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샬은 조용히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 이곳의 부동산은 대부분 전연우의 소유였다.모두 예전 세계 경제 위기 때 그가 매입한 것들이었다. 전연우는 가보고 싶은 곳이 많다는 장소월의 말을 기억하고 전국 각지에 집을 마련해 놓았다. 그녀가 가겠다고만 하면, 수시로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들의 아이와 함께, 설사 그들뿐이라 해도... 전연우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녀의 계획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연우는 적잖게 술을 마셨고, 점점 더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소월아,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피할 생각이야.”장소월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감금되어 있었고, 전연우와 송시아는 다정한 모습으로 그녀 앞에서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다른 여자들과 끈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장소월은 아픈 심장을 움켜쥐고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났다. 너무나도 괴로운 감정은 한참이 지나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전연우, 지금 네 부와 권력이라면 그 어떤 여자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잖아. 네가 남의 감정을 어떻게 농락하든,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없어. 왜 아직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 거야...’ 장소월은 휴대폰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 번호를 눌렀다. 서철용은 한창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배은란은 얼마 전에 그녀와 눈매가 닮은 딸을 출산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아이를 내려놓고 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나지막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연우가 깨어났다는 거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서철용은 허탈한 얼굴로 문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나 감시당하고 있어요. 미안해요. 그놈이... 기어이 소월 씨 찾아냈네요.” “참 뻔뻔하시네요. 그 사람과 연락이 닿을 수 있다면 전해주세요.” “제가 언젠간 강제로 끌려가는 날이 온다면, 그건 분명 시체일 거라고.” “이제 저한텐 아무것도 없어요. 때문에 협박
“네가 예전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어 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해! 또다시 소월 씨 주변 사람들을 해치면, 소월 씨한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분명히 말했으니까, 일이 잘못돼도 나 찾지 마!” “뚜뚜...” 서철용은 화가 치밀어 올라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 주변 사람들을 해친다고?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이미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친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전연우는 그저 그의 아내만을 원할 뿐이다. “리샬!” “보스! 무슨 일이십니까?” “세 사람을 잘 감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그 말을 들은 리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연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지시한 일은 120%의 정신력으로 처리해야 했다. “보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임무 반드시 완벽하게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도련님께서 계속 사모님을 찾으며 울고 계십니다. 도저히 달랠 수가 없습니다.” 전연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데려와.” 리샬이 엉엉 울고 있는 별이를 전연우 앞에 데려왔다.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만약 별이가 우리의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네 마음이 약해질까?’ 전연우는 감히 자신 앞에서 울지 못하고 훌쩍거리기만 하는 별이를 보니 마음이 조금 녹아내렸다.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소월이는 분명 마음 아파할 거야.” 별이는 전연우의 어깨에 얌전히 기대앉아 있다가 그가 장소월을 언급하자 입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엄마는... 곧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 별이는 그의 따스한 품속에서 잠이 들었고, 전연우는 직접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준 뒤 방을 나섰다. 장소월과 소현아, 강용 세 사람은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냈다. 별장 주인이 친절하게 그들을 대접했지만, 불안한
30분 뒤, 강용은 집으로 돌아왔다.와구와구 음식을 먹고 있는 소현아 옆, 장소월의 얼굴엔 바깥 상황에 대한 걱정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어때? 그 사람 아직도 우리를 찾고 있어?”강용은 소현아를 흘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장소월에게 다가가 말했다. “걱정돼?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다 준비해뒀어. 전연우한테 다시 잡혀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난 이제 그 사람이랑 아무 상관도 없어. 잡혀간다고 해도 무섭지 않아. 다만 별이가 따라다니면서 고생할까 봐 걱정돼. 전에 봤을 때도 많이 마른 것 같았거든.”“나쁜 자식. 널 다시 데려오려고 어린아이까지 끌어들이다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것보다는 그놈과 함께 있는 게 나을 거야.”“절대 그 아이 때문에 마음 약해지지 마. 전연우의 계략에 빠지면 안 돼.”“걱정하지 마. 다시는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을 거야.”강용은 장소월의 결연한 눈동자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아이 때문에 물러설까 봐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소현아가 옆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가왔다. “소월아, 우리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해? 전에 살던 큰 집이 그리워. 여긴 하나도 안 좋아. 뭔가 이상해.”“이틀만 더 참아. 이틀 후에 강용이 우리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 거야. 지금 우리는 나쁜 사람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 잡히면 안 돼, 알았지?”“정말? 나 어릴 때 이 게임 제일 좋아했었어. 민아가 항상 날 못 찾겠다고 울어서 결국 내가 먼저 나와서 잡혀줬었지. 이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지금 숨을 곳을 찾을게. 소월아, 너희도 빨리 나 따라와.”강용과 장소월은 소현아를 따라 침실로 숨어들었다. 소현아는 옷장에 숨고 싶어 했지만 장소월이 막았다.“여긴 들어가지 말자. 옷장이 너무 높아. 배 속에 아이도 있는데 조심해야지.”“안 돼, 우리 모두 방 안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 나쁜 사람이 와서 방문을 열면 한꺼번에 다 잡히잖아. 안
소민아는 임신했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다행히 신이랑이 흔쾌히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소민아가 잠들었을 때, 신이랑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그는 방에서 나와 발코니로 향했다.신이랑은 발신자 이름을 보고선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전화를 받았다.성세 그룹 대표 사무실은 여전히 환하게 조명이 켜져 있었다.신이랑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기성은이 날카로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소현아 씨는 무사히 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민아 씨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민아 씨는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만 없다면요.”기성은이 이렇게나 빨리 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신이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소민아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다만 그의 자격지심과 나약함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민아 씨 일은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이제 두 사람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요.”기성은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아기는 잘 자라고 있나요?”신이랑이 대답했다.“나랑 민아 씨 아이예요.”오랜 침묵 끝에야 기성은의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그 일은 사람을 보내 조사를 마친 뒤 내일 알려줄게요.”“네.”모두 소민아를 위한 일이다. 그녀가 소현아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여 그는 신이랑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주가은이 방 안에서 걸어 나왔다. “왜 아직도 안 자요? 방금 누구랑 통화했길래 얼굴이 그렇게 안 좋은 거예요?”“아직 처리할 일이 좀 있어요. 먼저 자요.”주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곧바로 눕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중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들뜬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곧 옆방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그녀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아직도 소민아가 그렇게 좋아요?
“어찌 됐든 강지훈은 언니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빠잖아요. 절대 그 모자를 내버려 두진 않을 거예요. 강씨 집안에서도 동의하지 않을 거고요.”“강지훈은 정말 보는 눈도 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착한 언니를 두고 천효연이라는 여자한테 빠져서는... 구미호 같은 사악한 기운만 폴폴 풍기던데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남자들은 다 그런 여자 좋아하는 거예요?”“그럴 리가요. 날 아직도 몰라요? 난 그런 여자 좋아하지 않아요. 언니가 안전하다는 거 알았으니까 이제 배 속 아기한테 신경 써야죠. 몸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민아 씨를 사랑하는 사람이 걱정하지 않게 해요, 알았죠?”“정말 내가 이 아이를 낳길 바라는 거예요? 친아빠가 당신이 아니더라도 괜찮아요?”“난 괜찮아요. 민아 씨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니까요. 민아 씨가 낳은 아이라면, 반드시 내 친자식처럼 사랑해 줄 거예요.”“이랑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또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요.”“우린 이제 부부예요. 앞으로는 그런 낯간지러운 말 하지 말아요.”신이랑의 말에 소민아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요.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 둘이 잘 키워봐요. 크면 당신한테 효도하라고 일러둘게요.”“전부 민아 씨 뜻대로 해요. 효도하지 않아도 난 기꺼이 키워줄 거예요.”“안 돼요. 반드시 은혜를 알고 갚을 줄 아는 아이로 키울 거예요. 우리 둘이 키운 아이는 분명 바르게 자랄 거예요.”…강용은 역시나 가장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됐어. 점심 전까지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 사람이 너희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장소월은 매번 강용이 혼자 위험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돼. 가려면 함께 가야 해. 네 안전도 중요해. 너 위험해지는 거 싫어.”“계속 여기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어. 조심할 테니까 안심해.”장소월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강용은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전연우와 강지훈의 사람들이 떠났는지 확인하러 나섰다.문밖에는 검은색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
강지훈이 데리고 온 부대는 모두 정예 인력이었기에 강용을 붙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강용은 결국 경찰차에 둘러싸여 체포당하고 말았다.이후 그는 호텔로 끌려갔다. 야외 수영장 옆에 누워 있던 강지훈은 강용이 사진 속 그 미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오기 전 강용은 실컷 두들겨 맞아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니 속이 꽤나 통쾌했다.“소현아는 어디에 있어? 감히 내 여자를 감히 숨겨?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당신 여자라고? 예전 혼자 이곳에 쫓아 보냈을 때는 왜 당신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어? 당신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서야 당신 여자라고 하는 거야?”수십 명의 사람이 강용에게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강용은 강지훈이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는 걸 아는 듯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총을 쏘면 영원히 소현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잘 생각해 봐.”“날 협박해? 재밌군. 여태껏 감히 나를 협박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그건 네 생각이고, 난 널 협박한 적 없어. 이건 협상이야. 필경 나보단 네 여자가 훨씬 더 중요하잖아, 날 죽이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할 테고. 이 넓은 세상에서 정보 하나 없이 어떻게 찾을 거야?”강지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강용의 이런 위풍당당한 모습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예전 소현아에게서 그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역시나 모든 면에서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그와 더 말을 섞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전 강지훈의 성격 같았으면 벌써 눈앞의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북경 감옥에 처넣었을 것이다.“데리고 가.”강용은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홀로 강지훈의 부하들에 대적하기엔 한없이 역부족이었다. 몇 번의 몸싸움 끝에 그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목숨은 살려주겠지만, 평생 바깥세상 구경은 꿈도 꾸지 마. 지금부터 감옥에서 남은 인생 잘 보내도록 해. 그곳에는 네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사
“아니야, 헛소리하지 마. 강용은 잘 지내고 있어. 단지 숨을 곳을 옮겼을 뿐이야. 우리도 곧 같은 곳으로 옮길 거야.”“그래? 괜히 걱정했네. 그럼 우리 언제 출발해?”“날이 어두워지면. 어두울 때가 더 안전해.”“하지만 어두워지면 무서운데, 어떡해?”“내가 옆에서 네 손 꼭 잡고 있을 테니까 무서워하지 마.”“그럼 좋아. 빨리 짐 챙기러 가야겠다.”소현아는 옆에서 조용히 짐을 챙겼다. 그녀는 또 다정하게 장소월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었지만, 장소월은 강용 걱정에 아무것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고, 시곗바늘이 3시를 넘어서자 장소월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강용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다만 누구를 먼저 의심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전연우가 개입한 것인지, 아니면 강지훈이 우연히 그들의 행적을 알아낸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전연우의 부하가 들어와 그에게 보고했다. “보스, 장소월 씨 쪽에 약간의 사고가 있었습니다.”“말해.”“사모님은 괜찮습니다. 다만 곁에 있던 남자가 강지훈에게 잡혀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구출해올까요?”“그럴 필요 없어. 소월이의 안전만 확보하면 돼. 나머지는 그냥 지켜봐.”“알겠습니다.”강용을 잡아갔다는 것은 강지훈이 아직 소현아의 행방을 모른다는 뜻이다. ‘강용,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거야.’전연우는 장난기가 담긴 눈동자로 아이를 달랬다.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엄마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거야.”“별장에서 나오는 차가 보이면,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호송해.”강용의 생사는 전연우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장소월 한 명뿐이었다.장소월은 강용이 잡혔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북경 감옥이 어떤 곳인지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장소월의 가장 큰 단점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다. 강용이 무사하기를 바랄 테니 분명 그를 찾아올 수밖에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강용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별장 주인은 그들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데려다줄 차량을 준비했다.장소월도 알고 있었다. 강용이 그들을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아가씨, 더 지체하면 난기류가 생겨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습니다.” ... “어떻게 됐어? 그놈이 위치 자백했어?”“주인님! 그놈 도저히 입을 열지 않습니다.”“말을 안 한다고? 그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 지켜봐야겠군!” 강지훈이 바로 화제를 바꾸었다. “전연우 쪽 상황은 어때?”“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매일 아이를 돌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강지훈은 조롱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친자식도 아닌데 그렇게 지극정성이라니. 와이프가 도망쳤는데도 마음 편하게 앉아 있는다고? 한 시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예, 주인님!”기사는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소월아, 우리 운이 정말 좋다! 오는 길에 나쁜 사람 한 명도 안 만났어.”전연우의 부하들이 몰래 두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순조로울 수 있었겠는가.이처럼 간단할 리 없다는 생각에 장소월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저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장소월은 소현아의 손을 잡고 불안한 얼굴로 공항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로 내달렸다. 반쯤 달렸을 때, 돌연 등대의 불빛이 그들을 비췄다.이후 수십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그들을 겹겹이 둘러쌌다.파리 한 마리도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빼곡히 박혀 있었다.소현아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월아! 들켰어! 흐어엉... 어떡해......”“울지 마. 내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아무도 너 데려가지 못하게 할 거야!”“소월아, 나 저 사람 알아. 그 나쁜 놈 부하야. 분명 날 잡으러 온 걸 거야. 흑흑... 나 돌아가기 싫어. 소월아, 나 꼭 구해줘야 해!”“당신들 뭘 하려는 거예요?”“아가씨, 죄송합니다. 소현아 아가씨만 넘겨주시면
서철용 또한 한때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서민용의 목숨에 집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서민용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 장영우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그동안 배은란은 이미 아이들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주로 서철용이 아이들을 돌보던 예전과는 달랐다. 당시의 배은란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했고 애정 또한 별로 없었다.하지만 그가 떠난 후 아이들은 배은란의 손에 맡겨졌다.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걱정과 초조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은 거짓이 아니었다.서철용이 떠나면 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없기에 배은란은 그들을 위해 남을 수밖에 없다.서철용 또한 감히 그런 위험한 모험을 시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외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장영우가 독단으로 그를 비행기에 실은 뒤에야 통보했던 것이다.지난 2년간 해외에서 그는 그녀와 아이들의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장영우가 꾸준히 배은란과 아이들의 근황을 알려주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이젠 배은란 나한테 맡겨. 내가 잘 보살필게. 하지만 그 여자가 너 그리워하고 있으니까 가끔씩 꿈에 보러 가줘. 또 그 토끼 인형처럼 눈이 새빨개지도록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서철용은 후련한 듯 묘비에 새겨진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네가 나보다도 더 그 여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믿어.”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언제부터 뒤에 서 있었는지 모를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서철용은 난처한 얼굴로 내디뎠던 발을 다시 거두어들였다.“은란아, 언제 왔어?”배은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엔 아직 당황한 기색이 남아있었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고 그를 지나쳐 묘비 앞으로 걸어갔다.“민용 씨는 당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다시는 오지 마.”소망이가 머리핀을 떨어뜨렸다며 다시 가지러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배은란은 아이들을 멀리서 기다리게 하
3년 후.서민용의 무덤 앞.배은란은 그의 묘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미안해, 민용 씨. 나 약속 못 지켰어. 민용 씨는 이미 떠났겠지? 떠나기 전에 나 원망 안 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3년 전,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민용을 따라가려고 했었다.다른 데엔 아무런 미련도 없었지만, 죄 없는 두 아이를 차마 혼자 남겨둘 수가 없었다.배은란은 처음에 아이들을 서철용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서철용의 핏줄인 데다 그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갔다가 서철용이 해외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두 아이를 보낼 곳이 없어졌다.서철용은 서씨 집안 친자식이 아니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키워줄 리 만무했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씨 집안은 이 두 아이를 증오하기도 모자랄 것이다.어린 두 아이가 마음에 걸린 배은란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하루하루 정성껏 돌봐주었다. 틈틈이 병원에 가서 서철용이 돌아왔는지도 확인했다.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지만, 서철용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동안 아이들은 점점 더 철이 들어갔다.“엄마, 아빠 옛날에 이렇게 생겼었어요?”소망이가 묘비에 붙어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배은란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얘들아, 이분은 너희 아빠가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너희는...”그녀는 아이들에게 서민용을 어떻게 부르라고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 호칭이 무엇이든 서민용이 싫어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아저씨, 저 기억나요!”소망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전에 오빠랑 저와 자주 놀아주셨어요!”배은란은 목이 메었다. 아이가 서민용을 서철용과 헷갈려 하고 있는 것이다.소원이는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아저씨는 저렇게 안 생겼는데...”“아니야! 저 얼굴 맞아! 내가 분명히 봤어! 어제도 꿈에 나왔는데 엄마 잘 돌봐주라고 하
“대체 무슨 일이야! 서 선생님, 미쳤어요? 손 앞으로 안 쓸 거예요?!”배은란은 복도에 서서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서철용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소리는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변해갔다.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배은란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눈에서 빛이 조금씩 꺼져갔다. 그녀는 맥없이 터덜터덜 응급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민용 씨...”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싸늘하게 식어버린 서민용의 모습만 가득 차 있었다.저기에 누워있는 사람이 정말 서민용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그 사람은 분명...배은란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녀는 곧바로 손을 들어 서둘러 눈물을 닦아냈다.울면 안 된다. 서민용은 그녀가 우는 걸 싫어하기에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방 안에서 전해져오는 흐느낌 소리에 배은란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서철용은 장영우와 남자 간호사에게 붙들린 채 끌려 나오고 있었다.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서철용의 몸짓이 멈추었다. 그의 눈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서민용의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먹구름이 하늘을 덮친 우중충한 날, 배은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조용히 그를 묻었다.“민용 씨, 기다려. 곧 당신 찾아갈게.”납골당에서 나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배은란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엄마, 우세요?”소원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배은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래.”소원이는 그녀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엄마는 분명 울고 있으면서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소원아, 소망아, 너희들 철용 삼촌 좋아해?”배은란은 마음속의 죄책감을 억누르며 아이들에게 물었다.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엄마 다음으로 삼촌이 제일 좋아요.”
“이미 호흡이 멈췄습니다.”장영우는 비교적 침착하게 서민용의 상태를 확인했다.전신 마비인 몸으로 손가락 하나밖에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자신의 목을 졸라 자살할 수 있었겠는가.어쩌면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일 수도 있다.그 말에 배은란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응급실로 옮겨서 CPR 시행해!”서철용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장영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서 선생님, 고인의 뜻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더 이상 괴롭히지 마세요.”옆에 늘어뜨린 서철용의 손에 시퍼런 핏줄이 솟아올랐다.“CPR 준비하라고 했어! 지금 바로 시작해!”그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서민용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었다!서민용 자신조차도 안 된다!서철용은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아직 깁스를 하고 있는 그의 왼손과 흐느껴 울고 있는 배은란을 번갈아 보며, 장영우는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미쳤어, 하나같이 다 미쳤어.’“장 선생님...” 간호사가 망설이며 그의 의견을 물었다.장영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서 선생님 말씀대로 해.”시도라도 해보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서민용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보호자분, 부디 힘내세요.”장영우는 병실을 나서며 배은란의 등을 다독이며 위로했다.응급실 빨간 등은 꼬박 한 시간 동안 켜져 있었다.배은란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즉시 일어나 달려갔다. 저번처럼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말이다.하지만 장영우는 난처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보호자분, 들어가서 서 선생님 좀 말려 주세요. 선생님을 말릴 수 있는 분은 보호자분밖에 없습니다.”배은란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순간 절망감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너무나도 안타까운 모
장영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철용의 깁스에 물이 닿아 흐물흐물해진 탓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깁스를 해야 했다.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의사다. 장영우는 그 자리에서 직접 빠르게 서철용의 팔을 고정해 주었다.“서민용은 회복 잘하고 있어? 수술은 언제쯤 할 수 있을 것 같아?”장영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고 싶으세요?”서철용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갑자기 죽는 것보단 죽을 날 미리 알아두는 게 낫잖아.”장영우가 대답했다.“안심하세요. 살 시간 많을 것 같아요.”서철용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배은란 씨가 간병인까지 고용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데도 서민용 씨의 수치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사 결과를 보니까 식사는 하지 않고, 영양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몇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그 말에 서철용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장영우는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이미 살겠다는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심장을 주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겁니다. 다 아시면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에게도, 배은란 씨에게도, 또 서민용 씨에게도 그저 고통만 안겨줄 뿐입니다.”정영우는 세 사람의 상황을 가장 객관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 역시 서민용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서철용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고개를 들고 지시했다. “이틀 더 지켜봐. 계속 음식 거부하면 코로 주입해.”서민용의 목숨은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거두어갈 수 없다.서민용 본인조차도 안 되는 일이다.장영우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환자분은 의식을 갖고 계신데, 그렇게 하면...”서철용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빛에 장영우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무실 문 앞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서철용의 몸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하반신에 간단히 수건 한 장만 두른 상태였다. 자세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서철용이 배은란을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배은란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녀는 자리에 굳어 선 채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서철용의 알몸을 수차례 보았었고, 심지어 더 친밀한 행동도 함께 했었다.하지만 그땐 어쩔 수 없었다.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제 서민용이 자신의 손바닥에 한 획 한 획 써 내려갔던 글자가 떠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선 서철용에 대한 경계심이 감돌고 있었다.“장영우 선생인 줄 알았어. 가져올 필요 없어. 나 다 씻었어.”아침은 남자의 성욕이 가장 왕성해지는 시간이다. 배은란의 향기를 맡으니 저도 모르게 몸이 반응했다. 그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서 휴게실로 돌아가 가운을 걸쳐 입고 나서야 다시 사무실에 나왔다.배은란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무슨 일로 왔어?”서철용은 이마를 짚으며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배은란은 약간 발그스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민용 씨 죽 끓일 때 겸사겸사 갈비탕도 좀 끓였어. 당신 상처에 좋을 것 같아서.”서철용은 그제야 책상 위에 놓인 도시락통 두 개를 발견했다.하나는 그의 갈비탕, 다른 하나는 당연히 서민용의 것이었다.“겸사겸사라...”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알았어. 안심해. 오해하지 않을게. 넌 그저 내가 너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걸릴 뿐이겠지.”그 말은 오히려 배은란에게 더욱 선명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당신 상처...”조금 전 듣기론 상처에 물이 닿은 것 같았다. 지금은 서철용이 가운을 입고 있어 확인하기 어려웠다.“안 죽어. 나 의사잖아. 내가 알아서 해.” 서철용은 아래턱을 쳐들고 말했다. “근데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해. 국 좀 따라줘.”배은란은 국을 따른 뒤, 서민용을 오랫동안 간호해왔던 습관대로 저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고 그에게 먹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 곧
“민용 씨, 미안해. 내가... 오늘 좀 일이 있어서 늦었어.”배은란은 침대 머리맡에 놓인 죽 그릇을 들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먹여주었다.“오늘 밸런타인데이래. 이런 날 일찍 와서 당신과 함께 보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몇 시간 뒤면 밸런타인데이 지나가. 나한테 말 좀 해줄래?”배은란은 그가 자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한 손을 그의 손 옆에 가져갔다.서민용은 손가락 끝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괜찮아.]배은란의 손가락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몇 초 동안 서민용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당황한 듯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민용 씨, 뭐라도 좀 먹어. 당신 몸 회복되면 내년에는 우리 같이...”서민용은 평소 같지 않게 식사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죽 한 그릇이 바닥을 보이자 배은란은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민용 씨, 당신도 빨리 낫고 싶은 거지? 나도 알아. 지금은 많이 힘들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정말이야...”배은란의 목소리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서민용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억지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냈다. 이후 마음이 진정되자 미소를 지으며 최근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그에게 이야기해주었다.서민용은 따뜻하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모두 들어주었다.밤이 깊어졌다. 배은란은 병실에서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하지만 서민용은 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했다.배은란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서민용은 이제야 간신히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그녀가 직접 죽을 끓여주면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별장으로 돌아온 배은란은 잠이 든 지 두세 시간 만에 일어나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좁쌀에 으깬 호박을 넣고 약한 불로 천천히 끓였다.냉장고에는 며칠 전에 사놓은 갈비와 옥수수도 조금 남아 있었다. 배은란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갈비탕을 끓였다.자신 때문에 다친 서철용을 나 몰라라 할 수는
병원으로 향하는 길, 배은란의 시선은 줄곧 그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서철용은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니 마음속으로 얄팍한 욕심이 피어올랐다.그녀는 그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서민용의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의 팔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아마 후자일 것이다.그를 미워할 시간도 모자랄 테니 말이다.병원에 도착하여 치료를 마친 후, 배은란은 긴장한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나야 회복될까요? 이 사람 의사인데, 나중에 팔을 쓰는 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관리만 잘하면 두 달 안에 거의 완전히 회복될 수 있고, 의사 생활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의사가 설명했다.그 말에 배은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서철용은 팔에 깁스를 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병원을 나서는 길에서도 여전히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는 배은란을 본 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안심해. 이 팔 못 쓰게 된다고 해도 서민용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배은란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당신은 내 머릿속에 민용 씨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약간 화가 난 듯 물었다.서철용이 되물었다. “그럼 아니야?”서민용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서철용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지금 돌아가면 서민용이랑 저녁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겠네. 밸런타인데이라 더욱 같이 있어 주고 싶었을 텐데 잘됐어.”서철용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차는 보험 회사에 견인되어 갔고, 두 사람은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배은란은 입술을 앙다문 채 그의 깁스한 왼손을 바라보았다.“난 단순히 당신 상처 걱정하면 안 되는 거야?”서철용은 분명 그녀를 구하려다 다친 것이다. 그것도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방금 전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배은란은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서철용은 고개를 돌려 꿰뚫어 보듯 그녀를
배은란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토끼가 왜? 귀엽기만 하잖아.”서민용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자기더러 귀엽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배은란은 너무 당황해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서민용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확실히 귀엽긴 해. 울지 않을 때는 토끼보다 더 귀여워.”배은란은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어 새빨개진 얼굴로 인형 가격을 물었다.서민용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고 말했다.당시 그녀는 서민용의 다정함에 푹 빠져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방금 서철용이 했던 말...그때 그 인형 서철용이 샀었나?그렇다면 왜 서민용이 그녀에게 전해준 걸까?그녀는 서철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결국 의미 없다는 생각에 말을 삼켰다.쇼핑몰에서 반나절을 보낸 후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서철용은 차를 몰고 그녀를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서민용 이제 말은 해?”돌아가는 길, 서철용이 갑자기 물었다.그는 줄곧 배은란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서민용의 상태에도 관심을 끊고 모두 장 선생에게 일임했다.배은란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말도 못 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속을 썩였나 보네. 왜, 그놈이 너 무시했어?”서철용은 제멋대로 추측하며 서민용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그놈 복에 겨웠네. 누군 아무리 원해도 같이 있지 못하는데, 고마운 줄도 모르고.”“조만간 내가 그놈 옆에 누워 있으면, 너희 둘...”분명 내 염장 지르겠지?서철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말을 삼켰다.배은란은 예민한 촉으로 무언가 감지했다.“무슨 말이야?”그가 서민용 옆에 눕는다니?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말에 배은란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서철용의 반응에 짜증이 밀려왔다.서철용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농담한 거야. 몰라서 그래? 내가 매일 서민용을 질투하느라 미칠 지경이라는 거.”그 말은 성공적으로 배은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