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예전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해! 또다시 소월 씨 주변 사람들을 해치면, 소월 씨한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분명히 말했으니까, 일이 잘못돼도 나 찾지 마!” “뚜뚜...” 서철용은 화가 치밀어 올라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 주변 사람들을 해친다고?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친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전연우는 그저 그의 아내만을 원할 뿐이다. “리샬!”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세 사람을 잘 감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그 말을 들은 리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연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지시한 일은 120%의 정신력으로 처리해야 했다. “보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임무 반드시 완벽하게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도련님께서 계속 사모님을 찾으며 울고 계십니다. 도저히 달랠 수가 없습니다.” 전연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데려와.” 리샬이 엉엉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앞에 데려왔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만약 별이가 우리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네 마음이 약해질까?’ 전연우는 감히 자신 앞에서 울지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는 별이를 보니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소월이는 분명 마음 아파할 거야.” 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얌전히 기대앉아 있다가 그가 장소월을 언급하자 입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별이는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잠이 들었고, 전연우는 직접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장소월과 소현아, 강용 세 사람은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다. 별장 주인이 친절하게 그들을 대접했지만, 불안한
30분 뒤, 강용은 집으로 돌아왔다.와구와구 음식을 먹고 있는 소현아 옆, 장소월의 얼굴엔 바깥 상황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어때? 그 사람 아직도 우리를 찾고 있어?”강용은 소현아를 흘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 “걱정돼?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준비해뒀어. 전연우한테 다시 잡혀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난 이제 그 사람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 잡혀간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다만 별이가 따라다니면서 고생할까 봐 걱정돼. 전에 봤을 때도 많이 마른 것 같았거든.”“나쁜 자식. 널 다시 데려오려고 어린아이까지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보다는 그놈과 함께 있는 게 나을 거야.”“절대 그 아이 때문에 마음 약해지지 마. 전연우의 계략에 빠지면 안 돼.”“걱정하지 마. 다시는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을 거야.”강용은 장소월의 결연한 눈동자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이 때문에 물러설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소현아가 옆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가왔다. “소월아, 우리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 전에 살던 큰 집이 그리워. 여긴 하나도 안 좋아. 뭔가 이상해.”“이틀만 더 참아. 이틀 후에 강용이 우리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지금 우리는 나쁜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 잡히면 안 돼, 알았지?”“정말? 나 어릴 때 이 게임 제일 좋아했었어. 민아가 항상 날 못 찾겠다고 울어서 결국 내가 먼저 나와서 잡혀줬었지. 이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지금 숨을 곳을 찾을게. 소월아, 너희도 빨리 나 따라와.”강용과 장소월은 소현아를 따라 침실로 숨어들었다. 소현아는 옷장에 숨고 싶어 했지만 장소월이 막았다.“여긴 들어가지 말자. 옷장이 너무 높아.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조심해야지.”“안 돼, 우리 모두 방 안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 나쁜 사람이 와서 방문을 열면 한꺼번에 다 잡히잖아. 안
소민아는 임신했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신이랑이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소민아가 잠들었을 때, 신이랑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는 방에서 나와 발코니로 향했다.신이랑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전화를 받았다.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은 여전히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었다.신이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기성은이 날카로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소현아 씨는 무사히 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민아 씨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민아 씨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만 없다면요.”기성은이 이렇게나 빨리 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신이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소민아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다만 그의 자격지심과 나약함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민아 씨 일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제 두 사람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요.”기성은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기는 잘 자라고 있나요?”신이랑이 대답했다.“나랑 민아 씨 아이예요.”오랜 침묵 끝에야 기성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그 일은 사람을 보내 조사를 마친 뒤 내일 알려줄게요.”“네.”모두 소민아를 위한 일이다. 그녀가 소현아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여 그는 신이랑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주가은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왜 아직도 안 자요? 방금 누구랑 통화했길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아직 처리할 일이 좀 있어요. 먼저 자요.”주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바로 눕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들뜬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옆방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직도 소민아가 그렇게 좋아요?
“어찌 됐든 강지훈은 언니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잖아요. 절대 그 모자를 내버려 두진 않을 거예요. 강씨 집안에서도 동의하지 않을 거고요.”“강지훈은 정말 보는 눈도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언니를 두고 천효연이라는 여자한테 빠져서는... 구미호 같은 사악한 기운만 폴폴 풍기던데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남자들은 다 그런 여자 좋아하는 거예요?”“그럴 리가요. 날 아직도 몰라요? 난 그런 여자 좋아하지 않아요. 언니가 안전하다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배 속 아기한테 신경 써야죠. 몸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민아 씨를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하지 않게 해요, 알았죠?”“정말 내가 이 아이를 낳길 바라는 거예요? 친아빠가 당신이 아니더라도 괜찮아요?”“난 괜찮아요. 민아 씨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니까요. 민아 씨가 낳은 아이라면, 반드시 내 친자식처럼 사랑해 줄 거예요.”“이랑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또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요.”“우린 이제 부부예요. 앞으로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 하지 말아요.”신이랑의 말에 소민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요.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둘이 잘 키워봐요. 크면 당신한테 효도하라고 일러둘게요.”“전부 민아 씨 뜻대로 해요. 효도하지 않아도 난 기꺼이 키워줄 거예요.”“안 돼요. 반드시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울 거예요. 우리 둘이 키운 아이는 분명 바르게 자랄 거예요.”…강용은 역시나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됐어. 점심 전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사람이 너희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장소월은 매번 강용이 혼자 위험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돼. 가려면 함께 가야 해. 네 안전도 중요해. 너 위험해지는 거 싫어.”“계속 여기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어. 조심할 테니까 안심해.”장소월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강용은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전연우와 강지훈의 사람들이 떠났는지 확인하러 나섰다.문밖에는 검은색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
강지훈이 데리고 온 부대는 모두 정예 인력이었기에 강용을 붙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강용은 결국 경찰차에 둘러싸여 체포당하고 말았다.이후 그는 호텔로 끌려갔다. 야외 수영장 옆에 누워 있던 강지훈은 강용이 사진 속 그 미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오기 전 강용은 실컷 두들겨 맞아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꽤나 통쾌했다.“소현아는 어디에 있어? 감히 내 여자를 감히 숨겨?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당신 여자라고? 예전 혼자 이곳에 쫓아 보냈을 때는 왜 당신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어?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서야 당신 여자라고 하는 거야?”수십 명의 사람이 강용에게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강용은 강지훈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는 걸 아는 듯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총을 쏘면 영원히 소현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잘 생각해 봐.”“날 협박해? 재밌군. 여태껏 감히 나를 협박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그건 네 생각이고, 난 널 협박한 적 없어. 이건 협상이야. 필경 나보단 네 여자가 훨씬 더 중요하잖아, 날 죽이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할 테고. 이 넓은 세상에서 정보 하나 없이 어떻게 찾을 거야?”강지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강용의 이런 위풍당당한 모습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예전 소현아에게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역시나 모든 면에서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와 더 말을 섞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전 강지훈의 성격 같았으면 벌써 눈앞의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북경 감옥에 처넣었을 것이다.“데리고 가.”강용은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홀로 강지훈의 부하들에 대적하기엔 한없이 역부족이었다. 몇 번의 몸싸움 끝에 그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목숨은 살려주겠지만, 평생 바깥세상 구경은 꿈도 꾸지 마. 지금부터 감옥에서 남은 인생 잘 보내도록 해. 그곳에는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사
“아니야, 헛소리하지 마. 강용은 잘 지내고 있어. 단지 숨을 곳을 옮겼을 뿐이야. 우리도 곧 같은 곳으로 옮길 거야.”“그래? 괜히 걱정했네. 그럼 우리 언제 출발해?”“날이 어두워지면. 어두울 때가 더 안전해.”“하지만 어두워지면 무서운데, 어떡해?”“내가 옆에서 네 손 꼭 잡고 있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그럼 좋아. 빨리 짐 챙기러 가야겠다.”소현아는 옆에서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녀는 또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지만, 장소월은 강용 걱정에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시곗바늘이 3시를 넘어서자 장소월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강용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다만 누구를 먼저 의심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전연우가 개입한 것인지, 아니면 강지훈이 우연히 그들의 행적을 알아낸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전연우의 부하가 들어와 그에게 보고했다. “보스, 장소월 씨 쪽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말해.”“사모님은 괜찮습니다. 다만 곁에 있던 남자가 강지훈에게 잡혀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구출해올까요?”“그럴 필요 없어. 소월이의 안전만 확보하면 돼. 나머지는 그냥 지켜봐.”“알겠습니다.”강용을 잡아갔다는 것은 강지훈이 아직 소현아의 행방을 모른다는 뜻이다. ‘강용,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거야.’전연우는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로 아이를 달랬다.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엄마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장에서 나오는 차가 보이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호송해.”강용의 생사는 전연우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장소월 한 명뿐이었다.장소월은 강용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북경 감옥이 어떤 곳인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장소월의 가장 큰 단점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다. 강용이 무사하기를 바랄 테니 분명 그를 찾아올 수밖에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강용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별장 주인은 그들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데려다줄 차량을 준비했다.장소월도 알고 있었다. 강용이 그들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아가씨, 더 지체하면 난기류가 생겨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습니다.” ... “어떻게 됐어? 그놈이 위치 자백했어?”“주인님! 그놈 도저히 입을 열지 않습니다.”“말을 안 한다고? 그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지켜봐야겠군!” 강지훈이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전연우 쪽 상황은 어때?”“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매일 아이를 돌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강지훈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친자식도 아닌데 그렇게 지극정성이라니. 와이프가 도망쳤는데도 마음 편하게 앉아 있는다고? 한 시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예, 주인님!”기사는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소월아, 우리 운이 정말 좋다! 오는 길에 나쁜 사람 한 명도 안 만났어.”전연우의 부하들이 몰래 두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순조로울 수 있었겠는가.이처럼 간단할 리 없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장소월은 소현아의 손을 잡고 불안한 얼굴로 공항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로 내달렸다. 반쯤 달렸을 때, 돌연 등대의 불빛이 그들을 비췄다.이후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파리 한 마리도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박혀 있었다.소현아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월아! 들켰어! 흐어엉... 어떡해......”“울지 마. 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아무도 너 데려가지 못하게 할 거야!”“소월아, 나 저 사람 알아. 그 나쁜 놈 부하야. 분명 날 잡으러 온 걸 거야. 흑흑... 나 돌아가기 싫어. 소월아, 나 꼭 구해줘야 해!”“당신들 뭘 하려는 거예요?”“아가씨, 죄송합니다. 소현아 아가씨만 넘겨주시면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하자, 장소월의 마음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실은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들은 전연우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월은 한 번 기적을 기대하고 싶었다.분명 희망은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이 비행기에 타기만 하면 영영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실패했다. 강용은 강지훈에게 잡혀갔고, 이젠 소현아마저 끌려갈 판이다.결국 그녀 자신 또한 다시 그 감옥에 갇혀야 한다.차 불빛을 등지고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전연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와 그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본 순간.그녀는 깨달았다. 서울에서 도망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었는지를.이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끌려가야 하는 것일까?‘아니... 그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장소월은 평온한 눈빛으로 눈앞으로 다가온 전연우를 바라보았다. 소현아는 울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쁜 놈, 소월아, 그 나쁜 놈도 왔어!”전연우와 강지훈이 동시에 나타났다.강지훈이 명령했다. “가서 데려와.”소현아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아아아, 오지 마.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마.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야.”소현아는 작은 칼을 들고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장소월은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아야,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마.”소현아는 턱을 한껏 쳐들고 거만하게 눈앞의 사람들을 쳐다보며 조용히 장소월에게 말했다. “나 괜찮을 거야.”“소월아, 빨리 가. 현아가 너 지켜줄게.”“이런 용감한 모습은 처음 보네? 한 바퀴 구르고 오더니 배짱이 두둑해졌군!” 강지훈이 소현아의 행동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다가갔다. 그는 단숨에 그녀의 손에서 플라스틱 장난감에 불과한 칼을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어 소현아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전연우 앞으로 걸어갔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배은란은 감히 장 선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그 누구의 헌신도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장 선생은 말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그분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다면, 두 분은 단순한 의사와 보호자 관계여야 합니다. 서민용 환자분의 주치의는 저이니,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와 소통하시면 됩니다. 더 이상 그분을 힘들게 하지 마세요.”장 선생의 그 말 때문에 배은란은 한동안 서철용을 찾아가지 않았다.그저 서민용의 수술이 끝날 때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서철용과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서철용 또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몇 번의 수술 끝에 서민용은 드디어 깨어났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온 지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나 있었다.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려와 서민용을 만나게 해주었다.그동안 그녀는 집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서민용의 건강 상태가 걱정된다며 캐물었다.너무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은 조금 어색해하는 듯했다.너무나 핼쑥해진 서민용의 모습에 소망이는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소망아, 소원아, 아빠라고 불러야지.”배은란은 아이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서민용과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소원이는 한참 동안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간신히 아빠라는 말을 내뱉었다.하지만 소망이는 온몸으로 거부감을 드러냈다.“아니에요. 저 사람은 우리 아빠 아니에요...”배은란은 안절부절못하며 서민용의 반응을 살폈다.서민용은 눈을 감고 있었다. 하여 그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소망아!” 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소망이는 엄마의 말투에 겁을 먹고 계속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진 배은란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설명했다.“소망아, 아빠는 지금 아프셔서 그래. 네가 그러면 아빠가 슬퍼하실 거야.
서민용은 여러 차례 대수술을 거쳐 신체 기관들을 하나하나 교체했다.하지만 적합한 심장을 구하는 일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오늘도 서민용은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배은란은 방금 수술을 집도하고 나온 서철용을 찾아갔다.“철용 씨, 나...”그녀는 서민용의 병실에 들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서철용에게 부탁하고 싶었다.하지만 그의 창백해진 입술과 눈 밑에 뚜렷하게 드리운 피로감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수술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웠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철용이 얼마나 큰 부담감과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지 또한 알고 있었다.“무슨 일인데?”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에 서철용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배은란은 말을 바꾸었다.“아이들 보러 집에 다녀오고 싶어. 아이들한테 밥도 좀 해주고...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만들어서 가져다줄게.”서철용이 그녀의 건강과 서민용의 목숨을 묶어 놓은 덕분에 배은란은 몸에 다시 살이 붙었고 전체적으로 훨씬 건강해 보였다.서철용은 한동안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그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했다.“서민용 병실에 들어가는 건 아직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한테 굳이 잘 보이려 할 필요 없어.”배은란의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래도 서철용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민용 씨가 괜찮다는 거 알았으면 됐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서...”“모르겠으면 안 해도 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서민용이 깨어나서 속상해하지 않지.”서철용은 조롱 섞인 그 말을 내뱉고 난 뒤 배은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배은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한참이 지났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그때 뒤에서 장 선생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서 선생님!”배은란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서철용이 걷다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배은란은 희미하게 의식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일들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고마워. 근데 나 배 안 고파.”그녀는 정말로 조금의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더는 서철용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서철용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미 장 선생에게 장기 기증자를 알아봐 달라고 했어. 서민용 안 죽어. 오히려 지금은 네가 문제야. 이러다가는 그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게 될 수도 있어.”“그놈이 죽으면 넌 죽도록 슬퍼하겠지. 하지만 네가 먼저 죽으면, 그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아?”배은란은 여전히 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눈빛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알아서 먹을게.”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밥그릇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하지만 손가락 끝이 그릇에 닿은 순간, 너무 뜨거워 화들짝 놀랐다.다행히 서철용이 재빨리 그릇을 잡아채 죽이 침대 시트에 쏟아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입 벌려.” 서철용이 명령했다.배은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술을 움직였다.천천히 죽을 한 숟가락씩 삼키자 억눌렸던 허기가 밀려왔다.그제야 배은란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깨달았다.“네가 이렇게 네 몸을 엉망으로 망치면, 서민용이 네가 안쓰러워서라도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서철용이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꼬며 말했다.배은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그런 거 아니야. 그저 며칠 동안 너무 바빠서 깜빡했을 뿐이야...”서철용은 밥그릇을 내려놓았다.“밥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정신으로 대체 무슨 수로 서민용을 돌보겠다는 거야?”배은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에도 잘해왔어. 다만 요즘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래...”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도 모르게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쳐다보았다. 배가 너무 고파 조금 더 먹고 싶었다.서철용은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조금 있다가 다시 먹어
그를 몇 초 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은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용 씨? 당신이 어떻게...” 서민용이 일어서 걷고 있었다! 이런 서민용의 모습을 본 게 언제였던가! 가득 피어오른 흥분감에 배은란은 또다시 눈물이 왈칵 차올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서민용은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점점 더 울보가 되어가네. 울지 마. 네가 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배은란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가 혹시라도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서민용은 오히려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미안해. 늘 당신 힘들게 해서.” 배은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아니야. 당신만 옆에 있다면, 난 늘 행복해.” 서민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 거짓말할 때 티 난다는 거 거 알아?”배은란은 부인하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서민용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배은란도 순순히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서민용은 일부러 걸음을 늦춰 그녀가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너 산책하는 거 좋아했잖아. 예전 회사 다닐 때 몰래 빠져나가서 바람 쐬던 거 기억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니 배은란의 머릿속에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서민용은 그녀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걸으며 예전 추억들을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서민용이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 좀 나아졌어?” 배은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이 느껴져 그의 손을 힘껏 붙잡았다.서민용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했다. “나 어디도 안 가. 배가 좀 고프네. 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내가 뭐 좀 사 올게.”너무나도 진실된 그의 미소에 배은란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놓고 말았다. 길가 벤치
“민용 씨... 민용 씨,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그녀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강한 햇빛이 눈에 쏟아져 들어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쿵 하는 소리에 서철용이 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배은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배은란?”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곧바로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심각한 영양실조입니다. 적어도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아요.”검사를 마친 후, 주치의가 말했다.서철용 또한 흰 가운을 입고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그는 배은란의 모든 검사 과정에 참여했다.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나니 서철용은 더 이상 화를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반송장 같은 사람 때문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린 것이다.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그녀가 서민용보다 먼저 갔을지도 모른다!“서 선생님...”주치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서철용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그는 복도에 나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닫고 나서야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마음을 바꾸셨습니까?” 주치의가 물었다.그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무엇을 묻고 있는지 서철용은 알고 있었다.서철용은 병실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다른 방법 없잖아? 모두 살거나, 모두 죽거나 둘 중 하나잖아. 배은란은 지금 목숨을 담보로 날 압박하고 있어.”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 의사다.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이 사람에게 주치의는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저와 서 선생님은 모두 의사입니다. 서 선생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이 치료는 정말 무의미한 것이라는 걸요.”서철용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장기 이식 알아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서민용이 살고 싶어 한다면, 전신 모든 장기 이식을 진행해야 한다.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그저 신체
복도를 따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서철용은 창가에 멈춰 섰고, 뒤따르던 발걸음 소리 역시 멎었다.어느샌가 주치의는 자리를 비켜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줄곧 내 곁에 있었던 거지? 내가 당신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전화는 왜 계속 받지 않은 건데?”배은란의 감정은 차츰 가라앉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늘에 잠겨 어딘가 음울해 보였다.“그 답이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배은란은 미간을 찌푸렸다.서철용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서민용 말고 너에게 소중한 건 없어?” 그날 그는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받고 빌라로 달려가 창백한 얼굴을 한 소망이를 본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배은란은 온통 서민용에게만 신경을 쏟을 뿐, 두 아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모두 그가 보살피며 키운 아이들이었기에, 아무리 배은란을 사랑한다고 해도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책망 어린 그의 말에 배은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난... 민용 씨 상태가 어떤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정말 다른 데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서철용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서민용이 정말 그렇게나 소중한 존재인지 따져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절망을 떠올린 순간 마음속으로 답을 내렸다. 그는 씁쓸함에 입술을 비틀었다.서철용의 질책에 배은란의 가슴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죄다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하지만 여전히 서민용의 처지는 잊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야. 민용 씨를 다시 한 번만 살려줘. 그 사람이 깨어나면 네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서철용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뭐든지? 예전처럼 나랑 살기라도 할 거야?”배은란의 얼굴에 거부감이 스쳤다. 하지만 잠시 침묵한 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한다면.” 그녀에게는 자신보다 서민용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그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배은란 씨, 저예요. 죄송해요. 혹시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가요?” 장소월의 말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배은란은 발신자 번호를 다시 확인하고서야 장소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마침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혹시 철용 씨 소식 있나요?” 장소월은 왜 그녀가 이토록 애타게 서철용을 찾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 선생님은 최근 해외로 나가신 것 같아요. 저도 연락이 안 돼요.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서철용이 해외로 나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배은란은 마음속에 거대한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에요.” 그 말에 장소월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배은란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장소월이 물었다. “저희 혹시 예전에 아는 사이였나요? 저를 아시는 것 같은데, 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배은란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장소월의 반응은 그녀가 최면에 걸렸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단지 서철용을 서민용으로 착각했을 뿐,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멀리서 두 번 정도 뵌 적이 있어요. 기억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해요.” 장소월은 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어딘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배은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전 대표님과 사이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화해하신 건가요? 소월 씨한테 잘 해주시나요?” 장소월은 웃으며 대답했다.“네. 지금은 저한테 너무 잘 해줘요.”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두 분 행복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혹시 서철용 씨를 찾으시면 꼭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장소월도 웃으며 말했다.“배
중환자실 안.서민용은 생기를 잃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서철용은 무균복으로 완전 무장한 채 옆문으로 들어왔다.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보며, 그는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민용, 너 정말 잔인하구나.”“눈 좀 뜨고 봐봐. 배은란이 너 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너 그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네 사랑하는 방식은 고작 이런 거야?”“내가 널 살리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배은란이 널 낫게 하려고 얼마나 헌신했는지 알기나 해? 대체 무슨 낯으로 이 꼴로 누워있는 거야? 이 세상에 너보다 이기적인 사람은 없을 거야!”침대에 누워있는 남자의 호흡은 여전히 평온했고, 동공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서철용의 시선이 천천히 모니터링 기기들을 지나 침대 머리맡의 심전도 기기에 닿았다.“너 다 듣고 있다는 거 알아.”“넌 지금 그 여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잖아. 하지만... 네가 죽으면 그 여자는 너 따라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왜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내가 왜 그 여자 네 곁으로 보냈다고 생각해? 지난번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널 따라가겠다고 했어!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아마 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 있었을 거야!”서철용은 한 마디 한 마디 이를 악물고 뱉어냈다.시선은 심전도 기기에서 서민용의 얼굴로 다시 돌아갔다.잠시 서민용을 도와 그의 숨통을 끊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차라리 배은란에게 다시 최면을 걸어 평생 서민용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금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민용, 너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렇게 죽어서 배은란에게 평생 기억되고 싶은 거야?”“똑똑히 말해 줄게. 너 죽으면, 나는 즉시 배은란에게 최면을 걸어 영원히 너라는 사람을 지워버릴 거야. 네 바람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서민용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서철용은 포기하지 않고 심전도 기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래프의 선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릴
“선생님, 민용 씨 어떻게 됐나요?” 의사는 눈에 띄지 않게 멀리 서 있는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남자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제야 주치의는 배은란에게 말했다. “살려냈습니다. 다만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환자 본인에게 삶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수술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만 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습니다.”살았다는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물었다. “그럼... 민용 씨는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요? 만약 서철용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요.” 주치의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질문 대한 제 답은 조금 전과 같습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환자분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배은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치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가족분도 아셔야 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요.” “아니에요.” 배은란은 무의식적으로 반박했다. 주치의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설득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볼 겁니다. 일찍 쉬세요.”서민용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배은란이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그녀는 중환자실 복도에 앉아, 창문을 통해 침대에 누워있는 서민용을 바라보았다.분명 그녀가 줄곧 옆에서 보살펴주었음에도, 서민용은 너무나 야위어 마치 종잇장 같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은란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올랐다. 휴대폰을 꺼내 집에서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에 깃들었던 희망이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다. “엄마, 어디에요? 아빠도 없고, 둘이 놀러 간 거예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배은란은 마음이 저릿해졌다. 아이들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