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길에서 장소월은 너무나도 낯선 다정함을 느꼈다. 왜일까, 백윤서를 마주할때만 보이던 그 눈빛으로 이 남자는 지금 왜 날 보고있는걸까. 그녀에게 익숙한 것은 얼음 같은 냉혹함, 혐오, 무시... 수년간 변하지 않던 그의 태도에 익숙해지려 하는 지금, 갑자기 나타난 다정함은 그녀를 순식간에 긴장케 했다. 어디 긴장 뿐일까, 행여나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하나하나 되새겨보는 장소월이였다.“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 윤이가 알면 참 좋아할 텐데. 그럼 넌? 진짜 강영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네? 그게 무슨...”연우의 한마디에 소월은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강영수가 왜 나오는 거지? 참, 오늘따라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니까. 당황함에 할 말을 잃은듯해 보이는 소월을 바라보던 연우는 뭔가 떠오른 듯 잡은 손을 놓았다. 순간 방금전의 따스함은 사라지고 전연우의 얼굴에는 늘 하던 그대로 차가움만이 남아있다. 마치 방금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착각인것마냥...“됐어,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쓸 필요 없어.”후. 조금은 긴장이 풀린 장소월의 머릿속엔 그저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던 그녀의 손목이 뜨겁고 거친 손에 잡혔다. 전연우였다.“더 할 말이라도 있어요?”“배고파, 주방에 가서 뭐라도 좀 해와.”“...”그녀가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걸 전연우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면 하나조차 끓일 줄 모르는 소월에게 요리를 시키다니, 어딘가 단단히 맛이 간 게 분명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연우는 뒤돌아 소파로 향했다. 그제야 장소월은 그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느꼈다.“하, 술이 문제지 술이 문제야 정말.”장소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공복에 술부터 들이붓는 습관은 어디서 기른 건지 참, 아침밥조차 통 먹으려 하지 않으니, 위가 정상일 리 만무했다.“어쩌겠어, 이게 다 내 팔자지 뭐. 저런 인간도 명색에 오빠라고...”말은 삐뚤
장소월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바를 몰라 하며 방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힘껏 문을 닫고 나서 자물쇠까지 걸어버렸다.그녀는 문에 기대어 섰다. 떨리는 두 손은 끊임없이 입술을 닦아댔다. 마치 더러운 물건에라도 닿았던 것처럼 말이다.장소월의 첫 키스는 진작 술김을 빌어 전연우에게 줬다. 전연우가 그녀를 힘껏 밀어내던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다. 특히 혐오로 가득한 그 눈빛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장소월이 아니었고, 전연우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전연우와 닿았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수십 마리의 개미가 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장소월은 입술이 저릿저릿하니 감각이 사라진 다음에야 손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떻게 전연우의 몸 위로 넘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상식대로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전연우가 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심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장소월은 부단히 이건 사고일 뿐이라고,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다음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전연우의 얼굴로 가득했다.거실.전연우는 잔뜩 풀린 눈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채로 저도 모르게 그릇 안의 면을 전부 다 비웠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혹시 지금껏 요리를 못하는 척 한 건가? 에이, 설마... 그냥 어디에서 배웠겠지.’사실 전연우는 조금 전 일부러 장소월의 발을 걸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말이다. 예상 밖으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지금의 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백윤서 때문이 아닌 단순한 혐오와 공포 때문에 그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혹시 무언가 발견한 건가? 장소월... 너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줄곧 모든 것을 손쉽게 장악해
이튿날.장소월이 깨어났을 때 태양은 어느덧 밝게 떠 있었다. 그녀는 속옷과 옷을 갈아입고 나서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갔다.“아줌마, 오늘 아침 뭐예요?”아줌마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치며 대답했다.“연우 도련님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죽 끓이고 있어요. 저는 도련님한테 가져다드려야 하니까 아가씨는 직접 떠서 드세요.”장소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잖아요.”“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도련님이 안 돌아오는 줄 알고 이불을 싹 다 거뒀거든요. 먼지 앉을까 봐서요.”아줌마는 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집에 해열제가 없었네요. 빨리 나가서 사야겠어요. 아가씨, 혹시 시간 되시면 저 대신 도련님한테 죽 좀 가져다드릴 수 있어요?”“알겠어요, 아줌마. 죽은 저한테 맡기고 얼른 나가보세요. 오빠도 제가 보살펴 주고 있을게요.”사실 장소월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전연우가 아픈 것이 그녀와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아침 식사를 할 틈도 없이 죽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전연우의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노크했다.“오빠, 깼어요?”방 안에서는 기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콜록콜록... 들어와, 문 열려 있어.”장소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전연우뿐만 아니라 기성은도 있었다.전연우는 서류를 덮으면서 말했다.“오늘 회의는 조금 전 말했던 대로 미뤄 줘요. 이 프로젝트는 제가 계속 알아보고 있을게요. 기 비서는 일단 회사로 돌아가고,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저한테 연락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기성은은 가방을 들고 일어나더니 장소월을 향해 작게 묵례했다.“네가 어떻게 왔어? 아줌마는?”“해열제 사러 갔어요.”기성은이 떠난 다음 장소월은 죽 그릇을 침대 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쉬어요. 그리고 밥도 좀 먹고요.”“알았어. 일단 내려놔.”전연우는 여전히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쨍그랑!이때 위층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흠칫 놀라며 머리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위층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전연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말이다.그녀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연우의 안부부터 확인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전연우는 침대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잔뜩 흩어진 유리 조각을 주우려고 했다.“건드리지 마요, 제가 할게요. 오빠는 좀 쉬어야 해요.”장소월은 먼저 전연우의 베개를 정리해 주며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는 주섬주섬 깨진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과 유리 조각이 남지 않도록 세 번이나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마지막으로는 물기가 남지 않게 휴지로 다시 한 번 닦기도 했다.전연우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장소월의 모습을 바라봤다. 만약 직접 본 것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장소월이 글쎄 도우미 아줌마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예전의 장소월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집안일에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을 겪은 건가?’장소월이 이렇게 된 건 다 전연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연우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한 8년 동안 회사는 점점 더 발전해서 서울에 완전히 자리 잡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장소월은 예나 지금이나 집에서 전연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일 뿐이었다.그녀는 전업주부이다. 하지만 대부분 집안일을 도우미가 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없는 일도 찾아서 하면서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많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청소도 해보고 화초도 키워 봤다. 그리고 이웃사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한때는 여느 부잣집 사모님처럼 미용실도 가고 헬스장도 갔었다. 하지만 전연우에게 들키고 나서는 나가서 창피할 짓 하지 말고 집
“당연히 괜찮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소월아.”전연우는 손을 뻗어 장소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장소월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걱정되죠.”장소월은 죽을 한술 떠서 전연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를 보살피는 일은 진작 몸에 익은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전연우의 눈빛은 장소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장소월은 빨리 죽을 다 먹이고 이곳에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 한 그릇을 다 먹이는 데에는 거의 20분이 걸렸다. 전연우가 천천히 먹는 데다가 자꾸 기침해서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얼마 후 아줌마가 돌아오자, 장소월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도련님, 체온을 체크해 보세요.”아줌마는 체온계를 들고 와서 전연우의 입에 물렸다.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은 3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아줌마는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안 되겠어요, 도련님. 얼른 병원으로 가요!”“병원은 귀찮아요. 일단 해열제를 먹어보고 다시 결정해요.”“알겠어요. 많이 힘드시면 곧바로 아가씨한테 말하세요. 도련님이 열이 펄펄 끓는 걸 알게 된다면 어르신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다. 장해진은 친딸인 장소월보다도 전여준을 더 아꼈기 때문에 이번 일로 인해 애꿎은 아줌마만 날벼락 맞을지도 몰랐다.“제가 잘 설명 해줄 테니까 괜찮아요. 오빠 곁에는 제가 있을게요. 그러니 아줌마는 다른 일을 하러 가요.”“알겠어요. 약은 반시간 후에 먹어야 해요. 그리고 따듯한 물을 많이 먹고 땀을 내봐요.”장소월도 감기 환자의 간병 방법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아줌마가 나간 다음 장소월은 전연우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첫째로 일단 그의 무릎에 있는 컴퓨터부터 치웠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아플 때는 그냥 쉬어요. 오빠가 지금 할 일은 쉬는 것뿐이에요.”장소월은 거의 강제적으로 전연우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눕힐 때 머리를
지나치게 리얼한 악몽 때문에 전연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떴다. 감정은 아직도 장소월을 잃은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숨은 탁탁 막혀서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고, 가슴은 미어지다 못해 칼에 찔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단순한 꿈으로 인해 이 정도의 반응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장소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 이해가 안 되는 것뿐이겠는가? 이는 황당하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깼어요?”귀가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다름 아닌 백윤서였다.전연우는 벽걸이 시계를 힐끗 봤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고 해도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백윤서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눈물을 흘리고 난 자국인 듯했다.“윤이야, 너 왜 학교 안 갔어?”백윤서는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역시 까먹었죠? 금요일에 저를 데리러 학교에 오기로 했었잖아요. 한참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길래 성은 오빠한테 전화 해봤더니, 오빠가 아프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미안해,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전연우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너무나도 리얼한 꿈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불편했다.“이제 좀 괜찮아요? 물 마실래요?”“괜찮아.”“알겠어요.”백윤서는 고통스러운 듯한 모습의 전연우를 보고 말없이 그의 손을 잡으며 곁을 지켰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전연우는 천천히 눈을 떠서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네.”“연우 도련님, 식사 시간이 됐어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아줌마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전연우는 가슴이 무거운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소월이는요?”“아가씨는 아래층에서 식사하고 계세요. 혹시 볼 일 있으세요? 제가 가서 모셔 올까요?”‘소월이는 갑자기 왜 찾는 거지? 아프고 나더니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전연우는 피곤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됐어요. 윤이야
아줌마에게 이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 자리로 짐 싸서 나가. 여태 많이 봐준 줄 알아.”아줌마가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알겠어요. 사장님.”장해진은 손에 들었던 회초리를 내팽개치고는 위층 안방으로 올라가 버렸다.장소월은 아주머니를 모시고 방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묵묵히 약을 찾아 조심스레 발라 주었다. 아줌마는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셨을까... 아주머니가 이 집안에 헌신한 세월이 얼만데, 아버지는 어찌 이리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지?아줌마가 소월이를 위로하며 말했다.“아가씨가 왜 눈물을 흘리세요. 저 괜찮잖아요.”“회초리에 맞았잖아요! 장해진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죠?”“쉿. 조용히 하세요.” 아줌마의 따스했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아가씨, 그러나 그분은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요.”소월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알겠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방에 돌아온 소월이의 눈에 띈 것은, 대문 앞에 주차해 있는 차 한 대였다. 조수석에는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렴풋하게 옆모습만 보였지만, 소월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담임이자 새어머니, 강만옥이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한껏 매혹적인 자세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장해진은 전연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장해진이 강만옥에게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 집도 돌아오지 않는 지경이라니.소월이는 떠나는 차를 응시하다 강만옥이 고개를 이리로 돌리자,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봤을까? 못 봤으면 좋겠는데...’전연우는 원래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강만옥과 그가 손을 잡은 걸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전연우는 보기와 다르게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녀가 의심 갈 행동을 하나라도 한다면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소월이는 물을 꺼내 따르고는 발걸음을 다그쳐 위층 안방으로 돌아왔다.백윤서가 다급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고는 말했다.“제가 한 그릇이라도 떠다 줄까요? 소월이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내가 갈게.” 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백윤서는 불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연우가 소월이와 단둘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말리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저 보내기로 했다.이 무렵, 소월이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침 자려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문 뒤편에 있던 전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이는 소월이가 유일하게 그에게 불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하지 않는다.“윤이가 수제비 만들었는데 같이 먹을래? 맛있어.”“저는...”소월이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우는 이미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서 냉기가 느껴졌기에 소월이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심장이 점차 쿵쾅쿵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숟가락으로 그릇 속의 수제비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먹을래, 아니면 내가 먹여줘?”“제... 제가 스스로 먹을게요.” 막 수제비를 담은 그릇은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릇을 받아 든 손가락이 몹시 뜨거워 났지만, 소월이는 티도 내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 형용할 수 없는 냉담함이 느껴졌다.“소월아, 혹시 요새 무슨 일 있니? 오빠한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자꾸 피하는 것 같네?”온화함을 가장한 태연한 말투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들어 소월이를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묶어놓는 듯했다.“혹시 있으면 오빠에게 말해줄래? 네가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심장이 멈춘 듯싶었다가, 또 견딜 수 없게 쿵쾅댔다. 숟가락을 든 소월이의 손이 떨려왔다.“아뇨... 없어요.”소월이가 목구멍으로 튀어나
“무슨 일 있으세요, 손님? 저 종업원 불러서 손님에게 서빙하게 할까요?” 웨이터가 서철용에게 물었다. 그는 서철용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서철용은 급히 손을 저었다. 그가 어떻게 배은란에게 서빙하라고 시키겠는가. 오히려 그가 배은란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의 마음속에는 약간의 분노가 일었다. 서민용은 왜 배은란을 이런 곳에서 일하게 내버려 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건 서민용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서철용의 감정은 복잡해졌고, 점차 모순으로 가득 찼다.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배은란을 만나 기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술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배은란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바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 배은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철용은 만감이 교차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데려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그에게는 배은란의 삶에 간섭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주호걸은 서철용의 이상을 눈치채고 물었다. “철용아, 왜 그래?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해졌어?” 서철용은 한숨을 내쉬고 배은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봐. 배은란 맞지?” 서철용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순간, 주호걸은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배은란이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야?” “서민용 이 천벌 받을 놈,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 서철용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서민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배은란과 사귀었다면, 적어도 그녀를 이런 곳에서 일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철용아, 일단 진정해.” 주호걸은 서철용이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봐 그의 팔을 붙잡았
대학 생활이 시작된 지 대략 2주가 지나도록 서철용은 배은란을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그녀와 서민용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밤 나가서 술이나 한잔할까?”핸드폰 너머로 주호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같은 도시에 있었다.술을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의 공통된 취미였다. 바로 이 취미 덕분에 두 사람은 우정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그래, 좋지.” 서철용은 웃으며 대답했다.그 역시 마침 술이 당기던 참이었다. 다만 주호걸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을 뿐이다.“학교 근처에 새로 생긴 바가 있는데, 예쁜 여자들이 많다고 하더라고. 한번 가볼래?” 주호걸이 제안했다.그는 서철용에게 여자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다.그가 계속 배은란만 마음에 품고 있는 건 원치 않았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배은란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이 학교에는 예쁜 여학생들이 많다. 배은란이 예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서철용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주호걸은 서철용이 하루빨리 배은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과 알콩달콩 사귀기를 바랐다.“주호걸, 너도 내 성격 알잖아.” 서철용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주호걸이 자신을 위해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배은란 말고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철용아, 네가 배은란 잊기 어려워한다는 거 알지만, 계속 과거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어. 밖으로 나와서 주변 세상을 둘러봐. 어쩌면 더 좋은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어.” 주호걸은 차분히 서철용을 설득했다.서철용은 잠시 말없이 사색에 빠졌다. 확실히 주호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하염없이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사는 건 옳지 않다. 하루빨리 마음이 문을 열고 나와 새로운 삶을 마주해야 한다.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망설임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좋아, 주호걸. 오늘 밤 그 새로 생긴 바에 한번 가보자.”서철용은 마침내 결심했다.이건 새로운 길로
그는 배은란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건 그에게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니 말이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철용은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호걸에게 전화를 걸었다.“뭐야?” “너 돼지냐? 이제야 일어났어?”전화기 너머에서 주호걸의 욕설이 들려왔다.“농구장에서 기다려. 나와서 농구나 하자.”어제의 서철용은 그야말로 활기 하나 없이 축 처져 있었다.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주호걸은 농구를 하자며 서철용을 불러냈다.“좋아, 지금 바로 갈게.” 서철용은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운동복을 입고 농구장으로 향했다.따스한 햇볕이 농구 코트에 쏟아지고 있으니, 서철용의 기분도 더불어 밝아졌다.주호걸은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철용아, 왔어?” 주호걸은 서철용을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응, 주호걸, 어제 해준 말 고마웠어.” 서철용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필요 없어.” 주호걸은 웃으며 서철용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두 사람은 농구를 시작했고, 서철용의 기분도 점점 좋아졌다.그 역시 자신에겐 기나긴 미래가 펼쳐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그는 열심히 노력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생각이었다.농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식탁에서, 서철용은 주호걸에게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했다.“주호걸, 나 의대에 가기로 결심했어.” 서철용이 진지하게 말했다.“응, 나는 너 응원해.” 주호걸은 서철용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는 서철용이 올바른 선택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열심히 노력해 자신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비록 의학 공부가 서철용의 처음 꿈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배은란 때문에 한 번 진로를 바꾸었다. 또다시 바꾸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어느덧 개학 첫날이 되었다.주호걸은 의대에 지원하지 않았기에 서철용 혼자 대학교에
번외편 5: 최초의 꿈“미치지 않았어.” 서철용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나는 의대에 가고 싶지 않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에게 술을 따랐다.그는 자신의 결정이 미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결정을 끝냈다.그는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는 생각이었다.“철용아, 너...” 주호걸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서철용을 쳐다보았다.그는 서철용이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결심한 일은 종래로 번복하지 않는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했다.친구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난 네가 네 최초의 꿈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최초의 꿈이라...서철용은 생각에 잠겼다.그는 당연히 자신의 최초의 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배우고 싶어 했다.의대를 지망했던 건 오로지 배은란 때문이다.“주호걸,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서철용이 나지막이 말했다.“하지만 난 정말 더 이상 배은란을 위해 살고 싶지 않아.”그 순간 서철용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미친 결정이긴 하지만, 이미 준비를 마쳤다.그는 자신의 꿈을 좇으며 원하는 삶을 살 것이다.“자꾸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야.” 주호걸이 말했다.“이왕 이 길을 선택하고 노력을 기울여 성과까지 따낸 이상, 계속 걸어가야 해. 사소한 일 때문에 포기하는 건 내가 아는 서철용답지 않아.”서철용은 주호걸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그는 주호걸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 주호걸은 항상 그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주호걸은 그의 결정을 반대하고 있다.“주호걸, 너...” 서철용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철용아, 너 지금 기분 안 좋다는 거 알아. 또
서철용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일 맞지.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의미 없어.” “무슨 말이야?” 주호걸이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랑 사귄대.” 서철용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디야?” 주호걸의 목소리도 무거워졌다. 역시 아무 이유 없이 그를 찾아 술을 마시자고 할 서철용이 아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KK 술집으로 가자.” 서철용은 자신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슬픔만 안겨준 이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다. KK 술집은 서철용과 주호걸의 비밀 아지트였다. 그들은 종종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호걸은 술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앉아 있는 서철용을 발견했다. 서철용은 이미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에 약간의 취기가 감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주호걸은 서철용의 옆에 앉아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 안 마셨어.” 서철용은 또다시 자신의 컵에 술을 따랐다. 주호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철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철용아, 너...” 주호걸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서철용이 말을 끊었다. “주호걸, 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가 봐.” 서철용은 고개를 들어 허탈한 얼굴로 주호걸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배은란은 한 번도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병신 같은 놈. 고백도 못 하고!” 서철용은 괴로움을 못 이겨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주호걸의 눈에 서철용은 너무나도 안타까워 보였다. 그는 서철용이 배은란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서철용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했다. “철용아, 네 잘못이 아니야.” 주호걸은 서철용의 어깨를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그 말에 서철용의 얼굴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쁜 일이
번외편 4“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서철용은 합격 문자가 와 있는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그들의 교제 소식에 비하면, 그의 것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닌 것 같았다.어쩌면 서철용 혼자에게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 배은란, 서민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 수도 있다.두 사람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사랑을 키워갈 테니, 그는 그저 불필요한 존재가 될 뿐이다.그는 잠시 이 대학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들었다.“너 나한테 전화해서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했었잖아.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배은란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서철용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녀는 서철용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배은란 또한 서철용이 왜 이토록 풀이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넋을 잃은 사람처럼 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아, 너희들이 이어졌다는 거 들으니까 너무 기뻐서 그래. 그에 비하면 내 일은 별거 아닌 것 같아.” 서철용은 무심한 듯 손을 흔들었다.“됐어, 너희들 먼저 가.” 그는 더 이상 두 사람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계속 이 시간이 이어지다간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전락할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지칠 만큼 지쳐 더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건 무리다.“이상하네.” 배은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녀는 더는 서철용에게 캐묻지 않고 서민용의 팔짱을 끼고 떠났다.서철용은 씁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배은란은 분명 그가 의대에 지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 그녀 역시 이미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의대에 합격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배은란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전혀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그런 그녀에게 그의 합격 소식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여보세요,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서철
배은란이‘우리’라고 했다.‘내’가 아니라.“맞아, 우리 사귀기로 했어.” 배은란이 서민용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서철용은 눈앞이 아찔해지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배은란과 서민용이 사귄다고?배은란이 줄곧 서민용을 좋아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그의 마음은 실망감과 분함으로 가득 찼다. 왜 서민용은 되고, 그는 안 된단 말인가.하지만 그 또한 감정이라는 것은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못마땅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는 배은란과 서민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해.”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음은 불편했어도, 진심으로 배은란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배은란과 서민용 모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 배은란이 말했다. “고마워, 철용아. 사실 우리가 이렇게 되게 된 건, 네 덕분이기도 해.”서철용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배은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배은란이 말을 이어갔다. “전에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계속 망설였었거든. 네가 날 위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어.”배은란도 자신에 대한 서철용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 마음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아 잠시 외면했을 뿐이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해 주는좋아해주는 사람,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었다.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서철용을 본 그녀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선명해졌다.서철용을 선택했다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하여 수능이 끝난 후 서민용에게 그녀의 진심을 고백했다.다행히 그녀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서민용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내 덕분에?” 서철용은 더욱 의아해졌다.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덕분에. 네가 날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 보니까 나 역시 나
“은란아, 집에 있니?” 그는 좋은 소식을 알려주려 배은란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에 있어. 무슨 일이야?” 방금 합격 문자를 받은 배은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에게 좋은 소식 하나 알려주고 싶어서.” 서철용은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곧 배은란과 같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동안 했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다.그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앞으로는 다른 걱정 없이 그녀와 함께 대학 생활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마침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저녁에 같이 밥 먹을래?” 배은란이 말했다.오늘 그녀 또한 나누고 싶은 좋은 소식이 있었던 차에 마침 서철용이 전화를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초대한 것이다.“그래, 그래, 좋아.” 배은란의 제안에 서철용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그 역시 배은란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거절당할까 봐 망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런데 배은란이 먼저 그와 만나겠다고 하다니.혹시 그녀도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나중에 위치 보내줄게.” 배은란은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서철용에게 오후 시간은 굼벵이처럼 너무나도 느리게 흘렀다.그는 특별히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고 헤어스타일도 바꾸며 최고 멋진 모습으로 배은란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했다.저녁, 서철용은 일찌감치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기대와 긴장으로 가득 찬 채 의대 합격 문자가 담긴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그는 끊임없이 시계를 바라보며 배은란이 오기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흰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청순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서철용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보고 있으면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예뻤다.하지만 몇 초 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서민용이 왜 배은란과 함께 왔단 말인가?“여긴 왜 왔어?” 서철용은 불편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서민용에게 물
“응, 결정했어.”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건한 눈빛으로 배은란을 바라봤다.배은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철용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럼 지켜보겠어.” 배은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 마, 그때도 네 옆자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서철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오직 서철용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의학 공부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그가 진짜 좋아하는 분야는 컴퓨터공학이었다.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것이 그의 오랜 꿈이었다.하지만 배은란 앞에서는 그 어떤 꿈도 뒷전이었다.배은란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중요하고 큰 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뭐?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한의준은 서철용의 결정을 듣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화들짝 놀랐다.그가 과외해준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의대에 도전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네.” 서철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는 한의준을 바라보며 물었다.서철용 또한 의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하면 한의준이 많이 놀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지만 시도한다면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배은란 곁에 머물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나 다른 전공에 지원해도 되잖아. 쉬운 길이 있는데 왜 굳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거야.”서철용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는 알지만, 한의준은 그를 말리고 싶었다.그가 어찌 서철용에 대해 모르겠는가.정확히 말하면 그는 의학 분야에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평소 병원에 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그가 매일 의학 관련 일에 파묻혀 있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더 이상 말리지 말아요. 그냥 내가 의대에 붙을 수 있도록 과외만 잘해주면 돼요.” 서철용은 한의준을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그가 자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