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에게 이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 자리로 짐 싸서 나가. 여태 많이 봐준 줄 알아.”아줌마가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알겠어요. 사장님.”장해진은 손에 들었던 회초리를 내팽개치고는 위층 안방으로 올라가 버렸다.장소월은 아주머니를 모시고 방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묵묵히 약을 찾아 조심스레 발라 주었다. 아줌마는 얼마나 아프고 억울하셨을까... 아주머니가 이 집안에 헌신한 세월이 얼만데, 아버지는 어찌 이리 매정하게 대할 수가 있지?아줌마가 소월이를 위로하며 말했다.“아가씨가 왜 눈물을 흘리세요. 저 괜찮잖아요.”“회초리에 맞았잖아요! 장해진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때릴 수가 있죠?”“쉿. 조용히 하세요.” 아줌마의 따스했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아가씨, 그러나 그분은 아가씨의 아버지인걸요.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안 돼요.”소월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알겠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방에 돌아온 소월이의 눈에 띈 것은, 대문 앞에 주차해 있는 차 한 대였다. 조수석에는 와인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있었다. 어렴풋하게 옆모습만 보였지만, 소월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담임이자 새어머니, 강만옥이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한껏 매혹적인 자세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장해진은 전연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는 서둘러 떠나버렸다. 장해진이 강만옥에게 단단히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 집도 돌아오지 않는 지경이라니.소월이는 떠나는 차를 응시하다 강만옥이 고개를 이리로 돌리자, 커튼 뒤로 숨어버렸다. ‘봤을까? 못 봤으면 좋겠는데...’전연우는 원래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강만옥과 그가 손을 잡은 걸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전연우는 보기와 다르게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녀가 의심 갈 행동을 하나라도 한다면 꼬리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소월이는 물을 꺼내 따르고는 발걸음을 다그쳐 위층 안방으로 돌아왔다.백윤서가 다급하게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돌아보고는 말했다.“제가 한 그릇이라도 떠다 줄까요? 소월이가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요.” “내가 갈게.” 전연우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백윤서는 불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연우가 소월이와 단둘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말리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저 보내기로 했다.이 무렵, 소월이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침 자려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문 뒤편에 있던 전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이는 소월이가 유일하게 그에게 불만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올 때 노크하지 않는다.“윤이가 수제비 만들었는데 같이 먹을래? 맛있어.”“저는...”소월이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연우는 이미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있었다. 말투는 온화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에게서 냉기가 느껴졌기에 소월이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 심장이 점차 쿵쾅쿵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숟가락으로 그릇 속의 수제비를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먹을래, 아니면 내가 먹여줘?”“제... 제가 스스로 먹을게요.” 막 수제비를 담은 그릇은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릇을 받아 든 손가락이 몹시 뜨거워 났지만, 소월이는 티도 내지 못했다.그녀를 바라보는 전연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속에 형용할 수 없는 냉담함이 느껴졌다.“소월아, 혹시 요새 무슨 일 있니? 오빠한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자꾸 피하는 것 같네?”온화함을 가장한 태연한 말투 속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들어 소월이를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묶어놓는 듯했다.“혹시 있으면 오빠에게 말해줄래? 네가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심장이 멈춘 듯싶었다가, 또 견딜 수 없게 쿵쾅댔다. 숟가락을 든 소월이의 손이 떨려왔다.“아뇨... 없어요.”소월이가 목구멍으로 튀어나
“곧 수능인데, 네가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영향받으면 안 되지.”소월이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진심을 전하듯 낮게 중얼거렸다.“사실 저도 강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학교에서 저를 잘 돌봐주었거든요. 선생님께서 정말 아버지를 따르길 선택한다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리고, 저 이미 어느 학교에 갈지 결정했으니 강 선생님께서 더 이상 걱정 안 하셔도 돼요.”전연우가 물었다.“그래? 오빠에게 알려줄래?”장소월이 대답했다.“낙성의 사범대를 졸업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졸업 후에는 먼저 시골 학교에 신청할 거예요.”전연우의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시선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소월을 고집스레 위아래로 훑었다.“낙성... 너무 멀어. 비행기를 타도 열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소월아, 나는 네가 이렇게 먼 도시에 가는 걸 원치 않아.”“여기서 잘살고 있는데 왜 하필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는 거야.”원치 않는다고?전연우, 너는 원치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네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손바닥 위에 놓고 감시하고 싶은 거겠지.장소월은 미리 생각했던 변명을 거침없이 늘어놓았다.“아줌마가 알려주셨어요. 어머니가 도시의 유능한 지식인이셨고 교육 지원활동을 통해 아버지를 만났대요. 그래서 저도 교사를 하고 싶어졌어요. 또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도 뜻깊고 재밌는 일일 것 같아요.”“기왕 교사가 될 거, 제일 좋은 사범대학에 다녀야 하지 않겠어요? 서울사범대에 관해 알아봤는데 낙성이 환경이나 자원이 더 좋아요.”“오빠. 오빠는 제 편을 들어줄 거죠? 아버지도 설득해 주세요...”장소월은 괜히 아양을 부리며 전연우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오빠... 제발요...”전연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짜증이 순간 얼굴에 비쳤다가 이내 사라졌다.전연우의 표정을 살피던 장소월은 그제야 그가 가까운 신체접촉을 꺼린다는 것이 생각나 급히 잡았던 손을 놓고 몸을 움츠렸다.“정말 잘 생각해야 해. 일단 서울을 벗어나면, 네 주
장소월은 눈으로 전연우를 배웅했다.문이 닫히자, 소월이는 쿵쾅쿵쾅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쓸어내렸다.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지?그녀도 은연중에 계속 암시했었다. 수능이 끝나면 서울을 떠나 멀고도 먼 낙성으로 갈 것이라고.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시골의 교육지원에 참가할 것이다. 그의 피의 복수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게.전연우는 완전히 그녀를 죽은 사람처럼, 원래 장가에 존재하지 않았듯이 지워버릴 수 있었다.일단 이 집을 떠나기만 하면, 소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릴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이불 위의 얼룩을 보면서 소월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연우는 정말이지 작은 것도 꼭 되갚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소월이가 오늘 아침 금방 바꾼 이불 시트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만 봐도.전연우도 그녀더러, 밤에 덮을 이불이 없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몸소 느끼게 하고 싶었나 보다.장롱 속의 이불은 모두 오랜 기간 씻지 않은 데다가, 소월이가 또 먼지 알레르기까지 있었으므로 한번 잘못 덮었다가는 한밤중에 병원에 실려 갈 게 뻔했다.이 남자는 정말이지 뒤끝이 길었다.쪼잔한 사람! 속 좁은 고집쟁이!소월이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휙 바닥에 내던졌다. 내일 다시 가져가 씻을 요량으로 두꺼운 외투를 찾아 덮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이튿날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투명한 햇살이 유리 장막을 드리운 듯 밝게 방안에 비쳐 들어왔다.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장소월은 평소와 달리 지끈거리던 머리도, 밤새 괴롭히던 코막힘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회색 무늬 이불에 덮여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바로 이불을 옆으로 걷어차 버렸다.이 색은, 전연우에게만 있는 것이었다.설마, 전연우가 어젯밤에 몰래 방에 들어온 건가?장소월의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괜찮았던 머리가 다시금 쿵쿵 울렸다.요즘 전연우가 그녀의 방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누가 봐도 이건 별로 좋을 일이 아니었다.‘분명 문을
“작년 수능 등급 비율을 봤는데 충분히 저의 성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 있어요.”장소월의 말에 장해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여기 서울에 남든지, 그게 아니라면 다니지 마. 대학에 붙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어차피 결국 해야 하는 건 결혼이야. 얼마 뒤에 있을 연회에 같이 가. 만나봐야 할 사람들이 있어.”장소월은 아버지가 이리 말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장해진은 여자라는 신분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란 그저 후대를 번식하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집에만 있으면서 남편을 섬기고 아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존재였다.“아버지. 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제가 아는 친구들도 이미 외국으로 유학하러 갔어요. 문정이 기억하세요?”장해진이 호기심이 생긴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서창수 딸?”“네. 문정이가 IELTS 준비하겠대요. 유학 후에, 외국에 정착하다 국적도 바꿀 거래요. 아버지, 낙성에 가는 건 외국 유학보다 나은 선택이에요. 적어도 방학하면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나중에 누군가 학력을 물을 때 고등학교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만큼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는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장해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다.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나, 배운 것 없어 가방끈이 짧았던 그였기에. 지금의 회사마저 모두 전연우에게 맡기고 있는 터였다.장소월의 이 말이 드디어 장해진의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그는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꼭 낙성에 가야겠어?”소월이가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저를 걱정하시는 건 잘 알아요. 그렇지만 제가 낙성에 가면 할머니도 돌볼 수 있어요! 약속할게요. 절대 아버지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할머니는 그녀의 최후 패였다. 장해진은 비록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효자 중 효자였다. 몇 년간 할머니를 서울에 모시려 설득하였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꼭 낙성의 가난하고 편벽한
집에 방이 많지는 않았다. 장해진이 혼자 조용히 자는 것을 좋아해서, 2층의 서재와 안방은 모두 금지구역이었다.3층에는 장소월과 전연우가, 4층에는 백윤서가 살았었다.지금 소월이더러 3층 방을 내놓으라 하니 소월이는 어쩔 수 없이 5층으로 가야 했다. 이 집안에서 제일 높은 층이기도 했다.그러나 5층의 유일한 좋은 점은 매우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방에는 큰 베란다가 있어 꽃을 기르고, 차를 마시거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낮부터 밤까지 방에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만큼 좋은 곳이었다.소월이는 진통제 몇 알을 삼키고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물을 조금 마시고는 곧이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때 아주머니가 흐린 얼굴을 하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아무리 강만옥이 들어와 산다고 했어도, 방을 아가씨가 옮겨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장소월은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었다.“사실 이 방에 누가 살든 다 똑같아요. 저는 이곳보다 5층의 방이 더 좋아요. 거기엔 엄마가 그렸던 그림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요.”“엄마 사진도요. 혹시 알아요? 엄마가 꿈에 나와줄지. 이미 너무 오래 꿈에서 엄마를 만나지 못했어요.”그곳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아줌마는 미안함과 측은함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소월이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리 커서 어른스러워졌어요?”‘왜냐하면 저는 이미 성인이 됐거든요. 아주머니, 저는 사실 많은 걸 알고 있어요...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나중에 꼭 데리러 올게요.’소월이는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 자주 사용하던 작은 물건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인테리어회사 사람들이 찾아왔다. 소월이가 쓰던 낡은 가구들을 모두 바꾸고 페인트칠했다. 아기자기했던 벽은 창백한 백색으로 바뀌었다.뒤이어 개인 브랜드 의류회사가 대량의 옷과 드레스를 위층으로 올려보냈다.장해진은 종래로 여자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소월이가 알기로, 장해진과 3년을 교제했던 대
장소월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으며 말했다.“하나도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아요.”장소월이 자리를 피해준 건 전연우와 강만옥이 더 편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만약 필요한 거 있으면 오빠랑 말하면 돼.”“네, 알겠어요.”전연우가 나간 후 장소월은 이후부터 물 마시러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일을 피하려고 아래층에 놓인 주전자를 위층 방으로 가져갔다. 이 또한 전연우와 강만옥 두 사람과 마주치는 걸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다.Comment by 만든 이: 일정한 정도 - 직역파할 수 있다 - 오타 추정...시간은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강만옥이 장가네 집에 머무른 지 벌써 며칠이 지나갔다. 전연우는 완쾌 후 백윤서를 데리고 떠난 뒤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장해진과 강만옥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어 장소월은 그들과 만나게 되는 일이 적었다.대부분 시간은 장소월 혼자였다.장소월은 칠팔일 동안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강만옥이 가르치는 수업 시간이 적어졌다. 강만옥은 음악을 가르쳤는데 전업과가 아니다 보니까 학교에서 수업하면서 만날 일이 드물었다.Comment by 만든 이: 전업? 전공?장소월이 원래 학급으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틀 전에 치른 과목별 모의시험 성적도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다.이번 모의시험 문제들은 전부 선생님들께서 직접 내신 것들이었다.장소월은 이미 세 개 학과에서 이상적인 점수를 따냈다. 문과 평균점수는 백 점, 이과는 90점 정도였다. 서울사범대학교에 입학하기에 아주 충분한 점수였다.장소월에겐 너무 과한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임시 담임선생님이 학급 등수를 발표할 때 장소월이 학급 5등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모든 학생은 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로 장소월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한 학생은 장소월의 학급 등수의 투명성을 의심했다.“선생님, 거짓말이죠? 꼴찌 5등이 아니라 진짜 우리 학급 5등이란 말씀이세요?”임시 담임선생
장소월은 마지막 수업 시간에 조퇴하고 서울강남병원으로 향했다.장소월은 꽃 한 송이를 쥐고 병원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내렸다. 하지만 장소월이 손에 쥔 꽃은 다름이 아닌 하얀 국화꽃이었다. 사실 장소월도 강용이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골라 들고 왔다.주요하게는 장소월이 꽃집에 들어갔을 땐 하얀 국화꽃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하얀 국화꽃밖에 살 수 없었다.Comment by 만든 이: 한국어에서 가장 많이 쓰는 표현 : 꽃집큰맘을 먹은 장소월은 만 원 돈을 내고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사고는 특별히 사장님에게 이쁘게 포장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Comment by 만든 이: 큰 맘을 먹고 돈을 내고~고 두 번 중복으로 가독성 하락 우려하여 도치함Comment by 만든 이: ‘한테’보다는 ‘에게’를 쓸 것을 권장.‘한테’는 구어체 느낌이 강함병원에 들어간 후 간호사한테서 강용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을 알아낸 장소월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다.Comment by 만든 이: ~하고 같은 이유로 도치“자기야, 뭘 보는 거야?”선글라스를 쓰고 섹시한 옷차림을 한 강만옥은 전연우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Comment by 만든 이: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중국어의 比较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어색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이런 상황에서는 ‘비교적’ 생략. 한국어에서는 정도의 부사를 중국어만큼 사용하지 않음.전연우는 아무 말 없이 덤덤하게 시선을 돌리고는 의심했다.‘아까 그 사람 소월인 것 같은데.’Comment by 만든 이: 웹소설 특성상 상관은 없으나‘거’는 ‘것'의 구어체 형식이라는 것 확인 부탁장소월은 엘리베이터에 오른 후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긴장되어 떨리는 가슴을 움켜잡고는 생각했다.‘전연우가 날 보지 못했겠지?’‘두 사람 정말 간도 크다니까. 만일의 경우라도 사람이 북적이는 병원에서 저러다가 장해진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말썽을 일으키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죽 한 그릇을 먹여주는데 무려 20분이나 걸렸다.소민아는 그에게 수면 촉진 성분이 들어있는 약을 가져다주었다. 신이랑이 침대에 누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있어 줘요. 안 가면 안 돼요?”소민아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뭐든 이랑 씨가 몸을 다 회복한 다음 얘기해요.”옆에 앉아 신이랑이 잠드는 것을 지켜보던 중 핸드폰에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천천히 손을 빼냈다. 하지만 신이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불안한 얼굴로 다시 눈을 떴다. 소민아는 환자를 보살피는 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인지는 정말 몰랐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에 엎드려 잠시 잠을 청했다.창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그때, 그녀의 귀에 미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뜬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기성은 씨, 당신이에요?”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소민아는 자신을 잡고 있던 신이랑의 손을 풀고는 바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갔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순간 복도의 센서 등이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바깥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제가 문자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답장 안 했어요?”“이거 놔요.”“설명해주기 전엔 놓지 않을 거예요.”작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기성은은 소민아의 손을 잡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켜려다 말했다.“따라와요.”이후 그녀는 옆쪽 간병인 방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의 손가락을 만져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잠시만 기다려요. 제가 뜨거운 물 가져올게요.”소민아는 따뜻한 물을 가져온 뒤 그가 손으로 감싸게 하고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조금만 기다려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눈앞에 분명 기성은이 살아 숨 쉬고 있었지만, 자신과 그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느낌을
하지만 기성은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해버렸다.문이 닫힌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숨이 끊어진 것 같은 사람이 병실에서 던져져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소민아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음식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형님, 바깥에 사람이 있습니다.”“이런 우연이 있나. 오늘 아침 만났던 여자잖아.”소민아는 그들이 다가오자 빠르게 반응하며 말했다.“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어요.”적잖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고 지나갔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작두, 이 여자 누군지 알아?”작두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걸어 나오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형님, 이년 어떻게 처리할까요?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네요.”기성은은 검은색 가죽 신발을 신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낯선 그의 모습에 소민아는 돌연 덜컥 겁이 났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굳어버렸다. 기성은은 소민아 앞에 걸어와 손가락으로 땅에 떨어진 음식 주머니를 줍고는 그녀에게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입 간수 잘해요. 얼마를 들었든, 얼마를 보았든 한 글자라도 발설하면 그 후과 스스로 책임져야 할 거예요.”소민아는 머리를 푹 숙이고 다급히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기성은이 말했다.“너희 둘은 이곳에서 잘 지키고 있어.”“네, 형님.”“왜 계속 서 있어요? 안 가요?”소민아에게 하는 말이었다.소민아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뛰어갔다. 얼마 후 병실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서철용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에 낀 채 말했다.“손이 너무 거치네요. 목숨이 간당간당해요. 죽이더라도 내 병원에서 죽이면 안 되죠.”소민아는 병실에 돌아와서도 얼이 빠진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신이랑은 언제 깨어났는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움직이지 말아요. 바늘이 빠지면 안 돼요.”새벽 12시, 복도의
간호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남자친구분 잘 지켜보셨어야죠. 링거액이 다 떨어졌잖아요. 지금 병원이 너무 바빠서 저희 간호사들도 병실 하나하나 다 신경 쓸 수는 없어요.”소민아가 미안함에 말했다.“서류를 가지러 회사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저 이분 여자친구 아니고 비서예요.”간호사가 말했다.“환자분이 의식을 잃은 상태로 계속 가족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 환자분을 혼자 오래 두면 안 돼요.”소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소민아가 병실에 들어가 보니 신이랑은 눈을 뜨고 누워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다가갔다.“이랑 씨, 깼어요?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신이랑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소민아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속에 넣어주었다.“푹 쉬어요. 제가 옆에 있으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부르고요.”“가, 가지 말아요.”그는 꽉 잡은 손을 좀처럼 놓지 않았다.“이랑 씨, 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내일 보내줘야 해요.”신이랑이 머물고 있는 곳은 VIP 병실이라 주방에 모든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저녁 10시, 신이랑의 체온은 많이 안정되었다. 본래 몸이 좋지 않긴 했지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하다니.소민아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배고픔이 느껴지고 나서야 자신이 아직 죽을 받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지금 시간엔 병원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VIP 병동은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하고 고요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보니 프런트에 놓은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음식을 들고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던 중, 왼쪽 코너 쪽 병실에서 익숙한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기성은이 왜 여기에?소민아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병원에 왔으면서 왜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소민아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상적이지 않은 체온을 느낀 그녀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신이랑 씨!”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소민아는 잠시 그를 부축해 소파에 눕힐 수밖에 없었다.“열이 왜 이렇게 나는 거예요?”소민아가 핸드폰을 켜고 구급차를 부르려 한 순간, 그 뜨거운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힘껏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소민아는 통화를 마친 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구급차가 곧 올 거예요. 조금만 참아요.”소민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금방 들어왔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녀는 모두 똑똑히 들었었다.자신을 좋아해 달라던 그 말까지도...소민아는 신이랑이 자신과 같은 사람을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랑처럼 좋은 사람은 응당 예쁘고 부드럽고 현숙한 주가은 같은 부잣집 아가씨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기성은에게 들은 바로는 신이랑의 신분도 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의 가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신이랑은 구급차에 앉아 함께 병원으로 들어갔다.신이랑은 열이 39도, 아니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신이랑은 해열제 주사를 맞은 뒤 이어 링거를 꽂고 침대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소민아는 그렇게 하루종일 병원에서 그를 보살폈다. 저녁 여섯 시가 되니 배가 고파와 병원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때, 여자보다 더 여자같이 생긴 하얀색 옷차림의 남자가 마스크를 하고 그녀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소민아는 의아함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어디에선가 본 것처럼 익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하지만 지금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내려갔던 김에 서류를 가지러 다시 회사에 돌아갔다. 신이랑이
소민아는 기성은의 팔짱을 끼고 친밀하게 손을 잡고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오늘 어디에 가는 거예요? 언제 돌아와요? 퇴근할 때 저 픽업할 수 있어요?”기성은이 대답했다.“상황 봐서요. 매일 오늘처럼 한가한 건 아니거든요.”소민아가 불만이 가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기성은 씨 이젠 회사에도 안 나가잖아요. 대체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예요? 어제 저랑 사귀어보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절 첫 순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솔직히 말해봐요. 뭘 하러 가는 건지!”그가 하는 일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여 당연히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대표님이 의식불명으로 누워계시니 그 또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송시아는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눈앞의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그에게 있어 소민아는 부담이고 약점일 뿐이다. 어떤 말은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녀의 열정이 자연적으로 꺼져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민아 씨 앞가림이나 잘해요.”기성은이 결국 뱉어낸 말은 그 한 마디였다.지금은 출근 시간이라 차가 꽤 막혔다. 소민아는 선명히 뾰로통해진 얼굴로 손에 요구르트를 들고 앉아있었다.이번 생에 기성은이 그녀를 달래주는 날이 오긴 할까.그들은 출근 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성세 그룹 맞은편에 도착했다. 회사에 뛰어 들어간다면 3분이면 충분히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아직도 뭘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기성은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소민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그의 입가에 키스했다.“일 끝나면 전화해요. 성은 씨가 절 데리러 오든, 제가 성은 씨한테 가든 같이 있어요, 우리.”기성은은 그 키스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굳어버렸다.소민아는 안전벨트를 풀고 바람을 맞받아 몸을 움츠리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시간 맞춰 도착해 지각은 하지 않았다.소민아가 뒤돌아보니 기성은은 아직 그 자리에
침대에서 뒹구는 법이라곤 없는 기성은은 그녀가 계속 잠을 청하려 하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민아가 단번에 그를 끌어당겨 침대에 눕혔다.“아직 여섯 시밖에 안 됐단 말이에요. 출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어요. 조금 더 자요.”“소민아 씨!”기성은은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게 만드는 사람은 종래로 만나본 적이 없다. 소민아가 강제로 기성은의 팔을 끌어당겨 팔베개를 시켰다.기성은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남녀가 유별하다는 말 몰라요? 소민아 씨, 선 지켜요.”소민아는 눈을 감고 태연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이봐요, 아저씨. 지금이 조선 시대인 줄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일 수가 있어요? 여자친구 사겨본 적 있기는 해요?”기성은은 도저히 팔을 빼낼 수가 없었다.“내가 못해본 것 같아요?”소민아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맞추었다.“그 주가은 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정장은 왜 벗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그랬어요?”소민아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그의 이마에 가져갔다.“얼른 솔직히 말해봐요. 주가은 씨랑 대체 무슨 관계인 거예요? 어젯밤... 기성은 씨 만나러 집에 왔었어요. 제가 우리 두 사람이 사귀기로 했다니까 얼굴이 확 어두워져서 돌아갔고요.”소민아는 자세히 그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더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 것이 별다른 느낌이 없는 듯했다.그가 말하려 하지 않자 소민아가 말을 이어갔다.“연애할 줄 모르겠으면 제가 가르쳐줄게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실해야 한다는 거예요. 빨리 얘기해요.”기성은이 은하수를 담은 듯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피하며 말했다.“주가은은 서울시 시장 딸이에요. 얼마 전 주지웅이 주가은을 대표님에게 소개해주려고 저녁 식사 자리를 만들었는데 대표님이 못 가게 되셔서 내가 대신 갔었어요.”“그날 엘리베이터에서 주가은의 뇌전증이 발작했고, 내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도와줬었죠.”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내려다보니 소민아는 어느새 또다시 잠들어 있었다.기성은이 천천히 팔을 빼내고 침대에
“제 아빠는 데릴사위였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과학자여서 매일 연구원에서만 지냈어요. 그래서 전 태어나자마자 고모 댁에 보내졌죠. 엄마아빠의 유전자를 이어받아서인지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서울대에 입학했어요...”소민아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 옆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이랑이 걸어온 전화였다.“이랑 씨도 오겠다고 했던 걸 깜빡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전화 받고 올게요.”기성은이 깊은 눈동자로 아직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는...암흑 그 자체이다.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살았던 곳은 음산하고 차디찬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선... 명령에 따라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칼을 들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그야말로 나라의 관리가 손닿지 않는 혼란의 세상이었다.누군가 그랬다. 어머니는 기생이고, 아버지는... 마약범이라고. 하여 그는 태어난 뒤 바로 버려졌고, 그래서 이름도 없는 거라고...그의 머릿속 첫 기억은 음습하기 그지없는 시궁창이었다.그때의 참담한 경험이 지금 그의 모습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무 감정 없는 기계 같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그의 인생을 바꿔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바로 전연우다!당시 기성은은 변경에서 마약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연우를 만났고, 그가 다치고 베이고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성은을 변경 시궁창에서 빼냈다.전연우가 말했다.“나한테 목숨 빚졌으니까 앞으로 나 따라다녀.”“네.”“지금 이름은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앞으로는 기성은이라고 바꿔.”“네.”...소민아는 신이랑과 함께 설영우를 만나 일정을 조율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다.일을 끝내고 나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소민아가 신이랑을 아파트 아래까지 배웅한 뒤 걸음을 멈추었다.“왜요?”신이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소민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현실에 부합되지도 않는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아요. 소민아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은 신이랑이에요. 가서 일이나 열심히 해요, 내 체면 떨어뜨리지 말고.”결과야 어찌 됐든 소민아는 기성은이 키워온 사람이다.소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정말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없어요?”“저에 대한 이랑 씨 마음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기성은 씨를 좋아한단 말이에요!”문밖에 서 있던 설영우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들어왔다.“어머나, 형한테도 드디어 봄이 왔네요. 여자한테 고백을 다 받다니요!”소민아는 얼마나 어렵게 용기를 내어 그 말을 내뱉었는지 모른다. 한 달 내내 찾아다녔던 소설 작가가 지금 이 순간 기성은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나타날 줄이야.“꺼져.”설영우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소민아 씨, 전 이만 갈게요. 형과 얘기 끝나면 문자 주세요. 바로 올라올게요.”소민아는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실은 그녀 또한 알지 못했다. 대체 왜 하필이면 성격도 나쁜 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말이다.얼굴이 조금 반반한 것 외엔 별다른 장점도 없다.“제가 방금 했던 말 들었어요?”기성은이 말했다.“소민아 씨 같은 귀찮은 사람이랑 사귀어서 나한테 좋은 게 뭔데요? 아까 내가 했던 말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네요.”기성은이 와인 냉장고로 걸어가 와인을 한 병 꺼냈다. 그를 따라 소민아의 시선도 옮겨졌다.소민아가 그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진심을 고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저도 제가 충동적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에게도 눈이 있고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나더러 신이랑에게 붙어있으라는 거 날 보호하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게 느껴진다고요. 기성은 씨도 날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절 밀어내려고만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기성은이 말했다.“정말 황당한 생각이네요. 이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을 더 남겨서 뭘 하겠어요?”기성은이 고개를
기성은이 다급히 셔츠를 몸에 걸쳤다.“누가 마음대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나가요!”소민아는 순간 하려던 말까지 잊어버렸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문밖으로 나와 손으로 가슴을 짓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에 기성은의 몸에 덕지덕지 새겨진 흉터들이 떠올랐다.기성은은 대표님의 비서가 아니었던가?비서에게 어떻게 저렇게 많은 상처가 생길 수가 있지?또한 모두 칼에 찔린 자상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누가 칼을 휘두르고 다닌단 말인가.대체...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기성은은 욕실에서 거울로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빡할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어떤 일은 뇌 속에 박혀버린 것처럼 한번 또 한 번 반복적으로 재생되어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떠올리게 만들었다.기성은이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아직 집에 남아있는 소민아를 향해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에요?”소민아가 주방에서 젓가락 두 쌍을 가져오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식자재는 기성은 씨가 사긴 했지만 음식을 만든 건 저예요. 기성은 씨를 기다리느라 저도 한 입도 못 먹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손님한테 밥은 먹이고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기성은 씨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거예요. 마침 같은 아파트에 제가 맡은 소설 작가님이 살고 계시거든요. 그분이 집에 돌아오시면 드라마 제작 세부 사항에 관해 상의해야 해요.”“가서 침대 옆에 있는 핸드폰 가져와요.”소민아는 말없이 그의 말대로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시선이 기성은의 헐렁한 옷소매 안으로 드러난 상처에 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그의 손목에 이토록 깊은 흉터가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단 말인가.“...지금 이쪽으로 와.”그 한마디 말을 끝으로 기성은은 전화를 끊었다.“설영우 곧 올 거예요.”소민아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