소월은 순간 숨이 멎는 듯했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오빠... 오빠... 또 무슨 일 있어요?”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이는 점점 더 빨라졌다. 예리하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 눈빛은 아무리 두꺼운 갑옷을 입어도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길에서 장소월은 너무나도 낯선 다정함을 느꼈다. 왜일까, 백윤서를 마주할때만 보이던 그 눈빛으로 이 남자는 지금 왜 날 보고있는걸까. 그녀에게 익숙한 것은 얼음 같은 냉혹함, 혐오, 무시... 수년간 변하지 않던 그의 태도에 익숙해지려 하는 지금, 갑자기 나타난 다정함은 그녀를 순식간에 긴장케 했다. 어디 긴장 뿐일까, 행여나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하나하나 되새겨보는 장소월이였다.Comment by 만든 이: 랭혹하다 : ‘냉혹하다’의 북한어.북한어와 혼용하지 않도록 반드시 유의Comment by 만든 이: 긴장케 만들었다. - 번역체 문구둘 다 사용에는 무관하나 한국식 표현 지향Comment by 만든 이: 오타Comment by 만든 이: 搭配不当올바른 호응 : 행여나 ~ 한 건 아닐까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 윤이가 알면 참 좋아할 텐데. 그럼 넌? 진짜 강영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네? 그게 무슨...”연우의 한마디에 소월은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강영수가 왜 나오는 거지? 참, 오늘따라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니까. 당황함에 할 말을 잃은듯해 보이는 소월을 바라보던 연우는 뭔가 떠오른 듯 잡은 손을 놓았다. 순간 방금전의 따스함은 사라지고 전연우의 얼굴에는 늘 하던 그대로 차가움만이 남아있다. 마치 방금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착각인것마냥...“됐어,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쓸 필요 없어.”후. 조금은 긴장이 풀린 장소월의 머릿속엔 그저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던 그녀의 손목이 뜨겁고 거친 손에 잡혔다. 전연우였다.Comment by 만든 이: 맞춤법 오류Comment by 만든 이: 맞춤법 오류. 띄어쓰기“더 할 말이라도 있어요?”“배고파, 주방에 가서 뭐라도 좀 해와.”“...”그녀가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걸 전연우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면 하나조차 끓일 줄 모르는 소월에게 요리를 시키다니, 어딘가 단단히
장소월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바를 몰라 하며 방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힘껏 문을 닫고 나서 자물쇠까지 걸어버렸다.그녀는 문에 기대어 섰다. 떨리는 두 손은 끊임없이 입술을 닦아댔다. 마치 더러운 물건에라도 닿았던 것처럼 말이다.장소월의 첫 키스는 진작 술김을 빌어 전연우에게 줬다. 전연우가 그녀를 힘껏 밀어내던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다. 특히 혐오로 가득한 그 눈빛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장소월이 아니었고, 전연우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전연우와 닿았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수십 마리의 개미가 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장소월은 입술이 저릿저릿하니 감각이 사라진 다음에야 손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떻게 전연우의 몸 위로 넘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상식대로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전연우가 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심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장소월은 부단히 이건 사고일 뿐이라고,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다음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전연우의 얼굴로 가득했다.거실.전연우는 잔뜩 풀린 눈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채로 저도 모르게 그릇 안의 면을 전부 다 비웠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혹시 지금껏 요리를 못하는 척 한 건가? 에이, 설마... 그냥 어디에서 배웠겠지.’사실 전연우는 조금 전 일부러 장소월의 발을 걸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말이다. 예상 밖으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지금의 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백윤서 때문이 아닌 단순한 혐오와 공포 때문에 그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혹시 무언가 발견한 건가? 장소월... 너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줄곧 모든 것을 손쉽게 장악해
이튿날.장소월이 깨어났을 때 태양은 어느덧 밝게 떠 있었다. 그녀는 속옷과 옷을 갈아입고 나서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갔다.“아줌마, 오늘 아침 뭐예요?”아줌마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치며 대답했다.“연우 도련님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죽 끓이고 있어요. 저는 도련님한테 가져다드려야 하니까 아가씨는 직접 떠서 드세요.”장소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잖아요.”“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도련님이 안 돌아오는 줄 알고 이불을 싹 다 거뒀거든요. 먼지 앉을까 봐서요.”아줌마는 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집에 해열제가 없었네요. 빨리 나가서 사야겠어요. 아가씨, 혹시 시간 되시면 저 대신 도련님한테 죽 좀 가져다드릴 수 있어요?”“알겠어요, 아줌마. 죽은 저한테 맡기고 얼른 나가보세요. 오빠도 제가 보살펴 주고 있을게요.”사실 장소월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전연우가 아픈 것이 그녀와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아침 식사를 할 틈도 없이 죽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전연우의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노크했다.“오빠, 깼어요?”방 안에서는 기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콜록콜록... 들어와, 문 열려 있어.”장소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전연우뿐만 아니라 기성은도 있었다.전연우는 서류를 덮으면서 말했다.“오늘 회의는 조금 전 말했던 대로 미뤄 줘요. 이 프로젝트는 제가 계속 알아보고 있을게요. 기 비서는 일단 회사로 돌아가고,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저한테 연락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기성은은 가방을 들고 일어나더니 장소월을 향해 작게 묵례했다.“네가 어떻게 왔어? 아줌마는?”“해열제 사러 갔어요.”기성은이 떠난 다음 장소월은 죽 그릇을 침대 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쉬어요. 그리고 밥도 좀 먹고요.”“알았어. 일단 내려놔.”전연우는 여전히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쨍그랑!이때 위층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흠칫 놀라며 머리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위층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전연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말이다.그녀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연우의 안부부터 확인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전연우는 침대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잔뜩 흩어진 유리 조각을 주우려고 했다.“건드리지 마요, 제가 할게요. 오빠는 좀 쉬어야 해요.”장소월은 먼저 전연우의 베개를 정리해 주며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는 주섬주섬 깨진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과 유리 조각이 남지 않도록 세 번이나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마지막으로는 물기가 남지 않게 휴지로 다시 한 번 닦기도 했다.전연우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장소월의 모습을 바라봤다. 만약 직접 본 것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장소월이 글쎄 도우미 아줌마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예전의 장소월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집안일에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을 겪은 건가?’장소월이 이렇게 된 건 다 전연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연우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한 8년 동안 회사는 점점 더 발전해서 서울에 완전히 자리 잡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장소월은 예나 지금이나 집에서 전연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일 뿐이었다.그녀는 전업주부이다. 하지만 대부분 집안일을 도우미가 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없는 일도 찾아서 하면서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많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청소도 해보고 화초도 키워 봤다. 그리고 이웃사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한때는 여느 부잣집 사모님처럼 미용실도 가고 헬스장도 갔었다. 하지만 전연우에게 들키고 나서는 나가서 창피할 짓 하지 말고 집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소민아는 날이 완전히 밝아와서야 깨어났다. 그 순간 알람이 한 번 울리더니 배터리가 없어 핸드폰이 꺼져버렸다.회사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소민아는 다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침대 옆에 올려놓고 충전 선을 꼽고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핸드폰 전원이 자동으로 켜졌을 때, 소민아도 세수를 마쳤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로 내려갔다.그러던 중 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도우미와 마주쳤다.“이건 뭐예요?”“민아 아가씨, 이건 어르신에게 드릴 한약입니다. 어르신께선 아직 쉬어야 하시기 때문에 아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십니다.”소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고모부 지금 많이 나아지셨어요?”“네. 이젠 밥도 드실 수 있습니다.”“다행이네요.”명세진은 완성된 만두를 들고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민아야, 깼구나. 어서 와서 아침 먹어.”소민아는 아침 상이 이렇게나 풍성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모, 너무 많아요. 저 다 못 먹어요.”“많이 먹으렴.”“네.”소민아가 반쯤 먹었을 때, 명세진의 눈에 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회색 승용차가 보였다.“저거 누구 차지?”소민아도 호기심에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차 번호를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신이랑 씨?”도우미가 문을 열려 나갔고, 소민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이랑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어서 들어와요.”“민아 씨한테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요.”소민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배터리가 없어서 지금 충전 중이에요.”명세진이 미소를 머금고 걸어왔다.“이분이 바로 네가 어젯밤 말했던 신 총편집장님이시구나. 정말 유능하고 건실한 분이시네.”신이랑은 오늘 입술에 빨간빛이 감도는 것이 얼굴색이 꽤 괜찮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오늘은 민아 씨를 데리러 온 거예요. 아침밥은 이미 먹었습니다.”소민아는 그를 가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머리를 쥐
소민아는 명세진에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방금 통화한 사람은 제 회사 상사예요. 저 지금 구르미 시리즈라는 회사로 옮겨서 총편집장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월급은 예전과 같고요. 제 남자친구는 성세 그룹 총괄 비서예요. 다만 요즘은 다른 일이 있어 회사를 그만뒀어요.”“총괄 비서라고? 그럼 연봉도 엄청 높겠네?”“그건 물어본 적 없어요. 하지만 고아라 옆에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제가 가끔씩 가서 함께 있어 주곤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자주 못 만났어요.”명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민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시간 있으면 집에 데리고 와. 이 고모가 널 평생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봐야지.”명세진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참, 저번에 너희 엄마가 소개해준 남자는 어땠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그 질문에 소민아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최근 있었던 일을 대체적으로 나열해줄 뿐이었다.“일이 좀 복잡하게 되긴 했구나.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내 마음이 좋다는 걸 어떻게 해. 들어보니 너 그 기성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구나.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네 속을 이렇게 태우는지 궁금하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네가 접촉해본 명문가 도련님들도 적지 않았잖아. 성세 그룹 대표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다들 꽤 잘나가는 집안 자제들이었어.” 명세진이 말을 이어갔다.“그 강씨 집안은 어떻게 됐어? 예전 우리 소씨 집안은 강씨 집안 도움을 적잖게 받았었어. 요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구나. 저번... 설 인사를 하러 네 고모부와 함께 강씨 저택에 갔는데 이사를 갔는지 집은 텅 비어있었어. 그 장씨 아가씨한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줄곧 만날 기회가 없었어.”소민아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고모, 안 돼요. 지금은 심각한 상황이라 절대 강씨 집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입에 올리면 안 돼요. 특히 대표님,
소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요즘 출근하느라 바빴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꼭 시간 맞춰 들어와 같이 밥 먹을게요.”명세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놓아주었다.“그래.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을 꼭 잘 챙겨야 해. 이젠 집에 들어와서 살아. 너랑 현아 방은 오랫동안 비어있긴 했어도 내가 아주머니한테 매일 청소하라고 했어..”“고마워요, 고모. 역시 고모가 제일 좋아요.”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만 소민아는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민아는 욕실에서 샤워를 마쳤다. 그 후 그녀는 기성은에게 오늘 일과가 모두 담긴 문자를 보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오후엔 어떤 간식을 먹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역시 그 문자는 망망대해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예전 기성은과 이런 문제로 심술을 부렸던 나날들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너무나도 꿈 같은 시간이었다.소민아는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언제쯤이면 우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요?”“기성은 씨, 너무 보고 싶어요.”며칠 전에 보낸 문자에도 지금까지 답장이 없다.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정말 기성은과 사귀고 있는 건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띠링.”기성은에게서 온 문자일 거라 생각한 소민아는 빠르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신이랑의 문자였다.[언제 돌아와요? 민아 씨 주려고 삼계탕 끓여놨어요.]소민아는 문자를 쓰고 지우고 반복하다가 결국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답장했다.[오늘은 안 돌아갈 거예요. 이랑 씨, 저 앞으로 이곳에서 쭉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신이랑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민아 씨 귀찮게 해서 그래요? 미안해요.”“이랑 씨 때문이 아니에요. 집에 돌아와 고모와 고모부를 뵌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요. 정말 이랑 씨 때문은 아니에요. 삼계탕은 내일 가서 먹을
집에 돌아가는 길, 신이랑이 돌연 기성은을 언급했다.“그 사람이랑은 잘 사귀고 있어요?”핸들을 잡고 있던 소민아의 손이 순간 경직되었다.“네. 어젯밤 병원에서 성은 씨와 우연히 만났어요. 송시아가 총괄 비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소민아는 그 뒤의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직 대표님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있을 때 간호사들이 대표님의 상태에 대해 수군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이 일은 외부엔 비밀로 부쳤지만, 신이랑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신이랑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돌아가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소민아는 그와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필경 그녀는 본사에서 나와 구르미 시리즈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구르미 시리즈는 예전 대표님이 소월 언니를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현재 드라마화가 진행되고 있는 소설 모두 소월 언니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지금은 비록 변고가 생기긴 했지만, 그들 손에 맡겨진 일이니 멈출 수는 없다.소민아가 말했다.“아니요. 지금 맡은 일 너무 좋아요.”“월급 때문이라면 상의 가능해요.”그녀를 잡을 수만 있다면 신이랑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수도 있었다.소민아는 신이랑을 집에 데려다준 뒤 일을 처리하러 회사로 돌아갔다.설영우는 이미 사무실에 와 있었다.퇴근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을 때, 소민아는 신이랑의 문자를 받았다.가족 모임이 이번 주말로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4, 5일 정도 남아있었다.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소민아가 그의 문자에 답장했다.[알겠어요.]퇴근길, 소민아는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고모부가 의식을 찾았고, 고모는 그의 곁에서 간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명세진이 소민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 밖으로 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민아야, 우리 현아 어떻게 됐는지 알아? 강지훈은 대체 왜 그 아이를 다시 보내주
그중 살집이 두둑한 털보 남자가 히죽거리며 말했다.“누님, 이런 사소한 일에 친히 걸음하시게 했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때가 되면 저희가 이놈 껍질을 벗겨 누님의 분노를 달래드릴게요.”“전연우가 없으니까 엄청 막 나가네?”“누님, 누님도 아시잖아요. 형님은 지금 손을 씻은 상태라 푼돈을 벌 수밖에 없어요. 겨우겨우 가족들 먹여 살린다고요. 이놈이 겁도 없이 그 물건을 건드려서 저희까지 돈줄이 끊겨버렸어요. 누님...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솔직히 형님이 저희한테 추천한 일 꽤 괜찮아요. 시간도 힘도 별로 안 들어요. 하지만 벌이가 너무 적어서... 누님, 다른 방법 없을까요?”송시아가 손을 흔들자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간병인은 빠르게 자리를 비켜주었다.병실 문이 굳게 닫혔다...소민아는 신이랑의 병실로 들어오던 중 환청인지는 모르나 송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송시아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머릿속에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소민아는 신이랑에게 죽을 먹여주고 약을 가져다준 뒤 링거를 다 맞히고는 그의 외투를 걸치고 병실을 나섰다.신이랑이 물었다.“민아 씨, 돌아온 뒤로 계속 걱정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인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그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그는 지금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다. 지금의 그에게는 좋아하는 일인 소설을 마음껏 쓰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아직 채 못한 일이 있나 고민하느라 그랬어요. 오늘 이랑 씨는 회사에 못 나간다고 말해뒀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요.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이랑 씨가 저작권료 상의 때문에 출판사와 잡은 약속은 잠시 뒤로 미뤘어요.”소민아는 그를 부축해 걸어가며 핸드폰으로 메일을 보냈다.그날 있었던 일에 관해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신이랑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했다간 거부감만 더 살 뿐만 아니라 그녀가 천 리 밖으로 자신을 밀어낼 거라는
“충분히 생각한 거예요?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 없어요. 위험이 닥쳐도 내가 민아 씨 안전을 완전히 보장해줄 수는 없고요.”소민아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알아요. 저 그렇게 나약한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저 운도 항상 좋았어요. 아무도 저 다치게 못 해요.”기성은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윽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민아 역시 단호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성은이 입을 열었다.“그럼 나 대신 그 자리를 지켜줘요. 송시아의 손이 너무 높게 뻗지 못하도록.”“그게.. . 무슨 뜻이에요? 기성은 씨 대신 총괄 비서 자리에 앉으라는 건가요? 하지만 전 지금 회사 본사에서도 나왔어요. 안 된다고요!”“어떤 일은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민아 씨 스스로 뭘 해야 할지 알게 될 거예요.”소민아는 배시시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에 키스했다.“나 걱정하고 있다는 거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기성은 씨처럼 입이 지독한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아니면...”기성은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무슨 생각하는 거예요?”소민아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두 글자를 내뱉었다.기성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어떻게 그런 황당한 말을. 소민아 씨,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라는 거 잊었어요?”소민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기성은 씨가 있으니까 곧 결혼하겠죠.”소민아는 굶주린 늑대처럼 기성은이 입고 있는 옷 단추를 하나씩 풀어헤쳤다.“기성은 씨, 저 남자를 한번 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요. 다른 사람한테 듣기론 남자랑 자면 너무 짜릿하다고 하더라고요. 솔직하게 말해봐요. 다른 여자랑 잔 적 있어요?”“솔직히 저번 기성은 씨 집에서 밤을 보낼 때부터 잠자리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이번엔 꼭 할 거예요.”소민아는 허기진 암컷 호랑이처럼 차갑고 꼿꼿한 나무막대기 같은 기성은을 향해 군침을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