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길에서 장소월은 너무나도 낯선 다정함을 느꼈다. 왜일까, 백윤서를 마주할때만 보이던 그 눈빛으로 이 남자는 지금 왜 날 보고있는걸까. 그녀에게 익숙한 것은 얼음 같은 냉혹함, 혐오, 무시... 수년간 변하지 않던 그의 태도에 익숙해지려 하는 지금, 갑자기 나타난 다정함은 그녀를 순식간에 긴장케 했다. 어디 긴장 뿐일까, 행여나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하나하나 되새겨보는 장소월이였다.“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거 윤이가 알면 참 좋아할 텐데. 그럼 넌? 진짜 강영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네? 그게 무슨...”연우의 한마디에 소월은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강영수가 왜 나오는 거지? 참, 오늘따라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니까. 당황함에 할 말을 잃은듯해 보이는 소월을 바라보던 연우는 뭔가 떠오른 듯 잡은 손을 놓았다. 순간 방금전의 따스함은 사라지고 전연우의 얼굴에는 늘 하던 그대로 차가움만이 남아있다. 마치 방금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착각인것마냥...“됐어, 아무것도 아냐, 신경 쓸 필요 없어.”후. 조금은 긴장이 풀린 장소월의 머릿속엔 그저 빨리 이 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던 그녀의 손목이 뜨겁고 거친 손에 잡혔다. 전연우였다.“더 할 말이라도 있어요?”“배고파, 주방에 가서 뭐라도 좀 해와.”“...”그녀가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걸 전연우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면 하나조차 끓일 줄 모르는 소월에게 요리를 시키다니, 어딘가 단단히 맛이 간 게 분명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연우는 뒤돌아 소파로 향했다. 그제야 장소월은 그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느꼈다.“하, 술이 문제지 술이 문제야 정말.”장소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공복에 술부터 들이붓는 습관은 어디서 기른 건지 참, 아침밥조차 통 먹으려 하지 않으니, 위가 정상일 리 만무했다.“어쩌겠어, 이게 다 내 팔자지 뭐. 저런 인간도 명색에 오빠라고...”말은 삐뚤
장소월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바를 몰라 하며 방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힘껏 문을 닫고 나서 자물쇠까지 걸어버렸다.그녀는 문에 기대어 섰다. 떨리는 두 손은 끊임없이 입술을 닦아댔다. 마치 더러운 물건에라도 닿았던 것처럼 말이다.장소월의 첫 키스는 진작 술김을 빌어 전연우에게 줬다. 전연우가 그녀를 힘껏 밀어내던 장면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났다. 특히 혐오로 가득한 그 눈빛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장소월이 아니었고, 전연우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다.전연우와 닿았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수십 마리의 개미가 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장소월은 입술이 저릿저릿하니 감각이 사라진 다음에야 손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떻게 전연우의 몸 위로 넘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상식대로라면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전연우가 취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의심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장소월은 부단히 이건 사고일 뿐이라고,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다음에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전연우의 얼굴로 가득했다.거실.전연우는 잔뜩 풀린 눈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채로 저도 모르게 그릇 안의 면을 전부 다 비웠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천상의 맛이었다.‘혹시 지금껏 요리를 못하는 척 한 건가? 에이, 설마... 그냥 어디에서 배웠겠지.’사실 전연우는 조금 전 일부러 장소월의 발을 걸었다.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말이다. 예상 밖으로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지금의 장소월은 전연우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진저리를 쳤다.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백윤서 때문이 아닌 단순한 혐오와 공포 때문에 그와 거리를 두려는 것이었다.‘혹시 무언가 발견한 건가? 장소월... 너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줄곧 모든 것을 손쉽게 장악해
이튿날.장소월이 깨어났을 때 태양은 어느덧 밝게 떠 있었다. 그녀는 속옷과 옷을 갈아입고 나서 하품하며 계단을 내려갔다.“아줌마, 오늘 아침 뭐예요?”아줌마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돌아치며 대답했다.“연우 도련님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죽 끓이고 있어요. 저는 도련님한테 가져다드려야 하니까 아가씨는 직접 떠서 드세요.”장소월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잖아요.”“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도련님이 안 돌아오는 줄 알고 이불을 싹 다 거뒀거든요. 먼지 앉을까 봐서요.”아줌마는 죽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집에 해열제가 없었네요. 빨리 나가서 사야겠어요. 아가씨, 혹시 시간 되시면 저 대신 도련님한테 죽 좀 가져다드릴 수 있어요?”“알겠어요, 아줌마. 죽은 저한테 맡기고 얼른 나가보세요. 오빠도 제가 보살펴 주고 있을게요.”사실 장소월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다. 전연우가 아픈 것이 그녀와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장소월은 아침 식사를 할 틈도 없이 죽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전연우의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노크했다.“오빠, 깼어요?”방 안에서는 기침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콜록콜록... 들어와, 문 열려 있어.”장소월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전연우뿐만 아니라 기성은도 있었다.전연우는 서류를 덮으면서 말했다.“오늘 회의는 조금 전 말했던 대로 미뤄 줘요. 이 프로젝트는 제가 계속 알아보고 있을게요. 기 비서는 일단 회사로 돌아가고, 무슨 일 있으면 다시 저한테 연락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기성은은 가방을 들고 일어나더니 장소월을 향해 작게 묵례했다.“네가 어떻게 왔어? 아줌마는?”“해열제 사러 갔어요.”기성은이 떠난 다음 장소월은 죽 그릇을 침대 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아프면 일하지 말고 쉬어요. 그리고 밥도 좀 먹고요.”“알았어. 일단 내려놔.”전연우는 여전히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한
쨍그랑!이때 위층에서 갑자기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장소월은 흠칫 놀라며 머리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바로 위층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전연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면서 말이다.그녀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연우의 안부부터 확인했다.“오빠, 무슨 일 있어요?”전연우는 침대에 앉은 채로 허리를 굽혀 바닥에 잔뜩 흩어진 유리 조각을 주우려고 했다.“건드리지 마요, 제가 할게요. 오빠는 좀 쉬어야 해요.”장소월은 먼저 전연우의 베개를 정리해 주며 그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는 주섬주섬 깨진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과 유리 조각이 남지 않도록 세 번이나 바닥을 쓸고 닦았다. 마지막으로는 물기가 남지 않게 휴지로 다시 한 번 닦기도 했다.전연우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장소월의 모습을 바라봤다. 만약 직접 본 것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말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장소월이 글쎄 도우미 아줌마가 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예전의 장소월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집안일에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을 겪은 건가?’장소월이 이렇게 된 건 다 전연우 때문이었다.장소월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연우와 결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한 8년 동안 회사는 점점 더 발전해서 서울에 완전히 자리 잡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장소월은 예나 지금이나 집에서 전연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신세일 뿐이었다.그녀는 전업주부이다. 하지만 대부분 집안일을 도우미가 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없는 일도 찾아서 하면서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많기 마련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청소도 해보고 화초도 키워 봤다. 그리고 이웃사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한때는 여느 부잣집 사모님처럼 미용실도 가고 헬스장도 갔었다. 하지만 전연우에게 들키고 나서는 나가서 창피할 짓 하지 말고 집
“당연히 괜찮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소월아.”전연우는 손을 뻗어 장소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장소월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걱정되죠.”장소월은 죽을 한술 떠서 전연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를 보살피는 일은 진작 몸에 익은 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전연우의 눈빛은 장소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반대로 장소월은 빨리 죽을 다 먹이고 이곳에서 나갈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죽 한 그릇을 다 먹이는 데에는 거의 20분이 걸렸다. 전연우가 천천히 먹는 데다가 자꾸 기침해서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얼마 후 아줌마가 돌아오자, 장소월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도련님, 체온을 체크해 보세요.”아줌마는 체온계를 들고 와서 전연우의 입에 물렸다. 잠시 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열은 39도까지 올라가 있었다.아줌마는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안 되겠어요, 도련님. 얼른 병원으로 가요!”“병원은 귀찮아요. 일단 해열제를 먹어보고 다시 결정해요.”“알겠어요. 많이 힘드시면 곧바로 아가씨한테 말하세요. 도련님이 열이 펄펄 끓는 걸 알게 된다면 어르신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장소월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다. 장해진은 친딸인 장소월보다도 전여준을 더 아꼈기 때문에 이번 일로 인해 애꿎은 아줌마만 날벼락 맞을지도 몰랐다.“제가 잘 설명 해줄 테니까 괜찮아요. 오빠 곁에는 제가 있을게요. 그러니 아줌마는 다른 일을 하러 가요.”“알겠어요. 약은 반시간 후에 먹어야 해요. 그리고 따듯한 물을 많이 먹고 땀을 내봐요.”장소월도 감기 환자의 간병 방법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아줌마가 나간 다음 장소월은 전연우를 보살피기 시작했다. 첫째로 일단 그의 무릎에 있는 컴퓨터부터 치웠다.“너 지금 뭐 하는 거야?”“아플 때는 그냥 쉬어요. 오빠가 지금 할 일은 쉬는 것뿐이에요.”장소월은 거의 강제적으로 전연우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눕힐 때 머리를
지나치게 리얼한 악몽 때문에 전연우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떴다. 감정은 아직도 장소월을 잃은 그때에 머물러 있었다. 숨은 탁탁 막혀서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고, 가슴은 미어지다 못해 칼에 찔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단순한 꿈으로 인해 이 정도의 반응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장소월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따라 죽으려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 이해가 안 되는 것뿐이겠는가? 이는 황당하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의 일이었다.“깼어요?”귀가에서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는 다름 아닌 백윤서였다.전연우는 벽걸이 시계를 힐끗 봤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고 해도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내가 이렇게 오래 잤다고?’백윤서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눈물을 흘리고 난 자국인 듯했다.“윤이야, 너 왜 학교 안 갔어?”백윤서는 약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역시 까먹었죠? 금요일에 저를 데리러 학교에 오기로 했었잖아요. 한참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길래 성은 오빠한테 전화 해봤더니, 오빠가 아프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미안해,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전연우는 눈을 감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너무나도 리얼한 꿈 때문에 아직도 가슴이 불편했다.“이제 좀 괜찮아요? 물 마실래요?”“괜찮아.”“알겠어요.”백윤서는 고통스러운 듯한 모습의 전연우를 보고 말없이 그의 손을 잡으며 곁을 지켰다.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전연우는 천천히 눈을 떠서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네.”“연우 도련님, 식사 시간이 됐어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아줌마가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전연우는 가슴이 무거운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소월이는요?”“아가씨는 아래층에서 식사하고 계세요. 혹시 볼 일 있으세요? 제가 가서 모셔 올까요?”‘소월이는 갑자기 왜 찾는 거지? 아프고 나더니 어디 이상해진 거 아니야?’전연우는 피곤한 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됐어요. 윤이야
아줌마에게 이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 자리로 짐 싸서 나가. 여태 많이 봐준 줄 알아.”아줌마가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알겠어요. 사장님.”장해진은 손에 들었던 회초리를 내팽개치고는 위층 안방으로 올라가 버렸다.장소월은 아주머니를 모시고 방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묵묵히 약을 찾아 조심스레 발라 주었다. 아줌마는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셨을까... 아주머니가 이 집안에 헌신한 세월이 얼만데, 아버지는 어찌 이리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지?아줌마가 소월이를 위로하며 말했다.“아가씨가 왜 눈물을 흘리세요. 저 괜찮잖아요.”“회초리에 맞았잖아요! 장해진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죠?”“쉿. 조용히 하세요.” 아줌마의 따스했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아가씨, 그러나 그분은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요.”소월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알겠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방에 돌아온 소월이의 눈에 띈 것은, 대문 앞에 주차해 있는 차 한 대였다. 조수석에는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렴풋하게 옆모습만 보였지만, 소월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담임이자 새어머니, 강만옥이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한껏 매혹적인 자세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장해진은 전연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장해진이 강만옥에게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 집도 돌아오지 않는 지경이라니.소월이는 떠나는 차를 응시하다 강만옥이 고개를 이리로 돌리자,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봤을까? 못 봤으면 좋겠는데...’전연우는 원래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강만옥과 그가 손을 잡은 걸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전연우는 보기와 다르게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녀가 의심 갈 행동을 하나라도 한다면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소월이는 물을 꺼내 따르고는 발걸음을 다그쳐 위층 안방으로 돌아왔다.백윤서가 다급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고는 말했다.“제가 한 그릇이라도 떠다 줄까요? 소월이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내가 갈게.” 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백윤서는 불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연우가 소월이와 단둘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말리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저 보내기로 했다.이 무렵, 소월이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침 자려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문 뒤편에 있던 전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이는 소월이가 유일하게 그에게 불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하지 않는다.“윤이가 수제비 만들었는데 같이 먹을래? 맛있어.”“저는...”소월이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우는 이미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서 냉기가 느껴졌기에 소월이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심장이 점차 쿵쾅쿵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숟가락으로 그릇 속의 수제비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먹을래, 아니면 내가 먹여줘?”“제... 제가 스스로 먹을게요.” 막 수제비를 담은 그릇은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릇을 받아 든 손가락이 몹시 뜨거워 났지만, 소월이는 티도 내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 형용할 수 없는 냉담함이 느껴졌다.“소월아, 혹시 요새 무슨 일 있니? 오빠한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자꾸 피하는 것 같네?”온화함을 가장한 태연한 말투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들어 소월이를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묶어놓는 듯했다.“혹시 있으면 오빠에게 말해줄래? 네가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심장이 멈춘 듯싶었다가, 또 견딜 수 없게 쿵쾅댔다. 숟가락을 든 소월이의 손이 떨려왔다.“아뇨... 없어요.”소월이가 목구멍으로 튀어나
“저 졸려요. 의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잠들어 있을 테니까 검사 못 받을 거예요!”한동안 강지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소현아는 그가 갔을 거라 생각하고 이불을 살짝 걷어 눈만 내놓고 주위를 살펴보았다.하지만 강지훈의 음산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느낌에 힘껏 몸을 움츠렸다.“다, 당신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부러 저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죠? 저 안 그래도 바보인데 이러면 더 멍청해질지도 모른다고요!”강지훈은 몸을 기울여 코끝을 그녀의 코에 가져갔다.“괜찮아졌으면 아까 하던 일 마저 해야겠어. 내 몸에 토해놓고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소현아는 이불 속에 온몸을 웅크리고 앉아 동그란 눈만 내놓고 있었다.“토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분명히 불편하다고 말했는데 당신이 억지로 안고 있었던 거잖아요. 꾹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토한 거예요.”강지훈은 그녀의 속눈썹이 유난히 곱슬거린다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아 흥미로운 듯 꼼지락거렸다.소현아는 그가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에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화내지 말아요. 그냥 비긴 거로 해요. 어차피 당신도 제 몸에 더러운 거 묻힌 적 있잖아요. 다음에 또 그랬을 땐 안 때릴게요.”그녀는 강지훈의 하반신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말했다.강지훈의 움직임이 멈추었다.수 없는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이렇게 순진무구한 말투로 그 행동을 당당하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는 위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게 다야?”소현아는 얼굴에 경계심을 가득 드러낸 채 더욱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와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다, 당신 또 뭘 하고 싶은 건데요? 현아 때리면 안 돼요.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아기가 무서워할 거예요!”강지훈의 눈에서 장난기가 점차 사라지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피어올랐다.“강지훈 씨,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줄래요? 당신 몸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토할 것 같아요.”소현아가 갑
온몸에 토사물을 뒤집어쓴 강지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머리 위에서 소현아는 계속하여 토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도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몹시 괴로운 모양이었다.강지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데려갔다.엉망진창이 된 바닥과 자신의 몸을 확인한 강지훈의 몸에서 오싹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주... 주인님.”규영과 미진은 전화 한 통에 달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정리된 후였지만 주변을 맴도는 살기는 여전히 무시무시했다.“저녁에 대체 뭘 먹인 거야!” 강지훈이 소리쳤다.규영과 미진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그냥 중국 요리 몇 가지였습니다. 아가씨께서 좋아하는 음식이라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드셨습니다.”강지훈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장 요리사 불러와. 너희 둘은 알아서 벌을 받을 준비 하고.”곧이어 요리사부터 식재료 구매 담당과 음식을 나르는 도우미까지 모두 불려왔다. 그 누구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얼마 후 소현아는 마침내 구토를 멈추고 창백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너무 힘들어 눈물까지 글썽거렸고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아까 규영 씨랑 미진 씨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소현아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강지훈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처벌받으러 갔어.”소현아는 못마땅한 듯 그를 쏘아봤다. “왜 벌을 줘요? 제가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건데. 배가 불편한데도 아기가 노는 거라고 착각해서 계속 먹었던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아무 잘못 없어요!”규영과 미진은 그녀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강지훈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강지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 평소에도 많이 먹었잖아. 언제 이렇게 심하게 토한 적 있었어?”소현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평소에도 아주 많이 먹는다. 오
소현아는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단순히 아기가 뱃속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하며 입을 크게 벌려 음식을 삼켰다.그렇게 한 술씩 떠먹다 보니 어느덧 세 사람 몫의 음식을 모두 비워냈다. 그러고는 꺼억 트림까지 내뱉었다.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에 사람들은 덩달아 만족감을 느꼈다.특히 직접 그녀에게 음식을 먹여준 미진은 벅찬 성취감까지 느끼는 듯했다.“오늘은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나왔나 봐요. 기억해뒀다가 요리사님께 말씀드려서 앞으로 많이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요.”소현아는 급기야 목구멍까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먹었던 음식들이 당장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는 애써 눌러 참으며 진지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저는 뭐든지 다 잘 먹어요. 가리는 거 없어요. 다만 요즘 기분이 안 좋아서, 집에 가고 싶어서 밥을 안 먹는 거예요.”규영과 미진이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방문이 활짝 열렸다.강지훈이 제복을 입고 검은색 군화를 신은 채 매서운 냉기를 휘감으며 들어왔다.“주인님.”규영과 미진은 즉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공손하게 인사했다.강지훈은 곧장 소현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가에 묻은 기름때를 발견하고는 휴지로 닦아주었다.“오늘 많이 먹었어?”규영과 미진이 대답했다.“네. 모두 드셨습니다.”강지훈은 텅 빈 식판을 힐끗 보고는 명령했다.“나가 봐.”곧이어 방 안에는 그들 둘만 남게 되었다.강지훈은 외투를 벗고 셔츠 차림으로 성큼성큼 침대 곁으로 걸어가 앉았다.“이리 와.”소현아는 배를 감싸 안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싫어요. 당신 손이 닿으면 너무 아프단 말이에요. 아기도 당신 싫어해요. 매번 당신이 만질 때마다 발로 찬다고요. 발로 차면 배가 너무 아파요.”강지훈은 매일 총을 잡고 있는지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런 손이 얇고 부드러운 피부에 닿았으니 무척이나 거칠고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더욱이 그는 요즘 그녀의 배를 만지는 것에 푹 빠져버렸다. 만질 때마다 너무 아파 미칠 지경이었
북경 감옥.소현아가 돌아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계속되는 그녀의 탈출 시도에 강지훈은 그녀를 독방에 가두라고 명령했다.“아가씨, 오늘은 거의 드시지 않았네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 만들었는데, 입맛이 돌 거예요. 조금이라도 드세요.”규영과 미진은 식판을 들고 들어와 창가에 앉아있는 그녀를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어르고 달래고 있었다.소현아는 탕수육이라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지만, 여전히 우울감에 젖어있는 척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싫어요. 배 안 고파요. 집에 갈 거예요. 강지훈 씨가 집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따라왔단 말이에요.”규영과 미진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당시 차 안에서 소현아가 너무 강력하게 저항했던 탓에 강지훈은 행여 아이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아가씨가 안 드시더라도, 뱃속 아기는 먹어야 하잖아요.”“요 며칠 드시는 양이 예전보다 훨씬 적으세요. 오늘도 안 드시면 저희는 주인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그 말에 소현아는 즉시 몸을 돌렸다. 통통한 볼엔 불만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먹을게요! 먹겠다고요! 강지훈한테 말하지 마세요! 그 사람 엄청 무섭단 말이에요! 임신했는데도 자꾸만 저랑 자려고 하고... 매번 그 짓을 하고 나면 배가 아파 미치겠어요...”소현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봤다.“규영 씨, 미진 씨, 제 뱃속에 있는 아기 잘못되진 않았겠죠?”너무나도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규영과 미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한편으로는 서슴없는 잠자리 고백에 얼굴이 화끈거려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임신한 지 시간이 꽤 지난 지라 적당한 성관계는 가능하지만, 주인님의 난폭한 행동에 정말로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소현아는 그들이 들고 있는 음식에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