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연삭은 내공을 완전히 잃고 저항할 힘을 잃었다.소욱이 손짓하자 시위들이 나와 양연삭을 제압하고, 쇠사슬과 족쇄를 채워 미리 준비된 쇠창살 우리에 가두었다.양연삭은 끌려가면서도 입을 다물지 않고 악담을 퍼부었다.“소환! 네가 어떻게 죽나 두고 보자!”범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소환, 어서 말해봐라. 양연삭을 이렇게 처리할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낸 거냐?”봉구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양연삭이 황제의 내공을 흡수할 때, 진기가 유난히 불안정했소. 그때부터 의심이 들었지. 그리고 나중에 염추가 양연삭의 일부 내공을 흡수하는 것을 보고는 확신했소.”“무엇을 확신했다는 거요?” 범진은 성격이 급해 계속 다그쳤다.봉구안은 이어 말했다.“만간성법으로는 무한정 다른 이의 내공을 흡수할 수 없다는 것이오.”“아무리 깊은 심연이라도 바닥은 있지 않겠소?”“염추가 한 번에 너무 많은 내공을 흡수하지 못한다면, 양연삭 역시 마찬가지였소.”이 약점을 말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어도, 실제로 깨뜨리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많은 이들의 협력이 필요했다.봉구안은 동방세 등에게 몸을 굽혀 감사의 뜻을 표했다.“모두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동방세는 바로 예를 갖춰 답례하며 활짝 웃었다.“무슨 말씀을! 우리야말로 공력이 몇 배 늘었으니, 감사인사를 받을 사람은 소환 자네가 아니겠소.”무림맹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후회가 깊어졌다.그들은 아무런 이익도 챙기지 못했으니 말이다.완부옥은 끌려가는 양연삭을 죽을 듯이 노려보다가, 소욱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봉구안의 팔 한쪽을 끌어안았다.“낭군, 양연삭을 어서 죽여버리세요. 방금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방금 양연삭이 저 자를 왜 안 죽였을까?’소욱은 완부옥을 흉내 내듯 봉구안의 다른 손을 잡고 말했다.“구안아, 내가 좀 어지럽구나.”동방세는 봉구안이 좌우에 둘러싸인 모습을 보고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완부옥이 소환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녀를
남제의 동부 군은 한 번의 승리로 인해 다시금 군심이 뭉쳐졌다. 전쟁은 끝났고, 그날 소욱은 봉구안을 데리고 떠나려 했다.관 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소욱을 배웅했다.황제가 떠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 나라의 황제가 군영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법이었다.다만 그들이 아쉬운 것은 봉구안이었다. 병법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관 장군은 시험 삼아 물었다.“폐하, 맹 소장군께서도 함께 떠나십니까?”소욱은 눈을 살짝 좁혔다.“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관 장군은 끝내 황제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그저 먼지와 함께 멀어지는 가마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봉구안은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매일 몸 안의 습기를 빼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했다.그렇게 소욱은 봉구안을 데리고 황성으로 돌아갔다.동방세의 무리들은 양연삭이라는 심복의 골칫거리를 제거한 뒤에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들은 강호에 몸을 두고 있었기에 계속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유일하게 완부옥은 봉구안을 따라 몰래 황성으로 따라갔다.…북연군이 퇴각한 뒤, 모두가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양연삭 한 사람으로 인해 그들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패전 소식은 북연까지 전해졌다.조정에서 연나라 황제는 크게 분노했다.“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출병하지 말라고! 어찌 이리 많은 병력을 잃었단 말이냐! 양연삭은 어찌 되었느냐! 죽었느냐!”“폐하,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연나라 황제는 분노 끝에 냉소를 터뜨렸다.“노여움을 거두라고? 너희는 아느냐, 남제 또한 화룡을 만들어냈단 말이다! 짐은 이제 편할 날이 없구나! 철저히 조사하라! 화룡 설계도를 유출한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라!”그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복잡한 화룡을 남제인이 만들어냈을 리가 없었다.북연 내부에 반역자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한 가지 일이 해결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시위가 황제에게 서신을 전했
관료들은 황제를 따라 궁으로 들어가 업무를 보고하였다.봉구안은 바로 천옥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궁에 들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가 몸을 돌려 떠나려던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장군!”뒤를 돌아보니, 장공주 소기였다.장공주는 이미 궁 밖 장공주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오늘 황제와 맹 소장군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부터 궁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멀리서 소장군의 무사함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여겼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가마에서 내려왔다.한 걸음 더 나아가 소장군과 말을 나누고 싶었고, 심지어…장공주는 봉구안에게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같은 여자이기에, 봉구안은 밀어내지 않고 잠시 그대로 두었다.그러나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완부옥이 이 광경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었다.완부옥은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꽉 쥐며, 싸늘한 눈빛으로 속으로 저주를 하기 시작하였다.‘또 어디서 나타난 천한 계집이란 말인가!’장공주는 평소 위엄 있는 태도를 보였으나, 봉구안 앞에서는 하염없이 연약한 여인의 자태를 풍겼다.그녀는 봉구안을 품에서 놓아주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다치진 않았느냐? 눈사태가 그렇게도 사나웠다던데, 어떻게 탈출한 것이냐?”봉구안은 담담히 대답했다.“공주마마, 얘기하자면 깁니다.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따로 공주마마를 찾아 뵙겠습니다.”장공주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매우 사려 깊고 다정한 태도를 보였다.“그래, 먼저 바쁜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우리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봉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일?’장공주의 표현 방식은 어딘가 늘 어설펐으나, 무엇이 어설픈 것인지 금방 파악되지 않았다.천옥으로 가는 길.봉구안은 길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정확히 말하면 봉가 가족이었다.봉안진은 자신의 아내와 딸을 데리고 그녀와 마주쳤다.“구안아…”그는 눈앞에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
봉구안은 달아오른 낙인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몇 달 전에, 나는 우연히 염추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염 부인이 말하기를, 염추는 너의 사생아가 맞다 하더군.”양연삭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졌다‘소환은 아직도 나를 속이려 하는구나!’봉구안은 말을 이어 나갔다.“염추는 만간성법을 수련하기 위해 무림 인사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더군. 동방세는 염추를 즉시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자네 부녀가 서로 죽이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네.”“그래서 동방세를 보내 염추를 설득하여 자네와 함께 죽이도록 했지.”“염추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네. 그 애는 이미 자네를 대체하고 교주가 되어 무림을 평정하고 싶어 했거든…”“하지만 그 애는 지나치게 자만했지. 만간성법을 고작 3 단계까지 수련하고 자네와 맞서려 하다니.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심마에 빠져 정신을 잃을 수 있는 법인데 말이야. 원래 나는 그저 자네가 친딸을 직접 죽이는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었을 뿐이네. 염 부인이 나타난 건 내 예상 밖이었지.”“염추가 자네보다 먼저 심마에 빠져 자네 손에 죽고 말았어.”“그리고 자네는… 자네는 이미 우리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우리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네.”“우리가 염추가 자네 딸이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자네는 더욱 믿지 않았으니까 말이야.”“혹시 마음이 흔들릴지언정 그조차 억눌러 버렸지. 똑똑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똑똑함 때문에 실수하는 법이 아니겠나.”양연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봉구안이 무슨 말을 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그러나 곧 봉구안이 반문했다.“염 부인은 무공이 없는 약한 여인인데, 염추가 위험에 빠졌을 때, 어찌 그리 순식간에 나타나 자네의 치명적인 일격을 대신 맞을 수 있었겠나? 그리고 그 후에도 일반인처럼 바로 죽지 않고, 자네와 대화를 나누고 자네를 찌를 힘까지 있었던 점이 의심스럽지 않더냐?”양연삭은 곧 그때를 떠올렸다.그 여자는 확실히 좀 이상했다.혹시 그 여자도 몰래 무공을 수련
봉구안은 낙인을 내려놓고는 서두르지 않고 양연삭에게 다가갔다.감옥은 어둡고 눅눅하며 썩어가는 듯한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가득했다.양연삭은 눈을 잃은 대신 귀가 더 밝아진 상태였다.그는 봉구안의 차분한 숨소리와 평온한 목소리를 들었다.그 목소리는 사람의 희로애락을 쥐락펴락하는 힘이 있었다.“황성에는 도관이 하나 있다.”“그 도관 아래에는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지.”“그리고 이 천옥 역시 비밀 통로가 있네. 그 통로는 서로 이어져 있지.”양연삭의 귀가 미세하게 떨렸다.봉구안은 계속 말했다.“그 통로들은 최종적으로 안성의 유리곡으로 통한다더군.”“네 부하들 덕분에 나는 그 통로를 지나갈 기회를 얻었지.”“처음에는 단순히 도망치거나 약쟁이들을 운반하는 통로라 생각했다.”“하지만 그 통로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더군.”“굳이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궁림을 피하면서 큰 곡선을 만들더군.”여기까지 들은 양연삭의 마음은 잠시 흔들렸다.그는 애써 무심한 척했지만, 봉구안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봉구안은 무심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도굴이 성행하건만, 백 년간 진 나라의 태종 황제의 무덤 위치는 아무도 몰랐다.”“이는 진 나라의 독특한 장례 방식 때문이지.”곁에서 침묵하던 서왕은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히 그랬다.진 나라 태종 황제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서왕은 책을 많이 읽어 진 나라의 장례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진 나라 태종 황제는 선조의 풍습을 따라 밀장을 택했다.밀장이란, 평탄하고 넓은 곳을 골라 관을 깊이 묻고, 말발굽으로 반복해서 밟아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이후, 묘를 지키던 병사들은 땅에 풀이 자라면 왕성으로 돌아가 자결하여 묘의 위치를 영원히 비밀로 남겼다.그렇기에 두세 명의 심복 대신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위치를 아는 자가 없었고, 심지어 그들도 대략적인 위치만 알 뿐이었다.서왕은 맹 소장군의 말을 들으며 깊은 의문에 빠졌다.혹시 진 나라 태종 황제의 무
태황태후는 눈앞에서 눈물 범벅이 된 채 통곡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얼굴에 잠시 연민의 빛을 띠었다.“란아, 정말로 그들이 반역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이냐?”모용란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몰랐습니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마 대인은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를 속였습니다. 고모님, 고모님께서도 마 대인에게 속지 않으셨습니까? 고모님이야말로 그의 교활함을 가장 잘 아십니다. 저는 정말 잘못이 없습니다...”태황태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좋다.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황상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하여 너를 풀어주도록 하겠다.”젠장!모용란은 정말로 자신을 바보로 보는 것인가?지금 당장은 그렇게 말하는 게 맞다. 상대를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용란이 분노하여 밤중에 자신을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누군가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대체 왜 자신과 모용란을 같은 곳에 가둬 놓았단 말인가?모용란은 태황태후의 말에 무릎 꿇고 감사 인사를 드렸으나, 그녀의 눈에는 깊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상황은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양연삭은 모든 것을 자백했지만, 단 하나, 모용란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그와 모용란이 외삼촌과 조카 관계라는 사실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양연삭은 모용란이 아직도 모용가의 보호를 받고 있고, 매우 총명하니 분명 스스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 생각하였다.더군다나 그녀 역시 진 나라의 혈통이니, 앞으로 아이를 낳아 복국의 대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양연삭이 지금 모든 걸 자백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첫째는 정말로 궁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소환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면,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치닫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둘째는, 어차피 자신에겐 더는 살 길이 없으니, 차라리 천룡회의 죄악과 자신의 업적을 세상에 알려 남길 수 있는 것들을 남기자는 계산이었다.남제의 선황제가 한때 자신의 손
공당 위에서, 서왕은 옆에서 재판을 참관하였다. 모용렴은 그 자리에서 모든 죄를 자백했다.“그해, 나는 천룡회의 요녀에게 미혹되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소.”“진 대인의 반역 혐의라는 증거는 내가 조작한 것이오. 폐태자가 형제를 해치고, 당을 결성해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도 내가 꾸민 일이오...”그의 이 말이 나오자, 모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생각지도 못했다. 모용렴 같은 고상한 문인이 이런 대역죄를 저지를 줄이야!더구나, 폐태자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니! 이는 더욱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천옥 안.태황태후는 천옥 안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옥졸이 감옥 문을 열며 말했다.“태황태후마마,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제 감옥에서 나가셔도 됩니다.”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모용란은 크게 기뻐하였다.태황태후가 나가면, 자신도 분명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터였다.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자, 태황태후는 병든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몸을 가뿐히 일으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이곳에선 더는 단 한순간도 머물 수 없었다.그녀가 나가자마자, 감옥 문은 다시 단단히 닫혔다.태황태후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 순간, 뒤에서 순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모님...”태황태후는 멈춰 서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녀가 보니, 손을 잃은 모용란이 감옥 문에 바짝 기대어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모용란은 자신을 잊지 말고 꼭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모용란이 말하지 않았으면 모르겠지만, 이 부름에 태황태후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누가 네 고모란 말이냐!”“네가 무슨 염치로 나에게 너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냐? 애초에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내가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이런 모욕을 겪게 된 건 다 너 때문이 아니더냐?”“모용란! 내가 어찌하여 너 같은 배은망덕한 놈을 길렀단 말이냐!”모용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
황궁.가을이 지나고, 황제는 본격적으로 천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따져 묻기 시작하였다. 태황태후뿐만 아니라, 천옥에 갇혀 있던 몇몇 왕자들 역시 중죄를 피할 수 없었다.많은 대신들이 이들 왕자들을 위해 탄원하였다.“폐하, 몇몇 왕자들께서는 태황태후에게 속으신 것이지, 본래의 의도가 없으셨습니다. 중형은 삼가 주시옵소서.”소욱은 용상에 앉아 냉철한 눈빛으로 대신들을 바라보았다.“그들이 태황태후에게 이용당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무언가를 도모하려 했던 것인지는 따질 필요도 없다.”“그들이 친병을 이끌고 조묘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중대한 죄를 지은 것이다.”“게다가 황성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 본래의 직책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이미 중죄다.”“만약 북북연군이 정말로 성을 뚫었다면, 그들은 수성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야 마땅하다!”소욱에게 인정을 바라는 것은 큰 사치였다. 그는 법에 따라 왕자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하였다.대신들은 감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동부 군대와 맹 소장군이 적을 온 힘을 다해 막아낸 것이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만약 북연군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몇몇 왕자들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그들의 야심은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났다.하지만 나라가 망했다면, 태자 싸움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공무가 끝난 후, 소욱은 백관들에게 하직 인사를 명령하고 물러가게 하였다.그에겐 해결해야 할 사적인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황후 책봉과 대혼례였다.봉부.봉 대인은 집으로 돌아온 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첩 임씨는 그를 잘 모셨다. 그녀는 직접 차를 올리고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속삭였다.“대인,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속이 상하십니까? 저에게 말씀해 보세요. 혹여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임씨에게는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봉 부인이 봉 대인과 이혼을 했으니, 봉 가의 안주인 자리가 비게 되었다.
현비의 눈엔 짙은 허망함이 어려 있었다."폐하, 폐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신첩을 이해하려 하셨더라면 아셨을 겁니다. 신첩은 본래 약리학에 정통했습니다.”“영비마마께 쓴 독은 신첩이 직접 조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의원이 제 몸을 고치지 못하듯, 신첩 또한 제 독을 온전히 해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몸속의 독성을 억누를 수 있을 뿐,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했습니다."더 할 말은 없다는 듯, 현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소욱은 손짓으로 진한길에게 몸을 제압한 손을 풀라고 지시했다.양팔이 풀리자, 현비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폐하, 제발 제 가족만은… 용서해주시옵소서."곁에서 지켜보던 진한길은 표정 없이 서 있었지만 마음 한켠에 얕은 동정이 스쳤다. 현비에게 분명 죄는 있었지만, 모든 시작은 모용란의 악행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소욱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고, 목소리는 단호했다."현비는 황제인 나를 속이고 궁중의 법도를 어겼다. 천형에 가두고 추후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현비는 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 한켠으론 안도했다. 그 죗값이 가족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말이다.궁에서 끌려나가는 길에 현비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하늘이… 이렇게 넓었구나."수년간 좁디좁은 궁궐 안에 갇혀 살며 늘 발밑만 바라봤던 그녀.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도, 마음을 여는 법도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를 가두었고, 걸을수록 길은 좁아졌다.……현비가 다시 천형에 갇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궁 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지만, 정작 무슨 죄로 잡혀간 건지는 알지 못하였다.현비의 궁녀인 동하는 자녕궁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태후께 간청했다.태후는 전각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곁에서 시중들던 계 상궁은 태후가 독경을 마친 뒤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말했다."태후 마마, 동하 저 아이가 벌써 두 시진째 무릎 꿇고
현비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영비마마와 폐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지요. 그 시절, 마마는 후궁 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영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서둘러 저를 궁에 들여보내셨죠.”“궁의 모든 이들은 영비마마가 온화하고 현명하다고 칭송했었습니다. 저 역시 처음 입궁했을 땐 그렇게 믿었고요. 하지만 곧 마마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습니다.”“겉으로는 자매처럼 지내며 장신구도 건네주고, 심지어 폐하를 뵐 때도 저를 데리고 가셨었죠."소욱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가 모용란을 후궁으로 맞이한 것도 정이 아닌 우정 때문이었다. 즉위 초창기 정사에 바빠 후궁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모용란이 어전 출입이 잦았던 것은 기억했지만, 그 자리에 현비가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현비는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다."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영비마마는 다르셨죠. 간택 당시 폐하께서 제 시를 칭찬하신 그 한마디가 마마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폐하께는 그저 흘려 넘긴 말이었겠지만 저에겐 큰 기쁨이었고, 영비마마에겐 시기와 질투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소욱은 더는 후궁들 사이의 질투와 다툼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런 다툼을 혐오했지만, 그것을 바꿀 힘은 없었다."모용란이 어떻게 너에게 독을 먹였느냐. 왜 그때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현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마치 허탈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에 물기가 어렸다."그때 제가 폐하께 말씀드렸다면 과연 믿어주셨을까요? 폐하께서 영비마마를 벌하셨을까요?"소욱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단언하듯 말했다."아니요. 폐하께서는 안 그러셨을 겁니다."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분노 어린 한숨에 가까웠다. 그녀의 시선엔 실망과 원망이 가득했다."폐하, 저는 한 번도 폐하께서 현명한 군주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황후 마마께서 나타난 후에야 폐하께서는 조금씩 달라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소욱은 황궁으로 복귀했다.아침 조회 자리에서 신료들이 약쟁이 사건을 거론했다.“폐하, 각지에서 과도한 억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사온데 약쟁이들이 그 틈을 타 소란을 일으켜 억울한 판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무고한 지방 관원들이 연루되어 피해를 입고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 신중히 살펴주시옵소서.”소욱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약쟁이들이 의도적으로 관료들의 집에 숨어들어 수사 대상이 되도록 만들고 사건을 키워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은 혼란 속에 숨어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와 얽힌 관료들이 모두 무죄라고는 단정할 수 없었다. 결국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신들을 파견해 진상을 직접 조사하는 것이었다.조회가 끝난 후 소욱은 곧장 현흥궁으로 향했다.그가 입은 용포는 황제의 위엄을 더욱 드러냈고 냉랭한 분위기는 더욱 그를 권위 있게 만들었다.오랜만에 성상의 얼굴을 뵙는 궁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외쳤다.“황제 폐하를 뵙습니다!”궁 안.궁녀 동하가 다급히 안으로 뛰어들었다.“마마! 마마! 폐하께서 오셨습니다!”현비는 탕약을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고 평소의 생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뜻밖의 방문에 놀란 그녀는 눈빛에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폐하께서 왜 이곳에...그녀는 급히 약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소욱의 등장과 함께 전각 안이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엄 넘치는 황제가 천천히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다문 채 예를 올렸다.“신첩,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소욱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잘생긴 얼굴 위엔 차가운 무표정이 드리워 있었다.그는 손짓 한 번으로 전각 안의 궁녀들을 물리고 현비만 남겨두었다.현비는 당황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폐하…”“내가 묻는 말엔 진실만을 말해야할 것이다.”소욱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엔 엄중함이 어렸다.현비는 속내
황궁.현흥궁.현비는 병이 도지자 오래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그녀는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가 홍련초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마마...”찰싹!갑작스레 손이 날아와, 동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당황한 동하는 그 자리에 굳어섰다.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째서 현비가 이토록 격앙된 건지 알 수 없었다.현비는 힘겹게 가슴을 짚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가.”동하는 현비의 기분이 몹시 나쁜가 보다 여기고 조용히 물러나려던 찰나, 누군가 궁 안으로 들어섰다.“황제 폐하의 명이다. 염 신의를 모셔와 현비마마의 병을 진찰하게 하라!”그 순간 현비의 얼굴빛이 확 변했다.겉으로는 태연한 듯했지만, 장막 너머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응했다.“폐를 끼쳐 송구하네. 폐하께는 괜찮아졌다 전해주게.”그러나 염 신의는 말을 자르며 곧장 앞으로 나섰다.“마마, 폐하께서 직접 전하셨습니다. 반드시 병을 완쾌하라 하셨습니다.”그는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장막 앞으로 다가가 진맥을 청했다.“손을 내어주시옵소서. 진맥을 해야 합니다.”한동안 장막 안은 고요했다.잠시 후, 하얀 손 하나가 조심스레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동하는 재빨리 비단 손수건을 꺼내 손목 위에 덮었다.여인의 살이 남성에게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궁녀들은 눈치도 없이 염 신의에게 의자 하나 내주지 않았다.그는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대로 맥을 짚었다.현비는 말없이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다.잠시 후 염 신의는 맥에서 손을 거두며 말했다.“마마,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던 동하에게 바늘과 작은 사기그릇을 건넸다.동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속삭였다.“마마, 소녀가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현비는 익숙한 듯 손을 내밀며 다정히 말했다.“괜찮아. 어서 하렴.”동하는 피를 모아 염신의에게 전해주었다.염 신의는 약상자를 열어 조그만 병 하나를 꺼냈다.그 안의 약가루를 그릇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그의 손길은 침착했고 집중력 넘쳤
모용가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모용가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했을 때,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들었느냐.”“갑자기 왜 그 얘길 꺼낸 것이냐? 혹시…”그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봉구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모용가가 약쟁이 사건과 얽혀 있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단정한 목소리로 답했다.“사형이 약쟁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시점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입니다.”“그 말은 곧 선황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약쟁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뜻이지요.”“그 시점을 고려하면, 선황제께서 무언가 눈치채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소첩은 그래서 모용가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그녀의 말에 담긴 확신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소욱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다면 지금 네 말은… 모용가를 억지로 몰아세우겠다는 것이냐.”농담조였지만, 소욱 역시 마음속으로 봉구안의 의심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선황제의 유언은 분명 모용가를 경계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껏 감찰을 맡은 자들이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이었다.그런 점에서 모용가의 행적은 약쟁이들의 수법과 닮아 있었다.그 생각에 이르자 소욱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사람을 더 붙이도록 하마. 이번엔 제대로 조사하게 하자.”그날 밤 소욱은 평소처럼 자유각에 머물렀다.궁 안의 일은 이미 손을 놓아도 될 만큼 정돈되어 있었고, 후궁의 일은 태후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빈들 또한 조용한 편이었으나, 단 하나. 약쟁이 사건만큼은 태후의 골칫거리였다.태후는 후궁들에게 자중할 것을 명하며, 그 본보기로 현비를 들었다.그날 밤 현비의 시녀 동하가 태후를 찾아와 다급히 울부짖었다.“태후마마, 제발 저희 마마를 살려주십시오!”이미 잠자리에 들었던 태후는 몸을 일으키며
봉구안은 자신이 직접 그려둔 지도를 꺼내어 소욱에게 펼쳐 보였다.“황성을 총타로 삼아 사방에 명령을 내리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의 지령 경로입니다.”“그들의 평소 수법을 보면, 지금처럼 조정과 무림이 손잡고 그들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모든 연락선을 끊고 총타부터 지키는 것이겠지요.”“그러기 위해서는 내부 인물들을 정리하는 게 먼저입니다.”소욱이 그녀의 말을 받아 이었다.“그렇다면 우리가 그 틈을 노려 분타부터 하나씩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이로군.”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녀는 지도 위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 표시된 곳들이 현재 저희가 확인한 그들의 은신처입니다.”“대부분 외진 산골이나 황량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요. 죽산진 근처 산속 동굴처럼 말이지요.”“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예전에 황성 도관 아래에서 많은 약쟁이들을 발견했을 때를요.”소욱은 그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때 봉구안은 약쟁이에게 상처를 입었고, 그가 그녀를 등에 업고 간신히 빠져나왔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도관 자체가 약쟁이의 은신처였을지도 몰라요.”“그리고 기억하시겠지요. 천룡회가 황성을 공격했을 때 약쟁이 대군을 풀었는데, 그 시각이 바로 늦은 밤이었어요.”소욱은 그녀가 전하려는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그는 지도 위에 찍힌 지점들을 살펴보았다.“은신처의 위치와 약쟁이들의 활동 시각을 보면, 그 자들은 어둠 속 환경에 익숙한 존재들이겠구나.”봉구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어둡고 외진 곳이야말로 약쟁이들의 은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일 거예요.”“저희가 죽산진에서 약쟁이 소굴을 조사했을 때도, 산속 동굴 안은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요.”“강주에서 발견한 은신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치는 것들이 많아요.”소욱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느냐?”봉구안은 냉정한 눈빛
봉구안은 놀란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황성에도 홍련초가 자란다고요?"소욱은 곧바로 진지하게 대답했다."누가 심었는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서쪽 교외에 사람을 보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소욱은 그녀의 그릇에 반찬을 더 담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으렴. 요즘 부쩍 더욱 말라 보이는구나. 아이를 품은 몸이라면 더 잘 챙겨야 하지."하지만 봉구안의 눈빛은 여전히 다른 데 머물러 있었다."혹시… 열무신의 소식은 아직도 없는거죠?"소욱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더 걱정하지 않도록 화제를 돌렸다.소탁을 황성으로 데려온 뒤 그는 곧장 태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하지만 상처가 눈에 있는 탓에 회복이 쉽지 않았고 지금은 사실상 눈이 먼 사람처럼 지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데 어려움이 컸지만, 하녀를 붙여 주겠다는 제안도 번번이 거절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물었다."폐태자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나요?""마땅한 집을 하나 찾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대비해 그림자 호위도 붙여 두었다."그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단순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소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예전에 널 시중들던 연상을 혹시 기억하느냐?"봉구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되물었다."연상… 기억하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여쭤 보시는 거죠?"소욱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요 며칠 사이 그 아이가 소탁을 여러 번 찾아갔다는구나. 꽤 신경을 쓰는 듯했다."봉구안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게 그렇게 문제될 일인가요?""그 아이는 아직 시집을 안 가지 않았느냐."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봉구안은 곧장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론 연상은 궁을 떠난 뒤 곧장 진가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혼자서 글씨와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 왔고요. 살림은 넉넉지 않지만 나름대로 삶의 방향은 확실합니다. 진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뜻을
녕비는 자기가 무슨 심각한 말을 했는지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현비를 바라보았다.“언니, 우리 자매처럼 지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남한테 덜미 잡히기 전에 차라리 폐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결백한 사람은 당당해도 되는 법이지 않겠어요?”“홍련초는 그 자체로는 죄가 없는 약초예요. 죄가 있는 건 그걸로 독을 만든 자들이죠.”“언니처럼 착한 분이 약쟁이랑 엮일 리가 없잖아요, 그쵸?”그녀의 웃음은 현비의 눈에 유난히 싸늘하고 따갑게 느껴졌다.현비는 얼굴이 희미하게 질려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녕비, 네가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마시는 약은 약쟁이 사건과는 정말 아무 관련도 없어.”녕비는 굳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제가 언니를 믿느냐 마느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죠.”현비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깊은 숨을 고르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야.”“자, 할 말은 다 했으니까 전 이만 자녕궁으로 가볼게요. 태후마마께 기도드릴 시간이네요. 굳이 배웅하지 않으셔도 돼요.”녕비가 자리를 뜬 뒤, 곁에 있던 시녀 동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마마, 녕비 마마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폐하께서 약쟁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 계시다 하니, 홍련초가 얽히는 일은 아무래도 너무 커요.”현비의 눈빛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그녀는 그저 이 궁 안에서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녀는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잘못도 없었다.“…종이랑 붓을 준비하거라. 폐하를 뵙기 전에 아버지께 먼저 편지를 써야겠다.”“예, 마마.”……그날 밤.자유각.소욱은 이날 밤도 자유각에 머물며 봉구안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상소문을 검토하는 데 쓰였고 그녀 곁에 있어도 여유를 누릴 틈은 많지 않았다.그는 문서를 펼쳐든 채 농담처럼 말했다.“황제가 된 건, 아마 전생의 업보였던 모양
그해 봉구안은 스스로 천지설산에 올라 자욱화를 채취하려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염 신의였다.그 후 인연이 닿아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 무렵 염 신의는 약쟁이 독의 해독제를 연구하고 있었다.이에 봉구안은 그를 황성으로 데려왔다.그는 예전에도 한 차례 해독제를 만들어낸 바 있었으나, 중독자들에게 써보았을 때 뚜렷한 효과는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정한 해독제가 완성된 것이다.분명 기쁜 소식이었다.“염 신의 말로는, 홍련초 덕분에 그동안 풀지 못했던 원리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합니다.”“이미 중독자들에게 해독제를 복용시켰고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장순의 어머니까지도요.”장순은 아직 어린 유생이었으나, 과거 제후국들이 남제를 포위했을 당시 봉구안이 특별히 데려갔던 소년이었다.그는 적국을 향한 설전에서 통쾌한 활약을 펼친 바 있었다.그의 어머니는 오래전 약쟁이 독에 중독되어, 살아 있으되 정신이 나간 채 살아온 사람이었다.해독제가 생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경사였다.허나 좋은 일과 화는 언제나 함께 오는 법. 봉구안이 눈짓 하나만 보내도 소욱은 그녀의 속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그녀가 입을 떼기도 전, 소욱은 그녀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오백에게 명을 내렸다.“사람을 붙여 염 신의를 철저히 보호하라. 해독제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오백은 곧장 명을 따랐다.밖에서 듣고 있던 진한길은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폐하께서는 왜 이렇게 오백을 쓰시는 걸까?’오백이 물러난 뒤, 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해독제가 완성되었으니 약쟁이 독이 아무리 퍼져도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해독제는 결정적인 열쇠예요. 폐하, 문득 떠올랐는데… 담대연도 약쟁이 독에 중독된 사람이었죠?”소욱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 자에게도 해독제를 줄 것이다. 이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지?”“네.”봉구안도 지쳐